레옹 드그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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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옹 드그렐은 벨기에의 파시스트 정치인이자, 렉시스트 운동의 지도자이다. 1906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드그렐은 언론 활동을 시작으로, 1930년대에 렉스당을 창당하여 정치 활동을 펼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점령 하의 벨기에에서 친나치 행보를 보이며, 왈로니아 군단을 조직하여 무장 친위대에 복무했다. 전쟁 후 스페인으로 망명하여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등 극우 활동을 지속하다가 199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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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 드그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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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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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06년 6월 15일 |
출생지 | 부용, 벨기에 |
사망일 | 1994년 3월 31일 |
사망지 | 말라가, 스페인 |
국적 | 벨기에 (박탈), 스페인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렉스당 |
렉스당 대표 | 1935년 11월 2일 – 1941년 |
군사 경력 | |
충성 | 나치 독일 |
군대 | 독일 국방군(1941년-1943년) 무장친위대(1943년-1945년) |
복무 기간 | 1941년–1945년 |
최종 계급 | Standartenführer (연대지도자) |
지휘 | 제28SS의용척탄병사단 발로니엔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 |
서훈 |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독일십자장 금장 철십자장 전공십자장 전상장 |
2. 초기 생애 및 언론 활동 (1906~1935)
레옹 드그렐은 학창 시절부터 언론 및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나뮈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성직자주의 정치 활동에 몰두하여 1925년 시험에 실패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철학 및 문학 후보 학위를 받았지만, 학생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는 등 언론 활동에 더 집중했다.
1928년, 드그렐은 친군주제, 성직자주의 팸플릿을 작성하며 가톨릭 사제이자 베니토 무솔리니 추종자인 노르베르트 왈레즈의 주목을 받았다. 왈레즈의 제안으로 ''Le XXe Siècle''의 편집자가 되었고, 1929년에는 크리스테로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멕시코로 여행을 떠났다.[1] 멕시코에서 드그렐은 미국 만화가 실린 멕시코 신문을 벨기에 ''Le XXe Siècle'' 사무실로 보냈는데, 여기서 만화가 조르주 레미(에르제)가 일했다. 1983년 에르제 사후, 드그렐은 자신이 땡땡의 영감이었다고 주장했다.[1]
1930년, 드그렐은 그리스도 왕의 이름을 딴 가톨릭 출판사 ''Christus Rex''의 경영을 맡아 대량 유통 잡지를 출판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 벨기에 총선을 앞두고 가톨릭 정당을 위한 전단과 포스터를 제작하여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1933년, ''Christus Rex''를 완전히 장악한 드그렐은 이를 통해 가톨릭 정당 지도부를 공격했다.
1932년 선거 이후, 드그렐은 ''Christus Rex''를 민족주의적이고 친성직자적인 정치 운동으로 칭하며 가톨릭 정당과 갈등을 빚었고, 1933년 결국 가톨릭 정당은 드그렐과 관계를 단절했다.
2. 1. 초기 생애
레옹 드그렐은 1906년 6월 15일 부용에서 태어났으며, 5일 뒤 레옹 조제프 마리 이냐스 드그렐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마리 보버와 에두아르 드그렐의 다섯 번째 자녀였다. 프랑스 아르덴 출신인 에두아르는 프랑스의 세속주의 도입의 결과로 벨기에로 이민을 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양조업자로 경력을 쌓았고, 제1차 세계 대전 전에 귀화 시민이 되었다. 1904년 처음으로 룩셈부르크 도의회에 선출되었고, 가톨릭당의 일원으로서 존경받는 보수 정치인이었다. 마리는 신문의 창간에 관여했던 아버지의 지역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었다.드그렐 가족은 매우 종교적이었다. 어린 레옹은 매일 미사에 참석했고 낭시의 기독교 교리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다. 그는 부용의 생 피에르 연구소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다. 그 후 나뮈르의 노트르담 드 라 페 칼리지에 입학하여 레옹 블로이, 샤를 페기, 레옹 도데, 특히 샤를 모라스의 사상을 읽고 구독했다. 드그렐은 나뮈르의 노트르담 드 라 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학업에 지장을 줄 정도로 성직자주의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25년 시험에 실패한 후 학업을 중단했다.
2. 2. 언론 활동
드그렐은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학생 신문 ''L'Avant-Garde''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27년부터 Action catholique de la jeunesse belge프랑스어 (ACJB) 내에서 저널리즘에 참여했으며, 1928년에는 친군주제, 성직자주의 팸플릿을 작성하여 신문 ''Le XXe Siècle''의 편집장 아베 노르베르트 왈레즈의 주목을 받았다. 왈레즈의 제안으로 ''Le XXe Siècle''의 편집자가 되었고, 1929년에는 크리스테로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멕시코로 여행을 떠났다.[1]1930년, 드그렐은 ACJB의 요청으로 가톨릭 출판사인 ''Christus Rex''의 경영을 맡았다. 그는 젊은 급진 가톨릭 학생들을 직원으로 채우고 대량 유통 잡지를 출판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 벨기에 총선을 앞두고 가톨릭 정당을 위한 전단과 포스터를 제작하여 많은 보수주의 동맹을 얻었다. 1933년까지 ''Christus Rex''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게 되었고, 이 플랫폼을 사용하여 가톨릭 정당의 지도부를 공격했다.
1932년 선거 이후 드그렐은 ''Christus Rex''를 민족주의적이고 친성직자적인 정치 운동이라고 지칭했고, 1933년 가톨릭 정당은 드그렐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3. 정치 활동과 렉스당 (1935~1940)
레옹 드그렐은 1935년 렉시스트당(렉스)을 창당하고 가톨릭당을 비판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총선에서 렉스당은 11.5%의 득표율로 21석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지만, 이는 항의 투표 성격이 강했다.
선거 이후, 데그렐은 극우 프랑코폰 벨기에 단체들과 동맹을 맺었고,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스트 정당들과 관계를 맺었다. 1936년 9월 26일, 그는 요제프 괴벨스 및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에서 만나 나치당과 관계를 맺었다. 10월에는 플람스 국민 연합과 비밀리에 만나 조합주의 국가 형성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그는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서 영감을 받아 브뤼셀 행진을 발표했지만, 정부의 금지로 무산되었다.
반체제 가톨릭 정치인 구스타브 사프의 요청에 따라 데그렐은 "정치-금융 스캔들"로 칭한 일련의 사건들을 공개적으로 폭로했는데, 이는 "고위 금융"과 전 은행가 폴 판 제란트 현 정부 간의 공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3. 1. 렉스당 창당
1935년 초, 데그렐은 ''크리스투스 렉스''를 렉시스트당(렉스)으로 변모시켰다. 이는 호세 스트렐, 장 드니 등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가톨릭 학생 급진주의자들의 권위주의적이고 포퓰리즘적이며 매우 성직자 중심적인 파벌이었다.[1] 1935년 5월 1일, 이탈리아 파시스트 회합을 본떠 만든 렉스의 첫 정치 회합이 열렸다. 데그렐은 렉스가 가톨릭당을 개혁하기를 원한다고 선언했다.1935년 11월 2일, 코르트레이크 쿠데타('coup de Courtrai')라는 사건에서, 데그렐과 렉시스트 일당은 코르트레이크에서 열린 가톨릭당 지도자 회의를 방해했다. 그는 당 지도자들을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비난하며 사임을 요구했다. 11월 6일, 당 지도부는 데그렐을 가톨릭당에서 제명했고, 11월 20일, 추기경 요제프 에르네스트 판 로에이는 어떤 가톨릭 사제도 렉스와 친목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데그렐은 1936년 2월 23일에 렉스가 1936년 벨기에 총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5월 3일 렉스의 대변인 역할을 할 신문 ''르 페이 레알''을 창간했다.
반공산주의자 및 참전용사들과 같은 여러 우익 세력을 통합한 포퓰리즘적이고 중산층적이며 반민주적인 플랫폼에서 출마한 렉스는 투표의 11.5%와 대의원 의회의 202석 중 21석을 얻었다. 이는 이전의 유권자 중 상당수를 항의 투표의 형태로 렉스에게 잃은 가톨릭당의 통렬한 패배였다. 데그렐은 당 관료제를 설립하고 집회를 개최하여 렉스의 승리를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벨기에의 정치 및 경제 기득권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썩은 자들"(''pourris'')을 계속 공격했다. 반체제 가톨릭 정치인 구스타브 사프의 요청에 따라 데그렐은 "정치-금융 스캔들"(''scandales politico-financières'')로 칭한 일련의 사건들을 공개적으로 폭로했는데, 이는 "고위 금융"과 전 은행가 폴 판 제란트의 현 정부 간의 공모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3. 2. 1936년 총선 돌풍
1935년 초, 데그렐은 ''크리스투스 렉스''를 렉시스트당으로 변모시켰다.[1] 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회합을 본떠 만든 것으로, 렉스의 첫 정치 회합은 1935년 5월 1일에 열렸다. 데그렐은 렉스가 가톨릭당을 개혁하기를 원한다고 선언했다.[1] 1935년 11월 2일, 데그렐과 렉시스트 일당은 코르트레이크에서 열린 가톨릭당 지도자 회의를 방해했다. 그는 당 지도자들을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비난하며 사임을 요구했다. 당 지도부는 11월 6일 데그렐을 가톨릭당에서 제명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11월 20일 추기경 요제프 에르네스트 판 로에이는 어떤 가톨릭 사제도 렉스와 친목하는 것을 금지했다.이에 대응하여 데그렐은 1936년 2월 23일에 렉스가 1936년 벨기에 총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5월 3일 렉스의 대변인 역할을 할 신문 ''르 페이 레알''을 창간했다.
반공산주의자 및 참전용사들과 같은 여러 우익 세력을 통합한 렉스는 1936년 벨기에 총선에서 투표의 11.5%와 대의원 의회의 202석 중 21석을 얻었다. 이는 이전의 유권자 중 상당수를 항의 투표의 형태로 렉스에게 잃은 가톨릭당의 통렬한 패배였다. 데그렐은 당 관료제를 설립하고 집회를 개최하여 렉스의 승리를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벨기에의 정치 및 경제 기득권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썩은 자들"(''pourris'')을 계속 공격했다.
3. 3. 1937년 보궐선거 패배와 렉스당 쇠퇴
1937년 3월, 대의원 의회에 선출된 렉시스트 알프레드 올리비에가 참모들과 함께 사임했다.[1] 데그렐은 그의 후임을 결정하기 위해 브뤼셀에서 조기 선거에 출마하여 레오폴 3세 국왕이 또 다른 총선을 소집하도록 강요할 수 있을 때까지 일련의 보궐선거를 촉발시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936년 캠페인의 수사 및 여파는 벨기에 정치에 렉스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연합 전선을 형성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1937년 4월 11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폴 판 제란트는 집권 중도 좌파 연합의 후보로 데그렐에 맞서 개인적으로 출마하여 투표의 76%를 득표하며 그를 물리쳤다. 데그렐의 기세는 결정적으로 꺾였고, 비록 그가 벨기에 국립 은행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고 비난한 후 1937년 10월 판 제란트의 사임을 촉발했지만, 렉스의 당원 수는 줄어들었고 투표 결과는 계속 하락했다. 1939년 벨기에 총선에서 렉스는 전체 투표의 4.4%만 획득했다. 1930년대가 끝나갈 무렵 렉스는 급속히 파시스트 운동으로 변모했고, 출판물에 점점 더 반유대주의 수사를 포함시켰다.4.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일 점령 (1940~1945)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벨기에는 중립을 선언했고, 렉스당은 이를 격렬히 지지했다.[1] 드그렐은 전쟁의 책임을 영국, 프랑스, "프리메이슨과 유대 금융의 은밀한 세력"에 돌렸으며, 1940년 1월, 비밀리에 새로운 친중립 신문에 대한 독일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 (하위 섹션 '벨기에 중립 선언과 드그렐의 친독 행보' 참조)
독일의 벨기에 침공이 시작된 1940년 5월 10일, 드그렐은 빅토르 마티스, 세르주 도링과 같이 벨기에군에 입대하지 않은 다른 렉스당 지도자들과 함께 벨기에 정부에 의해 구금되었다.
드그렐은 브뤼헤에 수감되었다가 프랑스로 이송되어 덩케르크에서 심문을 받았고, 프랑스 공방전 중 군사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프랑스 남부의 베르네 수용소로 옮겨졌다. 레오폴드 3세는 5월 28일 벨기에군을 이끌고 항복하였고, 독일 점령 하의 벨기에에서 드그렐은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7월 22일, 렉스당 언론인 피에르 데이예는 독일 외교관 오토 아베츠의 도움으로 드그렐을 카르카손에서 발견했다. 데이예와 드그렐은 7월 25일 파리에 도착하여 아베츠와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으며, 드그렐은 아베츠와 함께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희생하여 대(大) 벨기에를 확장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1943년 5월 23일에서 24일, 드그렐은 라스텐부르크 근처에서 히믈러를 만나 왈로니아 군단을 독일 육군에서 무장친위대로 이전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1943년 6월 1일, 군단은 ''무장친위대''에 ''SS-돌격여단 왈로니아''로 통합되었다.
드그렐은 군단을 위한 인력을 모집하고, 유대인이 소유했던 압수된 향수 회사를 매입했으며, 1943년 7월 29일에는 ''라브니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즉각적인 재정적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7월에 드그렐은 SS 제복을 입고 고향에서 미사에 참석했으나 벨기에 주교들의 지시에 따라 성사를 거부당했다. 이에 드그렐과 그의 경호원은 문제의 사제를 체포하여 드그렐의 집에 감금했다. 이는 1943년 8월 19일 나뮈르 주교에 의해 파문되었으나, 드그렐은 군단의 군목과 독일 군목 봉사에 성공적으로 호소하여 파문을 번복시켰다.
10월과 11월에 드그렐은 히틀러에게 편지를 써서 벨기에의 군정 당국을 비난하고 SS가 운영하는 정부를 요청했다. 독일 정규군 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 독일 육군 원수에게 드그렐을 비난하는 편지를 썼다. 드그렐은 11월 2일에 군단에 다시 합류했고, 1944년 1월 28일, 군단은 체르카시 포위전에서 붉은 군대에 갇혔다. 군단은 이어진 전투에서 맹렬한 공격을 받아 2월 중순 포위가 뚫릴 때까지 632명으로 줄었다. 드그렐은 ''SS-돌격대지도자''(소령)으로 진급했지만, 군단의 실질적인 통제는 다른 독일 SS 장교에게 넘어갔다.
드그렐은 베를린으로 날아가, "모든 유럽 협력자들의 포스터 보이"가 되었다. 1944년 2월 20일, 히틀러로부터 철십자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군 복무를 선전 도구로 남기려는 SS의 바람대로 정치적 지위 향상으로 연결할 수 없었다. 1944년 7월 8일, 드그렐의 형제 에두아르가 고향의 약국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드그렐은 히믈러에게 벨기에 민간인 100명의 보복 살해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지만 무시당했고, 7월 21일에는 ''보안경찰'' 소속 렉스트 당원들이 부용 근처에서 세 명의 인질을 살해했다.
1944년 7월 22일 또는 23일, 드그렐은 에스토니아의 나르바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군단으로 돌아갔다. 군단은 전투로 인해 쇠약해졌고, 전투 후 독일로 돌아갔으며, 드그렐은 8월 25일에 참나무 잎이 달린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9월 18일, 군단은 확장되어 제28 무장친위대 사단으로 개편되었고 드그렐의 지휘 하에 놓였다. (하위 섹션 '왈롱 의용 여단', '무장친위대 복무와 진급' 참조)
4. 1. 벨기에 중립 선언과 드그렐의 친독 행보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벨기에는 중립을 선언했고, 렉스당은 이를 격렬히 지지했다.[1] 드그렐은 전쟁의 책임을 영국, 프랑스, "프리메이슨과 유대 금융의 은밀한 세력"에 돌렸으며, 이는 렉스당의 회원 수와 평판을 더욱 쇠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40년 1월, 드그렐은 비밀리에 새로운 친중립 신문에 대한 독일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벨기에 침공이 시작되자, 드그렐은 빅토르 마티스, 세르주 도링과 같이 벨기에군에 입대하지 않은 다른 렉스당 지도자들과 함께 벨기에 정부에 의해 구금되었다.드그렐은 처음에 브뤼헤에 수감되었다가 1940년 5월 15일 프랑스로 이송되어 덩케르크에서 심문을 받았고, 프랑스 공방전 중 군사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프랑스 남부의 베르네 수용소로 옮겨졌다. 레오폴드 3세는 5월 28일 벨기에군을 이끌고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는 한 달 뒤 휴전을 모색했다. 독일 점령 하의 벨기에에서 드그렐은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7월 22일, 렉스당 언론인 피에르 데이예는 1936년에 드그렐이 만났던 독일 외교관 오토 아베츠의 도움으로 드그렐을 카르카손에서 발견했다. 데이예와 드그렐은 7월 25일 파리에 도착하여 아베츠와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으며, 드그렐은 아베츠와 함께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희생하여 대(大) 벨기에를 확장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4. 2. 독일 점령 하의 벨기에
독일의 벨기에 침공이 시작된 1940년 5월 10일, 드그렐은 빅토르 마티스, 세르주 도링과 같이 벨기에군에 입대하지 않은 다른 렉스당 지도자들과 함께 벨기에 정부에 의해 구금되었다.,,드그렐은 처음에 브뤼헤에 수감되었다가 1940년 5월 15일 프랑스로 이송되어 덩케르크에서 심문을 받았다. 프랑스 공방전 중 군사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프랑스 남부의 베르네 수용소로 옮겨졌다. 레오폴드 3세는 5월 28일 벨기에군을 이끌고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는 한 달 뒤 휴전을 모색했다. 독일 점령 하의 벨기에에서 드그렐은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7월 22일, 렉스당 언론인 피에르 데이예는 1936년에 드그렐이 만났던 독일 외교관 오토 아베츠의 도움으로 드그렐을 카르카손에서 발견했다. 데이예와 드그렐은 7월 25일 파리에 도착하여 아베츠와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으며, 드그렐은 아베츠와 함께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희생하여 대(大) 벨기에를 확장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1943년 5월 23일에서 24일, 드그렐은 라스텐부르크(케트진) 근처에서 히믈러를 만나 왈로니아 군단을 독일 육군에서 무장친위대로 이전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1943년 6월 1일, 군단은 ''무장친위대''에 ''SS-돌격여단 왈로니아''로 통합되었다., 드그렐은 1943년 중반의 나머지 기간을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독일이 압수한 자산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유하게 하고, 군단을 위한 인력을 모집하는 데 보냈다. 그는 유대인이 소유했던 압수된 향수 회사를 매입했고,, 1943년 7월 29일에는 ''르 페이 레알''의 센세이셔널한 어조와 논쟁을 배제한 ''라브니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즉각적인 재정적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7월에 드그렐은 SS 제복을 입고 고향에서 미사에 참석했으나 벨기에 주교들의 지시에 따라 성사를 거부당했다. 이에 데그렐과 그의 경호원은 문제의 사제를 체포하여 드그렐의 집에 감금했다. 이는 1943년 8월 19일 나뮈르 주교에 의해 그의 파문을 촉발했다. 드그렐은 군단의 군목과 독일 군목 봉사에 성공적으로 호소하여 그의 파문을 번복시켰다.
10월과 11월에 데그렐은 다시 베르거를 만났고, 그의 지시에 따라 히틀러에게 편지를 써서 벨기에의 군정 당국을 비난하고 SS가 운영하는 정부를 요청했다. 이는 리더에게 칭찬의 편지를 보낸 지 불과 며칠 뒤였다. 리더는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를 알게 되었고, 독일 정규군 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 독일 육군 원수에게 드그렐을 비난하는 편지를 썼다. 드그렐은 11월 2일에 군단에 다시 합류했고, 9일 후에는 약 2,000명의 병력으로 우크라이나에 도착했다. 1944년 1월 28일, 군단은 체르카시 포위전에서 붉은 군대에 갇혔다. 군단은 이어진 전투에서 맹렬한 공격을 받아 2월 중순 포위가 뚫릴 때까지 632명으로 줄었다., 사상자 중에는 군단의 지휘관인 루시앙 리페르가 전사했고, 드그렐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드그렐은 리페르를 대신하여 ''SS-돌격대지도자''(소령)으로 진급했지만, 군단의 실질적인 통제는 다른 독일 SS 장교에게 넘어갔다.
데그렐은 베를린으로 날아갔고, 역사학자 니코 우터스에 따르면 "모든 유럽 협력자들의 포스터 보이"가 되었다. 2월 20일, 데그렐은 히틀러로부터 철십자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틀 후 데그렐은 요양을 위해 브뤼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벨기에 SS의 책임자인 마티스와 리하르트 융클라우스를 만났다. 데그렐은 2월 27일 브뤼셀에서, 3월 5일 파리에서 협력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4월 2일에는 군단의 생존자들이 샤를루아를 행진했다. 그러나 데그렐은 군 복무를 선전의 도구로 남기려는 SS의 바람대로 정치적 지위 향상으로 연결할 수 없었다., 휴가 중 데그렐은 파리와 플랑드르의 협력자들과의 연계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7월 8일, 렉스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정당과 독일 점령에 동조했던 데그렐의 형제 에두아르가 고향의 약국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에 독일 당국은 46명을 체포했고, 렉스트 당원들은 다른 약사를 살해했다. 독일 연설 투어에서 돌아온 데그렐은 7월 10일 부용에 도착하여 보복을 요구했다. 그는 히믈러에게 벨기에 민간인 100명의 보복 살해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지만 무시당했고, 7월 21일에는 ''보안경찰''에 소속된 렉스트 당원들이 부용 근처에서 세 명의 인질을 살해했다.,
1944년 7월 22일 또는 23일, 데그렐은 에스토니아의 나르바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군단으로 돌아갔다., 군단은 전투로 인해 쇠약해졌고, 전투 후 독일로 돌아갔으며, 데그렐은 8월 25일에 참나무 잎이 달린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9월 18일, 군단은 확장되어 제28 무장친위대 사단으로 개편되었고 데그렐의 지휘 하에 놓였다., 사단을 충원하기 위해 데그렐은 이제 모든 렉스트 당원들에게 군단 복무를 의무화했고, 그들 중 다수는 당시 진행 중이던 벨기에 해방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으며,, 지그마링겐으로 도망간 프랑스 협력자들과 해체된 청색 군단의 스페인 의용병을 모집했다., 12월, 군단은 기갑 부대를 배정받았고 1945년 1월에 전선으로 다시 이동했다. 이는 4월 오데르-나이세 전투에서 붉은 군대에 의해 전투에서 파괴되었다.
4. 3. 왈롱 의용 여단
1943년 5월 23일부터 24일까지, 드그렐은 라스텐부르크(케트진) 근처에서 히믈러를 만나 왈로니아 군단을 독일 육군에서 무장친위대로 이전하는 문제를 논의했다.[1] 1943년 6월 1일, 군단은 ''무장친위대''에 ''SS-돌격여단 왈로니아''로 통합되었다. 드그렐은 1943년 중반 남은 기간 동안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독일이 압수한 자산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유하게 하고, 군단 인력을 모집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유대인이 소유했던 압수된 향수 회사를 매입했고, 1943년 7월 29일에는 ''르 페이 레알''의 선정적인 어조와 논쟁을 배제한 ''라브니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즉각적인 재정적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7월, 드그렐은 SS 제복을 입고 고향에서 미사에 참석했으나 벨기에 주교들의 지시에 따라 성사를 거부당했다. 이에 드그렐과 그의 경호원은 문제의 사제를 체포하여 드그렐의 집에 감금했다. 이는 1943년 8월 19일 나뮈르 주교에 의해 파문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드그렐은 군단의 군목과 독일 군목 봉사에 성공적으로 호소하여 파문을 번복시켰다.
10월과 11월에 드그렐은 다시 베르거를 만났고, 그의 지시에 따라 히틀러에게 편지를 써서 벨기에 군정 당국을 비난하고 SS가 운영하는 정부를 요청했다. 이는 리더에게 칭찬 편지를 보낸 지 불과 며칠 뒤였다. 리더는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를 알게 되었고, 독일 정규군 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 독일 육군 원수에게 드그렐을 비난하는 편지를 썼다. 드그렐은 11월 2일에 군단에 다시 합류했고, 9일 후에는 약 2,000명의 병력으로 우크라이나에 도착했다. 1944년 1월 28일, 군단은 체르카시 포위전에서 붉은 군대에 갇혔다. 격렬한 전투 끝에 2월 중순 포위망이 뚫렸을 때 군단은 632명으로 줄어 있었다. 사상자 중에는 군단 지휘관 루시앙 리페르가 전사했고, 드그렐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드그렐은 리페르를 대신하여 ''SS-돌격대지도자''(소령)으로 진급했지만, 군단의 실질적인 통제는 다른 독일 SS 장교에게 넘어갔다.

드그렐은 베를린으로 날아가 역사학자 니코 우터스에 따르면 "모든 유럽 협력자들의 포스터 보이"가 되었다. 1944년 2월 20일, 드그렐은 히틀러로부터 철십자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틀 후 드그렐은 요양을 위해 브뤼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벨기에 SS 책임자인 마티스와 리하르트 융클라우스를 만났다. 드그렐은 2월 27일 브뤼셀, 3월 5일 파리에서 협력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4월 2일에는 군단 생존자들이 샤를루아를 행진했다. 그러나 드그렐은 군 복무를 선전 도구로 남기려는 SS의 바람대로 정치적 지위 향상으로 연결할 수 없었다. 휴가 중 드그렐은 파리와 플랑드르 협력자들과 연계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44년 7월 8일, 렉스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정당과 독일 점령에 동조했던 드그렐의 형제 에두아르가 고향 약국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에 독일 당국은 46명을 체포했고, 렉스트 당원들은 다른 약사를 살해했다. 독일 연설 투어에서 돌아온 드그렐은 7월 10일 부용에 도착하여 보복을 요구했다. 그는 히믈러에게 벨기에 민간인 100명을 보복 살해하라는 편지를 썼지만 무시당했고, 7월 21일 ''보안경찰'' 소속 렉스트 당원들이 부용 근처에서 세 명의 인질을 살해했다.
1944년 7월 22일 또는 23일, 드그렐은 에스토니아 나르바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군단으로 돌아갔다. 군단은 전투로 쇠약해졌고, 전투 후 독일로 돌아갔으며, 드그렐은 8월 25일에 참나무 잎이 달린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9월 18일, 군단은 확장되어 제28 무장친위대 사단으로 개편되었고 드그렐이 지휘하게 되었다. 드그렐은 사단 충원을 위해 모든 렉스트 당원에게 군단 복무를 의무화했고, 이들 중 다수는 당시 진행 중이던 벨기에 해방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으며, 지그마링겐으로 도망간 프랑스 협력자들과 해체된 청색 군단의 스페인 의용병을 모집했다. 1944년 12월, 군단은 기갑 부대를 배정받았고 1945년 1월 전선으로 다시 이동했다. 군단은 1945년 4월 오데르-나이세 전투에서 붉은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4. 4. 무장친위대 복무와 진급
레옹 드그렐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하며 여러 차례 진급했다.계급 | 날짜 |
---|---|
육군 사격병(Schütze) | 1942년 3월 3일 |
육군 소위(Leutnant) | 1942년 5월 |
무장친위대 하급돌격지도자(Untersturmführer) | 1943년 6월 |
무장친위대 최고돌격지도자(Hauptsturmführer) | 1944년 1월 1일 |
무장친위대 돌격대지도자(Sturmbannfuhrer) | 1944년 4월 20일 |
무장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Obersturmbannführer) | 1945년 1월경 |
무장친위대 연대지도자(Standartenführer) | 1945년 4월 20일 |
1943년 6월 1일, 왈로니아 군단은 ''SS-돌격여단 왈로니아''로 무장친위대에 통합되었다.[1] 1944년 2월 20일, 드그렐은 히틀러로부터 철십자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8월 25일에는 참나무 잎이 달린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9월 18일, 군단은 제28 무장친위대 사단으로 개편되었고 드그렐이 지휘를 맡았다.
5. 전후 스페인 망명과 사망 (1945~1994)
1944년 11월, 히틀러는 드그렐에게 '왈론인의 국민 지도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곧 있을 아르덴 대공세에서 독일군이 탈환할 벨기에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약속했다.[1] 그러나 1945년 1월, 공세는 실패로 끝났고 드그렐은 연합군의 승리를 예감했다.[1] 그는 렉스당을 해산하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독일 해군 함선을 타고 노르웨이로 피신했다.[1]
1945년 5월 7일, 드그렐은 프랑코 치하 스페인으로 향하는 Heinkel He 111에 탑승했다.[1] 다음 날 비행기는 산 세바스티안의 라 콘차 해변에 추락했고, 드그렐은 부상을 입고 구금되었다.[1] 벨기에는 드그렐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스페인은 여러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1] 1946년, 드그렐은 병원에서 탈출하여 스페인 남부에 은신했다.[1]
벨기에 정부는 1944년 드그렐에게 ''부재 중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했고, 1945년에는 국적을 박탈했다.[1] 드그렐은 스페인의 도움으로 호세 레온 라미레즈 레이나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국적을 얻고 은신 생활을 이어갔다.[1] 그는 1954년 독일군 참전 스페인 자원병 추모 행사에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타났으며,[1] 이후 벨기에 언론에 편지를 보내 공개 재판을 조건으로 벨기에에서 재판을 받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1]
1960년대에 드그렐은 언론에 자주 등장하며 도발적인 행동을 일삼았다.[1] 오토 스코르체니 등 다른 나치 망명자들과 교류하고, 딸의 결혼식에 SS 제복을 입고 나타나는 등 논란을 일으켰다.[1] 1964년 벨기에는 Lex Degrelliana 법을 통과시켜 드그렐에게 선고된 사형의 공소 시효를 연장했다.[1] 1969년 드그렐은 벨기에 귀국 허용 캠페인을 벌였으나, 스페인 경찰의 체포 영장 발부로 중단되었다.[1]
드그렐은 홀로코스트 부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방문을 앞두고 공개 서한을 보내 아우슈비츠에서의 조직적인 살인을 부인하고,[1]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와 함부르크 폭격, 드레스덴 폭격을 "진정한 대량 학살"이라고 주장했다.[1]
1985년 스페인 잡지 ''Tiempo''와의 인터뷰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회의론을 반복하고 요제프 멩겔레를 옹호하며 가스실의 존재를 부정했다. 이에 아우슈비츠 생존자 비올레타 프리드먼은 드그렐과 잡지사를 고소했고, 오랜 법정 투쟁 끝에 스페인 대법원은 프리드먼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판결은 대량 학살 부정,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에 관한 스페인 법에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까지 건설 회사를 운영하며 부유하게 살던 드그렐은 1994년 3월 31일 말라가의 한 병원에서 심정지로 사망했다. 벨기에는 그의 귀국과 유해 송환을 금지했다.[1]
5. 1. 스페인 망명
1944년 11월, 드그렐은 히틀러로부터 "왈론인의 국민 지도자(Volksführer)"라는 칭호를 받았고, 12월에는 독일군이 곧 있을 아르덴 대공세에서 탈환할 벨기에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약속받았다.[1] 1945년 1월 1일, 드그렐은 55명의 참모와 함께 서부 전선에 도착했으나,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드그렐은 연합군의 승리를 예상하기 시작했고, 3월 30일, 다른 렉시스트 지도자인 마티스와 루이 콜라르를 만나 렉스를 해산했다. 4월 말, 드그렐은 베를린 근처에 남겨진 군단의 잔존 부대를 버리고 북쪽으로 향했다.[1] 5월 2일, 뤼베크 근처에서 히믈러를 만나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으나, 대신 ''오버 퓌러''로 승진했다.[1] 드그렐은 독일 해군 함선을 타고 점령된 노르웨이로 향했다. 5월 7일, 노르웨이 해방의 날에, 전 노르웨이 ''국가판무관'' 요제프 테르보벤은 드그렐과 다른 다섯 명을 프랑코 치하 스페인과 남아메리카로 향하는 Heinkel He 111에 태웠다.[1] 다음 날, 비행기는 산 세바스티안의 라 콘차 해변에 추락했고,[1] 드그렐은 다리 골절을 포함한 부상을 입고 입원하여 구금되었다.[1]
5월 15일, 스페인 정부는 드그렐을 벨기에가 아닌 다른 곳으로 추방하는 것에 대해 영국 정부에 연락했다. 이에 벨기에는 드그렐의 송환과 기소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스페인과의 협상에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과 영국은 드그렐이 국제연합 전쟁 범죄 위원회에 의해 전범으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양가적인 입장이었지만, 벨기에의 항의로 6월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드그렐이 독일군 소속으로 스페인에 입국했으므로 30명의 다른 독일 망명자들과 함께 미국 선박으로 연합군에 구금되어야 한다고 결정하고 이 뜻을 스페인에 전달했다. 스페인 정부는 드그렐을 대가로 벨기에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고, 대신 드그렐을 송환하지 않는 것을 인권 문제로 정당화했다.[1] 1946년 8월 21일 밤에서 22일 사이, 드그렐은 회복 중이던 병원에서 사라졌다.[1] 스페인 정부는 그가 국외로 떠났고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발표했으며, 그가 돌아올 경우 벨기에로 송환하겠다고 약속했다.[1]
벨기에 정부는 1944년에 드그렐에게 ''부재 중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했고, 1945년 12월 29일에는 국적을 박탈했다.[1] 스페인 정부의 도움으로, 드그렐은 스페인 남부 말라가 주에 은신했고, 그를 찾기 위해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으로 위장한 벨기에 요원들에 대한 정보를 계속 받았다. 1954년, 드그렐은 친분을 맺었던 현지 여성인 마틸데 라미레즈 레이나에게 양자로 입양되어, 호세 레온 라미레즈 레이나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국적을 얻었다.[1] 드그렐은 전쟁 이후 1954년 12월 15일에 독일군에 참여한 스페인 자원병들을 기리는 행사에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났다.[1] 이 사건과 드그렐이 벨기에 신문 ''라 리브르 벨지크''에 보낸 편지에서 재판이 공개적으로 진행된다면 벨기에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제안한 것은 스페인과 벨기에 간의 외교적 균열을 초래했다.[1]
1960년대까지 벨기에 정부는 드그렐이 도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스페인에 망명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1] 드그렐은 1960년대에 점점 더 대중적인 인물이 되었고, 프랑스와 벨기에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었다.[1] 그는 오토 스코르체니와 같은 다른 나치 망명자들과 공공연히 교류했으며, 1969년 딸의 결혼식에 SS 제복을 입고 나타났는데, 이 사건은 스페인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다.[1] 1964년 12월 3일, 벨기에는 Lex Degrelliana라고 불리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벨기에 국가에 반하는 범죄로 발부된 사형 선고에 대한 공소 시효를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했다.[1] 1969년, 드그렐은 벨기에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언론 캠페인을 시작했다. 벨기에의 요청에 따라, 스페인 경찰은 다음 해에 드그렐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지만 집행하지 않아 캠페인은 중단되었다.[1] 1980년대까지 드그렐은 스페인에 있는 미국 공군기지 건설을 돕는 건설 회사를 운영하여 수익을 올렸고, 본래 이름으로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1994년 3월 31일, 드그렐은 말라가의 한 병원에서 심정지로 사망했다. 벨기에는 1983년에 드그렐의 귀국을 최종적으로 막았고, 그 후 그의 유해 송환을 금지했다.[1]
5. 2. 극우 활동과 홀로코스트 부정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드그렐은 다른 나치 망명자들과 함께 홀로코스트 부정에 동참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방문을 앞두고, 드그렐은 교황에게 공개 서한을 썼다. 그 서한에서 드그렐은 아우슈비츠에서 조직적인 살인이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했으며,[1] "진정한 대량 학살"은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와 함부르크 폭격, 드레스덴 폭격이라고 주장했다.[1]1985년 7~8월호 스페인 잡지 ''Tiempo''는 드그렐과의 인터뷰를 게재했는데, 그 인터뷰에서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회의론을 반복하며, 요제프 멩겔레는 평범한 의사였고, 아우슈비츠에는 가스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멩겔레의 명령으로 가족이 가스실에서 살해된 아우슈비츠 생존자 비올레타 프리드먼은 드그렐과 ''Tiempo''를 고소하기로 결정했다. 프리드먼은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 막스 마진과 알베르토 베나술리에 의해 법률 자문을 위해 카탈루냐 변호사 호르헤 트리아스에게 소개되었고, 당시 이스라엘의 스페인 대사였던 슐로모 벤 아미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소송은 1985년 11월 7일 마드리드 법원에서 열렸으며, 1982년 5월 5일의 유기법 1/82와 1978년 12월 26일의 법률 62/78을 근거로 진행되었다. 스페인 형법의 어떤 조항으로도 드그렐의 발언을 고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먼과 그녀의 변호사는 드그렐의 발언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로서 그녀 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고, 드그렐의 변호사는 프리드먼이 드그렐이 그녀나 그녀의 가족을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원고 적격이 없다고 주장하며 기각을 요청했다. 하급 법원은 처음에는 드그렐에게 유리했지만, 1991년 스페인 대법원은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법원은 프리드먼이 드그렐을 고소할 자격이 있다고 판결했는데, 그의 발언이 스페인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리아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대량 학살 부정,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에 관한 스페인 법에 영향을 미쳤다.
5. 3. 사망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레옹 드그렐의 사망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출력합니다.(레옹 드그렐의 사망 관련 섹션은 제공된 원본 소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해당 섹션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
6. 유산
레옹 드그렐은 전후 파시즘 부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나치를 옹호하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등 역사 왜곡을 일삼았으며, 그의 사상과 저술은 여러 극우 단체 및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
6. 1. 전후 파시즘에 미친 영향
드그렐은 전후 파시즘 부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1] 1949년부터 드그렐은 나치를 칭찬하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며, 역사적 기록을 왜곡하고 자기를 미화하는 책을 출판하고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드그렐의 저술은 1970년대 벨기에 역사가 Albert de Jonghe|알베르트 더 용어nl에 의해 반박되기 전까지 20세기 벨기에 전쟁에 관한 프랑스어 역사 서술의 상당 부분을 형성했다. 드그렐은 또한 벨기에와 서독의 전후 극우 단체,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2010년대에 이탈리아 언론인 알레산드로 오르시니는 이탈리아의 신파시스트 민병대에 잠입하여 드그렐의 저술이 그들에게 필독서라고 보도했다.말라가에 있는 드그렐의 저택은 네오 나치의 기착지가 되었다. 그는 유럽 친구 스페인 서클(Círculo Español de Amigos de Europa, CEDADE)과 같은 네오 나치와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은 드그렐과 스코르체니를 통해 유럽 전역의 네오 나치 단체와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1960년대에는 Werner Haupt (Militärschriftsteller)|베르너 하우프트(군사 작가)de가 HIAG를 위해 제작한 작품에 드그렐의 초상화가 등장했는데, HIAG는 ''무장친위대'' 퇴역 군인 로비 단체였다. 그는 1990년대까지 독일어 네오 나치 출판물에 계속 등장했다. 드그렐은 또한 프랑코 시대 이후의 국민 동맹(Alianza Popular, AP)과 장마리 르 펜, 즉 프랑스의 극우 국민전선 창립자 및 20세기 후반 독일 네오 나치 운동의 지도자였던 미하엘 퀴넨과도 친분을 맺었다.
6. 2. 역사 왜곡과 논란
드그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파시즘 부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9년부터 나치를 칭찬하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며, 역사적 기록을 왜곡하고 자기를 미화하는 책을 출판하고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드그렐의 저술은 1970년대 벨기에 역사가 Albert de Jonghe|알베르트 더 용어nl에 의해 반박되기 전까지 20세기 벨기에 전쟁에 관한 프랑스어 역사 서술의 상당 부분을 형성했다.드그렐은 벨기에와 서독의 전후 극우 단체,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2010년대 이탈리아 언론인 알레산드로 오르시니는 이탈리아 신파시스트 민병대에 잠입하여 드그렐의 저술이 그들에게 필독서라고 보도했다. 말라가에 있는 드그렐의 저택은 네오 나치의 기착지가 되었다. 그는 유럽 친구 스페인 서클(Círculo Español de Amigos de Europa, CEDADE)과 같은 네오 나치와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은 드그렐과 스코르체니를 통해 유럽 전역의 네오 나치 단체와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1960년대에는 Werner Haupt (Militärschriftsteller)|베르너 하웁트de가 HIAG를 위해 제작한 작품에 드그렐의 초상화가 등장했는데, HIAG는 ''무장친위대'' 퇴역 군인 로비 단체였다. 그는 1990년대까지 독일어 네오 나치 출판물에 계속 등장했다. 드그렐은 프랑코 시대 이후의 국민 동맹(Alianza Popular, AP)과 장마리 르 펜, 즉 프랑스의 극우 국민전선 창립자 및 20세기 후반 독일 네오 나치 운동의 지도자였던 미하엘 퀴넨과도 친분을 맺었다.
7. 진급 내역
계급 | 날짜 |
---|---|
육군 사격병 | 1942년 3월 3일 |
육군 소위 | 1942년 5월 |
무장친위대 하급돌격지도자 | 1943년 6월 |
무장친위대 최고돌격지도자 | 1944년 1월 1일 |
무장친위대 돌격대지도자 | 1944년 4월 20일 |
무장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 | 1945년 1월경 |
무장친위대 연대지도자 | 1945년 4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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