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렐란토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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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렐란토스 전쟁은 기원전 8세기 말에서 7세기 중반까지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렐란토스 평원의 소유권을 두고 발생했으며, 당시 그리스 세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참여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전쟁의 직접적인 기록은 부족하지만, 동시대 시인들의 언급과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전쟁의 양상과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전쟁의 결과로 에우보이아는 쇠퇴하고 칼키스가 승리했지만, 두 도시 모두 과거의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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렐란토스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이름레란토스 전쟁
그리스어 라틴 문자 표기pólemos Chalkidéon kaì Eretriōn
주요 참전 세력할키스, 에레트리아
위치에우보이아 섬, 그리스
시기
시기기원전 710년 ~ 기원전 650년경
결과
결과할키스의 승리 (추정)
영토 변화에레트리아, 안드로스, 테노스, 케아 섬 통제력 상실
교전 세력
교전 1에레트리아 및 동맹국
교전 2할키스 및 동맹국
할키스 동맹스파르타, 사모스, 코린토스, 테살리아
에레트리아 동맹키클라데스 제도, 밀레토스, 키오스 섬, 메가라, 아이기나
기타
레란토스 전쟁에서 할키스(파란색)와 에레트리아(빨간색)의 가상 동맹.
레란토스 전쟁에서 할키스(파란색)와 에레트리아(빨간색)의 가상 동맹.
레란토스 평원 근처의 할키스와 에레트리아의 위치
레란토스 평원 근처의 할키스와 에레트리아의 위치

2. 전쟁의 시기 및 사료

고대 자료에는 렐란토스 전쟁의 시기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정보가 없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700년경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역사와 전설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5] 레프칸디 유적지는 혼란의 결과로 서서히 버려지고 있었다. 건국 설화에 따르면, 에우보이아의 공동 식민지인 이스키아는 기원전 8세기 중반에 칼키스와 에레트리아가 협력했음을 시사한다. 테오그니스는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에레트리아와 칼키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5] 몇몇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렐란토스 전쟁의 시기로 제시했지만, 테오그니스가 두 번째 렐란토스 전쟁을 언급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로빈 레인 폭스는 "우리는 확실히 '백년 렐란토스 전쟁'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6]

2. 1. 문헌 자료

렐란토스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동시대의 저술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스 역사 기록 자체가 헤로도토스에 이르러서야 발전했기 때문에, 전쟁과 관련된 동시대 자료는 초기 시인 헤시오도스아르킬로코스의 언급 정도가 전부이다. 역사적 저술에서의 최초 언급도 사건 발생 2세기 후인 기원전 5세기에 나타나며, 그 내용 또한 모호하고 간략하다.

투키디데스(기원전 460년~기원전 4세기 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저술의 서론에서 렐란토스 전쟁을 언급하며, "헬라스의 나머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입장을 취했던 분쟁"이었다고 기록했다.[3] 즉, 그리스 대부분이 이 전쟁에 어느 한쪽으로 가담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기원전 484년~기원전 425년)는 밀레토스에레트리아를 지원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렐란토스 전쟁을 언급한다. 밀레토스는 칼키스와의 전쟁에서 에레트리아의 도움을 받았고, 사모스 섬은 반대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에레트리아를 지원했다는 것이다.[9]

플루타르코스(45년~125년)는 렐란토스 전쟁과 관련된 전통을 두 번 언급한다. 그의 저서 ''도덕론''[10]에서는 칼키스인들이 테살리아의 파르살로스 출신 클레오마코스의 도움을 받아 에레트리아 기병대를 격파했다는 내용을 전한다. 클레오마코스는 전투 중 사망했고, 칼키스인들은 그의 기념비를 세웠다.[11] 또한, 플루타르코스는 암피다마스의 장례 경기를 통해 전쟁과 관련된 전통을 언급했다.[12]

스트라보(기원전 63년~23년)는 그의 저서 지리학에서 칼키스와 에레트리아가 전투 전에 투사체 사용 금지 등에 합의했다고 기록했다.[14]

아르킬로코스(기원전 7세기)는 전투에서 활과 투석기 대신 칼이 사용될 것이라고 언급했다.[15]

2. 2. 고고학적 증거

투키디데스는 렐란토스 전쟁이 기원전 700년경에 일어났다고 간접적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역사와 전설의 중간 지점에 해당한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에레트리아의 헤로온 지역에서 최초의 전사 매장이 기원전 740-730년경에 이루어졌고,[16] 마지막 매장은 기원전 6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6] 기원전 680년경, 에레트리아의 전사 묘지 위에 삼각 건물이 세워져 전사한 영웅에게 헌정하는 제물을 바쳤다.[17]

한편, 렐란토스 평원에 위치한 레프칸디의 제로폴리스 정착지와 묘지 사용은 렐란토스 전쟁과 에레트리아가 주요 고고학 유적지로 부상한 시기와 거의 동시에 중단되었다. 발굴자들은 레프칸디가 에레트리아의 전신이었으며, 전쟁에서 칼키스가 승리한 결과 버려졌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8]

3. 전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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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키스와 에레트리아는 에우보이아 서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다. 두 도시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렐란토스 강이 가로지르는 렐란토스 평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에레트리아는 평원 밖에 위치해 있지만,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에레트리아가 서쪽에 위치한 모(母) 도시의 항구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 도시는 현대의 레프칸디 근처, 렐라스 강 어귀에 위치해 있었으며, 기원전 825년경 심각한 파괴를 겪은 후[19] 인구 대부분이 에레트리아로 이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에레트리아와 칼키스는 원래 아테네와 정치적 연합을 맺었으며, 모두 이오니아인 부족에 속했다. 델포이의 암피크티오니에 있는 두 개의 이오니아 좌석이 아테네와 에우보이아의 이오니아인, 즉 칼키스와 에레트리아에게 주어졌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두 도시는 곧 키클라데스 제도와 더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눈을 돌려 무역을 했다.

기원전 8세기, 에우보이아는 그리스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지역 중 하나였다.[20] 섬의 두 주요 강국인 칼키스와 에레트리아는 그리스 식민지 건설을 주도하며 지중해로 뻗어 나갔으며, 오랫동안 경쟁자가 아닌 협력자 역할을 했다. 기원전 8세기 중반경, 그들은 동지중해와의 무역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식민지인 알 미나를 공동으로 설립했다.[21] 거의 같은 시기에 그들은 서쪽으로 확장했다. 에레트리아는 케르키라/코르푸와 함께 서지중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기원전 8세기 2분기부터 에우보이아 상인들은 캄파니아 해안 외곽의 피테쿠사이 (이스키아) 섬에 존재하며 에트루리아인과 무역을 수행했다. 몇 십 년 후, 쿠마에가 이탈리아 본토에 세워졌는데, 이곳은 최초의 그리스 식민지였다. 기원전 735년경, 칼키스는 시칠리아에 첫 번째 그리스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투키디데스는 이를 그리스 식민지화의 진정한 시작으로 보았다. 그 직후, 전략적으로 중요한 메시나 해협의 양쪽에 레기온과 장클레가 세워졌다.[22]

3. 1. 전쟁의 원인

전통적으로 렐란토스 전쟁은 렐란토스 평원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발생했다.[12] 렐란토스 평원은 매우 비옥하여 오랫동안 포도 재배를 포함한 농업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는 비옥한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농업적으로 매력적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흔했으며, 특히 메가라아테네 사이에서 그러했다.[23]

분쟁의 기원은 자연 재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기원전 8세기 말, 아티카, 에우보이아 및 기타 인근 섬들은 심각한 가뭄을 겪었다.[24] 그 결과, 안드로스에 있던 에레트리아의 시설이 버려졌을 가능성이 높다.[25] 이러한 가뭄과 기근은 칼키스와 에레트리아가 모두 렐란토스 평원 전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칼키스와 에레트리아는 모두 렐란토스 평원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렐란토스 평원은 농업에 적합했으며, 그리스는 비옥한 토지가 희소했다. 당시 토지를 둘러싼 전쟁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메가라아테네도 토지를 놓고 다투었다.[40] 과거 칼키스와 에레트리아는 렐란토스 평원을 공동으로 사용했으나, 아티카와 에우보이아에서 대규모 한발 피해로 기근이 발생하자 풍요로운 렐란토스 평원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일어났을 것이다.[41]

4. 전쟁의 경과

기원전 710년경 렐란토스 전쟁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육상에서 벌어졌다.[26] 아르킬로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은 그의 생애 동안 계속되었으며(그는 기원전 645년경 사망),[27]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나 메세니아 전쟁처럼 여러 단계와 휴전이 반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4]

기원전 700년경, 에레트리아의 모도시이자 렐란토스 평원에 위치한 레프칸디가 할키스에 의해 파괴되었다.[46] 이로 인해 렐란토스 평원 내부에서 할키스의 영향력은 커지고 에레트리아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같은 시기, 에레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밀레토스가 칼리스토스에 의해 약탈당하며 동지중해에서의 패권을 잃었다. 렐란토스 전쟁은 여러 차례 휴전을 반복하면서 기원전 7세기 중반까지 이어졌으며, 최종적으로 테살리아의 귀족 클레오마코스의 군사적 개입으로 할키스의 승리로 끝났다.

4. 1. 전투 방식

할키스와 에레트리아 간의 전쟁은 기원전 710년경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도시 모두 대규모 함대를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전쟁은 육상에서 벌어졌다.[26] 이 전쟁은 중장 보병 전쟁이 발전하거나 도입되기 전에 일어났고, 활과 투석기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14] 대부분의 교전자는 아마도 가볍게 무장한 검을 사용하는 병사였을 것이다.[27]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이 전쟁은 주로 기병 간의 교전으로 이루어졌다.[7] 아르킬로코스의 관련 구절은 그 전쟁이 시인의 생애 동안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기원전 645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분쟁은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메세니아 전쟁처럼 여러 단계의 전쟁과 휴전으로 나뉘었을 가능성이 높다.

칼키스와 에레트리아는 해외에 식민 도시를 선제적으로 건설하여 모두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전쟁은 육상에서 벌어졌다. 당시에는 아직 중장 보병이 그리스에 보급되기 전이었지만, 이나 새총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많은 병사들은 경장한 검사였다.[42] 다른 견해에 따르면, 주로 기병에 의해 싸워졌다고 한다.[43] 에레트리아는 보병 부대 3000명, 기병 부대 600명, 전차 부대 60명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는 호메로스 시대(전차를 타고 전투를 시작하여 일리아스의 영웅처럼 싸운다)와 중장 보병 시대의 중간기임을 상기시킨다.

칼키스의 전력에 대해서는 보병 부대는 에레트리아에 비해 열세였지만, 기병 부대는 우세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4. 2. 군사력

에레트리아는 전성기에 보병 3,000명, 기병 600명, 전차 60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42] 이는 이 분쟁이 호메로스의 ''아리스토스''(전차를 타고 전쟁에 참여하여 일리아스의 영웅처럼 적과 싸움)와 고전 시대 호플리테스 사이의 과도기에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칼키스의 군사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보병은 에레트리아보다 우세했고 기병은 열세였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42]

칼키스와 에레트리아는 해외에 식민 도시를 선제적으로 건설하여 모두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전쟁은 육상에서 벌어졌다.[42] 당시에는 아직 중장 보병이 그리스에 보급되기 전이었지만, 이나 새총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많은 병사들은 경장한 검사였다.[42] 다른 견해에 따르면, 주로 기병에 의해 싸워졌다고 한다.[43]

4. 3. 동맹 관계

렐란토스 전쟁에는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외에도 여러 도시 국가들이 참여했다. 에레트리아는 밀레투스[9], 아이기나, 메가라와 동맹을 맺었고, 칼키스는 사모스[9], 코린토스, 테살리아[11]와 동맹을 맺었다.

아이기나는 이집트와 무역하며 사모스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31] 사모스가 칼키스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아이기나는 에레트리아 편에 섰다.[31] 코린토스메가라는 페라코라 반도 문제로[35] 전쟁 상태였고, 칼키스와 코린토스는 협력 관계였으므로[36][37] 메가라는 에레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밀레투스는 이전에 키오스를 지원했기 때문에[38] 키오스는 에레트리아와, 에리트라이는 칼키스와 동맹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더 많은 도시 국가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28]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8세기에는 광범위한 정치적 동맹 체제가 존재하기 어려웠다고 본다.[29] 당시의 동맹은 귀족들 간의 개인적인 관계에 기반했을 가능성이 크다.[7]

5. 전쟁의 결과 및 영향

렐란토스 전쟁 이후 한때 그리스의 주요 지역이었던 에우보이아는 변방으로 전락했다.[20] 패배한 에레트리아와 승리한 칼키스는 모두 과거의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을 잃었다. 지중해 시장에서는 코린트 도기가 이전에 에우보이아 도기가 차지했던 지배적인 역할을 대체했다(고대 그리스 도기 참조). 식민 활동의 주도권은 미레투스(동부 식민지)와 포카이아(서부 식민지)와 같은 소아시아의 도시 국가들에게 넘어갔다. 칼키스는 장기간 쇠퇴했고, 에레트리아가 통제했던 키클라데스 제도는 독립했다. 테오그니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에 렐란토스 평원을 둘러싼 또 다른 분쟁이 있었고, 두 도시는 다시 싸운 것으로 보인다. 전쟁 이후 두 도시는 북부 그리스의 할키디케 반도 식민지화를 계속했다. 에레트리아는 전쟁 동안 미레투스가 제공한 도움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이오니아 반란에서 미레투스를 지원했다. 이로 인해 에레트리아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 전에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었다. 칼키스는 기원전 506년까지 렐란토스 평원을 통제했으나, 아테네가 그곳에 클레루키를 세웠다.[39]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Archaic Greek World
[2] 논문 The Lelantine War and Pheidon of Argo
[3] 고전 Thucydides I. 15
[4] 서적 History of the Archaic Greek World
[5] 인용 Travelling Heroes in the Epic Age of Homer
[6] 서적 eo. loc.
[7] 논문 Der Lelantische Krieg – ein Mythos?
[8] 논문 Zwei Lehrstücke über Pseudo-Nachrichten
[9] 고전 Herodotus V 99
[10] 고전 Amatorius 17
[11] 고전 Amatorius 17
[12] 고전 Septem sapientium convivium
[13] 고전 Érga kaì hêmérai
[14] 고전 Strabon X 1,11–12
[15] 고전 Anthologia Lyrica Graeca
[16] 논문 Geometric Eretria
[17] 서적 L'Hérôon á la porte de l'ouest
[18] 서적 Excavations at Lefkandi, Euboea, 1964/1966. A Preliminary Report Thames and Hudson
[19] 서적 Lefkandi 1: The Iron Age
[20] 서적 Untersuchungen zum Lelantischen Krieg
[21] 간행물 Euboean Exports to Al Mina, Cyprus, and Crete: A Reassessment
[22] 고전 Thukydides VI 4,5–6
[23] 고전 Solon 7–10
[24] 간행물 A Drought in the Late Eighth Century B. C
[25] 간행물 Ἀνασκαφαὶ Ζαγορᾶς Ἄνδρον
[26] 정보
[27] 서적 Untersuchungen zum Lelantischen Krieg
[28] 간행물 The So-Called 'Trade-Leagues' in Early Greek History and the Lelantine War
[29] 서적 Korinthiaka
[30] 서적 Cambridge Ancient History
[31] 간행물 The Lelantine War and Pheidon of Argos
[32] 서적 A History of Sparta 950-192 BC Hutchinson University Library
[33] 서적 The Histories Penguin Books
[34] 서적
[35] 고전 Pausanias I 44.1
[36] 문서 Thucydides VI 4
[37] 서적 Quaestiones Graecae
[38] 문서 Herodot I 18
[39] 간행물 Athens and Euboea
[40] 서적 Solon 7–10
[41] 논문 A Drought in the Late Eighth Century B. C 1979
[42] 서적 Untersuchungen zum Lelantischen Krieg Stuttgart
[43] 논문 "Der Lelantische Krieg – ein Mythos?"
[44] 논문 "The Lelantine War and Pheidon of Argos" 1947
[45] 문서 Pausanias I 44.1
[46] 서적 Lefkandi 1: The Iron Age London
[47] 논문 "Athens and Euboea"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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