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루블린 연합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블린 연합은 1569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연합 조약으로, 두 국가는 선거 군주제를 채택하여 단일 통치자를 선출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라는 단일 국가를 수립했다. 이 연합은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를 만들었지만, 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중앙 집권화의 실패로 인해 결국 분할되었다. 루블린 연합은 5월 3일 헌법으로 대체되었지만, 주변국의 개입으로 인해 헌법은 시행되지 못했고, 1795년 폴란드 분할로 연합은 멸망했다. 오늘날 루블린 연합은 유럽 연합의 모델로 평가받기도 하며,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간의 지역 동맹인 루블린 삼각동맹의 명칭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 리투아니아 대공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3세기 중반부터 1795년까지 동유럽에 존재했던 국가로, 발트족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흑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다문화 사회를 이루었고, 폴란드 왕국과 연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일원으로 존속하며 동유럽 여러 국가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 야기에우워 왕조
    야기에우워 왕조는 폴란드 국왕 요가일라에서 시작되어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중앙 유럽 여러 국가를 통치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사망으로 단절되었다.
루블린 연합
지도
기본 정보
정식 명칭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연합
존속 기간1569년 7월 1일 ~ 1795년
수도크라쿠프 (1569년)
공용어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루테니아어
정치
정치 체제선출 군주제
국가 원수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헨리크 3세
스테판 바토리
지그문트 3세 바사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
얀 3세 소비에스키
아우구스트 2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아우구스트 3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입법부제국 의회
역사
결성1569년 7월 1일
해체1795년
주요 사건루블린 연합 (1569년)
폴란드 분할 (1772년, 1793년, 1795년)
인구
16세기 말 추정 인구약 750만 명
경제
통화즈워티
기타
이전 국가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후계 국가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2. 역사적 배경

1526년 루블린 연합 이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루블린 연합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오랜 논의가 있었다. 리투아니아귀족들은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폴란드의 하급 귀족(슈략타)들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갖게 될 경우 권력 약화를 우려했다. 하지만 당시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리투아니아 전쟁과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 차르국에게 밀리며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었고, 폴란드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반면, 폴란드의 귀족(슈략타)들은 리투아니아를 지원하는 데 막대한 비용(1560년대 폴란드 세수의 최대 70%가 투입됨)이 드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아무런 대가 없이 지원을 계속하는 것을 꺼렸다.[5][6]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양국의 군사적 협력이 증가하면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층 사이에서는 개인적인 유대감을 강화하고 통합된 미래를 구상할 기회가 생겨났다.[7]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양국이 처한 위협을 인식하고 연합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점차 지지 세력을 확보하여 연합에 반대하는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압박할 수 있었다.[8] 지기스문트 2세에게 연합은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서 왕조의 유산을 보존하고, 야드비가 여왕과 요가일라 대공의 결혼으로 시작된 양국의 관계를 선거 군주제를 통해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중요한 시도였다.[8]

2. 1. 연합 이전의 상황



루블린 연합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오랜 논의 과정이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귀족, 특히 마그나트(대귀족)들은 수가 훨씬 많은 폴란드의 하급 귀족(슈략타)들과 법적으로 같은 지위가 되면서 자신들의 권력이 크게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당시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리투아니아 전쟁에서 점차 밀리고 있었고, 16세기 후반 리보니아 전쟁에서는 완전한 패배와 함께 러시아 차르국에 합병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반면, 폴란드의 귀족(슈략타)들은 별다른 대가 없이 계속해서 리투아니아를 지원하는 것을 꺼렸다. 실제로 1560년대 폴란드에서 걷힌 세금의 최대 70%가 모스크바와의 전쟁에서 리투아니아를 지원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5][6]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협력이 늘어나면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층 사이에서는 개인적인 관계를 다지고 하나된 미래를 구상할 기회가 생겨났다.[7]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모두에게 닥친 위협을 인식하고 연합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점차 지지 세력을 넓혔고, 연합에 반대하는 리투아니아의 토지 소유 귀족들을 압박할 만큼 충분한 힘을 확보했다.[8] 지기스문트 2세가 연합에 적극적이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으며 왕위를 이을 자녀나 형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블린 연합은 야드비가 여왕과 요가일라 대공의 결혼으로 시작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보존하고 더욱 공고히 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이 연합은 두 나라를 함께 다스릴 왕을 공식적으로 선출하는 선거 군주제를 수립하기 위한 중요한 헌법적 변화이기도 했다.[8]

2. 2. 연합 추진 과정



루블린 연합 조약 체결까지는 오랜 논의가 필요했다. 리투아니아의 마그나트(대귀족)들은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폴란드의 슈략타(하급 귀족)와 동등한 법적 지위를 갖게 될 경우 권력 약화를 우려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리투아니아 전쟁에서 점차 밀리고 있었고, 16세기 후반 리보니아 전쟁에서는 러시아 차르국에 의한 완전한 패배와 병합 위협에 직면했다. 반면, 폴란드 귀족들은 이미 막대한 전쟁 비용(1560년대 폴란드 세수의 최대 70%가 리투아니아 지원에 사용됨)을 부담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대가 없이 지원을 계속하는 것을 꺼렸다.[5][6]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국 엘리트들은 군사 협력을 통해 개인적 유대를 강화하며 통합된 미래를 모색할 기회를 엿보았다.[7]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이러한 위협을 인식하고 연합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남성 후계자로 자녀나 형제가 없었기에, 연합을 통해 야드비가 여왕과 요가일라 대공의 결혼으로 시작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이라는 왕조의 유산을 보존하고자 했다. 연합은 양국을 함께 통치할 공식적인 선거 군주제를 확립하는 데 필수적이었다.[8] 지기스문트 2세는 점차 지지 기반을 넓혀 연합에 반대하는 리투아니아 토지 소유주들을 압박할 힘을 확보했다.[8]

1567년 1월, 폴란드의 루블린에서 세임(의회)이 소집되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폴란드 측의 강력한 연합 압박에 반발한 빌뉴스 주지사 미코와이 라지비우 루디가 이끄는 리투아니아 대표단은 1569년 3월 1일 회의장을 떠났다.

이에 지기스문트 2세는 폴란드 슈략타로부터 리투아니아가 지배하던 남부 영토, 즉 포들라시에, 볼린, 포지시에, 키예프 지역을 폴란드 왕국에 할양하도록 강요받았다. 3월 26일, 이 결정이 내려지면서 역사적인 루테니아 영토이자 당시 우크라이나 영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이 중요 지역들이 폴란드에 편입되었다. 이 지역 상류층을 주로 구성하던 루테니아인 귀족들에게는 큰 타격이었으며, 폴란드 국왕에게 충성을 거부한 이들은 영지를 몰수당했다.

영토 할양 조치 이후, 루블린을 떠났던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얀 카롤 호트키에비치의 아버지인 얀 호트키에비치의 주도로 협상에 복귀했다. 그들은 미코와이 라지비우 루디와는 다른 전략으로 협상을 이어갔다. 폴란드 측은 리투아니아의 완전한 합병을 통한 중앙집권화와 재정 강화를 원했지만, 리투아니아 측은 이에 맞서 연방 국가 형태를 고수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1569년 6월 28일 합의가 이루어졌고, 7월 4일 루블린 성에서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트 국왕이 연합 법령에 서명함으로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공식 출범했다.[34]

2. 3. 1569년 세임(Sejm)

1569년 1월, 폴란드 도시 루블린 근교에서 세임이 소집되었으나 초기에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주요 쟁점 중 하나는 폴란드인이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에 정착하고 토지를 소유할 권리 문제였다.[9] 리투아니아 대표단은 빌뉴스 주지사였던 미콜라이 "루디" 라지비우의 주도하에 폴란드 측의 연합 압력에 반발하며 1569년 3월 1일 회의장을 떠났다.

리투아니아 대표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폴란드 귀족(슈략타)들의 요구와 일부 현지 귀족들의 지지에 힘입어[9][10] 3월 26일, 리투아니아가 지배하던 남부의 포들라시에, 볼리니아, 브라츠와프 주, 키예프 주를 폴란드 왕국 왕관령으로 병합할 것을 결정했고, 이는 6월 6일 공식화되었다. 이 역사적인 루테니아 지역들은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으며, 현대 우크라이나 영토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해당 지역의 루테니아 귀족들은 폴란드가 제공하는 정치적, 경제적 기회를 얻고자 했기에 대체로 이러한 영토 변경을 지지했다.[11] 국왕에게 충성을 거부한 일부 귀족들은 영토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영토 병합이라는 강경 조치 이후, 얀 예로니모비치 호드케비치(얀 카롤 호드케비치의 아버지)가 이끄는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세임으로 복귀하여 협상을 재개했다. 이들은 라지비우와는 다른 전략을 사용했다. 폴란드 측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폴란드 왕국에 완전히 통합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를 원했지만, 리투아니아 측은 이에 계속 반대하며 연방 국가 형태의 결합만을 수용하려 했다. 오랜 논쟁 끝에 리투아니아 측의 마지막 반대가 1569년 6월 28일에 극복되었고, 마침내 7월 4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국왕이 루블린 성에서 연합 법령에 최종 서명했다.[9][34]

이러한 합의의 배경에는 리투아니아가 모스크바-리투아니아 전쟁과 리보니아 전쟁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에 점차 밀리며 국가적 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폴란드의 군사적 지원이 절실했지만, 폴란드 귀족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리투아니아를 돕는 것을 꺼렸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연방 결성을 강력히 추진했다. 한편, 리투아니아의 마그나트(대귀족)들은 연합을 통해 수적으로 우세한 폴란드 슈략타(하급 귀족)와 동등한 지위가 되는 것을 우려하여 마지막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현실적인 위협 앞에서 연합에 동의하게 되었다.

3. 루블린 연합의 내용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장


루블린 연합은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하나의 국가, 즉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합병될 것을 규정했다. 하지만 각 국가는 자체 군대, 재무부, 법률 및 행정부를 유지하며 상당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10] 이론적으로는 두 국가가 동등한 파트너였지만, 실제로는 폴란드가 더 큰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연합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공동 의회인 세임(Sejm)에서는 폴란드 대표가 리투아니아 대표보다 3대 1의 비율로 많았다.[10]

연합 국가는 양국 귀족이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단일 통치자를 두었다. 선출된 군주는 크라쿠프의 바벨 성당에서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했다. 공동 의회인 세임은 바르샤바에서 소집되었으며, 양국은 공동 외교 정책과 공동 방위 정책을 수행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군대는 각자 별도로 유지했다.[3]

연합의 일환으로 리투아니아는 포들라스키에, 볼리니아, 포돌리아, 키예프 주 등 일부 영토를 폴란드 왕관령에 넘겨주었다. 경제적으로는 공통 통화인 즈워티가 도입되었다.

이 연합으로 탄생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많은 국가 중 하나였다(러시아오스만 제국 제외).[18] 그러나 연합 이후 루테니아 지역에서는 폴란드 슈략타(귀족)에 의한 식민화와 현지 농민에 대한 농노제 심화 현상이 나타났다.[13][14][15][16] 또한, 연합 조약과 기존 리투아니아 법전 간의 충돌 문제로 인해 법률 체계를 통일하려는 코에크와차야 프라프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19]

루블린 연합 체제는 1791년 5월 3일 헌법을 통해 단일 국가로 개편될 예정이었으나, 이 헌법은 완전히 시행되지 못했고 결국 1795년 폴란드 분할로 연방은 해체되었다.

3. 1. 정치

1569년 1월, 폴란드 도시 루블린 근교에서 세임이 소집되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폴란드인들의 강력한 연합 압력에 반발한 리투아니아인들은 빌뉴스 주의 미콜라이 "루디" 라지비우 지휘 아래 3월 1일 루블린을 떠났다. 이에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국왕은 슈라흐타(폴란드 귀족)의 요구에 따라 리투아니아 남부의 포들라시에, 볼리니아, 브라츠와프 주, 키예프 주를 폴란드 왕관령으로 병합했다(6월 6일).[9][10] 이 지역의 루테니아 귀족들은 폴란드 권역이 제공하는 경제적, 정치적 기회를 활용하고자 했고, 대체로 폴란드 왕관 편입을 지지했다.[11] 이 역사적인 루테니아 지역은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으며, 현대 우크라이나 영토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얀 예로니모비치 호드케비치(얀 카롤 호드케비치의 아버지)의 지도 아래 세임으로 복귀하여 협상을 재개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폴란드 왕관에 완전히 편입시키기를 원했으나, 리투아니아인들은 이를 반대하고 연방 국가 형태를 주장했다. 결국 1569년 6월 28일 마지막 반대가 극복되었고, 7월 4일 국왕이 루블린 성에서 연합 법령에 서명했다.[9][34]

루블린 연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라는 단일 국가의 수립을 규정했지만,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각자의 군대, 재무부, 법률 및 행정부를 유지하며 상당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10][35] 이론적으로 두 국가는 동등한 파트너였으나, 실제로는 폴란드가 더 큰 규모와 인구를 바탕으로 연합 내에서 우위를 점했다. 인구 차이로 인해 공동 의회인 세임(Sejm)에서 폴란드 대표는 리투아니아 대표보다 3대 1의 비율로 많았다.[10][35] 세임은 바르샤바에서 열렸으며, 하원은 폴란드 대표 114명과 리투아니아 대표 48명으로, 상원은 폴란드 상원의원 113명과 리투아니아 상원의원 27명으로 구성되었다.

연합 국가는 단일 통치자를 두었으며, 이 통치자는 양국 귀족에 의해 자유 선거로 선출되어 크라쿠프의 바벨 성당에서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했다. 루블린 연합 협상 과정에서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리투아니아 대공의 별도 즉위식을 요구했으나, 이는 공식 조약에는 포함되지 않았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1580년 5월 29일 빌뉴스 대성당에서 슈테판 바토리 국왕을 위한 별도의 즉위식이 거행되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주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21][22][23][24] 또한, 양국은 공동 외교 정책을 수행했다.

루블린 연합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한계를 지닌 것이기도 했다. 이 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36] 이후 200년 이상 번영을 누리는 기반을 마련했지만,[37] 지그문트 2세는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하급 귀족의 지지를 통해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마그나트(대귀족)와의 세력 균형을 이루려 했으나, 법적으로 모든 귀족이 동등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그나트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지 않았고 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다.[34] 결과적으로 주변 국가들이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절대 군주제로 발전하는 동안, 연합 국가의 왕권은 점차 약화되었고, 귀족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황금의 자유 체제는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38]

연합 설계자들은 두 국가가 더 긴밀히 통합되기를 기대했지만, 1566년에 제정된 제2차 리투아니아 법전이 여전히 효력을 가지면서 루블린 연합 조약과 일부 내용이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1588년 제3차 리투아니아 법전이 제정되었지만, 이 역시 여러 면에서 연합 조약과 상충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연합 조약이 모든 법률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며 리투아니아 법전을 위헌으로 간주했지만, 리투아니아 측은 법전의 유효성을 내세웠다. 이러한 법 체계의 불일치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마그나트(특히 사피에하 가문)의 권력을 제한하고 연방의 법을 통일하려는 시도는 '코에크바치야'(koekwacja) 법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1697년 대관 의회에서 관련 개정안이 통과되고 1698년 4월 세임에서 문서로 승인되면서 절정에 달했다.[39]

3. 2. 군사

폴란드는 두 실체의 연합 이후 전쟁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군사 원조를 제공했는데, 이는 대공국의 생존에 매우 중요했다.[3] 폴란드와 대공국은 별도의 군대를 유지하되 공동 방위 정책을 펼치기로 했다.

이 연합 이후,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에 군사 지원을 제공했지만, 이전에 합병한 지역을 반환하지는 않았다. 이 지역의 토착 귀족인 루테니아계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포들라시에, 볼리니아, 포돌리아, 키예프 지역의 폴란드 합병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35]

3. 3. 경제

공통 통화인 즈워티가 도입되었다.

루테니아 지역이 폴란드 왕관령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해당 지역 귀족들은 폴란드 권역이 제공하는 경제적, 정치적 기회를 활용하려는 열망이 있었다.[11] 그러나 루블린 연합 이후, 이 지역에서는 폴란드 슈략타에 의한 식민화와 루테니아 농민에 대한 농노제 심화가 진행되었다.[13][14][15][16]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농민들의 상황은 제2농노제의 영향으로 서유럽에 비해 열악했지만, 러시아 차르국의 농민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 연방으로 도망치는 농민들이 발생했으며, 이는 러시아 정부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 결과적으로 폴란드 분할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17]

3. 4. 사회 및 문화

175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종교 분포: 서쪽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 동쪽은 동방 가톨릭교회(주황색)


루블린 연합 이후,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와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폴란드 귀족과 동등한 공식적인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가톨릭이 지배적인 연방 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15세기 후반부터 폴란드어는 이미 리투아니아와 루스 엘리트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9] 루블린 연합은 이러한 폴란드화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문화와 사회생활에서 폴란드어와 가톨릭 신앙은 루테니아 귀족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본래 루테니아어를 사용하고 동방 정교회를 믿었다. 반면, 평민들, 특히 농민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계속 사용했으며, 브레스트 연합 이후에는 동방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변화는 연방 내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지역에서 귀족 계층과 하층 계급 사이에 상당한 문화적, 사회적 간극을 만들었다.[11] 일부 루테니아의 유력 가문(오스트로그스키 가문 등)은 정교회 신앙을 지키고 루테니아 정교회와 학교에 기부하며 폴란드화에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대가 거듭될수록 폴란드화의 압력은 강해졌고, 결국 거의 모든 루테니아 귀족들이 폴란드화되었다.

3. 5. 법률

리투아니아 법전은 루블린 연합으로 제정된 법률 중 기존 법전과 상충하는 내용을 위헌으로 규정했다. 제1차 리투아니아 법전은 연합 직전에 폴란드 왕관령에 편입된 리투아니아 영토(포들라스키 제외)에서도 효력을 유지했다. 이처럼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법률 체계 간 충돌은 수년간 지속되었으며, 제3차 리투아니아 법전은 연방 분할 이후에도 1840년까지 구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에서 계속 시행되었다.

한편, 리투아니아의 유력 귀족 가문(특히 사피에하 가문)의 권력을 제한하고 연합 내 법률을 통일하려는 시도는 코에크와차야 프라프(koekwacja praw, 권리 균등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1697년 5~6월에 열린 선거 세임에서 코에크와차야 개혁으로 구체화되었고, 1698년 4월 총 세임에서 ''Porządek sądzenia spraw w Trybunale Wielkiego Księstwa Litewskego''(리투아니아 대공국 재판소의 사건 심리 절차) 문서로 최종 확정되었다.[19]

4. 루블린 연합의 결과와 영향

루블린 연합은 지기스문트 2세의 가장 큰 업적이자 동시에 가장 큰 실패로 평가받는다. 이 연합으로 당대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가 탄생하여 200년 이상 지속되었지만,[25] 연합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실질적인 정치 제도 개혁에는 실패했다는 한계가 있다. 모든 귀족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명문가의 강력한 정치적 힘은 약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하급 귀족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9] 약화된 왕권과 귀족 중심의 황금의 자유 체제는 결국 연합을 정치적 혼란 상태로 이끌었고, 이는 주변 강대국들의 개입과 함께 연합 해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26]

젤리고프스키의 반란으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폴란드에 합병된 후, 리투아니아는 1922년 공식적으로 루블린 연합의 폐기를 선언하였다.[27][28] 오늘날 폴란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자국의 역사적 계승 국가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29] 전간기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연합의 역사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30]

루블린 연합의 원본 문서는 그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31] 또한 현대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사이의 지역 협력체인 루블린 삼각형은 역사적인 루블린 연합의 의미를 기리며 명명되었다.[32]

4. 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발전



연합 성립 후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공식적으로 폴란드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누렸으나, 가톨릭이 우세한 연합 내에서의 실질적인 정치적 위상은 달랐다. 이미 15세기 후반부터 폴란드어는 리투아니아와 루스 지역 엘리트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었고, 루블린 연합은 이러한 폴란드화 경향을 더욱 가속했다.[9] 문화와 사회생활 전반에서 폴란드어와 가톨릭 신앙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본래 루테니아어를 사용하고 동방 정교회를 믿었던 다수의 루테니아 귀족들이 점차 폴란드화되었다. 반면, 평민층, 특히 농민들은 고유 언어를 유지했으며, 브레스트 연합 이후에는 동방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변화는 연합 내 리투아니아 및 루테니아 지역에서 귀족 계층과 하층민 사이에 상당한 문화적, 사회적 간극을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11] 오스트로그스키 가문과 같은 일부 루테니아 거상(마그나트)들은 정교회 신앙을 고수하며 폴란드화에 저항하고, 루테니아 정교회와 학교 설립에 기여하기도 했으나, 세대가 거듭될수록 폴란드화의 압력은 거세져 결국 대부분의 루테니아 귀족이 폴란드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루블린 연합은 두 국가의 형식적 합병을 이루었지만, 각 국가는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하여 개별적인 군대, 재무부, 법률 체계 및 행정부를 유지했다.[10][35] 이론상으로는 양국이 동등한 파트너였으나, 실제로는 규모가 더 크고 문화적으로 영향력이 강했던 폴란드가 우위를 점했다. 인구 차이로 인해 공동 의회인 세임(Sejm)에서 폴란드 대표의 수가 리투아니아 대표보다 3:1 비율로 많았으며,[10][35] 이는 폴란드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세임은 바르샤바에서 소집되었고, 폴란드 지역 대표 114명과 리투아니아 대표 48명으로 구성되었다. 상원은 폴란드 상원의원 113명과 리투아니아 상원의원 27명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연합은 공동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폴란드 국왕과 리투아니아 대공을 겸하는 단일 통치자는 양국 귀족 전체의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으며, 크라쿠프의 바벨 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루블린 연합 협상 과정에서 미콜라이 "붉은" 라지빌,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 등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리투아니아 대공만의 별도 즉위식을 요구했으나, 이는 공식 조약에는 반영되지 않았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1580년 5월 29일 빌뉴스 대성당에서 슈테판 바토리 국왕(1576년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을 위한 별도의 의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직접 축성한 성검과 모자가 수여되었는데, 이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주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루블린 연합의 조항을 넘어서는 새로운 리투아니아 대공의 즉위를 기념하는 의미를 지녔다.[21][22][23][24]

루블린 연합으로 성립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제치포스폴리타(Rzeczpospolita))
폴란드 왕국(진한 분홍색)
리투아니아(연한 보라색)
프로이센 공국(베이지색)
리보니아(회색)
에스토니아(연두색)
올리브색 글씨와 경계선은 현재의 국가명과 국경선


연합의 설계자들은 실제보다 더 긴밀한 통합을 기대했으나, 1566년에 제정된 제2 리투아니아 법전이 여전히 효력을 유지하면서 연합 조약과 일부 내용이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1588년 제3 리투아니아 법전이 제정되었지만, 이 역시 여러 측면에서 루블린 연합 조약과 상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폴란드 귀족들은 연합 조약 체결 시 "연합 조약은 어떠한 법에도 저촉되지 않는다"고 명시된 점을 근거로 리투아니아 법전을 위헌으로 간주하려 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법전은 리투아니아 영토 내에서 계속해서 법적 효력을 가졌으며, 심지어 루블린 연합 직전에 폴란드에 편입된 리투아니아 지역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법 체계의 불일치와 리투아니아 마그나트(특히 사피에하 가문)의 강한 권력을 제한하고 연방의 법 체계를 통일하려는 시도는 '코에크바치아'(koekwacja) 법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1697년 대관 의회(Sejm elekcyjny)에서 관련 개정안이 통과되고, 1698년 4월 의회(세임)에서 ''Porządek sądzenia spraw w Trybunale Wielkiego Księstwa Litewskego''라는 문서로 최종 승인되면서 절정에 달했다.[39]

루블린 연합은 지그문트 2세의 주요 업적이자 동시에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연합을 통해 당대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가 탄생했고 200년 이상 존속했지만,[25][36][37] 지그문트 2세는 연합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치 개혁을 완수하지 못했다. 그는 하급 귀족(슐라흐타)의 지지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하급 귀족과 마그나트 사이의 권력 균형을 이루려 했으나, 법적으로 모든 귀족이 법 앞에 평등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그나트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그나트들은 재력을 이용해 하급 귀족들을 매수하거나 통제할 수 있었다.[9][34] 결과적으로 왕권은 점차 약화되었고, 주변 국가들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절대 군주제를 구축하며 발전하는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귀족 민주주의 체제인 '황금의 자유' 아래에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결국 국가 해체라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26][38]

내부적인 정치적 불안정과 코사크 봉기, 그리고 외세의 지속적인 개입은 결국 18세기 말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한 세 차례의 폴란드 분할(1772년, 1793년, 1795년)로 이어져 연합의 소멸을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1655년, 라지빌 가문이 스웨덴과의 연합을 모색하며 체결한 케다이냐이 연합 조약이 일시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면서 루블린 연합 체제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이후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냐토프스키 국왕의 주도로 1791년 5월 3일 헌법이 제정되어 연합을 입헌군주제 기반의 단일 국가로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러한 민주적 개혁과 국가 강화를 위협으로 간주한 주변 열강들의 무력 개입으로 인해 헌법은 완전히 시행되지 못했다. 20세기 들어 젤리고프스키의 반란으로 빌뉴스폴란드에 점령 및 합병되자, 리투아니아는 1922년 루블린 연합의 공식적인 폐기를 선언했다.[27][28]

오늘날 폴란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자국의 역사적 계승 국가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29] 전간기의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루블린 연합의 성립과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30] 한편, 루블린 연합의 원본 문서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31] 현대에 들어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3국 간의 지역 협력체인 루블린 삼각형은 역사적인 루블린 연합의 의미를 기리며 명명되었다.[32]

크지슈토프 라크(Krzysztof Rak)를 비롯한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루블린 연합이 오늘날의 유럽 연합(EU)과 유사한 형태의 국가 연합을 구축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2][40][41][42] 이러한 관점에서 루블린 연합은 칼마르 동맹, 영국의 연합법 등과 더불어 현대적 국가 통합의 선례, 나아가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역사적 전신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다만, 루블린 연합은 당시 기준으로 중앙집권화를 지향하며 현대의 EU보다 더 강력한 결속력을 가진 국가 형태였다는 차이점이 있다.

1861년경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기념하는 그림; 모토는 "영원한 연합"이다.

4. 2. 연합의 해체

루블린 연합은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냐토프스키 국왕이 주도한 1791년 5월 3일 헌법에 의해 변화를 맞이했다. 이 헌법은 연방 국가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단일 국가로 개편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를 통해 국가를 강화하려는 진보적인 목표를 가졌으나, 주변의 절대 군주제 국가들은 이를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26] 두 나라의 상호 보장 조항을 통해 준연방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이 헌법은 주변국들의 무력 개입, 즉 폴란드 분할로 인해 완전히 시행되지 못했다.

루블린 연합 자체는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를 탄생시키고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25] 그러나 지기스문트 2세는 연합을 뒷받침할 실질적인 정치 제도 개혁에는 실패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는 소귀족의 지지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 가문 간의 권력 균형을 이루려 했으나, 실제로는 명문가들의 정치적 힘이 크게 약화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하급 귀족들을 매수하거나 강압할 수 있었다.[9] 약화된 왕권과 귀족들의 황금의 자유는 연합을 정치적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게 했고, 주변국들이 중앙집권적 절대 군주제로 발전하는 동안 연합은 점차 쇠퇴했다.[26]

결국, 코사크의 봉기와 주변 강대국들의 계속된 간섭 끝에 1795년 러시아 제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합스부르크 제국에 의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완전히 분할되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폴란드 분할). 이로써 루블린 연합 체제는 종말을 맞이했다. (이전 1655년 라지빌 가문이 스웨덴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연합을 추진한 케다이니 조약이 잠시 효력을 발휘했을 때도 연합은 일시적으로 무효화된 바 있다.)

연합이 해체된 이후에도 양국 간의 갈등은 이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 공화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젤리고프스키의 반란으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가 군사 점령당하고 1922년 폴란드에 합병되자, 리투아니아는 이에 항의하며 공식적으로 1569년의 루블린 연합을 폐기한다고 선언했다.[27][28]

오늘날 폴란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계승 국가임을 자처하지만,[29] 전간기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연합의 역사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30] 루블린 연합 원본 문서는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31] 또한, 현대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사이의 지역 협력체인 루블린 삼각형은 역사적인 루블린 연합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2]

5. 루블린 연합에 대한 평가

젤리고프스키의 반란 이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폴란드 공화국에 의해 군사 점령되고 1922년 합병되자, 리투아니아인들은 공식적으로 1569년 루블린 연합을 폐기하였다.[27][28] 이는 전간기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연합의 성립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시각과 맥을 같이 한다.[30] 반면, 오늘날 폴란드 공화국은 스스로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계승 국가로 여기고 있다.[29]

이러한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루블린 연합의 원본 문서는 그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31] 또한, 현대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사이의 지역 협력체인 루블린 삼각형은 루블린 연합의 역사적 유산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32]

5. 1. 긍정적 평가



루블린 연합은 지기스문트 2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연합으로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리보니아 등을 아우르는 광대한 국가가 탄생했으며, 이는 러시아 제국이나 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가 중 하나로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25]

현대 역사가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형태가 현재의 유럽 연합(EU)과 유사성을 가진다고 보기도 한다.[40][41][42] 이러한 관점에서 루블린 연합은 영국의 연합법 등과 더불어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선구적인 형태로 평가받기도 한다.

루블린 연합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관련 원본 문서는 201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31] 또한, 현대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간의 지역 협력체인 루블린 삼각형은 루블린 연합의 역사적 의미를 기려 명명되었다.[32]

5. 2. 부정적 평가

루블린 연합은 지기스문트 2세의 가장 큰 업적이자 동시에 가장 큰 실패로 평가받기도 한다.[36] 이 연합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가 탄생했고 200년 이상 지속되었으나,[25][37] 지기스문트 2세는 연합을 실질적인 정치 제도로 발전시킬 개혁을 추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는 소귀족(슐라흐타szlachta|슐라흐타pol)의 지지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소귀족과 마그나트(Magnat, 대귀족) 간의 권력 균형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모든 귀족이 법 앞에 평등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그나트의 정치적 권력은 크게 약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은 하급 귀족들을 매수하거나 강압할 수 있었다.[9][34]

이론상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은 연합 내에서 동등한 파트너였지만, 실제로는 규모가 더 크고 문화적으로 영향력이 강했던 폴란드가 우위를 점했다.[35] 인구 차이로 인해 공동 의회인 세임(Sejm)에서 폴란드 대표의 수는 리투아니아 대표보다 3대 1의 비율로 많았다.[10][35]

연합 이후 폴란드화 과정은 더욱 가속화되었다.[9] 문화와 사회생활에서 폴란드어와 가톨릭교가 루테니아 귀족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본래 루테니아어를 사용하고 동방 정교회 신자였던 루테니아 귀족 대부분이 결국 폴란드화되었다. 이는 연합 내 리투아니아 및 루테니아 지역에서 하층 계급과 귀족 사이에 상당한 사회적 균열을 야기했다.[11]

루블린 연합은 루테니아 지역에 대한 폴란드의 영향력 확대와 함께, 슐라흐타 계급에 의한 루테니아 농민의 농노제 심화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13][14][15][16]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농민들의 상황은 서유럽에 비해 매우 열악했지만(제2농노제 참조), 러시아 차르국의 농민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고 평가되기도 한다.[17]

결과적으로 왕권(왕권)은 계속 약화되었고, 주변 국가들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절대 군주제로 발전하는 동안, 연합은 귀족들의 특권인 황금의 자유 아래 정치적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었다.[26][38] 이러한 내부적 취약성은 코사크 봉기와 외세의 개입을 불러왔고, 결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의한 폴란드 분할(1772년, 1793년, 1795년)로 이어져 연합은 소멸하게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특히 전간기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루블린 연합의 성립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30] 젤리고프스키의 반란으로 빌뉴스가 폴란드에 합병된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1569년의 루블린 연합을 폐기하기도 했다.[27][28]

6. 루블린 연합의 유산

폴란드 왕국(진한 분홍색)
리투아니아(연한 보라색)
프로이센 공국(베이지색)
리보니아(회색)
에스토니아(연두색)
올리브색 글씨와 경계선은 현재의 국가명과 국경선]]

루블린 연합은 지기스문트 2세의 주요 업적이지만 동시에 한계도 지닌 사업이었다. 이 연합으로 당대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가 탄생하여 200년 이상 지속되었으나,[25] 지기스문트 2세는 연합을 뒷받침할 실질적인 정치 제도 개혁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소귀족의 지지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소귀족과 명문가 사이의 권력 균형을 이루려 했지만, 실제로는 명문가의 정치적 힘이 크게 약화되지 않아 하급 귀족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9] 결국 약화된 왕권과 귀족 중심의 황금자유는 주변국들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절대 군주제로 발전하는 동안 연합을 정치적 무정부 상태로 이끌었고, 이는 결국 국가의 소멸로 이어졌다.[26]

연합은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냐토프스키 왕이 주도한 5월 3일 헌법에 의해 대체될 예정이었다. 1791년 이 헌법은 연방 국가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의회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적 개혁을 통한 국가 강화를 프랑스 혁명과 같은 위협으로 간주한 주변 강대국들(러시아 제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합스부르크 제국)의 무력 개입(폴란드 분할)으로 인해 헌법은 완전히 시행되지 못했다. 결국 코사크의 봉기와 주변국의 지속적인 개입 끝에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완전히 분할되어 소멸했다. 연합은 라지빌 가문이 스웨덴과의 연합을 추진한 케다이니 조약(1655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효력을 잃기도 했다.

오늘날 폴란드 공화국은 자신들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계승 국가로 여기고 있다.[29] 반면, 전간기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연합의 성립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30] 특히 젤리고프스키의 반란으로 수도 빌뉴스가 군사 점령당하고 1922년 폴란드에 합병되자, 리투아니아인들은 공식적으로 1569년의 루블린 연합을 폐기하기도 했다.[27][28]

루블린 연합 원본 문서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31] 또한,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는 루블린 연합의 역사적 유대를 바탕으로 지역 협력체인 루블린 삼각형을 결성하여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고 있다.[32]

루블린 연합은 폴란드 왕국(왕령 프로이센, 프로이센 공국, 폴란드령 우크라이나 포함), 리투아니아 대공국(리투아니아령 우크라이나·벨라루스 포함), 리보니아(쿠를란트에스토니아 포함)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졌으며, 러시아 제국이나 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당대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느슨한 인적 동군연합에서 발전하여 제도적 동군연합의 형태를 갖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현대 유럽 연합(EU)과 유사한 국가 형태로 보기도 한다.[40][41][42] 이런 관점에서 루블린 연합은 영국 제도의 연합법, 기타 유사한 조약과 마찬가지로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어떤 의미의 전신(게다가 최초의)으로 보고 있다. 다만, 루블린 연합은 중앙 집권화를 지향하며 현대 유럽 연합보다 더 강력한 결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참조

[1] 서적 Reiche und Territorien in Ostmitteleuropa. Historische Beziehungen und politische Herrschaftslegitimation Oldenbourg Wissenschaftsverlag
[2] 서적 The Slavs in European History and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Rutgers University Press
[3]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in Two Volume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A Man of Honour: Adam Czartoryski as a Statesman of Russia and Poland, 1795–1831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5] 웹사이트 450 lat unii lubelskiej. Dla Polaków i Litwinów - duma. Dla Europy - dziwactwo i źródło pogardy (Interview with Robert I. Frost) https://wyborcza.pl/[...] Gazeta Wyborcza 2020-07-05
[6] 서적 The Northern Wars: War, State and Society in Northeastern Europe, 1558-1721 Routledge 2000
[7]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in Two Volumes Oxford University Press
[8]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in Two Volumes Oxford University Press
[9] 서적 A Concise History of Po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0] 서적 A History of Russia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1] 서적 A History of Ukraine https://books.google[...] Toronto University Press
[12] 웹사이트 Federalism or Force: SR, January 2006 http://www.ruf.rice.[...]
[13] 백과사전 Ukraine http://www.britannic[...]
[14] 서적 History of Ukraine Lybid
[15] 서적 Narys istorii Ukrainy s zaidavnishyh chasic do kincia XVIII stolittia
[16] 서적 Ukraine: A History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7] 간행물 "Zbiegostwo ludności Rosji w granice Rzeczypospolitej" (Russian population exodus into the Rzeczpospolita) http://www.promemori[...] 2004-10
[18] 웹사이트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https://www.pbs.org/[...] 2006-03-19
[19] 서적 Szkice z dziejów federalizmu i myśli federalistycznych w czasach nowożytnych Unia Troista, Wydawnictwo UJ
[20] 웹사이트 Liublino unija https://www.vle.lt/s[...]
[21] 웹사이트 Vavelio pilies lobyne – ir Lietuvos, Valdovų rūmų istorija https://www.valdovur[...]
[22] 학술지 The year-book of Lithuanian history https://www.istorija[...] Lithuanian Institute of History 2005
[23] 서적 Kronika polska, litewska, żmódzka i wszystkiéj Rusi Macieja Stryjkowskiego. T. 2. https://polona.pl/pr[...] 1846
[24] 서적 Tolimos bet artimos: Lietuvos ir Vengrijos istoriniai ryšiai https://www.flf.vu.l[...] 2018
[25] 서적 Diplomats Without a Country: Baltic Diplomacy, International Law, and the Cold War https://books.google[...] Greenwood Press 2001-06-29
[26] 서적 A Union for Empire: Political Thought and the British Union of 1707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04-20
[27] 웹사이트 A Century Ago, The Treaty Of Riga Redrew The Map. It Still Reverberates Today. https://www.rferl.or[...] 2021-03-18
[28] 웹사이트 Lithuania in her Struggle for Freedom https://www.lrs.lt/p[...] 2008-04-07
[29] 법률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Poland
[30] 서적 Lithuania in European Politics: The Years of the First Republic, 1918–1940 https://books.google[...] St. Martin's Press
[31] 웹사이트 The Act of the Union of Lublin document |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http://www.unesco.or[...]
[32] 웹사이트 Meeting of Foreign Ministers of Poland, Lithuania and Ukraine https://www.gov.pl/w[...] 2020-07-28
[33] 간행물 "Zbiegostwo ludności Rosji w granice Rzeczypospolitej" (Russian population exodus into the Rzeczpospolita) http://www.promemori[...] 2004-10
[34] 서적 A Consise History of Polan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35] 서적 A History of Russia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36] 서적 Power and the Nation in European Histo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00-00
[37] 서적 Diplomats Without a Country: Baltic Diplomacy, International Law, and the Cold War https://books.google[...] Greenwood Press 2001-00-00
[38] 서적 A Union for Empire: Political Thought and the British Union of 1707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00-00
[39] 서적 Szkice z dziejów federalizmu i myśli federalistycznych w czasach nowożytnych Wydawnictwo UJ 1999-00-00
[40] 웹사이트 Leaving history behind? Poles and Lithuanians in the year 2001 http://www.lfpr.lt/u[...] 2001-07-00
[41] 웹사이트 The World Factbook - European Union - Introduction https://www.cia.gov/[...] 2009-11-11
[42] 웹사이트 Poland-Lithuania four centuries of the European Union's precursor http://info-poland.b[...] 2000-00-0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