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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마운트배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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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즈 마운트배튼은 헤센 대공국의 바텐베르크 공주로 태어나, 영국 해군 제독이자 초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인 바텐베르크의 루이 왕자의 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간호사로 활동했으며, 여러 차례 혼담이 오갔으나 34세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세자와 결혼했다. 1950년 남편이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적십자사 구호 활동을 펼쳤다. 1965년 사망했으며, 스웨덴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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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마운트배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5년의 루이즈
1945년의 루이즈
칭호스웨덴 왕비
재위 기간1950년 10월 29일 – 1965년 3월 7일
출생명바텐베르크 공녀 루이즈
출생일1889년 7월 13일
출생지독일 제국 헤센 대공국 제하임-유겐하임 슐로스 하일리겐베르크
사망일1965년 3월 7일
사망지스웨덴 스톡홀름 성 요란 병원
매장일1965년 3월 13일
매장지스웨덴 솔나 왕립 묘지
배우자구스타프 6세 아돌프 (1923년 11월 3일 결혼)
가문바텐베르크 가문 (1917년까지)
마운트배튼 가문 (1917년부터)
아버지루이 마운트배튼, 제1대 밀퍼드헤이븐 후작
어머니헤센과 라인 공녀 빅토리아
루이즈 여왕의 서명
루이즈 여왕의 서명
이름
스웨덴어루이세 알렉산드라 마리 이레네 마운트배튼
전체 이름 (스웨덴어)루이세 알렉산드라 마리 이레네
전체 이름 (영어)Louise Alexandra Marie Irene 루이즈 알렉산드라 마리 아이린
전체 이름 (독일어)Luise Alexandra Marie Irene 루이제 알렉산드라 마리 이레네

2. 생애

루이즈는 헤센 대공국에서 바텐베르크의 루이즈 공녀로 태어났으며, 세례명은 루이즈 알렉산드라 마리 이레네였다.[13] 아버지는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루이), 어머니는 헤센 대공녀 빅토리아였다. 1917년, 아버지가 영국 귀족으로 밀포드헤이븐 후작위를 받자 루이즈는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Lady Louise Mountbatten)으로 불렸다.

1889년 루이즈와 부모님, 자매 앨리스


1907년 루이즈, 필립 드 라슬로 작


루이즈는 조산으로 태어나 매우 허약했다. 허약하고 외모에 자신이 없었던 루이즈는 어린 시절 늘 소심했고, 예쁜 언니가 언젠가는 왕비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가족은 몰타와 같은 대영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이사했지만, 다름슈타트 외곽의 하일리겐베르크로 자주 돌아왔다. 루이즈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와이트 섬에서 종종 증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을 방문했다. 루이즈와 그녀의 여동생은 다름슈타트의 텍스터 여학교에서 잠시 교육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루이즈는 적십자에 입대하여 간호사로 프랑스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뇌베르와 몽펠리에 외곽의 팔라베스에 있는 전쟁 병원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영국 전쟁 훈장, 승리 훈장, 영국 적십자사 훈장, 프랑스 감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루이즈는 몇 번의 혼담이 오갔다. 20살 무렵 포르투갈 국왕이 청혼했을 때 거절했고, 1909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2세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사랑 때문에 결혼하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리스의 크리스토퍼 공과 은밀히 약혼했지만 재정적인 이유로 관계를 포기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사랑했던 남자는 전쟁 초기에 사망했다.[1] 전쟁 중 네베르에서 간호사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파리의 알렉산더 스튜어트-힐과 관계를 시작했으나, 1918년 루이즈의 아버지는 그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높다며 결혼을 반대했다.[1]

1923년 레이디 루이즈와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의 결혼 초상화


1923년, 루이즈는 스웨덴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세자와 결혼했다. 그는 첫 번째 부인 코넛의 마거릿 공주과 사별했으며, 5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루이즈는 결혼 초 임신했다가 딸을 사산한 후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1925년 왕세자비 시절의 루이즈


루이즈와 구스타프 아돌프의 결혼은 매우 행복했다. 1930년 바덴의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후, 루이즈는 국가의 공식적인 퍼스트 레이디로서 여왕의 모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녀는 스웨덴 적십자사등 여러 단체의 후원자가 되었다.

1926-1927년에 왕세자 부부는 미국을 포함한 세계 일주를 했다. 1934-35년에는 그리스, 중동,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루이즈는 적십자사에서 구호 활동을 했다. 중립국 시민으로서 전쟁 중인 국경을 넘어 친척과 친구들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핀란드겨울 전쟁 동안 울리크스달 궁전에 핀란드 전쟁 고아를 위한 집을 마련했다.

1950년 시아버지 구스타프 5세가 사망하면서 루이즈는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다. 루이즈는 소탈한 성격으로,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경호원 없이 궁궐 밖을 산책하곤 했다.

1963년의 루이즈 여왕


루이즈는 1954년 많은 오래된 궁정 관습을 민주화하는 새로운 지침을 제정했다. 1962년에는 궁정 알현을 폐지하고 "민주적인 여성 런치"로 대체했다.

1963년, 루이즈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를 국빈 방문했다.

루이즈 여왕은 1965년 3월 7일, 스톡홀름의 성 예란 병원에서 사망했다.

2. 1. 가족 관계 및 혈통

루이즈는 헤센 대공국에서 바텐베르크의 루이즈 공녀로 태어났으며, 세례명은 루이즈 알렉산드라 마리 이레네였다.[13] 아버지는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루이), 어머니는 헤센 대공녀 빅토리아였다.

루이즈의 친가인 바텐베르크가는 헤센 대공가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가문으로, 할아버지 헤센의 알렉산더가 왕족이 아닌 율리아 하우케와 귀천상혼하면서 생겼다. 이 때문에 헤센 대공가의 상속권은 없었고, 자녀들은 어머니의 지위인 바텐베르크 공/공녀 지위를 이어받았다. 루이즈의 고모 마리는 에르바흐-쇤베르크 공비가 되었고, 큰 숙부 알렉산더는 불가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둘째 숙부 하인리히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의 딸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는 현 스페인 국왕의 할머니다. 막내 숙부 프란츠 요제프는 몬테네그로의 안나와 결혼했는데, 안나의 언니들은 러시아의 대공비와 이탈리아의 왕비였다.

루이즈의 외가는 헤센 대공가였다. 외할아버지는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외할머니는 영국의 앨리스 공주였다. 루이즈의 큰 이모 엘리자베트는 러시아의 대공비, 둘째 이모 이레네는 독일의 왕자비가 되었다. 외삼촌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헤센 대공이었고, 막내 이모 알릭스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후였다.

루이즈의 형제로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안드레아스의 왕자비이자 영국의 필립 공의 어머니인 언니 앨리스, 밀퍼드헤이브 후작인 큰남동생 조지 마운트배튼 경, 마운트배튼오브버마 백작인 작은남동생 루이 마운트배튼 경이 있다. 루이즈 여왕과 의붓자녀들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이었다.

영국 해군 대장이었던 루드비히 폰 바텐베르크(훗날 초대 밀포드헤이븐 후작 루이스 알렉산더 마운트배튼)와 헤센 대공의 딸 빅토리아의 차녀로, 하일리겐베르크 성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공녀 루이제 폰 바텐베르크'(Prinzessin Louise von Battenberg)였다. 에든버러 공작 필립은 루이즈의 조카이다.

1917년, 아버지가 영국 귀족으로 밀포드헤이븐 후작위를 받자 루이즈는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Lady Louise Mountbatten)으로 불렸다.

2. 2. 어린 시절

루이즈는 조산으로 태어나 매우 허약했다. 어머니 빅토리아는 딸에 대해 왜소하고 신경질적으로 울어댄다고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코가 자신을 닮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허약하고 외모에 자신이 없었던 루이즈는 어린 시절 늘 소심했고, 예쁜 언니가 언젠가는 왕비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루이즈는 헤센 대공국 제하임-유겐하임의 슐로스 하일리겐베르크에서 바텐베르크 공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바텐베르크의 루이 왕자는 영국 해군의 제독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독일 작위를 포기하고 조지 5세의 요청에 따라 가문의 성을 "마운트배튼"으로 영국식으로 고쳤다. 그 후 그는 연합 왕국 귀족에서 초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으로 봉해졌다. 따라서 1917년부터 그의 딸은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으로 알려졌다. 어머니는 헤센과 라인의 빅토리아 공주로,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였다. 루이즈는 루이스 마운트배튼, 버마 백작과 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의 여동생이었고, 러시아 여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조카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가족은 몰타와 같은 대영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이사했지만, 그들은 항상 잉글랜드에 거주지를 유지하면서 휴가 별장으로 여겨지는 다름슈타트 외곽의 하일리겐베르크로 자주 돌아왔다. 루이즈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와이트 섬에서 종종 증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을 방문했다. 가족은 화목한 것으로 묘사된다. 루이즈의 부모는 정략결혼이 아닌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고, 루이즈는 특히 오빠와 가까이 지냈으며, 그녀는 죽을 때까지 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루이즈와 그녀의 여동생은 다름슈타트의 텍스터 여학교에서 잠시 교육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언니 앨리스가 어린 나이에 결혼하자, 루이즈의 부모는 딸이 일찍 시집간 것에 섭섭함을 느꼈고, 루이즈가 곁에 남아있는 것에 안심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다른 많은 왕족들처럼 루이즈도 제1차 세계 대전 때 친척들끼리 싸우는 것을 경험했다. 특히 영국에서 반 독일 감정이 형성되면서 조지 5세는 독일계 친척들에게 작위와 타이틀을 버리라고 강요했다. 루이즈는 그녀의 부모와 함께 독일에서의 모든 작위를 포기하고, 바텐베르크를 영어로 직역한 마운트배튼을 성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후에 레이디라는 경칭을 얻는다.

루이즈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자원해서 간호사로 프랑스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군인 및 선원 가족 협회와 군인 및 선원을 위한 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곧 간호사로 봉사하기 위해 적십자에 입대했다. 그녀는 뇌베르의 프랑스 군 병원에서 활동했으며, 1915년 3월부터 1917년 7월까지 몽펠리에 외곽의 팔라베스에 있는 전쟁 병원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영국 전쟁 훈장 및 승리 훈장과 영국 적십자사 훈장, 그리고 ''프랑스 감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2. 4. 혼담과 결혼

루이즈는 몇 번의 혼담이 오갔으며 그중 한 번은 약혼까지 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루이즈에 대한 첫 번째 혼담은 포르투갈 국왕과의 이야기였다. 루이즈가 20살 무렵 포르투갈 국왕이 청혼했을 때 루이즈는 이 청혼을 거절했다. 이에 에드워드 7세는 청혼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라고 루이즈의 부모에게 압력을 넣었는데, 이때 루이즈는 "홀아비나 국왕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1909년, 루이즈는 포르투갈의 마누엘 2세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사랑 때문에 결혼하고 싶다며 거절했다.

두 번째 혼담은 언니 앨리스의 시동생이었던 그리스의 크리스토퍼 공과의 혼담이었다. 앨리스는 동생이 그리스로 시집오길 바랐고 시동생과 잘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앨리스의 바람이었을 뿐이었다. 스무 살 때, 루이즈는 그리스의 크리스토퍼 공과 은밀히 약혼했지만 재정적인 이유로 관계를 포기해야 했다.

세 번째는 1차 대전 때 만난 한 젊은 화가와의 약혼이었다. 가족들이 "셰익스피어"라는 별명으로 부른 이 남자는 루이즈와 함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족의 반대에도 루이즈는 약혼하길 원했고 결국 약혼은 하되 발표는 안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약혼은 파혼으로 끝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루이즈는 부모가 찬성하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는 전쟁 초기에 사망했다.[1] 이후 전쟁 중 네베르에서 간호사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그녀는 파리에 거주하는 스코틀랜드 출신 예술가 알렉산더 스튜어트-힐과 관계를 시작했다. 부모가 자신의 선택에 실망할 것을 예상하여 루이즈는 그들의 약혼을 비밀로 했다. 결국, 그녀는 부모에게 털어놓았고, 부모는 이해하며 스튜어트-힐을 켄트 하우스에 두 번 초대했다.[1] 사실 그녀의 가족은 그를 기이한 외모 때문에 "셰익스피어"라고 부르며 그를 "괴짜"이고 "가식적인" 사람이라고 여겼다.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약혼한 두 사람은 전쟁 후에 결혼을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918년, 루이즈의 아버지는 스튜어트-힐이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와의 결혼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1]

34살의 루이즈는 결혼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고 가족들 역시 루이즈의 결혼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루이즈의 어머니인 빅토리아는 루이가 상속녀인 에드위나 애슐리와 결혼하자, 루이가 후에 노처녀로 늙어가서 경제적으로 어려울 누나 루이즈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루이즈 역시 조카들인 그리스 공주들의 샤프롱으로 따라다니면서 조카들의 신랑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3년 전 상처했던 스웨덴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태자가 루이즈에게 청혼을 한 것이었다. 루이즈는 무척이나 당황했으며, 왕태자비라는 엄청난 지위와 다섯 명이나 되는 전처의 자식들과 외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구스타프 아돌프의 청혼은 다른 가족들에게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으며 루이즈의 어머니 빅토리아는 루이즈에게는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구스타프 아돌프에게 충고까지 했다. 결국 루이즈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1923년, 루이즈의 어머니의 사촌 코노트의 마가렛 공주의 과부가 된 지 3년이 된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세자가 런던을 방문했고, 루이즈가 놀랍게도 그녀에게 구애를 시작했다.[1] 젊은 시절 루이즈는 결코 왕이나 과부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왕이 될 운명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루이즈의 결혼은 그리 편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점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구스타프 아돌프가 아이들에게 새어머니가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특히 고명딸인 잉리드는 친어머니가 죽은 지 겨우 3년밖에 안 되었는데 새어머니가 생긴다는 것을 이해 못 했다. 또 다른 문제점은 루이즈의 신분 문제였다. 루이즈는 독일 왕족 신분을 버렸고 겨우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일 뿐이었다. 그녀의 신분이 영국 귀족일 뿐이라면 루이즈와 구스타프 아돌프는 결혼할 수 없었다. 당시 스웨덴은 엄격한 귀천상혼제를 적용했기에 왕족 출신이 아닌 여성과 결혼할 경우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다. 이때문에 루이즈와 구스타프 아돌프의 결혼은 미묘한 문제였다. 1810년 스웨덴 왕위 계승법 (§5, Act 1810:0926)에 따라 스웨덴 왕가의 왕자는 "국왕의 지식과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사적인 스웨덴 또는 외국 남자의 딸과 결혼할 경우" (''med eller utan Konungens vetskap och samtycke, tager till gemål enskild svensk eller utländsk mans dotter'') 왕위 계승권을 상실했다. 약혼이 발표되자, 미래의 스웨덴 왕비가 될 신부가 헌법적으로 적격한지 여부에 대해 언론에서 활발한 논의가 벌어졌다.[2] 이에 대응하여, 스웨덴 외무부는 문제의 법을 인용하며 "사적인 스웨덴 또는 외국 남자의 딸"이라는 용어를 "주권 가족 또는 국제 관례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가족에 속하지 않은 사람" (''som icke vore medlem av suverän familj eller familj som enligt internationell praxis vore därmed likställd'')을 의미한다고 명확히 했고, 스웨덴 정부가 "이와 관련하여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의 지위에 대한 영국 정부의 설명을 요청했다"고 발표했다.[2] 외무부는 영국 정부의 질의에 대한 답변과 그 후의 문제 조사를 거쳐 왕세자의 미래 신부 선택이 왕위 계승법을 준수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임박한 결혼에 대한 논쟁을 종결했다고 발표했다.[2]

아이들 문제는 가족들이 결혼 전 만나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뚜렷했던 위의 아이들은 루이즈와 잘 어울리지 못했으며 특히나 잉리드는 매우 화를 냈다. 반면 어렸던 아이들은 좀 더 루이즈를 따랐는데, 특히 벨틸과 루이즈는 사이가 매우 좋아진다. 루이즈의 신분 문제는 결국 외교적 해결법을 찾게 된다. 영국의 조지 5세는 루이즈가 영국 왕실의 일원임을 보증했고 이에 구스타프 아돌프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5세와 외교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문에는 루이즈가 영국 왕실의 일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루이즈부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 이르는 모계 가계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923년 10월 27일, 스웨덴과 영국의 각 전권대사는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과 스웨덴 왕세자 구스타프 아돌프 전하의 결혼에 관한 대영제국과 스웨덴 간의 조약"에 서명했다.[3] 이 조약은 일부 내용에서 영국과 스웨덴의 국왕이 "각자의 왕가가 결혼을 통해 다시 동맹을 맺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여...다음 조항에 동의하고 체결했다"라고 명시했다. 이 조항들은 결혼이 런던에서 거행되고 정식으로 인증될 것이며, 부부의 재정적 합의는 "본 조약의 불가분의 일부"로 선언된 별도의 결혼 계약으로 표현될 것이고, 두 국가의 조약 비준은 1923년 11월 12일에 공식적으로 스톡홀름에서 교환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루이즈와 구스타프 아돌프는 1923년 11월 3일 성 제임스 궁전의 채플 로열에서 결혼했다. 1923년 11월 3일, 34세의 루이즈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채플 로열에서 조지 5세와 양쪽 왕가의 구성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세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루이즈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루이즈의 어머니 빅토리아의 사촌이었던 첫 번째 부인 코넛의 마거릿과 사별했으며, 5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루이즈는 결혼 초 임신했다가 딸을 사산한 후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2. 5. 스웨덴 왕세자비 시절

루이즈가 결혼했을 때, 스웨덴 궁정에는 중심이 되는 여성이 없었다. 시어머니 바덴의 빅토리아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외국에 나가 있었고, 구스타프 아돌프는 부인 코넛 공녀 마거릿을 잃은 후였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동생 빌헬름 왕자는 부인인 러시아의 마리야 표도로브나 여대공과 이혼한 상태였다. 결국 루이즈는 결혼과 동시에 왕실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이 되어 궁정을 이끌어야 했다. 다행히 루이즈는 언어에 소질이 있어 스웨덴어를 빨리 익혔고, 여러 사업에서 연설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루이즈와 구스타프 아돌프의 결혼은 모든 면에서 사랑의 결실이었고 매우 행복한 결혼으로 묘사되었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호감을 샀는데, 이는 그녀의 친절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어머니인 바덴의 빅토리아 여왕이 대부분의 시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여왕이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루이즈가 처음부터 많은 왕실의 임무를 맡게 되었음을 의미했는데, 당시 그녀는 꽤 수줍어하는 성격으로 묘사되었기에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 여왕이 사망한 후, 루이즈는 실제로 여왕이 되기 20년 전부터 국가의 공식적인 퍼스트 레이디로서 여왕의 모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는 루이즈가 여왕에게 전통적으로 할당된 모든 단체와 협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아야 함을 의미했다. 그녀는 스웨덴 적십자사, 크론프린세스 루이즈 어린이 병원, 유제니아 홈, ''Drottningens centralkommitté'' (여왕 비상 구호 위원회), ''Arbetsflitens Befrämjande'' (근면 장려), ''소피아헤메트'' 및 ''Svenska Hemslöjdsföreningarns Riksförbund'' (스웨덴 수공예 협회)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루이즈는 "결혼 전 평범한 사람으로서 실질적인 일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여러 기관의 후원자가 되는 것이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전직 간호사였고, 이를 자랑스럽게 지적했는데, 루이즈는 간호사의 근무 조건을 개선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루이즈의 외동딸은 1925년 5월 30일에 사산되었다.

1926-1927년에 왕세자 부부는 스웨덴의 이익을 위해 국제적인 세계 일주를 했는데, 특히 미국 여행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묘사되었다. 그들은 뉴욕시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전국을 여행했다. 대중의 관심이 높았고, 부부는 한 미국 백만장자의 환영회에서 초대받아 왕좌에 앉아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것을 거부한 후 "민주적"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솔트레이크시티에서의 인터뷰에서 루이즈는 성 평등을 믿으며 여성은 모든 직업과 비즈니스 세계,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은 지적으로 남성과 완전히 동등하며, 충분한 교육을 받으면 이 분야에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존경과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1934-35년에 그녀는 구스타프 아돌프와 함께 그리스, 중동,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오리엔트 투어와 유사한 여행을 했다. 1936년 루이즈는 영국의 조지 5세 장례식에 참석했다.

1945년 왕세자와 왕세자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루이즈는 적십자사에서 구호 활동을 했다. 그녀는 "빈테르유스" (겨울 빛) 캠페인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양초 및 기타 전기가 없는 광원을 수집했다. 또 다른 기여는 중립 방어군을 위한 왕세자비 선물 협회(Kronprinsessans Gåvokommitté för Neutralitetsvakten)였는데, 이는 중립 스웨덴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군인들에게 전국 각지에서 기증자들이 짠 양말, 스카프, 모자를 제공했다. 중립국의 시민으로서 루이즈는 또한 전쟁 중인 국경을 넘어 친척과 친구들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이 방식으로 많은 민간인에게 물품을 제공했는데, 예를 들어 "뮌헨의 두 노부인", 남편의 전 부인의 전 독일어 교사,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망명한 러시아의 타티아나 공주가 있었다. 루이즈의 도움이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1940년에 그녀는 소총 여단의 영국 육군 소령 마이클 스마일리에게 물품을 보냈는데, 그는 그의 장모인 앨리샤 피어슨의 도움을 요청한 후 포로 수용소에 갇혔다.

1923년 11월 3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왕실 예배당에서 국왕 조지 5세와 양가의 왕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루이즈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루이즈의 어머니 빅토리아의 사촌이었던 첫 번째 부인 코넛의 마거릿과 사별했으며, 5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핀란드겨울 전쟁 동안 루이즈는 울리크스달 궁전에 핀란드 전쟁 고아를 위한 집을 마련했다. 핀란드소련 사이의 겨울 전쟁 동안, 핀란드인 아이들이 스웨덴으로 피난 오자, 그녀는 봄 별장으로 사용하던 울리크달 궁전 부지 내에 아이들의 거처를 마련하고, 매일 아이들의 놀이에 참여했다. 전쟁 종결 후 아이들이 귀국한 후에도 그녀는 아이들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나중에 헬싱키를 방문하여 성장한 그들을 만났다.

2. 6. 제2차 세계 대전과 인도주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루이즈는 적십자사에서 구호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빈테르유스"(겨울 빛) 캠페인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양초 및 기타 전기가 없는 광원을 수집했다. 또한 중립 방어군을 위한 왕세자비 선물 협회(Kronprinsessans Gåvokommitté för Neutralitetsvakten)를 통해 중립국 스웨덴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군인들에게 전국 각지의 기증자들이 짠 양말, 스카프, 모자 등을 제공했다.

중립국 시민이었던 루이즈는 전쟁 중인 국가들의 국경을 넘어 친척과 친구들 사이에 소식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방식으로 많은 민간인에게 물품을 지원했는데, "뮌헨의 두 노부인", 남편의 전 부인의 전 독일어 교사,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한 러시아의 타티아나 공주 등이 그 예이다. 루이즈의 도움이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1940년에는 소총 여단의 영국 육군 소령 마이클 스마일리에게 물품을 보냈는데, 그는 장모인 앨리샤 피어슨의 도움을 요청한 후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핀란드에서 발발한 겨울 전쟁 동안 루이즈는 울리크스달 궁전에 핀란드 전쟁 고아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2. 7. 스웨덴 왕비 시절

루이즈 마운트배튼이 결혼했을 당시, 스웨덴 궁정에는 중심 역할을 하는 여성이 없었다. 시어머니 바덴의 빅토리아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외국에 있었고,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아내 코넛 공녀 마거릿을 잃은 후였으며, 그의 동생 빌헬름 왕자는 부인인 러시아의 마리야 표도로브나 여대공과 이혼한 상태였다. 따라서 루이즈는 결혼과 동시에 왕실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이 되어 궁정을 이끌어야 했다. 다행히 루이즈는 언어에 소질이 있어 스웨덴어를 빨리 익혔고, 여러 사업에 참여하고 연설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50년 시아버지 구스타프 5세가 사망하면서 루이즈는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다. 소심했던 루이즈는 자신이 "폐하(Your Majesty)"라고 불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다. 조지 6세의 장례식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장례식에 참석한 루이즈 앞으로 "스웨덴 왕비용 의전 차량"이 도착했지만, 루이즈는 그 차량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루이즈는 스웨덴에서 인기 있는 왕비가 되었다. 남편 구스타프 6세 아돌프처럼 소탈한 성격이었던 루이즈와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경호원 없이 단둘이 궁궐 밖을 산책하곤 했다.

루이즈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묘사되었으며, 왕비라는 이유만으로 찬사를 받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녀는 이러한 관심에 대해 "사람들은 나를 특별한 존재로 보지만, 나는 어제와 오늘 다르게 보이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루이즈는 시어머니 시대의 엄격한 궁정 의례를 싫어했고, 1954년에는 많은 오래된 관습을 민주화하는 새로운 지침을 제정했다. 1962년에는 궁정 알현을 폐지하고 전문직 여성들을 초청하는 "민주적인 여성 런치"로 대체했는데, 이 관습은 그녀의 사후에도 지빌라 공주에 의해 계속되었다. 루이즈는 스톡홀름 왕궁 내부를 개조하고 재장식하기도 했다.

루이즈는 왕족으로서 괴팍하고 다혈질적인 면도 있었지만, 마음이 착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나며 자기 비판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동정심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이는 정직함의 징표로 여겨졌다. 한 측근은 "저는 여왕을 '신사'라고 묘사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을 결코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루이즈는 스웨덴을 매우 사랑하고 애국심이 강했으며, 스웨덴의 비애국적인 관습에 종종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스웨덴의 발전된 정치 체제와 민주주의를 지지했고, 다른 어떤 정치 체제도 스웨덴처럼 국가에 행복한 발전을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또한 스웨덴 여성들을 칭찬했으며, 스웨덴보다 저속함이 적은 나라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루이즈는 여러 마리의 포메라니안 강아지를 키웠는데, 해외 방문 시 세관 통과에 문제가 없도록 몸에 숨기곤 했다. 그녀는 "그립스홀름 백작부인" 또는 "올슨 부인"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런던에서는 하이드 파크 호텔에 자주 묵었는데, 쇼핑을 위해 교통량이 많은 거리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나는 스웨덴 여왕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작은 카드를 가지고 다녔다. 이는 혹시라도 차에 치일 경우 사람들이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963년, 루이즈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를 국빈 방문하여 샤를 드골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만찬에서 그녀는 "제 서투른 프랑스어를 용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 프랑스어는 1914년 참호에서 사용하던 프랑스어입니다."라고 말했다. 드골은 나중에 파리에서 열린 그녀의 추도식에 참석했는데, 이는 프랑스 대통령이 스웨덴 교회에 방문한 첫 번째 경우이자 드골이 그러한 종류의 추도식에 참석한 두 번뿐인 경우 중 하나였다.

루이즈는 1965년 3월 7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2. 8. 사망

루이즈 여왕은 1965년 3월 7일, 심각한 병을 앓은 후 응급 수술을 받고 스웨덴 스톡홀름의 성 예란 병원에서 사망했다. 1964년 12월 노벨상 시상식에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루이즈 여왕은 남편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마거릿 왕세자비와 함께 스톡홀름 북쪽에 있는 솔나의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스웨덴 솔나의 칼스보르 섬에 있는 루이즈, 구스타프 아돌프, 마거릿의 묘

3. 평가

루이즈는 괴짜로도 알려져 있었다. 몇 마리의 포메라니안을 키웠고 외국 여행에도 데려갔지만, 문제를 일으킬까 봐 사람 앞에서는 개를 숨기곤 했다(그녀는 항상 그리프스홀름 백작 부인이나 올손 부인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또한 매우 신경질적인 면도 있었다. 런던 체류 시 루이즈는 신호 위반을 하거나 갑자기 길을 건너려 했고, 어느 날 결국 버스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루이즈는 "저는 스웨덴 왕비입니다"라고 인쇄된 작은 카드를 휴대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느냐는 동생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의 질문에 "만약 제가 길에서 쓰러져 의식을 잃더라도, 아무도 제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거예요. 제 핸드백을 연 사람이 이 카드를 찾아낼 거예요"라고 답했다.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루이즈는 수행원에게 "스웨덴 왕비"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다니게 했다고 한다.

루이즈는 스웨덴 국민에게 사랑받았고, 그녀의 유머와 현실적인 삶(구스타프 6세 아돌프도 그랬다)을 높이 평가받았다. 스톡홀름 시내에서는 국왕 부부가 단둘이 산책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경호원은커녕, 궁에서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는 부부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스톡홀름의 노부부였고, 왕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온화하게 모자를 들어 인사를 했다. 루이즈는 스톡홀름의 구시가지에서 쇼핑을 즐겼고, 매주 궁에서 와서 말 그대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스톡홀름 시민들은 붐비는 가게 안에서 뒤돌아보면 갑자기 옆에 왕비가 서서 직물이나 테이블보를 고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신문을 펼쳐 보면, 티아라를 쓴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왕비가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만찬에 초대했다는 사진 기사를 발견했다.

1963년, 루이즈는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함께 프랑스를 공식 방문하여 대통령 샤를 드 골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만찬 자리에서 루이즈는 대통령에게 "저의 형편없는 프랑스어를 용서해 주세요. 제 프랑스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에 참호에서 배운 것이니까요."라고 말했다.. 드 골은 이후 파리에서 열린 왕비 루이즈 추모식에 참석했다.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 내 스웨덴 교회를 방문한 첫 번째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드 골이 이러한 종류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4. 칭호 및 영예

루이즈 마운트배튼은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4. 1. 영예

국가훈장
--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성장[5]
-- 덴마크엘리펀트 훈장 기사
-- 핀란드백장미 훈장 칼라 대십자
-- 태국차크리 왕가 훈장 체인 부착 부인[6]
-- 프랑스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프랑스 감사 메달 수훈자
-- 독일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 네덜란드네덜란드 사자 훈장 기사 십자 대십자, 율리아나 여왕 즉위 메달 수훈자
-- 스웨덴세라핌 훈장 단원, 구스타프 5세 국왕의 왕실 가족 훈장,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의 왕실 가족 훈장, 구스타프 5세 국왕 90세 생일 배지 메달 수훈자, 구스타프 5세 국왕 70세 생일 배지 메달 수훈자
-- 영국로열 레드 크로스 수훈자, 영국 전쟁 메달 수훈자, 승전 메달 수훈자, 자원 의료 서비스 메달 수훈자


참조

[1] 서적 Alice, Princess Andrew of Greece Macmillan 2003
[2] 서적 Ny svensk historia, Gustaf V och hans tid 1919–1927 1979
[3] 간행물 Treaty between the United Kingdom and Sweden for the Marriage of Lady Louise Mountbatten with His Royal Highness Prince Gustaf Adolf Crown Prince of Sweden http://www.fco.gov.u[...]
[4] LIBRIS
[5] 웹사이트 Anfragebeantwortung http://www.parlament[...] 2012-04-24
[6] 간행물 แจ้งความสำนักนายกรัฐมนตรี เรื่อง พระราชทานเครื่องราชอิสริยาภรณ์ https://web.archive.[...] Royal Thai Government Gazette 1960-12-28
[7] 웹사이트 Het geheugen van Nederland http://www.geheugenv[...] geheugenvannederland.nl
[8] Britannica Battenberg family
[9] 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The Complete Genealogy Pimlico
[10] NDB Alexander
[11] 서적 Das Haus Hessen: Eine europäische Familie Kohlhammer Verlag
[12] NDB Ludwig IV.
[13] 문서 루이즈의 세례명중 알렉산드라는 가끔 이모인 [[헤센의 알릭스|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이름을 따왔다고 추측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루이즈가 태어났을 때 알렉산드라 황후는 아직 러시아 황제와 결혼하기 전이었고, 이때의 이름은 알릭스였다. 알릭스라는 이름은 어머니 앨리스 공주의 이름에서 따온것이다. 루이즈의 알렉산드라라는 세례명은 어머니의 외숙모인 알렉산드라 왕비의 이름이거나 루이즈가 태어나기전에 죽은 할아버지 알렉산더의 이름에서 따온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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