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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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은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아들이자 샤를 6세의 동생으로, 1372년에 태어났다. 그는 1392년 샤를 6세의 정신 이상으로 섭정권 다툼에 휘말렸으며,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 이후에는 그의 아들 장 1세와 대립했다. 루이는 형수 이자보 드 바이에르와 불륜 관계를 맺어 인망을 잃었고, 교회 대분열에서 아비뇽 교황청을 지지했다. 1407년,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들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암살은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발렌티나 비스콘티와 결혼하여 샤를, 필리프, 장을 낳았으며,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의 조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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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루이 1세 |
원어 이름 | Louis Ire |
작위 | |
작위 | 오를레앙 공 |
통치 기간 | |
재위 기간 | 1392년 - 1407년 |
가문 | |
가문 | 발루아=오를레앙 가문 |
출생 가문 | 발루아 가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샤를 5세 |
어머니 | 잔 드 부르봉 |
배우자 | 발렌티나 비스콘티 |
자녀 | 샤를 장 마르그리트 장 (서자)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372년 3월 13일 |
출생지 | 파리, |
사망일 | 1407년 11월 23일 |
사망지 | 파리,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작위 계승 정보 | |
작위 | 아스티 백작 (1389년–1407년) 베르튀 백작 (1389년–1407년, 아내를 통해) 앙굴렘 백작 (1394년–1407년) 블루아 백작 (1397년–1407년) 페리고르 백작 (1400년–1407년) 드뢰 백작 (1402년–1407년) 시니 백작 (1402년–1407년) 룩셈부르크 공작 (1402년–1407년) 수아송 백작 (1405년–1407년)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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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루이 1세는 백년 전쟁 시기 프랑스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다. 1389년 형 샤를 6세의 자문 회의에 참석하며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으나, 1392년 샤를 6세가 정신 이상을 겪으면서 섭정 정치와 외교 문제로 용담공 필리프와 대립했다. 또한 형수인 이사보 왕비와의 불륜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1]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 ''루이 도를레앙이 정부를 공개하다''(c. 1825–26)는 루이 1세의 방탕한 평판을 보여준다.
루이 1세는 밀라노 공국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딸 발렌티나 비스콘티와 결혼하여 제노바 원정을 계획했지만, 플랑드르 백작이자 제노바와 통상 관계에 있던 용담공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교회 대분열에서 루이 1세는 아비뇽 교황청을, 용담공은 로마 교황청을 지지했다. 1400년 로마왕벤체슬라오 폐위 후, 용담공은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루프레히트를 지지했지만, 루이 1세는 벤체슬라오를 지지하는 등 모든 면에서 대립했다.
1404년 용담공이 사망하고 장 1세(공포공)가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하자, 루이 1세는 이 사촌과도 대립하게 되었다.[2] 1405년 6월, 칼레를 포위한 공포공의 원조 요구를 거절하고, 7월에는 공포공이 파리로 군대를 이끌고 접근하자, 루이 1세는 이자보 왕비와 왕세자 루이를 데리고 뫼랑으로 도망갔다. 이후 베리 공작의 중재로 공포공과 화해하고 파리로 돌아왔지만, 공포공의 측근을 정부에서 내쫓고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여 공포공의 분노를 샀다.
1407년 11월 23일, 루이 1세는 파리 거리에서 공포공의 측근들에게 암살당했다. 공포공은 정부가 루이 1세에게 장악되는 상황에 대한 초조함 때문에 암살을 실행했다고 한다. 이후 공포공은 자기 변호를 통해 추궁을 피하고, 1408년 샤를 6세로부터 사면을 받았으며, 1409년 왕세자의 후견인으로서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루이 1세의 아들 샤를과 베리 공작 등이 반발하여 1410년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등을 더한 아르마냐크 파를 형성하여 공포공 등의 부르고뉴 파와 전면 충돌했다.[3]
1389년, 루이는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딸 발렌티나 비스콘티와 결혼했다. 루이 1세와 발렌티나 비스콘티 사이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들 | 1390년 3월 25일 | 1390년 3월 25일 | 파리 생 폴 교회에 매장됨. |
루이 | 1391년 5월 26일 | 1395년 9월 | 파리 젤레스탱 교회에 매장됨. |
존 | 1393년 9월 | 1393년 10월 31일 이전 | 파리 젤레스탱 교회에 매장됨. |
샤를, 오를레앙 공작 | 1394년 11월 24일 | 1465년 1월 4일 |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아버지. |
필리프, 베르튀 백작 | 1396년 7월 21/24일 | 1420년 9월 1일 | 사생아 필리프 앙토니를 남김. |
장, 앙굴렘 백작 | 1399년 6월 24일 | 1467년 4월 30일 | 프랑수아 1세의 할아버지. |
마리 | 1401년 4월 | 출생 직후 | |
마르그리트 | 1406년 12월 4일 | 1466년 4월 24일 | 브르타뉴의 리샤르와 결혼. 브르타뉴 공작과 샬롱-알레(Chalon-Arlay)의 영주, 그리고 오렌지 공의 조상. |
루이는 그의 정부 마리에트 당기앵를 통해 사생아 장 드 뒤누아 (1402–1468)를 두었으며, 그는 롱그빌 공작의 조상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
1372년 3월 13일, 루이는 프랑스 왕 샤를 5세와 부르봉의 조안나의 둘째 아들이자 샤를 6세의 동생으로 태어났다.1374년, 루이는 헝가리 왕국의 추정 상속인이었던 캐서린과 약혼했다. 루이와 캐서린은 캐서린의 아버지인 헝가리의 루이 1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헝가리 또는 폴란드를 통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1378년 캐서린이 사망하면서 결혼 협상은 종료되었다. 1384년, 보스니아의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아버지와 루이가 마리아와 결혼할 가능성에 대해 협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마리아가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와 약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마리아와 지기스문트의 약혼을 무효화하는 면죄부를 발행했고, 1385년 4월에는 루이와 마리아 사이에 대리 결혼이 거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혼은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지지하는 헝가리 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대리 결혼 4개월 후, 지기스문트가 헝가리를 침공하여 마리아와 결혼했고, 이는 결국 루이가 헝가리 왕으로 통치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2. 2. 궁정 내 역할과 백년전쟁
루이 1세는 백년 전쟁 동안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1392년, 그의 형 광인 샤를이 정신 질환 발작을 겪으면서 독립적인 통치가 어려워졌다. 1393년, 섭정 이사보 여왕이 주재하는 섭정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루이는 이 위원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루이는 왕실 자녀들의 섭정 및 후견인 자리를 놓고 용담공 필리프와 그의 아들 장 무공과 대립했다. 이들의 갈등은 국가의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다. 루이는 왕의 형이라는 점에서 초기에는 유리했지만, 여성 편력과 이사보 여왕과의 불륜 소문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후 샤를 6세의 자녀들은 양측에 의해 납치와 회복을 반복했고, 장 무공이 도팽 루이의 후견인과 프랑스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루이는 장의 통치를 방해하기 위해 칼레 포위에 사용될 자금을 낭비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이 사건 이후 장과 루이는 공개적인 위협을 가했고, 장 드 베리 공작의 중재로 내전은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1393년에는 불타는 남자들의 무도회로 알려진 비극적인 가면 무도회에서 4명의 무용수가 사망하는 사건에 루이가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루이가 들고 있던 횃불이 인화성이 높은 의상에 가까이 다가가 불이 붙어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샤를 6세는 이 무도회에서 같은 의상을 입고 있었으나, 운 좋게 살아남았다.
1388년 샤를 6세의 친정이 시작되자, 루이는 1389년 형의 자문 회의에 참석하며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392년 형의 정신 이상으로 정무가 불가능해지자, 섭정권과 외교를 두고 용담공과 대립했다. 또한, 형수인 이자보 왕비와의 불륜으로 평판을 잃었다.[1]
오를레앙 공작(루이 1세)과 용담공(필리프 2세)은 외교 문제에서 충돌했다. 오를레앙 공작은 밀라노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딸 발렌티나 비스콘티와 결혼하여 제노바 원정을 계획했지만, 플랑드르 백작이자 제노바와 통상 관계에 있던 용담공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교회 대분열에서도 오를레앙 공작은 아비뇽 교황청을 지지한 반면, 용담공은 로마 교황청을 지지했다. 1400년 로마왕벤체슬라오가 폐위되자, 용담공은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루프레히트를 지지했지만, 오를레앙 공작은 벤체슬라오를 지지하는 등 모든 면에서 대립했다.
내정에서도 두 사람은 중앙 정부에 자신의 파벌 관리를 파견하여 세력 확장에 힘썼다. 1401년 양측은 파리 주변에 군대를 집결시켜 충돌 직전까지 갔지만, 이자보 왕비와 베리 공작 등의 중재로 화해하여 내전은 피했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은 샤를 6세의 명령으로 정치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계획하고 군자금을 명목으로 징수한 세금을 사적으로 유용하려 했다. 용담공이 징세에 반대하면서 대립은 계속되었다. 1404년 용담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장 1세(공포공)가 부르고뉴 공작위를 계승하자, 오를레앙 공작은 이 사촌과도 대립하게 되었다.[2]
1405년 6월, 오를레앙 공작은 칼레를 포위한 공포공의 원조 요구를 거절했다. 7월에 공포공이 파리로 군대를 이끌고 접근하자, 오를레앙 공작은 이자보 왕비와 왕세자 루이를 데리고 뫼랑으로 도망갔다. 왕세자가 공포공에게 빼앗겼음에도 뫼랑에 머물렀지만, 베리 공작의 중재로 10월에 공포공과 화해하고 이자보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은 베리 공작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공포공의 측근을 정부에서 내쫓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여 궁정 내 지지자를 확대했기 때문에 공포공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은 파리의 거리에서 공포공의 측근들에게 암살당했다. 공포공은 암살을 실행한 이유로 정부가 오를레앙 공작에게 장악되는 상황에 대한 초조함을 들었다. 공포공은 자기 변호를 통해 추궁을 피했고, 1408년 샤를 6세로부터 사면을 받았으며, 1409년 왕세자의 후견인으로서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 샤를과 베리 공작 등이 반발하여 1410년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등을 포함한 아르마냐크 파를 형성하여 공포공 등의 부르고뉴 파와 전면 충돌했다.[3]
2. 3. 암살
1407년 11월 20일 일요일, 대립하던 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과 장 1세는 프랑스 궁정 앞에서 화해를 약속하는 엄숙한 맹세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불과 사흘 뒤인 11월 23일, 루이는 파리 거리에서 장 1세의 명령에 의해 잔혹하게 암살당했다.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의 하인인 라울레 드 앙케통빌이 이끄는 15명의 복면을 한 범죄자들에게 말을 타던 중 찔려 살해되었으며, 시종 한 명도 중상을 입었다.[3]
공포공 장 1세는 파리 시민과 대학교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심지어 살인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존은 이를 부인하는 대신, 소르본 대학교의 학자 장 프티에게 살인을 연설로 정당화하도록 하여, 이를 폭군 살해로 묘사하게 했다.
루이의 살해는 피비린내 나는 불화와 부르고뉴와 프랑스 왕가 사이의 내전을 촉발하여, 이후 28년 동안 프랑스를 분열시켰으며,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3]
공포공이 암살을 실행한 이유는 정부가 오를레앙 공작에게 장악되는 상황에 초조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포공은 자기 변호를 통해 능숙하게 추궁을 피했고, 1408년에 샤를 6세로부터 사면받았을 뿐만 아니라, 1409년에는 왕세자의 후견인으로서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에 오를레앙 공작의 유자 샤를과 베리 공작 등이 반발하여 1410년에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등을 더한 아르마냐크 파를 형성하여 공포공 등의 부르고뉴 파와 전면 충돌했다.[3]
3. 결혼과 자녀
1389년, 루이는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딸이자 사촌인 발렌티나 비스콘티와 결혼했다.[3]
두 사람 사이에는 9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딸 | 1390년 3월 25일 | 1390년 3월 25일 | 파리 생 폴 교회에 매장됨. |
루이 | 1391년 5월 26일 | 1395년 9월 | 파리 젤레스탱 교회에 매장됨. |
아들 | 1392년 | 1392년 | |
장-필립 | 1393년 9월 | 1393년 10월 31일 이전 | 뱅센 성에서 사망, 파리 젤레스탱 교회에 매장됨. |
샤를 | 1394년 11월 24일 | 1465년 1월 4일 | 오를레앙 공작, 루이 12세의 아버지[3] |
필리프 | 1396년 7월 21/24일 | 1420년 9월 1일 | 베르튀 백작[3] |
장 | 1399년 6월 24일 | 1467년 4월 30일 | 앙굴렘 백작, 프랑수아 1세의 할아버지[3] |
마리 | 1401년 4월 | 1401년 4월 | |
마르그리트 | 1406년 12월 4일 | 1466년 4월 24일 | 에탕프 백작 리샤르와 결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어머니이자 안 여공작의 할머니. |
또한, 루이는 그의 정부 마리에트 당기앵과의 사이에서 사생아인 장 드 뒤누아 (1402년–1468년)를 낳았으며, 그는 롱그빌 공작의 조상이 되었다.
4. 가계
샤를 5세
장 2세
필리프 6세[1]
잔 드 부르고뉴
본
요한 1세 룩셈부르크
엘리슈카
잔 드 부르봉
피에르 1세
루이 1세
마리 다베르뉴
이자벨
샤를[2]
마오 드 샤티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