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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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코카(流行歌)는 문자 그대로 "유행하는 노래"를 의미하며, 192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서 레코드와 라디오를 통해 대중화된 대중음악의 한 유형을 지칭한다. 191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형성, 발전, 전성기를 거치며, 서양 음악과 일본 전통 음악을 융합한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류코카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전쟁 시기에는 프로파간다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전후에는 다양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노래들이 등장했다. 1960년대 초 LP 레코드 보급과 함께 쇠퇴하며, 현재는 음반 복각 작업을 통해 그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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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사토》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동요로, 일본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에서는 '고향'이라는 제목으로 불리며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활용되고 있다.
류코카 | |
---|---|
기본 정보 | |
스타일 기원 | 전통 팝, 서양 고전 음악, 오페레타, 성악, 도도이츠, 민요, 재즈, 블루스, 탱고 |
문화적 기원 | 1920년대, 일본 |
파생 장르 | 엔카, 가요곡, 트로트 |
추가 정보 | |
관련 토픽 | 민요, 온도, 도도이츠, 로쿄쿠, 가요 로쿄쿠, 재즈, 클래식 음악, 엔카, 가요곡 |
2. 어원 및 정의
류코카(流行歌)는 문자 그대로 "유행하는 노래"를 의미한다. 넓은 의미로는 특정 시기에 유행한 모든 노래를 지칭하며, 그 기원은 문헌상 헤이안 시대의 이마요 등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3]
마츠이 스마코가 부르고 나카야마 신페이가 작곡한 카츄샤의 노래는 1914년에 발표되어 류코카의 시초로 여겨진다. 이 곡은 연극 부활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큰 인기를 얻었으며, 레코드는 2만 장이 팔렸다.[11]
넓은 의미로는 일본에서 레코드 발매를 통해 상업적으로 유행한 독창 또는 중창 악곡을 말한다. 히트곡 전반을 아우르며, 비슷한 경향을 가진 외국 대중가요도 포함된다. 특히 각 시대나 연도의 시대상을 정리한 출판물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53]
좁은 의미로는 일본에서 상업적으로 제작된 대중가요 중, 서구의 포크송 등 새로운 음악이 유입되어 장르가 다양해지기 이전인 쇼와 초기부터 1950년대 말(쇼와 30년대 초반)까지의 가곡을 가리킨다. '하야리우타'라고도 불린다.[53]
과거의 류코카를 회상하는 의미로 '추억의 멜로디(나츠메로)'라는 용어가 사용된다.[53] 1914년(다이쇼 3년), 칸나가 아키츠키의 레코드 '유행가·소나무의 소리'가 발매되면서 유행가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53]
3. 역사
나카야마 신페이는 일본 전통 음악을 서양식 오선보에 담아내는 데 주력했으며, 센도 코우타(뱃사공 노래) 등 민요풍의 노래를 작곡했다.
1928년, 일본 빅터, 일본 콜롬비아 등 외자계 레코드 회사가 설립되면서, 마이크로폰을 사용한 전기 녹음 방식의 '''레코드 가요'''가 탄생했다. 아사쿠사 오페라 출신의 니무라 테이이치는 유행가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성악가였던 사토 치야코는 빅터에서 1928년 "하부의 항구"를 녹음하며 본격적인 유행 가수로 등장했다. 1929년에는 "도쿄 행진곡"을 히트시켜 가요계의 여왕이자 "일본 최초의 레코드 가수"라는 영예를 얻게 된다.[17]
1931년, 콜롬비아에서 유행가 제작에 관여했던 고가 마사오는 도쿄 음악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음악부) 학생인 후지야마 이치로[57]와 함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를 발표했다. 전기 마이크의 특성을 활용한 "크룬 창법"으로 감성을 담은 노래는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 시기에는 고타 카츠타로, 이치마루 등 게이샤 출신 가수(게이샤 가수)들도 인기를 얻었다.
1930년대 초, 콜롬비아, 테이치쿠, 폴리도르 3사가 유행가 시장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다.
빅터는 나카야마 신페이가 유행가와 맞지 않아 주춤했으나, 사사키 슌이치의 등장과 고타 승타로 등이 활약했다. 킹은 도카이린 타로와 계약했지만, 폴리도르와의 이중 계약으로 큰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유행가는 영화와 연동되어 보급되었다. "구두걸이 소곡", "여행의 밤바람" 등 영화 주제가, 배우의 노래 녹음, 인기 가수의 영화 출연, "백만인의 합창", "뒷골목 심포니" 등 음악 영화 제작이 그 예이다.
"아카기의 자장가", "아내의 사랑 길", "뒷골목 인생" 등 정통 엔카도 많이 만들어졌다. 시사 문제를 다룬 "천국에 맺는 사랑", "육탄 삼용사", 유행을 도입한 "하이킹의 노래", "하부의 항구", "스키의 노래" 등도 발표되었다.
"기온 소곡", "다절절", "도쿄 음두" 등 지방 풍물을 노래하는 "신민요"도 등장했다. 고타 승타로, 이치마루, 미치노, 신바시 키요조 등 게이샤 출신 가수(게이샤 가수)들은 "섬의 소녀", "메이지 일대 여인" 등 일본 음악 요소를 강하게 가진 곡을 불렀다. 딕 미네, 아와야 노리코 등은 "다이나", "술이 마시고 싶어", "이별의 블루스" 등 서양 팝 음악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불렀다.
'''대륙 가요'''는 만주나 상하이 등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한 노래로, 여행자의 애수, 망향, 남녀의 이별 등을 노래했다. 마츠다이라 아키라의 "서둘러 마차"가 이 장르를 개척했다.
1936년, NHK는 "에로 구로 난센스"의 영향을 받은 ''류코카''에 대항하기 위해 国民歌謡|こくみんかよう|국민가요일본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시작했지만, 1937년 7월경부터는 전쟁 노래를 방송하기 시작했다.[20]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후 많은 전쟁 노래가 만들어졌지만, 기리시마 노보루와 후타바 아키코가 부른 高原の月|코겐노 쓰키|고원의 달일본어은 서정적인 노래로 인기를 얻었다.[32]
전쟁 후, 전쟁 중의 노래들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도 금기시되었다.[20]
패전 후, 일본에서는 해방적인 분위기를 담은 노래들이 인기를 얻었다. 나미키 미치코의 リンゴの唄|링고노 우타|사과의 노래일본어는 1945년 영화 '소요카제'에 삽입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핫토리 료이치는 상하이에서 귀국한 후 일본 ''팝푸스'' 음악 발전에 기여했다.[26] 카사기 시즈코의 東京ブギウギ|도쿄 부기우기일본어 (1947년)는 핫토리 료이치가 작곡하여 인기를 얻었다.
코세키 유지는 長崎の鐘|나가사키노 카네|나가사키의 종일본어과 ひめゆりの塔|히메유리노 토|히메유리 백합탑일본어을 작곡했다.[37] 나가이 다카시의 저서 ''나가사키의 종''을 바탕으로 한 長崎の鐘|나가사키노 카네일본어는 1949년 후지야마 이치로가 불렀다.
미소라 히바리, 카스가 하치로, 미하시 미치야, 시마쿠라 치요코 등 새로운 가수들이 등장하며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8]
프랭크 나가이의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유라쿠초데 아이마쇼|유락초에서 만나요일본어 (1957년)는 요시다 타다시가 작곡하여 인기를 얻었다.
사카모토 큐, 더 피너츠, 히로타 미에코 등은 처음에는 미국 곡을 커버했지만, 점차 자신의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41]
1963년, 미소라 히바리, 에리 치에미, 유키무라 이즈미 등 이전 인기 가수들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가운데, 사카모토 큐는 見上げてごらん夜の星を|미아게테 고란 요루노 호시오|밤하늘을 올려다보며일본어를 발표했다.[42] 1963년 6월, 사카모토 큐의 上を向いて歩こう|우에오 무이테 아루코일본어는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 Sukiyaki|스키야키영어라는 제목으로 1위를 차지했다.
1962년에는 SP 레코드의 생산이 중단되었다. LP 레코드가 SP 레코드를 대체했으며, 이는 유행가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60년대 초를 기점으로 유행가는 종언을 맞이했다. 포크송, 비틀즈 등 새로운 음악이 유입되었고, 그룹 사운즈 등이 생겨나면서 일본 음악계는 다양화되었다. 유행가에 종사했던 가수, 작사가, 작곡가들은 엔카 가수로 전향하거나 다른 분야로 진출했다.
3. 1. 형성기 (1910년대 ~ 1920년대 초)
1914년, 마츠이 스마코가 부르고 나카야마 신페이가 작곡한 카츄샤의 노래는 류코카의 시초로 여겨진다. 이 곡은 연극 부활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큰 인기를 얻었으며, 레코드는 2만 장이 팔렸다.[11]
나카야마 신페이는 일본 전통 음악을 서양식 오선보에 담아내는 데 주력했으며, 센도 코우타(뱃사공 노래) 등 민요풍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의 1921년 노래 센도 코우타|뱃사공 노래|일본어는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었지만, 처음에는 바이올린 엔카 가수 돗토리 슌요|鳥取春陽|Tottori Shun'yō|1900–1932일본어가 오케스트라를 동반하여 커버한 것으로 가장 유명했다.[16]
이 시기의 노래는 신민요(新民謡, 새로운 민요)라고도 불렸으며,[16] 엔카 가수들이 바이올린 반주에 맞춰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3. 2. 발전기 (1920년대 후반 ~ 1930년대)
1928년, 일본 빅터, 일본 콜롬비아 등 외자계 레코드 회사가 설립되면서, 마이크로폰을 사용한 전기 녹음 방식의 '''레코드 가요'''가 탄생했다. 아사쿠사 오페라 출신의 니무라 테이이치는 유행가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니무라는 다이쇼 말기부터 재즈·송을 닛포논으로 녹음했고, 1928년에 발표한 재즈(이지 리스닝에 해당하는 경음악)에 일본어 가사를 붙인 "푸른 하늘", "아라비아의 노래"가 히트하여, 이다 이치로의 밴드와 함께 재즈 가수로 활동한다.[14]
한편, 성악가였던 사토 치야코는 빅터에서 1928년 "하부의 항구"를 녹음하며 본격적인 유행 가수로 등장했다. 1929년에는 "도쿄 행진곡"을 히트시켜 가요계의 여왕이자 "일본 최초의 레코드 가수"라는 영예를 얻게 된다.[17]
1931년, 콜롬비아에서 유행가 제작에 관여했던 고가 마사오는 도쿄 음악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음악부) 학생인 후지야마 이치로[57]와 함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를 발표했다. 전기 마이크의 특성을 활용한 "크룬 창법"으로 감성을 담은 노래는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 시기에는 고타 카츠타로, 이치마루 등 게이샤 출신 가수(게이샤 가수)들도 인기를 얻었다.
3. 3. 전성기 (1930년대 ~ 1940년대 초)
1930년대 초, 콜롬비아, 테이치쿠, 폴리도르 3사가 유행가 시장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다. 각 회사의 소속 가수와 주요 작곡가, 작사가는 다음과 같다.
회사 | 소속 가수 | 주요 작곡가 | 주요 작사가 |
---|---|---|---|
콜롬비아 | 마츠다이라 아키라, 나카노 타다하루, 이토 히사오, 세키 타네코, 미스 콜롬비아, 아와야 노리코 | 고가 마사오, 에구치 야시 | 사이조 야소, 사토 소노스케 |
테이치쿠 | 후지야마 이치로, 딕 미네, 쿠스노키 시게오 | 고세키 유지, 핫토리 료이치 | 사토 하치로, 후지타 마사토 |
폴리도르 | 도카이린 타로 | 타케오카 노부유키, 아베 타케오 |
빅터는 나카야마 신페이가 유행가와 맞지 않아 주춤했으나, 사사키 슌이치의 등장과 고타 승타로 등이 활약했다. 1940년 이후 하이다 카츠히코가 인기를 얻으며 빅터의 간판 가수가 되었다. 킹은 도카이린 타로와 계약했지만, 폴리도르와의 이중 계약으로 큰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유행가는 영화와 연동되어 보급되었다. "구두걸이 소곡", "여행의 밤바람" 등 영화 주제가, 배우의 노래 녹음, 인기 가수의 영화 출연, "백만인의 합창", "뒷골목 심포니" 등 음악 영화 제작이 그 예이다.
"아카기의 자장가", "아내의 사랑 길", "뒷골목 인생" 등 정통 엔카도 많이 만들어졌다. 시사 문제를 다룬 "천국에 맺는 사랑", "육탄 삼용사", 유행을 도입한 "하이킹의 노래", "하부의 항구", "스키의 노래" 등도 발표되었다.
"기온 소곡", "다절절", "도쿄 음두" 등 지방 풍물을 노래하는 "신민요"도 등장했다. 고타 승타로, 이치마루, 미치노, 신바시 키요조 등 게이샤 출신 가수(게이샤 가수)들은 "섬의 소녀", "메이지 일대 여인" 등 일본 음악 요소를 강하게 가진 곡을 불렀다. 딕 미네, 아와야 노리코 등은 "다이나", "술이 마시고 싶어", "이별의 블루스" 등 서양 팝 음악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불렀으며, 이는 카사기 시즈코, 에리 치에미, 유키무라 이즈미 등으로 이어져 팝스 가요의 원류가 되었다.
'''대륙 가요'''는 만주나 상하이 등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한 노래로, 여행자의 애수, 망향, 남녀의 이별 등을 노래했다. "'''만주물'''", "'''상하이물'''", "'''마차물'''"이라고도 불렸다. 마츠다이라 아키라의 "서둘러 마차"가 이 장르를 개척했다. 대륙 가요는 전쟁에 관한 묘사가 없는 서정가, 연애가였으며, 1934년 발생하여 1941년경부터 수가 줄어 패전 전에 소멸했다. 대륙 가요의 서정은 전후 엔카의 주제 중 하나인 "북으로의 방랑"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3. 4. 전시 가요 시대 (1930년대 후반 ~ 1945년)
1936년, NHK는 "에로 구로 난센스"의 영향을 받은 ''류코카''에 대항하기 위해 国民歌謡|こくみんかよう|국민가요일본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시작했지만, 1937년 7월경부터는 전쟁 노래를 방송하기 시작했다.[20] 이 프로그램은 1941년에 われらのうた|와레라노 우타|우리들의 노래일본어로, 1942년에는 国民合唱|こくみんがっしょう|국민합창일본어으로 개명되었다.[20] 전쟁 중의 노래는 戦時歌謡|센지 카요|전시가요일본어라고 불렸다. 전쟁 중에 많은 음악가들이 전쟁 노래를 작곡하도록 강요받았다. 고세키 유지는 많은 전쟁 노래를 작곡했고, 나중에 전쟁 협력자로 비판받았지만,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다.[27] 고세키는 1937년에 露営の歌|로에이노 우타|노영의 노래일본어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B면 곡이었지만 60만 장이 팔렸다.[28] 1937년의 노래 愛国行進曲|아이코쿠 코신쿄쿠|애국 행진곡일본어은 100만 장이 팔렸다.[29] 그러나 핫토리 료이치와 같은 일본 재즈 음악가들은 전쟁 노래를 작곡하는 데 열의가 없는 듯했다.[30] 그의 아들 핫토리 가쓰히사는 자신이 반민족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일본 전쟁 노래가 음악적으로 ''엔카''였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고 싶어도 기술적으로 전쟁 노래를 작곡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30]한편, 전 엔카 가수 오카 하루오의 데뷔곡 国境の春|코쿄노 하루|국경의 봄일본어은 1939년에 발매되었다. 다바타 요시오도 1939년에 노래 島の舟唄|시마노 후나우타|섬의 배 노래일본어로 데뷔했다. ''로쿄쿠''(naniwa-bushi)는 국위 선양을 위해 사용되었다.[31]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후 많은 전쟁 노래가 만들어졌지만, 기리시마 노보루와 후타바 아키코가 부른 高原の月|코겐노 쓰키|고원의 달일본어은 서정적인 노래로 인기를 얻었다.[32]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아투 전투, 과달카날 전역, 마셜 제도 전역과 같은 무서운 광경을 주제로 했다.[30] 오카는 암본섬으로 갔지만 병에 걸려 곧 일본으로 돌아왔다. ''naniwa-bushi''의 ''코부시''를 사용해 노래를 부른 우에하라 빈은 뉴기니 전역에서 사망했고, 후지야마는 인도네시아에서 포로로 잡혔다.[33]
전쟁 후, 전쟁 중의 노래들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도 금기시되었다.[20] 하야시 이사오가 작곡한 전쟁 노래 중 하나인 出征兵士を送る歌|슈쓰세헤이시오 오쿠루 우타|출정 병사를 보내는 노래일본어는 ''우익 단체''로 불리는 일본 우익 단체의 주제가 되었다.[30] 이향란의 "수주 야상곡"은 핫토리가 작곡했지만, 선전 노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34] 전쟁 후, 쇼지 타로는 나가노현에서 옥음방송을 듣고, 민족주의적이라는 이유로 그의 많은 노래가 한때 금지되었다.[33]
3. 5. 전후의 변화 (1945년 ~ 1960년대 초)
패전 후, 일본에서는 해방적인 분위기를 담은 노래들이 인기를 얻었다. 나미키 미치코의 リンゴの唄|링고노 우타|사과의 노래일본어는 1945년 영화 '소요카제'에 삽입되어 큰 인기를 얻었으며, 오카 하루오 역시 東京の花売り娘|도쿄노 하나우리 무스메|도쿄 꽃 파는 소녀일본어 (1946년), 憧れのハワイ航路|아코가레노 하와이 코로|갈망하는 하와이 항로일본어 (1948년)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다.[35]핫토리 료이치는 상하이에서 귀국한 후 일본 ''팝푸스'' 음악 발전에 기여했다.[26] 카사기 시즈코의 東京ブギウギ|도쿄 부기우기일본어 (1947년)는 핫토리 료이치가 작곡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이치마루의 三味線ブギウギ|샤미센 부기우기일본어 (1949년) 역시 그가 작곡했다. 미소라 히바리는 카사기 시즈코의 모창가로 알려졌으며, 1949년 河童ブギウギ|갓파 부기우기일본어로 데뷔했다.[36] 핫토리 료이치가 작곡한 青い山脈|아오이 산먀쿠|푸른 산맥일본어는 후지야마 이치로와 나라 미츠에가 불러 전후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26]
코세키 유지는 長崎の鐘|나가사키노 카네|나가사키의 종일본어과 ひめゆりの塔|히메유리노 토|히메유리 백합탑일본어을 작곡했다.[37] 나가이 다카시의 저서 ''나가사키의 종''을 바탕으로 한 長崎の鐘|나가사키노 카네일본어는 1949년 후지야마 이치로가 불렀으며, 1951년 제1회 홍백가합전에서 이 노래로 모든 가수의 마지막 가수가 되었다. 에리 치에미는 1952년에, 유키무라 이즈미는 1953년에 데뷔했다. 후지야마 이치로는 1954년 NHK로 옮겨 클래식 음악으로 복귀했고, 홍백가합전에서 蛍の光|호타루노 히카리|반딧불일본어의 지휘를 맡았다.[38]
미소라 히바리, 카스가 하치로, 미하시 미치야, 시마쿠라 치요코 등 새로운 가수들이 등장하며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8] 1955년부터 1964년 사이에는 "가요"가 인기를 끌었다.[39] 코가 마사오는 자신의 전후 음악 스타일을 버리고 미소라 히바리에게 곡을 제공했다.[8]
카스가 하치로가 부른 お富さん|오토미상일본어 (1954년)은 류큐 제도 출신 토쿠치 마사노부가 작곡했으며, 10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40] 1955년 카스가 하치로의 別れの一本杉|와카레노 잇폰스기일본어와 미하시 미치야의 あの娘が泣いてる波止場|아노코가 나이테루 하토바일본어는 후나무라 토루가 작곡하여 히트했다. 미나미 하루오와 무라타 히데오 등 ''료쿄쿠'' 가수들이 일본 대중음악에 합류했으며, 카스가 하치로, 미하시 미치야, 무라타 히데오는 이후 ''엔카''라는 장르를 형성했다.[40]
프랭크 나가이의 有楽町で逢いましょう|유라쿠초데 아이마쇼|유락초에서 만나요일본어 (1957년)는 요시다 타다시가 작곡하여 인기를 얻었다. 1958년에는 니치게키 서부 카니발이 열려 미키 커티스, 사카모토 큐 등 미래의 인기 가수들이 참여했다. 하시 유키오는 젊은 ''엔카'' 가수로 일본 대중음악에 충격을 주었다.[8]
사카모토 큐, 더 피너츠, 히로타 미에코 등은 처음에는 미국 곡을 커버했지만, 점차 자신의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41] 사카모토 큐의 上を向いて歩こう|우에오 무이테 아루코|위를 보고 걷자일본어 (1961년)는 나카무라 하치다이가 작곡하여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무라타 히데오의 王将|오쇼|왕장일본어 (1961년)은 후나무라 토루가 작곡하여 10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 1962년 6월 5일, 키타지마 사부로가 ブンガチャ節|붕가차 부시일본어로 데뷔했으며, 후나무라 토루는 키타지마 사부로의 히트곡 なみだ船|나미다부네|눈물 배일본어 (1962년)를 작곡했다. 미야가와 히로시는 더 피너츠의 ふりむかないで|후리무카나이데|뒤돌아보지 마일본어 (1962년)를 작곡했다. 더 피너츠는 モスラの歌|모스라노 우타|모스라의 노래일본어를 불렀으며, 이 곡은 코세키 유지가 작곡했다.[37]
1963년, 미소라 히바리, 에리 치에미, 유키무라 이즈미 등 이전 인기 가수들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가운데, 사카모토 큐는 見上げてごらん夜の星を|미아게테 고란 요루노 호시오|밤하늘을 올려다보며일본어를 발표했다.[42] 1963년 6월, 사카모토 큐의 上を向いて歩こう|우에오 무이테 아루코일본어는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 Sukiyaki|스키야키영어라는 제목으로 1위를 차지했다. 후나키 카즈오의 高校三年生|코코 산넨세|고등학교 3학년일본어 (1963년)은 엔도 미노루가 작곡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하시 유키오와 함께 青春歌謡|세이슌 가요|청춘 가요일본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8]
1962년에는 SP 레코드의 생산이 중단되었다. LP 레코드가 SP 레코드를 대체했으며, 이는 유행가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60년대 초를 기점으로 유행가는 종언을 맞이했다. 포크송, 비틀즈 등 새로운 음악이 유입되었고, 그룹 사운즈 등이 생겨나면서 일본 음악계는 다양화되었다. 유행가에 종사했던 가수, 작사가, 작곡가들은 엔카 가수로 전향하거나 다른 분야로 진출했다.
4. 음악적 특징
나카야마 신페이는 서양 음악 기법으로 극중가와 유행가를 만들었다. 요나누키 단음계로 만들어진 〈뱃사공 노래〉는 쇼와 엔카의 기본이 되었다.[16] 기타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클래식 기타가 사용되었다. 음표 배열은 현재의 대중음악과 달리 일정한 규칙을 따랐으며, 그 안에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작곡가의 재능이 중요했다. 엔카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음악성은 상당히 다르다.[53] 마츠이 스마코의 〈카츄샤의 노래〉, 돗토리 슌요의 〈새장 속의 새〉, 〈뱃사공 노래〉 등은 영화 주제가로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53]
5. 사회적 위상과 영향
류코카는 서민의 오락으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클래식 음악보다 저급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을 지상으로 생각하고, 대중 속에서 태어난 유행가를 비속한 것으로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때로는 과도한 배척이나 비방, 중상도 있었다.[54] 학교에서는 풍기상의 이유로 류코카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다. 남녀의 자유 연애나 쉽게 몸을 파는 여성을 주제로 한 노래도 있어서, 풍기상 좋지 않다는 의견도 많았다.[54]
류코카는 "노래는 세상과 함께, 세상은 노래와 함께"라는 속담까지 생겨날 정도로, 그 시대의 세상을 비추는 거울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불려졌다.[54] 전쟁 중에는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1936년 6월 1일 NHK에서 "국민가요"가 시작되었는데, 인기곡은 레코드화되어 대히트를 기록했지만, "애국의 꽃", "이웃집의 노래", "귀여운 망아지", "국민 진군가" 등 명백히 프로파간다적 요소가 강한 작품도 많았다.[58]
류코카는 이후 일본 대중음악의 다양한 장르(엔카, 가요, J-POP 등)로 분화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전후, 전시 가요 작곡에 참여했던 일부 작곡가들은 전쟁 협력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고세키 유지는 대전 말기에 작곡한 『필리핀 결전의 노래』에 대해 「나에게는 싫은 노래로, 종전 후 전범이라고 시끄럽게 굴었다. 이제 와서 가사도 악보도 찾을 기분이 들지 않고, 환상의 전시 가요로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64]
6. 대표적인 가수 및 작곡가
1914년, 마츠이 스마코가 부르고 나카야마 신페이가 작곡한 "카츄샤의 노래"는 연극 ''부활''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노래의 레코드는 2만 장이나 팔렸다.[11] 이 곡은 시마무라 호게츠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최초의 ''류코카'' 곡으로 평가받기도 한다.[12][13]
마츠이 스마코는 시마무라 호게츠가 사망한 후 자살했지만, 나카야마 신페이는 계속해서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테루테루 보즈" 등 약 3,000곡을 작곡하며 일본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15] 특히 1921년에 발표한 "센도 코우타"는 5음 음계를 사용하여 일본 전통 음악을 서양식 오선 악보로 표현하는 데 힘썼다.[16]
쇼와 시대 초기에는 마이크가 대중음악에 도입되면서 새로운 스타들이 등장했다. 후타무라 테이이치는 1928년에 "Sing me A Song of Araby"를 커버하여 발표했고, 사토 치야코는 같은 해 나카야마 신페이가 작곡한 "하부의 항구"를 발표하여 1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14] 후지와라 요시에도 "하부의 항구"를 불렀으며,[14] 사토 치야코는 1929년 "도쿄 행진곡"으로 30만 장 이상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17]
1931년부터 1937년 사이에는 가수 후지야마 이치로와 작곡가 코가 마사오가 큰 인기를 얻었다. 코가 마사오는 서양 재즈와 일본 도도이츠의 융합을 시도했으며,[18] 후지야마 이치로는 크루너 창법과 코가 마사오의 기타 연주를 결합한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로 큰 히트를 기록했다.[18] 후지야마 이치로의 노래 "오카오 코에테"는 60만 장이 팔렸다.[19]
이 시기에는 게이샤 출신 가수 이치마루와 고타 가쓰타로도 인기를 얻었다. 고타 가쓰타로의 "시마노 무스메"는 60만 장이 팔렸으며,[21] 고타 가쓰타로와 미시마 잇세이는 듀엣 곡 "도쿄 온도"를 녹음하여 12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22]
바리톤 가수 쇼지 타로의 1934년 노래 "아카기노 고모리우타"도 인기를 얻었으며,[25] 소프라노 가수 아와야 노리코는 1937년 핫토리 료이치가 작곡한 "와카레노 블루스"로 히트했다.[9]
태평양 전쟁 중에도 기리시마 노보루와 후타바 아키코가 부른 "고원의 달"과 같은 서정적인 노래들이 인기를 얻었다.[32] 전쟁 후에는 나미키 미치코의 "링고노 우타", 오카 하루오의 "도쿄노 하나우리 무스메"와 "아코가레노 하와이 코로" 등이 히트했다.
핫토리 료이치는 전후 일본 ''팝푸스'' 음악 발전에 기여했으며,[26] 카사기 시즈코의 1947년 곡 "Tokyo Boogie-Woogie"와 이치마루의 1949년 곡 "Shamisen Boogie-Woogie"를 작곡하여 인기를 얻었다. 미소라 히바리는 카사기 시즈코의 모창가로 알려졌으며,[36] 1949년 "Kappa Boogie-Woogie"로 데뷔했다. 핫토리 료이치 작곡의 "아오이 산먀쿠"는 후지야마 이치로와 나라 미츠에가 불러 전후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26]
코세키 유지는 "나가사키노 카네"와 "히메유리노 토"를 작곡했으며,[37] 나가이 다카시의 저서 ''나가사키의 종''을 바탕으로 한 "나가사키노 카네"는 1949년 후지야마 이치로가 불렀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미소라 히바리, 카스가 하치로, 미하시 미치야, 시마쿠라 치요코 등 새로운 가수들이 인기를 얻었다.[8] 프랭크 나가이의 1957년 곡 "유라쿠초에서 만나요"도 인기를 얻었다. 1958년에는 니치게키 서부 카니발이 열려 미키 커티스와 사카모토 큐 등 미래의 인기 가수들이 참여했다.
사카모토 큐의 1961년 싱글 "위를 보고 걷자"는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1963년에는 키타지마 사부로의 "기타 진기"와 후나키 카즈오의 "고교 3학년"도 인기를 얻었다.
7. 음반 복각 현황
여러 음반 회사에서 류코카 음반 복각을 진행하고 있지만, 회사별로 상황이 다르다.
음원 복각에 관해서는 현존하는 모든 음반 회사가 진행하고 있지만, 그 상황은 회사에 따라 크게 다르다.[11]
- '''콜롬비아''': 가장 적극적으로 복각을 진행하고 있다. 쇼와 30년대에 이미 복각을 진행한 실적이 있으며, 쇼와 40년대부터 자사가 보유한 방대한 SP 음원을 이용하여 가수별 복각을 진행했다. 특히 구스노키 시게오나 쓰무라 겐 등 회사 내에서는 마이너한 존재인 가수의 음원을 대량으로 복각한 것은 타 회사에는 없는 사례이다. CD 시대가 되어서도 정기적으로 SP 음원을 복각해 왔으며, 최근에는 "음반"이라고 칭하는 염가 복각반도 판매하고 있다.[12]
- '''테이치쿠''': 유행가 시대부터 있었던 회사 중에서도 특히 소극적이다. "유행가" 자체의 복각에는 적극적이지만, 구스노키 시게오 등 스테레오 음원이 없는 가수 외에는 SP 음원은 거의 복각된 실적이 없다. 동사를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후지야마 이치로의 음반도 과거 몇 번 복각되었을 뿐이다. 겨우 헤이세이 시대에 딕 미네, 코가 마사오의 작품집 상하 2권, 재즈 송 전집이 나왔을 정도이다.[13]
- '''폴리도르''': 복각에 비교적 적극적이지만, 도카이린 타로와 우에하라 빈에 크게 비중이 편중되어 있다. 동사의 유행가 시대는 이 두 사람이 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또한 현재에도 굳건한 인기가 있어 집중적으로 복각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CD 전집이 되면 도카이린 타로는 나오지만 우에하라 빈의 것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또한, 타바타 요시오, 기타 렌타로 등 다른 가수에 대해서는, 여러 번 개인적으로 복각된 실적이 있는 가수가 있는가 하면 옴니버스 등으로 문득 생각난 듯이 복각되는 정도의 가수도 있는 등, 각 가수의 차이가 크고 균일하지 않아, 그 점에서는 콜롬비아에 미치지 못한다.[14]
- '''킹''': 복각에 적극적이다. 동사의 세력이 컸던 것이 전후이기 때문에 전후의 곡이 중심이지만, 가수별 복각반을 내는 등 타 회사와 비교해도 많은 편이다. 전집류에서는 전전의 곡이나 회사 설립기의 곡도 적극적으로 복각하여, 귀중한 음원을 제공한다.[15]
- '''빅터''': 쇼와 말 무렵까지 금속 원반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 회사와 달리 전전의 곡은 "원반"에서, 전후의 곡은 타 회사와 마찬가지로 "반 일어선" 방식으로 거의 유행가 시대 전부에 걸쳐 복각을 진행하고 있다. 가수별 복각반도 발매하고 있으며, 특히 후지야마 이치로에 대해서는 여러 번 복각했다. 콜롬비아와 테이치쿠 사이에 끼어 존재감이 옅어지기 쉬운 빅터 시대의 귀중한 음원을 제공하고 있다.[16]
이 외에, 회사 간의 협력에 의한 횡단 복각이 이루어진 예가 몇 가지 있지만, 애초에 유행가의 복각 자체가 "수요가 적다"고 경시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어느 회사도 상호 협력에는 소극적이며, 대량의 것만 발매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2008년(헤이세이 20년) 1월, 위의 5개 대기업의 협력으로 "청춘 가요 연감" 시리즈의 자매반으로서 "청춘 가요 연보" 시리즈가 CD 2매 세트, 전 10권이라는 비교적 구하기 쉬운 형태로 발매되어, 회사를 넘어선 유행가의 감상이 쉽게 가능하게 되었다.[17]
1960년대의 "추억의 멜로 붐"으로 인해, 당시 생존해 있던 유행 가수는 텔레비전에 출연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과거의 곡을 다시 녹음했다. 이는 당시 실용화된 지 얼마 안 된 스테레오 녹음에 의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스테레오 음원"이라고 불리며 SP 원반의 음원과 구별된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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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し実際には前線の兵士の間でも支持を得てヒット曲と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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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松山時夫」=「松平晃」については「片瀬波」作詞者の高橋掬太郎が真っ向から否定しているが、今も一部の楽譜集には誤って松平晃の曲のまま掲載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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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テレオ録音の時代になって、過去のヒット曲を再録音することは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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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しこの曲は収容所で覚えた歌を書き起こしたものであったため、発売後に、昭和15年林伊佐緒による『東京パレード』の替え歌だったとわかり発売中止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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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ングレコードや日本コロムビアは、歌手によりSP・モノラル録音とステレオ再録音の両方を復刻することが多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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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にも本人が既に死亡している場合、別の歌手に歌わせて無理矢理にステレオ音源として収録し復刻にあてる例もある。こうなるともはやカヴァーであって「復刻」ですらないが、レコード会社はこの矛盾について一切触れることなく販売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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