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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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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덕해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이주한 한국계 공산주의자로,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이후 중국 동북 지역에서 조선족 자치주 수립에 기여했다. 그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초대 주석을 역임하며 민족 자결과 사회주의 이념을 조화시키려 노력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박해를 받아 사망했다. 이후 복권되어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조국' 발언 논란과 문화대혁명 시기의 비판 등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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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해
기본 정보
주덕해
이름주덕해
로마자 표기Zhu Dehai
한자 표기朱德海
조선어 표기주덕해
출생 이름오지서
출생일1911년 3월 5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연해주 우수리스크 도베아
사망일1972년 7월 3일
사망지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국적중국
배우자김영순
소속 정당중국 공산당
직책
옌볜 조선족 자치주 인민위원회 주석1대
임기 시작1952년 9월 2일
임기 종료1967년 4월 18일
군사 경력
소속팔로군
복무 기간1939년 ~ 1947년
계급정치위원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중국 국공 내전
학력
모교동방노력자공산대학
기타
관련 인물김일성
관련 기관조선혁명군정대학

2. 생애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의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모두 다루고 있어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됨)

2. 1. 해방 이전

1911년 3월 5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근의 한인 마을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오기섭(吳基涉)이며, 본적은 함경북도 회령군이다.[1] 조부 때 조선에서 러시아로 이주했다. 7살 때 아버지가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고[2] 잠시 함경북도 회령으로 돌아갔다가,[3] 1920년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중국 간도 지방(길림성 화룡현, 현재의 룡정시)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4]

어린 시절 중화민국 정부가 운영하는 소학교에 다니며 신해혁명과 손중산의 영향을 받아 혁명 의식을 키웠고,[5] 1927년에는 소학교 교장이자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던 김근(다른 자료에서는 김광진[6])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다. 1929년 조선공산당 산하 청년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7] 1930년 8월에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1931년 5월 중국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여[12]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만주사변 발발 이후 헤이룽장성 등지에서 지하당 활동과 항일 유격 투쟁에 참여했으며, 동북항일연군 제4군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덕해(朱德海)'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15]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에 입대했으나, 이전부터 앓고 있던 결핵으로 인해[16] 요양 생활을 해야 했다.[60]

1936년, 중국공산당의 결정으로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파견되어[17] 방호산, 이권무 등과 함께 유학했다. 1938년 여름 졸업 후[20] 1939년 9월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에 도착하여 팔로군 지도원으로 활동했다.[20] 1941년에는 항일군정대학 등에서 추가로 군사 및 정치 교육을 받았으며,[20] 1943년 옌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설립되자 교무위원 겸 총무처장을 맡아 한인 간부 양성에 힘썼다.[60]

2. 1. 1. 러시아 연해주 출생과 성장 (1911-1920)

연해주 지도


1911년 3월 5일 러시아 연해주(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프리모르스키 크라이ru ) 우수리스크( Уссурийск|우수리스크ru ) 인근 니콜스크-우수리스키( 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ий|니콜스크우수리스키ru )의 도별하(道別河) 마을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오기섭(吳基涉)이다.[1] 그의 본적지는 함경북도 회령군 팔을면(八乙面)으로, 할아버지 대에 조선에서 러시아로 이주했다.

아버지 오우서(吳雨涉)는 1902년 한반도 북부의 대기근을 피해 함경북도 회령에서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이었다. 도별하는 우수리스크에서 약 50km 떨어진 곳으로, 오씨 가족과 같은 조선인 이주 농민들이 개척하여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다. 오우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 계곡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주덕해는 두 자녀 중 막내였다.

주덕해가 7살이 되던 해(1918년경), 아버지는 중국인 강도에게 살해당했다.[2] 아버지의 죽음으로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자, 주덕해와 그의 형제, 그리고 어머니 허씨는 1918년 10월 아버지의 고향인 회령으로 잠시 돌아갔다.[3]

2년 뒤인 1920년, 가족은 두만강을 건너 당시 일제강점기하 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하던 중국 간도 지방으로 다시 이주했다. 주덕해 가족은 그의 삼촌이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수동골(현재 중국 길림성 룡정시 광신향)이라는 조선인 이주민 마을에 정착했다.[4]

2. 1. 2. 중국 길림성 이주와 사회주의 입문 (1920-1931)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났으나, 1918년 아버지가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은 후[2] 잠시 함경북도 회령으로 돌아왔다가,[3] 1920년 일제강점기조선인들의 주요 이주지였던 중국 간도 지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이들은 길림성 룡정시 광신향 수동골이라는 조선인 이주민 마을에 정착했다.[4]

수동골에서 주덕해는 중화민국 정부가 운영하는 흑룡강현 제14공립소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까지 수학했다.[5] 이 시기 학교 교육을 통해 신해혁명과 손중산의 사상을 접하며 혁명적 민족주의 의식을 키웠다.[5]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해야 했다. 룡정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간도 지역에서 일본인과 조선족 사이에 벌어지는 민족적 갈등과 차별을 목격했다.

1927년, 룡정 지역의 저명한 조선인 공산주의자이자 소학교 교장이었던 김광진(Kim Kwangjin)을 만나 그의 사립학교 학생이 되었다.[6] 김광진의 영향으로 조선 민족 해방과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깊이 공감하게 된 주덕해는 1929년, 조선공산당 산하의 비밀 청년 조직인 고려공산주의청년동맹|고려공산주의청년동맹한국어에 가입했다.[7] 그는 이 조직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무기를 반입하려던 동지들 사이에서 비밀 연락 임무를 수행했다.

1930년 2월,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가족을 떠나 헤이룽장성 닝안(영안)으로 향했다.[8] 그곳에서 동지들과 함께 공산주의 혁명 기지 건설에 참여했다. 같은 해 8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하나의 국가에는 하나의 공산당만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고려공산주의청년동맹에서 중국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 소속을 옮겼다.[9] 1930년 말, 중국공산당 하얼빈 지부로부터 다음 해 초 봉기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10] 11월 국민당 당국에 계획이 발각되어 동지 대부분이 체포되는 위기를 맞았다. 주덕해는 급히 현장을 탈출하여 인근 산속으로 피신했다.[11]

1931년 1월, 피신 생활을 마치고 경포호 근처의 천자촌(城子村)이라는 마을에 가명으로 정착했다. 그해 5월, 중국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으며, 공산주의 공동체 건설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당으로부터 마을 서기로 임명되었다.[12]

2. 1. 3. 항일 무장 투쟁과 질병 (1931-1937)

1931년 9월 19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중국 동북부를 침략했다.[13] 중국 국민당 정부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철수하자, 9월 말 주덕해가 활동하던 성자촌(城子村) 공동체마저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13] 침략 직후, 주덕해와 그의 중국공산당 동료들은 아직 일본군이 점령하지 않은 미산, 헤이룽장성으로 피신했다.[14] 미산의 당 지방위원회는 주덕해를 미산 남쪽 부근의 작은 마을로 파견하여 혁명 기지를 건설하게 했다.[14] 그는 1934년까지 이곳에서 당을 위해 활동하며, 일본 순찰대와 친일 지역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동지 중 한 명과 위장 결혼을 하기도 했다.[14]

1932년 5월, 일본군은 미산을 점령했다. 주덕해는 일본 점령에 항의하며 1932년 10월 반일 대규모 집회를 조직했다가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15] 경찰 조사 과정에서 그는 처음으로 '주덕해(朱德海)'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이후로 계속 이 이름을 사용했다. 주덕해는 자신이 집회의 배후 인물이라는 경찰의 혐의를 부인하여 석방되었다.[15]

1934년 봄,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주덕해는 약 20명의 게릴라 대원들과 함께 하다하(哈達河) 강 근처 산비탈로 기지를 옮겼다.[16] 그는 그 기지에서 1년 동안 약 100명의 게릴라를 훈련시켰으나, 이 시기에 결핵에 걸렸다.[16] 이 게릴라들은 나중에 일본의 괴뢰 정부인 만주국관동군과 싸운 항일 게릴라 부대인 동북 항일 연군 제4군 제2단 후방유수처의 기반이 되었다.[16]

1935년, 주덕해는 동북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으나 결핵으로 인해 요양 생활을 해야 했다.[60] 1936년에는 방호산(方虎山), 이권무(李權武) 등과 함께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했다.

2. 1. 4. 모스크바 유학과 옌안 활동 (1937-1945)

결핵 등 건강 악화로 전선 활동이 어려워지자, 중국공산당은 치료와 간부 교육을 위해 그를 모스크바로 보냈다.[17] 1936년 여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이동하여[18] 그해 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중국인 학생 과정에 있었으나 한국인 과정으로 옮겼다.[18] 이곳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공산주의 운동사, 군사 전략 등을 학습했으며,[19] 방호산, 이권무 등과 함께 유학했다. 재학 중 강생 등 다른 중국 간부들과도 교류했다.[19]

1938년 여름 과정을 졸업하고,[20] 신장을 거쳐 1년간의 여정 끝에 1939년 9월 옌안에 도착했다.[20] 도착 후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연대 특무련(特務連) 지도원과 공급처 지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1941년에는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과 중국공산당 중앙 해외위원회 연구반 조선조에서 추가로 수학했다. 이 시기 주충일, 김창덕 등 다른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공부했다.[20]

섬감녕 지역 지도


1943년에는 옌안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교무위원과 총무처장을 맡았다.[60]

2. 2. 해방 이후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의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모두 다루고 있어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됨)

2. 2. 1. 중국 동북 지역에서의 활동 (1945-1949)

주덕해동지기념비(연길시)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한반도가 해방되자, 주덕해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중국 동북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는 이 지역에서 조선족 사회를 재건하고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했다. 1945년 11월에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조직하고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동북 지역에서의 조선족 자치 활동 기반을 다져나가던 중, 1948년 4월에는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장을 맡아 조선족을 포함한 소수민족 관련 행정을 담당했다.

1949년에 들어서면서 주덕해는 연변 지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같은 해 3월에는 중공연변지위서기(中共延邊地位書記)에 임명되었고, 이어 4월에는 연변대학(延邊大學) 교장을, 5월에는 연변공서전원(延邊公署專員)을 겸임하며 연변 지역의 정치, 교육, 행정 분야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60] 이러한 활동은 이후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2. 2. 2. 연변 조선족 자치주 수립과 발전 (1949-1966)



1949년 3월 중국공산당 연변지구위원회 서기, 4월 연변대학 교장, 5월 연변공서 전원을 겸임했다. 1952년 9월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주석에 취임하며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립과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54년 9월에는 중국공산당 길림성 당위원회 상무위원과 길림성 인민정부 부성장을 역임했으며, 1955년에는 중국공산당 연변 자치주 위원회 제1서기 겸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었다.[60]

2. 3. 문화대혁명 시련과 죽음 (1966-1972)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주덕해는 마오쩌둥의 조카인 마오위안신 등에 의해 지방민족주의자이자 북한의 특무(간첩)라는 비난을 받으며 박해를 겪었다.[60][62]

1966년 5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연변에서는 동북 지방 대학에 다니던 조선족 학생들이 혁명을 주도했다. 이들은 연변대학에 모여 극좌 성향의 "8.27 반란군"을 결성했고, 이에 동조하지 않는 학생들은 "홍기전투련군"을 조직하여 두 세력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했다.[50] 주덕해는 학생들에게 학업 복귀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으며, 오히려 장칭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51]

1966년 6월 20일, 주덕해는 연변자치주 당위원회 문화혁명지도소조 조장으로 임명되었고,[63] 8월 23일에는 4만 명이 참가한 문화대혁명 경축대회에서 연설했다. 9월에는 주은래가 송인궁을 연변에 파견하여 중앙의 주덕해 보호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으며,[63] 10월 1일 국경절에는 주은래의 초청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63]

그러나 1966년 12월, 마오위안신이 하얼빈공정대학 학생들을 이끌고 연길로 와서 "8.27 반란군"이 개최한 대회에서 "주덕해를 타도하고 연변을 해방하자"고 선동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63] 주덕해는 "8.27 반란군"에 의해 연변대학에 감금되었고, 비판 대회를 통해 "반당·반사회주의·반마오쩌둥사상"의 두목으로 공격받았다(주덕해 사건).[63]

1967년 1월, 마오위안신은 연변 문화대혁명의 성공이 주덕해 타도에 달려있다고 선언하며, 반란 세력에게 주덕해를 비판 대상으로 삼으라고 지시했다.[52] 이에 따라 반란 세력은 공개 연설과 팸플릿을 통해 주덕해를 맹렬히 비난했다. 1967년 중반 발표된 팸플릿은 주덕해와 측근 간부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담고 있었으며,[52] 그를 매국노, 한국 민족주의자, 북한 스파이로 몰아붙였다.[53] 당시 악화된 중-북 관계 속에서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비난하던 흐름에 편승하여, 주덕해가 김일성의 노선을 따른다고 주장했다.[53] 구체적인 비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노선 문제: 대약진운동의 연변 적용에 비판적이었던 점, 소의 개인 사육을 인정한 점("황우주의") 등을 들어 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63]
  • 지방 민족주의: 연변의 특수성 강조, 조선족 학교 및 인민공사 설립 등이 "민족 연합"에 반한다고 비판했다.[63][54] 팸플릿은 주덕해가 "조선족을 중화 민족 대가족에서 분리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54]
  • 김일성과의 연계 및 영토 문제: 1948년 발언("조국")을 근거로 김일성의 앞잡이라고 주장했으며,[53] 김일성과 공모하여 연변에 "독립된 한국 국가"를 세우고 북한에 합병하려 했다고 비난했다.[55] 1962년 중조변계조약 체결 당시 주장이었던 그가 이 문제로 "매국노"로 비판받기도 했다.[58] 또한, 1960년대 중국인들의 북한 탈출을 도왔다고 주장했다.[56]
  • 경력 문제: 과거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혼자 석방된 경위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63]


이러한 팸플릿이 배포될 당시 주덕해는 이미 마오위안신의 요구에 따라 반란 세력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였다. 인민해방군 간부들이 개입하여 그를 홍위병의 감시 하에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지역 당위원회는 반란 세력의 압력과 주덕해의 신변 안전을 이유로 그를 연변에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1967년 4월 18일, 주덕해는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이송되어 중앙 정부의 보호 아래 농장에서 일했다.[63] 이후 1969년 9월(또는 10월[60]), 후베이성 우한 인근의 53농장으로 보내져 이름과 신분을 숨긴 채 농장 노동자로 일하도록 강요받았다.[62][63] 유배 생활 중 호흡기 질환을 앓게 되었고 이는 폐암으로 진단되었다. 결국 1972년 7월 3일 저녁 9시 10분, 우한의 육군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60][62][63] 그의 유서에는 "저는 연변에 돌아가겠습니다"라는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2. 4. 사후 복권과 기념 사업

1972년 9월 12일, 장춘시에서 주덕해의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9월 16일에는 그의 사망 사실이 연변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는 1972년 12월 24일부터 주덕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시작했다. 1978년 5월, 길림성위원회는 소위 "연변 4대 억울한 사건"(주덕해 사건, 폭동 사건, 특무 사건, 지하 국민당 사건)에 대한 명예회복 결정을 발표하며 주덕해의 누명을 공식적으로 벗겼다. 이어 같은 해 6월 10일, 중국공산당 연변자치주위원회는 "주덕해의 명예회복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했고, 6월 20일에는 연변위원회 주최로 대규모 명예회복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연변주 전역 200곳의 분회장을 통해 생중계되었으며,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취하며 그의 복권을 지켜보았다.

1984년 5월,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이 연변을 시찰하면서 주덕해 기념비 건립을 제안하고 직접 현판을 휘호했다. 이를 계기로 1986년, 연길시 인민공원 인근 구릉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2007년에는 그의 생가가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다.

3. 논란과 비판

주덕해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동안 여러 정치적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1948년 북한 방문 당시 '조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발언은 이후 그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극좌 세력으로부터 '지방 민족주의자', '매국노', 심지어 북한의 간첩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극심한 박해를 겪었다. 이러한 논란들은 당시 복잡했던 중국 내 민족 문제, 중화인민공화국북한의 관계, 그리고 중국 내부의 정치 투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3. 1. '조국' 발언 논란

1949년 중국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연변 지역의 한국계 지도자들과 북한 지도자들은 동북부 지역 한국계 소수민족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1948년 11월, 한국계 중국인 지도자 공식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 부총리 김책은 연변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다. 당시 주덕해의 반응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연변 서기장 직무대행이었던 임춘추는 김책의 주장을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32]

공식적인 기록은 주덕해가 북한 지도자들과 공모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1948년 12월 1일 자 연변일보 기사는 그가 최소한 북한 정권을 지지할 것을 약속했음을 시사한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주덕해는 대표단장으로서 북한 방문 소감을 밝히며 "빛나는 인민공화국 국기를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는 영광스러운 국가를 높이 평가합니다."라고 말했으며, 자신과 해외 동포들이 혁명 전통과 한국 민족의 영광을 영원히 빛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특히 이 기사에서 북한을 '우리의 민주적인 조국'으로 언급한 점은 논란의 여지가 되었다.[33]

1949년 9월 21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CPPCC)에 참석한 주덕해(맨 앞줄 맨 왼쪽)


그러나 주덕해는 중국으로 돌아온 후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 1949년 1월 민족 문제 관련 회의에서 그는 북한의 연변 병합을 지지했던 임춘추의 행동을 비판하고, 연변을 중국의 영토로 유지하면서 한국인의 자치를 보장하는 계획을 지지했다.[34] 역사가 염인호는 이 회의가 두 지도자의 정치적 운명을 갈랐다고 평가한다. 주덕해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한 반면, 임춘추는 북한 지도자들과의 관계로 인해 파벌주의자로 낙인찍혔다.[35] 결국 임춘추는 북한으로 추방되었다. 당시 선양에서 국민당 군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있던 중국 공산당은 한국계 소수민족의 지지를 확보하고 동북 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주덕해의 자치 제안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주덕해는 1949년 2월 연변성 서기로, 1952년 9월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초대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적 반대자들은 문화 대혁명 시기까지 주덕해가 북한에 충성하고 있다는 비판을 지속했다.[36]

'조국(祖国|쭈궈중국어)'이라는 개념 자체는 당시 복잡한 논쟁거리였다. 1920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소수민족의 '조국'이 어디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레닌은 억압받는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했으며,[46] 이는 일부 소수민족 지도자들에게 독립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반면 마오쩌둥은 모든 중국 내 민족이 외세 압제에 함께 저항해 온 '위대한 중화민족( 伟大的中华民族|웨이다더 중화민쭈중국어 )'의 일원이라는 공동 민족성 담론을 내세웠다.[46][47][48] 하지만 이는 중국 내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비교적 최근에 이주해왔고, 1950년대까지도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던 한국계 소수민족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중국 공산당 연변 위원회조차 "당은 이 민족[한국인]이 다른 '조국'에 속하는 소수민족임을 인정할 것이다"라고 발표하며 한국계 소수민족의 특수성을 인정하기도 했다.[49]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덕해는 공식적으로는 한족 중심의 당 노선에 따라 한국계 소수민족이 중화민족의 일원임을 주장했지만,[30] 일부 한국계 민족주의자들은 북한(민족적 조국), 소련(계급적 조국), 중국(현실적 조국)이라는 '다중 조국' 이론을 제기하며 그의 입장에 반발하기도 했다.[49]

3. 2. 문화대혁명 시기의 비판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주덕해는 가혹한 정치적 박해에 직면했다. 1966년 5월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발발시키자, 연변에서는 동북 지방 대학에 재학 중이던 조선족 학생들이 혁명을 주도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1966년 8월 연변대학교에서 "8.27 반란군"이라는 극좌 성향의 반란 집단을 결성했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학생들은 "홍기전투련군"이라는 별도의 반란 집단을 조직했으며, 두 세력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했다.[50] 주덕해는 학생들에게 학교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반란군들은 장칭의 요청으로 연변에 왔다고 주장하며 나중에는 주덕해가 장칭의 명령을 거역했다고 비난했다.[51]

1966년 12월, 마오쩌둥의 조카인 마오위안신이 하얼빈공정대학 학생들을 이끌고 연길을 방문하여 "8·27혁명조반단"이 개최한 대회에서 "주덕해를 타도하고 연변을 해방하자"며 조반을 선동했다.[58] 이로 인해 주덕해는 8·27혁명조반단에 의해 연변대학에 감금되었고, 비판대회에서 “반당·반사회주의·반마오쩌둥사상”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주덕해 사건).[58] 1967년 1월, 마오위안신은 반란 집단에게 주덕해를 비판의 핵심 대상으로 삼으라고 명확히 지시하며, 연변에서의 문화대혁명 성공 여부가 주덕해 타도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52]

마오위안신의 발표 이후, 반란군들은 공개 연설과 팸플릿을 통해 주덕해를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특히 1967년 중반에 발표된 팸플릿은 주덕해를 매국노, 지방 민족주의자, 그리고 북한의 간첩(특무)으로 규정하며 그에 대한 조사를 담고 있었다.[52][53][60][62] 이러한 비난은 당시 악화일로에 있던 중국과 북한의 관계 속에서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비판하던 정치적 분위기와 맞물려, 주덕해를 김일성의 노선을 따르는 반동 인물로 매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53]

팸플릿은 주덕해가 1948년 연변일보 기사에서 북한을 "조국"이라고 언급한 발언[33]을 근거로 그가 북한의 앞잡이라고 주장했으며[53], 마오쩌둥의 "강대한 중화민족" 담론을 위반하고 조선족을 중화민족이라는 큰 가족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했다고 비난했다.[54] 또한, 팸플릿은 김일성이 1948년 회담에서 주덕해에게 "연변의 모든 한국 소수민족은 진정한 '조국'인 북한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주덕해가 이를 받아들여 북한을 위한 비밀 공작원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55] 나아가 1960년대에 2만 8천 명에 달하는 중국인의 북한 탈출을 돕고 계획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56] 결론적으로 팸플릿은 주덕해가 연변에 "독립된 [한국] 국가"를 수립하고 가까운 미래에 이를 북한에 합병시키려 공모했다고 주장하며, 연변 주요 도시의 거리에 대대적으로 게시되었다. 이 팸플릿 사건은 주덕해의 정치적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56]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주덕해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이유로 비판받았다.[58]

비판 항목세부 내용
노선 문제대약진운동의 연변 적용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소의 개인 사육을 인정한 것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다는 의미의 "황우주의"로 낙인찍힘.
지방 민족주의자연변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조선족 학교와 조선족 인민공사를 설립한 것이 중국 공산당의 "민족연합" 원칙에 반한다는 비판을 받음.
경력 문제과거 밀산에서 활동 중 일본군에 체포되었다가 혼자만 석방된 경위와 소련 유학 후 1939년 연안에 합류한 과정에 대한 신뢰성 문제가 제기됨.
영토 문제1962년 체결된 중조변계조약에 따라 중국이 북한에 일부 영토를 양보하고 천지에 국경선이 그어진 것과 관련하여,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었던 주덕해가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는 이유로 매국노로 비판받음.



팸플릿 사건 당시 주덕해는 이미 마오위안신의 축출 요구에 따라 반란 세력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후 인민해방군 간부들의 협상으로 홍위병의 감시 하에 병원에 감금되었다. 1967년 4월, 지역 공산당 위원회는 반란 세력의 압력과 주덕해의 신변 안전을 고려하여 그를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호송했다.[58] 베이징에서는 다른 추방된 고위 간부들과 함께 농장에서 일했으며, 1969년 9월(또는 10월)에는 후베이성의 53농장으로 하방되었다.[60][62][58] 그는 자신의 이전 직책과 이름을 숨긴 채 농장 노동을 강요당했고, 추방 후 얻은 호흡기 질환이 폐암으로 악화되어 1972년 7월 3일 우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60][62] 그의 유서에는 "저는 연변에 돌아가겠습니다"라는 한마디만이 적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된 후인 1978년 6월 20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 이후 중국공산당 연변 조선족 자치주 위원회는 주덕해를 사후 복권하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6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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