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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비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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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가비조스는 고대 페르시아의 귀족이자 장군으로, 기원전 482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반란을 진압하고 마르두크 신상을 파괴했다. 그는 그리스 원정에 참여했으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으나 배신하고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집트 반란 진압, 키프로스 원정을 수행했으며, 아메스트리스의 포로 처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면받고 복권되었다. 이후 사냥에서 왕을 구했으나 추방당했다가 다시 사면받았으며,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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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비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메가비조스
원어 이름Μεγάβυζος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이름Bagabuxša
인물 정보
활동 시기기원전 485년경 – 440년
소속아케메네스 제국
계급장군, 시리아 총독
배우자아미티스
자녀조피루스 2세
군사 경력
복무 기간기원전 5세기
전투이집트 원정

2. 생애

메가비조스의 가문, 출생, 어린 시절 등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부족하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기원전 482년 태수들의 반란 때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메가비조스는 시리아의 태수가 되었다. 프리기아의 태수 아르타바조스와 함께 페르시아 군의 사령관으로 이집트의 아나로스와 그를 지원하는 아테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파견되었다. 그 후 그들은 키프로스로 관심을 돌렸고, 그곳은 키몬이 이끄는 아테네 인들에 의해 공격받고 있었다. 직후, 페르시아와 아테네 사이의 적대 관계는 〈칼리아스의 평화〉라고 불리는 강화조약에 의해 해소된다.

얼마 후 메가비조스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다. 크테시아스는 그 이유를 메가비조스가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메스트리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 포로들을 처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집트의 유시리스와 왕의 조카인 메노스타네스가 이끄는 군대가 그를 진압하기 위해 파병되었고, 장군들끼리 기사전을 벌여 메가비조스가 승리한다. 왕은 그의 형제 아르타리오스, 환관 아르토카레스와 아미티스를 평화 사절로 파견한다. 그의 명예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항복하고 용서를 받아 그의 자리를 유지하게 된다. 얼마 후 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를 사냥에서 사자로부터 구하게 되었지만, 먼저 죽으라는 황명을 위반했다고 크리타이로 추방당하지만 문둥병에 걸린 체 함으로써 수사로 돌아와 사면을 받는다.

메가비조스는 그 직후 76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아들 조피로스 2세는 아테네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버지가 추방당해 있는 동안 카우로스를 습격하는 것을 도왔지만, 바위에 맞아 죽게 된다.

2. 1. 페르시아 왕조에서의 초기 활동

그의 아버지 조피로스는 기원전 482년 태수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살해당했다. 메가비조스는 군을 이끌고 도시를 탈환했으며, 미래의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마르두크 신상을 파괴했다. 이어 메가비조스는 그리스 원정에 참여했다. 헤로도투스는 그가 델포이를 약탈하라는 명령을 거부했지만, 그런 명령이 내려진 것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메가비조스의 아내이자 크세르크세스 1세의 딸인 아미티스가 간음 혐의로 기소되었다.[1] 메가비조스는 황제를 암살하려는 아르타바누스의 음모에 가담했지만, 새 황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를 죽이기 전에 배신했다.[1] 전투에서 아르타바누스의 아들이 죽고 메가비조스는 부상을 입었지만, 아미티스가 중재하여 치료를 받았다.[1]

3. 이집트 원정

메가비조스는 시리아의 사트라프로 임명된 후, 프리기아의 사트라프 아르타바조스와 함께 이집트에서 일어난 이나로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들은 기원전 456년에 이집트에 도착하여 2년 안에 반란을 진압하고, 이나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아테네인들을 사로잡았다.[2]

메가비조스는 멤피스 포위전(기원전 459–455년)과 프로소피티스 포위전(기원전 455년)에서 아테네인과 이집트인에 맞서 싸웠다.


이집트 병사, 기원전 470년경 – 크세르크세스 1세 묘소 부조

3. 1. 이집트 반란의 배경

크세르크세스 1세가 기원전 465년에 암살되자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뒤를 이었지만, 아케메네스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곧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곳은 박트리아와 이집트였다. 이집트의 이나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형제인 이집트의 페르시아 총독 아케메네스를 물리치고 하 이집트를 장악했다. 그는 또한 공식적으로 페르시아와 여전히 전쟁 중이던 그리스인들과 접촉했고, 기원전 460년에 아테네는 이나로스를 지원하기 위해 200척의 함선과 6,000명의 중장 보병으로 구성된 원정군을 파견했다.[1] 이집트군과 아테네군은 이집트의 현지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멤피스 시를 점령했지만, 페르시아의 요새는 수년간 포위했다.[1]

3. 2. 멤피스 포위전 (기원전 459-455년)

아테네와 이집트 연합군은 멤피스에서 페르시아 군을 포위 공격했으나, 잘 진행되지 않았다. 투키디데스는 이들의 원정 기간이 총 6년이었다고 언급했는데, 이를 통해 포위전이 최소 4년 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3] 이 기간 중 마지막 18개월은 프로소피스 포위에 사용되었다.[4]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메가바주스를 보내 아테네 군대를 이집트에서 몰아내기 위해 스파르타에 아티카 침략을 요청하며 매수하려 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메가비조스에게 대군을 맡겨 이집트로 파견했다.[1] 디오도루스는 이와 유사한 내용을 더 자세히 전한다. 매수 시도가 실패한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메가비조스와 아르타바주스에게 30만 명의 병력을 주어 반란 진압을 지시했다. 이들은 먼저 페르시아에서 킬리키아로 이동하여 킬리키아인, 페니키아인, 키프로스인으로부터 300척의 삼단노선 함대를 모으고 1년 동안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그 후 이집트로 향했다.[5] 그러나 현대의 추정치는 페르시아 군대의 규모를 25,000명 정도로 상당히 낮게 보고 있는데, 이는 이미 압박받고 있는 사트라프에서 그 이상의 병력을 빼는 것이 매우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6] 투키디데스헤로도토스가 두 번째 페르시아 침공에 참여했다고 기록한 아르타바조스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디오도루스가 이 원정에서 그의 존재에 대해 오해했을 수도 있다.[7] 페르시아 군이 훈련에 상당한 시간을 보냈을 가능성은 분명하다. 이집트 파프레미스에서의 승리에 대응하는 데 4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두 저자 모두 자세한 내용은 많이 제공하지 않지만, 메가비조스가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 멤피스 포위를 빠르게 풀고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여 아테네군을 멤피스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1][8]

3. 3. 프로소피티스 포위전 (기원전 455년)

메가비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은 멤피스 포위를 풀고 이집트 군을 격파한 후, 프로소피티스 섬으로 후퇴한 아테네 군을 포위했다.[1] 메가비조스는 18개월 동안 아테네 군을 포위 공격했고, 결국 운하를 파서 섬 주변의 강물을 빼내어 섬을 육지와 연결하는 전략을 사용했다.[1]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그 후 예전 섬으로 건너가 섬을 점령했다.[1] 아테네 군대 중 극소수만이 리비아를 거쳐 키레네로 행군하여 살아남아 아테네로 돌아갔다.[1] 디오도로스는 강물이 마르자 이집트인들이 페르시아에 항복했고, 페르시아인들은 아테네인들을 공격하다가 큰 사상자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이 키레네로 자유롭게 떠나도록 허락했다고 기록했다.[1]

이집트 원정의 패배는 아테네에 큰 충격을 주었고,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아테네로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9]

4. 키프로스 원정

기원전 456년, 메가비조스는 프리기아의 사트라프(태수)였던 아르타바조스와 함께 이집트에서 일어난 이나로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들은 2년 안에 반란을 진압하고 이나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여러 아테네인들을 사로잡았다.[2] 이후 키몬이 이끄는 아테네 군대의 공격을 받고 있던 키프로스로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와 아테네 간의 적대 행위는 칼리아스 화약으로 종식되었다.

5. 반란과 복권

얼마 후 메가비조스는 아메스트리스가 이집트 반란 포로들을 처형한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메가비조스는 이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우시리스와 왕의 조카 메노스타네스가 이끄는 군대가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지만, 장군들 간의 결투에서 메가비조스가 승리했다.

은 그의 형제 아르타리우스, 환관 아르토크사레스와 아미티스를 평화 사절단으로 보냈다. 메가비조스는 명예를 회복한 후 항복하고 사면받아 지위를 유지했다.

얼마 후, 메가비조스는 사냥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사자로부터 구했지만, 먼저 사냥감을 죽일 수 있는 왕의 특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키르타에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나병 환자인 척하며 수사로 돌아와 다시 사면받았다.

6. 죽음

메가비조스는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그의 아들 조피로스 2세는 아테네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버지가 추방당해 있는 동안 카우노스 공격을 도왔지만, 바위에 맞아 사망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Bêl-šimânni and Šamaš-eriba https://www.livius.o[...] 2020-09-14
[2]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3] 웹사이트 I, 110 https://www.perseus.[...]
[4] 웹사이트 I, 109 https://www.perseus.[...]
[5] 웹사이트 XI, 74–75 https://www.perseus.[...]
[6] 서적 Land Battles in 5th Century BC Greece: A History and Analysis of 173 Engagements McFarland & Company, Inc.
[7] 웹사이트 VIII, 126 https://www.perseus.[...]
[8] 웹사이트 XI, 77 https://www.perseus.[...]
[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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