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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바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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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타바주스는 페르시아-그리스 전쟁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장군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의 제2차 페르시아 원정에서 파르티아인과 호라즘인을 지휘했다. 플라타이아 전투 후 아케메네스 군 잔여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를 탈출하여 이오니아로 돌아갔다. 이후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으며, 파르나케스 왕조의 첫 번째 공식 사트라프였다. 또한, 메가비주스와 함께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키프로스에서 아테네 군대에 대응했으며, 칼리아스 평화 조약으로 페르시아와 아테네 간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켰다.

2.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에서의 역할

파르티아 군인


호라즘 군인


아르타바주스는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의 제2차 페르시아 원정 당시 장군 중 한 명으로, 아케메네스 제국 군대에서 파르티아인과 호라즘인을 지휘했다.[1] 그는 특히 아시아로 돌아가는 경로를 지키는 예비군을 담당했으며, 포티데아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2]

이 원정은 다음 해에 총사령관 마르도니우스가 아르타바주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인들과 정면으로 맞붙어 패배하면서 끝났다(기원전 479년). 그리스인들은 승리한 여세를 몰아 이오니아로 항해하여 같은 해 미칼레에서 티그라네스 휘하의 수비대를 격파했다.

2. 1. 플라타이아 전투와 그리스 탈출

아르타바주스는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자신의 군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크게 줄어든 아케메네스 군대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를 탈출하여 이오니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3] 헤로도토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병력은 4만 명으로 구성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아르타바주스가 테살리아에서 패배 사실을 밝히지 않았는데, 만약 그랬다면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신 그는 특별 임무를 위해 트라키아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트라키아에서 공격을 받아 병력을 잃었음에도 페르시아 영토로 돌아갈 수 있었다.

3.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의 사트라프

아르타바조스는 보상으로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의 사트라프(태수)가 되었다.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의 첫 번째 아케메네스 왕조 통치자는 미트로바테스(c. 기원전 525-522년)였으며, 키루스 2세에 의해 임명되었고 캄비세스 2세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살해되었고 그의 영토는 이웃 리디아의 사트라프 오로에테스에 의해 병합되었다. 다리우스 1세의 재편 이후, 미트로바테스의 뒤를 이어 메가바주스의 아들인 오에바레스 2세(c. 493)가 계승했다.

3. 1. 파르나케스 왕조



아르타바조스 1세는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의 사트라프였다.


아르타바조스는 기원전 479년에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의 사트라프(태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 파르나케스의 이름을 딴 파르나케스 왕조의 첫 번째 공식 사트라프였다. 이 직책은 그의 후손들에게 이어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시대까지 이어졌다.

통치 기간지도자
기원전 550년경–497년경파르나케스
기원전 480년경–455년경아르타바조스 1세
기원전 455년경–430년경파르나바조스 1세
기원전 430년경–420년경파르나케스 2세
기원전 413년경–374년경파르나바조스 2세
기원전 407년경–362년경아리오바르자네스
기원전 389년경–329년경아르타바조스 2세
기원전 370년경–320년경파르나바조스 3세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파르나바조스 1세(기원전 455년경 - 기원전 430년경)가 즉위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 다음은 그의 손자 프리지아의 파르나케스 2세(기원전 430년경 - 기원전 413년경)가 이어받았으며,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시 사트라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르나케스는 다시 그의 아들 파르나바조스 2세(기원전 413년경 - 기원전 373년경)에게 계승되었으며, 그는 티사페르네스와의 경쟁과 스파르타와의 전쟁으로 잘 알려져 있다.

4. 이집트 및 키프로스 원정

아르타바조스는 메가비주스와 함께 기원전 456년 이나로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파견한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이들은 2년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이나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아테네인들을 생포했다.[5] 이후 키프로스로 이동하여 키몬이 이끄는 아테네 군대에 맞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와 아테네 사이에 칼리아스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적대 행위는 종식되었다.

4. 1. 이집트 반란 진압

아르타바조스는 메가비주스와 함께 이집트에서 일어난 이나로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페르시아 군대의 지휘를 맡았다. 기원전 456년에 도착한 그들은 2년 안에 반란을 진압하고 이나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여러 아테네인들을 생포했다.[5]

크세르크세스 1세가 기원전 465년에 암살된 후,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아케메네스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집트의 이나루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형제이자 이집트의 페르시아 총독인 아케메네스를 격파하고 하이집트를 장악했다. 이나루스는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던 그리스인들과 연합했고, 기원전 460년 아테네는 이나루스를 돕기 위해 200척의 배와 6,000명의 중장 보병으로 구성된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집트군과 아테네군은 이집트의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멤피스를 점령했다.

이집트 병사, 기원전 470년경. 크세르크세스 1세 무덤 부조.


아테네인과 이집트인은 멤피스의 페르시아군을 포위했지만, 포위전은 장기화되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메가바주스를 보내 스파르타에 뇌물을 주어 아테네를 공격하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메가비주스에게 대규모 군대를 맡겨 이집트로 파견했다.[1] 디오도루스는 아르타바조스도 3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고 기록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페르시아군의 규모가 25,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9] 페르시아군은 훈련에 오랜 시간을 보낸 후 이집트에 도착하여 멤피스 포위전을 풀고 이집트군과 아테네군을 격파했다.[1][11]

4. 2. 멤피스 포위전과 프로소피티스 전투

크세르크세스 1세가 기원전 465년에 암살된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아케메네스 제국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중요한 곳은 박트리아이집트였다. 이집트의 이나루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형제이자 이집트의 페르시아 총독인 아케메네스를 격파하고 하이집트를 장악했다. 그는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던 그리스인들과 연합했고, 기원전 460년 아테네는 이나루스를 지원하기 위해 200척의 배와 6,000명의 중장 보병으로 구성된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집트군과 아테네군은 이집트의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멤피스를 점령했지만, 페르시아 성채는 함락시키지 못하고 몇 년 동안 포위했다.[6][7]

메가바주스는 멤피스 포위전(기원전 459-455년)과 프로소피티스 포위전(기원전 455년)에서 아테네인 및 이집트인과 싸웠다.


아테네인과 이집트인은 멤피스의 "백성(White Castle)"에 주둔한 페르시아군을 포위했다. 이 포위전은 최소 4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원정 전체 6년 중 마지막 18개월은 프로소피티스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메가바주스를 보내 스파르타에게 뇌물을 주어 아티카를 침공하게 하여 아테네군을 이집트에서 철수시키려 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메가비주스 휘하의 대규모 군대를 이집트로 파견했다.[1] 디오도루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메가비주스와 아르타바주스에게 30만 명의 병력을 맡겨 반란을 진압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킬리키아로 가서 킬리키아인, 페니키아인, 키프로스인으로부터 300척의 삼단노선 함대를 모으고 1년 동안 병사들을 훈련시킨 후 이집트로 향했다.[8] 그러나 현대의 추정치는 페르시아군 규모가 25,000명 정도로, 이미 억압받던 사트라피에서 그 이상 병력을 징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을 것이라고 본다.[9] 투키디데스는 아르타바주스를 언급하지 않지만, 헤로도토스는 그가 2차 페르시아 침공에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디오도루스가 그의 참전을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10]

페르시아군은 이집트군이 파프레미스에서 승리한 후 4년 동안 훈련했을 가능성이 있다. 메가비주스가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 멤피스 포위전을 해제하고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여 아테네군을 멤피스에서 몰아냈다.[1][11]

아테네인들은 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프로소피티스 섬으로 후퇴하여 배를 정박시켰다.[1] 메가비주스는 18개월 동안 그들을 포위했고, 운하를 파서 섬 주변의 강물을 빼내 섬을 본토에 연결했다.[1]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인들은 옛 섬으로 건너가 점령했고, 소수의 아테네 군대만이 리비아를 거쳐 키레네로 행군하여 살아남아 아테네로 돌아갔다.[1]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강물 배수는 이집트인들이 페르시아인들에게 항복하도록 유도했고, 페르시아인들은 아테네인들을 키레네로 자유롭게 떠나도록 허락했다.[1] 이집트 원정의 패배는 아테네에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투키디데스의 버전이 더 정확할 가능성이 높다.[12]

4. 3. 키프로스 원정과 칼리아스 평화 조약

아르타바조스는 당시 시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메가비주스와 함께 이집트에서 일어난 이나로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페르시아 군대의 지휘를 맡았다. 기원전 456년에 도착한 그들은 2년 안에 반란을 진압하고 이나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여러 아테네인들을 생포했다.[5] 이후 키프로스로 이동하여 키몬이 이끄는 아테네 군대의 공격에 대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와 아테네 간의 적대 행위는 칼리아스 평화 조약으로 종식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Parthians and Chorasmians had for their commander Artabazus son of Pharnaces, the Sogdians Azanes son of Artaeus, the Gandarians and Dadicae [[Artyphius]] son of [[Artabanus (son of Hystaspes)|Artabanus]]." https://penelope.uch[...] Herodotus
[2] 웹사이트 Herodotus 8,126-129 https://www.perseus.[...]
[3] 웹사이트 Herodotus 9,89 https://www.perseus.[...]
[4] 서적 CNG: MYSIA, Kyzikos. Circa 500-450 BC. EL Stater (20mm, 16.23 g). https://www.cngcoins[...]
[5]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6] 웹사이트 I, 110 https://www.perseus.[...]
[7] 웹사이트 I, 109 https://www.perseus.[...]
[8] 웹사이트 XI, 74–75 https://www.perseus.[...]
[9] 서적 Land Battles in 5th Century BC Greece: A History and Analysis of 173 Engagements McFarland & Company, Inc.
[10] 웹사이트 VIII, 126 https://www.perseus.[...]
[11] 웹사이트 XI, 77 https://www.perseus.[...]
[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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