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흐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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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흐디군은 이라크 전쟁 중인 2003년 6월에 창설된 시아파 민병대이다. 12이맘파에서 믿는 종말에 나타날 마흐디의 재림을 기다리며, 무크타다 알 사드르의 지휘 아래 이라크 시아파 지역의 질서 유지를 목표로 활동했다. 2004년에는 미군에 대항하여 봉기했으며, 2006년에는 세력이 4만~6만 명으로 확대되어 시아파 측의 폭력 기구로 활동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휴전과 무력 충돌을 겪었으며, 2008년 알 사드르의 군사 활동 중단 명령으로 해산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평화 여단 등 유사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이란의 지원을 받는 분파가 존재하여 수니파 주민 살해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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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흐디군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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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기간 | 2003년 – 2008년 |
| 본부 | 나자프, 쿠파, 사드르 시티 |
| 활동 지역 | 이라크 |
| 규모 | 60,000명 (2008년) |
| 해체 | 해체됨 |
| 전신 | 없음 |
| 후신 | 약속의 날 여단 |
| 이념 | |
| 정치적 이념 | 이라크 민족주의, 사드르 사상, 반-와하브주의, 시아 이슬람주의 |
| 종교적 이념 | 시아 지하드 |
| 주요 목표 | 반-연합군, 반미주의, 반-LGBT, 반-시오니즘, 반-수니파 |
| 지휘부 | |
| 지도자 | 무크타다 알-사드르 |
| 아군 | |
| 국가 | (쿠드스군) |
| 단체 | 이라크 바트주의자 및 수니파 반군 단체 제이시 무함마드 아사이브 알 알하크 바드르 여단 |
| 적군 | |
| 단체 | 살라피 지하드주의 반군 이라크 이슬람 국가 이라크 이슬람군 이라크 알카에다 무자헤딘 슈라 협의회 |
| 국가 | (친-연합군, 2003–2008) 다국적군 (2003–2008) |
| 주요 전투 | |
| 전투 목록 | 이라크 전쟁 고대 바빌론 작전 사드르 시티 포위전 알 쿠트 전투 나자프 전투 (2004년) 디와니야 전투 아마라 전투 카르발라 전투 (2007년) 바스라의 영국 기지 포위 바스라 전투 (2008년) 2008년 이라크 봄 전투 |
2. 명칭
시아파의 12이맘파에서는 마흐디를 12이맘 중 열두 번째 이맘인 후자트 알 마흐디와 동일한 인물로 여긴다. 따라서 '알-이맘 알-마흐디'라고 부른다. 그들은 마흐디가 대은폐 상태로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며, 세상의 끝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종파의 시아파 신자들은 이맘 마흐디가 어느 시대에나 이슬람 공동체(''움마'')의 정당한 통치자라고 믿기 때문에, 그를 "시대의 이맘"이라는 뜻의 '이맘 알-자만'이라고도 부른다.
메흐디군은 이라크 전쟁 초기인 2003년 6월 무크타다 알사드르에 의해 창설되었다. 초기에는 시아파 거주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고 샤리아에 기반한 지역 통치를 목표로 활동했다. 2004년에는 이라크 남부와 바그다드 등지에서 점령군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나 다국적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2005년에는 바스라에서 경쟁 조직인 바드르 군 병사들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2006년 초, 알사드르는 모든 이슬람 국가에 메흐디군 지원을 요청하며 세력 확장을 모색했다.
3. 역사
그러나 메흐디군은 활동 과정에서 수니파 주민, 경쟁 관계의 다른 민병대 조직원, 언론인, 영국군 병사 등을 납치하고 암살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자살 폭탄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전술을 사용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이러한 활동과 조직의 성장, 그리고 이후의 해산과 재편 과정은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3. 1. 초기 역사 (2003-2004)
무크타다 알 사드르와 소수의 시아파 지지자들에 의해 창설된 메흐디군은 처음에는 약 500명 정도의 신학교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과거 사담 시티로 알려졌던 바그다드의 사드르 시티 지역에서 알 사드르와 연계되어 활동했다. 메흐디군은 2003년 4월 9일, 미국 주도의 연합군에 의해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 발생한 치안 공백 상태에서 사드르 시티와 남부 이라크 도시들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초기에는 이라크 주민들에게 구호 물품을 나누어 주고 시아파 빈민가에서 약탈자들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민병대의 규모는 점차 커졌고, 알 사드르는 2003년 6월 메흐디군을 공식적으로 조직화했다.[13] 메흐디군은 최대 10,000명에 달하는 상당한 규모의 무장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사실상의 정부처럼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알 사드르는 설교를 통해 미국의 점령을 비판했지만, 초기에는 연합군을 직접 공격하는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이나 옛 바트당 잔존 세력의 게릴라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이란 쿠드스군 사령관이었던 가셈 솔레이마니는 2003년 이라크 전쟁 발발 직후 메흐디군 창설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14] 메흐디군은 샤리아 법에 기반한 지역 통치를 목표로 삼았다.
2004년에 들어서 메흐디군은 이라크 남부와 바그다드 등지에서 점령군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메흐디군은 수니파 세력,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민병대 조직원들, 언론인, 그리고 영국군 병사 등을 납치하고 암살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자살 폭탄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전술을 사용한다는 혐의도 받게 되었다.
3. 2. 2004년 시아파 봉기
2004년 4월 초, 무크타다 알사드르가 소유한 신문 ''알 하우자''가 폐쇄되고 그의 측근 중 한 명이 체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에 사드르는 4월 2일, 평소와 달리 격앙된 어조로 추종자들에게 설교했다. 다음 날인 4월 3일부터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거주 지역 전역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했으며, 이는 곧 메흐디군 민병대의 봉기로 확산되어 4월 4일에는 전면적인 봉기 양상을 띠었다.
메흐디군 병력은 나자프, 쿠파, 쿠트, 사드르 시티 등지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공공 건물과 경찰서를 장악하고 다국적군과 충돌했다. 카르발라에서는 전투 끝에 일부 지역을 장악했으며, 나시리야, 아마라, 바스라에서도 다국적군이 공격받았다. 나자프와 쿠파는 스페인군과의 교전 끝에 빠르게 점령되었고, 쿠트 역시 우크라이나군과의 충돌 후 점령되었다.
다국적군은 산발적인 교전 후 나시리야, 아마라, 바스라에서 민병대 활동을 일시적으로 진압했다. 그러나 사드르 시티에서는 메흐디군이 3곳의 경찰서에서 이라크 경찰을 몰아내고 미군을 매복 공격하여 미군 7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미군은 반격에 나서 경찰서를 탈환하고 수십 명의 메흐디군 민병대를 사살했지만, 메흐디군은 여전히 사드르 시티 빈민가 상당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4월 16일, 미군은 쿠트를 탈환하며 수십 명의 메흐디군 대원을 사살했다. 그럼에도 나자프와 쿠파, 카르발라 주변 지역은 사드르 세력의 통제하에 남아 있었다. 사드르 본인은 나자프에 머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다국적군은 2,500명의 병력으로 나자프를 봉쇄했으나, 협상을 위해 병력 규모를 줄였다. 5월 초 다국적군의 추산에 따르면, 카르발라에는 200~500명, 디와니야에는 300~400명, 아마라와 바스라에는 불확실한 수, 그리고 나자프-쿠파 지역에는 1,000~2,000명의 메흐디군 병력이 남아 있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5월 4일, 다국적군은 남부 이라크에서 메흐디군 소탕을 위한 반격을 시작했다. 첫 공세는 카르발라와 디와니야에서 동시에 이루어졌고, 5월 5일에는 카르발라에서 두 번째 공세, 5월 6일에는 나자프에서 주지사 사무실을 점령하는 추가 공격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민병대 약 86명과 미군 4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 특수 작전 부대는 별도의 급습 작전을 통해 여러 고위 민병대 지휘관을 사살했다. 5월 8일, 미군은 카르발라에서 양면 공격을 감행하며 추가 공세를 벌였고, 미군 탱크가 사드르 시티로 진입했다. 동시에, 아마도 기만 전술의 일환으로, 수백 명의 메흐디군 병력이 바스라를 급습하여 영국군 순찰대에 발포하고 도시 일부를 점령했다. 이 교전으로 민병대원 2명이 사망하고 여러 영국군이 부상을 입었다.
수 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막대한 손실을 입은 메흐디군은 5월 24일 카르발라에서 철수했다. 이로써 메흐디군의 확고한 통제 지역은 지속적인 미군의 공격을 받던 나자프-쿠파 지역만 남게 되었다. 봉기 기간 동안 총 수백 명의 메흐디군 민병대가 사망한 것으로 집계된다. 무크타다 알사드르는 전투 중에도 쿠파에서 정기적으로 금요 설교를 이어갔다.
2004년 6월 6일, 무크타다 알사드르는 메흐디군에게 나자프와 쿠파에서의 작전 중단을 명령했다. 잔존 민병대는 무장을 해제하고 미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으며, 점차 해당 지역을 떠나거나 귀가했다. 같은 날, 나자프 지역 최고위 미군 사령관이었던 준장 마크 허틀링은 "무크타다 민병대는 군사적으로 패배했다. 지난 몇 주 동안 나자프에서만 수십 명을 죽였고, 그건 나자프에서만 일어난 일이다. [...] 민병대는 패배했거나 떠났다."라고 말했다.[15] 이로써 6월 6일은 사실상 시아파 봉기의 종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라크 전역에서 전투로 사망한 마흐디군 민병대원의 총수는 1,500명에서 2,000명 사이로 추산된다.
휴전 이후 나자프가 이라크 치안 부대의 통제 하로 복귀하면서, 사드르 시티는 폭력적 저항을 계속하려는 메흐디군 게릴라의 마지막 거점으로 남았다. 나자프-쿠파 전투 종료 후에도 이 구역에서는 주기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6월 24일, 메흐디군은 사드르 시티에서도 작전을 종료한다고 발표하며, 당분간 민병대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다국적군과의 6월 4일 휴전 이후, 알사드르는 메흐디군 해산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나자프 외곽의 민병대원들에게 "임무를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이후 나자프의 미군은 이라크 경찰로 교체되었다. 알사드르는 지지자들에게 이라크 치안 부대를 공격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정당을 결성하여 2005년 선거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임시 정부가 통일된 이라크를 건설할 기회라고 언급했다. 임시 대통령 가지 야와르는 알사드르가 민병대를 포기한다면 정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약속했으며, 이라크 관리들은 알사드르가 체포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16]
이 봉기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반응은 다소 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 이라크인은 반군에 가담하거나 저항하지 않았으며, 많은 이라크 보안군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물러섰다. 전통적인 성직자들의 영향력이 강한 나자프에서는 메흐디군의 인기가 높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소규모 비밀 저항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봉기는 동시기 팔루자 포위 공격에 자극받은 바그다드의 시아파 급진주의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3. 3. 2004년 8월 나자프 전투
사드르의 민병대가 나자프의 경찰서를 포위하고 지방 정부가 지원을 요청하자, 미국군이 다시 개입했다. 미군은 7월 31일에 카르발라에서 사드르의 대리인인 셰이크 미탈 알 하스나위를 체포했고,[17] 8월 3일에는 알 사드르의 집을 포위했다.[18][19][20][21] 바스라에 주둔한 영국군 또한 8월 3일에 알 사드르 추종자들을 상대로 작전을 개시하여 4명을 체포했다. 8월 5일 정오까지 체포된 이들을 석방하라는 최후 통첩이 만료된 후, 바스라 민병대는 영국군에 대해 지하드를 선포했다.[22]
8월 5일, 알 사드르는 대변인 아흐메드 알 샤이바니를 통해 휴전 준수 의지를 재확인하고 미군에게 휴전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 그는 휴전이 복원되지 않으면 "혁명의 발포와 점화가 계속될 것"이라고 발표했다.[23] 이 제안은 나자프 주지사 아드난 알-주루피("타협이나 다른 휴전을 위한 여지는 없다")와 미군 관계자("우리가 정말 이길 수 있다고 느끼는 전투이다")에 의해 거부되었다.[24]
그 후 며칠 동안 나자프 구시가지, 특히 이맘 알리 사원과 묘지 주변에서 전투가 계속되었다. 나자프에 주둔한 약 2,000명으로 추산되는 메흐디군은 약 2,000명의 미군과 1,800명의 이라크 보안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으며, 헬리콥터와 AC-130 건쉽과 같은 미국의 월등한 전술, 훈련, 화력 및 공중 지원으로 인해 불리한 입장이었다. 8월 13일, 민병대는 이맘 알리 사원 주변의 포위망에 갇혔다. 이라크 임시 정부와 마흐디 군 간의 협상이 계속되는 동안, 알 사드르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5]
8월 12일, 영국 언론인 제임스 브랜든은 ''선데이 텔레그래프'' 소속 기자로 바스라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무장 세력에 의해 납치되었다. 브랜든과 복면을 한 무장 세력이 등장하는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되었으며, 무장 세력은 미군이 24시간 내에 나자프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영국인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브랜든은 구타당하고 권총으로 맞았으며, 가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여성을 칼로 위협하여 탈출한 후 정부 건물로 피신했으나, 그곳의 경비원이 납치범에게 연락하여 다시 붙잡혔다. 납치범들은 그가 언론인이라고 반복해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점령 세력의 스파이나 요원으로 의심했으나, 알아라비야 텔레비전에서 납치 관련 보도를 본 후에야 그가 언론인임을 인지했다. 이후 브랜든에 대한 대우는 눈에 띄게 개선되었고, 알 사드르의 개입으로 하루도 채 안 되어 석방되었다. 브랜든은 기자 회견에서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며 납치범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처음에는 거칠게 대했지만, 그들이 내가 언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매우 잘 대해주었고, 나를 납치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알 사드르의 대변인은 "당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이 아니고, 우리의 규칙도 아닙니다. 이슬람의 전통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26][27] 브랜든은 영국 군사 경찰에 인도되어 치료를 받고 다음 날 쿠웨이트로 이송되었다. 그는 가족을 만나 휴가를 보낼 계획이었지만 이라크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며 "다음에는 보도만 하고 싶을 뿐입니다. 다시 이야기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라고 덧붙였다.[28]
미군이 이맘 알리 사원을 포위하면서 마흐디 군은 사원을 떠날 수 없었고, 미군은 이슬람 성지를 침범하는 것을 꺼려하여 교착 상태가 발생했다. 이 교착 상태는 아야톨라 시스타니가 런던에서 요양을 마치고 돌아와 양측 간의 합의를 중재할 때까지 3주 동안 지속되었다.[29]
3. 4. 2005-2007년
알사드르 지지자들은 2005년 이라크 총선에서 국가 독립 간부 및 엘리트 연합의 깃발 아래 출마했다. 이 정당은 선거에서 전체 6위를 차지했으며 과도 입법부에 대표를 배출했다. 또한 알사드르와 연계된 약 20명의 다른 후보들도 이라크 연합 소속으로 출마했다.
메흐디군은 이라크 경찰에 침투하여 2005년 9월 바스라에서 발생한 영국 군인 2명의 체포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30] 2005년 12월 4일에는 전 총리 이야드 알라위가 메흐디군의 영향력이 강한 나자프에서 폭도들에게 공격을 받았다.[31]
2006년 10월 중순, 길가 폭탄 테러로 경쟁 조직인 바드르 조직 소속이자 지방 경찰 수사 책임자인 카심 알-타미미가 사망했다. 바드르 조직은 메흐디군을 배후로 지목했고, 경찰은 이에 대응하여 메흐디군 소속으로 의심되는 폭탄 테러범의 형제를 체포했다. 10월 17일, 메흐디군 소속 복면 무장대원 약 800명이 아마라의 경찰서 3곳을 습격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4일 동안 민병대와 경찰 사이에 여러 차례 교전이 벌어졌다.
2006년 10월 20일 아침, 지역 지도자들과 주민들은 승리한 메흐디군이 도보와 탈취한 경찰 차량을 이용하여 도시를 순찰하고 검문소를 설치했다고 전했다. 당시 셰이크 알-무하마다위는 "도시에 국가는 없다. 경찰은 모든 종류의 무기를 가진 민병대에 비해 충분한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32] 이 충돌로 최소 27명이 사망하고 118명이 부상당했다. 메흐디군은 지역 부족 지도자, 정치 지도자 및 바그다드의 누리 알말리키 총리 사무실 대표 간의 협상 끝에 아마라에서 철수했으며, 이후 이라크 육군의 한 대대가 바스라에서 파견되어 도시를 장악했다. 이 사건은 이라크 보안군의 취약성과 메흐디군의 강력함을 드러냈으며, 많은 이들이 이를 이라크 내전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했다.
2006년 초, 사드르는 모든 이슬람 국가에 마흐디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마흐디군은 수니파, 경쟁 민병 조직, 언론인, 영국군 병사 납치 및 암살 혐의로 비난받았으며, 자살 폭탄 테러 전술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보도에 따르면, 마흐디군 구성원들은 이라크 이슬람 최고 평의회파 등과 마찬가지로 이라크 경찰과 군에 침투를 시도했다. 정권 참여와 수니파 무장 세력의 시아파 대상 테러 등을 계기로 마흐디군은 조직을 크게 확장하여, 2006년 기준 총원은 약 4만 명에서 6만 명에 달했다.
2006년 2월 시아파 성지인 아스카리 사원 폭파 사건 이후 격화된 종파 항쟁에서 마흐디군은 시아파 측의 주요한 폭력 기구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누리 알말리키 정권 하에서는 보건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다수의 마흐디군 구성원을 직원으로 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2007년 2월 8일, 사드르파 간부인 하킴 아즈 자밀리 보건 차관이 미군·이라크군 합동 부대에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살인, 유괴, 민병대에 구급차 이용 허가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는 취하되었다.
2007년 2월, 미군 및 이라크군·경찰은 대규모 무장 세력 소탕 작전을 시작했으며, 메흐디군은 수니파 무장 세력과 함께 주요 소탕 목표가 되었다. 이 작전 이후 수니파 시민에 대한 납치나 학살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 마흐디군의 활동과의 연관성을 시사했다. 하지만 사드르파·마흐디군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하는 말리키 정권은 소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58], 이는 2007년 2월 17일 바그다드를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한편, 마흐디군은 세력 보존을 위해 간부와 핵심 멤버 다수를 인접국 이란으로 일시 출국시켰다는 보도가 있었다. 잘랄 탈라바니 대통령은 이들의 출국이 "치안 작전의 성공에 기여한다"며 환영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2007년 3월 5일, 연합군 1,150명이 마흐디군의 최대 근거지인 바그다드 동부 사드르 시티에 진입했으나, 별다른 무기 압수나 민병 체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3. 5. 2008년 바스라 전투 및 사드르 시티 포위전
2007년 8월 카르발라 전투 이후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선언한 휴전은 이라크 내 폭력 사태 감소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33] 2008년 2월 22일, 알 사드르는 이 휴전을 6개월 더 연장했다.[34][35]
그러나 2008년 3월 25일, 수천 명의 이라크군 병력이 메흐디군의 주요 거점인 바스라에 대해 "기사들의 반격 작전"(Operation Charge of the Knightseng)이라는 암호명 아래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이는 영국군이 바스라 시내 중심에서 철수한 이후 처음으로 시행된 대규모 작전이었다. 작전이 시작되자 이라크 보안군과 알 사드르를 따르는 무장 세력 간의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36] 이에 알 사드르는 자신의 본부가 있는 나자프에서 메흐디군 현장 지휘관들에게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점령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37] 전투는 남부 도시 쿠트에서도 이라크 경찰과 메흐디군 사이에 벌어졌다.[38]
메흐디군은 이라크 정부군의 급습과 대원 구금에 항의하며 이라크 전역에서 전국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은 알 사드르가 선언했던 휴전을 사실상 무력화시켰고, 종파 간 폭력이 다시 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또한 미국의 병력 철수 계획이 지연될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2008년 10월 1일로 예정되어 있던 이라크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시아파 내부의 권력 다툼이 폭력적으로 번질 것을 예상했다.[39]
한편, 4월 6일에는 이라크군과 미군이 바그다드의 사드르 시티 남부 지역으로 진입했다. 이는 해당 지역에서 그린 존을 향해 발사되는 로켓 및 박격포 공격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 미군 공병대는 사드르 시티 남부의 3분의 1을 봉쇄하고 재건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알-쿠드스 거리를 따라 콘크리트 장벽 건설을 시작했다. 이후 약 한 달 동안 메흐디군은 장벽을 건설하는 미군 및 이라크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으나, 오히려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2008년 5월 11일, 알 사드르는 이라크 보안군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전투를 종결시켰다. 이 전투 과정에서 메흐디군은 700명에서 1,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산된다.[40]
3. 6. 해산 및 부활 (2008-2014)
2008년 8월 8일, 알사드르는 마흐디군을 해산하고 군사 부문이 아닌 복지 및 정치 조직으로 재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때 조직 명칭을 "알-무마히둔"으로 변경하고, 미군이 철수와 관련된 일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만 미군을 공격하는 특별 게릴라 부대는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같은 해 8월 28일, 알사드르는 마흐디군에 대해 무기한 군사 활동 중단을 명령했다.[41]
해산 발표 이후 알사드르는 마흐디군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들을 만들었다. 2008년 11월에는 민병대 성격의 약속의 날 여단이 창설되었고,[42] 사회 사업 및 종교 교육에 중점을 둔 '무하미둔'이라는 조직도 만들어졌다.[43] 2010년 AP 통신 보도에 따르면, '지지자 동원'을 담당하는 '몬나세룬'이라는 세 번째 조직도 언급되었다.[44]
2008년 해산 발표 이후에도 마흐디군의 부활에 대한 소문은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2010년 4월, 2010년 이라크 총선에서 사드르파가 325석 중 40석을 획득하자 알사드르는 마흐디군의 재창설을 요구했다.[45] 같은 달 23일, 시아파 주민을 대상으로 한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알사드르는 이라크 정부에 이라크군과 경찰을 보조하고 시아파 신도를 보호하기 위해 마흐디군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재편을 시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라크 정부는 이를 거부했지만, 사드르파 대변인 살라 알 우바이디는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마흐디군이 이미 부활했다고 밝혔다. 부활한 무장 부대는 "약속의 날 대대"로 불렸으며, 2011년 12월 31일까지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공격을 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언급되었다. 우바이디는 또한 마흐디군 내부에 "무마히둔"과 "무나시룬"이라는 두 파벌이 존재하며, 군사 부문 병력이 수천 명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2014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의 위협이 커지자 알사드르는 시아파 성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평화 여단"의 창설을 발표했다.[46][47]
4. 이란의 영향
무끄따다 알-사드르는 역사적으로 이란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으나, 일반적으로 이라크 내 이란 성직자와 정치적 영향력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왔다. 걸프 전쟁 이후 이란으로 망명했던 이라크 이슬람 최고 위원회의 알-하킴 가문이나 다와당 지도자들과 달리[48], 알-사드르와 그의 가족은 사담 정권 시절에도 이라크를 떠나지 않았다. 이는 사담 정권 붕괴 후 알-사드르가 많은 지지를 얻는 배경이 되었다. 2006년 초, 알-사드르는 이란 등 이웃 이슬람 국가가 외세의 공격을 받을 경우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49] 그러나 이후 알-사드르는 다와당과 대립했으며, 2006년 누리 알-말리키 총리는 바스라에서 메흐디군을 겨냥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명령했다.[50]
2007년 말 또는 2008년, 무끄따다 알-사드르는 이란으로 건너가 곰에서 수년간 시아파 법학을 공부했으며, 2011년에 나자프로 돌아왔다.[45][51]
현재 메흐디군은 분파적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일부 분파는 이란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하고 주류 세력과 충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분파는 통칭 "특별 그룹"으로 불리며, 이란으로부터 무기를 제공받고 이란 내에서 훈련을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별 그룹의 지도자는 하이데르 마흐디 하둠 알-파와디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수니파 주민 살해 및 다국적군 공격 등을 감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특별 그룹들은 무끄따다 알-사드르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그의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다국적군에 따르면, 특별 그룹 지원의 핵심 역할은 이란의 혁명수비대 산하 알-쿠드스 군과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맡고 있다. 실제로 미군과 이라크군의 작전 과정에서 특별 그룹의 거점에서 이란제 무기가 다수 압수되기도 했다.
| 구분 | 내용 |
|---|---|
| 주요 지원 조직 | 이란 혁명수비대 알-쿠드스 군, 레바논 헤즈볼라 |
| 훈련 캠프 위치 | 이란 테헤란, 곰, 아바즈, 마슈하드 |
| 훈련 캠프 책임자 | 알-쿠드스 군 가셈 솔레이마니 준장 |
| 주요 훈련 내용 | 즉석 폭발 장치(IED) 및 신형 노상 폭탄 제조, 조직 세포 편성, 연락 방법, 암살 수단 등 |
| 주요 제공 무기 | RPG-29 등 |
| 훈련 캠프 내 주요 인물 | 하지 마흐디, 하지 사미르, 바키르 앗-사이다 |
| 관련 과격파 조직 | 아사이브 알-하크, 카타이 힙볼라 |
훈련 캠프에는 수배 중인 시아파 민병 지도자 3명, 하지 마흐디, 하지 사미르, 바키르 앗-사이다가 있으며, 각각 "아사이브 알-하크", "카타이 힙볼라" 등의 과격파 조직을 지도하고 있다.
또한, 메흐디군 내부에는 뚜렷한 정치적 신념 없이 범죄 활동에 가담하는 인물들이 유입되어 시민들을 상대로 금품 갈취, 살인, 밀수 등을 저지르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특별 그룹"과 범죄자 그룹에 반대하는 "현실파" 또는 "고결한 마흐디군"이라 불리는 내부 세력은 미군과 이라크군에 관련 간부 및 조직원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무끄따다 알-사드르 역시 메흐디군 내 정예 부대를 동원하여, 급진파 및 범죄자 그룹을 미군 체포 전에 자체적으로 처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전해진다.
5. 활동
이라크 전쟁 초기인 2003년 6월에 창설되었으며, 초기에는 시아파 지역의 질서 유지를 담당하고 샤리아에 근거한 지역 통치를 목표로 삼았다. 2004년에는 이라크 남부와 바그다드에서 점령군에 대항하여 봉기했으나 진압되었다. 2005년에는 바스라에서 바드르 군 병사와 교전하기도 했다. 2006년 초, 지도자 무크타다 알-사드르는 모든 이슬람 국가에 마흐디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2006년 8월 기준으로, 마흐디군은 연합군을 상대로 대규모 교전을 벌이는 경우는 드물었고, 연합군과 이라크 정부 역시 알-사드르를 체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마흐디군은 수니파 반군과의 전투에 참여했으며, 자신들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독자적인 사법 시스템을 운영했다.[52][53] 특히 이라크 내전 기간 동안에는 수니파 민간인을 대상으로 살해를 자행하는 암살단을 운영했다는 비판을 받았다.[54] 마흐디군은 수니파 인사, 경쟁 관계의 민병대 조직원, 언론인, 영국군 병사 등을 납치하고 암살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자살 폭탄 테러 전술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흐디군 구성원들은 (이라크 이슬람 최고 평의회파 등과 마찬가지로) 이라크 경찰과 군대에 침투하려는 시도를 벌였다. 또한, 누리 알말리키 정권 하에서는 보건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다수의 마흐디군 구성원을 직원으로 고용했다. 이로 인해 2007년2월 8일에는 사드르파 간부인 하킴 아즈 자밀리 보건 차관이 미군과 이라크군 합동 부대에 의해 구속되었다. 자밀리는 살인, 유괴, 민병대에 구급차 이용을 허가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는 취하되었다.
마흐디군은 창설 당시 약 5,000명 규모로 알려졌으나, 2004년 미군과의 교전으로 대부분이 사망하여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 정권 참여와 수니파 무장 세력의 시아파 대상 테러가 격화되는 상황을 기회로 삼아 조직을 비약적으로 확대하여, 2006년에는 총원이 약 4만 명에서 6만 명으로 늘어났다.
2006년 2월 시아파의 중요 성지인 알아스카리 모스크 폭파 사건 이후 격화된 종파 간 항쟁에서 마흐디군은 시아파 측의 주요 폭력 기구로 활동했다. 2007년 2월 시작된 미군 및 이라크 군경의 대규모 무장 세력 소탕 작전에서 마흐디군이 수니파 무장 세력과 함께 주요 소탕 대상이 된 이후, 수니파 시민에 대한 납치나 학살 사건이 급감했다.
하지만 사드르파와 마흐디군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하는 말리키 정권은 마흐디군 소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58], 소탕 작전 개시 후에도 이러한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이에 2007년2월 17일 바그다드를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수니파 소탕에만 집중하는 작전 내용에 불만을 표했다.
한편, 마흐디군은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간부와 핵심 조직원 다수(일설에는 알-사드르 본인 포함)를 인접국 이란으로 일시 출국시켰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그 영향력이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2007년3월 5일, 연합군 1,150명이 마흐디군의 최대 근거지인 바그다드 동부의 사드르 시티에 진입했으나, 무기 압수나 민병대원 체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잘랄 탈라바니 당시 이라크 대통령은 마흐디군 간부들의 이란 출국에 대해 "치안 작전의 성공에 기여한다"며 환영 입장을 밝혔다.
이후 마흐디군은 점차 분파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부 분파는 이란의 지원을 받아 무장과 훈련 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이들은 주류파와 충돌하기도 했다. 통칭 "특별 그룹"으로 불리는 이 분파들은 이란으로부터 무기를 제공받고, 소속 대원들을 이란 내에서 훈련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지도자는 하이데르 마흐디 하둠 알-파와디였다. 특별 그룹은 수니파 주민 살해와 다국적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무크타다 알-사드르조차 통제하지 못하고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다고 전해졌다. 다국적군에 따르면, 특별 그룹 지원에는 이란의 혁명수비대 산하 쿠드스군과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주요 역할을 했다. 실제로 미군과 이라크군의 작전을 통해 특별 그룹의 거점에서 이란제 무기가 다수 압수되었다. 훈련 캠프는 이란 내 테헤란, 곰, 아바즈, 마슈하드 등에 존재했고, 쿠드스군의 가셈 솔레이마니 준장이 책임자로 알려졌다. 훈련 내용은 급조폭발물(IED) 및 신형 노상 폭탄 제조, 점조직 구성, 연락 방법, 암살 기술 등이었다. 또한 쿠드스군과 헤즈볼라로부터 RPG-29와 같은 무기를 제공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배 중인 시아파 민병대 지도자 하지 마흐디, 하지 사미르, 바키르 앗-사이다 등이 이 훈련 캠프에 연루되었고, 이들은 각각 "아사이브 알 하크", "카타이브 헤즈볼라" 등의 과격파 조직을 이끌었다.
또한, 마흐디군 내부에는 특별한 정치적 신념이나 사상 없이 범죄 활동을 목적으로 합류한 인원들이 유입되어, 시민들을 상대로 세금을 징수하거나 살인, 밀수 등을 저지르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러한 "특별 그룹"과 범죄자 그룹에 반대하는 "현실파" 또는 스스로 "고결한 마흐디군"이라 칭하는 일파가 형성되었고, 미군과 이라크군에게 관련 간부 및 조직원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했다. 무크타다 알-사드르 역시 마흐디군 내 정예 부대를 동원하여, 미군에 체포되기 전에 급진파 및 범죄자 그룹을 자체적으로 처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6. 조직 구조
2006년 10월 초 디와니야에서 발생한 메흐디군과 다국적군 간의 충돌에 대해 BBC 뉴스는 당시 메흐디군이 단일화된 지휘체계를 갖춘 조직이 아니며, 지역별 조직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도했다.[55]
같은 해 9월, 한 고위 연합 정보 관계자는 알-사드르의 비교적 온건한 정치 노선에 반발하는 세력이 조직 내에 존재하며 정치적 균열이 있다고 언급했다.[56] 이 관계자는 최소 6명의 주요 지도자가 더 이상 알-사드르에게 보고하지 않으며, 전체 병력의 약 3분의 1이 그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난 것으로 추정했다.[57] 여러 보도에 따르면, 메흐디군 대원들은 이라크 이슬람 최고 평의회 계열 등 다른 시아파 민병대와 마찬가지로 이라크 경찰과 군대에 침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누리 알말리키 정권 하에서 보건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다수의 메흐디군 대원을 직원으로 고용했다. 이로 인해 2007년 2월 8일에는 사드르파 간부인 하킴 아즈 자밀리 보건 차관이 미군과 이라크군 합동 부대에 의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밀리는 살인, 유괴, 민병대의 구급차 이용 허가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는 취하되었다.
현재 메흐디군은 분파 경향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분파는 이란의 지원을 받아 무장 및 훈련 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주류파와 충돌하기도 한다. 통칭 "특별 그룹"으로 불리는 이들 분파는 이란으로부터 무기를 제공받고, 소속 대원들을 이란 내에서 훈련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그룹의 지도자는 하이데르 마흐디 하둠 알-파와디이다. 특별 그룹은 수니파 주민 살해 및 다국적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무크타다 알-사드르조차 통제하지 못하고 그의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다국적군에 따르면, 특별 그룹 지원에는 이란의 혁명수비대 산하 알-쿠드스 군과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미군과 이라크군의 작전을 통해 특별 그룹의 거점에서 이란제 무기가 압수되고 있다. 훈련 캠프는 이란 내에 있으며, 테헤란, 곰, 아바즈, 마슈하드 등지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캠프 책임자는 알-쿠드스 군의 가셈 솔레이마니 준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 캠프에서 특별 그룹 대원들은 급조 폭발물(IED) 및 신형 노상 폭탄 제조, 세포 조직 구성, 연락 방법, 암살 기술 등을 훈련받는다. 또한 알-쿠드스 군과 헤즈볼라로부터 RPG-29와 같은 무기를 제공받는 것으로 보인다.
훈련 캠프에는 수배 중인 시아파 민병대 지도자 3명, 즉 하지 마흐디, 하지 사미르, 바키르 앗-사이다가 관여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각 "아사이브 알-하크", "카타이 힙볼라" 등의 과격파 조직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메흐디군 내부에는 특별한 정치적 신념 없이 범죄 활동을 목적으로 합류한 인원들도 상당수 존재하며, 이들은 시민들을 상대로 금품 갈취, 살인, 밀수 등을 자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특별 그룹"과 범죄 집단에 반대하는 "현실파" 또는 스스로를 "고결한 마흐디군"이라 칭하는 일파가 형성되어, 미군과 이라크군에게 이들 과격파 및 범죄자들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무크타다 알-사드르 역시 메흐디군 내 정예 부대를 동원하여, 과격파 및 범죄 집단을 미군에 체포되기 전에 자체적으로 처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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