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히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모히 전투는 1241년 4월 11일에 일어난 몽골 제국과 헝가리 왕국 간의 전투이다. 몽골군의 유럽 침공 과정에서 벌어졌으며, 몽골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헝가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헝가리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벨라 4세는 달마티아로 피신했으며, 헝가리 영토는 몽골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전투 결과 헝가리 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헝가리는 폐허가 되었다. 몽골군은 헝가리 정복 후에도 유럽 지역에서 약탈을 이어갔으나,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인해 철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241년 분쟁 - 레그니차 전투
1241년 몽골 제국의 폴란드 침공 중 레그니차 인근에서 벌어진 레그니차 전투는 헨리크 2세가 이끄는 폴란드-독일 연합군이 바이다르와 카단이 이끄는 몽골군에 패배한 전투로, 몽골의 유럽 원정 중 중요한 전투이며 폴란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241년 유럽 - 레그니차 전투
1241년 몽골 제국의 폴란드 침공 중 레그니차 인근에서 벌어진 레그니차 전투는 헨리크 2세가 이끄는 폴란드-독일 연합군이 바이다르와 카단이 이끄는 몽골군에 패배한 전투로, 몽골의 유럽 원정 중 중요한 전투이며 폴란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몽골 제국이 참가한 전투 - 레그니차 전투
1241년 몽골 제국의 폴란드 침공 중 레그니차 인근에서 벌어진 레그니차 전투는 헨리크 2세가 이끄는 폴란드-독일 연합군이 바이다르와 카단이 이끄는 몽골군에 패배한 전투로, 몽골의 유럽 원정 중 중요한 전투이며 폴란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몽골 제국이 참가한 전투 - 아인잘루트 전투
아인잘루트 전투는 1260년 9월 3일 팔레스타인에서 맘루크 술탄국군이 몽골 제국군을 격파하여 몽골 제국의 서진 확대를 저지하고 맘루크 왕조가 중동을 지배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모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 | 모히 전투 |
부분 | 몽골의 헝가리 침공의 일부 |
시기 | 1241년 4월 11일 |
장소 | 헝가리 모히 인근 셔요강 |
결과 | 몽골 제국의 승리 |
좌표 | 47 |
구글 지도 검색어 | 무히 헝가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성전 기사단 소규모 파병 부대: 오스트리아 공국 |
교전국 2 | 몽골 제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헝가리 왕국 | 벨러 4세 칼만 우그린 차크 마차시 라토트 프리드리히 2세 데네시 토머이 렘발트 드 보크존 |
몽골 제국 | 바투 칸 수부타이 샤이반 베르케 칸 보롤다이 바카투 |
병력 규모 | |
헝가리 왕국 | 25,000명 - 80,000명 |
몽골 제국 | 15,000명 - 70,000명 기병 돌 던지기 투석기 최소 7대 |
손실 규모 | |
헝가리 왕국 | 군대의 대부분, ~10,000명 (당대 기록) |
몽골 제국 | 수백 명 매우 큼 |
관련 전투 | |
전투 목록 | 외게데이 칸의 전투 목록 몽골의 침략 전투 목록 몽골의 헝가리 침공 전투 목록 |
추가 정보 | |
기타 | 출처 필요 |
2. 배경
13세기 초 칭기즈 칸의 정복 전쟁 이후 급격히 팽창한 몽골 제국은 1236년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대규모 서방 원정에 나섰다. 몽골군은 먼저 볼가 불가리아를 시작으로 쿠만, 루스 공국들을 차례로 정복하며 서쪽으로 진격했다.[21]
1241년 초, 몽골군은 병력을 나누어 폴란드와 헝가리를 동시에 침공했다. 바이달이 이끄는 부대가 폴란드 북부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바투와 수부타이가 지휘하는 몽골군 본대는 카르파티아산맥의 베레츠키 고개를 돌파하여 헝가리 영토로 빠르게 진입했다.[21]
당시 헝가리 왕국은 벨러 4세 국왕의 통치 아래 있었다. 벨러 4세는 아버지 언드라시 2세 시절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토지 환수 정책 등을 추진하여 귀족들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20] 특히 귀족들이 사적으로 성이나 요새를 짓는 것을 금지한 정책은 왕권 강화에는 기여했지만, 결과적으로 몽골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 시설 부족이라는 문제를 낳았다.[20]
이러한 내부적 불안정 속에서 헝가리는 외부의 위협에도 직면했다. 벨러 4세는 몽골에 쫓겨 온 쿠만족 약 4만 명의 피난민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몽골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24] 헝가리 내부에서 쿠만족과 기존 주민들 사이의 갈등을 유발했다. 몽골군의 침공이 임박한 시점에 수도 페슈트에서 쿠만족 지도자 쾨텐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배신감을 느낀 쿠만족은 헝가리를 떠나면서 남부 지역을 약탈했다.[25] 이로 인해 헝가리는 몽골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중요한 병력인 쿠만족을 잃게 되었다.[25]
몽골군의 빠른 진격 속도와 쿠만족의 이탈, 그리고 왕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헝가리 군대의 동원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25] 결국 벨러 4세는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몽골군에 맞서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2. 1.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
1236년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몽골 제국의 군대는 서방 원정에 나서 먼저 볼가 불가리아를 침공했다.[21] 같은 해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으며, 1237년에는 체첸 지역을 공격했다. 이후 쿠만 여러 부족과 루스 공국들을 차례로 정복(1237년-1240년)했다.1240년 말부터 1241년에 걸쳐 폴란드를 침공한 몽골군은 투르스크 전투(2월 13일)에서 승리한 후 산도미에시에서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바이달이 이끄는 부대는 폴란드에 남아 침공을 계속했고, 바투가 이끄는 본대는 헝가리로 향했다. 폴란드에 남은 바이달의 군대는 흐몌르니크 전투(3월 18일)에서도 승리했으며, 실롱스크 공국의 헨리크 2세는 레그니차에서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1세가 이끄는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바이달의 군대는 레그니차 전투에서 헨리크 2세의 군대를 격파했다.[21]
한편, 몽골군의 다른 부대는 남쪽에서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하여 지역 군주(Voivode)를 물리치고 트란실바니아 군대를 섬멸했다.[21]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 주력 부대는 카르파티아산맥의 요새화된 베레츠키 고개를 돌파하여 헝가리로 진입했다. 1241년 3월 12일, 이들은 팔라틴 백작 데니스 토마이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고 판노니아 평원으로 나아갔다.[21] 바투의 형제인 시반이 이끄는 또 다른 부대는 주력군의 북쪽에서 기동했다.[21]
헝가리의 벨라 4세 국왕은 침공 전 동부 국경 지대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여 몽골군의 진격을 늦추려 했으나, 몽골군은 특수 부대를 동원해 단 3일 만에 장애물을 제거하고 길을 열었다.[22] 유럽인들이 "번개"라고 묘사할 정도로 빠른 몽골군의 진격 속도 때문에 헝가리군은 제대로 병력을 집결시킬 시간을 갖지 못했다.[23] 베레츠키 고개가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벨라 4세는 북쪽의 헨리크 2세가 레그니차에서 바이달의 군대를 상대하는 동안, 자신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바투의 몽골군 본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출진했다.
2. 2. 헝가리의 방어 정책과 준비
헝가리 왕국의 군사 정책은 귀족들이 사적으로 돌성이나 요새를 건설하는 것을 금지하고, 왕실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었다. 이는 왕권 강화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서쪽 국경 외에는 방어 시설이 부족하게 되는 결과를 낳아 몽골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20] 벨러 4세는 침략에 대비해 동쪽 국경에 자연 장벽을 만들었으나, 몽골군은 특수 부대를 동원해 단 3일 만에 이를 제거하며 신속하게 경로를 개척했다.[22] 몽골군의 빠른 진격 속도 때문에 헝가리군은 제대로 병력을 집결할 시간조차 부족했다.[23]헝가리는 이전부터 쿠만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고, 벨러 4세는 '쿠마니아 국왕'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몽골에 패한 쿠만족 약 4만 명이 헝가리로 피난을 오자 벨러 4세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몽골은 헝가리를 경쟁자로 여겼고, 쿠만족의 헝가리 이주를 전쟁 명분으로 삼았으며, 과거 헝가리가 사절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24]
몽골의 위협은 헝가리 내부의 정치적 혼란기에 찾아왔다. 언드라시 2세 시절 귀족들에게 과도하게 토지가 분배되었는데, 그의 아들 벨러 4세는 즉위 후 아버지의 토지 기증을 몰수하고 귀족들의 권한을 축소하려 했다. 그는 귀족들의 직접 청원을 금지하고 서면 청원만 받았으며, 의회 회의실의 의자를 치워 모두 서 있게 하는 등 귀족들의 불만을 사는 정책을 펼쳤다. 이런 상황에서 벨러 4세가 새로 받아들인 쿠만인들을 헝가리인과의 분쟁에서 옹호하자 귀족들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
벨러 4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페슈트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2세 공작도 지원을 위해 도착했다. 그러나 페슈트에서 헝가리인과 쿠만인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왕의 보호 아래 있던 쿠만족의 칸 쾨텐이 살해당했다. 일부 기록은 이 폭동 선동에 프리드리히 공작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호라즘 원정 당시처럼 몽골 첩자들이 쿠만족과 몽골이 동맹을 맺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혼란을 부추겼을 수도 있다. 배신감을 느낀 쿠만인들은 남쪽으로 후퇴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이 사건과 더불어, 일부 부대는 페슈트에 도착하기 전에 몽골군이나 후퇴하는 쿠만족에게 격파당했으며, 왕에게 불만을 품은 많은 귀족들이 동원을 거부하면서 헝가리의 군대 집결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특히 몽골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유럽 유일의 군대였던 쿠만족의 이탈은 헝가리에게 뼈아픈 손실이었다.[25]
3. 전투의 전개 과정
1241년 4월 11일, 헝가리의 벨러 4세가 이끄는 군대와 몽골 제국의 바투 칸, 수부타이가 이끄는 군대가 셔요강 유역의 무히 평원에서 충돌했다. 헝가리군은 셔요강 서쪽에 수레 진영을 구축하고 강 동쪽에 교두보를 확보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초반에는 헝가리군이 몽골군 선봉대를 격파하고 돌다리를 점령하는 등 우세를 보였으나, 다음 날 새벽 몽골군은 투석기를 동원한 집중 공격으로 교두보를 파괴하고 돌다리를 다시 장악했다. 바투 칸의 주력 부대가 강을 건너오자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 중 수부타이가 이끄는 별동대가 강을 건너와 헝가리군의 후방을 공격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좁은 평원에 갇힌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포위 공격과 원거리 무기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수부타이는 의도적으로 포위망의 일부를 열어 헝가리군의 탈출을 유도했고, 무장 해제하고 도주하는 병사들을 경기병으로 추격하여 대부분 섬멸했다.
이 전투로 벨러 4세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달마티아로 피신했지만, 헝가리 군대는 사실상 전멸했으며 왕국의 대부분은 몽골군의 점령 하에 놓였다.
3. 1. 초기 상황
1241년 4월 9일 레그니차 전투에서 폴란드 군대를 물리친 몽골 제국 군대는 카르파티아산맥과 도나우강을 건너 헝가리 원정에 나섰다. 이 소식을 접한 헝가리의 벨러 4세 국왕은 군대를 소집하여 몽골군에 맞설 준비를 시작했다.헝가리를 침공한 몽골군은 바투 칸이 이끄는 주력 부대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부대로 나뉘어 움직였다. 바투 칸의 부대는 다뉴브강을 건너 진격하던 중 헝가리군과 마주쳤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바투의 부대는 일단 후퇴했고, 이를 추격한 헝가리 군대는 셔요강 남서쪽의 무히 평원에 도착했다. 한편, 수부타이가 이끄는 부대는 바투 부대와 멀지 않은 곳에서 셔요강의 다른 도하 지점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하며 헝가리군을 포위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몽골군이 접근하는 동안, 헝가리군은 아직 완전히 집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3월 15일 페슈트(Pest) 근처에 나타난 몽골 선봉대는 주변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벨러 4세는 아직 군대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교전을 금지했지만, 오스트리아의 프레드릭 공작은 독단적으로 소규모 몽골 약탈 부대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그는 이 작은 승리를 빌미로 벨러 4세를 비겁하다고 비난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26] 이 외에도 칼로차 대주교 우그린 차크(Ugrin Csák, Archbishop of Kalocsa)가 이끄는 부대나 팔라틴 백작의 군대 등 여러 헝가리 부대들이 몽골군에게 유인당하거나 각개격파 당하는 손실을 입었다.[26]
마침내 벨러 4세는 몽골군과 결전을 치르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이끌고 무히 평원으로 향했다. 일주일간의 강행군과 몽골군의 산발적인 공격을 받으며 헝가리군은 셔요강에 도착했다. 강의 범람과 강 건너편의 숲 때문에 벨러 4세와 헝가리군은 주력 몽골군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헝가리군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독일 연대기 에프터나허 노티츠(Epternacher Notiz)는 헝가리군 사상자가 1만 명이라고 기록하여 전체 병력이 그 정도였음을 시사한다.[27] 몽골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라시드 알딘(Rashid al-Din)이 몽골 자료를 인용하여 중앙 유럽 침공에 총 4만 명의 기병이 동원되었으며, 무히 전투에는 그 일부가 참여했다고 기록했다.[28] 양측 기록은 서로 상대방의 병력이 더 많았다고 주장하며 과장된 수치를 제시하기도 했다.[29][30]
무히 평원에 도착한 벨러 4세는 즉시 몽골군 선봉대를 격파하고 셔요강의 유일한 돌다리를 확보하여 강 동쪽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후 강 서쪽 본진에는 유목민족의 기병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수레를 원형으로 연결하여 방벽을 세우는 수레 진영을 구축하고 야영에 들어갔다.[31] 헝가리군은 눈앞의 바투 부대가 자신들보다 수적으로 열세라고 판단하고 다소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3. 2. 몽골군의 공격
1241년 4월 11일 전투 당일 새벽,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야간 공격 계획을 루테니아 출신 탈주 노예를 통해 미리 알게 되었다.[32] 이에 국왕 벨러 4세의 동생인 슬라보니아 공작 콜로만과 우그린 차크 대주교, 템플 기사단장 등은 셔요강의 다리를 방어하던 몽골군 선발대를 기습 공격했다. 헝가리군의 석궁 공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몽골군은 큰 피해를 입고 다리 너머로 밀려났으며, 일부는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 헝가리군은 이 작은 승리에 만족하여 일부 병력만 다리 방어에 남겨둔 채 본진으로 돌아가 승리를 자축했다.[34]그러나 헝가리군의 방심과 달리,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군 본대는 아침이 되자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바투는 투석기 7대를 동원하여 셔요강 동안에 헝가리군이 확보했던 교두보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섬광"을 동반한 포격과 함께 몽골 기마대가 돌격하자, 다리를 지키던 헝가리군은 혼란에 빠져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바투는 손쉽게 돌다리를 다시 확보했다.
몽골군 주력이 셔요강을 건너오자 벨러 4세는 주력 부대를 투입하여 강을 건너는 몽골군을 격퇴하려 했다. 헝가리 기병대는 여러 차례 용맹하게 돌격했지만, 몽골군은 투석기와 활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질 무렵, 강 남쪽으로 우회하여 도하 지점을 찾던 수부타이가 이끄는 별동대가 전장에 도착하면서 헝가리군은 순식간에 포위되었다.
무히 평원은 대규모 병력이 기동하기에는 너무 좁은 지형이었고, 이는 몽골군의 포위 전술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33] 완전히 포위된 헝가리군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돌과 화살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세가 기울자 수부타이는 의도적으로 포위망의 서쪽 일부를 열어 헝가리군의 탈출로를 만들어 주었다.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던 헝가리 병사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몽골 경기병들의 추격을 받아 대부분 살해당했다.
3. 3. 헝가리군의 패배
셔요강을 건넌 몽골 제국 군대가 진격해오자, 벨러 4세 국왕은 셔요강 서쪽 강가에 주력 부대를 배치하고 방어 진형을 구축했다. 헝가리군은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판단하여 안심했지만, 이는 섣부른 판단이었다. 바투 칸은 다음 날 아침, 투석기 7대를 동원하여 셔요강 동쪽 강가에 있던 헝가리 군대의 교두보를 집중 공격했다.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섬광"을 동반한 포격과 함께 몽골 기마대가 돌격하자 헝가리 군대는 후퇴했고, 바투 칸은 셔요강의 돌다리를 다시 장악했다. 몽골군은 이 과정에서 선봉대와 함께 요충지를 직접 공격했을 때 바아타르(경호원) 30명과 부관 바카투 한 명을 잃는 등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35]몽골 제국 군대가 셔요강을 건너오자 벨러 4세는 주력 부대를 투입하여 강으로 몰아내려 했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헝가리 기병대는 여러 차례 돌격을 시도했지만, 몽골군은 투석기와 활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방어하며 격퇴했다. 결정적으로, 수부타이가 이끄는 별동대가 전장에 도착하여 헝가리 군대를 완전히 포위했다. 몽골군이 입은 손실과 헝가리군의 규모 때문에 바투는 한때 철수를 제안하기도 했으나, 수부타이는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공격을 재개했다.[36][37]
무히 평원은 대규모 군대가 기동하기에는 너무 좁은 지형이었다. 포위된 헝가리 군대는 몽골군의 끊임없는 돌과 화살 공격에 발이 묶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진영 내부는 불화살 등으로 인한 공포와 혼란에 빠졌고, 병사들은 서로 짓밟히며 사상자가 속출했다. 왕에 대한 귀족들의 충성심도 낮아 탈영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벨러 4세의 동생 콜로만이 병력을 모아 돌격을 감행했으나 격퇴당했다.[38]
전투 막바지에 수부타이는 의도적으로 서쪽 방면의 포위망을 열어 헝가리 군대가 도망칠 길을 터주었다. 절망에 빠진 헝가리 군인들 중 일부는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이 탈출구를 통해 도망치려 했으나, 이는 몽골군의 함정이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몽골 경기병들은 도망치는 헝가리 군대를 추격하여 대부분 학살했다. 스플리트의 토마스는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며, 헝가리군이 도망치려 했던 길이 시체로 가득 차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기록했다.[39]
우그린 대주교를 비롯한 여러 고위 성직자와 관리들이 전투 중 사망했다. 벨러 4세 국왕과 동생 콜로만은 간신히 탈출했지만, 콜로만은 전투 중 입은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벨러 4세는 달마티아로 피신했지만, 헝가리 군대는 사실상 전멸했고 헝가리는 몽골 제국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4. 전투의 결과
벨러 4세는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달마티아 해안의 섬으로 피신했지만, 헝가리군은 이 전투에서 거의 궤멸되었고 헝가리 전역은 몽골군의 점령하에 놓였다. 이는 헝가리의 막대한 피해로 이어졌다.
한편, 바이달이 이끄는 몽골군 별동대는 보헤미아군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면서 북쪽으로 기동하여, 1241년 4월 9일 레그니차(현 폴란드)에서 실레지아 공작 헨리크 2세가 이끄는 폴란드-독일 연합군과 격돌했다. 이 레그니차 전투(바르슈타트 전투)에서 몽골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헨리크 2세는 전사했다. 이후 바이달의 군대는 브로츠와프를 파괴하고 남하하여 당시 헝가리령이었던 모라비아(현 체코 동부)로 이동, 올로모우츠에서 올로모우츠 전투를 치렀다.
이후 바이달 부대는 서진하던 바투가 이끄는 본대와 합류하여 다음 목표인 빈으로의 진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1242년, 몽골 제국의 대칸 오고타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새로운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원정군 총사령관 바투는 귀환 명령을 내렸고, 몽골군은 점령했던 헝가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몽골군의 철수로 이어졌다.
4. 1. 헝가리의 피해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참패한 후, 카단이 이끄는 몽골군은 벨러 4세를 추격하며 헝가리 영토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수도 페슈트는 함락되어 불탔고, 에스테르곰 역시 공격받아 많은 주민이 학살당했다. 다만 몽골군의 주 목표는 왕을 사로잡는 것이었기에 대규모 포위 공격은 피했고, 에스테르곰 성채 자체는 함락되지 않았다.[57]몽골군은 체계적으로 헝가리 대평원, 북부 카르파티아 산맥의 사면,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해 나갔다. 저항하는 지역의 주민들은 무참히 살해되었고, 저항하지 않는 지역의 남성들은 몽골군의 노예로 끌려갔다. 헝가리는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으며, 이 소식은 유럽 전역에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49] 헝가리 내 거주지의 거의 절반이 몽골 침략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약 15~25%가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혀가는 등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50] 특히 알폴드와 같은 저지대, 헝가리 평원 남부의 바나트 지역, 그리고 트란실바니아 남부의 피해가 극심했다.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한 벨러 4세는 결국 달마티아까지 쫓겨났다. 피신 과정에서 왕실 가족은 잠시 오스트리아로 피신하여 벨러 4세의 숙적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 공작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오히려 그에게 체포되어 막대한 금품을 강탈당하고 서부 3개 주를 오스트리아에 할양해야 하는 굴욕을 겪었다.[51] 이후 벨러 4세와 일부 수행원들은 헝가리 남서쪽 아드리아 해 연안의 섬 요새인 트로기르로 도망쳐 몽골군이 철수할 때까지 머물렀다.[52] 헝가리의 참혹한 패배와 황폐화 소식은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대서양 연안까지 공포와 공황 상태가 확산되었다.[53]
한편, 모히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던 왕실 수행원 일부와 무장한 농민들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몽골군에 저항하려 했으나,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54] 몽골군은 강력한 요새는 우회하는 대신 주변 농경지와 관개 시설을 파괴하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는 이후 헝가리에 대규모 기근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55] 몽골군은 약탈을 멈추지 않고 헝가리 시골 지역을 공격하며 잔존 헝가리군을 무자비하게 추격했고, 발견되는 대로 모든 낙오병들을 살해하며 점령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66][32]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약 1만 명의 헝가리 군인이 사망했는데, 이는 사실상 헝가리 군대 전체가 궤멸되었음을 의미한다.[67]
4. 2. 몽골군의 상황
무히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몽골군은 상당한 대가를 치렀다. 전투 후 몽골군 내부에서는 지휘관들 사이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몽골과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총사령관이었던 바투는 무히 전투에서 발생한 손실에 대해 수부타이를 비난하려 했다고 전해진다.[64] 바투는 전투에서 30명이 넘는 바아투르와 부사령관 바카투를 포함해 수백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은 것에 대해 크게 불만을 가졌다.[58][59][60][61] 이는 당시 몽골군에게는 매우 이례적으로 큰 피해였다. 결국 승리 축하연에서 바투는 한발 물러서 승리의 공을 수부타이에게 돌려야 했다.게다가 귀유크와 뷔리는 바투가 무능하며 수부타이의 공에 편승해 승리했다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바투는 두 왕자와 뭉케(아마도 증인으로서)를 카라코룸으로 돌려보내 오고타이에게 심판을 받게 했다. 이들이 자신의 군대를 데리고 떠났을 가능성이 높아, 몽골군의 전력은 더욱 약화되었다.[62][63]
원사(元史)의 수부타이 전기에 따르면, 강을 건넌 후 일부 왕자들이 적의 수가 많다는 이유로 후퇴하려 하자 수부타이는 "왕자들이 돌아가고 싶다면 혼자 돌아가라. 나는 마자르(헝가리)의 도나우 시(부다페스트)에 도착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진격을 강행했고, 결국 도시를 함락시켰다고 한다. 이후 열린 집회에서 바투는 수부타이의 공을 인정하며 "당시 달성된 모든 것은 수부타이의 공로였다"고 말했다.[64]
한편, 교황의 사절이었던 죠반니 다 피아노 델 카르피네는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많은 몽골군이 사망했으며, 바투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군대가 후퇴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바투가 직접 병사들을 독려하여 승리를 이끌었다는 내용으로, 전투 중반 수부타이가 후퇴를 막았다는 원사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65]
이러한 내부 갈등과 손실 속에서도 몽골군은 헝가리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1241년 말 또는 1242년 초,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칸의 사망은 몽골 제국의 관습에 따라 모든 왕자들이 수도 카라코룸으로 돌아가 새로운 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에 참여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바투는 유럽 원정을 중단하고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몽골군은 1242년 봄,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점령지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5. 무기 및 전술
몽골군은 기동성을 핵심으로 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바투가 이끄는 부대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부대로 나뉘어 움직였는데, 바투 부대가 샤이오 강 인근에서 헝가리군과 마주치자 수적으로 열세임을 고려하여 후퇴하는 척하며 헝가리군을 무히 평원으로 유인했다. 그 사이 수부타이 부대는 바투가 사용한 돌다리 외의 도하 지점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우회 기동하여 헝가리군을 포위할 준비를 했다.[40][41][42][43][44]
전투가 시작되자 몽골군은 다양한 무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벨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초반에 샤이오 강 돌다리를 확보하고 동쪽 강가에 교두보를 마련하자, 바투는 다음 날 아침 7대의 투석기(회회포, 트레뷰셰트)를 동원하여 교두보에 돌과 화살 공격을 집중했다. 이 공격은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섬광을 동반하며 헝가리군을 혼란에 빠뜨렸고, 몽골 기병대의 돌격과 연계되어 헝가리군을 후퇴시키고 돌다리를 다시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5] 이후 벌어진 격전에서도 몽골군은 투석기와 활을 이용해 여러 차례 돌격해오는 헝가리 기병대를 효과적으로 격퇴했다.[46][47]
몇몇 현대 역사가들은 몽골군이 이 전투에서 중국에서 유래한 화약 무기와 화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40][41][42][43][44] 윌리엄 H. 맥닐(William H. McNeill)은 당시 헝가리에서 중국산 화약 무기가 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45] 다른 자료에서는 "화염탄"이나 "나프타 폭탄"과 같은 무기가 언급되기도 한다.[46][47] 케네스 워렌 체이스(Kenneth Warren Chase)는 몽골이 유럽에 화약과 관련 무기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48]
수부타이의 별동대가 도착하여 포위망이 완성되자 몽골군의 전술적 우위는 더욱 명확해졌다. 좁은 무히 평원에 갇힌 헝가리군은 몽골군이 쏟아붓는 엄청난 양의 돌과 화살 세례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몽골군은 의도적으로 포위망의 서쪽을 열어 헝가리군에게 탈출구를 만들어 주었으나, 이는 함정이었다.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달아나는 헝가리군을 기동성이 뛰어난 몽골 경기병이 추격하여 대부분 섬멸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마무리했다.[40][41][42][43][44]
반면, 헝가리군은 전통적인 유럽식 중장기병 중심의 전술을 구사했으나 몽골군의 유연한 기동과 다양한 무기 활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초기에 샤이오 강 돌다리를 확보하고 방어 진형을 구축했지만,[40][41][42][43][44] 몽골군의 투석기 공격과 이후 완성된 포위 속에서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기병 돌격마저 번번이 좌절되었다.[46][47] 결국 몽골군의 포위 섬멸 전술에 말려들어 참패했다.
6. 역사적 영향
벨러 4세는 간신히 몽골군의 추격을 피해 달마티아 해안의 외딴섬으로 피신했지만, 이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거의 궤멸되었고, 헝가리 전역은 몽골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한편, 바이달이 이끄는 몽골군의 다른 부대는 보헤미아군과의 충돌을 피하고 4월 9일 레그니차에서 헨리크 2세가 이끄는 폴란드-독일 연합군과 격돌했다. 레그니차 전투(바르슈타트 전투)에서 몽골군은 폴란드-독일 연합군을 크게 격파했고, 헨리크 2세는 전사했다. 바이달의 군대는 브로츠와프를 파괴한 후 헝가리령 모라비아(현 체코 동부)로 이동하여 1241년 오로모우츠에서 오로모우츠 전투를 벌였다.
이후 바이달의 군대는 서진 중이던 바투 칸이 이끄는 본대와 합류하여 다음 목표지인 빈을 향하려 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242년 몽골 제국의 카안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면서 원정군에게 귀환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바투 칸은 어쩔 수 없이 헝가리 정복을 포기했고, 몽골군은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참조
[1]
논문
Numbers in Mongol Warfare
Boydell Press
[2]
문서
Sverdrup, pp. 114–115, citing Rashid al-Din's chronicles, 1:198, 2:152.
[3]
문서
Carey states on p. 128 that Batu had 40,000 in the main body and ordered Subotai to take 30,000 troops in an encircling maneuver.
[4]
문서
Sverdrup, p. 115, citing Kosztolnyik.
[5]
문서
McLynn, p. 469
[6]
문서
Carey, Brian Todd, p. 124
[7]
문서
Sverdrup, p. 115, citing Kosztolnyik.
[8]
서적
Great Honours of the Hungarian State
Magyar Könyvklub
[9]
서적
Military History of Hungary
Zrínyi Katonai Kiadó
[10]
서적
Genghis Khan: His Conquests, His Empire, His Legacy
Da Capo Press
[11]
문서
McLynn, p. 473
[12]
논문
The Mongols in the West
[13]
서적
Perilous Glory: The Rise of Western Military Power
Yale University Press
[14]
서적
A Global Chronology of Conflict: From the Ancient World to the Modern Middle East
ABC-CLIO
[15]
서적
The Mongol Empire: A Historical Encyclopedia
ABC-CLIO
[16]
문서
Sverdrup, p. 115
[17]
문서
Thomas of Spalato, Historia, 163;
[18]
서적
The Mongols and the Islamic World
Yale University Press
[19]
서적
The Penguin Atlas of Medieval History
Penguin Books
[20]
서적
Castle and Society in Medieval Hungary (1000-1437)
Akadémiai Kiadó
[21]
서적
The Mongol Empire
2022-04-00
[22]
문서
The Organization of the Mongols' War Expeditions
[23]
문서
Chronica Majora
[24]
문서
2022-04-00
[25]
문서
Jackson, 62.
[26]
서적
Der Einfall der Mongolen in Mitteleuropa in den Jahren 1241 und 1242
Innsbruck
[27]
문서
Sverdrup, p. 115
[28]
문서
Rashid al-Din, 2.152.
[29]
문서
History of the World Conqueror, 270.
[30]
문서
Kosztolnyik, p. 151
[31]
서적
The Mongol Art of War
[32]
문서
2022-04-00
[33]
서적
Storm from the East
BBC Books
[34]
서적
The Military Operations of Genghis Khan and Sube'etei
Helion and Company
2017-05-04
[35]
서적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36]
간행물
The Mongol Invasion of Hungary
https://www.academia[...]
[37]
서적
The History of the Mongol Conquest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38]
기타
Yuan Shi
2022-04-00
[39]
기타
Historia
2022-04-00
[40]
서적
Artillery and warfare during the thirteenth and fourteen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Utah State University Press
2011-11-28
[41]
서적
Dateline Mongolia: An American Journalist in Nomad's Land
https://books.google[...]
RDR Books
2011-07-29
[42]
서적
Experience of War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Inc
2011-07-29
[43]
서적
What on Earth Happened?: The Complete Story of the Planet, Life, and People from the Big Bang to the Present Day
https://books.google[...]
Bloomsbury
2011-11-28
[44]
서적
A history of Greek fire and gunpowder
https://books.google[...]
JHU Press
2011-11-28
[45]
서적
The Rise of the West: A History of the Human Communit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1-07-29
[46]
서적
Artillery and warfare during the thirteenth and fourteen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Utah State University Press
2011-11-28
[47]
서적
Artillery and warfare during the thirteenth and fourteen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Utah State University Press
2011-11-28
[48]
서적
Firearms: a global history to 170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7-29
[49]
기타
Chronica Majora
[50]
서적
Muhi, Battle of
Oxford U.P.
[51]
간행물
Herzog Friedrich II. von Österreich und die Mongolengefahr 1241/42
[52]
기타
[53]
기타
Chronica Majora
[54]
기타
[55]
기타
Carmen Miseribile
[56]
서적
Castle and Society in Medieval Hungary
[57]
간행물
A Phantom Menace Did the Mongol Invasion Really Influence Stone Castle Building in Medieval Slavoniav
https://urn.nsk.hr/u[...]
[58]
기타
[59]
기타
[60]
서적
Military history of Hungary
Zrínyi Katonai Kiadó
[61]
기타
[62]
기타
Yuan Shi
[63]
기타
A Reappraisal of Güyüg Khan
[64]
기타
Readings on Central Asian History
[65]
서적
History of the Mongols
Sheed and Ward
[66]
기타
Historia
2022-04-00
[67]
기타
[68]
기타
[69]
기타
[70]
서적
The Mongols
Blackwell
[71]
서적
History of the Mongols
Sheed and Ward
195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