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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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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마지는 612년 일본으로 귀화한 백제 출신 인물로, 오(吳)에서 기악을 배워 일본에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쿠라이에 거주하며 소년들에게 기악을 가르쳤으며, 그의 제자들이 춤을 전승했다. 미마지가 기악을 배운 오(吳)의 위치에 대해, 한반도 대방군에 거주하던 중국계 예능가에게 배웠다는 설이 있다. 미마지의 귀화는 백제 귀족 가문의 세력 약화와 관련된 것으로,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귀족들이 왜국으로 망명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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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마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미마지
원어 이름味摩之
국적백제→왜나라
기악무
기타 정보
경력미상
활동 기간미상

2. 생애 및 활동

일본서기에 따르면, 612년(스이코 천황 20년)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귀화했다. 미마지는 오(吳)에서 기악을 배워 그 춤을 익혔으며, 사쿠라이(도요우라 사찰이 있던 곳)에 거주하면서 소년들에게 기악 춤을 가르쳤다. 마노노 오비토 데시와 신칸제이분이 그 춤을 배워 전승했다[1]는 기록이 있다.

나리사와 마사루는 미마지가 기악을 배운 "오(吳)"가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한반도에 설치한 한사군황해도 대방군 지역이며, 이곳의 오(吳)씨 성을 가진 중국계 예능가로부터 기악을 배웠을 것이라고 추정했다[2]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 백제신라에 패배하면서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귀족들이 왜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는데, 미마지의 귀화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3]。 미마지는 백제 정부의 외교 사절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유로 기악 춤을 전파하기 위해 왜국으로 건너갔으며, 이는 백제 중앙 정부에서 세력을 잃은 귀족의 망명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3]

2. 1. 일본으로의 귀화

612년(스이코 천황 20년) 일본서기에 따르면 미마지는 일본으로 귀화했으며, 오(吳)에서 기악을 배워 그 춤을 익혔다고 한다. 령집해의 직원령 항목에 따르면, 기악과 허고 등은 오악(吳樂)으로, 그 춤은 해학적이고 저속했다고 한다.

미마지는 사쿠라이(도요우라 사찰이 있던 곳)에 거주지를 하사받아 소년들에게 기악 춤을 가르쳤다. 마노노 오비토 데시·신칸제이분이 그 춤을 배워 전승했다[1]

나리사와 마사루는 미마지가 기악을 배웠다고 전해지는 "오(吳)"에 대해,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지한사군황해도에 위치했던 대방군에 오(吳)의 성씨 및 오(吳)씨 성 부락의 비율이 높은 점을 들어, 미마지는 백제고구려의 경계에 위치한 대방군의 오(吳)씨 성을 가진 중국계 예능가로부터 배웠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2]。이에 대해 이응수는 "이 결론에 수긍할 만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오복집 등의 예에서, 오(吳)가 넓은 의미의 중국을 나타낸다거나, 이름이 같다는 점에서 이미 3세기에 멸망한 오나라를 가리킨다거나, 또는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전라도에 있는 구례(구례)라는 설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연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2]

2. 2. 기악 전파

612년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기악을 전파하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미마지는 스이코 천황으로부터 사쿠라이(현재의 나라현 사쿠라이시)에 거주하며 기악을 가르치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미마지는 마노노 오비토 데시와 신칸제이분 등에게 기악을 가르쳤고, 이들은 미마지의 기악을 계승하였다.[1]

3. 미마지가 배운 기악

일본서기』에 따르면, 612년미마지백제에서 귀화하여 오(吳)에서 배운 기악의 춤을 전했다고 한다. 『령집해』의 『직원령』 항목에 따르면, 기악과 허고 등은 오악(吳樂)으로, 그 춤은 해학적이고 저속했다고 한다.[1]

3. 1. 오(吳)의 위치에 대한 학설

나리사와 마사루는 미마지가 기악을 배웠다고 전해지는 "오(吳)"에 대해,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지한사군황해도에 위치했던 대방군에 오(吳)의 성씨 및 오(吳)씨 성 부락의 비율이 높은 점을 들어, 미마지는 백제고구려의 경계에 위치한 대방군의 오(吳)씨 성을 가진 중국계 예능가로부터 배웠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2]。이에 대해 이응수는 "이 결론에 수긍할 만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오복집 등의 예에서, 오(吳)가 넓은 의미의 중국을 나타낸다거나, 이름이 같다는 점에서 이미 3세기에 멸망한 오나라를 가리킨다거나, 또는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전라도에 있는 구례라는 설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연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2]

4. 미마지의 출신과 귀화 배경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 백제신라에 패배하면서, 해수가 이끄는 대성팔족해씨, 협씨, 진씨, 목씨가 몰락했다.[3] 반면, 사씨, 국씨, 백씨는 온건한 신라 정책을 주장하며 전투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3]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이들은 왜국으로 망명하여 활로를 모색했다.

612년 미마지의 왜국 귀화를 백제와 왜국 간의 기악(伎樂) 춤 전파라는 국가적 문화 교류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미마지는 백제 정부의 외교 사절이 아니었으며, 개인적인 이유로 왜국에 건너가 기악을 가르쳤다.[3] 미마지는 대성팔족은 아니지만, 그의 왜국 귀화는 백제 중앙 정부에서 세력을 잃은 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3]

4. 1. 백제 귀족 가문 출신설

미마지는 성왕 대부터 미마사의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교에 종사했던 가계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왜국 귀화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3]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 백제신라에 패배하면서, 해수가 이끄는 대성팔족해씨를 비롯하여 협씨, 진씨, 목씨가 몰락했다.[3] 이들은 아막성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가문들이다. 반면, 사씨, 국씨, 백씨는 온건한 신라 정책을 주장하며 전투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3]

아막성 전투 이후 역사 기록에서 해씨, 협씨, 진씨, 목씨는 자취를 감추는데, 이는 이들이 중앙 정계에서 급속도로 세력을 잃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3]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이들은 왜국으로 망명하여 활로를 모색했다. 미마지의 귀화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 미마지는 대성팔족은 아니지만, 그의 왜국 귀화는 백제 중앙 정부에서 세력을 잃은 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3]

4. 2. 백제 정부의 파견 가능성

612년 미마지의 왜국 귀화를 백제와 왜국 간의 기악(伎樂) 춤 전파라는 국가적 문화 교류로 보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미마지의 왜국 귀화가 백제 정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이는 미마지의 가계를 살펴보면 명확하다.[3]。 미마지는 백제 정부의 외교 사절로서 왜국으로 간 것이 아니다.[3]。 미마지는 개인적으로 기악의 춤을 가르치기 위해 왜국으로 갔다. 따라서 기악의 춤 전파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왕명에 의한 왜국 귀화가 아니다. 미마지의 가계는 성왕 대부터 미마사의 활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외교에 종사했던 가계였지만, 미마지의 왜국 귀화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백제의 중앙 정부에서 세력을 잃은 귀족의 왜국 망명이며, 미마지는 대성팔족은 아니지만, 미마지의 왜국 귀화는 백제의 중앙 정부에서 세력을 잃은 귀족의 모습을 시사한다.[3]

참조

[1] 서적 日本書紀
[2] 서적 伎楽の「桜井」考 日本演劇学会 2008
[3] 서적 백제 말기 중앙 귀족의 변천과 왕권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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