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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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木)씨는 백제의 귀족 성씨에서 유래되었거나, 형제간의 우애를 중시하는 설화, 또는 당나라 8학사의 후예라는 설 등이 존재한다. 고려 고종 때 사천 목씨의 시조인 목효기가 등장한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목인길이 공민왕 때 1등공신이 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목내선이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다. 목첨, 목서흠, 목내선 3대가 기로소에 들어간 것은 조선 500년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 목일신 등이 활동했으며, 현재 사천 목씨는 인구 천 명당 급제자 수 1위 성씨이다.
사천 목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요무장군낭장동정(耀武將軍郞將同正)을 지낸 목효기(睦孝基)이다.[1]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34명, 과거 급제자 132명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현재 인구 천 명당 급제자 수 1위 성씨이다.[2]
2. 기원
2. 1. 백제 귀족 가문설
《수서(隨書)》와 《신당서(新唐書)》 등에 따르면, 목씨는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를 비롯한 대성팔족(大姓八族) 중 하나였다. 백제 멸망 후 목(木)씨가 목(睦)씨로 변성되었다는 백제목씨변천설(百濟木氏變遷說)이 있다. 백제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는 북위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광위장군(廣威將軍) 목간나, 왜국이 가야를 침공했을 때 군대를 이끌고 나가 구원한 목라근자, 이름없는 무장 목만치 등이 있다.
2. 2. 형제상목설(兄弟相睦說)
사천 목씨 가승에는 형제의 우애가 깊어 왕이 화목을 뜻하는 목(睦)을 성씨로 내렸다는 형제상목설(兄弟相睦說)이 전해진다. 이 설화를 바탕으로 한 고전 소설로 《목시룡전(睦始龍傳)》이 있다.
2. 3. 당나라 8학사 후예설
641년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8학사가 파견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인 목충(睦沖)이 신라에 정착하여 사천 목씨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1]
3. 역사
일제 강점기에는 목자상(睦子商), 목연욱(睦然旭), 목치숙(睦致淑), 목준상(睦俊相), 목일신(睦一信) 등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3. 1. 고려 시대
고려 고종 때 요무장군낭장동정(耀武將軍郞將同正)을 지낸 목효기(睦孝基)의 아들 목덕창(睦德昌)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면서 서북 방면의 반란을 평정하다 평안북도 의주의 영주성(靈州城)에서 순절하였으며, 사후에는 영주군(靈州君)에 봉해졌다.[1] 목효기의 6세손 목인길(睦仁吉)은 공민왕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친원파와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1377년(우왕 3)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목인길의 사촌 동생인 목충(睦忠)과 목자안(睦子安)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며 왜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3. 2.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는 7세손 목진공(睦進恭)이 1417년(태종 17) 우부대언,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세종 때 호조참판에 올랐다.[1]
사천 목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34명, 과거 급제자 132명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현재 인구 천 명당 급제자 수 1위 성씨이다.[2]
11세손 목세칭(睦世秤)의 아들 목첨(睦詹)이 1567년(선조 즉위) 이조참판·도승지를 역임하였고, 목첨의 아들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면서 가문이 현달하였다. 장남인 목서흠(睦敍欽)은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 때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고, 둘째 목장흠(睦長欽)은 인조반정 후 호조참판·도승지를 지냈으며, 막내 목대흠(睦大欽)은 예조참의를 거쳐 강원부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목장흠의 아들 목행선(睦行善)은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 전시에 1등으로 장원(壯元)하였고, 대사성·승지·예조참의·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목창명(睦昌明)은 1670년(현종 11) 예문관검열, 1677년(숙종 3)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목서흠의 아들 목내선(睦來善)은 숙종 때 남인(南人)의 중진으로 온건파 탁남(濁南)에 속하였다. 1689년(숙종 15) 우의정에 이르렀고, 기사환국 때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 때 목천성(睦天成)이 호조참의·좌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지냈고, 목천성의 증손 목만중(睦萬中)은 1786년(정조 10) 문과에 장원(壯元)하였고, 1794년(정조 18)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801년(순조 1)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 박해를 주도하였다. 1805년(순조 5)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 후기와 조선 중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사천 목씨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을 고비로 남인의 몰락과 함께 세력이 약화되었고, 목호룡(睦虎龍)의 신임사화 사건과 이인좌의 난을 주도한 목함경(睦涵敬)으로 명예가 다소 손상되기도 했다.
목첨(睦詹), 목서흠(睦敍欽), 목내선(睦來善) 3대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조선(朝鮮) 500년 역사상 유일하게 3대 연속 기로소에 이름을 올린 가문이 되었다. 기로소(耆老所)는 반드시 문과 급제를 거쳐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내고, 나이가 70세 이상인 원로와 연로한 임금만 들 수 있는 국가 최고의 예우 기관이다.
4. 주요 인물
- 목효기(睦孝基): 고려 고종 때 요무장군낭장동정(耀武將軍郞將同正)을 지낸 사천 목씨의 시조이다.[1]
- 목인길(睦仁吉): 공민왕 때 병부상서와 첨의평리를 지내고, 친원파와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1377년(우왕 3) 문하찬성사에 올랐다.[1]
- 목첨(睦詹): 1567년(선조 즉위) 이조참판·도승지를 역임하였다.
- 목서흠(睦敍欽):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조에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 목내선(睦來善): 숙종조에 남인의 중진으로 온건파 탁남(濁南)에 속하였다. 1689년(숙종 15) 우의정에 이르렀고, 기사환국때 좌의정에 올랐다.
- 목만중(睦萬中): 1786년(정조 10) 문과에 장원하였고, 1794년(정조 18)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801년(순조 1)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 박해를 주도하였다.
- 목일신(睦一信): 일제 탄압에 대항한 독립운동가이다.
5. 현대
일제강점기에는 목자상(睦子商), 목연욱(睦然旭), 목치숙(睦致淑), 목준상(睦俊相), 목일신(睦一信) 등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사천 목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34명, 과거 급제자 132명을 배출하여, 현재 인구 천 명당 급제자 수 1위 성씨이다.[2]
6. 문화
참조
[1]
기타
『고려사』 권114, 열전27
https://terms.naver.[...]
[2]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사천 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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