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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고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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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고는 588년 백제 위덕왕이 일본에 파견한 서예가로, 아스카데라 조영에 참여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는 백제가 일본에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헌상한 기술자 중 한 명이다. 이토 요시노리 등은 양고를 포함한 백제 기술자들이 이란계 호인 출신이라고 추정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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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고 (서예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양고
한자陽古
한글해당사항 없음
히라가나ようこ
가타카나해당사항 없음
로마자 표기alphabet-type: 매큔-라이샤워 식
alphabet: Yanggo
서예가 정보
원어 이름陽古
국적백제
분야서예
대표작아스카데라

2. 생애

588년, 백제 위덕왕이 일본에 대규모로 사신을 파견했을 때 양고(양귀문)는 서예가로 파견되었다.[2] 이후 아스카데라(飛鳥寺)의 조영에 참여했다.[2]

일본서기』 숭준 원년 조에 따르면, 588년에 은솔의 수신, 덕솔의 개문, 나솔의 복부미신 등 수신사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 사공의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의 백미순, 와 박사의 마나문노, 양귀문(양고),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의 백가 등과 함께 백제가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일본에 헌상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복원된 인명의 원어에 차이가 있지만, 백제일본에 헌상한 사공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 박사 마나문노, 양귀문(양고),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등의 장인들은 모두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6][7][2]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세적 상황으로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양서』 열전 동이조의 신라에 관한 기술에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후에 통한다(語言待百済而後通焉)"고 적혀 있어,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 백제가 중국 강남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지만[4],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진출했고[5], 호코지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6][7][8]

2. 1. 일본 파견 이전

588년에 은솔의 수신, 덕솔의 개문, 나솔의 복부미신 등 수신사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 사공의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의 백미순, 와 박사의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의 백가 등과 함께 백제가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일본에 헌상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복원된 인명의 원어에 차이가 있지만, 백제일본에 헌상한 사공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 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의 장인들은 모두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6][7][2]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세적 상황으로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양서』 열전 동이조의 신라에 관한 기술에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후에 통한다(語言待百済而後通焉)"고 적혀 있어,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 백제가 중국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지만[4],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진출했고[5], 호코지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6][7][8]

2. 2. 일본 파견 (588년)

588년, 백제 위덕왕이 일본에 대규모로 사신을 파견했을 때 양고(양귀문)는 서예가로 파견되었다.[2] 일본서기 숭준 원년 조에 따르면, 588년에 은솔의 수신, 덕솔의 개문, 나솔의 복부미신 등 수신사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 사공의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의 백미순, 와 박사의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의 백가 등과 함께 백제가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일본에 헌상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복원된 인명의 원어에 차이가 있지만, 백제일본에 헌상한 사공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 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의 백가, 양고 등의 장인들은 모두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6][7][2]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세적 상황으로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 백제가 중국 강남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지만[4],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진출했고[5], 호코지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6][7][8]

2. 3. 아스카데라 건립 참여

588년, 백제 위덕왕이 왜에 대규모로 사신을 파견했을 때 양고는 서예가로 파견되었다.[2]일본서기』 숭준 원년 조에 따르면, 혜총 등 승려들, 사공의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의 백미순, 와 박사의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의 백가 등과 함께 백제가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일본에 헌상했다.[2] 이후 아스카데라(飛鳥寺)의 조영에 참여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복원된 인명의 원어에 차이가 있지만, 백제일본에 헌상한 장인들은 모두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6][7][2]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세적 상황으로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양서』 열전 동이조의 신라에 관한 기술에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후에 통한다(語言待百済而後通焉)"고 적혀 있어,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 백제가 중국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지만[4],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진출했고[5], 호코지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6][7][8]

3. 백제-일본 교류에 대한 추가적 관점

588년에 백제는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일본에 승려들과 기술자들을 헌상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이들 중 사공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 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의 장인들이 모두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6][7][2]

백제는 고구려, 신라에 비해 중국남조와 교류가 활발했고, 지리적 이점으로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울 정도였다.[3] 백제와 중국 강남 지역의 밀접한 교류는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4] 중국남조에는 이란계(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일찍부터 진출했고,[5] 호코지 조영에 참여한 백제 장인들도 이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자손으로 추정된다.[6][7][8]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세적 상황으로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양서』 열전 동이조의 신라에 관한 기술에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후에 통한다(語言待百済而後通焉)"고 적혀 있어,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 백제가 중국 강남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지만,[4]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진출했다.[5]

588년에 은솔의 수신, 덕솔의 개문, 나솔의 복부미신 등 수신사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 사공의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의 백미순, 와 박사의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의 백가 등과 함께 백제가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일본에 헌상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복원된 인명의 원어에 차이가 있지만, 백제일본에 헌상한 사공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 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의 장인들은 모두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6][7] 호코지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6][7][8]

3. 1. 이란계 기술자

588년에 백제는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일본에 승려들과 기술자들을 헌상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이들 중 사공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 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의 장인들이 모두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6][7][2]

백제는 고구려, 신라에 비해 중국남조와 교류가 활발했고, 지리적 이점으로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울 정도였다.[3] 백제와 중국 강남 지역의 밀접한 교류는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4] 중국남조에는 이란계(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일찍부터 진출했고,[5] 호코지 조영에 참여한 백제 장인들도 이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자손으로 추정된다.[6][7][8]

3. 2. 백제의 국제성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세적 상황으로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양서』 열전 동이조의 신라에 관한 기술에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후에 통한다(語言待百済而後通焉)"고 적혀 있어,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 백제가 중국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지만[4],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진출했다.[5]

588년에 은솔의 수신, 덕솔의 개문, 나솔의 복부미신 등 수신사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 사공의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의 백미순, 와 박사의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의 백가 등과 함께 백제가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일본에 헌상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복원된 인명의 원어에 차이가 있지만, 백제일본에 헌상한 사공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 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의 장인들은 모두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6][7] 호코지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6][7][8]

4. 비판적 시각

588년에 은솔의 수신, 덕솔의 개문, 나솔의 복부미신 등 수신사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 사공의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의 백미순, 와 박사의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의 백가 등과 함께 백제가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일본에 헌상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백제일본에 헌상한 장인들이 모두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6][7][2]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했을 때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기록이 『양서』에 있을 정도였다.[3] 백제가 중국 강남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점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다.[4]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진출했고,[5] 호코지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자손으로 추정된다.[6][7][8] 그러나 양귀문을 비롯한 백제 기술자들의 출신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근거는 부족하며, 이란계 기술자설은 추정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588년백제일본에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기술자들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이들 기술자 중 태량미태, 문가고자, 백미순,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백가 등이 모두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6][7]

백제는 중국 남조와 교류가 활발했고, 황해를 통한 지리적 이점으로 도래인이 많았다.[3] 인도 승려 마라난타동진에서 불교를 전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4] 백제는 중국남조와 밀접하게 교류했다.[4] 중국남조에는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나 아랍인상인들이 일찍부터 진출해 있었고,[5] 호코지 건립에 참여한 백제 기술자들도 이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온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후손으로 추정된다.[6][7][8]

하지만 백제의 국제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란계 기술자설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4. 1. 역사적 근거 부족

588년에 은솔의 수신, 덕솔의 개문, 나솔의 복부미신 등 수신사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 사공의 태량미태, 문가고자, 노반 박사의 백미순, 와 박사의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의 백가 등과 함께 백제가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일본에 헌상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백제일본에 헌상한 장인들이 모두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6][7][2]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했을 때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3]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기록이 『양서』에 있을 정도였다.[3] 백제가 중국 강남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점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다.[4]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 아랍인상인들이 진출했고,[5] 호코지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장인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자손으로 추정된다.[6][7][8] 그러나 양귀문을 비롯한 백제 기술자들의 출신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근거는 부족하며, 이란계 기술자설은 추정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4. 2. 과장된 해석

588년백제일본에 불사당탑 건립을 위해 기술자들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2]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이들 기술자 중 태량미태, 문가고자, 백미순,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백가 등이 모두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6][7]

백제는 중국 남조와 교류가 활발했고, 황해를 통한 지리적 이점으로 도래인이 많았다.[3] 인도 승려 마라난타동진에서 불교를 전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4] 백제는 중국남조와 밀접하게 교류했다.[4] 중국남조에는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나 아랍인상인들이 일찍부터 진출해 있었고,[5] 호코지 건립에 참여한 백제 기술자들도 이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온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나 그 후손으로 추정된다.[6][7][8]

하지만 백제의 국제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란계 기술자설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참조

[1] 서적 ゾロアスター教論集 平河出版社 2001-10-01
[2] 뉴스 欽明朝に来日した百済の医師王有稜陀について 日本医史学会 1983-10
[3] 서적 「鳥羽之表」事件の背景 愛知県立大学 2008
[4] 서적 百済仏教史序説 吉川弘文館 1978-10-01
[5] 서적 正倉院 : 流沙と潮の香の秘密をさぐる 瑠璃書房 1980
[6] 서적 ペルシア文化渡来考―シルクロードから飛鳥へ 岩波書店 1980
[7] 서적 古代の日本とイラン 学生社 1980-01-01
[8] 서적 太良未太 朝日新聞出版 199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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