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의 멸망
1. 개요
바빌론의 멸망은 기원전 539년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침공하면서 일어났다. 멸망의 배경에는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종교 정책, 벨사자의 실정, 아시리아 혈통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키루스의 부상과 바빌론 정복 과정에서 다양한 사료 간의 불일치로 인해 역사적 기록과 해석에 어려움이 있으며, 나보니두스 연대기, 키루스 실린더 등 쐐기 문자 기록과 헤로도토스, 크세노폰 등의 그리스 역사 기록, 그리고 다니엘서와 같은 구약성경 기록이 존재한다. 바빌론은 페르시아 지배 이후에도 반란을 겪었으며, 쇠퇴의 과정을 거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된 후 셀레우코스 제국에 흡수되었다.
| 시기 | 기원전 540년–539년 |
|---|---|
| 장소 | 바빌론,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현재의 이라크) |
| 결과 | 아케메네스 제국의 승리 |
| 세부 결과 |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멸망 |
| 관련 캠페인 | 키루스 대왕의 바빌론 정복의 일부 |
| 교전국 1 | 아케메네스 제국 |
|---|---|
| 교전국 2 | 신바빌로니아 제국 |
| 아케메네스 제국 | 키루스 2세 고브리야스 |
|---|---|
| 신바빌로니아 제국 | 나보니두스 벨사살? |
| 아케메네스 제국 | 알려지지 않음 |
|---|---|
| 신바빌로니아 제국 | 알려지지 않음 |
| 변화 | 페르시아에 의한 바빌론 합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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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39년 -
예후드 메디나타
예후드 메디나타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속주로서 유대인들이 귀환하여 재건한 자치 공동체였으며, 제2성전 건설과 유대교 재건을 이루면서 페르시아 제국 통치 하에 자치적인 행정을 유지했다. -
아케메네스 제국의 군사사 -
불사부대
불사부대는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정예 보병 부대로, 1만 명을 유지하며 사망자를 즉시 보충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영화 등 대중문화에도 등장한다. -
아케메네스 제국의 군사사 -
아르게 밤
이란 남동부에 위치한 아르게 밤은 이슬람 시대부터 카자르 왕조 시대까지 번성한 고대 도시이자 실크로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한때 세계 최대의 흙벽돌 구조물이었으나 2003년 지진으로 파괴되어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2. 바빌론 멸망의 배경
바빌론 멸망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바빌로니아 백성들은 나보니두스 왕에게 점점 더 불만을 품게 되었다. 마르두크 사제들은 나보니두스가 마르두크 신앙을 억압하고 달의 신 신 신앙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그는 바빌론의 마르두크 신전에 바빌로니아의 종교를 집중시키려 하여 자신에 대한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보니두스는 사원 기초 기록을 발굴하여 연대를 결정하는 연구 등에 몰두하며, 군사적 능력은 있었지만 외교에 서툴렀던 벨사자에게 왕국 방어를 맡겼다. 또한 그는 바빌로니아 밖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시리아 도시 하란의 신전을 재건하고, 남부 사막의 아랍 백성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백성들의 반감을 더욱 키웠을 것이다.
2.1. 나보니두스의 종교 정책
바빌로니아 인구는 나보니두스에게 점점 더 불만을 품게 되었다. 마르두크 사제들은 그가 마르두크 신앙을 억압하고 달의 신 신의 신앙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그는 바빌론의 마르두크 신전에 바빌로니아의 종교를 집중시키려 하여 자신에 대한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지역 사제들을 소외시켰다.
군대는 그의 학문적인 취향을 경멸했다. 그는 사원 기초 기록을 발굴하여 그들의 연대를 결정하는 연구와 같은 일에 몰두하면서, (유능한 군인이지만 정치 엘리트를 소외시킨 외교에 서툰) 벨사자에게 왕국의 방어를 맡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한 바빌로니아 밖에서 시간을 보내며 앗시리아 도시 하란의 신전을 재건하고, 남부 사막에 있는 아랍 백성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보니두스와 벨사자의 바빌로니아보다는 아시리아 혈통 또한 이러한 반감을 더했을 것이다.
2.3. 아시리아 혈통 문제
마르두크 사제들은 나보니두스가 마르두크 신앙을 억압하고 달의 신 신의 신앙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그는 바빌론의 마르두크 신전에 바빌로니아의 종교를 집중시키려 하여 자신에 대한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지역 사제들을 소외시켰다. 군대는 그의 학문적인 취향을 경멸했다. 그는 사원 기초 기록을 발굴하여 그들의 연대를 결정하는 연구와 같은 일에 몰두하면서, (유능한 군인이지만 정치 엘리트를 소외시킨 외교에 서툰) 벨사자에게 왕국의 방어를 맡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한 바빌로니아 밖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시리아 도시 하란의 신전을 재건하고, 남부 사막에 있는 아랍 백성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보니두스와 벨사자의 아시리아 혈통 또한 이러한 반감을 더했을 것이다.
3. 페르시아의 부상과 키루스 2세
키루스 2세는 미디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를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군사적 역량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한편, 나보니두스는 아라비아에 원정을 떠나 아들 벨사자르에게 군대를 맡겼다. S. 스미스에 따르면, 기원전 540년 키루스는 시리아를 침략했고, 나보니두스의 봉신들이 페르시아에 복속되었다.
3.1. 키루스 2세의 등장
키루스 2세는 엘람의 안샨에 있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왕으로, 나보니두스 6년(550/549년)에 미디아의 왕인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아스티아게스의 군대는 그를 배신했고, 키루스는 미디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인들을 이란 민족 중에서 돋보이게 하며 그의 통치를 에크바타나에 확립했다.
3년 후, 키루스는 모든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고, 기원전 547년에 아시리아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3.2. 바빌로니아 주변 정복
키루스 2세는 나보니두스 6년(550/549년)에 엘람의 안샨에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으로, 미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아스티아게스의 군대가 그를 배신하면서, 키루스는 미디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에크바타나에 자신의 통치를 확립하여 페르시아인들을 이란 민족 중에서 돋보이게 만들었다.
3년 후, 키루스는 모든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고, 기원전 547년에는 아시리아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한편, 나보니두스는 그의 왕국 남쪽 국경 근처, 아라비아 식민지의 사막에 야영지를 설치하고, 그의 아들 벨사자르(Belsharutsur)를 군대의 지휘관으로 남겨두었다. 기원전 540년, 도허티와 S. 스미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바빌론의 동쪽 영토 대부분인 시리아를 침략했다. 몇 달 만에 나보니두스의 많은 봉신들이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키루스가 끊임없이 국경을 침략했기 때문에 나보니두스는 기원전 543년에 바빌론으로 돌아가야 했다.
4. 바빌론 침공과 함락
기원전 539년,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침공하면서 바빌론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바빌론 멸망에 대한 역사 기록은 사료마다 차이가 있어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바빌론 연대기와 키루스 실린더는 바빌론이 "전투 없이" 함락되었다고 묘사하지만,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은 도시가 포위되었다고 전한다. 다니엘서는 왕이 죽었다고 언급한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벨사자르가 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의 기록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보니두스는 항복 후 추방되었다. 구티족 경비병들이 벨 신전 문에 배치되어 예배는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키루스 2세는 10월 28일/29일에 도착했고, 그동안 고브리아스가 그의 부재를 대신하여 통치했다. 고브리아스는 이후 바빌론 지방의 총독이 되었다.
바빌론은 아시리아처럼 기원전 539년에 아케메네스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4.1. 침공 과정
기원전 539년,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침공했다. 바빌론 멸망에 대한 역사 서술은 다양한 사료 간의 불일치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바빌론 연대기와 키루스 실린더는 바빌론이 "전투 없이" 함락되었다고 묘사하는 반면,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은 도시가 포위되었다고 기록했다. 다니엘서는 왕이 죽었다고 언급한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벨사자르가 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의 기록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보니두스는 항복하고 추방되었다. 구티족 경비병들이 벨 신전의 문에 배치되었고, 그곳에서 예배는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키루스 2세는 10월 28일/29일에 도착했고, 그 동안 고브리아스가 그의 부재를 대신하여 활동했다. 고브리아스는 이후 바빌론 지방의 총독이 되었다.
바빌론은 아시리아처럼 기원전 539년에 아케메네스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4.2. 바빌론 함락
기원전 539년,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침공했다. 바빌론 멸망에 대한 역사 서술은 다양한 사료 간의 불일치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바빌론 연대기와 키루스 실린더는 모두 바빌론이 "전투 없이" 함락되었다고 묘사하는 반면,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은 도시가 포위되었다고 기록했다. 다니엘서는 왕이 죽었다고 언급한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벨사자르가 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의 기록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보니두스는 항복하고 추방되었다. 구티족 경비병들이 벨 신전의 문에 배치되었고, 그곳에서 예배는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키루스 2세는 10월 28일/29일에 도착했고, 그 동안 고브리아스가 그의 부재를 대신하여 활동했다. 고브리아스는 이후 바빌론 지방의 총독이 되었다.
바빌론은 아시리아처럼 기원전 539년에 아케메네스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4.3. 벨사살의 죽음
다니엘서 5장에는 페르시아의 침략 직전 벨사살의 마지막 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벨사살은 연회를 열고, 손님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전 보물로 술을 마시며 바빌론 신들을 찬양하도록 한다. 그러다 그는 궁전 벽에 글씨를 쓰는 손을 본다. 벨사살의 현자들이 해석하지 못하자 다니엘이 불려와 글씨를 해석한다. 벨사살은 죽고, 역사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가 왕이 된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벨사자르가 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의 기록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5. 바빌론 멸망 이후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 왕위에 오르고 조로아스터교를 대표하여 통치하면서, 서아시아 통치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던 바빌론의 주장은 더 이상 인정받지 못했다.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를 장악한 직후, 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3세라는 이름을 사용한 토착 통치자 '니딘타-벨' 아래에서 잠시 독립을 회복했다. 그는 기원전 521년 10월부터 12월까지 통치했으며, 이 기간 동안 페르시아군이 바빌론을 점령했고 북쪽의 아시리아도 반란을 일으켰다.
1년 후인 기원전 521년, 바빌론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아르메니아인 왕 아라카가 네부카드네자르 4세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바빌론은 페르시아군에 점령되었고, 성벽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벨 신의 위대한 사원인 에사길라는 여전히 유지되었고 바빌론 애국심의 중심지였다.
5.1. 페르시아의 통치
신 바빌로니아 제국은 인구 이동 정책을 추구했지만, 키루스 2세는 유배자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신들의 조상과 성스러운 그릇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첫 번째 행동으로 삼았다. 이러한 허가는 정식 선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정복자는 바빌론 왕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키루스는 유대인 유배자들을 바빌론 유수로부터 이스라엘로 돌려보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점령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바빌로니아인들 사이에서는 벨과 그의 사제들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사람은 서아시아를 통치할 권리가 없다는 강한 감정이 여전히 존재했다. 이에 따라 키루스는 이후 "바빌론의 왕"이라는 제국 칭호를 사용했다. 키루스는 고대 바빌론 왕들의 정당한 후계자이자 벨-마르두크의 복수자라고 주장하며, 질서를 회복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마르두크가 선택한 구원자라고 묘사했다. 키루스는 나보니두스가 지역 신들의 조상을 조상 신전에서 자신의 공식 수도 바빌론으로 옮긴 것에 분노했다고 마르두크 사제단에 의해 추정되었다. 키루스는 기원전 529년 사망하기 1년 전에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를 정부로 승진시켜 바빌론의 왕으로 만들었고, 자신은 제국의 " (다른) 지방"의 왕이라는 더 완전한 칭호를 사용했다.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 왕위를 차지하고 조로아스터교의 대표로서 통치했을 때 비로소 옛 전통이 깨졌고, 서아시아 통치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바빌론의 주장은 더 이상 인정받지 못했다. 다리우스가 페르시아를 장악한 직후, 바빌로니아는 토착 통치자 니딘타-벨 아래에서 잠시 독립을 회복했으며, 그는 네부카드네자르 3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기원전 521년 10월부터 12월까지 통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기간 동안 페르시아인들이 폭풍으로 점령했고, 북쪽의 아시리아도 반란을 일으켰다. 1년 후인 기원전 521년, 바빌론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아르메니아인 왕 아라카가 네부카드네자르 4세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이 때 페르시아인들에게 점령된 후, 성벽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벨의 위대한 사원인 에사길라는 여전히 유지되었고 바빌론의 애국심의 중심지였다.
5.2. 바빌론의 반란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 왕위에 올라 조로아스터교를 대표하여 통치하면서, 서아시아 통치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던 바빌론의 주장은 더 이상 인정받지 못했다.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를 장악한 직후, 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3세라는 이름을 사용한 토착 통치자 '니딘타-벨' 아래에서 잠시 독립을 회복했다. 그는 기원전 521년 10월부터 12월까지 통치했으며, 이 기간 동안 페르시아군이 바빌론을 점령했고 북쪽의 아시리아도 반란을 일으켰다.
1년 후인 기원전 521년, 바빌론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아르메니아인 왕 아라카가 네부카드네자르 4세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바빌론은 페르시아군에 점령되었고, 성벽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벨 신의 위대한 사원인 에사길라는 여전히 유지되었고 바빌론 애국심의 중심지였다.
5.3. 바빌론의 쇠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1년에 바빌론을 정복했으며, 기원전 323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장군들 간에 10년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후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에 흡수되었다.
오랫동안 셀레우키아 건립으로 인해 인구가 바빌로니아의 새로운 수도로 이동했으며, 옛 도시의 폐허는 새로운 정부 청사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헬레니즘 시대의 바빌론 연대기가 출판되면서, 파르티아 제국 시대(기원전 150년~서기 226년)까지도 도시 생활은 상당히 비슷하게 유지되었음이 밝혀졌다.
6. 역사적 기록과 해석
쐐기 문자 기록, 그리스 역사 기록, 구약성경의 기록은 바빌론 멸망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과 세부 묘사를 제공한다.
쐐기 문자 기록은 페르시아의 관점을 반영하여 키루스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그리스 기록은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구약성경의 기록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하며, 벨사살의 죽음과 다니엘의 예언을 강조한다.
크세노폰의 키루스 교육은 고브리아스가 바빌론을 점령하고, 바빌론 왕을 살해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키루스 교육에는 도시가 함락될 당시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바빌론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중 젊은 통치자가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6.3).
새로운 정부 체제가 도입되었고 페르시아 다국적 국가가 발전했다. 이 정부 체제는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절정에 달했으며, 그 후 페르시아 왕들의 비문에 의해 이념적 기초를 받았다.
6.1. 쐐기 문자 기록
나보니두스 연대기, 키루스 실린더, '나보니두스 시의 기록'과 같은 쐐기 문자 기록들은 페르시아의 승리 이후에 기록되었다. 이들은 나보니두스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키루스를 바빌론의 해방자이자 바빌론 신들의 옹호자, 그리고 바빌론 왕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묘사한다. 현대 학계는 키루스 실린더를 나보니두스에 대한 여론을 조작하고 키루스의 바빌론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작된 선전물로 인식한다. 브리앙은 바빌론이 저항 없이 페르시아에 함락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바빌론이 저항 없이 함락되었을 가능성은 우선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썼고, 피오트르 미할로프스키는 "이 의심스러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동시대 증거는 없다."고 언급한다.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페르시아 궁정에서 나보니두스의 텍스트인 척하면서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 첫 부분은 다른 출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건들을 다루지만, 특히 나보니두스 통치 17년에 관한 후반부는 키루스를 칭찬하며, 바빌론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며 그 앞에 녹색 나뭇가지를 펼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고티에 톨리니는 바빌론 함락에 대한 그럴듯한 재구성을 제시했다. 엔릴 문 재건 공사에 대한 영수증은 바빌론에 대한 강제 진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톨리니는 우가루 장군의 지휘 하에 페르시아 군대의 일부가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엔릴 문을 통과한 후 강을 건너 바빌론 동부 지역을 점령했다고 제안한다. 이것이 페르시아 군대가 유프라테스강을 돌린 후 강바닥을 따라 바빌론으로 들어갔다는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의 근원일 수 있다. 이러한 바빌론 기습 점령은 다니엘 5장에 기록된 이야기와 일치한다.
공격 시점은 우가루의 전략 성공에 기여했을 수 있다. 헤로도토스, 크세노폰, 다니엘 5장은 모두 바빌론이 함락된 밤에 축제 중이었다고 기록한다. 바빌론 연대기는 바빌론이 달의 신을 기리는 아키투 축제 전날 밤인 16일 타쉬리투에 함락되었다고 기록한다.
6.2. 그리스 역사 기록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은 모두 아케메네스 군대가 유프라테스강 수로를 통해 바빌론에 들어갔다고 기록했다. 크세노폰의 키루스 교육에 따르면, 고브리아스가 군대를 이끌고 바빌론을 점령하고 왕을 살해했다. 크세노폰과 다니엘서는 모두 도시가 함락되던 밤 벨사살이 죽었다고 묘사한다. 헤로도토스, 크세노폰, 다니엘은 모두 도시가 축제 기간에 기습적으로 함락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키루스 교육은 키루스 대왕에 대한 부분적인 허구적 전기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을 수 있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내전에서 패배한 그리스 병사 만 명 중 한 명으로서 페르시아에 있었고, 아나바시스에 이 사건들을 기록했다. 키루스에 대한 이야기는 페르시아 궁정 사회에 의해 과장되어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크세노폰 기록의 기초일 수 있다. 헤로도토스는 사건 발생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글을 썼지만,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며 바빌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쐐기 문자 기록인 나보니두스 연대기와 키루스 실린더는 페르시아의 승리 이후에 기록되었다. 이들은 나보니두스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키루스를 바빌론의 해방자로 제시한다. 현대 학계는 키루스 실린더를 선전용 판으로 인식한다. 바빌론이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브리앙은 "바빌론이 저항 없이 함락되었을 가능성은 우선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썼고, 피오트르 미할로프스키는 "이 의심스러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동시대 증거는 없다."라고 언급한다.
6.3. 구약성경의 기록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정복과 기원전 586년 엘리트들의 유배는 이사야서의 다음 단계 형성을 가져왔다. 제2 이사야는 유배 중인 이스라엘인들에게 다가가 귀환의 희망을 제시한다. 제2 이사야가 바빌론의 임박한 멸망을 예언하고 키루스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칭송한 것은 그의 예언을 기원전 550~539년, 아마도 이 기간의 말기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다니엘서 5장에는 페르시아의 침략 직전 벨사살의 마지막 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벨사살은 연회를 열고, 손님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전 보물로 술을 마시며 바빌론 신들을 찬양하도록 한다. 그러다 그는 궁전 벽에 글씨를 쓰는 손을 본다. 벨사살의 현자들이 해석하지 못하자 다니엘이 불려와 글씨를 해석한다. 벨사살은 죽고, 역사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가 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