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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비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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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캄비세스 2세는 키루스 2세의 아들이자 아케메네스 제국의 페르시아 왕으로, 기원전 530년부터 기원전 522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으며, 이집트 원정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파라오의 칭호를 얻었지만, 이집트 정책과 관련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페르시아로 돌아가던 중 사망했으며, 그의 동생 바르디야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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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비세스 2세
기본 정보
캄비세스 2세가 [[아피스 (신)|아피스 소]]를 숭배하는 모습 (기원전 524년)
캄비세스 (왼쪽 무릎을 꿇고 있음)가 파라오로서 아피스 소를 숭배하는 모습 (기원전 524년)
로마자 표기Kambūjiya
통치
칭호아케메네스 제국의 만왕의 왕
재위 기간기원전 530년 – 기원전 522년 7월
공동 통치자키루스 2세 (기원전 530년)
이전 통치자키루스 2세
다음 통치자바르디야
재위 기간1기원전 525년 – 기원전 522년 7월
이전 통치자1프삼티크 3세
다음 통치자1바르디야
생애
출생기원전 550년경
사망기원전 522년 7월
사망 장소아그바타나, 에베르-나리
매장 장소파사르가다에
종교조로아스터교
가족
왕조아케메네스 왕조
아버지키루스 2세
어머니카산다네
배우자로크사나, 아토사

2. 이름의 유래

캄비세스(Cambyses)는 옛 페르시아어로 카부지야(𐎣𐎲𐎢𐎹𐎹𐎹|Kabūjiyapeo)인데,[15] 그 이름의 유래는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엘람어 기원설과 인도 북서부에 거주하던 이란계 민족인 캄보이아스(Kambojas)와의 연관설 등 여러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 캄비세스라는 이름은 엘라마이트어로는 '''칸부지야'''('''Kanbuziya'''), 아카드어로는 '''캄부지야'''('''Kambuziya'''), 아람어로는 '''칸부즈'''('''Kanbūzī''')로 알려져 있다. 현대 페르시아어로는 캄부지예(kambujiye)라고 한다.[15]

3. 배경

캄비세스 2세는 키루스 대왕과 카산다네의 장남이었다.[16] 캄비세스에게는 바르디야라는 남동생과 아르토네, 아토사, 록사네라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캄비세스의 친할아버지는 캄비세스 1세로, 기원전 600년부터 559년까지 페르시스를 통치했다. 그 가문은 페르시아 부족 지배층의 후손이었는데, 키루스 대왕을 시작으로 페르시아를 넘어 그들의 영역을 넓히고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리디아, 중앙아시아를 정복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웠다.

"캄비세스"(𐎣𐎲𐎢𐎪𐎡𐎹|Kaᵐbūjiyapeo)라는 이름의 기원은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이 이름은 엘람어에서 유래되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 이름을 북서부 인도에 거주했던 이란 민족인 캄보자스와 관련짓는다. 캄비세스라는 이름은 다른 언어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엘람어 ''Kanbuziya''; 아카드어 ''Kambuziya''; 아람어 ''Kanbūzī''.

4. 즉위 전

기원전 539년 4월, 캄비세스는 아버지 키루스 2세에 의해 바빌론을 포함한 바빌로니아 북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중부와 남부는 계속해서 키루스 2세와 그의 관료들이 직접 통치하였다.[4] 기원전 538년 3월 27일, 캄비세스는 즉위 전 새해 연례행사로 벌이던 축제에서 왕을 위해 임의로 거행되던 제전에 참여하여, 마르두크 신의 신전인 에사길라에서 왕이 사용하는 지팡이를 받았다.[4] 그러나 그의 바빌론 통치는 9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았는데, 기원전 538년 12월 부왕 키루스 2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캄비세스를 해임했기 때문이다.[4] 해임된 뒤에도, 캄비세스는 대부분 바빌론과 시파르에서 거주하였다.[4]

바빌로니아 기록에 따르면 키루스 2세와 캄비세스 부자는 모두 기원전 538/7년에 "바빌론의 군주, 지상의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키루스 2세가 마사게타이에 맞서기 몇 년 전에 아들 캄비세스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음을 보여준다.[4][5] 캄비세스의 어린 동생 바르디야는 중앙아시아에서 조공이 면제된 자신의 확고한 영역을 하사받았다.[5] 캄비세스는 부왕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아버지 키루스 2세를 따라 마사게타이 원정에 참전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페르시아로 돌아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때는 아버지 키루스 2세가 마사게타이와의 전투에서 패하기 전이었다.[4] 캄비세스는 부왕 키루스 2세의 유해를 페르시스의 파사르가다에로 옮겨, 미리 그를 위해 마련했던 무덤에 안장했다.[5]

5. 캄비세스 2세의 원정

프삼티크 3세를 사로잡는 캄비세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인장)


키루스 2세가 중동을 제압한 후, 캄비세스 2세는 이 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독립 국가인 이집트를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정에 앞서 캄비세스 2세는 자신의 형제이자 키루스 2세가 동부 지방 총독으로 임명한 바르디야(스메르디스)를 살해했다. 다리우스 1세는 그 날짜를 기록했지만, 그리스 작가들은 이 살해가 이집트 정복 이후에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525년, 이집트 제26왕조의 프삼티크 3세가 아마시스 2세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직후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공격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라비아 부족들과 동맹을 맺어 주둔지에 대량의 물을 공급받음으로써 사막을 통과하는 진군에 대비했다. 한편, 아마시스 2세는 그리스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 페르시아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키프로스의 도시와 대함대를 소유한 사모스의 참주 폴리크라테스가 페르시아 편에 섰고, 그리스 군 지휘관인 할리카르나소스의 파네스가 배신했기 때문에 아마시스 2세의 기대는 빗나갔다. 이집트 동쪽 끝의 펠루시움을 무대로 벌어진 Battle of Pelusium|펠루시움 전투영어에서 이집트군은 궤멸되었고, 그 직후 멤피스가 함락되었다.[7] 포로가 된 프삼티크 3세는 반란을 시도했지만 처형되었다. 이집트의 비문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는 공식적으로 파라오의 칭호와 의상을 착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에 이어 쿠시 왕국(나파타 및 메로에에서 번영한 왕국으로, 현재의 수단에 위치) 정복을 시도했다. 그러나 캄비세스 2세의 군대는 사막을 횡단하지 못하고 심각한 패배를 겪고 귀환해야 했다. 나파타의 비문(베를린 박물관 소장)에는 누비아의 왕 나스타센이 켐바스덴(캄비세스 2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군선 전부를 탈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8] 시와 오아시스로의 원정도 실패로 끝났고, 카르타고 공략 계획도 페니키아인들이 자신들의 친족에 대한 군사 작전을 거부했기 때문에 좌절되었다.

5. 1. 이집트 원정 준비와 키프로스 정복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캄비세스 2세는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근동 지역의 강국이었던 이집트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집트 원정은 아버지 키루스 2세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파라오 아마시스 2세가 기원전 570년부터 통치하고 있었다. 사모스 섬의 통치자 폴리크라테스는 이집트의 동맹이었으나, 캄비세스 2세에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파네스 또한 캄비세스 2세에게 합류했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원정 이전에 키프로스를 점령하여 이집트에 타격을 주었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정복을 위해 페니키아와 소아시아의 지원을 받아 해군을 창설했다. 또한, 가자 지구와 이집트 국경 사이 사막 지역을 지배하던 아랍인들과 조약을 맺어 보급로를 확보했다. 이 조약으로 캄비세스 2세는 가자 지역을 포함한 이집트와 페르시아 사이 미개척지에서 자신의 권위를 넓힐 수 있었다.

5. 2. 이집트 정복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침공하여 펠루시움 전투에서 승리했다.[1] 캄비세스 2세의 군대는 프삼티크 3세가 요새화한 멤피스를 포위, 점령하고 페르시아-이집트 수비대를 설치했다.[7]

멤피스 함락 후, 리비아, 키레네, 바르카의 그리스인들은 캄비세스 2세에게 굴복했다. 캄비세스 2세는 누비아쿠시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엘레판티네에 페르시아군 수비대를 설치했다.

키루스 2세 사후,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정복을 결심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는 아마시스 2세에게 딸을 요구했으나, 아마시스 2세가 아프리에스의 딸 니테티스(Nitetis영어)를 보내자 분노하여 이집트를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정복 과정에서 성우(聖牛) 아피스를 죽이는 죄를 범해 광기에 빠졌다고도 전해진다.

5. 3. 정복 이후

멤피스 함락 후, 리비아인들과 키레네, 바르카의 그리스인들은 캄비세스 2세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물을 바쳤다.[20] 캄비세스 2세는 아마시스 2세의 그리스인 미망인 라디케를 키레네로 돌려보내며 관대함을 보였다.[20] 그는 카르타고 원정을 계획했으나, 페니키아인들이 동족과의 전쟁을 꺼려 취소되었다.[20] 남쪽에서는 쿠시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엘레판티네에 수비대를 설치했다.[20][21]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의 시와 오아시스에티오피아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20] 그는 "캄비세스의 광기" 때문에 "물자 조달 명령도 없이, 병사들을 세상 끝까지 데려갈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시 에티오피아로 진군했다"고 주장한다.[20] 이는 캄비세스 2세의 잃어버린 군대로 불린다.

그러나 브리앙트는 "캄비세스에 대한 의도적인 편견은 헤로도토스 기록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말한다.[20] 헤로도토스의 주장은 다른 자료와 모순되며, 고고학적 증거는 아케메네스 왕조가 부헨 남쪽 도르기나르티 요새를 사용했음을 보여준다.[20]

6. 이집트 정책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의 전통적인 왕실 칭호를 사용하며, 이집트 원주민과의 합법적인 통일을 주장했다. 그는 스스로를 파라오 아프리에스의 딸 니테티스 공주의 아들이라 칭하며 이집트 혈통임을 강조했다. 사이스에서는 종교 의식의 일환으로 네이트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왕관을 쓰는 등 이집트 신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20]

그러나 고대 역사가들은 캄비세스 2세의 통치를 공포 정치, 사원 약탈, 신성 모독 등으로 묘사했다. 특히 헤로도토스는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의 신성한 황소 아피스를 죽였다고 기록했다.[20] 하지만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캄비세스 2세가 아피스를 석관에 매장하도록 지시했다는 기록과[20] 아피스의 후임자가 캄비세스 2세 사후 4년 뒤인 기원전 518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은[20]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상반된다.

기원전 524년에 매장된 아피스의 묘비명과 석관의 기록은 캄비세스 2세가 아피스의 장례를 주관하고 기념물을 봉헌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캄비세스 2세가 아피스를 죽였다는 주장과 배치되며, 오히려 그가 아피스의 보존과 매장 의식에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아피스 조각상.


이집트의 데모틱 연대기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사원들의 경제적 특권을 축소시켰고, 이로 인해 기득권을 잃은 사제들이 캄비세스 2세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퍼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사원과의 갈등은 이전 파라오 시대부터 지속된 문제였다.

진보 진영에서는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통치를 제국주의적 억압으로 간주하며, 이집트인들의 저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7. 행정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 키루스 2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페르시아인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했다.[1] 왕족과 귀족들은 제국 운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예를 들어, 다리우스는 캄비세스 2세의 사촌으로 왕의 친위대에서 복무했고, 다리우스의 아버지 히스타스페스는 파르티아히르카니아의 총독을 역임했다.[1] 캄비세스 2세의 '메시지 비어' 역할을 한 프렉사스페스나 왕실 판사였던 시삼네스도 페르시아인이었다.[1]

캄비세스 2세 시대의 세금 제도는 체계적이지 않았다. 왕의 신하들은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냈다.[2] 각 지역의 총독(사트라프) 역시 모두 페르시아인이었는데, 바빌로니아-트랜스-유프라테스의 구바루, 이집트의 아리안데스, 사르디스의 오로에테스, 다스키리움의 미트로바테스, 박트리아의 다다르시, 아라코시아의 비바나 등이 그 예이다.[3]

8. 인물

헤로도토스는 캄비세스 2세를 "반쯤 미치고, 잔인하며, 오만"한 인물로 묘사하여 페르시아인들이 그를 "폭군"으로 불렀다고 기록했다.[12] 그러나 이는 캄비세스 2세를 향한 페르시아와 이집트의 악의적인 선전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12] 실제로 캄비세스 2세는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 했기 때문에 페르시아 부족 귀족들은 그에게 점점 더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12]

그리스인들이 기록한 캄비세스 2세에 대한 전승은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뉜다. 하나는 이집트인에 의한 것으로, 헤로도토스 기록[12]의 대부분이 이를 바탕으로 한다. 이 전승에서 캄비세스 2세는 키루스 2세와 아프리에스의 딸 니테티스(Nitetis|니테티스영어)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로 여겨지며,[13] 니테티스가 살해되자 찬탈자 아마시스 2세(이아흐메스 2세)에게 복수했다고 한다.[14] 그러나 이 전승은 페르시아인에 의한 다른 계통의 자료에서 수정되었다.

페르시아인의 전승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는 아마시스 2세의 딸과 결혼을 원했지만, 아마시스 2세는 자신의 딸 대신 아프리에스의 딸을 보냈고, 이 딸이 캄비세스 2세에게 전쟁을 권유했다고 한다. 캄비세스 2세는 성우 아피스를 죽이는 큰 죄를 저질러 광기에 빠지는 벌을 받았고, 형제나 자매를 죽이는 죄를 저질렀으며, 결국 제국을 잃고 성우를 죽인 바로 그 장소에서 허리의 상처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 전승에는 이집트를 배신하고 페르시아에 팔아넘긴 할리카르나소스의 파네스와 같은 그리스 용병들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페르시아인의 전승에서는 캄비세스 2세가 저지른 죄는 형제 살해로 여겨지며, 그 후 술에 빠져 더욱 많은 죄를 저지르고 급속도로 타락해 갔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전승은 헤로도토스 외에도 크니도스크테시아스가 쓴 『페르시아지』의 단편집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베히스툰 비문에 기록된 다리우스 1세의 짧은 기술을 제외하면, 캄비세스 2세의 치세에 관한 동시대 증언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자료만으로는 캄비세스 2세의 정확한 인물상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가 방종한 폭군이었으며 술에 빠져 종종 잔혹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9. 결혼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는 그의 누이인 아토사와 록사네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불법적인 행동으로 여겨졌다.[6][4]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캄비세스 2세가 오타네스의 딸 파이디메와 결혼했다고도 진술하고 있으며, 동시대의 크테시아스는 록사네를 캄비세스 2세의 아내라고는 하지만, 캄비세스 2세와의 혈연 관계는 기록하지 않았다.[4]

캄비세스 2세에 대한 근친상간 비난은 그의 '광기와 허영심'을 지적하기 위한 '비행'의 일환으로 언급된다.[4] 이러한 보고들은 모두 캄비세스 2세에게 적대적이었던 이집트에서 유래한 것이며, 아피스 황소 살해와 같은 캄비세스 2세의 일부 '비행'이 거짓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캄비세스 2세의 근친상간 행위에 대한 기록 역시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따른다.[4]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에서 가족 간의 근친혼, 이복 형제자매나 조카딸, 사촌 간의 결혼은 금기시되지 않았다.[4] 그리스 소식통들은 형제자매, 심지어 부녀간의 결혼도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 왕실 내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기록들의 정확성을 판단하기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4]

10. 사망 그리고 계승

기원전 522년 봄, 캄비세스 2세는 페르시아 본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둘러 이집트를 떠났다.[9] 그는 이집트를 떠나기 전에 페르시아 아리아인 총독에게 이집트 통치를 맡겼다.[9]

대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가 시리아로 이동하던 중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는데, 이 상처는 곧 괴저로 악화되었다.[9] 캄비세스 2세는 3주 후(7월) 오늘날의 하마로 유력하게 추정되고 있는 아그바타나에서 사망했다.[10] 사망 당시 자손은 없었으며,[10] 그의 어린 동생 바르디야가 뒤를 이었다.[9]

당시 캄비세스 2세의 창수였던 다리우스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는 자신이 반란 진압을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기원전 522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와 크테시아스는 그의 죽음을 사고 탓으로 돌렸는데, 헤로도토스는 말에 올라타다가 캄비세스 2세의 칼집 끝이 부러져 그의 검이 허벅지를 뚫었다고, 크테시아스는 가족을 잃은 것에 낙담한 캄비세스 2세가 나무토막을 깎다 허벅지를 찔렀고 그 상처로 11일 후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캄비세스 2세가 실제로는 암살당한 것이며, 이는 다리우스 1세 자신이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 또는 바르디야 지지자들에 의한 의도적인 암살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9]

캄비세스 2세가 사망할 당시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해져 키레나이카에서 힌두쿠시로, 시르다리야강에서 페르시아만으로 뻗어나갔다.[9]

11. 캄비세스 2세의 잃어버린 군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는 시와 오아시스에 있는 아문 신의 신탁소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12] 5만 명의 군대가 사막을 횡단하는 도중, 거대한 모래 폭풍이 발생하여 전원이 모래에 파묻혔다고 한다. 대부분의 이집트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신화로 여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년 동안 그 병사들의 유해를 찾아 헤맸다. 소설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모델이 된 라즐로 알마시 백작이나 지질학자 톰 브라운 등도 그에 포함된다. 최근의 석유 채굴로 유물이 발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폴 서스먼의 2002년 소설 ''"The Lost Army Of Cambyses"'' (ISBN 978-0-593-04876-4)는 이 캄비세스 2세의 군대 유물을 놓고 경쟁하는 탐험대들의 이야기이다.

참조

[1] 논문 Dogs in Ancient Warfare http://www.jstor.org[...] 1941
[2] 서적 The Behistun Inscriptions (Old Persian Texts) Khaneye-Farhikhtagan-e Honarhaye Sonati
[3] 서적 Old Persian: Grammar, Text, Glossary
[4] 서적 ナボニドゥス年代記
[5] 서적 Babylonian Chronology
[6] 서적 ゾロアスター教 三五〇〇年の歴史 講談社 2010-02
[7] 서적 絶対に見られない世界の秘宝99 日経ナショナルジオグラフィック社
[8] 문서 Die Aethiopische Konigsinschrift des Berliner Museums 1901
[9] 웹사이트 A Commentary on Darius http://www.herodotus[...]
[10] 논문 Kambyses in der Sage, Litteratur und Kunst des Mittelalters 1897
[11] 뉴스 Discovered Stone Slab Proved to be Gate of Cambyses' Tomb http://www.chnpress.[...] Cultural Heritage New Agency
[12] 서적 역사
[13] 문서
[14] 문서
[15] 웹인용 کمبوجیه - معنی در دیکشنری آبادیس https://abadis.ir/fa[...] 2023-09-07
[16] 기타
[17] 서적 역사
[18] 서적 역사
[19] 서적 역사
[20] 서적 역사
[21] 기타
[2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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