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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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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아기는 강원도 강촌에서 태어난 천주교 신자로, 1836년 남편,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남편과 아들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했지만, 박아기는 가족들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1839년 사형 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으며,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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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박아기 안나
로마자 표기Bak Agi Anna
한글박아기 안나
인물 정보
출생1783년
출생지강원도 강촌
사망1839년 5월 24일
사망지서울 서소문
직업순교자
종교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서품/시성
시복일1925년 7월 5일
시복자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기념
축일5월 24일
기념일9월 20일

2. 생애

박아기는 1783년[3] 강원도 강촌[4]한강 둔치 작은 마을에 있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격은 온순했으나, 교리기도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느님을 알 수 없다면, 적어도 온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노력이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신앙생활에 힘썼다.[2]

18세에 태문행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자녀들에게 신앙의 덕성을 가르치며 양육했고,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올바르게 살고자 노력했다. 특히 주의 수난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져, 예수의 다섯 상처를 묵상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으며,[2][4] 다른 교우들의 박해 소식을 들으며 순교를 희망하기도 했다.[4]

1836년 3~4월경 남편, 장남과 함께 체포되었다.[4][2] 남편과 아들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지만, 박아기는 혹독한 고문과 가족의 간절한 회유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2] 투옥된 지 3년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른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당시 나이는 57세였다.[4][3]

2. 1. 체포와 투옥

1836년 3~4월경, 박아기는 남편 태문행 프란치스코와 장남 태웅천과 함께 체포되었다.[4]

남편과 아들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지만, 박아기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2] 그녀에게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괴로움은, 배교하고 풀려난 남편과 아들이 매일 감옥으로 찾아와 배교를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아기가 없는 집안의 어려움, 병든 시어머니에 대한 걱정, 어머니를 찾으며 우는 어린 자식들의 소식을 전하며 그녀의 마음을 흔들려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박아기에게 큰 번민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박아기는 이러한 유혹을 용감하게 이겨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족의 배교 권유를 거절했고, 오히려 그들에게 배교한 것을 회개하라고 간청했다.

박아기의 딱한 사정을 아는 동료 신자 몇몇이 감옥으로 찾아와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박아기는 단호하게 말했다. "며칠 더 살겠다고 영원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저의 신앙을 버리라고 설득하는 대신, 당신들이나 속죄하십시오. 당신들은 저의 행운을 부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감옥을 지키는 포졸들도 그녀에게 "네 남편과 아들은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 너도 말 한마디만 하면 똑같이 될 수 있는데, 어찌 그리 매정한 마음을 가졌느냐? 너에게는 돌봐야 할 가족이 많지 않느냐?"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박아기는 "제 남편과 아들의 배교는 그들의 일일 뿐,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저는 저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녀는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매질을 당하면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포장은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형조 감옥으로 이송시켰다. 그곳에서도 박아기는 더 심한 고문을 견뎌냈다. 형조 판서 역시 "네 남편과 아들은 풀려났다. 너 또한 한 마디만 하면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회유했지만, 그녀는 "각자 알아서 할 일입니다. 저의 바람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며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1839년 5월 10일, 박아기는 "그릇된 책을 읽고 사악한 그림을 소지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839년 5월 24일 금요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른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57세였다.[3]

2. 2. 가족의 회유와 신앙

1836년 3월 또는 4월경, 박아기는 남편 태문행 프란치스코와 장남 태웅천과 함께 체포되었다.[4] 남편과 아들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했지만, 박아기는 극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일관되게 증언했다.[2]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시련은 배교하고 석방된 남편과 아들이 매일 감옥으로 찾아와 배교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아기가 없는 집안의 어려움, 병든 시어머니의 걱정, 어머니를 찾으며 우는 어린 자식들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박아기는 신앙을 부정하는 말 한마디면 가족에게 돌아가 평화와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이러한 유혹을 용감히 극복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족의 간청을 거절했고, 오히려 그들에게 배교회개하라고 권했다.[2]

박아기의 딱한 사정을 아는 동료 교우 몇몇도 감옥으로 찾아와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박아기는 "며칠 더 살겠다고 영원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저의 신앙을 버리라고 저를 설득하려는 대신에, 당신들이 속죄하십시오. 당신들은 저의 행운을 부러워 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감옥을 지키는 포졸들까지 나서서 "너의 남편과 아들이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 너도 그 말 한마디만 하면, 똑같이 될 수 있다. 가족들이 많지 않느냐?"며 회유했지만, 박아기는 "제 남편과 아들의 배교는 그들의 일일 뿐인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저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흔들리지 않았다.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의 혹독한 매질 속에서도 박아기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포장은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형조 감옥으로 이송시켰다. 형조에서도 더 심한 고문을 견뎌야 했다. 형조 판서는 "너의 남편과 아들은 풀려났다. 너 또한 한 마디만 하면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며 다시 회유했지만, 박아기는 "각자 알아서 할 일입니다. 저의 바람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순교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2. 3. 순교

1836년 3~4월경, 박아기는 남편 태문행 프란치스코와 장남 태웅천과 함께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4] 남편과 아들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지만, 박아기는 극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2]

배교하고 풀려난 남편과 아들은 매일 감옥으로 찾아와 박아기에게 배교를 간청했다. 그들은 박아기가 없는 집안의 어려움, 병든 시어머니에 대한 걱정, 어머니를 찾으며 우는 어린 자식들의 슬픔을 이야기하며 박아기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4] 이는 박아기에게 고문의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배교하라는 말 한마디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지만, 박아기는 눈물을 흘리며 가족의 간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들의 배교를 회개하라고 타이르며 유혹을 이겨냈다.[4]

박아기의 딱한 사정을 아는 동료 교우들 몇몇도 감옥으로 찾아와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박아기는 단호하게 답했다.[4]

> "며칠 더 살겠다고 영원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저의 신앙을 버리라고 저를 설득하려는 대신에, 당신들이 속죄하십시오. 당신들은 저의 행운을 부러워 하게 될 것입니다."[4]

감옥을 지키는 포졸들까지 나서서 "너의 남편과 아들이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 너도 그 말 한마디만 하면, 똑같이 될 수 있다. 너는 같이 살아야 할 가족이 많지 않느냐?"라며 회유했지만, 박아기는 "제 남편과 아들의 배교는 그들의 일일 뿐인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저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답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4]

박아기는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의 혹독한 매질을 당하면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포장은 박아기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녀를 형조 감옥으로 이송했다. 형조에서도 박아기는 더 심한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 형조 판서는 "너의 남편과 아들은 풀려났다. 너 또한 한 마디만 하면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며 다시 회유했지만, 박아기는 "각자 알아서 할 일입니다. 저의 바람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신앙을 지켰다.[4]

감옥에 갇힌 지 3년이 지난 1839년 5월 10일, 박아기는 "그릇된 책을 읽고 사악한 그림을 소지한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4] 그리고 1839년 5월 24일 금요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가 다른 여덟 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당하며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7세였다.[4][3]

3. 시복 · 시성

박아기 안나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5]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에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웹사이트 Roman Martyrology https://www.vatican.[...] The Vatican
[2] 웹사이트 Den hellige Anna Pak A-gi (1783-1839) https://www.katolsk.[...] 1999-04-06
[3] 서적 The New Glories of the Catholic Church Richardson and Son 1859
[4]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5] 뉴스 복자 124위 특집. 124위 시복 후속 조치·현황 http://www.catholict[...] 가톨릭신문 201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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