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박후재는 1798년에서 1799년 경에 태어난 한국의 천주교 순교자이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여 짚신을 만들며 생계를 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고, 같은 해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99년 출생 - 제14대 더비 백작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제14대 더비 백작 에드워드 조지 제프리 스미스스탠리는 영국의 정치가, 귀족, 지주로서 보수당 당수와 총리를 역임했으며, 휘그당에서 시작하여 보수당으로 당적을 옮겨 빅토리아 시대 주요 정치인으로서 선거법 개정에 기여했다. - 1799년 출생 - 오노레 드 발자크
오노레 드 발자크는 1799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인간희극》을 통해 19세기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찰스 디킨스 등 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 프랑스 소설가이다. - 용인시 출신 - 이용구 (1964년)
이용구는 1964년 출생한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변호사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서 법무부 법무실장, 차관, 장관 직무대리를 역임했다. - 용인시 출신 - 송영근 (1947년)
대한민국 육군 중장 출신인 송영근(1947년)은 국군기무사령관을 지냈으며,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 1839년 사망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839년 사망 - 페르난도 소르
페르난도 소르는 스페인 출신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양식을 결합한 기타 음악과 교육용 연습곡집으로 유명하며 후대 기타리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박후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성인 정보 | |
이름 | 박후재 요한 |
출생일 | 1799년 |
사망일 | 1839년 9월 3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경기도 용인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1839년 3월, 기해박해가 발발했지만, 박후재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는 장독 한 개를 팔아 돈을 나누고 아내를 숙모 집으로 보냈다. 다음날 박후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박후재는 포장에게 심문을 받으면서도 "하느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저는 임금님보다는 하느님께 더 큰 충절을 바쳐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을 굽히지 않았고, 곤장 40대를 맞는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는데, 망나니가 여러 차례 칼을 내리쳤지만 목이 떨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칼을 가는 동안 박후재는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고 한다. 망나니가 다시 칼을 내리쳐 참수를 마쳤을 때, 박후재는 41세였다.
2. 1. 어린 시절과 성장
박후재는 순교자 박취득 라우렌시오의 아들로 1798년에서 1799년 경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살다가 함께 한양으로 이사해서 노모는 물장사를 하고 그는 짚신을 만들며 생계를 이었다.36세에 한 교우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후일에 그의 특별한 언행에 대해서 증언하였다. 그는 신앙 생활에 매우 충실하였고 매우 열심히 일했다. 그는 "저는 반드시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순교자로서 죽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또한 하느님을 위한 고행으로써 방망이로 자신의 정강이를 때렸다. 그는 아내에게 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또 "옛날에 한 성인이 자신의 상처에서 기어나오는 벌레를 보고 그것을 도로 상처 위에 올려 놓고는 '네 먹을 것이 여기있다.'라고 말했답니다. 우리도 꼭 고통을 견뎌 냅시다."라고 말하곤 했다.
2. 2. 신앙 생활과 순교에 대한 열망
박후재는 순교자 박취득 라우렌시오의 아들로 1798년에서 1799년 경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여읜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사해서 노모는 물장사를 하고, 그는 짚신을 만들며 생계를 이었다.36세에 한 교우와 결혼한 그는 신앙 생활에 매우 충실하였고 열심히 일했다. 그는 "저는 반드시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순교자로서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또한 하느님을 위한 고행으로 방망이로 자신의 정강이를 때렸다. 그는 아내에게 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또 "옛날에 한 성인이 자신의 상처에서 기어나오는 벌레를 보고 그것을 도로 상처 위에 올려 놓고는 '네 먹을 것이 여기있다.'라고 말했답니다. 우리도 꼭 고통을 견뎌 냅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 3. 체포와 심문
박후재는 36세에 한 교우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후일에 그의 특별한 언행에 대해서 증언하였다. 그는 신앙 생활에 매우 충실하였고 매우 열심히 일했다. 그는 "저는 반드시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순교자로서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또한 그는 하느님을 위한 고행으로써 방망이로 자신의 정강이를 때렸다. 그는 그의 아내에게 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옛날에 한 성인이 자신의 상처에서 기어나오는 벌레를 보고 그것을 도로 상처 위에 올려 놓고는 '네 먹을 것이 여기있다.'라고 말했답니다. 우리도 꼭 고통을 견뎌 냅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839년 3월 기해년의 박해가 발발했지만, 그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들 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는 장독 한 개를 팔아 돈을 둘로 나눠 반은 자신이 갖고 반은 그의 아내에게 주었다. 그는 아내를 그의 숙모 집으로 먼저 보내며 필요하면 그 돈을 쓰라고 말했다. 다음날 그녀는 남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후재는 포장에게 심문받았다. "네 부모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제 어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제 아버지는 신유년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참수되셨습니다. 친척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는 네가 왕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하느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저는 임금님보다는 하느님께 더 큰 충절을 바쳐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너의 동료들의 이름을 대라." "저는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습니다." "네가 살기를 원한다면, 너의 신앙을 부정하거라." "저의 종교가 제 삶보다 더 중요합니다."
박후재는 곤장 40대를 맞았다. 그의 살가죽이 찢겨 나갔고 피로 범벅이 되었다. 곤장이 그의 뼈에 부딪히는 소리가 옥중에 있는 다른 죄수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러나 박후재는 그의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2. 4. 혹독한 고문과 순교
박후재는 순교자 박취득 라우렌시오의 아들로 1798년에서 1799년 경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살다가 함께 한양으로 이사해서 노모는 물장사를 하고 그는 짚신을 만들며 생계를 이었다.36세에 한 교우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후일에 그의 특별한 언행에 대해서 증언하였다. 그는 신앙 생활에 매우 충실하였고 열심히 일했다. 그는 "저는 반드시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순교자로서 죽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또한 하느님을 위한 고행으로써 방망이로 자신의 정강이를 때렸다. 그는 아내에게 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또 "옛날에 한 성인이 자신의 상처에서 기어나오는 벌레를 보고 그것을 도로 상처 위에 올려 놓고는 '네 먹을 것이 여기있다.'라고 말했답니다. 우리도 꼭 고통을 견뎌 냅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839년 3월 기해년의 박해가 발발했지만, 그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들 집에는 돈이 한푼도 없었다. 그는 장독 한 개를 팔아 돈을 둘로 나눠 반은 자신이 갖고 반은 아내에게 주었다. 그는 아내를 숙모 집으로 먼저 보내며 필요하면 그 돈을 쓰라고 말했다. 다음날 그녀는 남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후재는 포장에게 심문받았다. "네 부모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제 어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제 아버지는 신유년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참수되셨습니다. 친척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는 네가 왕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하느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저는 임금님보다는 하느님께 더 큰 충절을 바쳐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너의 동료들의 이름을 대라." "저는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습니다." "네가 살기를 원한다면, 너의 신앙을 부정하거라." "저의 종교가 제 삶보다 더 중요합니다."
박후재는 곤장 40대를 맞았다. 그의 살가죽이 찢겨 나갔고 피로 범벅이 되었다. 곤장이 그의 뼈에 부딪히는 소리가 옥중에 있는 다른 죄수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러나 박후재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는데, 망나니가 박후재의 목을 수 차례 내리쳤지만 목이 떨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칼을 가는 동안 박후재는 심히 경련을 일으켰고, 망나니가 재차 칼을 내리쳐 참수를 완료했다. 박후재가 그토록 처참하게 참수되어 순교하였을 때의 나이 41세였다.
3. 시복 및 시성
박후재 요한은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1]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