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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셸렌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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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터 셸렌베르크는 나치 독일의 고위 정보 장교로, 1933년 친위대(SS)에 입대하여 국가보안본부(RSHA)에서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펜로 사건을 주도하고, 윈저 공작 부부 설득 작전을 수행했으며, 붉은 오케스트라를 분쇄하는 등 다양한 첩보 활동을 펼쳤다. 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서방 연합국과의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석방 후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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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셸렌베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3년, 친위대 상급대령 시대의 셸렌베르크
1943년, 친위대 상급대령 시대
본명발터 프리드리히 셸렌베르크
별칭해당사항 없음
출생1910년 1월 16일
출생지독일 제국 프로이센 라인 주 자르브뤼켄
사망1952년 3월 31일
사망지이탈리아 토리노
소속 정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출신 학교마르부르크 대학교
배우자케테 코르테캄프
이레네 그로세-셰네파우크
군사 경력
충성나치 독일
군 종류친위대
복무 기간1933년–1945년
계급친위대 여단지도자 겸 경찰 소장
지휘국가보안본부 제VI국 국장, 보안방첩부(SD) 대외국 국장
참전해당사항 없음
훈장철십자 훈장 1급
전쟁 공로 십자 훈장 1급 및 2급 (검 부착)

2. 경력

발터 셸렌베르크는 1933년 친위대(SS)에 입대하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만나 지퍼하이츠디엔스트(SD)의 방첩 부서에서 일했다. 그는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7] 1934년 파리에서 첫 외국 첩보 임무를 수행했다.[8] 1937년에는 베니토 무솔리니 방문 경호를 위해 이탈리아로 파견되었고, 뛰어난 경호 업무로 하이드리히의 신임을 얻어 국가보안본부(RSHA) 창설에 기여했다.[9]

1939년 국가보안본부 창설과 함께 제IV국 (게슈타포) E부(방첩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19] 빌헬름 카나리스와 친분을 쌓았는데, 카나리스는 상관인 하이드리히와는 앙숙이었지만 셸렌베르크에게는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20]

1941년 5월, 친위대와 아인자츠그루펜(이동학살부대)의 역할 확대에 따라 육군의 물류 지원을 받아 ''아인자츠그루펜''의 작전을 지원했다. 같은 해 5월 20일, 하이드리히를 대신해 독일 통제 영토 내 유대인 이민 금지 회람을 발행, 최종 해결책에 기여했다. 이 회람에는 "임박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표현이 명시되어 대량 학살 공모 사실을 보여준다. 하이드리히 사망(1942년 6월) 후에는 하인리히 힘러의 최측근이 되었다. 힘러는 셸렌베르크에게 전권대사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1942년 3월, 하인츠 요스트가 RSHA Amt VI (SD 해외 정보) 국장직에서 해임되자, 하이드리히는 셸렌베르크를 ''SD-Ausland''의 수장으로 임명하였다.[1]

1944년 2월, 빌헬름 카나리스와 국방군 정보부는 히틀러의 신임을 잃었다. 이후 히틀러는 국방군 정보부를 셸렌베르크의 SD 산하에 두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셸렌베르크는 국방군 정보부까지 장악하여 독일 정보 기관을 모두 통괄하게 되었다.

2. 1. 초기 생애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발터 셸렌베르크는 부모의 일곱 자녀 중 막내였다. 그의 아버지는 피아노 제조사였다.[1][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자르 분지를 점령하고(1920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1920년대 초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셸렌베르크 가족은 룩셈부르크로 이주했다.

독일로 돌아온 셸렌베르크는 대학에 다녔는데, 처음에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1929년부터는 본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처음에 의학을 공부했지만 곧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법학 대학원에서 셸렌베르크는 지퍼하이츠디엔스트(SD)를 위해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3] 그는 실제로 대학 교수였던 두 명의 SD 요원에게 채용되었으며, 그들은 그에게 공무원에 합류하라고 조언했다고 보고했다. 1933년에 친위대(SS)에 입대했다. 셸렌베르크는 법학을 공부했지만 행정 변호사를 불신했고, SD가 일반 법의 제약 없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4][5][6]

1935년, 셸렌베르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만나 SD의 방첩 부서에서 그를 위해 일했다. 셸렌베르크는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7]

2. 2. 나치 친위대

1933년 4월 1일,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3,504,508). 같은 날 친위대(SS)에 입대했다(대원 번호: 124,817[8]). 셸렌베르크는 생활비 부족으로 수당을 받기 위해 나치당에 입당했다고 밝혔다.[9][10] 당시 그는 사법 수습생으로 법률을 연수 중이었으며, 친위대 활동은 처음에는 파트타임이었다.[11]

친위대 소년병 역사 교육 담당 직책을 맡았으나, 반 가톨릭 강연으로 SD(보안 정보국) 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친위대 중장의 주목을 받았다.[12][13] 1934년 SD에 참가,[14] 1936년 12월 사법 시험 합격 후 베를린 SD 본부 I국(인사·재정부)에 근무했다.[15][16] 1937년 독일 내무성에 입성, 1938년 참사관(Regierungsrat)이 되었다.[17]

1939년 9월 국가 보안 본부 창설과 함께 제IV국 (게슈타포) E부(방첩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19] 국방군 방첩부장 빌헬름 카나리스와 친분을 쌓았는데, 카나리스는 상관인 하이드리히와는 앙숙이었지만 셸렌베르크에게는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20]

1941년 5월, 친위대(SS)와 ''Einsatzgruppen''(이동학살부대)의 역할 확대에 따라 국방군(Wehrmacht)과 협상하여 육군의 물류 지원(전선 및 후방 지역)을 받아 ''Einsatzgruppen''의 살상 작전을 지원했다. 1941년 5월 20일, 하이드리히를 대신해 독일 통제 영토 내 유대인 이민 금지 회람을 발행, 최종 해결책에 기여했다. 이 회람에는 "임박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표현이 명시되어 대량 학살 공모 사실을 보여준다. 하이드리히의 직속 부하였음에도 힘러에게 먼저 정보 보고를 하여 신뢰를 얻었고, 1942년 6월 하이드리히 사망 후 힘러의 최측근이 되었다. 힘러는 셸렌베르크에게 단순 조력자 이상의 전권대사(Sonderbevollmächtigter)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2. 3. SD 해외정보국 국장

1942년 3월, 하인츠 요스트가 RSHA Amt VI (SD 해외 정보) 국장직에서 해임되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그의 자리에 셸렌베르크를 ''SD-Ausland''의 수장으로 임명하였다.[1] 1942년 중반, 셸렌베르크는 중립국 아일랜드에서의 작전인 오스프레이 작전 계획에 관여했는데, 이 작전은 제1 SS 특수 부대원과 관련된 계획이었다.[2] 셸렌베르크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1942년 가을에 스위스 정보 책임자 로저 마송 대령과 통신 채널을 열었다.[3] 그는 심지어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모든 ''Abwehr''(군사 정보) 요원의 목록을 마송에게 제공하여 "그들을 추방"하려 했다.[4]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셸렌베르크는 반유대주의자이자 반영국인 예루살렘 대무프티 아민 알-후세이니를 로마에서 베를린으로 수송하여 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5] 붉은 군대가 독일군을 격퇴하고 서쪽으로 몰아내면서, 독일 참모는 스위스를 방어 작전에 포함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요새 유럽으로의 철수를 계획했다. 스위스 정보 책임자 마송은 이전에 셸렌베르크에게 사용했던 채널을 통해 "스위스 사건"으로 알려진 이 계획을 알고 셸렌베르크에게 스위스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는지 문의했다.[6] 이 질문으로 마송은 히틀러 본부 내에 정보 유출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냈지만, 독일이 스위스에 대한 기습 공격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셸렌베르크는 스위스에 대한 호감을 더하기 위해 독일 고위 사령부에 그러한 작전의 필요성이 없다고 설득했다고 주장했다.[6] OSS의 스위스 지부장 앨런 덜레스는 셸렌베르크 자신과의 직접적인 연락에도 불구하고, 마송과 셸렌베르크 간의 정보 유출 가능성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7]

신호 정보 요격은 게슈타포와 SD에게 독일 내 소련 스파이 조직인 "붉은 오케스트라"에 대해 경고했다.[8] 셸렌베르크는 여러 달 동안 참여자를 식별하기 위한 광범위한 노력을 이끌었다. 게슈타포는 116명을 체포했고, 그 중 절반은 격렬한 심문을 거쳐 처형되었다.[9] 이 시점에서 셸렌베르크는 Allgemeine-SS(일반 SS)의 장군(''Brigadeführer'')이 되었다.[10] 이 작전은 소련 작전에 대해 무지했던 ''Abwehr''의 희생으로 RSHA의 주요 승리였다.[11] 역사가 클라우스 피셔는 셸렌베르크의 "유일한 주요 성공은 붉은 오케스트라를 분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2]

''아프베어''의 수장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와 셸렌베르크는 친구였다고 한다. 그들은 베를린의 숲이 우거진 그뤼네발트에서 함께 말을 타며 나치 독일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곤 했다.[13] 이러한 승마 외출에는 종종 하이드리히와 베르너 베스트(Werner Best)가 참석했다.[14] 카나리스는 제국의 모든 정보 작전을 통제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던 셸렌베르크에게 신중했다.[15] 셸렌베르크는 하이드리히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나치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중앙 집중식 "포괄적인 보안 시스템"과 단일의 "대독일 정보국"을 구상했다(이는 국방군의 일부였던 '아프베어'와는 달랐다).[16] 셸렌베르크는 게슈타포 수장 하인리히 뮐러(Heinrich Müller)를 특히 불신했기 때문에 게슈타포보다 카나리스의 '아프베어'와 거래하는 것을 선호했다.[17] 그러나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아프베어'는 해산되었고, SD는 제국 전역의 정보에 대한 추가 권한을 부여받았다.[18] 카나리스는 군 정보부 후임자 게오르크 한센(Georg Hansen)의 심문을 근거로 1944년 7월 23일에 체포되었다.[19]

그 결과 '아프베어'의 일부 부서가 RSHA Amt VI 'SD-Ausland'에 통합되어 셸렌베르크의 지휘하에 놓이게 되었다.[20] 이러한 권한을 장악함으로써 셸렌베르크는 나치 정보의 "절대적 지배자"가 되었다.[21] 그는 버튼을 누르면 발사되는 두 개의 자동 소총이 내장된 "요새 같은 사무실" 책상으로 악명이 높았다.[22] SS 정보 장교 빌헬름 횑틀의 회고록에 따르면, 셸렌베르크는 게슈타포 국장 뮐러를 매우 의심했는데, 라디오 감시 녹음을 통해 그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뮐러가 소련과 협력하려는 계획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는 당시 RSHA 국장 에른스트 칼텐브루너(Ernst Kaltenbrunner)에게 이 증거를 알렸지만 무시당했다.[23] 칼텐브루너는 셸렌베르크를 싫어했는데, 아마도 그가 히믈러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여러 차례 그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24] 칼텐브루너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셸렌베르크의 부드러운 태도는 히믈러에게 호감을 샀고 "SS 수장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게 했다.[25]

연합군 군사 정보 문서가 공개되면서 프랑스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셸렌베르크와 공모하여 간첩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셸렌베르크는 그녀의 연애 상대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오퍼레이션 모델하트 (Operation Model Hat)는 샤넬이 오랫동안 맺어온 영국 귀족과의 관계와 윈스턴 처칠과의 친분을 활용하기 위해 구상되었다. 셸렌베르크는 샤넬을 나치 독일과 영국 간의 별도 평화를 중재하려는 계획(샤넬이 제안)의 중개인으로 고용했지만, 이 계획은 실패했다.

발터 셸렌베르크는 1941년까지 IVE 부장에 재직했다. 이후 VI국(SD 국외 첩보 / SD-Ausland)으로 이동하여 국장 하인츠 요스트의 대리가 되었다. 1942년에는 아인자츠그루펜(동부 전선에서 국방군 후방에서 유대인 학살을 행하던 부대) 임무를 위해 동부 전선으로 파견된 요스트를 대신하여 국가 보안 본부 제VI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주 스톡홀름 일본 공사관 무관인 오노데라 마코토 육군 소장과도 접촉했다.

1944년 2월, 중립국 국방군 정보부 정보 협력자의 배신으로 빌헬름 카나리스와 국방군 정보부는 히틀러의 신임을 잃었다. 이후 히틀러는 국방군 정보부를 셸렌베르크의 SD 산하에 두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셸렌베르크는 국방군 정보부까지 장악하여 독일 정보 기관을 모두 통괄하게 되었다.

2. 4. 정보기관 통합

1939년 나치가 독일 사회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함에 따라, 히틀러와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SS와 경찰 기관을 통합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발터 셸렌베르크는 1939년 2월 24일 국가 내 추가적인 중앙 집권화를 옹호하는 각서를 발표하며 이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1939년 여름, 셸렌베르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재단인 ''노르트하펜 재단''의 이사 중 한 명이 되었으며,[1] 헤르베르트 메르혼의 지도를 받았다.[2] 1939년 7월, 하이드리히는 국가보안본부(RSHA)를 창설하겠다고 발표했고, 셸렌베르크의 계획 덕분에 이 조직의 이름과 존재가 생겨났기에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1939년 9월 27일, 힘러는 RSHA를 공식적인 국가 조직으로 선포했다.[3]

빌헬름 카나리스와 셸렌베르크는 '아프베어'의 수장으로서 친구였고, 베를린의 숲이 우거진 그뤼네발트에서 함께 말을 타며 나치 독일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곤 했다.[4] 이러한 승마 외출에는 종종 하이드리히와 베르너 베스트가 참석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나리스는 셸렌베르크에게 신중했는데, 그는 제국의 모든 정보 작전을 통제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6] 하이드리히와 마찬가지로 셸렌베르크는 궁극적으로 나치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중앙 집중식 "포괄적인 보안 시스템"과 단일의 "대독일 정보국"을 구상했다('아프베어'와는 달랐다).[7] 셸렌베르크는 특히 게슈타포의 수장인 하인리히 뮐러를 불신했기 때문에 게슈타포보다 카나리스의 '아프베어'와 거래하는 것을 선호했다.[8] 그러나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아프베어'는 해산되었고, SD는 제국 전역의 정보에 대한 추가 권한을 부여받았다.[9] 카나리스는 군 정보부의 후임자인 게오르크 한센의 심문을 근거로 1944년 7월 23일에 체포되었다.[10]

그 결과 '아프베어'의 일부 부서가 RSHA Amt VI 'SD-Ausland'에 통합되어 셸렌베르크의 지휘하에 놓이게 되었다.[11] 이러한 권한을 장악함으로써 셸렌베르크는 나치 정보의 "절대적 지배자"가 되었다.[12] 그는 버튼을 누르면 발사할 수 있는 두 개의 자동 소총이 내장된 "요새 같은 사무실" 책상으로 악명이 높았다.[13]

2. 5. 평화 협상 시도

1945년 초, 셸렌베르크는 히틀러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핑계로 하인리히 힘러에게 히틀러를 몰아내고 서방 연합국과 별도의 평화 협상을 벌이도록 부추겼으나, 힘러는 망설이며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힘러를 전 스위스 대통령인 장마리 뮈지와 만나도록 설득했는데, 뮈지는 유대인 석방 대가로 스위스 프랑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셸렌베르크는 힘러를 설득하여 백작 폴케 베르나도트를 통해 서방 연합국과 협상을 시도하도록 했다. 셸렌베르크는 그해 초에 백작 베르나도트와 힘러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여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것을 위해 일했으며, 이는 강제 수용소에 갇힌 여러 수감자들을 스웨덴 적십자를 통해 석방하고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1945년 봄, 셸렌베르크는 서방 강대국과의 관계를 열기 위해 베르나도트 백작과의 추가 회담을 주도했다. 그는 1945년 4월 히믈러를 위한 회담을 주선하기 위해 직접 스톡홀름으로 갔다. 히믈러와 셸렌베르크는 모두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들이 나치 지도부가 서방 연합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 협상 카드라고 믿었다. 셸렌베르크는 그들의 협상에 대한 호의를 얻기 위해, 히믈러의 동의를 받아 독일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스위스와 스웨덴으로 1,700명의 유대인을 수송했다. 히틀러는 이 사실을 알고 추가적인 대피를 중단시켰다.

일련의 회담이 실패한 후, 셸렌베르크는 베르나도트에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직접 중재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 마지막 행동 역시 헛수고였다.

3. 전후

셸렌베르크는 전쟁 후 영국 군사 경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재판을 받았다. 그는 긴 징역형을 피하고자 친위대 조직과 나치 지도자들에 대한 증언을 했다.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장관 재판에 회부되어 1949년 6년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11] 간 질환으로 1951년에 석방되었다. 그는 회고록 『비밀 기관장 수기』(원제: ''Das Labyrinth'')를 집필했다.[11] 석방 후 스위스이탈리아에서 생활하다가 1952년 토리노에서 암으로 사망했다.[11] 말년에는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 매주 미사에 참석하는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11]

3. 1. 체포 및 재판

전쟁 후 셸렌베르크는 영국 군사 경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셸렌베르크는 긴 징역형을 피하기 위해 전후 재판에서 친위대 조직과 그 산하의 나치 지도자들을 상대로 증언했다. 부처 재판 동안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미궁''을 썼다. 역사가 로버트 게르바르트는 셸렌베르크의 회고록의 특정 내용에 대해 "의문스럽다"고 묘사한다.[1] 1949년 11월 4일, 그는 작전 제플린에서 요원으로 활용된 소련 전쟁 포로의 살해를 막지 못한 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2] 재판부는 전쟁 말기에 셸렌베르크가 나치 정권의 피해자들을 돕기 시작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재판부는 그가 선의로 행동했는지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을 인정했다. 그는 악화된 상태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2년 후 감옥에서 풀려났고, 스위스로 이주했다.[3] 이후 베르바니아-팔란차,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1952년, 그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사망했다.[4]

3. 2. 석방 및 사망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다른 피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셸렌베르크는 이후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장관 재판에 회부되어 1949년에 6년형을 선고받았다.[11] 수감 중 회고록 『비밀 기관장 수기』(원제: ''Das Labyrinth'')를 집필했으나, 간 질환으로 1951년에 석방되었다.[11] 이후 스위스이탈리아에서 생활하다 1952년 토리노에서 암으로 사망했다.[11]

말년에 셸렌베르크는 『비밀 기관장 수기』 편집 보조자 할프레히트의 증언에 따르면,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 매주 미사에 참석하는 독실한 신자였다고 한다.[11]

4. 논란 및 평가

발터 셸렌베르크는 나치 정권에서 정보 및 보안 분야의 핵심 인물이었으나, 그의 행동과 관련된 여러 논란이 있다.

그는 SS와 SD에서 활동하며 하인리히 힘러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휘를 받았다. 특히 1939년 베늘로 사건을 주도하여 영국의 정보 장교를 체포하는 등 SD의 영향력을 확대했다.[3]

전쟁 말기에는 평화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다.[3] 재판부는 그가 나치 정권의 피해자를 도우려 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했다.[4]

셸렌베르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아내와 불륜 관계였다는 논란이 있으며,[23]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과 애인 관계였다는 주장도 있다.[25]

4. 1. 나치 정권에 대한 기여

1933년, 셸렌베르크는 SS에 가입하여 SD (Sicherheitsdienst, 친위대 보안국)에서 근무했다.[1] 그는 하인리히 힘러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아래에서 일하며, 나치 정권의 정보 및 보안 업무에 관여했다.[1]

셸렌베르크는 SD 내에서 반(反)정보 활동을 담당하고, 해외 정보 수집 및 분석에도 참여했다.[2] 1939년에는 베늘로 사건(Venlo Incident)을 주도하여 영국의 정보 장교들을 체포하는 등 SD의 영향력을 확대했다.[3]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 셸렌베르크는 점령 지역에서 보안 경찰 및 SD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4]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부대는 유대인 및 기타 나치 정권의 적대 세력에 대한 탄압에 참여했다.[5]

1941년, 셸렌베르크는 SD의 해외 정보 부서 책임자가 되었다.[6]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독일의 해외 정보 활동을 주도하며, 연합국에 대한 정보 수집 및 공작 활동을 펼쳤다.[7] 그는 또한, 중립국과의 비밀 협상을 통해 독일의 이익을 추구하는 역할도 수행했다.[8]

4. 2. 평화 협상 시도에 대한 평가

전쟁 후 셸렌베르크는 영국 군사 경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셸렌베르크는 긴 징역형을 피하기 위해 전후 재판에서 친위대 조직과 그 산하의 나치 지도자들을 상대로 증언했다.[1] 부처 재판 동안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미궁''을 썼다. 역사가 로버트 게르바르트는 셸렌베르크의 회고록의 특정 내용에 대해 "의문스럽다"고 묘사한다.[2] 1949년 11월 4일, 그는 작전 제플린에서 요원으로 활용된 소련 전쟁 포로의 살해를 막지 못한 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3] 재판부는 전쟁 말기에 셸렌베르크가 나치 정권의 피해자들을 돕기 시작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재판부는 그가 선의로 행동했는지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을 인정했다. 그는 악화된 상태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2년 후 감옥에서 풀려났고, 스위스로 이주했다. 이후 베르바니아-팔란차,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1952년, 그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사망했다.[4]

4. 3. 기타 논란

상사이자 상관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아내 리나와도 불륜 관계였다고 한다.[23] 셸렌베르크의 회고록에 따르면, 페마른 섬에서 리나와 단둘이 산책하거나, 드라이브를 하거나, 커피를 마신 것이 전부라고 하지만, 질투심에 눈이 먼 하이드리히는 게슈타포 국장 하인리히 뮐러와 함께 셸렌베르크를 술집으로 유인해 독약을 먹였고, 해독제와 맞바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할 것을 강요했으며, 다시는 장관 부인과 허락 없이 어울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고 한다.[24]

그 후,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파리에서는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과 애인 관계였다.[25]

5. 대중문화


  • 잭 히긴스가 "해리 패터슨" 명의로 발표한, 셸렌베르크가 주인공인 전쟁 모험 소설 『윈저 공 납치』가 있다. 이 소설은 영화화도 되었으나, 일본에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소설은 영국 왕위를 물러난 에드워드 8세를 영국 점령 후 통치에 이용할 목적으로 히틀러가 셸렌베르크에게 명령하여 유괴하려 한 실제 계획을 그리고 있다.[1]
  • 잭 히긴스 저의 전쟁 모험 소설 『독수리는 날아올랐다』가 있다.[2]
  • 1976년 이탈리아/프랑스/서독 합작 영화 『살롱 키티』는 셸렌베르크가 관여한 첩보용 사창가 "살롱 키티"를 그린다. 영화에는 그를 모델로 한 장교 "발렌베르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3]

6. 계급

진급일계급
1934년 1월 10일친위대 이등병
1934년 10월 17일친위대 상등병
1935년 1월 15일친위대 오장
1935년 5월 15일친위대 하사
1935년 11월 9일친위대 상사
1936년 9월 13일친위대 특무상사
1937년 4월 20일친위대 소위
1938년 1월 30일친위대 중위
1938년 8월 1일친위대 대위
1939년 1월 30일친위대 소령
1941년 9월 1일친위대 중령
1942년 6월 21일친위대 대령
1943년 6월 21일친위대 상급대령
1944년 6월 21일친위대 소장 겸 경찰 소장


7. 수훈

참조

[1] 서적 Hitler's Intelligence Chief: Walter Schellenberg Enigma Books
[2] 서적 ニュルンベルク・インタビュー 河出書房新書
[3] 서적 秘密機関長の手記 角川書店
[4] 서적 Hitler's Intelligence Chief: Walter Schellenberg Enigma Books
[5] 서적 秘密機関長の手記 角川書店
[6] 서적 ニュルンベルク・インタビュー 河出書房新書
[7] 서적 Hitler's Intelligence Chief: Walter Schellenberg Enigma Books
[8] 서적 Hitler's Intelligence Chief: Walter Schellenberg Enigma Books
[9] 서적 秘密機関長の手記 角川書店
[10] 서적 ニュルンベルク・インタビュー 河出書房新書
[11] 서적 ニュルンベルク・インタビュー 河出書房新書
[12] 서적 秘密機関長の手記 角川書店
[13] 서적 ニュルンベルク・インタビュー 河出書房新書
[14] 서적 ナチ・ドイツ軍装読本 SS・警察・ナチ党の組織と制服 彩流社
[15] 서적 Hitler's Intelligence Chief: Walter Schellenberg Enigma Books
[16] 서적 ニュルンベルク・インタビュー 河出書房新書
[17] 서적 Hitler's Intelligence Chief: Walter Schellenberg Enigma Books
[18] 서적 Hitler's Intelligence Chief: Walter Schellenberg Enigma Books
[19] 서적 Hitler's Intelligence Chief: Walter Schellenberg Enigma Books
[20] 서적 髑髏の結社 SSの歴史 フジ出版社
[21] 서적 秘密機関長の手記 角川書店
[22] 서적 秘密機関長の手記 角川書店
[23] 서적 ナチスの女たち 第三帝国への飛翔
[24] 서적 秘密機関長の手記 角川書店
[25] 서적 ナチスの女たち 第三帝国への飛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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