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교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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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의 교통로는 발해와 주변 국가들 간의 교류를 위해 사용된 여러 경로를 의미한다. 신라도, 일본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등이 존재하며, 각 경로는 발해의 수도인 상경을 중심으로 연결되었다. 신라도는 신라와 발해 간의 육상 및 해상 교통로였으며, 일본도는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이었다. 조공도와 영주도는 발해가 당나라와 교류하기 위한 수로 및 육로였으며, 거란도는 발해와 거란 간의 교역로였다. 이러한 교통로들은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역사적 기록을 통해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도(新羅道)는 남북국 시대때 신라와 발해가 서로 오가던 대외교통로이다.
일본도는 발해 상경성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한 육지길과 발해 항구에서 일본 항구로 가는 해로, 그리고 일본에 도착한 발해 사신들이 일본의 수도로 들어가기 위한 길로 나뉜다. 발해 상경에서 동경용원부로 도착하는 육로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상경에서 옛 구국(지금의 돈화)을 거쳐 연변 지역을 지나 두만강을 따라 동경용원부인 훈춘의 동경성으로 도착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상경에서 왕청현으로 내려와 팔련성과 크라스키노토성을 거쳐 훈춘 동남 4km 떨어진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토성 푸시에트항에서 배를 타는 길이다.
2. 신라도(新羅道)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는 국도인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신라로 가는 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와 신라는 이하(泥河 : 현재의 용흥강)를 경계로 인접하여 있었고, 또 『삼국사기』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의하면 책성부(柵城府 : 즉 동경용원부)와 신라의 천장군(泉井郡 : 현재의 德源) 사이는 39역(驛)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신라도'''는 상경에서 동경을 거쳐 남경에 이른 다음 신라로 들어가는 경로를 지칭하였다.
신라도는 육상교통로와 해상교통로(동해, 서해)로 나뉜다. 대표적인 육상교통로는 신라도로 알려진 곳으로 신라와 발해 사이에 설치된 상설교통로이다.
이 육상교통로인 신라도에는 39개의 역사 내지 역관이 있었다. 이는 당나라 지리학자였던 가탐의 《고금군국지》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금군국지기록에는 '발해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 등 4개 부는 고구려의 옛지역이다. 신라 정천군으로부터 책성까지 이르는 사이에 39개 역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해상교통로에서 동해는 남경 남해부 청진항을 통해 한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서라벌에 이르는 길이다.
해상교통로에서 서해는 상경에서 서경 압록부의 압록강 하구를 통해 서해 바닷길로 남하하여 화성의 담흥포까지 해로를 통해 가고 육로로 동남으로 350km 정도 가서 수도인 서라벌에 도착하는 길이다.
발해와 신라간의 상설교통로의 존재는 양국의 빈번한 접촉을 의미한다.
신라도를 통하여 발해와 신라가 접촉하였던 구체적인 사실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두 번에 걸친 신라의 사신파견 기록,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발해가 신라와 결원(結援)하려 하였다는 기록, 일본기록에 보이는 당나라 사신 한조채(韓朝彩)가 발해에서 직접 신라로 갔다는 기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립관계에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민간 접촉은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교통로는 발해와 신라만을 잇는 구실만 한 것이 아니고 때로는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가는 경로로도 사용하였다.
즉,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의하면 777년 1월에 발해 사신이 남해부의 토호포(吐號蒲)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2. 1. 신라도의 경로
신라도(新羅道)는 남북국 시대때 신라와 발해가 서로 오가던 대외교통로이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는 국도인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신라로 가는 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와 신라는 이하(泥河 : 현재의 용흥강)를 경계로 인접하여 있었고, 또 『삼국사기』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의하면 책성부(柵城府 : 즉 동경용원부)와 신라의 천장군(泉井郡 : 현재의 德源) 사이는 39역(驛)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신라도'''는 상경에서 동경을 거쳐 남경에 이른 다음 신라로 들어가는 경로를 지칭하였다.
신라도는 육상교통로와 해상교통로(동해, 서해)로 나뉜다. 대표적인 육상교통로는 신라도로 알려진 곳으로 신라와 발해 사이에 설치된 상설교통로이다.
이 육상교통로인 신라도에는 39개의 역사 내지 역관이 있었다. 이는 당나라 지리학자였던 가탐의 《고금군국지》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금군국지기록에는 '발해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 등 4개 부는 고구려의 옛지역이다. 신라 정천군으로부터 책성까지 이르는 사이에 39개 역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해상교통로에서 동해는 남경 남해부 청진항을 통해 한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서라벌에 이르는 길이다.
해상교통로에서 서해는 상경에서 서경 압록부의 압록강 하구를 통해 서해 바닷길로 남하하여 화성의 담흥포까지 해로를 통해 가고 육로로 동남으로 350km 정도 가서 수도인 서라벌에 도착하는 길이다.
발해와 신라간의 상설교통로의 존재는 양국의 빈번한 접촉을 의미한다.
신라도를 통하여 발해와 신라가 접촉하였던 구체적인 사실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두 번에 걸친 신라의 사신파견 기록,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발해가 신라와 결원(結援)하려 하였다는 기록, 일본기록에 보이는 당나라 사신 한조채(韓朝彩)가 발해에서 직접 신라로 갔다는 기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립관계에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민간 접촉은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교통로는 발해와 신라만을 잇는 구실만 한 것이 아니고 때로는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가는 경로로도 사용하였다.
즉,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의하면 777년 1월에 발해 사신이 남해부의 토호포(吐號蒲)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2. 2. 신라도의 역할과 의미
남북국 시대 때 신라와 발해가 서로 오가던 대외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는 양국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발해와 신라는 신라도를 통해 사신을 파견하고,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했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는 국도인 상경을 중심으로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를 설명하면서,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신라로 가는 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와 신라는 이하(泥河 : 현재의 용흥강)를 경계로 인접해 있었고, 『삼국사기』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의하면 책성부(柵城府 : 즉 동경용원부)와 신라의 천장군(泉井郡 : 현재의 德源) 사이에 39역(驛)이 있었다.
신라도는 육상교통로와 해상교통로(동해, 서해)로 나뉜다. 육상교통로인 신라도에는 39개의 역사 내지 역관이 있었으며, 당나라 지리학자였던 가탐의 《고금군국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해상교통로에서 동해는 남경 남해부 청진항을 통해 한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서라벌에 이르는 길이고, 서해는 상경에서 서경 압록부의 압록강 하구를 통해 서해 바닷길로 남하하여 화성의 담흥포까지 해로를 통해 가고 육로로 동남으로 350km 정도 가서 수도인 서라벌에 도착하는 길이다.
발해와 신라간의 상설교통로의 존재는 양국의 빈번한 접촉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에는 두 번에 걸친 신라의 사신파견 기록이 있고,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발해가 신라와 결원(結援)하려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기록에는 당나라 사신 한조채(韓朝彩)가 발해에서 직접 신라로 갔다는 기록 등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립관계에 있었지만, 신라도를 통해 민간 교류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신라도는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가는 경로로도 활용되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의하면 777년 1월에 발해 사신이 남해부의 토호포(吐號蒲)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3. 일본도(日本道)
일본으로 가는 해로를 통해 일본에 도착한 후, 육로로는 794년 이전까지는 나라 시대의 수도인 헤이죠쿄로 들어갔으며, 헤이안 시대가 시작된 794년부터는 오늘날의 교토인 헤이안쿄로 들어갔다. 발해 사신이 정착한 항구로는 데와, 사도, 에치고, 노토, 가가, 에치젠, 다지마, 오끼, 호우키, 조몬, 쓰시마 등이 있으며, 이들은 일본 열도의 북륙도와 산음도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도를 통해 발해와 일본은 229년간 47회 사신을 왕래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본기에는 공식적인 기록이 10회도 되지 않는다.
발해는 초기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일본과 교섭했다. 신당연합 과정에서 일본을 통해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에서 먼저 사신을 보냈다. 이는 "속일본기"와 "목관"에서 '728년 정월 쇼무 천황을 만나고 발해의 국서와 선물을 전달하였다.'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발해 중반 이후에는 경제적인 목적 중심으로 일본도를 통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일본 귀족들은 발해 특산물인 담비 가죽과 학문적 교류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발해의 지방 수령들도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일본과 교류했다.
3. 1. 일본도의 경로
발해 상경에서 동경용원부로 도착하여 출발 항구로 도착하는 육로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상경에서 옛 구국(지금의 돈화)으로 가서 연변지역을 지나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 동경용원부인 훈춘의 동경성으로 도착하는 길이다.
두 번째로 상경에서 왕청현으로 내려와 팔련성과 크라스키노토성으로 접근하여 훈춘 동남 4km 떨어진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토성 푸시에트항에서 배를 타는 길이 있다.
일본으로 가는 해로를 통해 일본에 도착하여 육로로는 794년 이전까지는 나라 시대의 수도인 헤이죠쿄로 들어갔으며 헤이안 시대가 시작된 794년부터는 오늘날의 쿄토인 헤이안쿄로 들어갔다.
정착한 항구로는 대표적으로 데와, 사도, 에치고, 노토, 가가, 에치젠, 다지마, 오끼, 호우키, 조몬, 쓰시마 등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일본 열도의 북륙도와 산음도에 집중되어 있다.
3. 2. 일본도의 역할과 의미
일본도는 발해 상경성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한 육지길과 발해 항구에서 일본 항구로 가는 해로, 그리고 일본에 도착한 발해 사신들이 일본의 수도로 들어가기 위한 길로 나뉜다. 발해 상경에서 동경용원부로 도착하는 육로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상경에서 옛 구국(지금의 돈화)을 거쳐 연변 지역을 지나 두만강을 따라 동경용원부인 훈춘의 동경성으로 도착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상경에서 왕청현으로 내려와 팔련성과 크라스키노토성을 거쳐 훈춘 동남 4km 떨어진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토성 푸시에트항에서 배를 타는 길이다.
일본으로 가는 해로를 통해 일본에 도착한 후, 육로로는 794년 이전까지는 나라 시대의 수도인 헤이죠쿄로 들어갔으며, 헤이안 시대가 시작된 794년부터는 오늘날의 교토인 헤이안쿄로 들어갔다. 발해 사신이 정착한 항구로는 데와, 사도, 에치고, 노토, 가가, 에치젠, 다지마, 오끼, 호우키, 조몬, 쓰시마 등이 있으며, 이들은 일본 열도의 북륙도와 산음도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도를 통해 발해와 일본은 229년간 47회 사신을 왕래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본기에는 공식적인 기록이 10회도 되지 않는다.
발해는 초기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일본과 교섭했다. 신당연합 과정에서 일본을 통해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에서 먼저 사신을 보냈다. 이는 "속일본기"와 "목관"에서 '728년 정월 쇼무 천황을 만나고 발해의 국서와 선물을 전달하였다.'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발해 중반 이후에는 경제적인 목적 중심으로 일본도를 통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일본 귀족들은 발해 특산물인 담비 가죽과 학문적 교류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발해의 지방 수령들도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일본과 교류했다.
4. 조공도(朝貢道)와 영주도(營州道)
당나라와 발해는 130회~160회간 교류할 정도로 활발히 교류를 하였다. 당에서 발해로 30회의 사신을 파견하였고 발해에서 당나라로 100회 정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사신파견은 수로와 육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조공도는 그 중 대표적인 수로이다.
《신당서》 발해전(渤海傳)에는 국도(國都)인 상경(上京)을 중심으로 하여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조공도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는 조공하는 길(朝貢道也)’'''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공도'''는 발해입장에서는 등주도, 당지도, 압록도라고 불릴 수 있었던 길이었다. 조공도는 해로로 서경압록부를 지나 압록강을 따라 황해를 통해 등주에 도착하는 길이다.
등주에는 발해, 신라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발해관, 신라관, 신라원 등이 있었다. 이로 인해 등주를 통해 교류가 빈번하였다.
'''영주도는 상경에서 장령부를 거쳐 당의 영주도독부에 이르는 길이다.'''
출발근거지로는 지린성 화뎬시의 수미청, 즉 소밀성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알고 있다.
구체적인 경로는 《신당서》 지리지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상경에서 출발하여 첫 도읍지였던 돈화(敦化)를 지나 장령부(현재의 지린성 해룡현 산성진) 관내를 통과한 다음 심양(瀋陽)·흑산(黑山)·북진(北鎭)·의현(義縣 : 당시의 燕郡城)을 거쳐 영주에 이른다. 이는 상경에서 무단강을 따라 남쪽으로 가서 제2송화강 유역으로 들어가 영주로 통하는 길이다.
이러한 영주도는 실크로드의 동쪽 끝이 발해와 이어진다고 하여 한반도의 '초원로 동단'설, 발해의 '비단길'설, 발해국의 '실크로드'설이 있다.
4. 1. 조공도(朝貢道)
발해는 당나라와 130회에서 160회 가량 교류할 정도로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당나라에서 발해로 30회, 발해에서 당나라로 100회 정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사신 파견은 수로와 육로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조공도는 그 중 대표적인 수로였다.《신당서》 발해전(渤海傳)에는 국도(國都)인 상경(上京)을 중심으로 하여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조공도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는 조공하는 길(朝貢道也)’'''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공도'''는 발해 입장에서 등주도, 당지도, 압록도라고 불릴 수 있었던 길이었다. 서경압록부에서 출발하여 압록강을 따라 황해를 통해 등주에 도착하는 해로였다.
등주에는 발해관, 신라관, 신라원 등이 있어 발해와 신라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이를 통해 교류가 빈번하였다.
4. 2. 영주도(營州道)
영주도는 발해에서 당나라 영주도독부로 가는 육로였다. 상경에서 장령부를 거쳐 당나라 영주에 이르는 경로였다. 구체적인 경로는 《신당서》 지리지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상경에서 출발하여 첫 도읍지였던 돈화(敦化)를 지나 장령부(현재의 지린성 해룡현 산성진) 관내를 통과한 다음 심양(瀋陽)·흑산(黑山)·북진(北鎭)·의현(義縣 : 당시의 燕郡城)을 거쳐 영주에 이른다. 이는 상경에서 무단강을 따라 남쪽으로 가서 제2송화강 유역으로 들어가 영주로 통하는 길이다.이러한 영주도는 실크로드와 연결되어 '초원로 동단', '비단길', '실크로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5. 거란도(契丹道)
거란도(契丹道)는 거란과 발해 간 교역로로 사용된 길로 출발거점은 부여부이다. 부여부는 지린시로 비정되는데, 서단산 문화 유적과 부여 유적인 동단산 문화 유적이 많아 대조영의 출신지로 추정되기도 한다. 지린시는 서쪽으로는 평원을 통해 각지로, 동쪽으로는 상경으로 연결되는 육로의 거점이었다. '''거란도는 제2송화강 수로를 이용했다.''' 이 길은 돌궐, 회흘, 시리 등으로 가는 출구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소그드 은화의 발견으로 발해와 중앙아시아의 교류 증거도 있다. 이란계 소그드인들은 발해를 포함한 극동 지역에까지 교역 망을 뻗쳤다.
5. 1. 거란도의 경로
거란도(契丹道)는 거란과 발해 간 교역로로 사용된 길로 부여부가 출발 거점이다. 부여부는 지린시로 비정되는데, 서단산 문화 유적과 부여 유적인 동단산 문화 유적이 많아 대조영의 출신지로 추정되기도 한다. 지린시는 서쪽으로는 평원을 통해 각지로, 동쪽으로는 상경으로 연결되는 육로의 거점이었다. '''거란도는 제2송화강 수로를 이용했다.''' 이 길은 돌궐, 회흘, 시리 등으로 가는 출구일 가능성도 제기된다.5. 2. 거란도의 역할과 의미
거란도(契丹道)는 거란과 발해 간 교역로로 사용된 길로 출발 거점은 부여부이다. 부여부는 눙안시로 얘기가 되는데 이보단 지린시에 서단산 문화 유적이 있으며 부여 유적의 동단산 문화 유적이 많아 지린시를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출신지로 추정하기도 한다.지린시의 서쪽 구간은 평원이어서 각지로 통하는 육로의 거점이 되었으며 동쪽 구간은 상경으로도 통하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
거란도는 제2송화강 수로를 이용하였다. 이 길은 돌궐이나 회흘, 시리 등으로 가는 출구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소그드 은화의 발견으로 발해와 중앙아시아의 교류 증거도 있다. 이란계 소그드인들은 발해를 포함한 극동 지역에까지 교역 망을 뻗쳤다.
6. 역사적 기록
삼국사기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따르면 발해의 책성부(柵城府:동경 용원부, 중국 길림성 훈춘)와 신라의 삭주(朔州:천정군, 함남 문천군 덕원) 사이에 역이 39개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신라도의 주요 경로로 추정된다. 신라도는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를 출발하여 동경 용원부와 남경 남해부를 거쳐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가던 교통로로서 오늘날의 동해안을 따라 발해와 신라가 통교하였음을 보여준다.
신라도는 대체로 8세기 전반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양국이 이 교통로를 이용하여 자주 교류한 것은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이다.
현존 기록상 신라도를 최초로 이용한 사람은 당나라 사신 한조채(韓朝彩)로서 764년(발해 문왕(대흥) 28년) 발해에서 신라로 직접 갔다고 하며, 신라인으로는 790년(원성왕 6년) 발해에 사신으로 파견된 일기찬 백어(伯魚)가 있다.
그 이후 9세기 전반 양국은 이 교통로를 이용하여 빈번하게 내왕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812년(헌덕왕 4년)에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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