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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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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백교는 1912년 전정운이 창시한 사이비 종교로, 동학에서 파생되었다. 전정운은 금강산에서 도통했다 주장하며 포교를 시작했고, 한때 신도 1만 명을 모았다. 그는 신자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여성 신도들을 농락했으며, 이 과정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백백교 사건으로 이어진다. 백백교는 비밀 결사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종말론적 신학을 믿고 신자들에게 재산 헌납과 딸들을 교주에게 바칠 것을 강요했다. 1937년 경찰 수사로 800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교주 전용해는 자살로 위장해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백교 사건은 일제의 민족 탄압의 명분으로 활용되었으며, 전용해의 머리 표본은 오랫동안 보관되다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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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교
기본 정보
백백교 교주 전정운의 모습
창시자전정운
설립 연도1899년
해체 연도1941년
종교신흥 종교
종교 성향유사종교
역사
창립 배경1899년에 전정운이 동학에서 파생되어 창시함
교세 확장1920년대에 크게 확장
해체1930년대에 교주와 간부들이 살인, 사기, 간음 등의 범죄를 저질러 사회 문제가 됨. 1941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됨.
사건백백교는 신도들을 속여 재산을 갈취하고, 젊은 여신도들을 간음하거나 살해하는 등의 범죄를 저지름.
특징
교리미륵신앙과 기독교 교리를 혼합한 형태. "흰 옷을 입고 백(白)자를 외워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함.
신도주로 가난하고 무지한 농민층을 중심으로 신도를 확보함.
사회적 영향백백교 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유사 종교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킴.
관련 정보
관련 인물전정운
관련 사건백백교 사건

2. 역사

백백교 사건을 보도한 경성일보(京城日報) 1937년 4월 13일자 호외


백백교는 천도교의 분파인 백도교(백도교|白道敎한국어)에서 시작되었다.[1] 1899년에 창시된 백도교는 1912년에 정식으로 조직되었으며, 금강산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전정예가 지도했다. 주로 비밀 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신도는 1만 명에 달했다.

1902년(광무 6년), 동학 신자였던 전정운|전정운한국어금강산에서 수행 후 깨달음을 얻었다고 칭하며 "백도교"라는 이름으로 포교를 시작했다. "일정 주문을 외우고 예배하면 무병장수, 불로장생,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하여 한때 만 명의 신자를 얻었다. 전정운은 신자들에게서 금전을 기부받아 생활 자금으로 쓰고, 젊은 여성 신자(약 60명)를 으로 삼아 주지육림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교주의 태도에 의문을 품거나 도망치려는 첩이 나타나자, 전정운은 관헌에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여 1916년(다이쇼 5년)에 첩 4명과 신자 2명을 살해했다.

1919년(다이쇼 8년) 전정운이 뇌매독으로 사망했다.[2] 이후 1930년(쇼와 5년)과 1932년(쇼와 7년)에 살인 사건이 발각되었고, 실행범은 징역 10~15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 등에 수감되었다. 이로 인해 백도교는 궤멸된 듯했다.

전정운의 차남이자 2대 교주인 전용해|전용해한국어는 사건 발각 전에 도주하여 수사를 피했다. 이후 전용해는 교단을 "백백교"로 부활시켰다.

전용해는 관헌의 추격을 피하고자 교단을 비밀 결사 형태로 만들었다.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해 신자들은 일반인과 교제를 금지당하고, 인적이 드문 산간 지역에서 화전민 생활을 강요받았다.

전용해는 아버지처럼 주지육림 생활을 했으며, 경성부 사쿠라이초(현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4가)에 거처를 마련했다. 자신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신자나 성적 흥미를 잃은 첩은 산속으로 데려가 살해하고 암매장했다.

백백교 사건으로 교단이 일본 정부에 의해 궤멸되기까지 600여 명의 신자를 살해했다.[4]

2. 1. 기원과 유래

조선 후기 최제우유교, 불교, 도교의 교리를 종합하여 창시한 동학에서 여러 사이비 종교가 파생되었는데, 백백교의 전신인 백도교(白道敎)도 그 중 하나였다.[12] 백도교는 중국 영변에서 태어난 전정운(全廷芸, 1868~1919)이 창시한 신흥종교였다.[12][13] 전정운은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였으며, 금강산에서 3년간 기도 끝에 도통하여 천지신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13][14]

1900년경 하산한 전정운은 아버지의 연고지인 함경남도 문천군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신자가 늘어났고, 1912년에 강원도 김화군 오성산에 본거지를 두고 백도교를 창설하여 교주가 되었다.[15]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적극적으로 포교하여 한때 신도수가 1만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16] 백도교는 비밀결사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기본 교리는 동학과 거의 같았다. 주문을 열심히 외고 예배하면 무병장수하고 신선이 된다는 교리를 내세웠다.[15]

전정운은 "일정 주문을 외우고 예배하면 무병장수, 불로장생,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하여 신자들로부터 금전을 기부받아 생활 자금으로 사용하고, 젊은 여성 신자(약 60명)를 으로 삼아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주의 태도에 의문을 품는 신자들이 나타났고, 전정운은 관헌에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여 1916년에 첩 4명과 신자 2명을 살해했다.

1919년 전정운이 뇌매독으로 사망한 후,[2] 그의 차남 전용해와 당시 종교의 고위 사제였던 현욱광은 신도들에게 알리지 않고 시신을 비밀리에 매장했다. 이후 경찰 수사로 비밀 매장이 드러나면서 백도교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종교의 또 다른 고위 지도자였던 이휘룡은 1923년에 인천도(人天道한국어)라는 분파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전용해는 백도교의 남은 종파를 이끌고 1923년에 백백교로 종교를 재출범시켰다.[2]

2. 2. 백백교 (白白敎)

1919년 교주 전정운이 사망하자, 그의 둘째 아들 전용해는 우광현 등과 함께 전정운의 죽음을 숨기고 교단을 수습했다. 그러나 1920년 전정운의 사망 사실이 알려지면서 교단은 분열되었다. 전정운의 큰아들 전용주는 1923년 인천도(人天道)를, 셋째 아들 전용석은 도화교를 설립하여 독립했다.[14] 전용해는 백도교의 실권을 잡고 교주가 된 후, 백백교(白白敎)로 이름을 바꾸었다.[13] 백백교라는 이름은 '한 사람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하자'라는 교리를 담고 있었다.[19]

백백교는 주문을 외우며 하늘과 땅에 예배하면 무병장수하고 신선이 된다는 교리를 내세웠는데,[20] 이는 당시 신흥종교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속이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백백교는 천도교의 분파인 백도교에서 시작되었으며,[1] 종말론적 신학을 믿으며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Baekbaekbaekuiuiuijeokjeokjeokgameunggamgameunghasiopsungseong한국어이라는 진언을 외우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3]

전용해는 교단을 비밀 결사 형태로 만들고, 신도들에게 일반인과의 교제를 금지하며 화전민 생활을 강요했다. 또한, 아버지 전정운처럼 주지육림 생활을 하며 경성부 사쿠라이초(현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4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신자나 첩을 살해하고 암매장했다. 백백교 사건으로 교단이 궤멸되기까지 600여 명의 신자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2. 3. 금화 사건

1915년경 백백교의 전신인 백도교의 교주 전정운이 금화군 오성산에서 그의 애첩 4명을 산 채로 파묻어 버린 사건을 '금화사건'이라고 한다.[21]

전정운은 교세가 성장하자 혹세무민하며 간음과 간통을 일삼았고, 아끼던 애첩 4명을 생매장시키고 일부 여성들을 교수대에서 교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정운은 1919년에 뇌매독으로 사망하여[2]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사건에 가담했던 강명성 등 10여 명은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정운의 차남이자 2대 교주인 전용해는 수사망을 피해 지방으로 도망 다녔으며, 이후 위축된 조직 재건 사업을 비밀리에 펼쳤다.[21]

1930년 7월, 10여 년 전 백도교 시절에 있었던 금화사건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면서 백백교의 교세는 위축되었다.[21] 1932년에는 실행범에게 징역 10~15년의 실형 판결이 내려져 서대문형무소 등에 수감되었다. 이로 인해 백도교는 궤멸된 듯했으나, 전용해는 도주하여 수사망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전용해는 교단을 "백백교"로 부활시켰다.[2]

3. 백백교 사건

1937년, 백백교는 교주 전룡해에 반항하려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800구의 시신이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백백교 간부들은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3] 전룡해는 교단을 비밀 결사 형태로 운영하며 신도들에게 일반인과의 교제를 금지하고, 인적이 드문 산간 지역에서 화전민 생활을 강요했다.

전룡해는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4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신자나 첩을 살해하고 암매장하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백백교 사건으로 교단이 궤멸되기 전까지 600여 명의 신자가 살해되었다.[4]

1937년 2월, 경기도 경찰부 동대문경찰서는 경성부 내 아지트를 급습하여 간부 80명을 검거했으나, 전룡해는 놓치고 말았다. 이후 간부 150명이 추가로 검거되면서 최소 314명의 신자가 살해된 사실이 밝혀졌다.[5][6] 전룡해는 경기도 양평군의 산속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고, 백백교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3. 1. 백백교의 횡포

백백교 교주 전용해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칭하며 '대원님'으로 부르게 했다.[22] 그는 물과 불로 심판하는 날이 올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전국 53곳의 피난처에 은거해야 한다고 신도들을 현혹했다.[23][25] 또한 전용해가 천위(天位)에 등극할 인물이며, 머지않아 그의 주도로 일제를 물리치고 독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3] 독립 후에는 헌금 액수와 헌신도에 따라 대신, 참의,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등에 임명한다는 허황된 교리로 재산을 갈취하였다.[24]

재산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딸을 바치게 했는데, 미모가 뛰어난 여성은 교주의 첩이 되었다.[24] 전용해는 이들을 대상으로 성폭행과 성적 학대를 일삼았고, 나머지 여성들은 간부들에게 넘겼다.[25] 그는 변태성욕자였으며, 많은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정사(情事)를 벌이며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칭했다.[25]

전용해는 교주의 행각에 불만을 품거나, 비리나 범죄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비밀 누설의 염려가 있거나 배교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깊은 산중으로 끌고 가 살해 후 암매장했다.[26] 이러한 일은 '벽력사(霹靂使)'라고 불리는 광신도들이 담당했다.[26] 조직원이 너무 많아 먹여 살리기 귀찮거나, 한 장소에 인원이 너무 많아 발각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27]

백백교는 가족 단위로 입교한 사람들을 각 지부에 분산 배치하여 볼모로 삼아 배교를 막았고, 충성도가 높은 사람들을 감시 조직으로 만들어 신도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했다.[19] 이들은 민심 교화와 광명세계 실현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가산이 좀 있지만 배움이 짧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포교 대상으로 삼았다.[19][23] 경찰 조사 결과 조직원 중 소학교 졸업자는 한 명뿐이었고, 대부분 소학교 중퇴 이하의 학력이었다.[25][28] 전 재산을 헌납한 이들은 화전을 일구며 가난하게 살았지만,[29] 교주와 지도부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백백교는 종말론적 신학을 믿었으며,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한국어)이라는 주문을 외우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신자들에게 재산을 바치고 딸들을 창시자의 시중을 들도록 요구했다.[3]

전용해는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해 신도들을 일반인과 격리시키고, 인적이 드문 산간 지역에서 화전민으로 생활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아버지 전정운처럼 주지육림 생활을 했으며,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4가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의를 제기하는 신자나 성적 흥미를 잃은 첩은 산속에서 살해하고 암매장했다.

백백교 사건으로 교단이 일본 정부에 의해 궤멸되기까지 600여 명의 신자를 살해했다.[4] 교단은 "조선은 가까운 장래에 대원임(전용해)의 통솔 아래 독립하며, 독립이 되면 각 신자의 기여도에 따라 지사나 경찰서장 등의 고관에 임명한다."[8]라는 식으로 포교 활동을 벌였다. 입교한 신자는 모든 재산을 교단에 기증하고, 젊고 아름다운 딸은 전용해의 첩이 되었다. 얼마 후, 이들을 산간 지역으로 몰아내 화전민으로 만들고 화전 농업으로 얻은 수입마저 헌금하게 하는 등 철저한 수탈을 자행했다. 또한 "배교자는 죽음으로 처벌받는다"고 선전하며, 실제로 교단의 뜻에 거스르는 신자는 노소를 불문하고 살해했다.

3. 2. 경찰 수사

유곤용은 자신의 조부와 부친이 백백교에 재산을 모두 헌납하고, 여동생이 교주 전용해의 성노리개가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30] 분노한 그는 1937년 2월 16일, 거액의 헌금을 미끼로 전용해를 만났으나 복수에 실패하고 전용해는 도주했다. 이에 유곤용은 백백교 일당을 일본 경찰에 고발하였다.[31]

경찰은 1930년 금화사건으로 소탕된 줄 알았던 백백교가 은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검거에 나섰다.[32] 서울 중구 인현동에 있는 전용해의 집을 급습했으나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고, 이경득, 이순분 등 간부들만 체포할 수 있었다. 경찰은 이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하여 백백교 내부에서 재산 갈취, 정조 유린, 살해 암매장 등 흉악 범죄가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고, 대대적인 수사와 검거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1937년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경찰 수사를 통해 백백교 교주에게 반항하려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800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백백교 간부들은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3] 같은 해 2월 17일, 경기도 경찰부 동대문경찰서는 경성부 내의 아지트를 급습하여 간부 등 80명을 검거했으나, 전용해를 놓치고 말았다. 2월 26일에는 간부 약 150명을 검거했다.[5] 이로써 백백교가 최소 314명의 신자를 살해한 사실이 발각되었다(백백교 사건).[6]

전용해는 화전민이 된 신자의 집을 은신처로 삼아 각지를 전전했지만, 관계자들이 잇따라 검거되면서 점차 궁지에 몰렸다. 결국 1937년 3월 하순경 경기도 양평군의 산속에서 자살했고, 4월 7일에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백백교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3. 3. 수사 결과

경찰의 본격적인 수사 결과, 서울 마포, 청량리, 양평, 연천, 사리원, 세포, 양주 등 전국 20여 곳의 비밀 아지트에서 암매장된 시신 314구가 발견되었다.[33] 경찰은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전용해에 대해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리고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전용해는 여러 가명을 사용하고,[34] 사진을 남기지 않았으며, 항상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다녀 가족과 최측근 외에는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검거에 나선 지 50여 일 만에 경기도 용문산에서 전용해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시신 훼손 상태가 심했으나[35] 경찰은 전용해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36] 이로써 사건 수사는 일단락되었다.[37] 1937년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경찰 수사를 통해 백백교 교주에 반항하려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800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백백교 간부들은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3]

당시로서는 범죄 사상 초유의 대형 사건이었기에 공판에 회부되기까지 수사와 예심에만 3년이 걸렸다. 1940년 3월에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총 25명에게 보안법 위반,[38] 살인, 사체 유기, 상해치사, 살인 강도, 외설, 사기, 공갈, 횡령, 공문서 및 사문서 위변조 등 10개의 죄목이 적용되었다.[39] 재판 결과 14명에게 사형, 9명에게는 중형이 선고되었다.

1937년(쇼와 12년) 2월 17일, 경기도 경찰부 동대문경찰서는 경성부 내의 아지트를 급습하여 간부 등 80명을 검거했다. 그러나, 중요한 인물인 전용해를 놓치고 말았다. 2월 26일, 간부 약 150명을 검거[5]했다. 이로써 백백교가 최소 314명의 신자를 살해한 사실이 발각되었다(백백교 사건)[6]

전용해는 화전민화된 신자의 집을 아지트로 삼아 각지를 전전했지만, 관계자들이 잇따라 검거되면서 점차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3월 하순경 경기도 양평군의 산속에서 자살했고, 4월 7일에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백백교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4. 논란

백백교 사건은 여러 논란과 의혹을 낳았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백백교 사건을 민족 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있다. 1936년 미나미 지로 총독 부임 이후, 일제는 민족주의적 종교 활동을 억압하기 위해 사이비 종교를 장려하고 비호했다.[40] 백백교 사건이 크게 주목받자, 일제는 신흥 종교 탄압을 본격화하고 일본 신사 참배를 강요했으며, 특히 민족의식이 강한 천도교 등을 억압하는 구실로 삼았다.[24] 조선총독부신도, 불교, 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사이비 종교로 규정하여 경찰을 통해 단속했다.[42] 또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했다.

전용해의 머리는 범죄자 두뇌 표본 연구 목적으로 포르말린에 보관되었다가,[22]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폐기 절차가 진행되었다.[22] 불교단체 모니노는 전용해의 머리 표본을 인수하여 화장하고 봉선사에서 위령제를 지냈다.[43] 전용해의 머리는 사망 70년 만인 2011년에 화장되어 폐기되었다.[22]

백백교 사건은 1940년에 재판이 종결되었지만, 사형 집행 기록이 없어 백백교 간부들이 광복 후 비밀리에 활동하며 조직을 재건하거나 분파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용화교는 백백교에서 분파된 대표적인 사이비 종교로 알려져 있다.[44]

2014년 발견된 유병언의 시신과 관련된 의혹은 1937년 발견된 전용해의 시신 훼손 사건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두 사건 모두 종교 지도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이 제기되었고, 자살 위장 가능성이 거론되었다.[47]

4. 1. 민족 탄압의 명분

백백교 사건은 일제가 우민정책(愚民政策)의 일환으로 사이비 종교를 은연중에 조장하고 장려하면서 빚어진 사건이며,[40] 상당 부분 조작되고 부풀려졌다는 주장이 있다.[24] 1936년 미나미 총독 부임 후에는 사교를 더욱 공공연히 비호, 장려해 산중이나 농어촌은 물론 서울 시내까지 더욱 만연했다고 한다. 미나미 총독은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종교활동을 억누르기 위해 의식적으로 이런 사이비 종교 장려 정책을 펼쳤다고 한다.[40]

일제는 당초 이 사건을 적당히 처리할 생각이었으나 조선의 여론이 악화되자 시간을 끌다가 재판을 1주일 만에 급하게 종결해버렸다.[27] 이 사건이 충격적인 화제로 부상하자 신흥 종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신사를 적극적으로 보급하면서 참배를 강요했으며,[41] 특히 민족의식이 강한 천도교 등을 억압하는 명분으로 삼았다.[24]

조선총독부는 신도,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사이비 종교로 분류했다. 종교는 학무국 종교과에서 관리했으나 사이비 종교는 경찰서 보안과에서 단속했다.[42] 또한 독립운동에 가세하는 기독교 세력을 누르기 위해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한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하는 등 탄압을 시작했다.

4. 2. 전용해 머리표본

일본 경찰은 사건 직후 전용해의 머리를 잘라 포르말린 병에 넣어 영구 보관했다. 이는 범죄자의 두뇌 표본으로 삼아 연구를 하겠다는 목적이었다.[22] 전용해의 머리는 범죄형 두뇌 표본으로 보존되었다.[7] 이 머리 표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해 보관되어 오다가, 인체 표본 전시가 비인도적이라는 진정을 행정안전부가 받아들여 폐기 처분 절차가 진행되었다.[22]

불교단체 모니노는 전용해의 머리 표본을 인수해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시켰다. 같은 달 27일에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서 전용해 교주의 위령제도 봉행되었다. 모니노 측은 본인과 유족의 의사에 반해 인체 표본을 만드는 것은 헌법에서 규정한 '인간 존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는 취지로 머리 표본 폐기를 촉구해왔었다. 또한 석가모니 시대에 흉폭한 살인마들도 불교에 귀의해 참회하고 불법을 수행한 것처럼, 전용해를 불법에 귀의시키기 위해 위령제를 지냈다고 밝혔다.[43] 전용해의 머리는 사망 70년 만인 2011년 10월 25일에 화장되어 폐기되었다.[22]

4. 3. 백백교의 후예들

백백교 사건은 1940년에 재판을 통해 종결되었으나 사형 집행에 대한 공식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죄를 선고받았던 백백교 간부들은 광복 후 석방되어 비밀리에 활동하며 조직을 재건하거나 백백교의 분파를 만들었고, 그 아류들이 널리 퍼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백백교에서 분파되었다고 보여지는 대표적인 사이비 종교는 용화교이다. 용화교의 교주 서백일은 전라북도 김제에 용화사를 본부로 하여 활동하였으며, 교리를 이용하여 금품 갈취, 여신도 농락 등을 일삼다가 1962년에 범죄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44]

4. 4. 닮은꼴 사건

2014년 6월 12일,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의 시신이 전남 순천의 어느 매실밭에서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 내렸으나, 시신을 둘러싼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중 하나는 사체를 바꿔치기한 후 자살로 위장하여 유병언이 도주했을 가능성이었다. 유품 중 유병언의 것으로 추정되는 물품들이 있었으나, 2주 만에 반백골 상태로 부패가 너무 빨리 진행되어 외모 식별이 어려웠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45]

이는 1937년 4월 6일에 발견된 백백교 교주 전용해의 시신 중 얼굴 부분이 크게 훼손되어 신원 확인이 어려웠던 경우와 매우 유사했다. 전용해의 옷 주머니에서 그의 것으로 알려진 엘진 금시계와 돈 80원이 들어있기는 하였으나, 부검 결과 본격적인 수사 시작 일주일 만에 사망했다는 점 등은 전용해 역시 자살로 위장한 채 도피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갖게 했다.[46] 더욱이 유병언과 전용해는 모두 종교 지도자라는 공통점도 있었다.[47]

5. 평가

백백교가 사악한 종교였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신흥종교를 사이비 종교로 치부할 수는 없다. 바빌론 유수 당시의 유대교나 후대에 창시된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역시 신흥종교였던 시절이 있었다. 천도교 역시 신흥종교였지만 1910년에 교인 수가 100만을 넘었고 독립운동과 민중계몽운동에 주력했다. 근대 이후 발흥한 신흥종교가 공통으로 추구한 인존사상, 민중사상, 후천개벽, 지상천국, 구세주사상, 선민사상, 조화사상, 통일사상, 해원사상, 전통문화계승 사상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교리를 악용하는 사악한 종교가 존재하며 오용될 소지가 있을 뿐이다.[41]

종교는 합리성과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주관적인 믿음의 영역, 맹목의 영역에 속한다. 백백교 사건은 사악한 교주가 저지른 예외적인 일탈 행동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장막성전(1975), 오대양 사건(1987), 다미선교회 사건(1992), 아가동산 사건(1996) 처럼 종교를 빙자한 크고 작은 범죄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48] 일부 신흥종교는 기성종교보다 더 직접적으로 현세의 부귀영화와 육체의 영생을 약속한다. 종교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현세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보다 더 값진 마음의 평화일 것이다. 종교를 통해 현세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려 들면 언제든지 누구든지 사교 집단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백백교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을 파고든 경우에 해당한다.[48]

백백교는 "조선은 가까운 장래에 대원임(전용해)의 통솔 아래 독립한다. 독립이 되면 각 신자의 '''기여도'''에 따라 지사나 경찰서장 등의 고관에 임명한다."[8]라는 말로 포교 활동을 벌였다. 신도들은 재산을 바치고, 딸을 바치면서 수탈당했다. 또한, 교단의 뜻을 거스르면 "배교자는 죽음으로 처벌받는다"는 선전에 따라 살해당했다.

6. 창작물

1961년과 1992년에 백백교 사건을 바탕으로 한 같은 이름의 영화가 두 차례 개봉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백도교 https://encykorea.ak[...]
[2] 웹사이트 백백교 https://encykorea.ak[...]
[3] 뉴스 "[책갈피 속의 오늘]1937년 백백교 피해자 유골 발굴" https://n.news.naver[...]
[4] 뉴스 "「医学的価値ない」 日本統治時代の「生殖器標本」廃棄決定-韓国" http://m.searchina.n[...] SBIサーチナ 2010-06-03
[5] 뉴스 오늘의 역사(2月26日) https://megalodon.jp[...] 聯合ニュース 2009-02-26
[6] 뉴스 한국의 대형 살인사건 https://japanese.joi[...] 중앙일보 2008-12-29
[7] 뉴스 일제가 만든 ‘사람 머리 표본’ 내일 화장 http://news.kbs.co.k[...] KBS NEWS 2011-10-24
[8] 문서
[9] 뉴스 백백교 교주 전용해 머리통, 70년만에 화장 https://news.naver.c[...]
[10]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1] 백과사전 동학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2] 문서
[13] 백과사전 백도교 https://terms.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15] 백과사전 백도교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6] 백과사전 백백교 사건 https://terms.naver.[...] 원불교대사전
[17] 뉴스 백백교에서 신천지까지, 신흥 사교집단 열전 https://news.naver.c[...]
[18] 백과사전 백백교 https://terms.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9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0] 뉴스 해인사 전각 낙서로 본 사이비 종교의 실태 http://www.ilyoseoul[...]
[21]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22] 백과사전 전용해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3]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24] 백과사전 백백교 사건 https://terms.naver.[...] 원불교대사전
[25] 뉴스 책갈피 속의 오늘 1937년 백백교 피해자 유골 발굴 https://news.naver.c[...]
[26] 백과사전 백백교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7]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28]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29]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30] 기사 '[신동아]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https://shindonga.do[...]
[31]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32] 뉴스 "[조선일보 호외] 1937년 4월 13일자 보도" https://newslibrary.[...]
[33] 뉴스 현직 판사가 쓴 ‘유병언 사건 닮은꼴’ 소설 화제 https://news.naver.c[...]
[34]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35] 뉴스 "[한겨레 신문] 현직 판사가 쓴 ‘유병언 사건 닮은꼴’ 소설 화제" https://news.naver.c[...]
[36] 문서 수사시작 2월 16일, 전용해 자살 2월 21일, 시신발견 4월 초
[37]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38]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39]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40]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9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41]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9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42]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43] 뉴스 "[한겨레 신문] 백백교 교주 머리표본 70년 만에 화장" https://n.news.naver[...] 한겨레 신문
[44] 웹사이트 "[데일리 굿뉴스] 사회적 물의 일으킨 이단들" https://www.goodnews[...]
[45] 뉴스 "[뉴데일리] 유병언 백골사체가 남긴 3가지 미스터리" https://www.newdaily[...] 뉴데일리
[46] 뉴스 "[한겨레 신문] 현직 판사가 쓴 ‘유병언 사건 닮은꼴’ 소설 화제." https://www.hani.co.[...] 한겨레 신문
[47] 뉴스 "[뉴데일리] 백골 유병언과 백백교 교주 全龍海 & 조희팔" https://www.newdaily[...] 뉴데일리
[48] 서적 경성기담 살림출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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