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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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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원왕은 고구려의 제23대 국왕으로, 문자명왕의 아들이며 안장왕의 동생이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의 남북조에 조공을 바치며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북위로부터는 책봉을 받았고, 동위로 바뀐 후에는 표기대장군 호를 받았으며, 남조의 양나라로부터는 안장왕 때의 작호를 계승했다. 540년에는 백제의 침략을 격퇴했으며, 533년에는 평성(후일 양원왕)을 태자로 책봉했다. 545년 사망했으며,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고구려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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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태왕
재위 기간531년 5월 ~ 545년 3월
즉위531년 5월
이전 통치자안장왕
다음 통치자양원왕
이름고보연
출생498년 1월
출생지평양성
사망545년 3월
사망지평양성
매장지호남리 사신총 (추정)
배우자정부인, 중부인, 소부인
자녀양원왕, 아들
왕호연가태왕, 건흥태왕
시호안원태왕, 곡향강상태왕, 향강상태왕
아버지문자명왕
직업
종교불교
왕가
왕조고구려
한국어 이름
한자安原王, (鵠)香岡上王
한글안원왕, (곡)향강상왕
로마자 표기Anwon-wang, (Gok)Hyanggangsang-wang
한자 (출생)寶延
한글 (출생)보연
로마자 표기 (출생)Bo-yeon
이미지
왕릉의 벽화

2. 생애

문자명왕의 아들이자 안장왕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안원왕은 키가 173cm 정도로 추정되며[5] 도량이 넓어 형인 안장왕의 사랑을 받았다. 안장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동생인 안원왕이 왕위를 이었다.

반면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은 안장왕에게 복귀군(福貴君)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이 아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복귀군의 후손들은 코마씨(狛氏)와 오코마노무라치씨(大狛連氏), 노다씨(野田氏) 등의 성을 사용하며, 이 성씨들의 선조가 안장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또한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531년 3월에 안장왕이 시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시해나 정변과 같은 내용 없이 531년 5월에 안장왕이 사망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어 《일본서기》의 기록과는 차이를 보인다.

안원왕은 북위양나라에 조공하며 남북조와 등거리 외교를 펼쳤으며, 북위가 동위서위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위에 조공하였다.[6] 533년(안원왕 3년) 정월에는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책봉하였다.[6][7]

540년(안원왕 10년) 9월, 백제 성왕우산성(牛山城)을 포위하자 정예 기병 5,000명을 보내 물리쳤다.[6] 백제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위협에 비교적 균형 잡힌 평화를 이루었다. 안원왕 재위 기간 동안 유일한 분쟁은 540년 음력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했지만, 안원왕은 기병 5,000명을 보내 공격자들을 격퇴했다.[1]

장수왕 이래로 중국의 위진남북조 양면에 대해 조공을 계속했다. 북위로부터는 532년에 '사지절·산기상시·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되었으며, 북위가 동위로 바뀐 후 534년에는 '표기대장군' 호를 더해 받았다. 으로부터는 안장왕 대의 작호인 '영동장군·도독영평이주제군사·고구려왕'을 그대로 계승했다.

반도 내에서의 교류에 대해서는, 540년 9월에 백제가 쳐들어와 우산성을 포위한 것과, 이때 정병 5천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킨 것만을 전한다.

535년(안원왕 5년) 5월에는 남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유실되고 2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12월에는 우레가 치고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이와 더불어 가뭄이 들자 사신을 파견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백성들이 농사를 망치고 굶주림이 계속되자 안원왕은 직접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살피고 위로하였다.[6]

545년 3월에 사망하여 안원왕으로 시호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매장지에 대한 기술은 없다. 또한, 《양서》에는 "태청 2년(548년)에 안원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양원왕)을 '영동장군·고구려왕·낙랑공'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는 이 《양서》의 기사를 오류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는 《백제본기》를 인용, 안원왕이 545년 12월 자식들의 왕위 쟁탈전 중에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양서(梁書)》와 《남사(南史)》에는 안원왕이 548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안원왕의 첫 번째 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즉위 3년째에 그는 두 번째 왕후가 낳은 장남 평성군(후일 양원왕)을 태자로 책봉했다.[1] 그러나 안원왕 재위 마지막 해에, 두 번째 왕후와 세 번째 왕후 사이에 각자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1] 귀족들은 두 파로 갈라져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왕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1] 이러한 내부 분열은 이후 수년간 왕권 약화와 고구려 쇠퇴의 시작이었다.[1]

2. 1. 즉위

문자명왕의 아들이며 안장왕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원왕은 키가 7척 5촌(173cm로 추정[5])이며 도량이 커서 형인 안장왕이 사랑하였으며, 안장왕이 아들 없이 죽자 동생인 안원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은 안장왕에게 복귀군(福貴君)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그 후손들이 코마씨(狛氏)와 오코마노무라치씨(大狛連氏), 노다씨(野田氏) 등의 성을 사용하면서 이 성씨들의 선조가 안장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531년 3월에 안장왕이 시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시해나 정변과 같은 별다른 설명 없이 531년 5월에 안장왕이 사망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어 《일본서기》의 기록과는 대치된다.

2. 2. 치세

북위양나라에 조공하며 남북조와 등거리 외교를 펼쳤으며, 북위가 동위서위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위에 조공하였다.[6]

533년(안원왕 3년) 정월,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책봉하였다.[6][7]

535년(안원왕 5년) 5월에는 남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유실되고 2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지진이 났으며, 12월에는 우레가 치고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이와 더불어 가뭄이 들자 사신을 파견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백성들이 농사를 망치고 굶주림이 계속되자 안원왕은 직접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살피고 위로하였다.[6]

540년(안원왕 10년) 9월, 백제성왕우산성(牛山城)을 포위하자 정예 기병 5,000명을 보내 물리쳤다.[6] 백제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위협에 비교적 균형 잡힌 평화를 이루었다. 안원왕 재위 기간 동안 유일한 분쟁은 540년 음력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했지만, 안원왕은 기병 5,000명을 보내 공격자들을 격퇴했다.[1]

장수왕 이래로 중국의 위진남북조 양면에 대해 조공을 계속했다. 북위로부터는 532년에 '사지절·산기상시·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되었으며, 북위가 동위로 바뀐 후 534년에는 '표기대장군' 호를 더해 받았다. 으로부터는 안장왕 대의 작호인 '영동장군·도독영평이주제군사·고구려왕'을 그대로 계승했다.

반도 내에서의 교류에 대해서는, 540년 9월에 백제가 쳐들어와 우산성을 포위한 것과, 이때 정병 5천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킨 것만을 전한다.

재위 15년인 545년 3월에 사망하여 안원왕으로 시호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매장지에 대한 기술은 없다. 또한, 《양서》에는 "태청 2년(548년)에 안원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양원왕)을 '영동장군·고구려왕·낙랑공'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는 이 《양서》의 기사를 오류로 보고 있다.

2. 3. 최후

545년 봄 3월, 안원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는 '''안원왕'''(安原王)이다.[1]

일본서기》는 《백제본기》를 인용, 안원왕이 545년 12월 자식들의 왕위 쟁탈전 중에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양서(梁書)》와 《남사(南史)》에는 안원왕이 548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안원왕의 첫 번째 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즉위 3년째에 그는 두 번째 왕후가 낳은 장남 평성군(후일 양원왕)을 태자로 책봉했다.[1] 그러나 안원왕 재위 마지막 해에, 두 번째 왕후와 세 번째 왕후 사이에 각자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1]

귀족들은 두 파로 갈라져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왕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1] 이러한 내부 분열은 이후 수년간 왕권 약화와 고구려 쇠퇴의 시작이었다.[1]

3.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안원왕은 545년 음력 3월에 사망했으며, 安原王일본어이라는 시호를 받았다.[8]

안원왕의 첫 번째 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안원왕 즉위 3년째인 533년에 두 번째 왕후가 낳은 장남 평성군(후일 양원왕)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안원왕 재위 마지막 해에 두 번째 왕후와 세 번째 왕후 사이에 각자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귀족들은 두 파로 갈라져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왕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이후 수년간 왕권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고구려 자체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3. 1. 《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는 《백제본기》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545년 12월 안원왕이 병들자, 안원왕의 후비인 중부인(中夫人)과 소부인(小夫人)이 각자 자신들이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중부인의 아버지인 추군(麤群)과 소부인의 아버지인 세군(細群)이 싸움을 벌이다가 추군이 승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8]

기사 마지막 줄의 '狛鵠香岡上王薨也.(박국의 향강상왕이 죽었다)'라는 부분의 해석에 따라 안원왕의 호칭이 달라진다.

  • "狛鵠'''/'''香岡上王'''/'''薨也(코마국의'''/'''향강상왕이'''/'''죽었다)"
    고대 일본어에서 鵠과 國의 발음이 '코쿠(こく)'로 동일하며 '나라(國)'라는 동일한 의미로 쓰여져, 박국(狛鵠)은 고구려를 뜻하는 박국(狛國)과 같은 의미가 되므로 '박국(狛鵠, 고구려)의 향강상(香岡上)왕이 죽었다'라고 해석된다. 이 경우 '향강상(香岡上)'이 호칭이 된다. 가마쿠라 시대에 간행된 《일본서기》의 주석서인 《석일본기(釈日本紀)》 비훈(秘訓)과 1669년 간행된 《일본서기》는 '향강상왕'이라 칭한다.
  • "狛'''/'''鵠香岡上王'''/'''薨也(코마의'''/'''곡향강상왕이'''/'''죽었다)"
    '박(狛)=코마(こま)'로 발음되며 고(구)려(高麗=코마(こま))와 발음이 같다. 이 경우 '코마(狛=高麗)의 곡향강상(鵠香岡上)왕이 죽었다'라고 해석되며 '곡향강상(鵠香岡上)'이 호칭이 된다.[8]


일본서기》는 안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한 양원왕이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이며 즉위 당시 8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533년(안원왕 3년) 정월 양원왕을 태자로 책봉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모순된다. 한국 사학계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제1사료로 인식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 또한 중요시하며 교차 검증하고 있다.[9] 《일본서기》의 기록을 토대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안원왕 말년의 내분과 정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10]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문자명왕
어머니미상
배우자소생
정부인없음
중부인평성군
소부인불명의 아들


5. 기타

국보 제119호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에 새겨진 '연가 7년(延嘉七年) 기미년'을 539년으로 비정하고 '연가(延嘉)'를 안원왕의 연호로 추정하기도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안원왕 https://terms.naver.[...] 2019-05-31
[2] 서적 일본서기
[3] 서적 일본서기
[4] 서적 일본서기
[5] 웹사이트 척의 길이 https://labongbong.t[...]
[6] 서적 삼국사기
[7] 서적 동국통감
[8] 논문 일본서기소재(日本書紀所載) 고구려관계기사고(高句麗關係記事考)
[9] 논문 안원왕·양원왕대 정치변동과 고구려 불교계 동향
[10] 논문 6·7세기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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