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로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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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너 로렌츠는 1891년 독일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사업가로 활동했다. 1929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친위대에 들어가 프로이센 주 의회 의원, 독일 제국 의회 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독일 민족 대책 본부(VOMI)를 이끌며 해외 독일인 정책을 추진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회에 배속되어 점령지에서 독일계 주민의 이주와 재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종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고, 1955년 석방되어 1974년 사망했다. 로렌츠는 인종주의 정책에 가담하고 전쟁 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베르너 로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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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891년 포메라니아 주 슈톨프 인근의 그륀호프에서 삼림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렌츠는 사관학교에 다녔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는 기병과 비행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전후에는 1919년 6월까지 국경 수비대와 농부로 일했다. 이후 단치히에서 토지와 산업재산권을 획득하였다.

1929년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했고, 1931년 친위대(SS)에 들어갔다. 1933년 프로이센 자유주 의회 의원이 되었고, 독일 제국 의회 의원을 겸했다. 같은 해 함부르크 주 의회에서 일했으며, 1933년 11월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SS 북부 상급국경수비단(SS-Oberabschnitts Nord독일어) 지휘관을 맡았다. 1937년 1월부터 독일 민족 대책 본부(VOMI)를 이끌었다.

1939년 10월,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회에 배속되었고, 1941년 6월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친위대 본부를 갖게 되었다. 부총통 루돌프 헤스를 대신해 외교 교섭 전권위원이 되었으며, 1943년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로렌츠는 VOMI의 리더로서 독일계 외국인과 독일 내 외국인 재정착을 책임졌고, 폴란드, 슬로베니아 등 외국 아이들의 독일화도 담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로렌츠는 잉글랜드에 억류되었고, 1948년 3월 10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SS 인종 및 정착국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0년형에 처해졌다. 1951년에 15년형으로 감형되었으며, 1955년 조기 석방되었다. 1974년 함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2.1. 초기 생애

1891년, 포메라니아 슈톨프 인근의 그륀호프(현재 폴란드령 포스토미노(pl))에서 삼림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렌츠는 사관학교에 다녔으며, 제1차 세계 대전기병 및 공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1912년 10월 야전 포병 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 1913년 기병 연대로 전속되었고, 1914년 소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다양한 부대의 참모 장교를 맡았다. 1917년 중위로 승진함과 동시에 항공대(de)로 이적하여 파일럿으로 참전했다.

전후 1919년 6월까지 국경 수비대와 농부로 일했다. 이후 단치히에서 토지와 산업재산권을 획득, 부유한 자산가이자 미식가로 알려졌다. 그곳에서 샤를로테 벤츠키(Charlotte Ventski)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그의 딸 로즈마리는 악셀 슈프링어의 부인이 되었다.

2.2. 나치당과 친위대 경력

로렌츠는 1929년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했고, 1931년 친위대(SS)에 들어갔다. 1931년 11월부터 1934년 2월까지 단치히에 본부를 둔 제7 친위대 지구의 초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3년 프로이센 자유주 의회 의원이 되었고, 독일 제국 의회 의원도 겸했다. 같은 해 함부르크 주 의회에서 일했으며, 1933년 11월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SS 북부 상급국경수비단(SS-Oberabschnitts Nord독일어) 지휘관을 맡았다. 1936년 11월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1937년 1월부터 독일 민족 대책 본부를 이끌었다.

1939년 10월,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회에 배속되었고, 1941년 6월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친위대 본부를 갖게 되었다. 부총통 루돌프 헤스를 대신해 외교 교섭 전권위원이 되었으며, 1943년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로렌츠는 VOMI의 리더로서 독일계 외국인과 독일 내 외국인 재정착을 책임졌고, 폴란드, 슬로베니아 등 외국 아이들의 독일화도 담당했다.

2.3. 독일 민족 대책 본부(VOMI)와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 본부(RKFDV)

1937년 1월, 로렌츠는 나치당 산하 기관인 독일 민족 대책 본부(VOMI)를 이끌게 되었다. VOMI는 초기에는 나치 독일의 전쟁 전 국경 너머에 거주하는 독일계 민족(Volksdeutsche)의 복지를 책임졌다. VOMI는 오토 폰 쿠르젤(:de:Otto von Kursell)이 지휘하던 "뷰로 쿠르젤(Büro Kursell)"을 이어받은 조직으로, 부총통 루돌프 헤스에 의해 창설되어 국외 거주 독일인에 관한 정책을 조정하는 기관이었다. 헤스가 하인리히 힘러에게 이 조직을 사실상 넘겨주면서 로렌츠가 장관으로 취임하게 되었고, 이윽고 "뷰로 쿠르젤"에서 VOMI로 개명되었다.

로렌츠의 지휘 아래, VOMI는 해외 독일인 협회(VDA)나 동방 독일 연맹(BDO) 등 경쟁 조직을 차례로 산하에 두어 국외 독일 민족에 대한 정책의 주도권을 쥐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한때 로렌츠가 해외 독일인 문제 담당 대신으로 입각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외상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에 의해 저지되었다. 전쟁 전 VOMI는 여러 외국에 제5열을 만드는 데에도 진력했으며, 오스트리아 병합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주데텐 병합 당시에도 콘라트 헨라인을 지원하는 데 활약했다.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VOMI는 점령지의 독일계 민족 재정착뿐만 아니라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과 같은 외국인 어린이의 "독일화"도 담당했다.

폴란드인들이 [[폴크스도이체]]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1939년에 집과 땅에서 쫓겨나는 모습
폴란드인들이 [[폴크스도이체]]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1939년에 집과 땅에서 쫓겨나는 모습


폴란드 침공 이후 1939년 9월 말, 아돌프 히틀러는 소비에트 연방이나 발트 3국과 협정을 맺고 이들 국가에 사는 독일계 주민을 독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히틀러는 이를 힘러를 건너뛰고 로렌츠에게 직접 맡기려고 했지만, 이에 경계한 힘러가 히틀러에게 "중요한 문제는 한 명의 대장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친위대 전체가 힘써야 한다"고 직소하여 자신을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RKFDV)"으로 임명하게 했다. 이로 인해 힘러는 "제국에 영구 귀속에 적합한 국외 거주 독일인 또는 독일계 주민의 조국 복귀, 제국 및 독일 민족 공동체에 위협을 가하는 이민족의 악영향 제거, 인구 이동에 의한 신 독일 식민지 형성" 등의 전권을 위임받게 되었다.

1941년 6월, VOMI는 친위대(SS) 하인리히 힘러가 운영하는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 본부(RKFDV)에 흡수되었다. SS가 통제하는 조직인 RKFDV는 누가 독일인인지, 민족 독일인이 어디에 살 수 있는지, 그리고 독일 정착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어떤 인구를 인종 청소해야 하는지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로렌츠는 이러한 인종 청소 지역에서 폴크스도이체 정착지를 계속 담당했다.

VOMI는 울리히 그라이펠트 아래 새롭게 창설된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 본부(RKFDV)와 함께 "라이히로 귀향하라(de)"를 슬로건으로 국외에서 사는 독일 민족의 귀국을 촉구했다. 또한 RKFDV의 임무인 독일 민족의 식민 및 재정착에 대해서도 기술적인 면과 조직적인 면에서 지원했다. 소련과 발트 3국에서 상당수의 독일계 주민을 확보했다. 또한 VOMI의 보호 아래 놓인 폴란드인 등을 독일화했으며, 독일화된 외국인들은 무장 친위대 입대를 강요받았다.

로렌츠는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 본부의 재정착 국장으로도 취임했다. 또한 친위대 본부의 국제 관계 부장도 역임했다.

2.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로렌츠는 잉글랜드에 억류되었고, 1948년 3월 10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SS 인종 및 정착국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0년형에 처해졌다. 1951년에 15년형으로 감형되었으며, 1955년 조기 석방되었다. 1974년 함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3. 비판 및 논란

베르너 로렌츠는 나치 독일 시절 인종주의 정책에 깊이 관여했으며,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로렌츠는 점령된 동유럽 지역에서 폴크스도이체 관련 업무를 총괄하며 몰수된 토지와 재산을 할당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VOMI은 원주민들을 집과 땅에서 쫓아낸 후, 민족 독일인 정착민들에게 경작할 토지를 제공했다.

1941년, VOMI은 SS 하인리히 히믈러가 운영하는 독일 민족 통합을 위한 국가 판무관(RKFDV) 사무실에 흡수되었다. RKFDV는 누가 독일인인지, 어디에 살 수 있는지, 그리고 독일 정착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어떤 인구를 인종 청소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히믈러는 아인자츠그루펜과 다른 SS 경찰 부대가 유대인, 슬라브인, 로마인들을 살해하도록 승인했고, 로렌츠는 이러한 인종 청소 지역에서 폴크스도이체 정착지를 담당했다. 또한 라인하르트 작전 동안 살해된 유대인으로부터 압수된 재산을 처리하는 VOMI 관계자도 책임졌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로렌츠는 체포되어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루샤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형량이 감형되어 1954년에 석방되었다.

3.1. 인종주의 정책 가담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로렌츠는 몰수된 토지와 재산을 할당하고, 점령된 동유럽 지역의 모든 폴크스도이체의 업무를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나치당의 사무실이었던 VOMI은 원주민들이 집과 땅에서 쫓겨나면 해당 지역을 장악했다. 그런 다음 민족 독일인 정착민들에게 VOMI 관계자들의 지시 하에 경작할 토지를 제공했다. 그의 국제 업무와 관련하여 로렌츠는 아돌프 히틀러의 부관인 루돌프 헤스의 외교 담당 전권 대사였다.

폴란드인들이 [[폴크스도이체]]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1939년에 집과 땅에서 쫓겨나는 모습
폴란드인들이 [[폴크스도이체]]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1939년에 집과 땅에서 쫓겨나는 모습


1941년 6월 VOMI은 SS하인리히 히믈러가 운영하는 독일 민족 통합을 위한 국가 판무관(RKFDV) 사무실에 흡수되었다. SS가 통제하는 조직인 RKFDV는 누가 독일인인지, 민족 독일인이 어디에 살 수 있는지, 그리고 독일 정착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어떤 인구를 인종 청소해야 하는지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으로" 작전 동안 동유럽에서 온 RKFDV 책임자로서 히믈러는 아인자츠그루펜(SS 사살 부대)와 다른 SS 경찰 부대가 유대인, 슬라브인 및 로마인들을 체포하여 살해하도록 승인했다. 로렌츠는 이러한 인종 청소 지역에서 폴크스도이체 정착지를 계속 담당했다. 그는 또한 1942-1943년 동안 총독부의 라인하르트 작전 동안 살해된 유대인으로부터 압수된 개인 재산을 처리한 VOMI 관계자도 책임졌다.

1942년 가을 보스니아에서 체트니크 장교와 함께 있는 로렌츠
1942년 가을 보스니아에서 체트니크 장교와 함께 있는 로렌츠


1942년 말 로렌츠는 보스니아에서 VOMI의 민족 독일인 대피를 감독하던 중 차량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3.2. 전쟁 범죄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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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로렌츠는 몰수된 토지와 재산을 할당하고, 점령된 동유럽 지역의 모든 폴크스도이체의 업무를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나치당의 사무실이었던 VOMI은 원주민들이 집과 땅에서 쫓겨나면 해당 지역을 장악했다. 그런 다음 민족 독일인 정착민들에게 VOMI 관계자들의 지시 하에 경작할 토지를 제공했다.

1941년 6월 VOMI은 SS하인리히 히믈러가 운영하는 독일 민족 통합을 위한 국가 판무관 (RKFDV) 사무실에 흡수되었다. SS가 통제하는 조직인 RKFDV는 누가 독일인인지, 민족 독일인이 어디에 살 수 있는지, 그리고 독일 정착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어떤 인구를 인종 청소해야 하는지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으로" 작전 동안 동유럽에서 온 RKFDV 책임자로서 히믈러는 아인자츠그루펜 (SS 사살 부대)와 다른 SS 경찰 부대가 유대인, 슬라브인 및 로마인들을 체포하여 살해하도록 승인했다. 로렌츠는 이러한 인종 청소 지역에서 폴크스도이체 정착지를 계속 담당했다. 그는 또한 1942-1943년 동안 총독부의 라인하르트 작전 동안 살해된 유대인으로부터 압수된 개인 재산을 처리한 VOMI 관계자도 책임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로렌츠는 체포되어 영국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48년 3월 10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루샤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형량이 감형되어 1954년에 석방되었다.

4.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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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진급일
SS-슈투름반퓌러1931년 3월 31일
SS-슈탄다르텐퓌러1931년 7월 7일
SS-오버퓌러1931년 11월 9일
SS-브리게데퓌러1933년 7월 1일
SS-그루펜퓌러1933년 11월 1일
SS-오버그루펜퓌러1936년 11월 9일
SS-오버그루펜퓌러 및 경찰 대장1942년 8월 15일
SS-오버그루펜퓌러 및 무장 친위대 대장1944년 11월 9일

5.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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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훈 내역
1급 철십자 훈장 (1914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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