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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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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은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공립학교의 인종 차별을 위헌으로 판결하여 '분리하되 평등' 원칙을 폐지했다. 1951년 캔자스주 토피카에서 흑인 소녀 린다 브라운이 백인 학교 입학을 거부당한 사건을 계기로, NAACP의 지원을 받아 소송이 제기되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포함해 여러 유사 사건을 병합 심리했으며, 흑인 아동의 분리가 수정 헌법 제14조를 위반한다고 만장일치로 판결했다. 이 판결은 미국의 인종 차별 철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학교 통합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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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사건 개요
사건명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원고올리버 브라운 외
피고토피카 교육위원회 외
소송 제기 법원캔자스주 연방 지방법원
상고 법원미국 연방 대법원
재판일1954년 5월 17일
소송 진행
최초 변론일1952년 12월 9일
재심 변론일1953년 12월 8일
판결원고 승소
판결 정보
미국 판례집347 U.S. 483
약칭 판례집74 S. Ct. 686; 98 L. Ed. 873; 1954 U.S. LEXIS 2094; 53 Ohio Op. 326; 38 A.L.R.2d 1180
판결 내용
판결 요지공립학교에서 학생들을 분리하는 것은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14조의 평등 보호 조항을 위반하는 것이다.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캔자스 지방법원의 판결을 파기하다.
다수 의견아얼 워런
다수 의견 합류만장일치
적용 법률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14조
선례 변경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 (일부)

관련 정보
이전 판결피고 승소, 98 F. Supp. 797 (캔자스주 연방 지방법원 1951); 관할권 가능성 고지, 344 U.S. 1 (1952).
이후 판결구제 판결, 349 U.S. 294 (브라운 2); 파기환송 후, 139 F. Supp. 468 (D. Kan. 1955); 개입 신청 승인, 84 F.R.D. 383 (D. Kan. 1979); 피고 승소, 671 F. Supp. 1290 (D. Kan. 1987); 파기, 892 F.2d 851 (제10 연방 순회 항소법원 1989); 파기, 503 U.S. 978 (1992) (브라운 3); 판결 복원, 978 F.2d 585 (10th Cir. 1992); 피고 승소, 56 F. Supp. 2d 1212 (D. Kan. 1999)

2. 발생 계기

1951년 캔자스주 토피카에 살던 여덟 살 흑인 소녀 린다 브라운은 집에서 가까운 섬너 초등학교 대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약 1.61km 떨어진 흑인 학교인 몬로 초등학교까지 매일 걸어 다녀야 했다. 린다의 아버지 올리버 L. 브라운은 딸을 섬너 초등학교로 전학시키려 했으나 학교 측이 이를 거절하자, 토피카 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105] 이 소송은 전미 유색 인종 지위 향상 협회(NAACP)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다.

브라운 판결 이전 미국 내 교육 분리. 인종 차별은 미국 남부(빨간색)의 모든 주에서 요구되었다. 토피카가 위치한 캔자스는 학군이 분리를 시행할 수 있도록 지역 선택 사항을 허용했다(파란색).


이 사건 이전 약 60년간 미국 사회는 인종 분리 정책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1896년 미국 연방 대법원의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 판결은 인종별 시설이 분리되더라도 서로 동등하다면 미국 수정 헌법 제14조의 평등 보호 조항("어떤 주도 ... 어떤 사람에게도 법의 평등한 보호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분리하되 평등' 원칙을 확립했다.[4] 이 원칙은 1868년 평등 보호 조항이 발효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인종 차별이 지속되는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

교육에서의 인종 분리는 주마다 상황이 달랐는데, 17개 주에서는 분리를 법으로 강제했고 16개 주에서는 금지했다. ''브라운'' 소송의 원고들은 인종 분리 제도가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별도의 동등한 대우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흑인에게 열등한 시설, 서비스, 대우를 강요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부터 하워드 대학교 학자들과 NAACP 활동가들은 공교육에서의 인종 분리를 철폐하기 위한 법적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대학원 교육부터 공략하여 성과를 거두었는데,[5] ''스웨트 대 페인터''(1950)와 ''맥로린 대 오클라호마 주립 섭정 위원회''(1950) 판결이 대표적이다. 이 판결들은 특정 환경에서 인종 분리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는 점을 시사하며 ''브라운'' 판결의 길을 열었다.[6]

''브라운'' 사건에는 국제적인 학술 논의도 영향을 미쳤다. 유네스코가 1950년에 발표한 ''인종 문제'' 성명은 과학적 인종주의에 기반한 인종차별 정당화 시도를 비판하고 인종차별을 도덕적으로 규탄했으며,[7] 스웨덴 사회학자 군나르 미르달의 저서 ''미국의 딜레마: 흑인 문제와 현대 민주주의''(1944) 역시 대법원에서 인용되었다.[8]

당시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 정부 관리들은 인종 차별 문제가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이미지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윌리엄 O. 더글러스 대법관은 1950년 인도 방문 당시 "미국은 왜 흑인 린치를 용인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미국의 인종 문제가 외교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절감했다고 술회했다.[9]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명한 얼 워렌 대법원장 역시 1954년 미국 변호사 협회 연설에서 미국의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군사력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인종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10]

소송의 원고들은 NAACP 토피카 지부의 주도로 모집되었다. 지명 원고인 올리버 L. 브라운은 애치슨, 토피카 & 산타페 철도 공장의 용접공이자 지역 교회 목사 조수였다. 그의 딸 린다 브라운은 집에서 7블록 거리에 있는 백인 학교인 서머 초등학교 대신, 스쿨버스 정류장까지 6블록을 걸어간 뒤 버스를 타고 약 1.61km 떨어진 흑인 학교 몬로 초등학교에 다녀야 했다. NAACP의 지침에 따라 1951년 가을, 브라운을 포함한 흑인 학부모들은 자녀를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백인 학교에 등록시키려 했으나 모두 거부당하고 기존의 분리된 학교로 배정받았다.

3. 재판 과정

이 소송은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갔으며, 대법원은 캔자스주의 브라운 사건을 포함하여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버지니아주, 델라웨어주에서 제기된 유사한 인종 분리 교육 관련 소송들을 병합하여 심리했다.[106] 이 사건들은 모두 공립학교에서의 흑백 분리 교육이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 보호 조항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1954년 5월 17일, 얼 워런 대법원장이 이끄는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분리 교육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105] 워런 대법원장은 판결문에서 "공교육에서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는 원칙은 더 이상 존재할 여지가 없다"며, "분리 교육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명시했다. 이는 시설의 평등 여부와 관계없이 인종에 따른 분리 자체가 차별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 판결은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의 '분리하되 평등' 원칙을 공식적으로 폐기했으며, 미국 민권 운동에 중요한 법적 근거를 제공하며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105]

3. 1. 지방 법원

1951년, 올리버 브라운을 포함한 13명의 토피카 학부모들은 20명의 자녀를 대표하여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미국 캔자스 지방 법원에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11] 이들은 인종을 이유로 자녀들이 백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거부당하자, 전미 유색 인종 발전 협회(NAACP)의 도움을 받아 학군의 인종 분리 정책 철회를 요구했다. 당시 토피카 교육위원회는 1879년 캔자스주 법에 따라 분리된 초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법은 인구가 15,000명이 넘는 지역에서 흑인과 백인 학생을 위한 별도의 학교 시설 유지를 허용했지만, 의무화하지는 않았다.

지방 법원은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 판례를 인용하며 교육위원회의 손을 들어주었다.[18]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미국 연방 대법원은 시설이 동등하다면 인종 분리 자체는 합헌이라는 '분리하되 평등' 원칙을 확립한 바 있다. 3명의 판사로 구성된 지방 법원(판사 월터 헉스먼 주도)은 판결문에서 9가지 "사실 인정"을 포함했는데, 특히 8번째 사실 인정에서 공립 교육에서의 분리가 흑인 어린이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19][20]

그러나 법원은 토피카의 흑인 학교와 백인 학교가 건물, 교통, 교육 과정, 교사의 교육 자격 등 외형적인 조건에서 실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이유로 원고들의 요구(구제)를 거부했다.[19][20] 비록 원고 패소 판결이었지만, 법원이 인종 분리의 부정적 영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이 사실 인정은 이후 미국 연방 대법원 판결에서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21]

3. 2. 연방 대법원

이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소송은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연방 대법원은 캔자스 주의 브라운 사건 외에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브리그스 대 엘리엇' 사건, 버지니아주의 '데이비스 대 프린스에드워드 카운티 교육위원회' 사건, 델라웨어주의 '게브하트 대 벨턴' 사건, 그리고 워싱턴 D.C.의 '볼링 대 샤프' 사건까지 총 다섯 건의 유사 사건을 병합하여 심리하기로 결정했다.[106] 이 사건들은 모두 전미 유색 인종 발전 협회(NAACP)의 후원을 받았으며, 흑인 학생들이 초중등 공립학교에서의 인종 분리 교육 정책에 대해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 보호 조항 위반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버지니아의 데이비스 사건은 16세 학생 바바라 로즈 존스가 주도한 등교 거부 시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22] 델라웨어의 게브하트 사건은 하급심에서 이미 분리 교육이 위법이라는 판결을 받은 유일한 사건이었다. 반면 캔자스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 달리 분리된 학교 시설이나 교육 과정 자체의 불평등을 직접적으로 다투지는 않았으며, 지방 법원도 시설 면에서는 실질적인 평등을 인정한 바 있다.[23]

NAACP는 서굿 마셜 변호사를 중심으로 변호인단을 꾸렸고, 전미 자동차 노동조합은 NAACP의 대법원 소송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7.5만달러를 기부했다.[24] 마셜은 대법원에서 원고 측을 변호했으며, 캔자스 주 정부는 폴 윌슨 법무 차관보가 변호했다. 1952년 12월, 트루먼 행정부의 법무부는 이 사건에 법정 조언자(amicus curiae)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 의견서는 이례적으로 학교 분리 문제가 냉전 시대 미국의 외교 정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강조했다. 의견서는 "미국 내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의 존재는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인종 차별이 공산주의 선전에 이용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25] 딘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 역시 "미국은 이 나라의 다양한 차별적 관행 때문에 외신, 외국 라디오 및 유엔과 같은 국제 기구에서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26] 이러한 외교 정책적 고려 사항이 판결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평가된다.[26]

1954년 5월 17일 공립학교의 인종 차별이 위헌이라고 만장일치로 판결한 미국 대법원 재판관들


대법원은 1953년 봄에 사건을 처음 심리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같은 해 가을에 재심리를 요청했다. 재심리에서는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 보호 조항이 인종에 따른 공립학교 분리를 금지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27] 펠릭스 프랑크푸르터 대법관은 만장일치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재심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법관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나뉘었다. 윌리엄 O. 더글러스, 휴고 블랙, 해롤드 히츠 버튼, 셔먼 민턴 대법관은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 판결을 뒤집을 의향이 있었으나,[28] 프레드 M. 빈슨 대법원장과 스탠리 F. 리드, 톰 C. 클라크 대법관 등은 주의 권리나 기존 판례 유지 등을 이유로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28]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와 로버트 H. 잭슨 대법관은 분리 자체에는 반대했지만, 사법적 적극주의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28]

상황은 1953년 9월 빈슨 대법원장이 사망하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얼 워런을 새로운 대법원장으로 임명하면서 변화했다.[28] 워런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멕시코계 미국인 학생들의 통합 교육을 지지한 경험이 있었다.[29]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워런에게 남부 백인들의 입장을 고려해달라는 취지의 발언("이들 [남부 백인]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그들의 예쁜 어린 소녀들이 키가 크고 덩치 큰 흑인들과 함께 학교에 앉을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을 하기도 했으나,[30] 워런은 만장일치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대법관 회의에서 인종 분리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는 흑인에 대한 편견뿐이며, 법원의 정당성을 위해 '플레시'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워런은 끈질긴 노력 끝에 모든 대법관의 동의를 얻어 만장일치 의견을 완성했다.[34] 리드 대법관은 마지막까지 반대 입장이었으나 결국 동참했으며, 의견을 낭독하는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35]

얼 워런(Earl Warren) 대법원장이 브라운 판결의 만장일치 의견을 작성했다.


1954년 5월 17일, 대법원은 얼 워런 대법원장이 작성한 만장일치(9:0) 판결을 통해 브라운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판결은 단일 의견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든 대법관이 동의했다.

법원의 의견은 1868년에 채택된 수정헌법 제14조가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를 폐지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여부를 논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법원은 역사적 자료에 대한 당사자 변호사들의 두 번째 구두 변론을 청취한 후에도 이 문제에 대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심리는 1868년 수정헌법 제14조 채택과 관련된 상황에 주로 할애되었다. 여기에는 의회에서의 수정헌법 심의, 주에서의 비준, 당시의 인종 분리 관행, 그리고 수정헌법 지지자와 반대자들의 견해가 망라되었다. 이 논의와 자체 조사 결과, 이러한 자료들이 어느 정도 빛을 비추긴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껏해야, 그들은 결정적이지 않다." ('브라운', 347 U.S. at 489.[36])

법원은 이 문제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주요 사회적, 정부적 변화로 인해 복잡해졌다고 말했다. 법원은 1860년대 후반 미국 남부에서는 공립학교가 흔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학비를 낼 수 있는 남부 백인 아이들은 대개 사립학교에 다녔고, 남부 흑인 아이들의 교육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부 남부 주에서는 흑인들의 교육이 법으로 금지될 정도였다.[37] 법원은 1954년의 상황과 이를 대조했다. "오늘날, 교육은 아마도 지방 및 주 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일 것이다."[38] 법원은 판결을 내리는 과정에서 "전국에 걸쳐 공립 교육을 완전히 발전시키고, 현재 미국 생활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39]

인종 분리 시대에는 "분리하되 평등" 원칙에 따라 흑인 학교가 백인 학교보다 자원이 부족하고 시설이 열악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브라운'' 법원은 이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이 사건과 관련된 일부 학군이 백인 학교의 질에 맞춰 흑인 학교를 "평등화"하기 위해 개선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는 법원이 모든 백인 학교와 흑인 학교 간의 "측정 가능한 불평등"에서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 보호 조항 위반을 발견하는 것을 막았고, 법원은 인종 분리 자체의 영향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법원은 "분리하되 평등" 원칙이 공립 교육에 적용될 때 헌법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질문을 중심으로 사건을 구성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도달한다. 인종만을 기준으로 공립학교에서 아이들을 분리하는 것이, 비록 물리적 시설과 다른 "유형적" 요소가 동일할지라도, 소수 집단의 아이들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를 박탈하는가?" ('브라운', 397 U.S. at 493.[40])

이에 대한 답변으로 법원은 그렇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주가 강제하는 인종 분리는, 설령 시설 등이 평등하더라도, 분리된 아이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판결했다.

"[흑인 아이들]을 비슷한 나이와 자격을 가진 다른 아이들과 분리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역 사회에서의 그들의 지위에 대한 열등감을 유발한다." ('브라운', 347 U.S. at 494.[41])

법원은 이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종 분리된 흑인 아이들이 열등감을 느끼고 학습에 방해를 받는다는 결론을 내린 여러 심리학 연구를 각주(판결문의 본문이 아닌)에서 인용했다. 이러한 연구에는 케네스 클라크와 매미 클라크 부부의 연구가 포함되었는데, 1940년대의 실험에서 분리된 환경의 흑인 미국 아이들이 흑인 인형보다 백인 인형을 선호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법원은 비교적 짧은 판결의 결론에서 인종 분리된 공립 교육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평등 보호 조항을 위반하며, 따라서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우리는 공립 교육 분야에서 "분리하되 평등" 교리는 설 자리가 없다고 결론짓는다. 분리된 교육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따라서, 우리는 원고와 마찬가지로 소송이 제기된 다른 유사한 사람들은, 불만을 제기한 인종 분리로 인해 수정헌법 제14조가 보장하는 법의 평등 보호를 박탈당했다고 판결한다." ('브라운', 397 U.S. at 495.[41])

법원은 각 관할 구역의 학교 통합을 시행하라는 명령으로 마감하지 않았다. 대신, 당사자들이 다음 회기에 적절한 구제책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 위해 법원에 다시 출두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이 아래에 설명된 ''브라운 2''(Brown II)로 알려진 사건이 되었다. 이 판결은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확립된 '분리하되 평등' 원칙을 공교육 영역에서 공식적으로 폐기한 역사적인 결정이었다.[105] 브라운 판결은 그 자체로 미국의 모든 공립학교나 다른 공공 시설에서의 차별을 즉시 철폐하지는 못했지만(이는 1964년 시민권법 통과 이후 본격화됨), 미국 민권 운동에 강력한 법적 근거를 제공하며 운동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사회과학적 법학 방법론



1954년의 브라운 사건은 사회과학적인 증거를 활용하여 헌법 판단을 내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는 1907년의 뮬러 대 오레곤 사건 이후 사회과학적 접근이 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판결로 평가받는다. 브라운 사건은 100여 년간 지속된 미국의 인종차별 정책인 분리하되 평등 원칙을 폐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서 청구인 측 변호를 맡았던 더굿 마샬 변호사(훗날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 대법관)는 승소를 위해 광범위한 사회과학 연구 결과를 법원에 제출했다. 그는 수백 명의 사회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등 다양한 사회과학적 연구를 통해, 인종 분리 교육이 흑인 아동에게 미치는 심리적 악영향과 같은 기존의 소수 의견이 실제로는 사회과학계의 상식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주장했다.

얼 워런 당시 연방 대법원장은 이러한 사회과학적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판결문의 유명한 "제11번 각주"(footnote 11)에서 이를 직접 인용하며 마샬 변호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는 사회과학적 방법론, 즉 "사회과학자처럼 생각하는 방식"이 실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례이다. 워런 대법원장의 이러한 판단은 100여 년간 지속된 흑인 인종차별 정책을 폐기하는 역사적인 결정으로 이어졌으며, 이 사건은 남북전쟁 이후 '제2의 흑인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107]

브라운 사건은 오랫동안 차별받아 온 소수자들이 사회과학적 연구와 같은 학문적 근거를 통해 사법부를 설득하고, 억울한 차별을 해소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최대권 교수는 브라운 사건을 예로 들며 한국 법학이 외국의 이론을 단순히 수입하는 것에서 벗어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법사회학, 법철학, 법사학과 같은 기초 법학 연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브라운 사건이 법사회학적 접근이 어떻게 현실의 법 문제를 해결하고 독자적인 법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108]

5. 판결의 영향 및 여파

얼 워런 대법원장이 주도한 이 역사적인 결정 이후, 연방 대법원은 남부 주들에게 빠른 시일 내에 인종 분리 교육을 통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남부 백인 사회의 저항은 거셌으며, 약 3,000개의 남부 백인 학교 중 단 600여 개만이 통합 명령을 따랐다. 브라운 판결 자체는 공교육 분야에 한정되었기에, 다른 공공시설이나 장소에서의 인종 분리까지 즉시 폐지하지는 못했지만,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 철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판결 이후 델라웨어,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다른 주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이어졌다.[105]

이 판결은 60년간 미국 사회를 지배했던 인종 분리 정책, 특히 "분리하되 평등" 원칙을 내세운 플레시 대 퍼거슨(1896) 판결을 뒤집은 것이었다. 플레시 판결은 분리된 시설이 동등하기만 하다면 수정 헌법 제14조의 평등 보호 조항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았으나[4], 브라운 판결의 원고 측은 분리 자체가 흑인에게 열등한 시설과 대우를 강요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유네스코의 1950년 성명 ''인종 문제''[7]나 군나르 미르달의 저서 ''미국의 딜레마: 흑인 문제와 현대 민주주의''(1944)[8] 등 인종 차별을 비판하는 국제적인 학계의 흐름에도 영향을 받았다.

1954년 5월 17일, 대법원은 만장일치(9:0)로 브라운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얼 워런 대법원장이 작성한 판결문은 인종에 기반한 공립학교 분리가, 설령 물리적 시설이 동등하더라도, 흑인 아동에게 심리적 피해와 열등감을 유발하여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판단했다.[41] 이는 케네스 클라크와 매미 클라크 부부의 인형 실험 등 사회 과학 연구 결과를 근거로 삼았다. 법원은 "공립 교육 분야에서 '분리하되 평등' 원칙은 설 자리가 없다"고 명시하며, 분리된 교육 시설 자체가 위헌임을 선언했다.[41]

판결에 대한 미국 사회의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많은 이들이 판결을 환영했지만, 특히 남부의 백인 사회는 이를 강하게 비난하며 "재앙의 날—검은 월요일—진주만 공습과 같은 날"로 여기기도 했다.[42] 이러한 완강한 반대로 인해 학교 통합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정치 역사가 로버트 G. 매클로스키는 "남부 심장부는 사법 명령을 따르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차별 철폐 결정이 통합 제안에 대한 저항을 굳건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조직적인 반발이 있었고, 남부 출신 의원들은 서던 매니페스토에 서명하며 판결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흑인 교사, 교장 등이 일자리를 잃었다.[44]

매카시즘의 여파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기 어려웠던 데이비드 I. 아킨은 이 판결에 영감을 받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노래 가사를 썼고, 작곡가 얼 로빈슨이 곡을 붙였다.[102] 이렇게 만들어진 「블랙 앤 화이트」는 1956년 피트 시거가 불렀고, 1972년 쓰리 도그 나이트의 커버 버전이 큰 인기를 얻었다.

브라운 판결은 법률상의 차별(de jure segregation)을 종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만[101], 교육 기회 균등을 둘러싼 사실상의 차별(de facto segregation)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았다. 1966년 발표된 콜먼 보고서는 교육 시설, 교직원 자질, 학업 성취도 등에서 인종 간 격차가 여전하며, 이것이 학생의 가정 배경이나 지역 사회 환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103] 이후 연방 정부는 이러한 사실상의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학구 재편, 통합 학구제, 통학 버스 운행(busing)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104]

5. 1. 미국 내 변화

얼 워런 대법원장이 주도한 이 역사적인 결정 이후, 연방 대법원은 빠른 시일 내에 남부 주들에게 불평등한 인종 분리 교육을 통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남부 백인 사회의 저항은 거셌다. 남부의 백인 학교 약 3,000개 중 단 600여 개만이 통합 명령을 따랐으며, 대다수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브라운 판결 자체는 공교육 분야에 한정되었기에, 다른 공공시설이나 장소에서의 인종 분리까지 즉시 폐지하지는 못했지만,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 철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델라웨어,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다른 주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이어졌다.[105]

미국인들 사이에서 브라운 판결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많은 이들이 판결을 환영했지만, 대다수의 남부 백인들은 이를 강하게 비난했다. 일부 남부 백인들은 이 판결이 내려진 날을 "재앙의 날—검은 월요일—진주만 공습과 같은 날"로 여기며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다.[42] 이러한 남부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학교 통합의 진전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졌다. 미국의 정치 역사가 로버트 G. 매클로스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백인 남부의 이 사법적 공세에 대한 반응은 시끄럽고 완강했다. 이전에는 인종 차별 학교 시스템을 유지했던 특정 "국경 주"는 통합을 했고, 다른 주들은 한때 인종적으로 혼합되지 않았던 학교에 소수의 흑인 학생들의 상징적인 입학을 허용했다. 그러나 남부 심장부는 사법 명령을 따르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차별 철폐 결정이 통합 제안에 대한 저항을 굳건하게 만들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부 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통합을 회피하거나 지연시키려 했다.

  • 버지니아: 해리 F. 버드 상원의원은 학교를 통합하는 대신 아예 폐쇄해버리는 대규모 저항 운동을 조직했다.[43] 프린스 에드워드 카운티는 실제로 1959년부터 1964년까지 공립학교 시스템 전체를 폐쇄하고, 백인 학생들에게만 사립학교 학비를 지원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흑인 아동은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가야 했다. 1964년, 연방 대법원은 그리핀 대 프린스 에드워드 카운티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이러한 조치가 수정 헌법 제14조의 평등 보호 조항을 위반한다고 판결했다.[57] 버지니아 주지사 토머스 스탠리는 가랜드 그레이가 이끄는 위원회를 임명하여 통합 문제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게 했으나, 결국 1956년 주 의회는 연방 법원의 명령이 있을 경우 학교를 폐쇄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후임 주지사 J. 린제이 아몬드는 샬러츠빌, 노퍽 등지의 학교를 실제로 폐쇄했으나, 주 대법원과 연방 법원의 위헌 판결 이후 1959년부터 점진적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57]
  • 텍사스: 법무장관 존 벤 셰퍼드는 인종 차별 철폐 시행에 법적 장애물을 만들기 위한 캠페인을 조직했다.[45]
  • 아칸소: 1957년 9월, 오벌 포버스 주지사는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에 입학하려던 9명의 흑인 학생들, 소위 '리틀록 나인'의 등교를 막기 위해 아칸소 주 방위군을 동원했다. 이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주 방위군을 연방 통제 하에 두고 미국 육군 101 공수 사단 병력을 파견하여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를 보장했다. 이 사건은 리틀록 고등학교 사태로 알려져 있다.[46]
  • 플로리다: 1957년, 플로리다 주의회는 판결을 비난하고 무효라고 선언하는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르로이 콜린스 주지사는 판결에 항의하면서도, 법적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이유로 결의안 서명을 거부했다.
  • 미시시피: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판결 이후 9년 동안 학교 통합 소송이 제기되지 못했다.[47] 1963년 메드가 에버스가 미시시피주 잭슨에서 소송을 제기하자, 시민 협의회 회원인 바이런 데 라 벡위스에게 살해당했다.[48] 벡위스는 두 번의 재판에서 배심원 평결 불능으로 풀려났다가, 1994년에야 유죄 판결을 받았다.[49]
  • 앨라배마: 1963년 6월, 조지 월리스 주지사는 "지금 분리, 내일 분리, 영원히 분리"라는 자신의 취임 연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앨라배마 대학교 포스터 강당 문 앞에 직접 서서 두 명의 흑인 학생의 입학을 막으려 했다. 이 사건은 '학교 문 앞에서 버티기'로 알려졌다.[50][51]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개입하여 앨라배마 주 방위군의 헨리 V. 그레이엄 장군이 월리스와 대치하자 결국 물러섰다.
  • 노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교육위원회는 1954년 판결 준수를 선언하며 남부에서 가장 먼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실제 통합은 법적 장애물과 저항에 부딪혀 지연되었다. 1969년 연방 정부는 이 도시가 1964년 민권법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완전한 통합은 1971년에야 시작되었다. 진보적인 도시로 자처했던 그린즈버러가 통합에 가장 늦게까지 저항한 도시 중 하나였다는 점은 아이러니로 지적된다.[53][54]
  • 미주리: 미주리주 모벌리에서는 학교가 통합되었으나, 1955년 이후 기존 흑인 학교의 교사들이 성과 부진을 이유로 재임용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은 해고에 대해 소송(나오미 브룩스 외, 원고, 대 모벌리 시 교육구 외)을 제기했으나 기각되었다.[55][56]


이러한 저항 속에서 많은 흑인 교사, 교장 및 학교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역사가 마이클 펄츠는 "여러 면에서 남부는 학교 통합보다 흑인 교육자를 몰아내는 데 더 빠르고, 더 '신중한 속도'로 움직였다"고 지적했다.[44] 남부 출신 의원들은 브라운 판결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인종 통합을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던 매니페스토에 서명하기도 했다.

인종 차별 법은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원주민 어린이들 역시 백인 학교 입학이 금지되었으며, 같은 부족 내에서도 피부색에 따라 통학 버스 탑승 여부가 갈리는 차별을 겪었다.[52] 부족 지도자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킹 목사의 개입으로 문제가 신속하게 해결되었다.[52]

북부 도시들에서도 사실상의 인종 차별 문제가 존재했다. 주거 분리로 인해 흑인과 백인 사회 간 교육 자원의 격차가 컸다. 예를 들어, 뉴욕 할렘 지역은 제2차 흑인 대이동으로 인구가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이후 새 학교가 거의 지어지지 않았고, 기존 학교는 노후화되고 경험 부족한 교사들로 채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북부 공무원들은 인종 차별을 부인했지만, 메이 맬러리와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모들은 브라운 판결에 힘입어 뉴욕시와 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승리했다. 1959년에는 학교 보이콧과 함께 자유 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시 당국은 이에 대응하여 백인 학교로의 전학을 일부 허용했지만, 이는 또 다른 문제인 백색 도피 현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및 명령


한편, 소송의 발원지인 토피카에서는 비교적 순조롭게 통합이 진행되었다. 토피카 중학교는 1941년부터, 토피카 고등학교는 1871년 설립 때부터 통합되어 있었고, 스포츠팀은 1949년부터 통합되었다.[60] 캔자스 법은 "고등학교 이하" 학교에 대해서만 분리를 허용했었다.[61] 판결 직후 토피카 교육 위원회는 1953년 8월부터 초등학교 통합을 시작했으며, 1956년 1월에는 모든 초등학교 학군이 통합되었다.[62][63][64] 원고 중 한 명인 젤마 헨더슨은 훗날 인터뷰에서 토피카에서는 시위나 소란 없이 통합이 이루어졌다고 회상했다.[65] 토피카 공립학교 행정 건물은 소송을 조직한 전미 유색 인종 지위 향상 협회(NAACP) 지부 회장 매킨리 버넷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66] 사건의 중심지였던 먼로 초등학교는 1992년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었고, 2022년 국립 역사 공원으로 승격되었다.

브라운 판결은 1896년 "분리하되 평등" 원칙을 내세워 인종 차별을 합법화했던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뒤집은 것이었다. 플레시 판결은 당시 유행했던 과학적 인종주의 사상과 일부 관련이 있었지만[67][68], 근본적으로는 당시 백인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적 신념에 기반한 것이었다.[69] 브라운 판결에서 대법원은 분리된 학교가 흑인 아동에게 미치는 심리적 피해에 대한 사회 과학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각주 11), 과학적 인종주의와 학교 분리의 정당성을 명백히 거부했다. 그러나 유전론에 기반한 인종차별적 사고는 브라운 판결 이후에도 반발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으며[69], 인종주의 학술지인 ''맨카인드 쿼털리''는 부분적으로 브라운 판결에 대한 반발로 1960년에 창간되었다.[70][71]

판결 이후의 문화적 영향도 있었다. 매카시즘으로 인해 할리우드에서 일자리를 잃었던 데이비드 I. 아킨은 판결에 감명받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가사를 썼고, 작곡가 얼 로빈슨이 곡을 붙였다.[102] 이 노래 '블랙 앤 화이트'는 1956년 피트 시거가 불렀고, 1972년 쓰리 도그 나이트가 커버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브라운 판결은 법률상의 인종 차별(de jure segregation)을 종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만[101], 현실에서의 차별, 즉 사실상의 차별(de facto segregation)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남았다. 1966년 연방 교육국이 발표한 콜먼 보고서는 공립학교에서 교육 시설, 교직원 자질, 학업 성취도 등에서 인종 간 격차가 여전하며, 이러한 문제가 학생의 가정 배경이나 지역 사회 환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했다.[103] 이후 연방 정부는 이러한 사실상의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백인-흑인 학교 페어링, 학구 재편, 통합 학구제, 자발적 전학 장려, 통학 버스 운행(busing)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104]

5. 2. 국제적 영향

미국과 소련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냉전 시기에, 미국 내 인종 분리와 차별 문제는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미국 연방 대법원 판사들을 포함한 고위 관리들은 이러한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윌리엄 O. 더글러스 대법관은 1950년 인도를 방문했을 때, 그가 받은 첫 번째 질문은 "미국은 왜 흑인 린치를 용인하는가?"였다. 더글러스는 나중에 자신의 여행을 통해 "유색 인종 소수자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인도와의 관계에서 강력한 요인"임을 알게 되었다고 썼다. 이는 당시 국제 사회가 미국의 인종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법원에 지명한 얼 워렌 대법원장은 1954년 미국 변호사 협회 연설에서 더글러스의 우려에 공감하며 "우리 미국 시스템은 다른 모든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국내외에서 재판을 받고 있으며, ... 우리가 권리 장전이 포함된 헌법의 정신을 유지하는 정도가, 결국 우리가 비축하는 수소 폭탄의 수보다 그것을 안전하게 만들고 숭배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데 더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9][10] 이러한 국제적 압력과 내부적 성찰은 브라운 판결과 같은 인종차별 철폐 노력을 촉진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5. 3. 한국에 대한 시사점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은 미국에서 100여 년간 지속된 인종 차별 정책인 분리하되 평등 원칙을 폐기한 역사적인 판결이다. 이 판결은 단순히 공교육에서의 인종 분리를 위헌으로 선언한 것을 넘어, 사회 과학적 연구 결과를 법적 판단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105] 청구인 측 변호사였던 더굿 마샬은 광범위한 사회과학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인종 분리가 흑인 아동에게 미치는 심리적 악영향을 입증했고, 얼 워런 대법원장은 이를 판결문에 인용하며 마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107]

이 사건은 오랜 기간 차별받아 온 소수자들이 학계와의 연대를 통해 최고 법원을 설득하여 차별을 시정할 수 있음을 보여준 구체적인 사례이다. 즉, 사회적 약자가 법적 절차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찾고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한국의 법학자 최대권 교수는 브라운 사건을 한국 법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언급한다. 그는 한국 법학이 외국의 이론을 단순히 수입하는 단계를 넘어, 한국 사회의 현실에 뿌리내린 독자적이고 살아있는 법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법사회학, 법철학, 법사학과 같은 기초 법학 분야의 깊이 있는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브라운 사건은 법사회학적 접근이 어떻게 법 해석과 판결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사회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평가했다.[108] 이는 법이 단순히 추상적인 규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현실을 분석하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함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브라운 판결은 소수자 인권 보호와 차별 철폐를 위한 법적, 사회적 노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세계사적 사례로서,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차별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6. 비판 및 평가

미국인들은 대체로 브라운 판결을 환영했지만, 남부의 백인들 대부분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많은 남부 백인들은 이 판결을 진주만 공습에 비견하며 '검은 월요일'이라 부르기도 했다.[42] 이러한 완강한 저항 때문에 미국 학교의 인종 통합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정치 역사가 로버트 G. 매클로스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백인 남부의 이 사법적 공세에 대한 반응은 시끄럽고 완강했다. 이전에는 인종 차별 학교 시스템을 유지했던 특정 "국경 주"는 통합을 했고, 다른 주들은 한때 인종적으로 혼합되지 않았던 학교에 소수의 흑인 학생들의 상징적인 입학을 허용했다. 그러나 남부 심장부는 사법 명령을 따르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차별 철폐 결정이 통합 제안에 대한 저항을 굳건하게 만들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버지니아에서는 해리 F. 버드 상원의원이 주도하여 학교를 통합하는 대신 아예 폐쇄해버리는 대규모 저항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43]

브라운 판결 이후 수십 년간, 남부에서 백인 주도로 학교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존 흑인 학교에서 근무하던 많은 흑인 교사, 교장 및 교직원들이 해고되거나 일자리를 잃었다. 역사가 마이클 펄츠는 "여러 면에서 남부는 학교 통합보다 흑인 교육자를 몰아내는 데 더 빠르고, 더 '신중한 속도'로 움직였다"고 지적했다.[44]

미국 연방 항소 법원 판사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로버트 A. 카츠만, 데이먼 J. 키스, 소니아 소토마요르미국 수정 헌법 제14조, 서굿 마셜, 그리고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에 관한 2004년 전시회에 참석했다.


훗날 연방 대법원장이 되는 윌리엄 렌퀴스트는 1952년 로버트 H. 잭슨 대법관의 법률 서기 시절, "분리 사건에 대한 임의적 생각"이라는 제목의 메모에서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이 옳았으며 재확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수가 소수에게 헌법적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는 옳지만, 장기적으로는 소수의 헌법적 권리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다수여야 한다"고 덧붙였다.[72][73] 그러나 1971년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는 해당 메모가 잭슨 대법관의 잠정적인 견해를 정리한 것이라고 해명했고,[74] 1986년 대법원장 인준 청문회에서는 "플레시가 옳고 재확인되어야 한다는 단언은 당시 나의 견해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며 자신의 과거 입장과 거리를 두었다.[75] 실제로 렌퀴스트는 대법관 재임 중 ''브라운'' 판결을 뒤집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판례로 자주 인용했다.[76][77]

워런 대법원장의 판결 논리는 동시대 법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레런드 핸드 판사는 대법원이 "세 번째 입법부의 역할을 떠맡았다"고 비판했으며,[78] 허버트 웨클러는 ''브라운'' 판결을 중립적인 법 원칙만으로는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보았다.[79]

''브라운'' 판결의 일부 측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대표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1995년 ''미주리 대 젠킨스'' 사건에서 ''브라운'' 판결이 잘못 해석되었다고 주장했다.

: ''브라운 I''은 "인종적으로 고립된" 학교가 본질적으로 열등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 실제로 ''브라운 I''은 정부가 인종에 근거하여 시민을 차별할 수 없다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진실을 발표하기 위해 심리적 또는 사회 과학적 연구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 분리가 열등감을 야기했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 심리적 부상 또는 이익은 관련이 없다 ... 탈분리가 흑인 교육 성취에 예상된 도약을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흑인 학생이 통합된 환경에 있을 때만큼 자신의 인종 구성원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잘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 그들의 "독특한 역사와 전통" 때문에 흑인 학교는 흑인 공동체의 중심이자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독립적인 흑인 리더십, 성공, 성취의 사례를 제공할 수 있다.[80]

일부 헌법 원리주의자, 특히 라울 버거는 1977년 영향력 있는 저서 "사법에 의한 정부"에서 ''브라운''이 미국 수정 헌법 제14조의 원래 이해에 대한 언급으로는 방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1875년 민권법이 분리된 학교를 금지하지 않았고 수정 헌법 제14조를 통과시킨 동일한 의회가 워싱턴 D.C.의 학교를 분리하기로 투표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수정 헌법 제14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지지한다. 미국 제10 연방 항소 법원의 연방 판사인 마이클 W. 맥코넬을 포함한 다른 원리주의자들은 그의 논문 "원리주의와 탈분리 결정"에서 급진적 재건주의자들이 수정 헌법 제14조를 주도하여 남부 학교의 탈분리를 지지했다고 주장한다.[81] 수정 헌법 제14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수정 헌법의 비준 후 몇 년 동안 학교 통합을 시행할 연방 법률에 대한 제안이 의회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보관된 의회 기록에서 나왔다.[82]

마이클 맥코넬의 연구에 대한 응답으로 라울 버거는 1870년대에 학교 탈분리를 옹호한 의원과 상원 의원들이 수정 헌법 제14조를 정치적 의제에 맞게 다시 작성하려 하고, 1866년부터 1868년까지의 수정 헌법 제14조에 대한 실제 이해(실제로 수정 헌법 제14조가 통과되고 비준된 시기)가 실제로 미국 주가 분리된 학교를 갖는 것을 허용한다고 주장했다.[83] 버거는 맥코넬이 수정 헌법 제14조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학교 분리에 대한 언급(학교 분리를 금지하려는 욕구에 대한 언급은 말할 것도 없고)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비판했고, 또한 1954년의 "시민의 권리"에 대한 견해가 1866년의 "시민의 권리"에 대한 견해와 대조적으로 수정 헌법 제14조를 해석하는 데 결정적이어야 한다는 맥코넬의 견해를 비판했다.[1] 버거는 또한 수정 헌법 제14조를 비준한 주 입법부가 당시 학교 분리가 미국 헌법과 양립할 수 없다고 이해했다는 증거를 제공하지 못했고, 학교 분리의 미국 헌법과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질문(학교 분리의 미국 주법 및/또는 미국 주 헌법과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별도의 질문과는 반대로, 법원은 학교 분리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린 경우가 많음)이 수정 헌법 제14조의 통과 및 비준 후 몇 년 동안 사법부에 도달할 때마다(오하이오, 네바다, 캘리포니아, 인디애나, 또는 뉴욕에서) 법원은 항상 학교 분리의 합헌성을 확인했으며, 미시간 대법원 수석 판사 토머스 M. 쿨리는 1880년 논문 ''미국 헌법의 일반 원칙''에서 그렇게 했다.[1] 또한 버거는 1866년 수정 헌법 제14조의 초안 작성자들의 견해가 결정적이라고 주장한다. — 수정 헌법 제14조의 후기 독자들의 견해(심지어 이 수정 조항의 통과 및 비준 후 이 조항의 의미와 범위에 대한 견해와 신념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때때로 변경될 수 있고 변경된 수정 헌법 제14조의 지지자들의 견해 포함)와 대조적으로네바다 상원 의원 윌리엄 모리스 스튜어트와 같이, 처음에는 학교 탈분리에 반대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 이를 지지했다.[1] 원칙적인 의도가 결정적이라는 그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버거는 제임스 A. 가필드가 존 빙엄에게 1866년에 빙엄이 이전에 했던 진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1871년 인용문을 포함하여 인용했다. 가필드는 빙엄에게 역사를 만들 수는 있지만 지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1]

이 사건은 또한 더 진보적인 작가들로부터 일부 비판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흑인에 대한 분리에서 피해를 찾기 위해 심리적 기준에 의존한 워런 대법원장의 의존이 불필요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드류 S. 데이 III는 다음과 같이 썼다.[84] "우리는 정신적 피해 또는 사회 과학적 증거의 발견에 의존하지 않는 인종적 분류의 합헌성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개발했다. 오히려 '시민 간의 조상에 의한 구별은 그 본질상 평등의 교리에 기초한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혐오스럽다'는 원칙에 기초한다, ''히라바야시 대 미국'', 320 U.S. 81 (1943). . . ."

그의 저서 ''미국의 유혹'' (82페이지)에서 로버트 보크는 다음과 같이 ''브라운'' 결정을 지지했다.

: 1954년, 브라운이 결정될 때, 분리가 평등을 거의 또는 전혀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명백했다. 심리학에 대한 질문은 차치하고, 흑인에게 제공된 물리적 시설은 백인에게 제공된 시설만큼 좋지 않았다. 이는 일련의 사건에서 입증되었다... 따라서 법원의 현실적인 선택은 분리를 허용하여 평등을 포기하거나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분리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선택은 없었다. 두 선택 모두 원래 이해의 한 측면을 위반할 것이지만, 그것을 피할 가능성은 없었다. 평등과 분리는 상호 모순되었지만, 비준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둘 다 존중할 수 없었다. 이를 보면 법원이 평등을 선택하고 국가가 부과한 분리를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수정 헌법 제14조를 탄생시킨 목적은 법 앞의 평등이었고, 분리가 아닌 평등이 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1987년 6월, 해리 트루먼의 임기 동안 법무 차관으로 재직한 시민권 변호사 필립 엘먼은 자신과 펠릭스 프랑크푸르터 대법관이 대법원의 결정에 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NAACP의 주장이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85] 엘먼은 자화자찬하는 사건의 역사를 제공하고, 중요한 사실을 생략하고, 수십 년 동안 결정의 토대를 마련한 시민권 변호사들의 업적을 비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86] 그러나 프랑크푸르터는 또한 개인적 또는 정치적 고려가 아닌 기존 법률에 근거하여 법원 판결을 내리는 사법 자제 철학의 가장 노골적인 옹호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87][88] 오늘날 미국의 공무원들은 이 판결을 칭찬하는 데 거의 만장일치이다. 2004년 5월, 이 판결 50주년 기념식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국립 역사 공원'' 개막식에서 연설하며 ''브라운''을 "미국을 더 나은 방향으로, 그리고 영원히 변화시킨 결정"이라고 불렀다.[89] 대부분의 상원의원과 하원 의원들은 이 판결을 환영하는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

세일럼 미디어 그룹의 언론 매체인 Townhall.com의 2016년 기사에서 경제학자 토마스 소웰은 얼 워런 대법원장이 1954년 랜드마크 사건인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에서 인종적으로 분리된 학교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선언했을 때, 던바 고등학교가 그 가정을 반박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소웰의 추정에 따르면 "던바는 도시 어디에서나 뛰어난 흑인 학생들을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SCOTUS 결정의 해로운 결과로 인해 위치한 거친 빈민가에서 학생들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90]

7. 브라운 이후의 노력 (Brown II, Brown III)

1955년, 연방 대법원은 학교 측이 요구한 인종 차별 폐지에 관한 구제 방안을 논의했다. 이 결정은 흔히 "브라운 2"(Brown II)로 알려져 있으며[91], 법원은 학교 인종 차별 폐지 임무를 지방 법원에 위임하고, 인종 차별 폐지를 "모든 신중한 속도"(all deliberate speed)로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이 문구는 프랜시스 톰슨의 시 "천국의 사냥개"에서 유래한 것이다.[92]

그러나 이전 판결(브라운 1)의 지지자들은 이 결정에 만족하지 못했다. "모든 신중한 속도"라는 표현은 법원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한 합리적인 시간 제한을 두기에는 너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많은 남부 주와 학군들은 이 표현을 이용하여 학교 시스템 폐쇄, 주 정부 자금으로 분리된 "사립" 학교 지원, 소수의 흑인 학생만을 선별적으로 백인 전용 학교에 입학시키고 대다수는 여전히 열악한 흑인 학교에 남겨두는 "토큰 통합"(token integration)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며 수년, 때로는 10년 이상 실질적인 통합을 저항하고, 지연시키며, 회피하는 법적 근거로 삼았다.[93]

예를 들어, ''브라운 2'' 판결에 따라 미국 지방 법원은 버지니아주 프린스 에드워드 카운티가 즉시 인종 차별을 폐지할 필요는 없다고 판결했다. 1959년, 마침내 인종 차별 폐지 명령에 직면하자 카운티 감독 위원회는 공립학교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했고, 학교는 1959년부터 1964년까지 5년 동안 문을 닫았다. 이 기간 동안 카운티의 백인 학생들은 과거 공립학교 교사들이 가르치는 백인 전용 "사립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받았지만, 흑인 학생들은 카운티를 떠나지 않는 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대법원이 ''프린스 에드워드 카운티 학군 이사회 대 그리핀''(Griffin v. County School Board of Prince Edward County) 사건에서 "'신중한 속도'만으로는 시간이 다 되었다"고 선언하며 ''브라운 2''의 지연 전략을 사실상 뒤집고, 카운티가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어린이에게 공립 학교 시스템을 제공해야 한다고 판결한 후에야 공립 학교가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94]

1978년, 토피카의 변호사 리처드 존스, 조셉 존슨, 찰스 스콧 주니어(원래 ''브라운'' 소송팀 변호사의 아들)는 미국 시민 자유 연합(ACLU)의 도움을 받아, 당시 토피카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있던 린다 브라운 스미스를 설득하여 ''브라운'' 사건을 다시 제기하도록 했다. 이들은 토피카 공립학교의 "자유 등록" 정책이 실질적으로 인종 분리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즉, 자유 등록 제도로 인해 백인 학부모들이 자녀를 특정 학교로 옮기면서 학군 내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 중심 학교와 유럽계 미국인 학생 중심 학교가 나뉘게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지방 법원은 25년 만에 ''브라운'' 사건을 재개했지만, 학교가 이미 "통합되었다"고 판결하며 원고의 주장을 기각했다. 그러나 1989년, 미국 제10 연방 순회 항소 법원의 판사 3명으로 구성된 재판부는 2대 1의 결정으로 학생 및 교직원 배치와 관련하여 여전히 인종 차별의 잔재가 남아 있다고 판결했다.[95] 1993년, 대법원은 피고인 교육구의 상고 허가 신청(certiorari)을 기각하고, 사건을 제10 순회 법원의 명령 이행을 위해 리처드 로저스 지방 법원 판사에게 돌려보냈다.

1994년에 통합 계획이 승인되고 관련 채권 발행이 통과된 후, 추가적인 초등학교 마그넷 스쿨(magnet school)이 개교되었고 학군별 출석 계획이 재조정되었다. 그 결과 1998년까지 토피카 학교는 인종 균형에 대한 법원의 기준을 충족하게 되었다. 토피카 통합 교육구 제501구역(Topeka Unified School District 501)은 1999년 7월 27일에 최종적으로 통합 지위(unitary status)를 부여받았다.[96] 새로 설립된 마그넷 스쿨 중 하나는 ''브라운'' 사건과 시민권 운동에 기여한 스콧 가문 변호사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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