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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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1910년 서 조지 화이트에 의해 설립된 영국의 항공기 제조 회사이다. 초기에는 조디악 복엽기의 라이선스 생산을 시도했으나, 자체 설계 항공기 개발로 전환하여 브리스톨 박스카이트를 제작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브리스톨 스카우트, 브리스톨 F.2 파이터 등 전투기를 생산하며 영국 공군에 기여했으며, 전간기에는 다양한 항공기를 개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보파이터를 주력으로 생산했고, 전후에는 브리스톨 브리타니아, 브리스톨 브라바존 등의 항공기를 개발했다. 또한 헬리콥터 부서를 설립하여 브리스톨 시카모어와 벨베데레를 생산했으며, 항공기 엔진 부문을 통해 다양한 엔진을 개발했다. 1959년 영국 항공기 공사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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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 - [회사]에 관한 문서 | |
|---|---|
| 회사 정보 | |
| 회사명 |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 |
![]() | |
| 설립일 | 1910년 (브리티시 앤드 콜로니얼 항공기 회사로 설립) |
| 설립자 | 조지 화이트 경 |
| 해체일 | 1966년 (지주 회사) 1959년 (항공기 생산) |
| 소재지 | 필턴 |
| 국가 | 영국 |
| 산업 | 항공우주 제조업 |
| 주요 인물 | 프랭크 반웰 로이 페든 레슬리 프라이스 아치볼드 러셀 |
| 후신 | 영국 항공기 공사 브리스톨 시들리 |
| 자회사 | 브리스톨 에어로-엔진 브리스톨 헬리콥터 (1945–1959) 브리스톨 자동차 (1945–1960) 브리스톨 에어로스페이스 (1957–1966) |
| 홈페이지 | 브리스톨 공식 홈페이지 |
2. 역사
1910년 조지 화이트 경은 '''브리티시 앤 콜로니얼 에어플레인 컴퍼니'''(British and Colonial Aeroplane Company, Ltdeng)를 설립하여 항공 산업에 뛰어들었다.[1] 초기에는 필튼에서 브리스톨 박스카이트를 생산하고 라크힐 등지에 비행 학교를 운영하며 기반을 다졌다.[3][1]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프랭크 반웰을 수석 설계자로 영입하여 영국군을 위한 항공기 개발에 주력했다. 특히 브리스틀 F.2 파이터는 전쟁 중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후에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다.[7][1]
1920년 회사명을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Bristol Aeroplane Company, Ltd.eng)로 변경하고, 파산한 코스모스 엔지니어링의 엔진 부문을 인수하여 항공 엔진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1] 로이 페든이 이끈 엔진 부문은 브리스톨 쥬피터와 같은 성공적인 성형 엔진을 개발하며 회사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1] 이 시기 대표적인 항공기로는 영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브리스톨 불독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을 앞두고 브리스톨 블레넘 경폭격기를 개발했으며, 전쟁 중에는 브리스톨 보퍼트 어뢰 폭격기와 이를 기반으로 한 다목적 중전투기 브리스톨 보파이터를 대량 생산하여 연합군의 전쟁 수행에 크게 기여했다.[1] 생산량 증대를 위해 웨스턴슈퍼메어 등에 섀도 팩토리를 운영하기도 했다.[1]
전후에는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여 헬리콥터 (브리스톨 시카모어, 브리스톨 벨베데레), 자동차 (브리스톨 자동차), 여객기 (브리스톨 브라바존, 브리스톨 브리타니아), 미사일 (브리스톨 블러드하운드)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1] 또한, 콩코드 개발의 기초가 된 초음속 수송기 연구(브리스톨 타입 223)도 진행했다.[1]
1959년, 영국 정부의 항공 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브리스톨의 항공기 사업 부문은 다른 주요 항공사들과 합병하여 영국 항공기 공사(British Aircraft Corporation, BAC)를 설립하는 데 참여했다.[1]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지주 회사로 남았으나, 1966년 롤스로이스에 인수되었다.[1] BAC는 이후 국유화를 거쳐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현 BAE 시스템스)의 일부가 되었다.[1]
2. 1. 설립 (1910년)
'''브리티시 앤 콜로니얼 에어플레인 컴퍼니'''(British and Colonial Aeroplane Company, Ltdeng)는 급성장하는 항공 산업을 상업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1910년 2월, 브리스톨 궤도차 및 마차 회사의 회장이었던 조지 화이트 경과 그의 아들 스탠리, 그리고 그의 형제 사무엘에 의해 설립되었다. 조지 화이트 경은 1909년 프랑스에서 우연히 미국의 항공 개척자 윌버 라이트를 만나 항공 사업의 잠재력을 확인했다.[1]당시 많은 항공 회사들이 재정적 지원이 부족한 열성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과 달리, 브리티시 앤 콜로니얼은 처음부터 자금 지원이 탄탄했다.[1] 조지 화이트 경은 항공 사업이 기존 브리스톨 트램웨이 컴퍼니의 주주들에게는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별도의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고, 새로운 회사의 운영 자본 25000GBP는 조지 화이트 경과 그의 형제, 아들이 전액 출자했다. 두 회사는 긴밀하게 협력했으며, 회사의 첫 번째 부지는 브리스톨 트램웨이 컴퍼니로부터 임대한 필튼의 옛 트램 차고 두 곳이었다.[2][1] 또한, 수석 엔지니어이자 공장 관리자인 조지 챌린저를 포함한 핵심 인력 역시 브리스톨 트램웨이 컴퍼니에서 영입되었다.
회사의 첫 기획은 프랑스 보아잔 형제의 조디악 박스카이트 복엽기를 라이선스 생산하고 개량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물은 1910년 3월 올림피아에서 열린 항공 쇼에 전시되었지만, 조디악은 동력이 부족하여 실제로 비행하지는 못했다.
브리스톨이 자체 설계하여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항공기는 브리스톨 박스카이트로, 1910년 6월부터 필턴의 전차 격납고에서 생산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회사는 비행 학교 설립에도 힘썼다. 당시 영국 항공의 중심지였던 서리 브룩랜즈에 격납고를 임대하여 비행 학교를 열었고, 1910년 6월에는 솔즈베리 평원의 라크힐에 있는 2248acre의 토지를 육군성으로부터 임대하여 또 다른 학교를 설립했다. 이 비행 학교들은 큰 성공을 거두어, 1914년까지 발급된 왕립 항공 클럽 자격증 664개 중 308개가 이 회사 학교 출신자들에게 수여될 정도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3][1]
2. 2. 초기 항공기 개발 (1910년 ~ 1914년)


회사는 초기에 프랑스 조디악(société Zodiac)에서 제작하고 가브리엘 부아쟁이 설계한 복엽기의 면허 생산 및 개량을 통해 사업을 시작하려 했다.[1] 조지 화이트 경은 1909년 파리 에어로 살롱에서 이 항공기의 뛰어난 제작 품질에 감명받아 1대를 구매했고, 1910년 3월 올림피아 에어쇼에 전시했다. 동시에 필튼 공장에서는 5대의 추가 제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브룩랜즈에서 진행된 비행 시험 결과, 이 기체는 익형 설계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출력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브리스톨 측에서 새로운 날개를 장착하는 개량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 5월 28일 단 한 차례의 짧은 비행에 그쳐 결국 해당 기종에 대한 작업은 중단되었다. 조지 경은 조디악 측으로부터 15000FRF의 보상을 받는 데 성공했다.[4][1]
이 실패를 계기로 회사는 자체 항공기 설계를 결정했다.[1] 수석 엔지니어 조지 챌린저는 항공 전문지에 공개된 앙리 파르망의 성공적인 설계 치수를 기반으로 일주일 남짓한 기간 만에 새로운 항공기 도면을 완성했다. 조지 경은 즉시 20대의 제작을 승인했다.[1] 첫 번째 완성된 항공기는 솔즈베리 평원의 라크힐 비행 학교로 옮겨져 1910년 7월 20일, 모리스 에드몬즈가 조종하여 성공적인 처녀 비행을 마쳤다.[5]
브리스톨 박스카이트라는 별칭을 얻은 이 항공기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총 76대가 제작되었다. 이 항공기들은 회사가 운영하는 비행 학교의 주요 훈련기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육군성과 여러 외국 정부에도 판매되었다.[1] 회사는 당시 영국 항공의 중심지였던 서리 브룩랜즈에 격납고를 임대하여 비행 학교를 설립했으며, 1910년 6월에는 육군성으로부터 2248acre의 토지를 임대받아 솔즈베리 평원의 라크힐에도 학교를 추가로 열었다. 1914년까지 발급된 왕립 항공 클럽 비행 자격증 664개 중 308개가 브리스톨 비행 학교 출신에게 수여될 정도로 활발히 운영되었다.[3][1]
박스카이트는 당시 기준으로는 성공적이었으나, 추가적인 발전 가능성은 제한적이었다. 이에 회사는 소형 트랙터 구성의 복엽기와 단엽기라는 두 가지 새로운 설계에 착수했다. 이 두 기종은 1911년 올림피아 항공 쇼에 전시되었지만, 성공적인 비행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챌린저와 로우는 비커스의 신설 항공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의 빈자리는 헨던 비행장의 루이 블레리오 비행 학교 수석 강사였던 피에르 프리어가 채웠고, 이후 에릭 고든 잉글랜드가 합류했다. 1912년 1월에는 루마니아 출신 항공 기술자 앙리 코안다가 회사의 수석 설계자로 영입되었다.
1912년 초, 해군 항공기에 대한 데니스툰 버니의 아이디어를 연구하기 위해 "X-Department"라는 별도의 비밀 설계 사무소가 설립되었다. 프랭크 반웰이 이 프로젝트의 설계 엔지니어로 채용되었으며, 그는 1914년 10월 코안다가 회사를 떠난 후 브리스톨의 수석 설계자 자리를 이어받았다. 반웰은 이후 세계적인 항공 기술자로 인정받으며 1938년 사망할 때까지 회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회사는 빠르게 성장하여 브리스링턴 전차 공장에 두 번째 공장을 설립했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총 2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브리스링턴 전차 공장에 두 번째 공장을 설립하는 등 빠르게 확장하여 총 2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1] 당시 영국의 군사력은 100대 남짓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영국 왕립 비행대(RFC)는 무장하지 않은 다양한 종류의 항공기로 구성된 7개의 비행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6] 공식적인 육군성 정책은 영국 왕립 항공 연구소(RAE)가 설계한 항공기만을 구매하는 것이었고, 브리스틀은 이미 여러 대의 B.E.2 2인승 정찰기를 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RFC와 영국 왕립 해군 항공대(RNAS) 조종사들의 요구로 브리스틀이 새로 개발한 스카우트에 대한 주문이 이루어졌다.[1] 브리스톨 스카우트는 영국군에 채택된 최초의 전투기 중 하나였다.1914년 10월, 루마니아 출신 기술자 앙리 코안다가 회사를 떠나면서 프랭크 반웰이 수석 설계자 자리를 이어받았다. 반웰은 이후 세계적인 항공 기술자로 인정받게 된다. 1915년, 프랑스에서 조종사로 복무하던 반웰은 설계자로서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브리스틀 대학교 공학부를 갓 졸업한 레슬리 프리스가 반웰에 의해 채용되었다. 1916년에는 회사의 창립자인 조지 화이트 경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스탠리 화이트가 경영을 맡게 되었다.[1]

반웰이 귀국 후 처음 작업한 프로젝트는 브리스틀 T.T.A.였다. 이는 제플린 비행선의 공습에 대응하기 위한 2인승 전투기로 육군성의 요구에 따라 설계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1916년부터 시작된 브리스틀 F.2A 개발은 매우 성공적인 F.2B 파이터로 이어졌다. F.2B 파이터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뛰어난 항공기 중 하나이자 전후 영국 공군(RAF)의 주력기로 자리 잡았다. 총 5,300대 이상 생산되었으며 1931년까지 운용되었다.[7][1]
이 시기에는 브리스틀 단엽 정찰기도 설계되었다. 조종사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으나, 단엽기에 대한 육군성의 편견과 상대적으로 높은 착륙 속도(50mph)가 서부 전선의 야전 조건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실전 투입은 근동 지역으로 제한되었고, 130대만 제작되는 데 그쳤다.
2. 4. 전간기 (1919년 ~ 1939년)
제1차 세계 대전 말,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필튼과 브리스링턴에 위치한 공장에서 3,0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1] 생산된 항공기는 일반적으로 '브리스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1920년 기존의 '브리티쉬 앤 콜로니얼 에어플레인 컴퍼니'(British and Colonial Aeroplane Company)가 청산되면서 그 자산이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 Ltd.'''(Bristol Aeroplane Company, Ltd.)로 이전되어 공식 명칭이 되었다. 이 시기 회사는 공군성의 압력으로 브리스톨 교외 피쉬폰즈에 있던 파산한 코스모스 엔지니어링(Cosmos Engineering)의 항공기 엔진 부문을 인수하여 새로운 항공 엔진 사업의 핵심으로 삼았다.[1]브리스톨 항공과 코스모스 간에는 이미 협력 관계가 존재했다. 코스모스의 쥬피터 엔진(이후 브리스톨 쥬피터)은 1919년 5월 시제기인 브리스톨 배저에 탑재되어 첫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브리스톨은 15,000파운드에 로이 페든(Roy Fedden)이 이끄는 코스모스 설계팀과 일부 완성된 엔진, 공구 등을 확보했다.[1] 항공기 엔진 부문이 수익을 내기까지는 수년이 걸렸지만, 쥬피터 엔진은 결국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쟁 사이 기간 동안 항공기 엔진 부문은 항공기 제조 부문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브리스톨은 공랭식 성형 엔진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1] 쥬피터와 그 후속 엔진들은 브리스톨 자사의 항공기뿐만 아니라 다른 제조사들의 수많은 항공기에도 동력을 공급했다.

이 기간 동안 브리스톨의 가장 성공적인 항공기는 브리스톨 불독 전투기였다. 이 전투기는 공군성의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개발되었으며, 1930년부터 1937년까지 영국 공군(RAF) 전투 부대의 주력 기종으로 운용되었다. 또한 덴마크, 에스토니아, 핀란드, 호주 등 여러 국가에 수출되었다. 이 시기 브리스톨은 항공기 제작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경합금 대신, 플랜지 형태로 압연된 고장력강 스트립을 사용한 강철 동체 구조를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935년 6월 15일,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주식회사로 전환되었다. 당시 회사는 4,2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엔진 공장에서 근무했다. 이는 그해 5월 영국 정부가 발표한 대규모 군비 확장 계획에 발맞춰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 영국 공군력 증강에 대한 브리스톨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브리스톨 블레넘 경폭격기였다.
1938년 8월, 수석 설계자였던 프랭크 반웰(Frank Barnwell)이 자신이 설계한 경비행기를 조종하던 중 사고로 사망했다.[8] 그의 뒤를 이어 레슬리 프리즈(Leslie Frise)가 수석 설계자 자리를 맡았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 필튼에 있는 브리스톨 공장은 바닥 면적이 거의 25ha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항공기 제조 시설이었다.
2. 5.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의 가장 중요한 항공기는 보파이터(Beaufighter)였다.[1] 이 항공기는 2인승 다목적 항공기로, 장거리 전투기, 야간 전투기, 지상 공격기, 어뢰 폭격기 등 다양한 임무에 투입되었다. 보파이터는 영국 공군(RAF)을 비롯하여 다른 영연방 국가 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보파이터는 이전에 개발된 보퍼트(Beaufort) 어뢰 폭격기에서 파생되었으며, 보퍼트는 다시 블레넘(Blenheim) 폭격기에서 파생된 기종이었다.[1]
전쟁 수행을 위한 생산량 증대를 위해 1940년에는 섀도 팩토리(Shadow factory)가 건설되었다. 보파이터 생산 공장은 웨스턴슈퍼메어에 세워졌고, 엔진 생산을 위한 공장은 윌트셔 코샴 근처 호손(Hawthorn)의 이전 석재 채석장 부지에 지하 시설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호손 지하 공장의 건설은 예상보다 지연되었고, 1945년 부지가 폐쇄될 때까지 실제 생산량은 많지 않았다.[9][10][1] 전쟁 기간 동안 회사의 본부는 브리스틀 클리프턴에 위치한 로열 웨스트 오브 잉글랜드 아카데미 건물에 자리 잡았다.
2. 6. 전후 (1945년 ~ 1959년)
전쟁이 끝나자 브리스톨은 사업 다각화를 모색했다. 라울 하프너의 지휘 아래 웨스턴 슈퍼 메어 공장에 별도의 헬리콥터 부서를 설립했다.[1] 이 부서는 1944년 하프너와 그의 팀이 합류하면서 시작되었으며,[18] 시카모어 (171형)와 벨베데레 (192형) 헬리콥터를 개발하여 양산했다. 시카모어는 군용으로 여러 국가에 판매되어 총 178대가 제작되었고,[19] 벨베데르는 RAF에서 사용하기 위해 26대가 생산되었다.[21] 민간용 탠덤 로터 헬리콥터인 173형도 개발되었으나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20] 헬리콥터 부서는 1960년에 웨스트랜드에 인수되었다.[1]
브리스톨 자동차 부서도 전후에 설립되어 패치웨이에서 자동차를 생산했다.[1] 첫 모델인 브리스톨 400은 전후 입수한 BMW 설계를 기반으로 했다.[1] 브리스톨 400을 위해 개발된 엔진은 쿠퍼, 프레이저 내시, AC 등 다른 자동차 제조사의 성공적인 모델에도 사용되었다. 또한, 이 엔진을 탑재한 브리스톨 450 스포츠 프로토타입 자동차는 1954년과 1955년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클래스 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 시장을 겨냥한 '''아놀트-브리스톨''' 스포츠카도 제작되어 약 177대가 생산되었다.[11][12] 자동차 부서는 1960년 BAC와의 합병 과정에서 조지 화이트 경의 노력으로 분리되어 브리스톨 자동차 유한회사로 독립했다.[1][13] 이 외에도 조립식 건물, 선박, 플라스틱 및 복합 재료 사업도 진행했으나 이후 매각되었다.

민간 항공 분야에서는 브라바존 위원회의 보고서에 영향을 받아 대형 여객기 개발에 참여했다.[1] 1949년 첫 비행에 성공한 브라바존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기 중 하나였지만, 시장의 요구와 맞지 않아 군 및 민간 운영자들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1953년에 프로젝트가 취소되었다.[1] 대신 브리스톨은 브리타니아 터보프롭 여객기 개발에 집중했다. 대서양 횡단 비행이 가능했던 브리타니아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개발 기간이 길어져 판매는 82대에 그쳤다.[14] 수송기인 프리터 역시 1950년대에 생산되었다.
미사일 개발도 중요한 활동 중 하나였다. 블러드하운드 지대공 미사일을 개발하여 생산했으며, 이는 도입 당시 RAF의 유일한 장거리 수송 가능 지대공 미사일로서 영국 방공망 강화에 기여했다.[1] 브리스톨 에어로 엔진 부서는 미사일 추진을 위한 로켓 엔진과 램제트 엔진도 생산했다. 유도 무기 부서는 훗날 MBDA의 일부가 되었다.[1]
1950년대 후반에는 초음속 수송기 연구에도 착수하여 타입 223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연구는 훗날 콩코드 개발에 기여하게 된다.[1] 마하 2.0 비행을 위한 스테인리스강 기체 연구용 항공기인 타입 188도 제작되었으나, 1962년 첫 비행 당시에는 이미 회사가 BAC의 일부가 된 후였다. 이와 함께 타입 200과 같은 여러 아음속 여객기 설계도 진행되었으나 실제로 제작되지는 않았다.[15]

2. 7. 합병 및 이후 (1959년 ~ 현재)
1959년, 영국 정부의 항공 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의 항공기 사업 부문은 잉글리시 일렉트릭, 헌팅 항공, 비커스-암스트롱스와 합병하여 영국 항공기 공사(British Aircraft Corporation, BAC)를 설립했다. 이 합병으로 브리스틀은 BAC의 지분 20%를 보유한 지주 회사가 되었으며, 잉글리시 일렉트릭과 비커스는 각각 40%의 지분을 가졌다.[1]1966년에는 롤스로이스(Rolls-Royce Limited)가 BAC 지분 20%와 브리스톨 시들리 엔진 지분 50%를 보유하고 있던 브리스톨 지주 회사를 인수했다.[1] 당시 브리스톨은 여러 자회사와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주요 내역은 다음과 같다.
| 회사명 | 지분율 또는 소유 형태 |
|---|---|
| 브리스톨 에어로제트 | 50% |
|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 오스트레일리아 | 자회사 |
| 브리스톨 DE 멕시코 SA | 78% |
| 모토레스 브리스톨 데 쿠바 SA | 자회사 |
|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 캐나다 | 자회사 |
| 브리스톨 에어로 인더스트리즈 Ltd | 자회사 |
|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 USA | 자회사 |
| 스파르탄 항공 서비스 Ltd | 46.5% |
|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 뉴질랜드 | 자회사 |
| 브리스톨 항공기 서비스 Ltd | 자회사 |
|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플라스틱 Ltd | 자회사 |
| SECA | 30% |
| 쇼트 브로스 & 하랜드 | 15.25% |
| SVENSK-ENGELSK 에어 서비스 AB | 자회사 |
| TABSA | 25% |
| 웨스트랜드 항공기 Ltd | 10% |
브리스틀은 1923년 타입 90 버클리를 시작으로 프로젝트에 유형 번호를 체계적으로 지정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회사는 1914년 8월부터 시작된 모든 프로젝트에 대해, 실제 제작 여부와 관계없이 연대순으로 소급하여 유형 번호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초기 모델인 스카우트 A와 B는 유형 번호를 받지 못했지만, 스카우트 C는 타입 1이 되었다. 브리스틀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1962년 계획되었으나 제작되지 않은 STOL 수송기인 타입 225였다. 이렇게 부여된 총 225개의 타입 번호 중 실제로 117개 타입의 기체가 제작되었다.[26] 아래 이어지는 목록에는 실제로 제작되지 않은 계획상의 항공기("페이퍼 에어플레인")는 포함되지 않지만, 1914년 8월 이전에 제작된 항공기는 포함된다.
해외 자회사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캐나다 브리스틀 그룹은 몬트리올 도르발 공항에서 항공기 취급 및 정비를, 밴쿠버 공항에서는 캐나다 왕립 공군(RCAF) 및 상업 운영자를 위한 프랫 & 휘트니(Pratt and Whitney)와 라이트(Wright) 엔진 정비를 담당했다. 위니펙 스테븐슨 필드에 위치한 브리스톨 항공기(웨스턴) 주식회사는 그룹 내 유일한 기체 공장이었다. 멕시코 지사인 브리스톨 데 멕시코 S.A. de CV는 남미 운영자를 위한 피스톤 엔진 정비와 더불어, 1963년부터 알프레드 허버트의 기계 공구 라이선스 생산 및 자체 설계 소형 엔진 선반 제작 사업도 진행했다.[1]
1977년, 영국 정부는 다시 한번 항공우주 산업을 재편하여 BAC를 스코티시 항공, 호커 시들리와 함께 국유화하고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ritish Aerospace, BAe)를 출범시켰다. BAe는 이후 민영화 과정을 거쳐 현재의 BAE 시스템스가 되었다.[1] 한편, 브리스톨의 캐나다 지사는 롤스로이스 홀딩스에 인수되었다가 1997년 마젤란 항공우주에 매각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1]
3. 브리스톨 엔진 회사

'''브리스톨 엔진 컴퍼니'''는 원래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자동차 회사였던 브라질-스트레이커에서 파생된 별도 법인, 코스모스 엔지니어링에서 시작되었다. 1917년, 코스모스는 공랭식 성형 엔진 개발 요청을 받았다. 로이 페든의 지휘 아래, 1918년 14기통 2열 성형 엔진인 코스모스 머큐리를 개발했으나, 실제 사용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단순화한 9기통 버전인 브리스톨 주피터는 큰 성공을 거둔 설계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군사 주문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코스모스 엔지니어링은 파산 위기에 처했다. 이에 공군성은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가 코스모스 엔지니어링을 인수하도록 권고했다. 1920년대 동안 주피터 엔진은 암스트롱 시들리 재규어와 경쟁했지만, 브리스톨은 설계 개선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1929년에는 주피터가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로이 페든의 주도로 회사는 슬리브 밸브 방식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브리스톨 페르세우스 라인업 개발에 성공했다. 이 엔진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왕복 엔진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1960년대까지 생산 및 판매가 이어졌다.
1956년, 엔진 부서는 '''브리스톨 에어로 엔진'''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후 1958년, 브리스톨의 기체 부문이 다른 회사들과 합병하여 영국 항공기 공사(BAC)를 설립한 것과 유사하게, 엔진 부문 역시 암스트롱 시들리와 합병하여 '''브리스톨 시들리'''를 설립했다. 이 합병으로 브리스톨은 새 회사의 지분 50%를, 호커 시들리 그룹이 나머지 50%를 보유하게 되었다.[16]
1966년, 브리스톨 시들리는 롤스로이스에 인수되었고, 이로써 롤스로이스는 영국 유일의 주요 항공 엔진 회사가 되었다. 1967년부터 브리스톨 시들리의 사업은 롤스로이스 내에서 기존 항공 엔진 부문과 별개인 "브리스톨 엔진 부문"과 "소형 엔진 부문"으로 운영되었다.[17] 올림푸스 터보제트 엔진(콩코드 여객기를 위해 브리스톨이 스넥마와 공동 개발 시작) 및 페가수스 엔진 등 브리스톨 시들리에서 개발된 여러 엔진들은 롤스로이스 체제 하에서도 계속 개발되었다. 브리스톨이 선호했던 천문학적 대상에서 유래한 엔진 이름들은, 영국 강 이름을 선호하는 롤스로이스의 명명 방식 속에서도 그 유산을 일부 남겼다.
4. 생산 기종
4. 1. 항공기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설립 초기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전간기,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전후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항공기를 설계하고 생산했다. 초기의 브리스톨 박스카이트와 같은 복엽기부터 시작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브리스톨 F.2 파이터와 같은 성공적인 전투기를 개발했다. 전간기에는 브리스톨 불독 전투기와 브리스톨 블레넘 폭격기 등을 생산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다목적 전투기인 브리스톨 보파이터가 활약했다.
전후에는 민간 항공기 시장에도 진출하여 브리스톨 브리타니아와 같은 터보프롭 여객기를 개발했으며, 헬리콥터 분야에서도 브리스톨 벨베데르 등을 생산하며 기술력을 선보였다. 또한, 초음속 수송기 연구에도 참여하여 콩코드 개발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4. 1. 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브리티시 앤 콜로니얼 에어플레인 컴퍼니'''(British and Colonial Aeroplane Company, Ltd)는 1910년 2월, 브리스톨 옴니버스 컴퍼니의 회장이었던 조지 화이트 경(Sir George White, 1st Baronet)과 그의 아들 스탠리, 형제 사무엘이 설립하였다. 조지 화이트 경은 1909년 프랑스에서 미국의 항공 개척자 윌버 라이트를 만난 후 항공 산업의 상업적 잠재력을 확신하게 되었다.[1]
당시 많은 항공 회사들이 자금 부족에 시달렸던 것과 달리, 이 회사는 처음부터 탄탄한 자금력을 갖추었다.[1] 조지 경은 항공 사업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브리스톨 트램웨이 컴퍼니와는 별도의 회사를 설립했으며, 초기 자본금 2.5만파운드는 조지 경과 그의 형제, 아들이 전액 출자했다. 회사의 첫 번째 공장은 브리스톨 트램웨이 컴퍼니로부터 임대한 필튼의 옛 전차 차고 두 곳이었으며[2][1], 수석 엔지니어이자 공장 관리자인 조지 챌린저를 포함한 핵심 인력도 브리스톨 트램웨이 컴퍼니에서 영입되었다.
회사는 당시 영국 항공의 중심지였던 서리 브룩랜즈에 격납고를 임대하여 비행 학교를 열었다. 또한 1910년 6월에는 육군성으로부터 2248acre의 토지를 임대받아 솔즈베리 평원의 라크힐에도 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들은 큰 성공을 거두어, 1914년까지 발급된 왕립 항공 클럽 자격증 664개 중 308개가 이 회사 학교 출신자들에게 발급되었다.[3][1]
회사의 첫 제조 시도는 프랑스 조디악 에어로스페이스(société Zodiac)이 가브리엘 부아쟁 설계를 기반으로 제작한 복엽기의 면허 생산이었다.[1] 1909년 파리 에어로 살롱에서 이 기체의 품질에 감명받은 조지 경은 1대를 구매하고 5대의 추가 제작을 필튼 공장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1910년 5월 브룩랜즈에서 진행된 시험 비행 결과, 날개 단면 문제와 출력 부족이 드러나 단 한 차례의 짧은 비행에 그쳤고, 결국 생산 계획은 중단되었다. 조지 경은 '비행 보증' 조건을 근거로 조디악으로부터 를 보상받는 데 성공하였다.[4][1]
이 실패 후, 회사는 자체 설계 항공기 개발로 방향을 전환했다.[1] 조지 챌린저는 당시 성공적이었던 앙리 파르망의 설계를 기반으로, 공개된 치수를 참고하여 일주일 만에 새로운 항공기 도면을 완성했다. 조지 경은 즉시 20대 제작을 승인했다.[1] 첫 번째 완성 기체는 1910년 7월 20일 라크힐에서 모리스 에드몬즈의 조종으로 처녀 비행에 성공했으며, 만족스러운 성능을 보였다.[5] 브리스톨 박스카이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항공기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총 76대가 제작되었고, 회사의 비행 학교 운영과 육군성 및 해외 수출에 기여했다.[1]
박스카이트는 성공적이었지만 추가적인 발전 가능성은 제한적이었다. 이에 회사는 소형 트랙터 구성 복엽기와 단엽기라는 두 가지 새로운 설계를 진행했다. 이 기체들은 1911년 올림피아 항공 쇼에 전시되었으나 성공적으로 비행하지는 못했다. 이 시기 챌린저와 로우는 비커스의 신설 항공 부서로 이직했고, 그 자리는 루이 블레리오 비행 학교 강사 출신인 피에르 프리어와 에릭 고든 잉글랜드가 채웠다. 1912년 1월에는 루마니아 출신 항공 기술자 앙리 코안다가 수석 설계자로 영입되었다.
1912년 초, 해군 항공기에 대한 데니스툰 버니 경의 아이디어를 연구하기 위해 "X-Department"라는 별도의 비밀 설계 부서가 설립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프랭크 반웰이 설계 엔지니어로 채용되었으며, 그는 1914년 10월 코안다가 회사를 떠난 후 수석 설계자 자리를 이어받아 1938년 사망할 때까지 회사에 기여하며 세계적인 항공 기술자로 인정받았다.
회사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브리스링턴의 전차 공장에 두 번째 공장을 설립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총 2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 모델명 | 주요 특징 / 설계자 | 비고 |
|---|---|---|
| 브리스톨 박스카이트 | 앙리 파르망 기반 복엽기 (조지 챌린저 설계) | 1910년 첫 비행, 76대 생산, 상업적 성공 |
| 브리스톨 글라이더 | ||
| 브리스톨 레이싱 복엽기 | ||
| 브리스톨 복엽기 T형 | 트랙터 구성 복엽기 | 1911년 올림피아 전시, 비행 실패 |
| 브리스톨 단엽기 | 단엽기 | 1911년 올림피아 전시, 비행 실패 |
| 브리스톨 프리어 단엽기 | 단엽기 (피에르 프리어 설계) | |
| 브리스톨-버니 수상 비행기 | 수상 비행기 (데니스턴 버니 아이디어, 프랭크 반웰 설계 참여) | "X-Department"에서 개발 |
| 브리스톨-코안다 단엽기 | 단엽 훈련기 (앙리 코안다 설계) | 1912년부터 개발 |
| 브리스톨 고든 잉글랜드 복엽기 | 복엽기 (에릭 고든 잉글랜드 설계) | 1912년부터 개발 |
| 브리스톨 B.R.7 | ||
| 브리스톨 하이드로 no.120 | ||
| 브리스톨 G.B.75 | 브리스톨 T.B.8 파생형 | 루마니아 수출용 |
| 브리스톨 T.B.8 | 브리스톨-코안다 단엽기 기반 복엽기 | |
| 브리스톨 P.B.8 | ||
| 브리스톨 S.S.A. | 장갑 복엽 정찰기 | 1914년 첫 비행, 1대 제작 (프랑스용) |
4. 1. 2.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브리스링턴 전차 공장에 두 번째 공장을 설립하는 등 빠르게 확장하여 총 2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1914년 8월 전쟁이 시작될 때 영국의 군사 항공력은 100대 남짓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영국 왕립 비행대(RFC)는 무장하지 않은 다양한 종류의 항공기로 구성된 7개의 비행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6]초기 육군성의 공식 정책은 영국 왕립 항공 연구소(RAE)가 설계한 항공기만을 구매하는 것이었고, 브리스틀은 이미 여러 대의 B.E.2 2인승 정찰기를 제작했다. 그러나 RFC와 영국 왕립 해군 항공대(RNAS) 조종사들의 요구에 따라 브리스틀이 새로 제작한 스카우트에 대한 주문이 이루어졌다.[1]
1915년, 프랑스에서 복무 중이던 프랭크 반웰은 그의 설계 능력이 조종 기술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판단 하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레슬리 프리스가 브리스틀 대학교 공학부를 졸업하고 반웰에 의해 채용되었다. 1916년에는 회사의 창립자인 조지 경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스탠리가 회사를 이끌게 되었다.[1]
반웰이 귀국 후 처음으로 작업한 프로젝트는 브리스톨 T.T.A.였다. 이는 제플린 공습에 대응하기 위한 국토 방위용 2인승 전투기에 대한 육군성의 요구에 따라 설계되었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1] 하지만 1916년부터 시작된 브리스톨 F.2A 개발 작업은 매우 성공적인 F.2B 파이터로 이어졌다. F.2 파이터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뛰어난 항공기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전후 영국 공군(RAF)의 주력 기종이 되었다. 총 5,300대 이상이 생산되었고 1931년까지 운용되었다.[7][1]
이 시기에 설계된 또 다른 항공기는 브리스톨 단엽 정찰기(M.1)였다. M.1은 조종사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단엽기에 대한 육군성의 편견과 상대적으로 빠른 착륙 속도(시속 50mph)가 서부 전선의 야전 조건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그 성공이 제한되었다. 결국 130대만 제작되었으며, 주로 근동 지역의 작전에 투입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가 개발 및 생산한 주요 항공기는 다음과 같다.
- 타입 1-5, 18 및 21 스카우트
- 타입 6 T.T.A.
- 타입 10, 11, 20 및 77 M.1 단엽 전투기
- 타입 12, 14-17 및 22 F.2 파이터
- 타입 13 M.R.1
4. 1. 3.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필튼과 브리스링턴에 분산된 생산 공장에서 3,00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었다.[1] 회사의 제품은 항상 '브리스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1920년 청산 절차를 거쳐 영국 및 식민지 회사의 자산을 승계한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 유한회사(Bristol Aeroplane Company, Ltd.)가 설립되면서 공식화되었다. 이 시기 회사는 공군성의 압력에 따라 브리스톨 교외 피쉬폰즈에 위치했던 파산한 코스모스 엔지니어링(Cosmos Engineering)의 항공기 엔진 부문을 인수하여 새로운 항공기 엔진 사업의 기반을 마련했다.[1]
이미 브리스톨 항공과 코스모스 엔지니어링 사이에는 긴밀한 협력 관계가 존재했다. 코스모스 엔지니어링의 코스모스 쥬피터 엔진은 1919년 5월 시제기인 브리스톨 배저에 처음 탑재되어 비행에 성공했다. 브리스톨은 1.5만파운드에 로이 페든(Roy Fedden)이 이끄는 코스모스 설계팀과 일부 완성된 엔진, 공구 등을 확보했다.[1] 항공기 엔진 부문이 수익을 내기까지는 수년이 걸렸지만, 브리스톨 쥬피터 엔진은 결국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쟁 사이 기간 동안 항공기 엔진 부문은 항공기 제조 부문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브리스톨은 공랭식 성형 엔진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1] 쥬피터 엔진과 그 후속 엔진들은 브리스톨이 설계한 거의 모든 항공기에 탑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제조사에서 제작한 수많은 항공기에도 동력을 제공했다.
이 기간 동안 브리스톨이 개발한 가장 성공적인 항공기는 브리스톨 불독 전투기였다. 불독은 1930년부터 1937년까지 영국 공군(RAF) 전투 부대의 주력 기종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최전선에서 물러났다. 불독은 공군성의 지원 없이 회사 자체 프로젝트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해외 판매가 가능했고, 덴마크, 에스토니아, 핀란드, 호주 등 여러 국가에 수출되었다.
브리스톨은 이 시기에 항공기 제작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경합금 대신, 플랜지 섹션으로 압연된 고강도 강철 스트립을 이용한 부재로 강철 동체를 제작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35년 6월 15일,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당시 회사는 주로 엔진 공장에 4,200명의 직원을 두고 있었으며, 그해 5월 영국 정부가 추진한 대규모 군비 증강 계획에 발맞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시기 영국 공군력 확장에 브리스톨이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브리스톨 블레넘 경폭격기였다.
1938년 8월, 수석 설계자 프랭크 반웰(Frank Barnwell)은 자신이 설계한 경비행기를 조종하던 중 사고로 사망했다.[8] 그의 후임으로는 레슬리 프리즈(Leslie Frise)가 임명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 필튼에 있는 브리스톨 공장은 바닥 면적이 거의 25ha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항공기 제조 시설 중 하나였다.
다음은 전간기에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가 개발 및 생산한 주요 항공기 목록이다.
| 형식 | 이름 | 비고 |
|---|---|---|
| 23 | 브리스톨 배저 | 쥬피터 엔진 첫 탑재 시험기 |
| 24, 25 | 브리스톨 브레이마 | 삼엽기 중폭격기, 2대 제작 |
| 26 | 브리스톨 풀먼 | 브레이마 기반 여객기, 1대 제작 |
| 27–29, 47, 48 | 브리스톨 투어러 | |
| 30, 46 | 브리스톨 베이비 | |
| 31 | 브리스톨 그램퍼스 | 미완성 여객기 |
| 32 | 브리스톨 불릿 | 복엽 경주기, 1대 제작 |
| 36 | 브리스톨 시리 | 단거리 이착륙 성능 경쟁 참가기 |
| 37 | 브리스톨 트램프 | 풀먼 기반 증기 동력 여객기 파생형, 2대 제작 (비행 실패) |
| 52, 53 | 브리스톨 불핀치 | 전환 가능 단엽/복엽기, 프로토타입만 제작 |
| 62, 75 | 브리스톨 텐 시터 | Type 79 브랜든 포함 |
| 72 | 브리스톨 레이서 | |
| 76 | 브리스톨 주피터 파이터 | F.2 전투기를 쥬피터 엔진 사용하도록 개조 |
| 73, 83, 183 | 브리스톨 프라이머리 트레이너 | 택시플레인 포함 |
| 84 | 브리스톨 블러드하운드 | 2인승 정찰/전투기, 4개 프로토타입 제작 |
| 90 | 브리스톨 버클리 | |
| 91 | 브리스톨 브라우니 | |
| 92 | 브리스톨 92형 | 실험실 복엽기 |
| 93, 93A | 브리스톨 보어하운드 | 비버 포함 |
| 95 | 브리스톨 백샷 | |
| 99 | 브리스톨 배드민턴 | |
| 101 | 브리스톨 101형 | |
| 105 | 브리스톨 불독 | RAF 주력 전투기, 다수 수출 |
| 107 | 브리스톨 불펍 | |
| 109 | 브리스톨 109형 | |
| 110A | 브리스톨 110A형 | |
| 118 | 브리스톨 118형 | Type 120 포함 |
| 123 | 브리스톨 123형 | Type 133 포함 |
| 130 | 브리스톨 봄베이 | 수송-중폭격기 |
| 138 | 브리스톨 138형 | 고고도 연구 단엽기, 1대 제작 |
| 142 | '브리튼 퍼스트' | 고속 여객기, 브리스톨 블레넘의 원형 |
| 143 | 브리스톨 143형 | Type 142와 병행 개발 (아퀼라 엔진) |
| 146 | 브리스톨 146형 | Type 147, 148 포함 |
| 142M, 149, 160 | 브리스톨 블레넘 | 경폭격기 |
4. 1. 4.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브리스톨사의 가장 중요한 항공기는 보파이터(Bristol Beaufighter)였다. 이 항공기는 2인승 다목적 항공기로, 장거리 전투기, 야간 전투기, 지상 공격기, 어뢰 폭격기 등 다양한 임무에 투입되었다.[1] 보파이터는 영국 공군(RAF)뿐만 아니라 다른 영연방 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보파이터는 보퍼트(Bristol Beaufort) 어뢰 폭격기를 기반으로 개발되었으며, 보퍼트는 다시 블레넘(Blenheim) 폭격기에서 파생된 기종이었다.[1]
전쟁 중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1940년에는 섀도 팩토리(Shadow factory) 계획에 따라 보파이터 생산 공장이 웨스턴슈퍼메어에 건설되었고, 엔진 생산을 위한 지하 공장이 윌트셔 코샴 근처 호손(Hawthorn)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호손의 옛 석재 채석장을 활용한 지하 공장 건설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고, 1945년 부지가 폐쇄될 때까지 실제 생산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9][10][1] 전쟁 기간 동안 회사의 본부는 브리스틀 클리프턴에 위치한 로열 웨스트 오브 잉글랜드 아카데미 건물에 있었다.
이 시기에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가 개발하거나 생산한 주요 항공기는 다음과 같다.
- 142M, 149, 160형 블레넘
- 149형 볼링브로크 (캐나다에서 면허 생산된 블레넘)
- 152형 보포트 (어뢰 폭격기)
- 156형 보파이터 (쌍발 엔진 전투기 및 어뢰 폭격기)
- 159형 (4발 엔진 중폭격기, 미제작)
- 163형 버킹엄 (중형 폭격기)
- 164형 브리건드
- 166형 벅마스터
4. 1. 5. 전후
전쟁이 끝나자 브리스톨은 헬리콥터 개척자인 라울 하프너의 지휘 아래 웨스턴 슈퍼 메어 공장에 별도의 헬리콥터 부서를 설립했다. 이 부서는 1960년에 웨스트랜드에 인수되었다.[1]다른 주요 전후 프로젝트로는 브리스톨 자동차가 있었다. 이 회사는 BMW의 전후 설계를 바탕으로 브리스톨 400 모델을 개발했으며,[1] 차량 생산은 브리스톨의 패치웨이 공장에서 이루어졌다.[1] 브리스톨 400을 위해 개발된 엔진은 쿠퍼, 프레이저 내시, AC 등 다른 제조사의 성공적인 자동차 모델에도 사용되었다. 또한, 이 엔진은 브리스톨 450 스포츠 프로토타입에 동력을 공급하여 1954년과 1955년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클래스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미국 딜러 S.H. 아놀트의 요청으로 미국 시장용 스포츠카인 '''아놀트-브리스톨'''을 제작했으며, 1958년 생산 중단까지 약 177대가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11][12] 1960년, 조지 화이트 경은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가 BAC와 합병되는 과정에서 자동차 부문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브리스톨 자동차 유한회사'로 분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조지 경은 1973년에 은퇴했고, 토니 크룩이 그의 지분을 인수하여 단독 소유주이자 전무 이사가 되었다.[13] 이 외에도 조립식 건물, 선박, 플라스틱 및 복합 재료 사업도 진행했으나, 이들은 개별적으로 매각되었다.
브리스톨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브라바존 위원회의 보고서에 영향을 받아 영국의 민간 항공기 부흥 노력에 참여했다.[1] 1949년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기 중 하나였던 브라바존 여객기 프로토타입이 첫 비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군 및 민간 운영자들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해 잘못된 방향으로 여겨졌고, 결국 1953년에 취소되었다.[1] 대신 브리스톨은 브리타니아로 알려진 대형 터보프롭 여객기 개발에 집중했다. 대서양 횡단 비행이 가능한 이 여객기는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며, 프리터와 함께 1950년대에 대량 생산되었다. 하지만 브리타니아는 개발 기간이 길어져 판매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총 82대만 제작되었다. BOAC는 1949년 7월 28일에 주문했고, 첫 비행은 1952년 8월 16일에 이루어졌으나 실제 운항은 1957년 2월 1일에야 시작되었다.[14] 브리스톨은 헬리콥터 개발에도 참여하여 벨베데르와 시카모어 모델이 대량 생산되었다.

또 다른 전후 활동 분야는 미사일 개발이었으며, 이는 블러드하운드 지대공 미사일 생산으로 이어졌다. 블러드하운드는 도입 당시 RAF의 유일한 장거리 수송 가능 지대공 미사일이었다.[1] 브리스톨 에어로 엔진 부서는 미사일 추진을 위한 다양한 로켓 모터와 램제트 엔진을 생산했다. 유도 무기 부서는 이후 MBDA의 일부가 되었다.[1]
1950년대 후반, 회사는 SST 프로젝트인 타입 223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는 훗날 콩코드 개발에 기여하게 된다. 마하 2.0 속도의 기체에 스테인리스 스틸 사용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타입 188 연구 항공기가 1950년대에 제작되었다. 이 항공기는 1962년에 첫 비행을 했으나, 이때 회사는 이미 BAC의 일부가 된 상태였다.
이러한 초음속 연구와 병행하여 타입 200(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의 경쟁 기종)과 그 파생형인 타입 201, 타입 205 등 여러 아음속 여객기 설계도 계획되었으나,[15] 실제로 제작되지는 않았다.
주요 전후 생산 기종은 다음과 같다.
- Type 167 브라바존: 초대형 여객기 프로토타입 (1대 제작)
- Type 170 프레이터 및 웨이페어러: 화물 및 여객 수송기
- 브리스톨 슈퍼프레이터: 프레이터 개량형
- Type 175 브리타니아: 장거리 터보프롭 여객기
- Type 188: 고속 연구 항공기
4. 2. 헬리콥터
브리스틀 에어플레인 컴퍼니의 '''헬리콥터 부서'''는 1944년, 헬리콥터 설계자 라울 하프너가 공수부대 실험 기지(AFEE)에서 그의 팀과 함께 브리스틀로 이동하면서 시작되었다.[18] 초기에는 필턴의 본사에서 운영되었으나, 1955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블레넘 폭격기를 생산했던 웨스턴-수퍼-메어의 올드믹슨 공장으로 이전했다.[1][25] 현재 이 부지에는 헬리콥터 박물관이 있다.하프너의 지휘 아래 개발된 첫 번째 주요 헬리콥터는 171형이었으며, 군용 명칭은 '시카모어'였다. 1949년, 두 번째 시제품의 시험 비행 중 나무 로터 블레이드 파손 사고가 발생하는 등[18] 초기 개발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개발에 성공하여 총 178대가 생산되었고 RAF를 비롯한 여러 국가의 군대에 판매되었다.[19]
시카모어 이후, 브리스틀 헬리콥터 부서는 탠덤 로터 방식의 민간 헬리콥터 개발을 시작했다. 그 결과 13인승 173형이 개발되어 1952년 필턴에서 첫 비행을 했다. 평가용으로 5대가 제작되었지만 상업적 주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20] 그러나 173형은 군용 헬리콥터인 192형 개발의 기반이 되었다. 192형은 RAF에서 벨베데레라는 이름으로 운용되었으며, 1958년 첫 비행 이후 총 26대가 생산되었다.[21]
하프너와 그의 팀은 더 큰 규모의 민간용 탠덤 로터 헬리콥터인 194형 개발도 진행했다.[22] 그러나 1960년, 영국 정부 주도의 항공 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브리스틀의 헬리콥터 부서는 웨스트랜드, 페어리, 손더스-로의 헬리콥터 사업 부문과 통합되어 웨스트랜드 헬리콥터가 설립되었다.[1][23][24] 합병 후 194형 개발은 계속되었으나 시장을 찾지 못하고 결국 중단되었다.[23][24]
4. 3. 엔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군수 주문이 급감하면서 회사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1920년, 회사는 청산 절차를 거쳐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Bristol Aeroplane Company, Ltd.eng)로 재탄생했다. 이 과정에서 공군성의 권유에 따라 파산한 코스모스 엔지니어링(Cosmos Engineering)의 항공기 엔진 부문을 인수하며 항공기 엔진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1] 코스모스 엔지니어링은 원래 브라질 스트레이커(Brazil-Straker)라는 자동차 회사에서 시작된 별도 법인이었다.코스모스 엔지니어링 인수 당시, 브리스톨은 1.5만파운드에 로이 페든(Roy Fedden)이 이끄는 설계팀과 일부 완성된 엔진, 설비 등을 확보했다.[1] 이미 브리스톨 항공기와 코스모스 엔진 사이에는 협력 관계가 있었는데, 코스모스가 개발한 코스모스 주피터 엔진은 1919년 5월 브리스톨 배저 시제기에 탑재되어 비행한 바 있었다. 이 주피터 엔진은 이후 브리스톨 주피터로 이름이 바뀌어 브리스톨 엔진 사업의 핵심이 되었다.
초기에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주피터 엔진은 곧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쟁 사이 기간 동안 브리스톨의 엔진 부문은 모회사인 항공기 제조 부문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공랭식 성형 엔진 시장을 주도했다.[1] 주피터와 그 후속 엔진들은 브리스톨 자사 항공기뿐만 아니라 다른 제조사의 수많은 항공기에도 동력을 제공했다.
1930년대에는 로이 페든의 주도로 슬리브 밸브 방식을 적용한 새로운 엔진 개발에 성공하여 브리스톨 페르세우스를 시작으로 하는 고성능 엔진 라인업을 구축했다. 이 슬리브 밸브 엔진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 항공기에 널리 사용되며 기술력을 입증했다.
전후에는 터보프롭 및 터보제트 엔진 개발에도 힘썼다. 1956년 엔진 부문은 '''브리스톨 에어로 엔진'''(Bristol Aero Engineseng)으로 사명을 변경했고, 1958년에는 암스트롱 시들리(Armstrong Siddeley)와 합병하여 '''브리스톨 시들리'''(Bristol Siddeleyeng)를 설립했다. 이는 영국 정부 주도의 항공 산업 합리화 정책의 일환이었다.[16] 브리스톨 시들리는 롤스로이스와 경쟁하는 영국의 주요 항공 엔진 제작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66년, 브리스톨 시들리는 롤스로이스에 인수되었다. 이로써 롤스로이스는 영국 내 유일한 대형 항공 엔진 회사가 되었다.[17] 인수 이후에도 롤스로이스 올림푸스(콩코드 여객기 엔진)나 롤스로이스 페가수스(해리어 전투기 엔진)와 같이 브리스톨 시절부터 개발된 엔진들은 롤스로이스 브랜드 하에서 계속 생산되고 발전했다. 브리스톨 엔진의 특징이었던 천문학 관련 명칭 전통은 롤스로이스의 강 이름 명명법으로 대체되었다.
4. 3. 1. 초기
'''브리티시 앤 콜로니얼 에어플레인 컴퍼니'''(British and Colonial Aeroplane Company, Ltd영어)는 1910년 2월, 조지 화이트 경과 그의 아들 스탠리, 그리고 형제 사무엘에 의해 설립되었다. 조지 화이트 경은 브리스톨 궤도차 및 마차 회사의 회장이었으며, 1909년 프랑스에서 윌버 라이트를 만난 후 항공 산업의 상업적 잠재력을 인식하고 회사를 세웠다.[1]당시 많은 항공 회사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달리, 브리티시 앤 콜로니얼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처음부터 탄탄한 자금력을 갖추고 있었다.[1] 조지 화이트 경은 항공 사업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기존의 브리스톨 트램웨이 컴퍼니와는 별개의 회사를 설립했으며, 초기 자본금 25000GBP는 조지 경과 그의 형제, 아들이 전액 출자했다. 회사의 첫 번째 사업장은 브리스톨 트램웨이 컴퍼니로부터 임대한 필튼의 옛 트램 차고 두 곳이었고, 핵심 인력 역시 트램웨이 컴퍼니에서 영입했는데, 수석 엔지니어 겸 공장 관리자인 조지 챌린저도 포함되었다.[2][1]
회사는 당시 영국 항공의 중심지였던 서리 브룩랜즈에 비행 학교를 설립하고 격납고를 임대했다. 또한 1910년 6월에는 육군성으로부터 2248acre의 토지를 임대받아 솔즈베리 평원의 라크힐에도 비행 학교를 세웠다. 1914년까지 영국에서 발급된 왕립 항공 클럽 비행 자격증 664개 중 308개가 이 회사의 학교에서 배출될 정도로 항공 교육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1]
회사의 초기 제조 사업은 프랑스 조디악 항공에서 제작한 가브리엘 부아쟁 설계의 복엽기를 면허 생산하고 개량하는 것이었다.[1] 조지 경은 1909년 파리 에어쇼에서 이 항공기의 우수한 제작 품질에 깊은 인상을 받아 1대를 구매하고, 5대의 추가 제작을 필튼 공장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브룩랜즈에서 진행된 비행 시험 결과, 이 기종은 만족스럽지 못한 익형 설계와 출력 부족 문제를 드러냈다. 브리스톨 측에서 새로운 날개를 장착했음에도 1910년 5월 28일 단 한 차례의 짧은 비행에 그쳤고, 결국 해당 기종에 대한 작업은 중단되었다. 조지 경은 '비행 보증' 조건을 근거로 조디악 측으로부터 15000FRF의 보상을 받았다.[4][1]
이 실패를 교훈 삼아 회사는 자체 항공기 설계를 결정했다.[1] 조지 챌린저는 당시 성공적이었던 앙리 파르망의 설계를 기반으로, 공개된 제원을 참고하여 일주일 남짓한 기간 만에 새로운 항공기 도면을 완성했다. 조지 경은 즉시 20대의 제작을 승인했다.[1] 첫 번째 완성기는 라크힐로 옮겨져 1910년 7월 20일, 모리스 에드몬즈의 조종으로 처녀 비행에 성공했으며, 성능은 만족스러웠다.[5]
브리스톨 박스카이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이 항공기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총 76대가 제작되었다. 이 항공기들은 회사의 비행 학교에서 훈련기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육군성과 여러 외국 정부에도 판매되었다.[1]
박스카이트는 당시 기준으로는 성공적이었지만, 추가적인 발전 가능성은 제한적이었다. 이에 회사는 소형 트랙터 구성의 복엽기와 단엽기라는 두 가지 새로운 설계를 진행했다. 두 기종 모두 1911년 올림피아 에어쇼에 전시되었으나 성공적인 비행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시기에 챌린저와 로우는 비커스의 신설 항공 부서로 이직했고, 그 자리는 헨던 비행장의 루이 블레리오 비행 학교 수석 강사였던 피에르 프리어와 이후 합류한 에릭 고든 잉글랜드가 메웠다. 1912년 1월에는 루마니아 출신 항공 기술자 앙리 코안다가 회사의 수석 설계자로 임명되었다.
1912년 초, 해군 항공기에 대한 데니스툰 버니의 아이디어를 연구하기 위해 "브리스톨-버니 수상기"(X-Department)라는 별도의 비밀 설계 사무소가 설립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프랭크 반웰이 설계 엔지니어로 채용되었으며, 그는 1914년 10월 코안다가 회사를 떠난 후 브리스톨의 수석 설계자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회사는 꾸준히 성장하여 브리스링턴의 전차 공장에 두 번째 공장을 설립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총 2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4. 3. 2. 슬리브 밸브
1930년대 로이 페든의 주도로 브리스톨 엔진 컴퍼니는 슬리브 밸브 방식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엔진 라인업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브리스톨 페르세우스를 시작으로 하는 슬리브 밸브 엔진 시리즈가 탄생했으며, 이 엔진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왕복 엔진 중 일부로 평가받았으며 1960년대까지 생산 및 판매되었다.
주요 슬리브 밸브 엔진은 다음과 같다.
- 페르세우스
- 아퀼라
- 토러스
- 허큘리스
- 센토러스
4. 3. 3. 터빈

- 브리스틀 테세우스: 열교환기를 갖춘 터보프롭
- 브리스틀 프로테우스: 2축 터보프롭
- 롤스로이스 올림푸스: 2축 터보제트
- 오르페우스: 단축 터보제트
- 브리스틀 오리온: 2축 터보프롭
- 롤스로이스 페가수스: 2축 추력 편향식 터보팬
- 브리스틀 시들리 큐물러스: BAC TSR-2용 APU
- 브리스틀 야누스: 브리스틀 173형 헬리콥터용 소형 자유 동력 터빈 엔진[27]
4. 4. 미사일

브리스톨 에어플레인 컴퍼니의 또 다른 전후 활동은 미사일 개발이었으며, 이는 블러드하운드 대공 미사일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블러드하운드는 도입 당시 RAF의 유일한 장거리 수송 가능한 지대공 미사일이었다.[1] 브리스톨 에어로 엔진 부서는 미사일 추진을 위한 다양한 로켓 모터와 램제트를 생산했다. 유도 무기 부서는 결국 마트라 BAe 다이내믹스 알레니아 (MBDA)의 일부가 되었다.[1]
브리스톨의 미사일 및 로켓 설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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