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고든 차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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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어 고든 차일드는 1892년 호주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후 고고학자로 활동하며 유럽 선사 시대를 연구했다. 그는 신석기 혁명과 도시 혁명 개념을 제시하고, 마르크스주의와 문화사적 고고학을 결합한 독창적인 이론을 펼쳤다. 그는 '유럽 문명의 새벽', '인간은 스스로를 만든다'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고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고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1956년 은퇴 후 호주로 돌아간 그는 1957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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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고든 차일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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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베어 고든 차일드 |
출생 | 1892년 4월 14일 |
출생지 |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
사망 | 1957년 10월 19일 |
사망지 | 블랙히스, 뉴사우스웨일스, 오스트레일리아 |
직업 | 고고학자 언어학자 |
학력 | |
모교 | 시드니 대학교 퀸스 칼리지, 옥스퍼드 |
업적 | |
주요 업적 | 스카라 브레 발굴 마르크스주의 고고학 이론 |
2. 생애
비어 고든 차일드는 1892년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드니 처치 오브 잉글랜드 그래머 스쿨(Sydney Church of England Grammar School)과 시드니 대학을 졸업했다. 1914년 졸업을 하고, 학사학위를 따면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포드 대학에 있는 퀸즈 칼리지에 입학을 하여 1917년 학사 학위를 딴다.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 정치인 존 스토리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그는 이후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수상이 되는 인물이었다. 1923년에 펴낸 《How Labour Governs》은 이 때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다. 1921년 스토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차일드는 정치계를 떠났고, 런던으로 이주해 왕립 인류학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유럽을 여행하였다.
1925년 펴낸 그의 저서 《유럽 문명의 여명》(The Dawn of European Civilisation)은 그의 인지도를 높여주었고, 그는 이어 다른 고고학에 관한 책을 저술하게 된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92-1917)
비어 고든 차일드는 1892년 4월 14일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영어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계 호주인 출신 중산층 부부인 스티븐 헨리 차일드(1844–1923) 목사와 해리엇 엘리자 차일드(결혼 전 성씨는 고든)(1853–1910)의 외아들이었다. 성공회 사제의 아들인 스티븐 차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1867년에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86년 11월 22일, 스티븐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어릴 때 호주로 이주한 영국인 해리엇 고든과 결혼했다.[1] 고든 차일드는 아버지의 웅장한 시골집인 시드니 서쪽 블루마운틴의 웬트워스 폴스, 뉴사우스웨일스에 있는 샬레 퐁텐넬에서 다섯 명의 이복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랐다.병약한 아이였던 고든 차일드는 몇 년 동안 집에서 교육을 받다가 노스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에서 사립학교 교육을 받았다. 1907년, 그는 시드니 성공회 그래머 스쿨에 다니기 시작하여 1910년에 시니어 입학 자격을 얻었다. 학교에서 그는 고대사, 프랑스어, 그리스어, 라틴어, 기하학, 대수학, 삼각법을 공부했으며 모든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외모와 운동 부족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했다. 1910년 7월, 그의 어머니가 사망했고, 그의 아버지는 곧 재혼했다. 차일드는 특히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와의 관계가 껄끄러웠으며, 종교와 정치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목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사회 보수주의자였고, 그의 아들은 무신론자이자 사회주의자였다.
차일드는 1911년 고전학 학위를 받기 위해 시드니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문헌 자료에 집중했지만, 처음으로 고고학을 접하게 된 것은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과 아서 에반스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대학교에서 그는 토론 클럽의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고, 사회주의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리고 변증법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 G. W. F. 헤겔의 저작을 읽었다. 대학교에서 그는 동급생이자 미래의 판사이자 정치가인 허버트 베르 에바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13년에 학업을 마친 차일드는 이듬해 프랜시스 앤더슨(Francis Anderson) 교수의 철학상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명예와 상을 받으며 졸업했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를 원하여 200파운드의 쿠퍼 대학원 장학금을 받아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의 퀸스 칼리지의 수업료를 지불할 수 있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직후인 1914년 8월 SS ''오르소바''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다. 퀸스 칼리지에서 차일드는 고전 고고학 디플로마를 취득한 후 리터래 휴마니오레스 학위를 취득할 예정이었지만, 전자는 완료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그는 존 비즐리와 아서 에반스에게서 배웠고, 후자는 차일드의 지도교수였다. 1915년 그는 첫 학술 논문인 "미니언 도자기의 제작 시기와 기원에 관하여"를 ''헬레닉 연구 저널''에 발표했고, 이듬해에는 "선사 그리스 시대의 인도-유럽인의 영향"이라는 B.Litt. 논문을 발표하여 언어학적 증거와 고고학적 증거를 결합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옥스퍼드에서 그는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보수적인 대학 당국을 반대했다. 좌익 개량주의자 옥스퍼드 대학교 페이비언 협회의 저명한 회원이 된 그는 1915년 페이비언 협회에서 분리되어 옥스퍼드 대학교 사회주의 협회로 이름을 바꿀 때 그곳에 있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룸메이트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라자니 파르메 더트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많은 영국 기반 사회주의자들은 정부의 징병에도 불구하고 군 입대를 거부했다. 그들은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 계급이 노동 계급을 희생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믿었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계급 투쟁이 자신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유일한 갈등이라고 생각했다. 더트는 싸움을 거부하여 투옥되었고, 차일드는 그와 다른 사회주의자 및 평화주의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석방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 차일드는 건강과 시력 문제로 인해 군에 입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반전 감정은 당국을 걱정시켰고, 정보 기관 MI5는 그에 대한 파일을 열었고, 그의 우편물이 가로채졌으며, 그는 감시를 받았다. 1917년 학사 학위를 땃다.
2. 2. 호주에서의 초기 경력 (1918-1921)
비어 고든 차일드는 1917년 8월 호주로 돌아왔다. 그는 사회주의 선동가로 알려져 보안 당국의 감시를 받았고 우편물이 감청되었다. 1918년 시드니 대학교 세인트 앤드류스 칼리지의 선임 튜터가 되었고, 시드니의 사회주의 및 징병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전쟁 회피를 위한 호주 민주 통제 연합이 주최한 제3차 주간 평화 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이 회의는 사회주의를 강조했으며, 보고서는 국제 전쟁을 종식시킬 최선의 희망은 "자본주의 체제의 폐지"라고 주장했다. 차일드의 참여 소식이 세인트 앤드류스 칼리지 학장에게 알려져, 학장은 많은 교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차일드를 사임하도록 강요했다.교직원들은 그를 고대사 튜터로 일하도록 했지만, 대학 총장 윌리엄 컬렌은 그가 학생들에게 사회주의를 전파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해고했다. 좌익 사회는 이를 차일드의 시민적 권리 침해로 규탄했으며, 중도 좌파 정치인 윌리엄 맥켈과 T.J. 스미스는 이 문제를 호주 의회에서 제기했다. 1918년 10월, 차일드는 퀸즐랜드 주 메리버러로 이주하여 메리버러 남자 문법 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직업을 얻었고, 그의 학생 중에는 P. R. 스티븐슨이 있었다. 여기에서도 그의 정치적 성향이 알려졌고, 지역 보수 단체와 ''메리버러 크로니클''로부터 반대 운동을 받았으며, 일부 학생들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그는 곧 사임했다.
차일드는 대학 당국에 의해 학문적 경력이 막힐 것을 깨닫고, 좌익 운동 내에서 직업을 찾았다. 1919년 8월, 그는 정치인 존 스토레이의 개인 비서이자 연설 작가가 되었다. 뉴사우스웨일스 주의회에서 발메인 교외를 대표하는 스토레이는 1920년 노동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주 총리가 되었다.

노동당 내에서 일하면서 차일드는 그들의 활동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을 얻었고, 더 깊이 관여할수록 노동당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 직위에 오면 사회주의적 이상을 배신하고 중도적 친자본주의적 입장을 취한다고 믿었다. 그는 당시 호주에서 금지되었던 급진 좌익 세계산업노동자에 가입했다. 1921년 스토레이는 차일드를 런던으로 보내 뉴사우스웨일스의 상황을 영국 언론에 알리도록 했지만, 12월에 스토레이가 사망했고, 이어진 뉴사우스웨일스 선거에서 조지 풀러의 총리 아래 국민당 정부가 복귀했다. 풀러는 차일드의 직책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922년 초에 그의 고용을 종료했다.
2. 3. 런던과 초기 저술 (1922-1926)
비어 고든 차일드는 1892년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시드니 처치 오브 잉글랜드 그래머 스쿨(Sydney Church of England Grammar School)과 시드니 대학을 졸업하고 1914년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포드 대학의 퀸즈 칼리지에서 1917년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수상이 되는 존 스토리의 개인 비서를 지냈고, 이때의 경험은 1923년에 펴낸 《How Labour Governs》의 토대가 되었다. 1921년 스토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차일드는 정치계를 떠나 런던으로 이주해 왕립 인류학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유럽을 여행하였다.1925년 출간된 《유럽 문명의 여명》(The Dawn of European Civilisation)은 유럽 전역의 선사 시대를 종합한 중요한 저작으로, 문화-역사 고고학 발전에 기여했다. 차일드는 이 책이 "고고학적 유물에서 정치, 군사, 역사 대신, 행위자로서의 정치인 대신 문화를, 전투 대신 이주를 사용하여 문맹 대용물로 증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 1926년에는 후속작 ''아리아인: 인도-유럽 기원의 연구''를 출판하여 문명이 근동에서 북쪽과 서쪽으로 유럽으로 확산되었다는 이론을 탐구했다.
차일드는 확산주의의 온건한 버전을 받아들여, 대부분의 문화적 특성이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퍼지지만, 동일한 특성이 다른 장소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런던에 머물며 대영 박물관과 왕립 인류학 연구소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런던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1917 클럽에서 좌파들과 교류했다. 영국 공산당(CPGB) 당원들과 친분을 맺고 ''Labour Monthly''에 기고했지만, 공개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1922년 빈으로 가서 부코비나 스키페니츠에서 출토된 채색된 신석기 시대 도자기에 관한 미발표 자료를 조사하여 자연사 박물관 선사 시대 부서에 보관하고, 그 연구 결과를 1923년 ''왕립 인류학 연구소 저널''에 발표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박물관을 방문하고, 1922년 ''Man''에 기고하여 영국의 고고학자들에게 알렸다.
1922년 런던으로 돌아온 차일드는 존 호프 심슨과 프랭크 그레이를 포함한 세 명의 국회의원의 개인 비서가 되었고, 이들은 모두 중도 좌파 자유당의 당원이었다. 출판사 Kegan Paul, Trench, Trübner & Co.의 번역가로 일했고, 가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선사 시대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1923년 런던 노동 회사는 차일드의 첫 번째 저서 ''노동당은 어떻게 통치하는가''를 출판했다. 이 책은 호주 노동당과 호주 노동 운동과의 관계를 분석하며, 당선된 정치인들이 개인적인 안락함을 위해 사회주의적 이상을 버렸다고 주장했다.
1923년 5월 로잔, 베른, 취리히의 박물관을 방문하여 선사 시대 유물 컬렉션을 연구했으며, 그해 왕립 인류학 연구소의 회원이 되었다. 1925년 연구소의 사서가 되어 유럽 전역의 학자들과의 관계를 다지기 시작했다. 측량국의 고고학 담당관인 O. G. S. 크로퍼드와 매우 친해지면서 크로퍼드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전환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2. 4. 애버크롬비 고고학 교수 (1927-1946)
비어 고든 차일드는 1927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애버크롬비 남작의 유증으로 설립된 애버크롬비 고고학 교수직을 맡아 1946년까지 재직했다. 35세의 차일드는 스코틀랜드에서 교직에 있는 유일한 학계 선사학자였으나, 많은 스코틀랜드 고고학자들은 그를 스코틀랜드 선사 시대 전문 분야가 없는 외부인으로 여겨 싫어했다.차일드는 강의보다 연구에 집중했으며, 학생들에게 친절했지만 많은 청중 앞에서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에든버러 선사학자 협회를 설립하고, 실험 고고학의 초기 지지자로서 학생들을 자신의 실험에 참여시켰다. 1937년에는 이 방법을 사용하여 북부 영국에서 여러 철기 시대 요새에서 나타나는 유리화 과정을 조사했다.
차일드는 유럽 대륙에서 여러 컨퍼런스에 참석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1935년에는 소련을 방문하여 사회주의 국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소련 고고학의 사회적 역할에 특히 관심이 있었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 소련 지지자가 되었다. 그의 사회주의적 신념은 유럽 파시즘에 대한 초기의 비난으로 이어졌으며, 선사 고고학을 나치가 아리아 인종 유산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찬양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에 분노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파시스트 세력과 싸우기로 한 영국 정부의 결정을 지지했다.
차일드는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오크니 제도의 스카라 브레이를 발굴하여 잘 보존된 신석기 시대 마을을 발견했다.

1931년 그는 발굴 결과를 ''스카라 브레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지만, 해석 오류로 인해 이 유적지를 철기 시대로 잘못 추정했다. 1932년에는 버윅셔 해안의 언스 휴에서 두 개의 철기 시대 언덕 요새를 발굴했고, 1935년 6월에는 북아일랜드 라리반에서 곶 요새를 발굴했다.
차일드는 고고학에 관한 책을 계속해서 썼는데, 1928년에 출간된 《가장 오래된 근동》은 메소포타미아와 인도의 정보를 모아 유럽으로의 농업과 기타 기술의 확산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설정했다. 《선사 시대의 도나우 강》(1929)에서는 고고학적 문화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여 영국 고고학의 이론적 접근 방식을 혁신했다.
《청동기 시대》(1930)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수용하여 사회가 어떻게 기능하고 변화하는지 이해하려 했다. 1933년 아시아 여행 후 출판한 《가장 오래된 근동에 대한 새로운 조명》(1935)에는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영향을 받은 자신의 생각을 결론에 적용했다.
《스코틀랜드의 선사 시대》(1935)를 출판한 후, 차일드는 《인간은 스스로를 만든다》(1936)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역사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의 영향을 받아 인간 사회가 일련의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혁명을 거쳐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제도의 선사 시대 공동체》(1940)를 썼고, 전쟁의 결과에 대한 비관론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만든다》의 속편인 《역사에서 일어난 일》(1942)을 제작했다. 이어서 《진보와 고고학》(1944)과 청년 공산주의 동맹을 위해 쓰여진 명백한 마르크스주의 텍스트인 《도구의 이야기》(1944)를 출판했다.
2. 5. 런던 고고학 연구소 (1946-1956)
비어 고든 차일드는 1946년 에든버러를 떠나 런던 고고학 연구소(IOA)의 소장 겸 유럽 선사 시대 교수가 되었다.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그는 그 직책을 얻는 데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햄스테드에 거주했다.리젠트 파크 이너 서클의 세인트 존 로지에 위치한 IOA는 1937년 모티머 휠러에 의해 설립되었지만, 1946년까지는 주로 자원 봉사 강사에게 의존했다. 차일드는 휠러와 성격 차이로 인해 긴장 관계를 겪었다. 휠러는 외향적이고 효율적인 행정가였던 반면, 차일드는 행정 능력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했다. 차일드는 연구소 학생들 사이에서 친절하고 괴짜로 여겨져 인기가 많았으며, 그의 강의는 형편없다고 여겨졌지만, 튜토리얼과 세미나는 학생들과 더 많은 시간을 교류하여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다. 소장으로서 발굴 의무는 없었지만, 쿼이니스 (1951)와 메이스 호(1954–55)의 오크니 신석기 시대 매장 무덤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1949년, 차일드는 크로포드와 함께 런던 골동품 협회의 특별 회원직을 사임했는데, 이는 제임스 만을 협회 회장으로 선출하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1952년에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 창간한 정기 간행물 ''과거와 현재''의 편집 위원회에 합류했다. 1950년대 초, 현대 분기—나중에 ''마르크스주의 분기''—의 위원이 되었고, ''노동 월간''에 기고했지만,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소련 지도부에 대한 믿음을 버렸지만,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믿음은 버리지 않았고, 소련과의 문화 관계 협회에 참여하여 협회의 국립 역사 및 고고학 부문 회장으로 활동했다.
1956년 4월, 고고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골동품 협회의 금메달을 수상했다. 미국 국무부는 그의 마르크스주의 신념 때문에 그의 미국 입국을 금지했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동안, ''역사'' (1947), ''선사 시대 이주'' (1950) 등의 책을 쓰고 출판했다. 1946년 ''남서 고고학 저널''에 "고고학과 인류학"이라는 논문을 발표, 고고학과 인류학 분야가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6. 은퇴와 죽음 (1956-1957)
1956년 중반, 차일드는 IOA(고고학 연구소) 소장직에서 1년 일찍 은퇴했다. 1950년대 유럽 고고학은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전문화가 심화되었고, 차일드가 특기로 했던 종합적인 연구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 해, 연구소는 고든 스퀘어로 이전했고, 차일드는 그의 후임자인 W.F. 그리메스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해주고 싶어 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사시대 학회 회보''는 그의 소장 마지막 날에 전 세계의 친구들과 동료들의 기고를 담은 ''헌정 논문집''을 발간했는데, 이는 차일드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은퇴 후, 그는 많은 친구들에게 호주로 돌아가 친척들을 방문하고 자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늙고, 노망이 들고, 사회의 짐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의심했다. 이후의 논평가들은 그의 자살 욕구의 주요 원인이 헝가리 혁명과 니키타 흐루쇼프의 요제프 스탈린 비판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 상실이라고 주장했지만, 브루스 트리거는 차일드가 소련의 외교 정책을 비판했지만, 국가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의어로 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설명을 일축했다.그의 일을 정리하면서, 차일드는 그의 서고와 모든 유산을 연구소에 기증했다. 1957년 2월 지브롤터와 스페인의 고고학 유적지를 방문하는 휴가를 보낸 후, 그는 호주로 항해하여 65번째 생일에 시드니에 도착했다. 한때 그를 채용하지 않았던 시드니 대학교는 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 그는 6개월 동안 전국을 여행하며 가족과 옛 친구들을 방문했지만, 호주 사회에 대해 감명을 받지 못했는데, 호주 사회가 반동적이고, 점점 교외화되고, 교육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주 원주민에 대한 학문적 인종차별을 비판하면서 이 문제와 다른 주제에 대해 고고학 및 좌파 단체에 강연을 했다.
많은 친구들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쓰면서, 그는 1968년까지 열어보지 말라는 요청과 함께 그리메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서 그는 노년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생을 마감할 의사를 밝히면서 "인생은 행복하고 강할 때 가장 잘 끝난다"라고 언급했다. 1957년 10월 19일, 차일드는 자신이 자란 블루 마운틴스 지역의 블랙히스에 있는 고벳츠 리프 지역으로 갔다. 그의 모자, 안경, 나침반, 파이프, 그리고 매킨토시 레인코트를 절벽에 남겨둔 채, 그는 300m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검시관은 그의 죽음을 사고로 판결했지만, 그리메스에게 보낸 그의 편지가 1980년대에 출판되면서 그의 죽음은 자살로 인정되었다. 그의 유해는 노던 교외 화장터에서 화장되었고, 그의 이름은 화장터 정원에 있는 작은 가족 묘비에 추가되었다. 그의 사망 이후, 고고학계에서는 "전례 없는" 수준의 찬사와 추모가 이어졌으며, 루스 트리넘에 따르면, 이는 모두 유럽의 "가장 위대한 선사학자이자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3. 연구 내용 및 업적
비어 고든 차일드의 사고는 1세기 이상 과학적 학문으로 자리 잡은 서유럽 고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소련 고고학과 미국 인류학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철학과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고고학의 사회적 가치를 정당화하는 데 다른 고고학자들보다 더 관심이 많았다. 그의 신념은 독단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했으며, 그의 이론적 접근은 마르크스주의, 전파주의, 기능주의를 혼합한 것이었다.
; 주요 개념
비어 고든 차일드는 마르크스주의[4][5], 전파주의, 기능주의를 혼합한 이론적 접근을 가졌다. 그는 19세기에 지배적이었던 진화 고고학에 비판적이었으며, 유물을 만든 인간보다 유물에 더 큰 비중을 둔다고 믿었다. 차일드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창의적이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변화를 내부 발전이나 문화 진화보다는 전파와 이동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차일드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이 개발한 삼시대 구분법을 따랐지만, 세계의 많은 사회가 여전히 석기 시대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석기 시대를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세분하는 데 경제적 기준을 사용했으며, 중석기 시대의 개념은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과거 사회를 "야만", "미개", "문명"의 틀로 구분했다.
차일드는 신석기 혁명[3](식량 생산 혁명)과 도시 혁명을 제안했다. 그는 사회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광범위한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했다. 신석기 혁명은 인간이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하여 식량 공급과 인구 증가를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된 시기였다. 도시 혁명은 청동 야금술의 발달에 의해 야기되었으며, 사회적 분화와 억압으로 이어졌다.
; 학문적 영향
비어 고든 차일드는 유럽 선사 시대 연구를 전문으로 했으며, 신석기 혁명[3](식량 생산 혁명), 도시 혁명을 제안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경제 이론과 문화사적 고고학의 시점을 결합하여 이단시된 의 제창자이기도 하다[4][5]。
차일드는 고고학·선사학 분야에서 많은 선구적인 책을 썼으며, 특히 『문명의 기원』(원제: ''Man makes himself'', 1936년) 및 『역사의 새벽』(원제: ''What Happened in History'', 1942년)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개설서는 일본의 고고학 방법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동료인 스튜어트 피고트는 칠데를 "영국 최고의, 아마도 세계 최고의 선사학자"라고 칭송했다. 고고학자 랜달 H. 맥과이어는 나중에 그를 "20세기의 가장 유명하고 많이 인용된 고고학자"라고 묘사했고, 이 생각은 브루스 트리거가 되풀이했으며, 반면 바바라 맥네어른은 그를 "이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칭했다. 고고학자 앤드루 셔랫은 칠데가 고고학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묘사했다.
셔랫은 또한 "칠데의 저술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방대했다"고 언급했다. 그의 경력 동안 칠데는 20권이 넘는 책과 약 240편의 학술 논문을 출판했다.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은 그의 책을 "단순하고 잘 쓰인 서술"이라고 묘사했는데, 이것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고고학의 정전"이 되었다. 1956년까지 그는 중국어, 체코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힌디어, 헝가리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및 터키어와 같은 언어로 그의 책이 출판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이 번역된 호주 작가로 인용되었다. 고고학자 데이비드 루이스-윌리엄스와 데이비드 피어스는 칠데를 역사상 "아마도 가장 많은 글이 쓰여진" 고고학자로 여겼으며, 2005년에도 그의 책이 이 분야의 사람들에게 "필독서"라고 논평했다. 2024년 현재, 시드니 대학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베어 고든 차일드 센터를 설립했다.[2]
"위대한 종합가"로 알려진 칠데는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지역 유적지와 연대기에 집중하던 시기에 유럽과 근동의 선사 시대를 종합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사후, 이 틀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의 발견 이후 크게 수정되었고, 그의 해석은 "대부분 거부"되었으며,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유럽에 대한 그의 많은 결론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칠데 자신은 고고학에 대한 자신의 주요 기여가 해석적 틀에 있다고 믿었고, 앨리슨 라베츠와 피터 개더콜이 이 분석을 지지했다. 셔랫에 따르면 "그의 해석에서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가 묘사한 자료의 패턴을 인식하는 데 관련된 더 상세한 수준의 글쓰기이다. 바로 이러한 패턴이 그의 설명이 부적절하다고 인식되더라도 유럽 선사 시대의 고전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칠데의 이론적 연구는 그의 생애 동안 대부분 무시되었고, 그의 사후 수십 년 동안 잊혀졌지만,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부활할 것이다.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는데, 20세기 후반 내내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핵심 이론적 흐름으로 남아 있었다.
칠데는 세계적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유럽 선사 시대에 대한 그의 연구는 미국에서 잘 이해되지 못했고, 그의 연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그가 줄리안 스튜어드 및 레슬리 화이트와 함께 신진화론의 창시자이자 근동 전문가라는 평판을 잘못 얻었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그들보다 "더 미묘하고 미묘했다". 스튜어드는 자신의 저술에서 칠데를 일선 진화론자로 반복적으로 잘못 묘사했는데, 아마도 자신의 "다선형" 진화론적 접근법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과 구별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무시와 오해와는 대조적으로, 트리거는 칠데의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사후에 가장 많이 발전시킨 사람이 미국의 고고학자 로버트 맥코믹 아담스 주니어라고 믿었다. 칠데는 또한 1940년대에 보아스의 특수주의가 이 분야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유물론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아이디어를 자신의 연구에 다시 도입하려는 미국의 고고학자 및 인류학자들의 소규모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망한 후, 차일드의 고고학적 영향력을 검토하는 여러 논문이 출판되었다. 1980년에는 브루스 트리거의 ''고든 차일드: 고고학의 혁명''이 출간되어 차일드의 고고학적 사고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을 연구했다. 같은 해, 바바라 맥네어의 ''V. 고든 차일드의 방법과 이론''이 출판되어 고고학에 대한 그의 방법론적 및 이론적 접근 방식을 검토했다. 이듬해, 샐리 그린은 ''선사학자: V. 고든 차일드의 전기''를 출판하여 그를 "20세기의 유럽 선사 시대의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학자"라고 묘사했다. 피터 개더콜은 트리거, 맥네어, 그린의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트링햄은 이 모든 것을 "차일드를 더 잘 알자"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여겼다.
1990년 9월, 퀸즐랜드 대학교의 호주 연구 센터는 브리즈번에서 차일드의 탄생 100주년 기념 회의를 조직하여 그의 학문적 업적과 사회주의적 업적을 모두 검토하는 발표를 진행했다. 1992년 5월,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 회의가 그가 이전에 이끌었던 두 조직인 런던의 UCL 고고학 연구소와 선사 시대 학회가 공동 후원하여 열렸다. 회의 논문집은 연구소 소장인 데이비드 R. 해리스가 편집한 1994년 서적 ''V. 고든 차일드의 고고학: 현대적 관점''으로 출판되었다. 해리스는 이 책이 "차일드의 사고의 역동성, 그의 학문의 폭과 깊이, 그리고 고고학의 현대적 문제에 대한 그의 연구의 지속적인 관련성을 보여주기"를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 1995년에는 또 다른 회의 자료집이 출판되었다. ''차일드와 호주: 고고학, 정치, 그리고 아이디어''라는 제목으로, 피터 개더콜, T. H. 어빙, 그리고 그레고리 멜리우시가 편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차일드를 주제로 한 논문들이 더 출판되었으며, 그의 개인적인 서신 및 마지막 안식처와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 대중 문화 속에서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서는 인디아나 존스가 고든 차일드에게 영향을 받은 설정으로 등장한다.
3. 1. 주요 개념
비어 고든 차일드는 마르크스주의[4][5], 전파주의, 기능주의를 혼합한 이론적 접근을 가졌다. 그는 19세기에 지배적이었던 진화 고고학에 비판적이었으며, 유물을 만든 인간보다 유물에 더 큰 비중을 둔다고 믿었다. 차일드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창의적이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변화를 내부 발전이나 문화 진화보다는 전파와 이동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차일드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이 개발한 삼시대 구분법을 따랐지만, 세계의 많은 사회가 여전히 석기 시대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석기 시대를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세분하는 데 경제적 기준을 사용했으며, 중석기 시대의 개념은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과거 사회를 "야만", "미개", "문명"의 틀로 구분했다.
초기 경력에서 차일드는 문화사 고고학의 옹호자였으며, 문화 개념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독일의 구스타프 코시나로부터 "문화" 개념을 채택했지만, 코시나의 인종차별적 함의는 인식하지 못했다. 차일드는 "문화"를 주어진 지역에서 반복되는 물질 문화의 집합으로 정의했으며, 비인종적인 용어로 사용했다. 그는 유대인을 사회 문화적 집단으로 간주하며 나치의 고고학 사용을 비판했다. 1935년, 그는 물질 문화의 적응 가능성을 강조하며 구조 기능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말년에 차일드는 문화사 고고학에 싫증을 느꼈고, "문화" 개념의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1950년대에 그는 문화사 고고학이 선사 시대 연구에서 갖는 역할을 비판했다.
차일드는 서구에서 자신의 저작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사용한 최초의 고고학자로 여겨지며, 마르크스주의 고고학자로 평가받는다. 마르크스주의 고고학은 1929년 소련에서 블라디슬라프 I. 라브도니카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차일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저작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물질적인 것이 사상보다 중요하며, 사회적 조건이 생산 양식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차일드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동일시했지만, 동료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사회 정치적 이론을 독단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개별적 해석"으로 간주되었으며, "창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로 불렸다. 에릭 홉스봄은 차일드를 "가장 독창적인 영국 마르크스주의 작가"라고 묘사했다. 냉전 상황에서 차일드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을 독자들에게 더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차일드는 소련 고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데이터 분석 전에 결론을 내리는 소련 정부의 방식을 비판했다. 그는 또한 소련 고고학에서 유형학에 대한 부주의한 접근 방식을 비판했다. 온건한 확산론자로서 차일드는 니콜라스 마르의 이론에 기반한 소련 고고학의 "마르리스트" 경향을 비판했다. 그는 소련의 고고학 및 문화 유산 관리 시스템을 칭찬했지만, 자살 직전 소련 고고학계에 편지를 보내 그들의 방법론에 대해 "극도로 실망했다"고 말했다.
조지 데르웬트 톰슨과 닐 포크너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차일드의 고고학적 저작이 계급 투쟁을 고려하지 않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차일드는 변증법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났다. 그는 또한 인류의 진보가 순수한 공산주의로 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차일드는 신석기 혁명[3](식량 생산 혁명)과 도시 혁명을 제안했다. 그는 사회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광범위한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했다. 신석기 혁명은 인간이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하여 식량 공급과 인구 증가를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된 시기였다. 도시 혁명은 청동 야금술의 발달에 의해 야기되었으며, 사회적 분화와 억압으로 이어졌다.
3. 2. 학문적 영향
비어 고든 차일드는 그가 사망한 후 수십 년 동안 발전한 앵글로-아메리카 고고학의 두 주요 이론적 흐름인 과정고고학과 탈과정고고학에 기여했다. 과정고고학은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하여 고고학이 인류학의 한 분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조하고, 사회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의 발견을 추구했으며, 고고학이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탈과정고고학은 1970년대 후반 과정고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하여 고고학이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모든 해석의 주관성을 강조했다.과정고고학자인 콜린 렌프루는 차일드를 "선사 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주제의 발전"으로 인해 "과정적 사고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생각은 포크너에 의해 반복되었다. 트리거는 차일드의 연구가 사회 발달에서 변화의 역할을 강조하고 과거에 대한 엄격한 유물론적 관점을 고수함으로써 두 가지 면에서 과정적 사고를 예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가지 모두 차일드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미국 과정고고학자들은 차일드의 연구를 무시하고 그를 사회 행동의 일반화된 법칙을 찾는 데 무관한 역사적 특수주의자로 여겼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따라 차일드는 그러한 일반화된 법칙이 존재한다고 동의하지 않았으며, 행동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요인에 의해 조건화된다고 믿었다. 피터 유코는 차일드가 고고학적 해석의 주관성을 받아들였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는 고고학적 해석이 객관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정고고학자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 결과, 트리거는 차일드를 "전형적인 탈과정고고학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동료인 스튜어트 피고트는 칠데를 "영국 최고의, 아마도 세계 최고의 선사학자"라고 칭송했다. 고고학자 랜달 H. 맥과이어는 나중에 그를 "20세기의 가장 유명하고 많이 인용된 고고학자"라고 묘사했고, 이 생각은 브루스 트리거가 되풀이했으며, 반면 바바라 맥네어른은 그를 "이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칭했다. 고고학자 앤드루 셔랫은 칠데가 고고학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묘사했다.
셔랫은 또한 "칠데의 저술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방대했다"고 언급했다. 그의 경력 동안 칠데는 20권이 넘는 책과 약 240편의 학술 논문을 출판했다.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은 그의 책을 "단순하고 잘 쓰인 서술"이라고 묘사했는데, 이것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고고학의 정전"이 되었다. 1956년까지 그는 중국어, 체코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힌디어, 헝가리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및 터키어와 같은 언어로 그의 책이 출판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이 번역된 호주 작가로 인용되었다. 고고학자 데이비드 루이스-윌리엄스와 데이비드 피어스는 칠데를 역사상 "아마도 가장 많은 글이 쓰여진" 고고학자로 여겼으며, 2005년에도 그의 책이 이 분야의 사람들에게 "필독서"라고 논평했다. 2024년 현재, 시드니 대학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베어 고든 차일드 센터를 설립했다.[2]
"위대한 종합가"로 알려진 칠데는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지역 유적지와 연대기에 집중하던 시기에 유럽과 근동의 선사 시대를 종합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사후, 이 틀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의 발견 이후 크게 수정되었고, 그의 해석은 "대부분 거부"되었으며,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유럽에 대한 그의 많은 결론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칠데 자신은 고고학에 대한 자신의 주요 기여가 해석적 틀에 있다고 믿었고, 앨리슨 라베츠와 피터 개더콜이 이 분석을 지지했다. 셔랫에 따르면 "그의 해석에서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가 묘사한 자료의 패턴을 인식하는 데 관련된 더 상세한 수준의 글쓰기이다. 바로 이러한 패턴이 그의 설명이 부적절하다고 인식되더라도 유럽 선사 시대의 고전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칠데의 이론적 연구는 그의 생애 동안 대부분 무시되었고, 그의 사후 수십 년 동안 잊혀졌지만,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부활할 것이다.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는데, 20세기 후반 내내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핵심 이론적 흐름으로 남아 있었다.
칠데는 세계적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유럽 선사 시대에 대한 그의 연구는 미국에서 잘 이해되지 못했고, 그의 연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그가 줄리안 스튜어드 및 레슬리 화이트와 함께 신진화론의 창시자이자 근동 전문가라는 평판을 잘못 얻었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그들보다 "더 미묘하고 미묘했다". 스튜어드는 자신의 저술에서 칠데를 일선 진화론자로 반복적으로 잘못 묘사했는데, 아마도 자신의 "다선형" 진화론적 접근법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과 구별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무시와 오해와는 대조적으로, 트리거는 칠데의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사후에 가장 많이 발전시킨 사람이 미국의 고고학자 로버트 맥코믹 아담스 주니어라고 믿었다. 칠데는 또한 1940년대에 보아스의 특수주의가 이 분야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유물론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아이디어를 자신의 연구에 다시 도입하려는 미국의 고고학자 및 인류학자들의 소규모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망한 후, 차일드의 고고학적 영향력을 검토하는 여러 논문이 출판되었다. 1980년에는 브루스 트리거의 ''고든 차일드: 고고학의 혁명''이 출간되어 차일드의 고고학적 사고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을 연구했다. 같은 해, 바바라 맥네어의 ''V. 고든 차일드의 방법과 이론''이 출판되어 고고학에 대한 그의 방법론적 및 이론적 접근 방식을 검토했다. 이듬해, 샐리 그린은 ''선사학자: V. 고든 차일드의 전기''를 출판하여 그를 "20세기의 유럽 선사 시대의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학자"라고 묘사했다. 피터 개더콜은 트리거, 맥네어, 그린의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트링햄은 이 모든 것을 "차일드를 더 잘 알자"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여겼다.
1990년 9월, 퀸즐랜드 대학교의 호주 연구 센터는 브리즈번에서 차일드의 탄생 100주년 기념 회의를 조직하여 그의 학문적 업적과 사회주의적 업적을 모두 검토하는 발표를 진행했다. 1992년 5월,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 회의가 그가 이전에 이끌었던 두 조직인 런던의 UCL 고고학 연구소와 선사 시대 학회가 공동 후원하여 열렸다. 회의 논문집은 연구소 소장인 데이비드 R. 해리스가 편집한 1994년 서적 ''V. 고든 차일드의 고고학: 현대적 관점''으로 출판되었다. 해리스는 이 책이 "차일드의 사고의 역동성, 그의 학문의 폭과 깊이, 그리고 고고학의 현대적 문제에 대한 그의 연구의 지속적인 관련성을 보여주기"를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 1995년에는 또 다른 회의 자료집이 출판되었다. ''차일드와 호주: 고고학, 정치, 그리고 아이디어''라는 제목으로, 피터 개더콜, T. H. 어빙, 그리고 그레고리 멜리우시가 편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차일드를 주제로 한 논문들이 더 출판되었으며, 그의 개인적인 서신 및 마지막 안식처와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유럽 선사 시대 연구를 전문으로 했으며, 신석기 혁명[3](식량 생산 혁명), 도시 혁명을 제안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경제 이론과 문화사적 고고학의 시점을 결합하여 이단시된 의 제창자이기도 하다[4][5]。
차일드는 고고학·선사학 분야에서 많은 선구적인 책을 썼으며, 특히 『문명의 기원』(원제: ''Man makes himself'', 1936년) 및 『역사의 새벽』(원제: ''What Happened in History'', 1942년)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개설서는 일본의 고고학 방법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중 문화 속에서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서는 인디아나 존스가 고든 차일드에게 영향을 받은 설정으로 등장한다.
4. 저서
비어 고든 차일드는 다양한 주제에 걸쳐 광범위한 저술 활동을 했다. 1923년 출간된 ''노동은 어떻게 통치하는가''(How Labour Governs)는 호주 노동자 대표에 대한 연구이다. 1925년에는 ''유럽 문명의 새벽''(The Dawn of European Civilization)을 출간했다. 1926년에는 ''아리아인: 인도유럽어족 기원 연구''(The Aryans: A Study of Indo-European Origins)를 출간했다.
차일드는 선사 시대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29년 ''선사 시대의 다뉴브''(The Danube in Prehistory)를 출간했고, 1930년에는 ''청동기 시대''(The Bronze Age)를 출간했다. 1931년에는 ''스카라 브레이: 오크니의 픽트족 마을''(Skara Brae: A Pictish Village in Orkney)을 통해 스카라 브레이 유적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1935년 ''스코틀랜드의 선사 시대''(The Prehistory of Scotland)를 출간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인간은 스스로를 만든다''(Man Makes Himself)는 1936년에 출간되었고, 1941년과 1951년에 약간 수정되어 재출간되었다. 1942년에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What Happened in History)을 출간했다. 1940년에는 ''영국 제도의 선사 시대 공동체''(Prehistoric Communities of the British Isles)를 출간했고, 1947년에 제2판이 나왔다.
제목 | 연도 | 출판사 |
---|---|---|
가장 오래된 동방(The Most Ancient East) | 1922, 1928 | Kegan Paul (런던) |
노동은 어떻게 통치하는가: 호주 노동자 대표 연구(How Labour Governs: A Study of Workers' Representation in Australia) | 1923 | The Labour Publishing Company (런던) |
유럽 문명의 새벽(The Dawn of European Civilization) | 1925 | Kegan Paul (런던) |
아리아인: 인도유럽어족 기원 연구(The Aryans: A Study of Indo-European Origins) | 1926 | Kegan Paul (런던) |
가장 오래된 동방: 유럽 선사 시대의 오리엔탈 서곡(The Most Ancient East: The Oriental Prelude to European Prehistory) | 1929 | Kegan Paul (런던) |
선사 시대의 다뉴브(The Danube in Prehistory) | 1929 | Oxford University Press (옥스퍼드) |
청동기 시대(The Bronze Age) | 1930 | Cambridge University Press (케임브리지) |
스카라 브레이: 오크니의 픽트족 마을(Skara Brae: A Pictish Village in Orkney) | 1931 | Kegan Paul (런던) |
북유럽의 숲 문화: 진화와 확산 연구(The Forest Cultures of Northern Europe: A Study in Evolution and Diffusion) | 1931 |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런던) |
영국 신석기 시대 도기의 대륙적 친연성(The Continental Affinities of British Neolithic Pottery) | 1932 |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런던) |
스카라 브레이 오크니. 공식 가이드(Skara Brae Orkney. Official Guide) | 1933 [https://archive.org/details/skarabaeofficialguidethirdedition1950images 1950년 제2판] | His Majesty's Stationery Office (에든버러) |
가장 오래된 동방에 대한 새로운 조명: 유럽 선사 시대의 오리엔탈 서곡(New Light on the Most Ancient East: The Oriental Prelude to European Prehistory) | 1934 | Kegal Paul (런던) |
스코틀랜드의 선사 시대(The Prehistory of Scotland) | 1935 | Kegan Paul (런던) |
인간은 스스로를 만든다(Man Makes Himself) | 1936, 약간 수정 1941, 1951 | Watts (런던) |
영국 제도의 선사 시대 공동체(Prehistoric Communities of the British Isles) | 1940, 1947년 제2판 | Chambers (런던) |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What Happened in History) | 1942 | Penguin Books (Harmondsworth) |
도구의 이야기(The Story of Tools) | 1944 | Cobbett (런던) |
진보와 고고학(Progress and Archaeology) | 1944 | Watts (런던) |
스코틀랜드 이전의 스코틀랜드인, 1944년 린드 강좌(Scotland before the Scots, being the Rhind lectures for 1944) | 1946 | Methuen (런던) |
역사(History) | 1947 | Cobbett (런던) |
지식의 사회적 세계(Social Worlds of Knowledge) | 1949 | Oxford University Press (런던) |
유럽의 선사 시대 이주(Prehistoric Migrations in Europe) | 1950 | Aschehaug (오슬로) |
마법, 장인 정신, 과학(Magic, Craftsmanship and Science) | 1950 | Liverpool University Press (리버풀) |
사회 진화(Social Evolution) | 1951 | Schuman (뉴욕) |
고대 기념물 일러스트 가이드: 6권 스코틀랜드(Illustrated Guide to Ancient Monuments: Vol. VI Scotland) | 1952 | Her Majesty's Stationery Office (런던) |
사회와 지식: 인간 전통의 성장(Society and Knowledge: The Growth of Human Traditions) | 1956 | Harper (뉴욕) |
과거를 짜맞추기: 고고학적 데이터의 해석(Piecing Together the Past: The Interpretation of Archeological Data) | 1956 | Routledge and Kegan Paul (런던) |
고고학 개론(A Short Introduction to Archaeology) | 1956 | Muller (런던) |
유럽 사회의 선사 시대(The Prehistory of European Society) | 1958 | Penguin (Harmondsworth) |
그의 저서 ''Man makes himself''(1936)는 한국어로 『문명의 기원』으로 번역되었고, ''What Happened in History''(1942)는 『역사의 여명』으로 번역되었다. 『고고학의 방법』은 곤도 요시로에 의해 번역되어 가와이데 서방 신사에서 1964년에 출간되었고, 개정 신판(1981년)과 신장판(1994년)이 나왔다. 『고고학이란 무엇인가』는 곤도 요시로와 키무라 시코에 의해 번역되어 이와나미 서점(이와나미 신서)에서 1969년에 출간되었다.
5. 한국 고고학계에 미친 영향
6. 대중 문화 속에서
참조
[1]
뉴스
Family Notices
http://nla.gov.au/nl[...]
2021-12-31
[2]
웹사이트
The new Vere Gordon Childe Centre
https://www.sydney.e[...]
2024-11-27
[3]
서적
食の人類史 ユーラシアの狩猟・採集、農耕、遊牧
中央公論新社
[4]
서적
A Marxist Archaeology
Academic Press
[5]
간행물
"The Relationship Between Vere Gordon Childe's Political and Academic Thought – and Practice"
University of Queensland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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