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사가미만 해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가미만 해전은 1945년 7월, 미국 해군 제61구축전대가 일본 근해에서 일본 수송 선단을 공격한 해전이다. 제38기동부대의 존 매케인 중장의 지휘 아래, 9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제61구축전대는 사가미만 주변에서 통상 파괴 작전을 수행했다. 미국 측은 화물선 "엔분마루"와 "제5박철마루"를 공격하여 "제5박철마루"를 침몰시켰고, 일본 측은 "제5박철마루"와 함께 공작 기계류 등을 싣고 있던 "엔분마루"의 피해와 사상자를 냈다. 이 해전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수상 전투 중 하나로 언급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이 참가한 해전 - 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해전은 1942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미드웨이 환초에서 벌어진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해전으로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의 MI 작전은 미국의 암호 해독, 일본군의 실책, 미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여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역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 일본이 참가한 해전 - 운요호 사건
    운요호 사건은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 강화도를 침략하여 발생한 무력 충돌로, 조선 개항을 강요하려는 일본의 도발 의혹이 있으며, 강화도 조약 체결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발판을 마련하고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영향을 미쳤다.
  • 미국이 참가한 해전 - 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해전은 1942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미드웨이 환초에서 벌어진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해전으로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의 MI 작전은 미국의 암호 해독, 일본군의 실책, 미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여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역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 미국이 참가한 해전 - 시모노세키 전쟁
    시모노세키 전쟁은 1863년부터 1864년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는 외국 선박을 공격한 사건에 대한 서양 열강의 보복으로 발발했으며, 조슈 번의 도막 운동 전환과 메이지 유신, 서양 제국주의 침략의 배경이 되었다.
  • 일본이 참가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해전 - 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해전은 1942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미드웨이 환초에서 벌어진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해전으로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의 MI 작전은 미국의 암호 해독, 일본군의 실책, 미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여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역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 일본이 참가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해전 - 산호해 해전
    산호해 해전은 1942년 5월 미국과 일본 해군이 산호해에서 벌인 해전으로, 일본의 MO 작전은 실패하고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으며, 항공모함 중심 해전의 시작을 알렸다.
사가미만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교전명사가미만 해전
전투 위치보소반도 노지마자키 해역
날짜1945년 7월 22일 - 23일
결과미국 해군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미국 해군
교전국 2일본 제국 해군
지휘관
미국T. H. 헤더만
일본불명
부대 규모
미국구축함 9척
일본소해정 1척, 구잠정 1척, 수송선 2척
피해 규모
미국없음
일본수송선 1척 침몰, 수송선 1척 손상
이미지
1944년 5월 14일에 항해 중인 USS De Haven (DD-727)
USS De Haven (DD-727), 공격을 주도한 구축함, 1944년 운항 중.
관련 정보
관련 전투일본 본토 공습
태평양 전쟁

2. 배경

2. 1. 미국의 통상 파괴 작전

2. 2. 제61구축전대

3. 해전의 경과

1945년(쇼와 20년) 7월, 일본 근해에서 활동 중인 미국 해군 제38기동부대의 존 매케인 중장은, 예하 제61구축전대(사령관: 토마스 헨리 헤더만 대령)를 분파하여, 사가미만 주변에서 통상 파괴를 실시하기로 했다. 제61구축전대는 기함 "데 헤븐" 이하 "먼스필드", "라이먼 K. 스웬슨", "콜렛", "매독스", "블루", "브러시", "토시그", "새뮤얼 N. 무어"의 총 9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최신예 앨런 M. 섬너급 구축함이었다.[3]

7월 21일 이른 아침, 제61구축전대는 기동부대 주력과 헤어져 일본 본토 연안으로 접근을 시작했다. 태풍이 부근을 통과 중이었기 때문에, 날씨는 좋지 않았다.

7월 22일, 태풍은 지나갔지만, 낮 동안에는 파도가 거친 상태가 계속되었다. 제61구축전대는 저녁부터 속도를 높여, 단종진으로 최종 코스에 들어갔다. 23시 05분, 24노트로 항해 중인 "데 헤븐"의 SG 수색용 레이더는, 19해리 (약 35km)의 거리에 수상 목표를 포착했다. 그로부터 11분 후, 이번에는 사격 관제 레이더가 목표를 포착하여, 4척의 선영임이 확인되었다.[4] 이것은 화물선 "엔분마루"(일본유선, 6,919총 톤)와 "제5박철마루"(서해기선, 800총 톤) 및 호위의 제1호 기뢰정과 제42호 잠수함 호위정으로 구성된 호송 선단으로, 다테야마만에서 선단을 편성하여 당일 21시 00분에 출항, 하코다테항을 향해 항해 중이었다.[5]

미국 함대는 속력을 27노트로 높여 습격 작전으로 돌입했다. 미국 함대는 일본 측의 어뢰에 의한 반격을 경계하면서 약 10km (11,000야드)까지 접근하여, 23시 50분경에 각 함에서 어뢰 2발씩을 발사하고, 이어서 포격을 시작했다.[6] 이 때, 일본 선단은 노지마자키 남서 4.5해리 (북위 34도 50분・동경 139도 50분)의 지점에 있었으며, 미국 함대의 출현을 알아채지 못했다. 포탄은 첫 탄부터 "엔분마루"와 "제5박철마루"에 잇따라 명중하여, 2척 모두 화염에 휩싸였다.[7] 23일 0시 05분경에, 미국 함대의 승무원은 "제5박철마루" 방향에서 여러 차례 폭발음을 듣고, 2발 이상의 어뢰가 명중한 것으로 판단했다.[6] 일본 측 기록에서는 수상 함정에 더해 항공기로부터의 총폭격도 받았다고 하지만,[7] 미국 측에는 해당 기록이 없다.

이 동안, 일본의 호위 함정은 "엔분마루"의 승무원에 따르면, 동선의 그늘에 숨어, 무리한 응전을 피하고 있었다고 한다.[8] "엔분마루"는 자위용으로 장비한 대포와 기관포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미국 측에는 피격 피해는 없었다. 또한, 미국 측은 노지마자키의 연안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9]

7월 23일 0시 09분, 제61구축전대는 공격을 중단하고 방향을 바꿔,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브러시"의 타륜이 고장난 것 외에는, 특히 손해는 없었으며, 저녁에 제38기동부대 주력과 합류했다.

일본 선단 중 "엔분마루"는 소화에 성공하여, 호위 함정과 함께 다테야마 만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제5박철마루"는 수리를 위해 요코스카항으로 예인하던 중 침몰했다.[10]

3. 1. 미 해군의 접근

1945년 7월, 일본 근해에서 활동 중이던 미국 해군 제38기동부대의 존 매케인 중장은 예하 제61구축전대(사령관: 토마스 헨리 헤더만 대령)를 사가미만 주변에 파견하여 통상 파괴를 실시하기로 했다. 제61구축전대는 기함 "데 헤븐"을 포함하여 "먼스필드", "라이먼 K. 스웬슨", "콜렛", "매독스", "블루", "브러시", "토시그", "새뮤얼 N. 무어" 등 총 9척의 최신예 앨런 M. 섬너급 구축함으로 구성되었다.[3]

7월 21일 이른 아침, 제61구축전대는 기동부대 주력과 분리되어 일본 본토 연안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당시 태풍이 부근을 지나가고 있어 날씨가 좋지 않았다.[3]

7월 22일, 태풍은 지나갔지만 낮 동안에는 파도가 거친 상태가 지속되었다. 제61구축전대는 저녁부터 속도를 높여 단종진으로 최종 코스에 진입했다. 23시 05분, 24노트로 항해하던 "데 헤븐"의 SG 수색용 레이더가 19해리(약 35km) 거리에서 수상 목표를 탐지했다. 11분 후, 사격 관제 레이더가 목표를 포착하여 4척의 선박임을 확인했다.[4] 이들은 화물선 "엔분마루"(일본유선, 6,919총 톤)와 "제5박철마루"(서해기선, 800총 톤), 호위함 제1호 기뢰정과 제42호 잠수함 호위정으로 구성된 호송 선단으로, 다테야마만에서 편성되어 당일 21시 00분에 출항하여 하코다테항으로 항해 중이었다.[5]

미국 함대는 27노트로 속력을 높여 습격 작전에 돌입했다. 일본 측의 어뢰 반격을 경계하며 약 10km (11,000야드)까지 접근하여 23시 50분경 각 함에서 어뢰 2발씩을 발사하고 포격을 시작했다.[6] 일본 선단은 노지마자키 남서 4.5해리 (북위 34도 50분・동경 139도 50분) 지점에 있었으며, 미국 함대의 출현을 인지하지 못했다. 첫 포탄부터 "엔분마루"와 "제5박철마루"에 연이어 명중하여 두 척 모두 화염에 휩싸였다.[7] 23일 0시 05분경, 미국 함대 승무원들은 "제5박철마루" 방향에서 여러 차례 폭발음을 듣고 어뢰 2발 이상이 명중한 것으로 판단했다.[6] 일본 측 기록에는 수상 함정 외에 항공기로부터의 총폭격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7] 미국 측 기록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일본 호위 함정들은 "엔분마루" 승무원에 따르면, 동선의 그늘에 숨어 응전을 피했다고 한다.[8] "엔분마루"는 자체 무장한 대포와 기관포로 반격했지만, 미국 측에 피해는 없었다. 미국 측은 노지마자키 연안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9]

7월 23일 0시 09분, 제61구축전대는 공격을 중단하고 방향을 전환하여 전장을 이탈했다. "브러시"의 타륜이 고장난 것 외에는 별다른 손실 없이 저녁에 제38기동부대 주력과 합류했다.

"엔분마루"는 소화에 성공하여 호위 함정과 함께 다테야마 만으로 퇴각했다. "제5박철마루"는 수리를 위해 요코스카항으로 예인되던 중 침몰했다.[10]

3. 2. 일본 수송선단 발견

1945년 7월, 일본 근해에서 활동 중이던 미국 해군 제38기동부대의 존 매케인 중장은 예하 제61구축전대(사령관: 토마스 헨리 헤더만 대령)를 사가미만 주변에 파견하여 통상 파괴를 실시하기로 했다. 제61구축전대는 기함 "데 헤븐"을 포함한 최신예 앨런 M. 섬너급 구축함 9척으로 구성되었다.[3]

7월 22일, 제61구축전대는 저녁부터 속도를 높여 단종진으로 최종 코스에 진입했다. 23시 05분, 24노트로 항해 중이던 "데 헤븐"의 SG 수색용 레이더가 19해리 (약 35km) 거리에서 수상 목표를 포착했다. 11분 후, 사격 관제 레이더가 목표를 포착, 4척의 선박임을 확인했다.[4] 이들은 화물선 "엔분마루"(일본유선, 6,919총 톤)와 "제5박철마루"(서해기선, 800총 톤), 호위함인 제1호 기뢰정과 제42호 잠수함 호위정으로 구성된 호송 선단으로, 다테야마만에서 하코다테항으로 항해 중이었다.[5]

미국 함대는 27노트로 속력을 높여 습격 작전에 돌입했다. 약 10km (11,000야드)까지 접근하여 23시 50분경 어뢰를 발사하고 포격을 시작했다.[6] 일본 선단은 노지마자키 남서 4.5해리 (북위 34도 50분・동경 139도 50분) 지점에 있었으며, 미국 함대의 출현을 알아채지 못했다. 포탄은 첫 탄부터 "엔분마루"와 "제5박철마루"에 잇따라 명중하여 두 척 모두 화염에 휩싸였다.[7]

3. 3. 미 해군의 공격

1945년 7월, 일본 근해에서 활동 중인 미국 해군 제38기동부대의 존 매케인 중장은 예하 제61구축전대(사령관: 토마스 헨리 헤더만 대령)를 사가미만 주변에 파견하여 통상 파괴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제61구축전대는 기함 "데 헤븐"을 포함하여 "먼스필드", "라이먼 K. 스웬슨", "콜렛", "매독스", "블루", "브러시", "토시그", "새뮤얼 N. 무어" 등 총 9척의 최신예 앨런 M. 섬너급 구축함으로 구성되었다.[3]

7월 21일 이른 아침, 제61구축전대는 기동부대 주력과 분리되어 일본 본토 연안으로 접근했다. 태풍의 영향으로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22일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파도가 거친 상태가 계속되었다. 제61구축전대는 저녁부터 속도를 높여 단종진으로 최종 코스에 진입했다. 23시 05분, "데 헤븐"의 SG 수색용 레이더가 19해리 (약 35km) 거리에서 수상 목표를 포착했고, 11분 후 사격 관제 레이더가 4척의 선박을 확인했다.[4] 이는 화물선 "엔분마루"(일본유선, 6,919총 톤)와 "제5박철마루"(서해기선, 800총 톤), 호위함 제1호 기뢰정과 제42호 잠수함 호위정으로 구성된 호송 선단으로, 다테야마만에서 출항하여 하코다테항으로 항해 중이었다.[5]

미국 함대는 27노트로 속력을 높여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 측의 어뢰 반격을 경계하며 약 10km (11,000야드)까지 접근하여 23시 50분경 각 함에서 어뢰 2발씩을 발사하고 포격을 시작했다.[6] 일본 선단은 노지마자키 남서 4.5해리 (북위 34도 50분・동경 139도 50분) 지점에서 미국 함대의 출현을 인지하지 못했다. 첫 포탄부터 "엔분마루"와 "제5박철마루"에 명중하여 두 척 모두 화염에 휩싸였다.[7] 23일 0시 05분경, 미국 함대 승무원은 "제5박철마루" 방향에서 여러 차례 폭발음을 듣고 어뢰 2발 이상이 명중한 것으로 판단했다.[6] 일본 측 기록에는 항공기로부터의 총폭격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7] 미국 측 기록에는 없다.

일본 호위 함정은 "엔분마루" 승무원에 따르면, 동선의 그늘에 숨어 응전을 피했다.[8] "엔분마루"는 기관포 등으로 반격했지만, 미국 측에 피해는 없었다. 미국 측은 노지마자키 연안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9]

7월 23일 0시 09분, 제61구축전대는 공격을 중단하고 전장을 이탈했다. "브러시"의 타륜 고장 외 손해는 없었으며, 저녁에 제38기동부대 주력과 합류했다. "엔분마루"는 소화에 성공하여 다테야마 만으로 퇴각했고, "제5박철마루"는 요코스카항으로 예인 중 침몰했다.[10]

3. 4. 일본 측의 피해

1945년 7월 22일 밤, 미 해군 제61구축전대는 사가미만 해전에서 일본 수송선단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화물선 "엔분마루"(일본유선, 6,919총 톤)는 소화에 성공하여 다테야마만으로 퇴각했고,[7] "제5박철마루"(서해기선, 800총 톤)는 요코스카항으로 예인 중 침몰했다.[10] "엔분마루"는 자위용 대포와 기관포로 반격했으나, 미군 측 피해는 없었다.[8]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수상 함정뿐 아니라 항공기로부터의 총폭격도 받았다고 하지만,[7] 미군 측 기록에는 없다.

3. 5. 전투 중단 및 결과

1945년 7월 23일 0시 9분, 제61구축전대는 공격을 중단하고 방향을 바꿔 전장을 이탈했다.[9] 도중에 "브러시"의 타륜이 고장난 것 외에는 큰 피해 없이 저녁에 제38기동부대 주력과 합류했다.[3]

일본 선단 중 "엔분마루"는 소화에 성공하여 호위 함정과 함께 다테야마만으로 퇴각했다. "제5박철마루"는 수리를 위해 요코스카항으로 예인되던 중 침몰했다.[10]

4. 결과 및 영향

사가미만 해전의 결과, 일본 측은 "제5박철환"을 탑재 물자와 함께 잃었다.[9] "연문환"은 침몰은 면했지만, 선교 등이 파괴되었고, 선원도 선장 이하 5명이 전사, 7명이 부상(그 중 1명은 후에 전상사)을 입었으며, 경계 임무로 승선 중이던 군인도 사상하는 손해를 입었다.[9] 살아남은 "연문환"도 항해는 중지되었다.[9] 이 배는 만주 방면으로 공장 소개시키는 공작 기계류 7264톤과 상륙용 주정 8척을 싣고 있었으며, 하코다테를 경유 후, 한반도의 나진에 양륙할 예정이었다.[9]

미국 측은 중형 수송선과 소형 수송선 각 1척을 침몰시킨 외에, 수송선과 호위함을 1척씩 격파했다고 전과를 판정했다.[9]

미국 함대가 소비한 탄약은 5인치 포탄 3291발과 어뢰 18발이었다.[6]

이 해전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마지막 수상 전투이다"라고도 한다.[12] 그 외 마지막 수상 전투로 꼽히는 싸움으로는 1945년 5월 16일에 일본 해군 함정과 영국 해군 함정 간에 벌어진 페낭 해전이나, 같은 해 8월 21일에 중국 연안에서 발생한 무장 정크끼리의 전투가 있다.[12] 후자는 미국 병사와 지휘 하의 중국 병사가 승선한 정크 2척이, 해문에서 상하이로 항행 중에, 일본 병사가 탄 정크 1척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반격하여 나포했다는 것이다.[12] 이 전공으로 연합국 측 지휘관이었던 리빙스턴 스웬첼 주니어(Livingston Swentzel, Jr.영어|리빙스턴 스웬첼 주니어) 예비 해군 대위 등 2명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마지막 해군 십자장을 수여받았다.[12]

4. 1. 일본 측 피해

일본 측은 사가미만 해전으로 "제5박철환"을 탑재 물자와 함께 잃었다.[9] "연문환"은 침몰은 면했지만, 선교 등이 파괴되었고, 선장 이하 5명이 전사, 7명이 부상(그 중 1명은 후에 전상사)을 입었으며, 경계 임무로 승선 중이던 군인도 사상하는 피해를 보았다.[9] 살아남은 "연문환"도 항해는 중지되었다.[9] "연문환"은 만주 방면으로 공장 소개시키는 공작 기계류 7264톤과 상륙용 주정 8척을 싣고 있었으며, 하코다테를 경유 후, 한반도의 나진에 양륙할 예정이었다.[9]

미국 측은 이 해전으로 중형 수송선과 소형 수송선 각 1척을 침몰시킨 외에, 수송선과 호위함을 1척씩 격파했다고 판단했다.[9] 미국 함대가 소비한 탄약은 5인치 포탄 3291발과 어뢰 18발이었다.[6]

이 해전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마지막 수상 전투이다"라고도 한다.[12] 그 외 마지막 수상 전투로 꼽히는 싸움으로는 1945년 5월 16일에 일본 해군 함정과 영국 해군 함정 간에 벌어진 페낭 해전이나, 같은 해 8월 21일에 중국 연안에서 발생한 무장 정크끼리의 전투가 있다.[12] 후자는 미국 병사와 지휘 하의 중국 병사가 승선한 정크 2척이, 해문에서 상하이로 항행 중에, 일본 병사가 탄 정크 1척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반격하여 나포했다는 것이다.[12] 이 전공으로 연합국 측 지휘관이었던 리빙스턴 스웬첼 주니어(Livingston Swentzel, Jr.) 예비 해군 대위 등 2명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마지막 해군 십자장을 수여받았다.[12]

4. 2. 미 해군의 전과

미 해군은 사가미만 해전에서 중형 수송선과 소형 수송선 각 1척을 침몰시키고, 수송선과 호위함을 1척씩 격파했다고 전과를 판정했다.[9] 그러나 실제 일본 측 피해는 "제5박철환"을 물자와 함께 잃었고, "연문환"은 침몰은 면했지만 선교 등이 파괴되고 선원 선장 이하 5명이 전사, 7명이 부상(그 중 1명은 후에 전상사)당했으며, 경계 임무로 승선 중인 군인도 사상하는 손해를 입었다.[9] "연문환"은 항해가 중지되었으며, 만주 방면으로 공장 소개시키는 공작 기계류 7264톤과 상륙용 주정 8척을 나진에 양륙할 예정이었다.[9]

미국 함대가 소비한 탄약은 5인치 포탄 3291발과 어뢰 18발이었다.[6]

이 해전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마지막 수상 전투"로도 불린다.[12] 다른 마지막 수상 전투 후보로는 1945년 5월 16일 페낭 해전과 같은 해 8월 21일 중국 연안에서 발생한 무장 정크끼리의 전투가 있다.[12] 후자의 경우, 미국 병사와 지휘 하의 중국 병사가 승선한 정크 2척이 해문에서 상하이로 항행 중 일본 병사가 탄 정크 1척의 공격을 받았으나, 반격하여 나포한 사건으로, 연합국 측 지휘관 2명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마지막 해군 십자장을 수여받았다.[12]

4. 3. 마지막 수상 전투 논란

사키만 해전의 결과, 일본 측은 "제5박철환"을 탑재 물자와 함께 잃었다.[9] "연문환"은 침몰을 면했지만, 선교 등이 파괴되었고, 선원도 선장 이하 5명이 전사, 7명이 부상(그 중 1명은 후에 전상사)당했으며, 경계 임무로 승선 중인 군인도 사상하는 손해를 입었다.[9] 살아남은 "연문환"도 항해는 중지되었다.[9] 동선은 만주 방면으로 공장 소개시키는 공작 기계류 7264톤과 상륙용 주정 8척을 적재하고 있었으며, 하코다테를 경유 후, 한반도의 나진에 양륙할 예정이었다.[9] 이상의 결과에 대해, 미국 측은 중형 수송선과 소형 수송선 각 1척을 침몰시킨 외에, 수송선과 호위함을 1척씩 격파했다고 전과 판정했다.[9]

미국 함대가 소비한 탄약은, 5인치 포탄 3291발과 어뢰 18발이었다.[6]

본 해전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마지막 수상 전투이다"라고도 한다.[12] 그 외 마지막 수상 전투로 꼽히는 싸움으로는, 1945년 5월 16일에 일본 해군 함정과 영국 해군 함정 간에 벌어진 페낭 해전이나, 같은 해 8월 21일에 중국 연안에서 발생한 무장 정크끼리의 전투가 있다.[12] 후자는, 미국 병사와 지휘 하의 중국 병사가 승선한 정크 2척이, 해문에서 상하이로 항행 중에, 일본 병사가 탄 정크 1척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반격하여 나포했다는 것이다.[12] 이 전공으로, 연합국 측 지휘관이었던 리빙스턴 스웬첼 주니어(Livingston Swentzel, Jr.) 예비 해군 대위 등 2명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마지막 해군 십자장을 수여받았다.[12]

5. 한국의 관점

참조

[1] 웹사이트 Penetrating Home Waters: Destroyer Sweep of Sagami Nada https://www.national[...] 2020-07-21
[2] 문서 Wikipedia英語版의 상미만 해전 기사명 변경
[3] 서적 Culver (2004)
[4] 서적 Culver (2004)
[5] 서적 駒宮 (1987) - 戦時輸送船団
[6] 서적 Culver (2004)
[7] 서적 日本郵船 (1971)
[8] 서적 日本郵船 (1971)
[9] 서적 Roscoe (1953)
[10] 서적 駒宮 (1987) - 戦時輸送船団
[11] 서적 戦時船舶史 自費出版 1991
[12] 웹사이트 http://militarytime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