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경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상경도는 요나라의 행정 구역으로, 요나라의 5경 중 하나이다. 상경 임황부는 요나라의 첫 번째 수도였으며, 바린좌기에 위치해 있었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몽골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고, 1912년에 재발굴되었다. 이 외에도 중경 대정부, 동경 요양부, 남경 석진부, 서경 대동부가 있었다. 또한, 조주 천성군, 회주 봉릉군, 경주 현녕군, 태주 덕창군, 장춘주 소양군, 오주 정안군, 영주 영창군, 의곤주 계성군, 용화주 흥국군, 강성주 개국군, 요주 광의군 등의 주요 주(州)와 두하군주, 변방성 등의 행정 구역이 존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요나라의 도 - 동경도 (요)
동경도 주군은 요나라 동경도에 속한 다양한 주와 군들을 지칭하며, 발해 유민 이주와 한족 포로 정착 등의 배경으로 설치되어 요나라 변경 통치와 민족 융합 정책에 기여했고 요양부가 중심지였다. - 요나라의 도 - 남경도
남경도는 고려 시대 석진현을 중심으로 한 행정 구역으로, 석진현은 1012년 개명되어 남경도의 중심지였으며 주변의 여러 현과 군을 포함했다. - 내몽골의 역사 - 몽골 제국
몽골 제국은 1206년 칭기즈 칸에 의해 건국되어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고 동서 교류를 촉진했으나, 몽케 칸 사후 분열되어 쇠퇴하여 멸망한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던 제국이다. - 내몽골의 역사 - 판석묘 문화
판석묘 문화는 기원전 1300년경 자바이칼에서 시작하여 몽골, 중국 북부, 만주 등지에 분포하며, 판석으로 둘러싸인 무덤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 및 초기 철기 시대의 고고학 문화이다.
상경도 | |
---|---|
상경도 | |
![]() | |
정보 | |
국가 | 요나라 |
위치 | 현재 내몽골 자치구 바린 좌기 |
좌표 | 북위 44° 04′ 동경 119° 41′ |
역사 | |
건설 | 918년 |
별칭 | 상경 용천부 |
중요 사건 | 938년: 요나라의 수도가 됨 1120년: 금나라에 함락됨 |
인구 | |
1030년 | 150,000명 |
경제 | |
주요 산업 | 농업 목축업 상업 |
기타 | |
현재 상태 | 폐허 |
2. 5경
요나라는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5개의 수도, 즉 '''5경'''(五京)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이 5경은 각각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하여, 요나라 통치의 핵심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각 경은 고유한 명칭과 행정 구역을 가졌으며, 그중 첫 번째 수도는 상경 임황부이다.
2. 1. 상경 임황부 (上京 臨潢府)
요나라 최초의 수도인 상경 임황부는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바린좌기에 건설되었다. 요 태조는 천제산(天梯山), 몽국산(蒙國山), 별노산(別魯山) 세 산의 기세를 보고 금착전(金齪箭)을 쏘아 그 기운을 얻어 용미궁(龍尾宮)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후 918년(신책 3년)에 도성을 건설하고 황도(皇都)라 칭했으며, 938년(천현 13년)에는 상경(上京)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황부'''(臨潢府)라는 이명을 붙였다.
도성 서북쪽으로는 래류하(涞流河)가 남쪽으로 흐르며, 그 외에도 어하(御河), 사하(沙河), 황하(潢河), 압자하(鴨子河), 타노하(他魯河) 등이 주변에 위치했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이곳을 북경(北京)으로 칭했으나, 1214년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오랫동안 잊혔던 상경 유적은 1912년에 재발굴되었고,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발굴된 상경성은 북쪽의 내성(內城)과 남쪽의 외성(外城)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임황부는 10개의 현을 통치했으며, 이 현들은 모두 외성 내부에 위치했다.[2]
현명 | 한자 | 비고 |
---|---|---|
임황현 | 臨潢縣 | 거란이 생포한 연주(燕州)와 계주(薊州)의 포로들을 황수(潢水) 북쪽에 정착시켰다. 황수에 임하고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땅이 비옥하여 파종하기 좋았으며, 3,500호가 거주했다. |
장태현 | 長泰縣 | 발해 멸망 직후 요 태조가 발해 장평현(長平縣)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후 중국인 일부가 유입되었으며, 4,000호가 거주했다. |
정패현 | 定覇縣 | 부여부 강사현(强師縣)의 주민들을 중국인들과 함께 외성 서쪽에 정착시키고 땅을 분배하여 농사를 짓게 했다. 990년(통화 8년)에는 제궁제할사(諸宮提轄司) 소속 주민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장녕궁(長寧宮)에 소속되었으며, 2,000호를 거느렸다. |
보화현 | 保和縣 |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킬 때 용주(龍州)를 격파한 뒤 부리현(富利縣)의 주민들을 도성 남쪽에 이주시켰다. 990년에는 제궁제할사 소속 주민들을 정착시켰으며, 창민궁(彰湣宮)에 예속되었다. 4,000호를 거느렸다. |
노현 | 潞縣 | 922년(천찬 원년) 계주를 격파하고 노현(潞縣)의 주민들을 생포하여 도성 동쪽에 정착시켰다. 이후 발해인들을 추가로 정착시켰으며, 숭덕궁(崇德宮)에 소속되었다. 3,000호를 거느렸다. |
역속현 | 易俗縣 | 흥료국을 정복한 뒤 남은 유민 중 일부를 도성 북쪽에 정착시키고 현을 설치했다. 이곳에서 다시 거란에 저항한 이들을 도성 내부에 정착시켰다. |
천료현 | 遷遼縣 | 흥료국을 정복한 뒤 남은 이들 중 힘세고 영리한 자들을 뽑아 도성 남쪽에 정착시켰다. 990년에는 제궁제할사 소속 주민들을 정착시켰으며, 창민궁에 소속되었다. 4,000호를 거느렸다. |
흥인현 | 興仁縣 | 1013년(개태 2년)에 설치되었다. |
선화현 | 宣化縣 | 요 태조가 서경 압록부를 격파한 뒤 압록부 신화현(神化縣)의 주민들을 도성 남쪽에 정착시켰다. 990년에는 제궁제할사 소속 주민들을 정착시켰으며, 창민궁에 소속되었다. 4,000호를 거느렸다. |
요나라는 수도인 5경 외에, 지방 행정 체계로 도(道), 주(州), 현(縣)을 두어 운영했다.[1][2] 상경도 역시 이러한 행정 체계 아래 여러 주와 현을 관할하였다. 상경도에 속했던 주요 주(州)와 현(縣), 그리고 특별 행정 구역이었던 두하군주 및 변방성(邊防城)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다룬다.
3. 도, 주, 현
3. 1. 주요 주 (州)
상경도에 속한 여러 주(州)들은 각각의 군사적, 행정적 중요도에 따라 설치되었으며, 절도사, 관찰사, 자사 등이 파견되어 통치했다. 각 주는 고유한 역사적 배경과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3. 1. 1. 조주 천성군 (祖州 天成軍)
현재의 바린좌기 석방자촌(石房子村) 지역에 위치했던 곳이다. 조주는 상급주로서 절도사가 민정을 담당했다. 본래 이곳은 거란 우팔부(右八部) 중 세몰리(世沒里) 부족의 땅이었다. 요 태조가 이곳에서 가을 사냥을 즐겨 하다가 서쪽 누각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후에 조주성을 축조하게 되었다.[3]
조주라는 이름은 요 황실의 시조로 여겨지는 야율누리사, 야율살랄덕, 야율균덕식, 야율살랄적이 태어난 발상지라는 점에서 유래했다. 성의 동쪽에는 성종전(聖蹤殿)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요 태조의 사냥 관련 일화를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성종전 동쪽의 누각에는 거란의 창업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유적들은 모두 조주성 서쪽 5리 거리에 위치했다. 조주는 천현 연간(926년~938년)에 요 태종이 설치했으며, 홍의궁(弘義宮)에 소속되었다.[3]
조주는 2개의 현과 1개의 성을 통치했다.[3]
현명/성명 | 한자 | 비고 |
---|---|---|
장패현 | 長覇縣 | 발해의 용주(龍州)를 격파한 뒤, 발해 장평현(長平縣)의 주민들을 이곳에 이주시켜 설치했다. 약 2,000호가 거주했다. |
함녕현 | 咸寧縣 | 요양(遼陽)을 격파한 뒤, 장녕현(長寧縣)의 주민들을 이곳으로 옮겨 설치했다. 약 1,000호가 거주했다. |
월왕성 | 越王城 | 요 태조의 숙부인 야율실로(耶律室魯)가 서쪽으로 탕구트와 토욕혼을 정벌하고 사로잡은 주민들을 이곳에 정착시켜 세운 성이다. 조주 동남쪽 20리 거리에 위치했으며, 약 1,000호가 거주했다. |
3. 1. 2. 회주 봉릉군 (懷州 奉陵軍)
현재 바린우기의 치소가 있는 곳에서 동북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4] 상급주(上級州)로서 절도사가 주의 민정을 맡았다. 이곳은 본래 당나라 귀성주(歸誠州)가 있던 땅이었으며, 요 태조가 장막을 옮겨 다니며 목축을 하던 지역이었다. 요나라는 발해의 부여부와 상경용천부를 격파한 뒤 일부 주민들을 이곳에 정착시켰고, 이후 연주(燕州)와 계주(薊州) 주민 일부도 추가로 이주시켰다.[4]947년(대동 원년), 요 태종이 사망하자 이곳 서산(西山)에 장사 지내고 그 무덤을 회릉(懷陵)이라 칭했다. 이를 계기로 요 세종이 이곳에 주(州)를 설치하고 회주(懷州)라 이름 붙였다. 회주는 영흥궁(永興宮)에 속했으며, 성문 중 하나인 봉황문(鳳凰門)에는 요 태종이 사냥하며 여우를 쫓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요 목종 또한 회릉 근처에 안장되었다.[4]
회주는 아래 2개의 현을 통치했다.[4]
현명 | 한자 | 비고 |
---|---|---|
부여현 | 扶餘縣 | 상경용천부 주민들과 항복한 부여현 주민들을 정착시켰고, 요 세종 때 현을 설치했다. 1,500호가 살았다.[4] |
현리현 | 顯理縣 | 발해 멸망 후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과 현리부(顯理府) 주민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요 세종 때 현을 설치했으며, 1,000호가 살았다.[4] |
3. 1. 3. 경주 현녕군 (慶州 玄寧軍)
바린 우기 숴보르가 소목(索博日嘎蘇木)에 치소를 두었다. 이곳은 본래 대보산(大保山) 흑하(黑河) 유역의 땅으로 지세가 험준한 곳이었다. 요 목종이 이곳에 성을 쌓고 흑하주(黑河州)라고 불렀으며, 실무는 신하들에게 맡긴 채 매년 이곳에서 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목종은 결국 자신의 주방장에게 살해당했고, 이 땅은 거칠고 추운 곳이라는 이유로 990년에 주는 폐지되었다.[5]이후 요 성종이 가을에 이곳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이한 산수를 좋아하게 되어 경주(慶州)라는 이름으로 주를 다시 세웠다. 성종이 세상을 떠난 뒤, 요 흥종은 1031년(경복 원년) 성종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있는 영경릉(永慶陵)에 그를 안장했다. 이곳에는 망선전(望仙殿)과 어용전(御容殿)이 있었다. 성종의 묘를 지키기 위해 번인(蕃)과 한족(漢族) 주민 3,000호를 이곳에 정착시키고 대내도총관사(大內都總管司)에 소속시켰다.[5]
경주에는 흑산(黑山), 적산(赤山), 대보산(大保山), 요나라 5대조인 야율 발돌(勃突)이 태어난 발돌산(勃突山), 노옹령(老翁嶺), 만두산(饅頭山) 등의 산과 흥국호(興國湖), 할실락(轄失濼) 등의 호수, 그리고 흑하(黑河)가 있다. 행정적으로는 흥성궁(興聖宮)에 속했으며, 3개의 현을 통치했다.[5]
현명 | 한자 | 비고 |
---|---|---|
현덕현 | 玄德縣 | 흑산과 흑하가 있는 곳이다. 1031년에 낙장(落帳)의 주민들을 모아 이곳에 정착시켰다. 6,000호가 살았다. |
효안현 | 孝安縣 | |
부의현 | 富義縣 | 발해를 멸망시킨 뒤 요 태종이 발해 의주(義州)의 주민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1032년(중희 원년)에 의풍현(義豊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부의현으로 돌아왔다. 홍의궁(弘義宮)에 소속되어 있었다. |
3. 1. 4. 장춘주 소양군 (長春州 韶陽軍)
현재의 지린성 쑹위안 시 첸안 현 북부에 치소(治所, 행정 중심지)를 두었다. 하급주(下級州)로, 절도사가 주의 민정(民政)을 담당했다. 압자하(鴨子河)라는 곳이 있었는데, 봄에 사냥하던 땅이었다. 요 흥종이 1040년(중희 8년)에 주를 설치했다.[6] 연경궁(燕京宮)에 속했으며, 동북통군사(東北統軍司)가 주의 군정(軍政)을 맡았다. 속현으로는 장춘현(長春縣) 하나를 통치했다. 현에는 연주(燕州)와 계주(薊州)에서 유배 온 범죄자 2,000호가 살고 있었다.[6]1115년, 금나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거란이 영강주로 보낸 병력들이 이곳을 경유하였다.
3. 1. 5. 오주 정안군 (烏州 靜安軍)
현재의 지린성 쓰핑 시 솽랴오 시에 치소(治所, 행정 중심지)를 두었다. 주의 민정은 자사(刺史)가 맡았다. 이곳은 동호(東胡)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오환(烏桓)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았다. 요의 북대왕(北大王) 야율발랄(撥剌)이 이곳을 차지하여 목초지로 사용했으나, 나중에 중앙 정부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경내에는 요하(遼河), 야하(夜河), 오환천(烏丸川), 오환산(烏丸山) 등이 있다. 속현으로는 애민현(愛民縣) 하나를 두었는데, 이 현에는 야율발랄이 남쪽에서 포로로 잡아와 정착시킨 중국인 1,000호가 살고 있었다.[7]3. 1. 6. 영주 영창군 (永州 永昌軍)
현재의 웡뉴터 기에서 시라무렌강과 라오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치소를 두었으며, 승천황후가 이곳을 개척했다. 관찰사가 주의 민정을 맡았다. 요 태조는 이곳에 남쪽 누각을 설치했다. 981년(건형 3년)에는 황자 한팔(韓八)의 묘 쪽에 주를 설치했다.동쪽의 황하(潢河, 시라무렌강)와 남쪽의 토하(土河, 라오하 강)가 이곳에서 합쳐진다. 겨울에는 아장이 많아 말이 머무를 수 있었기 때문에 동날발(冬捺缽)이라고 불렸다. 황하와 토하가 합류하는 지점에는 목엽산이 있으며, 그 위에는 거란 시조의 사당이 있다. 기수가한(奇首可汗)의 사당은 남쪽 사당에, 가돈(可敦)의 것은 북쪽 사당에 위치한다. 흙으로 색칠한 성병팔자신상(聖並八子神像) 2개가 있다. 영주 영창군은 창민궁에 소속되었고, 아래 3개 현을 통치했다.
현명 | 한자 | 대략적 위치 | 비고 |
---|---|---|---|
장녕현 | 長寧縣 | 웡뉴터 기 시라무렌강과 라오하 강의 합류지점 | 중경 현덕부에 있던 장녕현의 주민들을 발해가 멸망한 뒤 이곳으로 옮겨왔다. 4,200호가 살았다. |
의풍현 | 義豊縣 | 영주성 남루 서북쪽 (주의 서북쪽 100리) | 철리부 의주(義州)의 주민들을 이곳에 정착시키고 의주를 설치했다. 1031년 주를 폐지하고 현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상현(嘗縣)을 부의현으로 고쳐 태주로 이관시켰다. 1,400호가 살았다. |
자인현 | 慈仁縣 | 야율 지살고 무덤 서쪽 | 요 태조의 아들 야율 지살고(只撒古)가 죽자 그의 무덤 서쪽에 자주(慈州)를 설치했다. 1031년 자주를 폐지하고 현으로 격하했다. 400호가 살았다. |
3. 1. 7. 의곤주 계성군 (儀坤州 啓聖軍)
커스커텅 기 동남쪽에 있었다. 원래 거란 우대부(右大部)의 땅이었으나, 응천황후가 이곳에 주를 건설했다. 응천황후의 집안은 회흘나사(回鶻糯思)에서 살았는데, 4대 후손인 용아매리(容我梅裏)가 응천황후 술율씨(述律氏)를 낳아 요 태조에게 시집보냈다.요 태조가 응천황후와 함께 대외 원정을 다니며 사로잡은 많은 포로들을 귀장(歸帳) 아래에 두었는데, 이들을 속산(屬珊)이라고 불렀다. 이런 땅에다가 주를 설치했다. 주를 설치한 뒤 계성원(啟聖院)을 두고 중간에 이를 의녕전(儀寧殿)이라고 칭했다. 요 태조와 응천황후의 모습을 은으로 만든 상이 이곳에 있었다. 장녕궁에 소속되어 있었다. 광의현(廣義縣) 하나를 속현으로 두었다.
광의현은 본래 회흘부가 목초지로 쓰던 곳인데, 요 태조 때 대외원정 속에서 얻은 포로들을 이곳에 정착시키고 주현을 두었다. 990년 제궁제할사(諸宮諸割使)의 주민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1005년(통화 22년) 추가로 정착민이 들어왔다. 2,500호가 이곳에 살았다.
3. 1. 8. 용화주 흥국군 (龍化州 興國軍)
아오한 기의 시라무렌 강 남쪽에 위치했던 하급주이다. 절도사가 주의 민정을 맡았으며, 군정은 북여진병마사(北女眞兵馬司)가 담당했다. 창민궁 소속이었다.거란의 시조 가수가한이 이곳에서 자신을 용정(龍庭)이라 칭했으며, 요 태조는 이곳에 동쪽 누각을 세웠다. 902년(당나라 천복 2년), 요 태조는 철렬륵부(叠烈部) 이리근(夷離堇)이라는 칭호를 얻고 대북(代北) 지역을 격파하였다. 이때 사로잡은 주민들을 이곳으로 옮겨와 성을 쌓게 하였다. 이듬해에는 숙여진을 정벌하고 얻은 수백 가구의 포로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용화현(龍化縣)을 속현으로 두었는데, 이곳에는 숙여진, 연주, 계주 등지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주민들이 성을 쌓고 살았다. 전체 규모는 약 2,000호에 달했다.
3. 1. 9. 강성주 개국군 (降聖州 開國軍)
아오한 瑪尼罕鄕|마니한향중국어에 치소를 두었다. 기하급주로 분류되어 자사가 주의 민정을 맡았다. 본래 이곳은 대부락동루(大部落東樓)의 땅이었으며, 요 태조가 매년 봄마다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다. 응천황후가 이곳에서 태몽을 꾸고 요 태종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요 목종 대에 이르러 주가 설치되었고, 사방 30리 내에서의 벌목과 목축이 금지되었다. 처음에는 연창궁에 소속되었으나, 이후 창민궁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속현으로는 영안현(永安縣)을 두었다. 이 현은 과거 발해의 동경 용원부 회주(懷州)에 있던 동명의 현을 폐지하고 그곳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설치한 곳이다. 당시 영안현에는 800호의 주민이 거주했다.
3. 1. 10. 요주 광의군 (饒州 匡義軍)
중급주로 절도가 주의 민정을 맡았다. 야율아보기가 폐허가 되었던 요악도독부의 옛 보루를 수리하며 주성이 만들어졌다. 주의 주민은 발해와의 전쟁에서 잡아온 발해인 포로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채웠다고 한다. 황하(潢河), 장수락(長水濼), 몰타하(沒打河), 청산(靑山), 대복산(大福山), 송산(松山) 등이 주의 영역 내에 있었다. 연경궁에 속했으며, 3개 현을 통치했다.천경 5년(1115년) 2월 13일, 발해 유민 고욕(古欲)이 이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거란이 보낸 진압군의 장교 소사불유(蕭謝佛留), 소도소알(蕭陶蘇斡)을 패퇴시키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결국 도소알(陶蘇斡)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같은 해 6월 진압되었다.[8]
아래는 요주 광의군이 관할했던 현의 목록이다.
현명 | 한자 | 대략적 위치 | 인구 | 비고 |
---|---|---|---|---|
장악현 | 長樂縣 | 린시현 쌍정점향(雙井店鄕) 서영조구촌(西英桃溝村) 동쪽 | 4,000호 | 주의 치소가 있었다. 발해 요성현(遼城縣)의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설치되었다. 전체 주민 중 1,000호는 철을 생산 및 제련하여 공납으로 바쳤다. |
임하현 | 臨河縣 | 린시 현 동남 61리 쌍정점향 | 1,000호 | 발해 멸망 이후 요 태종이 풍영현(豊永縣)의 주민들을 황수 계곡에 정착시켜 설치되었다. |
안민현 | 安民縣 | 커스커텅 기 동부 토성자진(土城子鎭) | 1,000호 | 요 태종이 발해 여러 지역의 주민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
3. 2. 두하군주 (頭下軍州)
두하군주 문서를 참조하라.3. 3. 변방성 (邊防城)
요나라가 실위 등 북방 민족을 정복한 후,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북방 변경을 방어하기 위해 현재의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설치한 행정구역들을 말한다.3. 3. 1. 정주 (靜州)
우란호트시 북쪽 우란호트진(乌兰哈达镇|우란하다진중국어)에 위치했다. 관찰사가 주의 민정을 맡았다. 본래 태주(泰州)에 속했던 금산(金山)이었으나, 1116년(천경 6년)에 정주로 설치되었다.3. 3. 2. 진주 건안군 (鎭州 建安軍)
몽골 볼간주에 위치하며, 툴강(Tuul)과 오르홍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과거 가돈성(可敦城)이 있던 터였다.진주의 민정은 절도사가 담당하였다. 1004년(통화 22년), 황태후의 건의에 따라 설치되었으며, 주된 목적은 실위와 우궐(羽厥) 세력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여러 민족 출신으로 구성된 2만 명의 기병이 주둔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성과(추이, 抽移)를 얻지는 못했다.
이 지역에는 유배되어 온 발해인, 여진족, 중국인 등 약 700여 가구가 거주하였다. 이들은 진주 인근의 방주(防州, 진주 동남쪽 툴강 근처)와 유주(維州, 진주 서쪽)에 나뉘어 살았다. 진주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상경까지의 거리는 약 3,000여 리에 달했다.
3. 3. 3. 하동성 (河董城)
처이발상 서쪽에 있었다. 본래는 회흘의 가돈성(可敦城)이었는데, 말이 잘못 전해져 하동성(河董城)이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버려져 있다가 요가 이를 완전히 복구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고주(高州) 경계에 살면서 약탈을 일삼던 여진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동남쪽으로 상경까지의 거리는 1,700리였다.3. 3. 4. 정변성 (靜邊城)
만저우리시 너머 자바이칼 지방 자바이칼스키 지방에 위치했던 성이다. 과거 거란의 20여 부족이 물과 풀을 얻던 곳이었으나, 북쪽에 이웃한 우궐의 잦은 약탈 때문에 성을 쌓고 방어하였다. 성에는 1,000여 명의 기병이 주둔했으며, 동남쪽으로 상경까지의 거리는 1,500리였다.3. 3. 5. 피피하성 (皮被河城)
피피하성은 북쪽 변방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군인 500명을 주둔시켜 방어하던 군사 기지였다.[1] 피피하(皮被河)라는 강은 회흘의 북쪽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우궐을 지나 여구하(臚朐河)로 합류한다.[1] 이 강은 하동성 북쪽 근처를 지나며, 동쪽에서는 타록하(沱漉河)와 합쳐져 최종적으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1] 피피하성에서 남쪽으로 상경까지의 거리는 1,500리였다.[1]3. 3. 6. 초주 수원군 (招州 綏遠軍)
몽골 아르항가이주 남쪽에 위치한 부귀성(富貴城)에 있었다. 이곳에는 자사(刺史)를 두었다. 1014년(개태 3년)에 여진족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설치하였다. 서북로초토사(西北路招討司)가 주의 군사 및 행정을 담당하였다. 금나라가 건국된 이후에는 케레이트부가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3. 3. 7. 탑라주성 (塔懶主城)
피피하성 서쪽 근처에 있었다. 1083년 (대강 9년)에 설치했다. 여구하가 있다.참조
[1]
서적
《요사》 권39 지리지 1 상경도조
https://zh.wikisourc[...]
[2]
서적
《요사》 권39 지리지 1 상경도 상경 임황부조
https://zh.wikisourc[...]
[3]
서적
《요사》 권39 지리지 1 상경도 조주 천성군조
https://zh.wikisourc[...]
[4]
서적
《요사》 권39 지리지 1 상경도 회주 봉릉군조
https://zh.wikisourc[...]
[5]
서적
《요사》 권39 지리지 1 상경도 경주 현녕군조
https://zh.wikisourc[...]
[6]
서적
《요사》 권39 지리지 1 상경도 장춘주 소양군조
https://zh.wikisourc[...]
[7]
서적
《요사》 권39 지리지 1 상경도 오주 정안군조
https://zh.wikisourc[...]
[8]
서적
《요사》 권28 본기 천조황제 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