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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용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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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용 전투는 228년, 위나라 장수 맹달이 촉한에 투항하려다 사마의에게 진압된 사건이다. 맹달은 조비의 신임을 얻어 신성 태수를 지냈으나, 촉한과의 내통을 의심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사마의는 맹달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여 맹달을 처형하고, 그의 세력을 궤멸시켰다. 이 사건은 삼국지연의 등 대중문화에서도 다뤄지며, 코에이의 진 삼국무쌍 5: 맹장전에서 신성 전투라는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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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용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 명칭신성지란
영어 명칭Xincheng Rebellion
일부삼국 시대 전쟁의 일부
관련 전투제갈량의 북벌
이미지
맹달의 패배
맹달이 사마의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그림
전투 정보
날짜227년 12월경 – 228년 3월경
장소신성군 (현재의 후베이성스옌시의 팡현, 주시현, 주산현, 샹양시의 바오캉현 및 난장현을 포함)
결과조위의 승리, 반란 진압
교전 세력
교전 1조위
교전 2맹달 (일부 촉한 및 동오 지원)
지휘관 및 지도자
조위사마의
반란군맹달

2. 배경

220년, 유비 휘하의 장수였던 맹달조비에게 투항하여 신성군의 태수가 되었으나, 많은 이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3][4] 사마의는 맹달을 경계했으나 조비는 그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6] 맹달은 조비 사후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동오와 우호 관계를 맺고 촉한에 대비했다. 촉한제갈량은 맹달을 불신하며 그를 경계했다.[8]

2. 1. 맹달의 투항과 위나라에서의 지위

220년, 유비 휘하의 장수였던 맹달유비의 경쟁자였던 조비에게 투항했는데, 조비는 최근 사망한 아버지 조조로부터 제후 왕, 즉 "위왕"의 칭호를 물려받았다. 맹달은 부하들과 그들의 가족 등 총 4,000명이 넘는 인원을 데리고 갔다. 조비는 맹달이 자신에게 합류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그를 따뜻하게 환영했다. 조비는 맹달을 위나라 남서쪽 국경에 위치한 신성군의 태수(太守)로 임명했다.[3]

당시 많은 관리들은 맹달을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중요한 책임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4] 사마의 장군은 당시 (현재의 난양시, 허난성)에 주둔하며 형주유주의 군사 업무를 감독하고 있었는데,[5] 맹달에게 너무 큰 신뢰를 두지 말라고 조비에게 경고했지만, 조비는 사마의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6]

맹달은 조비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위나라 관리인 환계하후상과도 친밀한 관계였다. 226년 조비가 사망하자 환계와 하후상도 사망했다. 맹달은 오랫동안 최전선에 있었기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7]

2. 2. 촉한과의 관계

맹달은 신성에서 복무하는 동안 동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촉한의 공격에 대비하여 강력한 방어 태세를 구축했다. 촉한승상-섭정인 제갈량은 맹달을 쉽게 변절할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인물로 여겼고, 그가 촉에 위협이 될까 걱정했다.[8]

3. 맹달의 난

227년, 촉한제갈량맹달에게 위나라에 반기를 들 것을 종용하자, 맹달은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맹달의 난이라 부른다.[9] 맹달은 신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제갈량은 이 점을 이용하여 맹달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하였다.[9][10]

촉한과 동오는 각각 맹달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으나, 사마의는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부하들을 파견했다.[11]

3. 1. 반란의 동기

제갈량맹달촉한으로 귀순시키려 한 것과 맹달이 신의와 불화가 있었다는 점은 맹달이 반란을 일으킨 동기로,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은 맹달이 신성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 촉으로 귀순하도록 유도했다. 맹달은 답장을 보냈으나, 맹달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위흥 태수 신의가 맹달이 촉과 내통하고 있다고 위나라 조정에 보고했다. 당시 완에 주둔하고 있던 사마의는 맹달을 조사하고 낙양으로 오라고 설득했으나, 맹달은 의심과 목숨에 대한 두려움으로 반란을 일으켰다.[9]

진서에서는 맹달과 신의의 불화를 확인하며, 제갈량이 이를 이용하여 맹달을 압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은 곽모를 보내 맹달의 계획을 신의에게 누설하게 했고, 맹달은 음모가 탄로 나자 즉시 반란을 계획했다. 사마의는 맹달을 진정시키기 위해 편지를 보내 그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맹달은 망설였다.[10]

3. 2. 사마의의 진압

사마의는 맹달의 반란 낌새를 알아채고 신속하게 군대를 이끌고 신성으로 진격했다. 맹달은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지만, 사마의의 군대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했다.[10]

맹달은 제갈량에게 "낙양에서 800리 떨어져 있는 완과 달리 저는 낙양에서 1,200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마의가 제가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황제(조예)에게 알릴 것입니다. 사마의가 낙양에 편지를 보내 응답을 받는 데 총 한 달 정도 걸릴 것입니다. 그때쯤이면 제 성은 요새화되고 군대는 준비될 것입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사마의의 군대가 8일 만에 도착하자, 맹달은 "제가 반란을 꾸몄는데, 8일 만에 (사마의의) 군대가 제 성에 도착했습니다. 이 무슨 신속함입니까?"라며 당황했다.[12]

사마의는 맹달의 조카 등현(鄧賢)과 부하 이보(李輔)를 설득하여 항복시켰고,[12] 16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신성을 함락시켰다. 맹달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그의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졌다.[13][14]

4. 결과

사마의는 낙양으로 돌아가 조예를 만나고, 위나라 황제 조예는 사마의에게 동오의 침략에 대처할 방법을 자문하였다. 이후 사마의는 완(宛)의 주둔지로 돌아갔다.[19]

4. 1. 위나라의 승리

사마의와 그의 군대는 1만 명이 넘는 포로를 생포하여 완으로 돌아갔다.[15]

신의는 오랫동안 위흥에 머물면서 오만하게 행동했다. 그는 허가 없이 여러 관인을 새겨 배포했다. 맹달의 최후를 듣고 불안해진 신의는 그 지역의 다른 관리들과 함께 사마의에게 선물을 보내 승리를 축하했다. 사마의는 신의를 조롱하는 사자를 보냈고, 신의는 사마의를 만나 불법 관인 배포에 대해 질문을 받았지만 나중에 풀려났다.[16]

사마의는 맹달의 영토에 있던 7,000 가구를 중국 북부의 유주로 이주시켰다. 촉나라 장수 요경, 정타 등은 7,000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위나라에 항복했다.[17] 그러나 이 촉의 무관들은 11세기 최고의 연대기적 역사서인 ''자치통감''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진서''에만 등장한다.[18]

4. 2. 촉한의 입장

촉나라 장수 요경(姚靜), 정타(鄭他) 등은 7,000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위나라에 항복했다.[17] 그러나 이들은 11세기 최고의 연대기 역사서인 ''자치통감''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진서''에만 등장한다.[18]

5. 대중문화 속 맹달의 난

삼국지연의는 맹달의 난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맹달은 금성 태수 신의와 상용 태수 신단에게 반란을 권유했지만, 이들은 위나라를 돕고자 맹달을 속였다. 사마의는 맹달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안심시켰고, 서황은 맹달의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결국 맹달은 배신당하고 신단에게 죽임을 당했다.[1]

코에이의 게임 진 삼국무쌍 5: 맹장전에서는 "신성 전투"라는 스테이지로 맹달의 난이 등장한다. 플레이어는 위나라 측 장수 (조비, 사마의, 서황)를 선택하여 맹달을 격파해야 한다.[4]

5. 1.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 제94화에서는 맹달의 난이 극적으로 묘사되었다. 맹달은 금성 태수 신의와 상용 태수 신단에게 반란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신의와 신단은 위나라 군대를 돕기 위해 비밀리에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동의하는 척했다. 그들은 맹달에게 준비가 부족하다고 거짓말했고, 맹달은 그들을 믿었다.[1]

사마의의 사자 양기는 신성에 도착하여 맹달에게 사마의가 장안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 촉한의 침략에 대응했다고 거짓말했다. 맹달은 기뻐하며 양기를 위해 잔치를 열고 양기를 성 밖으로 배웅했다. 그는 신의와 신단에게 다음 날 반란을 일으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성 밖에 군대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맹달은 서둘러 성벽으로 달려가 그 군대가 위나라의 노장 서황이 지휘하는 군대임을 알았다. 서황은 맹달에게 항복을 외쳤지만, 맹달은 화살을 쏘아 서황의 이마에 명중시켰다. 맹달의 궁수들은 서황의 병사들에게 화살을 쏟아부어 그들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서황은 그날 밤 화살 부상으로 59세(동아시아 나이)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관에 안치되어 뤄양으로 보내져 장례를 치렀다.[1]

그때 사마의의 주력 부대가 신성 밖에 나타나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다. 다음 날, 맹달은 신의와 신단의 군대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자신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문을 열고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나가 사마의를 공격하려 했지만, 신의와 신단은 그에게 "반역자야, 도망치려 하지 마라! 어서 죽음을 받아들여라!"라고 외쳤다. 맹달은 문제가 생겼음을 감지하고 성 안으로 퇴각하려 했지만, 그의 부하 이보와 등현이 그를 배신하고 입성을 거부했다. 신단은 기진맥진한 맹달에게 다가가 그를 죽였고, 맹달의 병사들은 항복했다.[1]

사마의는 신성에 들어가 도시의 평화와 질서를 회복했다. 그는 위나라 황제 조예에게 승리를 보고했고, 조예는 맹달의 머리를 뤄양으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신의와 신단은 승진하여 사마의를 따라 촉 침공에 대응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보와 등현은 신성과 상용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1]

5. 2. 게임

코에이의 진 삼국무쌍 5: 맹장전에서 맹달의 난은 "신성 전투"라는 스테이지로 등장한다.[4] 플레이어는 위나라 측으로만 플레이할 수 있으며, 조비, 사마의 또는 서황을 선택하여 맹달을 격파해야 스테이지에서 승리할 수 있다.[4] 플레이어가 충분히 빠르다면, 촉나라의 지원군이 맹달을 돕기 전에 스테이지를 완료할 수 있다.[4]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Jin Shu
[6] 서적 Jin Shu
[7] 서적 Sanguozhi
[8] 서적 Jin Shu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Jin Shu
[11] 서적 Jin Shu
[12] 서적 Jin Shu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Jin Shu
[16] 서적 Jin Shu
[17] 서적 Jin Shu
[18] 서적 Zizhi Tongjian
[19] 서적 Jin Shu
[20] 서적 Sanguo Yanyi
[21]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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