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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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후상은 조조 휘하의 장수로, 위나라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군사마로 종군했으며, 오환 토벌에도 참여했다. 조비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황문시랑, 중령군 등을 역임했고, 위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정남장군, 형주 자사 등을 지내며 남방 경략에 힘썼다. 특히 상용을 기습하여 유봉을 격파하고, 강릉 전투에서 제갈근과 맞서 싸웠다. 말년에는 첩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기기도 했으며, 226년에 사망하여 도후로 시호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중 전투에서 황충에게 중상을 입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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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기 홍농 양씨 출신 명문가 자제인 양표는 효렴과 무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삼공을 역임하며 헌제를 옹호하려 했고 조조에게 경계받기도 했으나 강직함과 학문적 깊이로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 225년 사망 - 올돌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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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연은 조조 휘하의 장수로 동탁 토벌, 관도 전투, 황건적 토벌 등에서 활약했으며, 군수 물자 수송에도 기여했으나,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황충에게 패하여 전사했다. - 조조 휘하의 장군 - 유비
유비는 후한 말 평민 출신으로 시작하여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여러 세력을 거치며 활동하다 제갈량을 영입하여 촉한을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으나, 이릉 전투 패배 후 병사하였다. - 조조 휘하의 장군 - 사마의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던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후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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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하후상 |
원어 이름 | 夏侯尚 |
자 | 백인(伯仁) |
시호 | 도후(悼侯) |
작위 | 창릉향후(昌陵鄉侯) |
사망 | 226년 5월 ~ 6월 |
사망 장소 | 뤄양, 허난 성 |
배우자 | 조씨 부인 |
자녀 | 하후현 경회황후 하교의 부인 |
친척 | 조상 (조카) |
직업 | 군사 장군, 정치가 |
관직 경력 | |
중령군 | 220년 |
산기상시 | 220년 |
정남장군 | 220년 ~ 221년 |
정남대장군 | 221년 ~ 226년 |
형주자사 | 220년 ~ 222년 |
형주목 | 222년 ~ 226년 |
섬긴 군주 |
2. 행적
하후상은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군사마로 종군했으며, 이후 오관장문학이 되었다. 대군에서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창을 따라 참군으로 종군했다. 위나라 건국 후 정남장군 겸 형주 자사·가절·도독남방제군사가 되었다. 220년, 상용을 기습할 것을 제안하여, 서황과 함께 촉나라의 부군장군 유봉을 무찌르고 상용태수 신탐의 항복을 받아 3군 9현을 평정하고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했다.
황초 3년(222년), 문제가 직접 완에 내려와 남정할 때, 여러 군을 거느리고 조진, 장합과 함께 강릉성을 포위했다. 오나라의 제갈근이 구원군을 이끌고 오자 제갈근 군대의 배를 불태우고 수륙 병진하여 격파했으나, 주연이 강릉성에서 굳게 항전하여 함락하지는 못했다. 《삼국지》 하후상전에서는 “아직 성을 함락하지 않았는데, 군에 역병이 돌았으므로 퇴각했다.”고 서술한다. 《삼국지》 동소전, 반장전과, 또 제갈근전에 배주로 인용된 《오록》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하후상은 보병과 기병을 배를 통해 삼각주로 들여보내고 부교를 만들어 남북으로 왕래하며 성을 함락하려 했다. 대부분 이 작전을 찬성했으며, 실제로 오나라 장군 제갈근과 양찬(楊粲)은 이에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동소(董昭)의 상소를 받은 문제가 조칙을 내려 삼각주에서 빠져나오게 했고, 반장이 부교를 불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하후상 등의 군대는 삼각주를 빠져나왔다. 열흘 후 동소의 상소대로 물이 불어나 삼각지에 들어간 군대는 고립될 뻔하였다. 강릉현령 요태가 위나라와 내통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주연에게 죽임을 당했고, 제갈근이 부교를 띄워 공격해 오니, 하후상 등은 이길 수 없게 되어 퇴각했다.
문제는 하후상에게 조서를 내려, 아랫사람에게 형벌과 은혜를 베풀어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게 했다. 하후상은 이것을 장제에게 보였고, 장제는 문제에게 간언하여 이 조서를 거두게 하였다.
황초 5년(224년), 창릉향후로 봉해졌다. 하후상은 애첩이 있어 본부인 조씨를 사랑하지 않자, 문제는 애첩을 교살했다. 하후상은 비탄에 빠져 병을 얻었고, 묻은 첩을 다시 보기 위해 무덤까지 찾아갔다. 문제는 분노했으나, 오랜 신하였기에 이전처럼 은총을 내렸다.
225년, 병이 깊어져 서울로 돌아왔고, 문제는 여러 차례 문병하며 손을 잡고 울었다. 하후상이 죽자, 悼侯|도후중국어라는 시를 내렸다. 아들 하후현이 뒤를 이었고, 조카 하후봉은 영지의 300호를 받았다.
243년 가을 7월, 조방(제왕)은 조조의 묘정에 공신 20인을 제사지냈으며, 하후상도 포함되었다.
2. 1.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200년 초반,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군사마로 종군했으며, 그 후 오관장문학이 되었다. 218년 대군에서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창이 정토하러 갔는데, 하후상은 조창의 참군으로 수행했다.[1] 위나라가 건국된 후 정남장군 겸 형주 자사·가절·도독남방제군사가 되었다. 220년, 상용을 기습할 것을 건의하여, 서황과 함께 촉나라의 부군장군 유봉을 무찌르고 상용태수 신탐의 항복을 받아 3군 9현을 평정하고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했다.[1]황초 3년(222년), 문제가 직접 완에 내려와 남정할 때, 여러 군을 거느리고 조진, 장합과 함께 강릉성을 포위했다. 오나라의 제갈근이 구원군을 이끌고 오자 제갈근 군대의 배를 불태우고 수륙 병진하여 격파했으나, 주연이 강릉성에서 굳게 항전하여 함락하지는 못했다. 《삼국지》 하후상전에서는 “아직 성을 함락하지 않았는데, 군에 역병이 돌았으므로 퇴각했다.”고 서술한다. 《삼국지》 동소전, 반장전과, 또 제갈근전에 배주로 인용된 《오록》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하후상은 보병과 기병을 배를 통해 삼각주로 들여보내고 부교를 만들어 남북으로 왕래하며 성을 함락하려 했다. 대부분 이 작전을 찬성했으며, 실제로 오나라 장군 제갈근과 양찬(楊粲)은 이에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동소(董昭)의 상소를 받은 문제가 조칙을 내려 삼각주에서 빠져나오게 했고, 반장이 부교를 불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하후상 등의 군대는 삼각주를 빠져나왔다. 열흘 후 동소의 상소대로 물이 불어나 삼각지에 들어간 군대는 고립될 뻔하였다. 강릉현령 요태가 위나라와 내통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주연에게 죽임을 당했고, 제갈근이 부교를 띄워 공격해 오니, 하후상 등은 이길 수 없게 되어 퇴각했다.[1]
문제는 하후상에게 조서를 내려, 아랫사람에게 형벌과 은혜를 베풀어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게 했다. 하후상은 이것을 장제에게 보였고, 장제는 문제에게 간언하여 이 조서를 거두게 하였다.[1]
2. 1. 1. 기주 평정
200년 초반,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군사마(軍司馬)로 종군했다.[1] 이후 오관장문학(五官將文學)이 되었다.[1] 218년 5월, 오환족 무신저(無臣氐) 분파가 대군과 상곡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창의 참군(參軍)으로 종군하여 진압을 도왔다.[1]2. 1. 2. 오환 토벌
218년 5월, 오환족 무신저(無臣氐) 분파가 대군(현재의 허베이성 위현 주변)과 상곡군(현재의 베이징 주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 조조는 아들 조창에게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게 했으며, 이때 하후상은 조창의 참군(參軍)으로 종군하여 무신저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1]2. 2. 조비와의 관계와 위나라 건국
하후상은 젊어서부터 조비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군사마로 종군했으며, 이후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자 그의 문학이 되었다. 두습은 하후상이 조비에게 이로운 친구가 아니라고 조조에게 간언했지만, 조비의 총애는 변함이 없었다.[11]220년, 조조가 낙양에서 사망하자, 하후상은 조조의 관을 옹위하여 봉토인 업(鄴; 현재의 한단, 허베이성)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 조비는 조조의 후계자로서 위나라의 왕이 되었고, 하후상을 산기상시, 중령군으로 임명했다. 또한, 하후상의 공헌을 인정하여 평릉정후에 봉했다.[11]
220년 말,[12] 조비는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다. 조비는 하후상을 평릉향후로 승격시키고, 정남장군, 형주 자사, 가절, 도독남방제군사로 임명하여 위나라 남부 국경의 군사 문제를 감독하게 했다.[13]
2. 2. 1. 조비와의 친분
조비는 하후상의 뛰어난 계략과 지모를 높이 평가하여, 신분을 초월한 친한 친구처럼 대했다고 한다(『위서』).[11] 조조가 오관중랑장이 되었을 때, 하후상은 그의 문학이 되었다. 두습은 "하후상은 사람에게 이로운 친구가 아니다"라고 평하며, 조조에게 하후상을 멀리하라고 조언했지만, 조비의 총애는 변함이 없었다.조비가 황제에 즉위한 후, 하후상은 평릉향후로 승격되었고, 정남장군, 형주자사, 가절, 도독 남방 제군사가 되었다.[13]
224년, 창릉향후로 봉해졌다. 하후상은 사랑하는 첩이 있었는데, 정실 부인은 종실 출신이었기에 조비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첩을 죽였다. 그러자 하후상은 슬픔에 사무쳐 정신이 이상해졌고, 이미 매장한 애첩을 그리워하며 무덤을 파헤치는 일까지 벌였다. 이를 들은 조비는 화가 나서 "두습의 말이 옳았다"라고 말했지만, 곧 후회하며 다시 하후상을 후하게 대했다.[31]
225년, 병이 악화되어 낙양으로 돌아왔다. 226년, 조비는 하후상의 병상을 여러 번 문병했고,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후상은 사망했고,[29] '''도후'''라는 시가 내려졌다.
2. 2. 2. 위나라 건국 기여
조비가 황제에 즉위한 후 하후상은 평릉향후로 승격되었고, 정남장군, 형주자사, 가절, 도독 남방 제군사가 되었다.[13] 상용은 촉의 세력 아래에 있었지만, 의도태수 맹달이 유봉과 대립하다 위나라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후상은 상용을 기습할 것을 제안했고, 맹달, 서황과 함께 유봉과 태수 신탐 등을 격파하여 상용, 서성, 방릉의 3군 9현을 위나라의 판도에 넣었고,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했다.[11]오의 손권이 조비에게 신종을 신청했을 때, 하후상은 이를 믿지 않고 오에 대한 군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222년, 조비가 직접 완으로 행차하여 오를 삼면에서 공격하려 하자, 하후상은 제군을 통괄하여 조진, 장합[30]과 함께 강릉을 포위했다. 하후상은 오의 제갈근과 대치했는데, 장강의 중주를 중심으로 수륙 양군을 전개한 오군에 대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하류에서 몰래 장강을 건너 야습을 가하고 적의 수군을 화공하여 크게 격파했다. 주연이 강릉성을 굳게 지켰고, 위군 내에서 역병이 유행했기 때문에 하후상은 조칙에 의해 퇴각해야 했다.
귀국 후, 하후상은 가절월이 되었고, 형주목으로 승진하여 600호를 가증받아 1900호가 되었다. 당시 형주는 황폐해져 있었고, 한수를 사이에 두고 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민족도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은 강남으로 도망갔지만, 하후상은 상용에서 새롭게 길을 개발하고 군대를 이끌고 서방을 진무했다. 이 때문에 산악이나 평지의 이민족으로 항복하는 자가 많았고, 불과 몇 년 만에 수천 호의 주민이 귀순했다. 또한, 맹달과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하후상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맹달은 위나라에 반역하지 않았다.
224년, 창릉향후로 봉해졌다.[31]
2. 2. 3. 관직 변동
200년 초반에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군사마로 종군했으며, 그 후 오관중랑장의 문학이 되었다. 위나라 황조가 수립되자 정남장군 겸 형주 자사·가절·도독남방제군사가 되었다.[13] 220년에는 상용을 기습할 것을 상주하여, 서황과 함께 촉나라의 부군장군 유봉을 무찌르고 상용태수 신탐의 항복을 받아 3군 9현을 평정해 정남대장군이 되었다.황초 3년(222년) 문제가 친히 완에 내려와 남정할 때, 여러 군을 거느리고 조진, 장합[30]과 함께 강릉성을 포위하고, 오나라의 제갈근이 구원군을 이끌고 오자 제갈근 군대의 배를 불태우고 수륙 병진하여 이를 격파했다. 그러나 강릉성은 주연이 항전하여 함락할 수 없었다. 《삼국지》 하후상전에서는 “아직 성을 함락하지 않았는데, 군에 역병이 돌았으므로 퇴각했다.”고 서술한다. 《삼국지》 동소전, 반장전과, 또 제갈근전에 배주로 인용된 《오록》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하후상은 보병과 기병을 배를 통해 삼각주로 들여보내고, 부교를 만들어 남북으로 왕래하려 하였고, 이렇게 하여 성을 함락하고자 했다. 논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작전을 찬성했으며, 실제로 오나라 장군 제갈근과 양찬(楊粲)은 이런 하후상의 전법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동소(董昭)의 상소를 받은 문제가 조칙을 내려 삼각주에서 빠져나오게 했고, 반장이 부교를 전소시킬 작정으로 떼를 만들어 띄우려고 하고 있었으므로 하후상 등의 군대는 삼각주를 빠져나왔다. 열흘 후 동소의 상소대로 물이 불어나 삼각지에 들어간 군대는 고립될 뻔하였다. 강릉현령 요태가 위나라와 내통하려 했으나 들통나 주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제갈근이 부교를 띄워 공격해 오니, 하후상 등은 이길 수 없게 되었으므로 퇴각했다.
문제는 하후상에게 조서를 내려, 아랫사람에게 형벌과 은혜를 베풀어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게 했다. 하후상은 이것을 장제에게 보였고, 장제는 문제에게 간언하여 이 조서를 물려오게 하였다.
황초 5년(224년), 창릉향후로 봉해졌다.
225년, 병이 악화되어 낙양으로 귀환했다. 226년, 조비는 하후상의 병상을 여러 번 문병했고[31],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29], '''도후'''로 시되었다.
하후상의 관직 변동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기 | 관직 | 비고 |
---|---|---|
200년 이전 | 군사마(軍司馬) | 조조 |
오관장문학(五官將文學) | 조조 | |
황문시랑(黃文侍郞) | 조조 | |
산기상시(散騎常侍) | 조조 | |
중령군(中領軍) | 조조 | |
220년 | 정남장군(征南將軍) 영(領) 형주자사(荊州刺史) · 가절(加節) · 도독남방제군사(都督南方諸軍事) | 조비 |
220년 이후 |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영(領) 형주목(荊州牧) · 가절월(假節鉞) | 조비 |
2. 3. 남방 경략과 군사적 업적
200년 초반,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군사마로 종군했으며, 이후 오관장문학이 되었다. 대군에서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창을 따라 참군으로 종군했다. 위나라 건국 후 정남장군 겸 형주 자사·가절·도독남방제군사가 되었다.조비는 조조의 뒤를 이어 위나라 왕이자 재상이 되었고, 하후상을 산기상시, 중령군으로 임명했다. 조비는 하후상의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평릉정후(平陵亭侯)에 봉했다.[11]
220년 말,[12]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동한을 멸망시키고 조위를 건국한 조비는 하후상을 평릉향후(平陵鄕侯)로 승격시키고, 정남장군(征南將軍)과 형주 자사(刺史)에 임명하여 위나라 남부 국경의 군사 문제를 감독하게 했다.[13]
하후상은 젊은 시절부터 계략과 지모가 뛰어나 조비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며, 신분을 초월한 친분을 유지했다(『위서』). 조조의 기주 평정 시 군사마로서 기병을 이끌고 종군했다.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자, 하후상은 그의 문학이 되었다. 두습은 하후상을 "사람에게 이로운 친구가 아니다"라고 평하며 조조에게 그를 멀리할 것을 건의했으나, 조비의 총애는 변함이 없었다.
위나라 건국 시 하후상은 황문시랑이 되었다. 대군에서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창을 따라 정벌에 참여했다. 조조 사후, 하후상은 절을 들고 시신을 지켜 업으로 귀환했고, 그 공적으로 평릉정후에 봉해지고 중령군에 임명되었다.
오의 손권이 조비에게 신종을 신청했을 때, 하후상은 이를 불신하고 오에 대한 군비를 유지했다.
문제는 하후상에게 형벌과 은혜를 베풀어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조서를 내렸다. 하후상은 이를 장제에게 보였고, 장제는 문제에게 간언하여 조서를 철회하게 했다.
224년, 하후상은 창릉향후로 봉해졌다.[20]
2. 3. 1. 상용 전투
220년, 하후상은 상용을 기습할 것을 제안하여, 서황과 함께 촉한(촉나라)의 부군장군 유봉을 무찌르고 상용태수 신탐의 항복을 받아 3군 9현을 평정했다. 이 공으로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했다.[15]222년, 조비가 직접 완으로 행차하여 오나라를 공격할 때, 하후상은 여러 군을 거느리고 조진, 장합과 함께 강릉을 포위했다.[30] 오나라의 제갈근이 구원군을 이끌고 오자 제갈근 군대의 배를 불태우고 수륙 병진하여 이를 격파했다. 그러나 강릉성은 주연이 항전하여 함락할 수 없었고, 위군 내에 역병이 돌아 퇴각했다.
2. 3. 2. 강릉 전투
손권은 조비의 또 다른 경쟁자였으며, 조비가 220년 말에 황제가 된 후 처음에는 조위에 충성을 맹세했다. 조비는 이에 매우 기뻐하며 손권에게 "오왕"이라는 제후왕의 칭호를 수여하고, 강남 지역과 남부 형주에 대한 손권의 영유권을 인정했다.[12] 하후상은 손권이 위의 통치에 복종하는 척하는 것임을 알고 조비에게 손권을 경계할 것을 촉구했다. 하후상이 예상한 대로 손권은 222년에 조비와 관계를 끊고 독립적인 동오 정권의 황제를 선포했다.[12][16]222년, 조비는 손권에 대한 보복으로 오를 상대로 일련의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그는 하후상, 조진 등을 시켜 강릉(江陵; 현재의 후베이성, 장링현)을 공격하게 했으며, 강릉은 오의 장군 주연이 지키고 있었다. 조비는 완(宛; 현재의 허난성, 난양시)에 주둔하며 지원을 제공했다. 손권은 장군 제갈근에게 하후상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제갈근은 강 곳곳에 해군을 배치했다. 그날 밤, 하후상은 약 10,000명의 군사에게 소형 선박에 탑승하여 강을 건너 제갈근을 육상과 해상에서 기습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오의 배를 불태우고 강 반대편의 오 군영을 파괴하며 제갈근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17] 223년,[18] 위군이 강릉을 포위하는 동안 전염병이 발생하자 조비는 위군에게 철수를 명령했고, 이는 작전의 종결을 가져왔다. 하후상의 작전 기여에 대한 보상으로 조비는 그에게 식읍 600호를 추가로 하사하여 총 1,900호가 되었다. 그는 또한 하후상에게 의장용 도끼를 하사하고 형주 목으로 승진시켰다.[19]
2. 3. 3. 형주 통치
220년, 조비가 황제에 즉위한 후 하후상은 평릉향후로 승격되었고, 정남장군, 형주자사, 가절, 도독 남방 제군사가 되었다. 촉의 상용 공격을 제안하여 맹달, 서황과 함께 유봉과 신탐 등을 격파하고 상용, 서성, 방릉 3군 9현을 위나라에 편입시켰다.[12] 이후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했다.오의 손권이 조비에게 신종을 신청했을 때, 하후상은 이를 믿지 않고 오에 대한 군비를 유지했다.
222년, 조비가 완으로 행차하여 오를 공격할 때, 하후상은 조진, 장합[30]과 함께 강릉을 포위했다. 제갈근이 이끄는 오군과 대치 중, 하후상은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야습을 감행, 적의 수군을 불태우는 등 크게 승리했다. 그러나 주연이 지키는 강릉성은 함락하지 못하고, 위군 내 역병 유행으로 조칙에 따라 퇴각했다.[17][18]
귀국 후 가절월, 형주목으로 승진하고 600호를 더 받아 1900호가 되었다. 당시 형주는 황폐했고, 한수 이남으로 많은 주민이 이주한 상태였다. 하후상은 상용에서 새 길을 내고 개발을 진행하며 서쪽을 진무하여, 산악 및 평지 이민족들의 항복을 받아 수천 호의 주민을 귀순시켰다. 맹달과의 친분으로, 하후상이 살아있는 동안 맹달은 위나라에 반역하지 않았다.[19]
224년, 창릉향후로 봉해졌다.[20]
2. 4. 말년과 죽음
황초 5년(224년), 창릉향후로 봉해졌다. 하후상은 애첩을 총애하여 정실 부인 조씨를 멀리하자, 문제는 애첩을 교살했다. 하후상은 비탄에 빠져 병을 얻었고, 묻은 첩을 다시 보기 위해 무덤까지 찾아갔다. 문제는 분노했으나, 오랜 신하였기에 이전처럼 은총을 내렸다.[23][24]이듬해(225년), 병이 깊어져 서울로 돌아왔고, 문제는 여러 차례 문병하며 손을 잡고 울었다. 하후상이 죽자, 도후(悼侯)라는 시를 내렸다.[25][26] 아들 하후현이 뒤를 이었고, 조카 하후봉은 영지의 300호를 받았다.
243년 가을 7월, 조방(제왕)은 조조의 묘정에 공신 20인을 제사지냈으며, 하후상도 포함되었다.
2. 4. 1. 애첩의 죽음
하후상은 총애하는 첩이 있었으나, 정실 부인인 조씨는 소홀히 대했다. 조비는 정실 부인이 자신의 종실이었기에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첩을 죽였다.[23] 하후상은 슬픔에 잠겨 병을 얻었고, 매장한 첩을 그리워하여 무덤을 파헤치기까지 했다. 조비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두기의 말이 옳았다"라고 말했지만, 곧 후회하고 하후상을 이전처럼 후하게 대했다.[24]2. 4. 2. 조비와의 우정
조비는 젊은 시절부터 하후상의 계략과 지모를 높이 평가하여, 신분을 초월한 친한 친구로서 교류를 하였다.[25]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군사마로서 기병을 이끌고 종군했다.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자 그의 문학이 되었다. 두습은 "하후상은 사람에게 이로운 친구가 아니다"라고 평하며 조조에게 하후상을 멀리할 것을 호소했지만, 조비의 총애는 변함이 없었다.위나라 건국 시 황문시랑이 되었다. 대군에서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창을 따라 정벌에 참여했다. 조조가 낙양에서 사망하자 하후상은 절을 손에 들고 시신을 지켜 업으로 귀환했다. 전후 공적을 인정받아 평릉정후에 봉해졌으며, 중령군에 임명되었다.
조비가 황제에 즉위한 후 평릉향후로 승격되었고, 정남장군, 형주자사, 가절, 도독 남방 제군사가 되었다. 촉의 세력 아래에 있던 상용을 기습할 것을 제안했고, 맹달, 서황과 함께 유봉과 태수 신탐 등을 격파하여 상용, 서성, 방릉의 3군 9현을 위나라의 판도에 넣었다. 이 공으로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했다(촉지 「유봉전」). 오의 손권이 조비에게 신종을 신청했을 때, 하후상은 이를 믿지 않고 오에 대한 군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222년, 조비가 직접 완으로 행차하여 오를 삼면에서 공격하려 할 때, 하후상은 제군을 통괄하여 조진, 장합[30]과 함께 강릉을 포위했다. 하후상은 오의 제갈근과 대치하며 장강의 중주를 중심으로 수륙 양군을 전개했다. 이에 하후상은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하류에서 몰래 장강을 건너 야습을 가하고, 적의 수군을 화공하여 크게 격파했다. 주연이 강릉성을 굳게 지켰고(오지 「주연전」), 위군 내에서 역병이 유행했기 때문에 하후상은 조칙에 의해 퇴각해야 했다(『위지』「동소전」).
224년, 창릉향후로 개봉되었다. 하후상은 사랑하는 첩이 있었기 때문에 정실 부인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정실 부인이 종실 출신이었기 때문에 불쾌하게 여긴 조비는 사람을 보내 첩을 죽였다. 그러자 하후상은 슬픔에 사무쳐 정신이 병들었고, 매장한 애첩을 그리워하며 묘를 파헤치는 짓까지 했다. 이를 들은 조비는 화가 나서 "두습의 말이 옳았다"라고 말했지만, 이윽고 후회하여 다시 하후상을 후하게 대했다.
225년, 병이 악화되어 낙양으로 귀환했다. 226년, 조비는 하후상의 병상을 여러 번 문병했고[31],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후상은 사망했고[29], '''도후'''라는 시를 받았다. 아들 하후현이 뒤를 이었고, 조카 하후봉은 하후상의 소유지 중 300호를 나누어 받고 관내후를 받았다. 조비는 조칙을 내려 하후상의 죽음을 애석해했고, 정남대장군, 창릉향후의 인수를 보냈다고 한다(『위서』).
2. 4. 3. 죽음과 사후 추증
하후상은 시로 悼侯|도후중국어를 받았다.[25] 조비는 그를 위해 다음과 같은 추도문을 지었다. "하후상은 어린 시절부터 나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충성스럽고 진실하며 믿음직했다. 비록 우리는 부모는 달랐지만 형제와 같았다. 그는 나의 위와 심장과 같았고, 발톱과 이빨과 같았다. 그는 총명하고 통찰력 있으며 뛰어났다. 그의 생이 너무 일찍 끝난 것이 애석하다. 아,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이에 그에게 남쪽을 공격하는 선봉대장 직함을 수여하고 창릉후의 인장을 수여한다."[26]하후상은 사랑하는 첩이 있어 정실 부인 조씨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정실 부인은 종실 출신이었기 때문에, 불쾌하게 여긴 조비는 사람을 보내 첩을 죽였다. 그러자 하후상은 슬픔에 사무쳐 정신이 병들었고, 매장한 애첩을 그리워하며 묘를 파헤치는 짓까지 했다. 이를 들은 조비는 화가 나서 "두습의 말이 옳았다"라고 말했지만, 이윽고 후회하여 다시 하후상을 후하게 대했다.
225년, 병이 악화되어 낙양으로 귀환했다. 226년, 조비는 하후상의 병상을 여러 번 문병했고,[31]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29] 아들 하후현이 뒤를 이었다. 또한, 조카 하후봉은 하후상의 소유지 중 300호를 나누어 받고 관내후를 받았다.
조비는 조칙을 내려 하후상의 죽음을 애석해했고, 정남대장군, 창릉향후의 인수를 보냈다고 한다.
243년 가을 7월, 조방(제왕)은 조칙을 내려 조조의 묘정에 공신 20인을 제사지냈는데, 그 중에는 하후상도 포함되어 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하후상
219년 한중 전투에서 형 하후덕과 함께 참전한 하후상은 촉나라의 노장 황충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진식과의 포로 교환 과정에서 황충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하후상은 조조와 유비의 한중을 둘러싼 전투에서 하후연의 부장으로 등장한다. 황충과의 전투에서 사로잡혔으며, 적장 진식과의 포로 교환 시, 뒤에서 황충에게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는다. 이후, 상용의 맹달이 모반을 일으키자, 정사대로 이를 구원하여 유봉을 격퇴한다.
3. 1. 한중 전투에서의 등장
219년 한중 전투에 형 하후덕과 함께 참가했다. 촉나라의 노장 황충에게 사로잡혔으며, 진식과 포로 교환 도중에 황충의 활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1]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정군산 전투에 유비 군대에 맞서 하후연의 부하로 참전한다. 소규모 전투에서 적에게 생포되지만, 후에 하후연에게 생포된 적의 장수 진식과 교환되어 풀려난다. 교환 과정에서 황충이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았고, 화살은 그의 등에 명중하여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2]
3. 2. 허구적 요소 비판
하후상은 219년 한중 전투에 형 하후덕과 함께 참가했다. 천탕산 전투에서 촉나라의 노장 황충에게 사로잡혔으며, 진식과 포로 교환 도중에 황충의 활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1]4. 친족 관계
4. 1. 처
하후상은 조진의 여동생과 결혼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덕양향주(德陽鄉主)로 불렸다. 그들은 아들 하후현과 딸 하후휘를 두었다.[21][22]4. 2. 자녀
- 하후현 (아들)
- 하후휘 (딸, 경회황후)
- 하교를 낳은 딸[28]
4. 3. 기타 친족
하후상은 조진의 여동생과 결혼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덕양향주(德陽鄉主)로 불렸다. 그들은 아들 하후현과 딸 하후휘를 두었다.[21][22] 조비는 하후현이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은 뒤, 작위에서 300가구를 떼어내 하후상의 조카 하후봉(夏侯奉)에게 수여했으며, 하후봉은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27]하후상에게는 하교를 낳은 딸도 있었는데, 하교의 아들인 하유(和逌)와 결혼했다.[28]
《위략(Weilüe)》에 따르면, 하후상은 장기 휘하에서 무관으로 복무한 사촌 동생 하후유(夏侯儒)를 두었다고 한다.
참조
[1]
서적
Book of Jin
[2]
서적
Sanguozhi
[3]
서적
Wei Shu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Sanguozhi
[17]
서적
Sanguozhi
[18]
서적
Zizhi Tongjian
[19]
서적
Sanguozhi
[20]
서적
Sanguozhi
[21]
서적
Sanguozhi
[22]
서적
Jin Shu
[23]
서적
Sanguozhi
[24]
서적
Sanguozhi
[25]
서적
Sanguozhi
[26]
서적
Wei Shu
[27]
서적
Sanguozhi
[28]
서적
Jin Shu
[29]
서적
晋書
[30]
서적
魏志
[31]
서적
魏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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