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 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 분쟁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 이후 슬라보니아와 시르미아 지역의 영토 분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945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내에서 국경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다뉴브 강을 경계로 하는 세르비아와 지적도 기반 경계를 주장하는 크로아티아 간의 분쟁으로 이어졌다. 주요 분쟁 지역은 아파틴 인근, 샤렌그라드 섬, 부코바르 섬 등이며, 양측은 2000년대 초 국경 결정 위원회를 설치했으나 2010년 이후 아파틴 항구 건설 계획 등으로 갈등이 심화되었다. 2015년에는 분쟁 지역 중 고르냐 시가에 미승인 국가인 리버랜드가 선포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세르비아의 영토 분쟁 - 리버랜드
리버랜드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국경 분쟁 지역에 위치한 자칭 국가로, 비트 예들리치카에 의해 건국이 선포되었으며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에 기반한 무세금 천국을 지향하지만, 영토 접근 차단과 국제적 승인 부재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 - 다뉴브강
다뉴브강은 독일에서 발원하여 흑해로 흘러드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여러 나라의 수도를 지나며 수운 및 문화적 경계 역할을 하고, 풍부한 생물다양성과 역사적 유산을 지닌 국제적인 강이다. -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 - 엔클라바 왕국
엔클라바 왕국은 2015년 폴란드인들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국경 사이 무주지에 건국을 선언한 미크로네이션으로, 리베르랜드 자유 공화국을 승인하고 주변에 유사한 미크로네이션들이 존재한다. - 무주지 - 남극조약
남극 조약은 남극 대륙의 평화적 이용, 과학적 조사, 국제 협력 증진, 영유권 주장 동결, 핵 관련 활동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제 조약으로, 남극 조약 체제를 통해 관리되며 50개 이상의 국가가 가입되어 있다. - 무주지 - 마리버드랜드
마리버드랜드는 아문센해, 로스해, 로스 빙붕에 접한 남극 대륙의 일부로, 서남극 빙상으로 덮여 있으며 서남극 열곡계의 일부를 포함하고, 리처드 버드에 의해 탐험되어 그의 아내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으며, 다양한 탐사 활동과 연구 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 분쟁 | |
---|---|
지도 | |
![]() | |
개요 | |
분쟁 명칭 | 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경 분쟁 |
위치 |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도나우강을 따라 위치한 지역 |
관련 국가 |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
상세 정보 | |
분쟁 원인 | 도나우강의 흐름 변화로 인한 국경선 변경 문제 |
분쟁 지역 면적 | 약 140 제곱킬로미터 |
현재 상황 | 일부 지역은 세르비아가 점령하고 크로아티아가 영유권을 주장 어느 국가도 주장하지 않는 땅인 포켓지는 '리버랜드'와 같은 미승인 국가가 위치 |
국경 | |
국경 길이 | 약 140km |
국경선 형태 | 도나우강을 따라 형성 |
주요 분쟁 지역 | |
세르비아 통제 지역 | 샤렌그라드 섬과 모크린스카 아다를 포함한 도나우강 우안의 일부 지역 |
크로아티아 통제 지역 | 도나우강 좌안의 일부 지역 (어느 국가도 주장하지 않는 땅) |
관련 정보 | |
관련 사건 | 유고슬라비아 전쟁 이후 국경 분쟁 심화 리버랜드 건국 시도 |
참고 | 도나우강의 흐름 변화 유엔의 중재 노력 |
2. 역사적 배경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시르미아를 포함하는 세르비아 보이보디나가 잠시 선포되었으나, 1년 후 폐지되고 세르비아 및 테메스 바나트 보이보디나 관할령으로 대체되면서 시르미아는 다시 슬라보니아 왕국으로 돌아갔다. 1868년 크로아티아-헝가리 협정에 따라 슬라보니아 왕국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 통합되었고, 1881년에는 슬라보니아 군사 변경 지역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국가의 일부가 되었고, 바나트, 바치카, 바라냐는 세르비아 왕국으로 직접 통합을 선포했다.[6] 이 지역들은 1920년 트리아농 조약에서 설정된 "클레망소 라인"에 따라 헝가리의 바라냐 및 바치-보드로그 카운티가 분할되면서 형성되었다.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영토를 '바노비나'로 재편했다. 부코바르, 빈코브치, 시드, 주파냐 및 스렘스카 미트로비차 구역은 투즐라에 주둔한 드린스카 바노비나의 일부가 되었다. 1939년 Cvetković-Maček 협정으로 크로아티아 바노비나가 창설되면서 시드와 일로크 구역이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에 포함되었다.[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는 1945년 2월 24일 크로아티아의 국경에 대한 윤곽을 만들었지만, 바라냐 등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6] 1945년 4월부터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였던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드라바 강을 따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과의 국경을 설정하려 했고, 크로아티아는 이에 반대하며 부코바르, 빈코브치, 바라냐, 솜보르 지역에 대한 주장을 제기했다.[6]
1945년 6월 밀로반 질라스가 주재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어 분쟁 지역을 확인하고, 바치카 구역은 보이보디나에, 바라냐 구역은 크로아티아에 할당했다.[6] 부코바르 구역도 크로아티아에 할당되었으며, 일로크와 시드는 보이보디나에 할당되었다. 이후 세르비아 의회는 보이보디나의 국경을 설정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질라스 위원회가 제안한 경계선을 명시하며 임시적이라고 명시했다. 1947년, 보이보디나 농업부는 부코바르 당국이 4개의 강 섬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다는 불만을 제기했고, 이후 연방 정부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연방 당국은 크로아티아의 입장을 지지했다.[6] 1948년까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Bapska 마을을 크로아티아로, Jamena를 보이보디나로 넘기는 국경 수정에 동의했지만, 추가 변경은 합의되지 않았다.[6]
2. 1. 19세기 이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된 1699년, 대 터키 전쟁의 결과로 슬라보니아와 시르미아의 일부가 오스만 제국에서 합스부르크 군주국으로 이전되면서 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경 분쟁이 시작되었다. 시르미아의 나머지 지역은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을 통해 합스부르크 군주국으로 이전되었다. 이전된 영토는 군주국 내에서 동쪽 경계가 도나우 강에 설정된 슬라보니아 왕국으로 조직되었으며, 사바 강을 따라 뻗어 있는 군사 변경 지역의 방어 벨트는 빈에서 직접 통치되었다.이후 이 지역에서는 1848년 헝가리 혁명 동안 시르미아를 영토로 포함하는 단명한 세르비아 보이보디나가 선포되었다. 1년 후 세르비아 보이보디나는 폐지되고 세르비아 및 테메스 바나트 보이보디나의 관할령으로 대체되었으며, 시르미아는 슬라보니아 왕국으로 반환되었다. 1868년 크로아티아-헝가리 협정에 따라 슬라보니아 왕국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 통합되었고, 1881년에는 슬라보니아 군사 변경 지역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2. 2. 19세기 ~ 20세기 초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과 함께 대 터키 전쟁의 결과로 슬라보니아와 시르미아 일부가 오스만 제국에서 합스부르크 군주국으로 이전되면서 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경 분쟁이 시작되었다.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을 통해 시르미아의 나머지 지역도 합스부르크 군주국으로 넘어갔다. 이전된 영토는 군주국 내에서 동쪽 경계를 도나우 강으로 하는 슬라보니아 왕국으로 편성되었고, 사바 강을 따라 설치된 군사 변경 지역의 방어 벨트는 빈에서 직접 통치했다.이후 이 지역에서는 여러 차례 영토 변화가 있었다.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에는 시르미아를 포함하는 세르비아 보이보디나가 잠시 선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1년 후 세르비아 보이보디나는 폐지되고 세르비아 및 테메스 바나트 보이보디나 관할령으로 대체되면서 시르미아는 다시 슬라보니아 왕국으로 돌아갔다. 1868년 크로아티아-헝가리 협정에 따라 슬라보니아 왕국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 통합되었고, 1881년에는 슬라보니아 군사 변경 지역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8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국가의 일부가 되었고, 바나트, 바치카, 바라냐는 같은 해 11월 25일 세르비아 왕국으로의 직접 통합을 선포했다.[6] 이 지역들은 1920년 트리아농 조약에서 설정된 "클레망소 라인"에 따라 헝가리의 바라냐 및 바치-보드로그 카운티가 분할되면서 형성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은 회의에서 오시예크시의 자연적 배후지라는 점을 들어 남부 바라냐 영토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에 양도할 것을 주장했다. "클레망소 라인" 남쪽 영토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존재했던 행정 구역으로 분배되었으며, 1922년 행정적으로 재편되었다. 이 모든 영토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1929년 유고슬라비아로 개칭)으로 통합되었다.
2. 3. 전간기 (1918년 ~ 1945년)
1848년 헝가리 혁명 동안 시르미아를 영토로 포함하는 단명한 세르비아 보이보디나가 선포되었다. 1년 후 세르비아 보이보디나는 폐지되고 세르비아 및 테메스 바나트 보이보디나의 관할령으로 대체되었으며, 시르미아는 슬라보니아 왕국으로 반환되었다.[6] 1868년 크로아티아-헝가리 협정에 따라 슬라보니아 왕국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 통합되었으며,[6] 1881년에는 슬라보니아 군사 변경 지역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에 완전히 병합되었다.[6]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말,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국가의 일부가 되었고, 바나트, 바치카, 바라냐는 1918년 11월 25일에 세르비아 왕국으로 직접 통일을 선포했다. 이들은 1920년 트리아농 조약을 통해 제정된 "클레망소 라인"을 따라 헝가리 바라냐 및 바치-보드로그 카운티가 분할된 후 형성되었다. 남부 바라냐의 영토는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이 회의에서 오시예크시의 자연적인 배후지라고 주장한 전제하에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에 양도되었다.[6] "클레망소 라인" 남쪽의 영토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존재했던 행정 구역으로 분배되었으며, 1922년에 영토가 행정적으로 재편성되었다.[6] 이 모든 영토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1929년에 유고슬라비아로 개명됨)으로 통합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1918년 세르비아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아래 중앙 집권적인 군주국으로 설립되었다.[6] 1922년, 이 지역은 '오블라스트'로 재편되었다. 바라냐는 바치카와 함께 노비사드 오블라스트에 통합되었고, 시르미아는 부코바르에 주둔한 별도의 오블라스트가 되었으며, 오시예크는 슬라보니아 오블라스트에 통합되었다.[6] 1929년 1월 6일의 왕령 선포에 의해 1921년 헌법이 폐지되고 의회가 해산되었으며, 절대 왕정이 선포되었다. 국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명되었고, 영토는 '바노비나'로 재편되었다.
논쟁의 대상이 된 지역과 관련하여 가장 큰 변화는 시르미아에서 일어났는데, 부코바르, 빈코브치, 시드, 주파냐 및 스렘스카 미트로비차 구역이 투즐라에 주둔한 드린스카 바노비나의 일부가 되었다. 분쟁 지역의 북쪽 절반은 바라냐와 바치카 전체와 함께 다뉴브 바노비나에 통합되었다. 2년 후인 1931년, 부코바르, 빈코브치, 주파냐 구역이 사브스카 바노비나로 이관되었다.[6] 1939년에는 베오그라드의 당국과 자그레브의 야당 간의 격렬한 협상 끝에 합의된 내용의 일부로 추가적인 영토 재편이 이루어졌다. Cvetković-Maček 협정으로 알려진 이 협정은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창설했다.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창설은 유고슬라비아 연방화의 첫걸음이었으며, 슬로베니아 자치 단위도 구상되었고, 나머지 국가는 세르비아 단위가 되도록 계획되었다.[6] 크로아티아-세르비아 경계와 관련하여, 1939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경계 획정은 시드와 일로크 구역을 포함했다.[6] 이 협정의 어떤 버전에도 바라냐가 크로아티아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는 분쟁 지역의 북쪽 절반이 모든 버전에서 크로아티아에서 제외될 것임을 의미했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 현재)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는 1945년 2월 24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크로아티아의 국경에 대한 첫 번째 일반적인 윤곽을 만들었다.[6] 그러나 바라냐 등 국경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6] 1945년 4월부터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였던 새로 설립된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드라바 강을 따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과의 국경을 설정하여 바라냐, 다뉴브 강, 그리고 부코바르–주파냐 선을 포함시키려 했다.[6] 보이보디나의 주장에 맞서 크로아티아 당국은 부코바르, 빈코브치, 바라냐, 그리고 솜보르 지역에 대한 반대 주장을 제기했다.[6]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 당국은 1945년 6월 밀로반 질라스가 주재하는 5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바치카의 수보티차, 솜보르, 아파틴, 오자키 구역, 바라냐의 바티나 및 다르다 구역, 그리고 스레미아의 부코바르, 시드 및 일로크 구역을 분쟁 지역으로 확인했다.[6] 바치카 구역은 보이보디나에, 바라냐 구역은 크로아티아에 할당되었는데, 이는 주로 민족적 경계선을 따랐다. 위원회는 또한 유고슬라비아가 헝가리로부터 바야 지역을 획득할 경우 바치카에 대한 결정이 재검토될 것이라고 언급했다.[6] 부코바르 구역도 크로아티아에 할당되었으며, 일로크와 시드는 보이보디나에 할당되었다. 일로크의 경우, 이 문제는 당국의 경계선 양쪽의 통합이 이루어질 때까지 잠정적인 것으로 명시되었으며, 이후 재검토될 예정이었다.[6]
이후 세르비아 의회는 보이보디나의 국경을 설정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질라스 위원회가 제안한 경계선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임시적이라고 명시했다. 법률에 따르면 국경은 헝가리 국경에서 일로크까지 다뉴브 강을 따라가고, 다뉴브 강을 건너 일로크, 샤렌그라드, 모호보를 크로아티아에 남겨둔 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오파토바츠, 로바스, 토바르니크, 포드그라제, 아프셰브치, 리포바츠, 스트로신치, 예메나의 지적 자치체를 크로아티아에 남겨두고, 이 선의 동쪽 모든 지역을 보이보디나에 두었다.[6] 일로크를 크로아티아에 할당한 것은 질라스 위원회의 결정과 달랐는데, 이는 1945년 또는 1946년에[6] 일로크 주민들이 크로아티아 편입을 지지하는 주민 투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6]
1947년, 보이보디나 농업부는 세르비아 임업부에 부코바르 당국이 4개의 강 섬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다는 불만을 제기했고, 이후 크로아티아 임업부에도 같은 문제에 대해 도움을 요청했다. 크로아티아가 이 요청을 거부하자, 세르비아 당국은 연방 정부에 의존했다. 연방 당국은 상호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했으며, 보이보디나가 국경에 관한 법률을 해석하는 방식, 즉 국경이 다뉴브 계곡의 최심수로를 따라 흐른다는 것(강의 중간 지점)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법률은 그러한 문구를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 1947년 4월 18일자 서한에서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분쟁 중인 강 섬이 부코바르 지역의 영토이며, 국경이 다르게 정의되기 전에는 해당 영토를 보이보디나로 이전할 수 없다고 밝혔다.[6]
1947년 5월까지, 보이보디나 당국은 다뉴브 강을 따라 국경의 위치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크로아티아 당국과 분쟁이 있었고, 분쟁을 중재하도록 요청받은 연방 당국이 크로아티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동시에 보이보디나는 크로아티아가 이전에 양도받았던 다뉴브 강 우안의 영토(바로쉬-비자 및 말라 시가)를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다.[6] 유고슬라비아 체제 내에서 이 문제는 연방 당국에 의해 해결이 권장되지 않았고, 관련 지역의 경제적 가치가 제한적이며, 사람이 살지 않고 자주 침수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6]
1948년까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Bapska 마을을 크로아티아로, Jamena를 보이보디나로 넘기는 두 가지 국경 수정에 동의했다. 그러나 국경에 대한 추가 변경은 합의되지 않았다.[6]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군사지리연구소에서 1967년에 발행한 이 지역 지도는 분쟁에서 크로아티아의 주장에 해당하는 지적도 기반 경계를 따라 국경을 묘사하고 있다.[6]
3. 영토 분쟁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국경 분쟁은 다뉴브 강을 따라 형성된 국경에 대한 양국의 서로 다른 주장으로 인해 발생한다. 분쟁 지역은 다뉴브 강의 140km 구간에 걸쳐 있으며, 최대 140km2의 영토가 관련되어 있다. 다른 자료에서는 분쟁 지역의 크기를 100km2로 추정하며, 이 중 90%가 세르비아가 통제하는 다뉴브 강 동쪽 둑에 위치한다고 언급한다.
크로아티아는 지적 자치구의 경계를 따라 국경선을 주장하는 반면, 세르비아는 다뉴브 강의 현재 흐름을 따르는 국경선을 주장한다. 지적 기반 경계선은 19세기에 강물의 흐름 변화와 수리 공학 작업으로 인해 변경된 다뉴브 강의 이전 강바닥을 반영한다.[2]
3. 1. 20세기
아파틴 마을 근처에 분쟁 중인 영토의 대부분이 있으며, 샤렌그라드 섬과 부코바르 섬은 특히 논쟁적인 부분으로 언급된다. 추가적인 분쟁 지역은 바치카 팔란카 마을 근처, 솜보르 시정촌, 크로아티아, 헝가리 및 세르비아의 삼각점에 위치해 있다.[1] 1945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연방 구성 요소 간의 경계를 결정하기 위해 설립된 딜라스 위원회에 대해 크로아티아는 지적 기반 경계를 채택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세르비아는 동일한 위원회가 경계를 다뉴브강의 흐름으로 식별했다고 주장한다.[2] 1991년, 유고슬라비아 평화 회의 중재 위원회는 유고슬라비아의 연방 단위 간의 경계가 어떠한 특정 주장이나 선의 위치를 언급하지 않고 불가침 국제 국경이 되었다고 판결했다. 판결 전,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크로아티아 독립 이후 경계가 변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3]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이후 통제선은 세르비아의 주장과 일치한다.[2]1947년, 보이보디나 농업부는 세르비아 임업부에 부코바르 당국이 4개의 강 섬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다는 불만을 제기했고, 이후 크로아티아 임업부에도 같은 문제에 대해 도움을 요청했다. 크로아티아가 이 요청을 거부하자, 세르비아 당국은 연방 정부에 의존했다. 연방 당국은 상호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했으며, 보이보디나가 국경에 관한 법률을 해석하는 방식, 즉 국경이 다뉴브 계곡의 최심수로를 따라 흐른다는 것(강의 중간 지점)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법률은 그러한 문구를 적용하지 않기 때문이다.[4] 1947년 4월 18일자 서한에서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분쟁 중인 강 섬이 부코바르 지역의 영토이며, 국경이 다르게 정의되기 전에는 해당 영토를 보이보디나로 이전할 수 없다고 밝혔다.[5]
1947년 5월, 보이보디나 당국은 다뉴브 강을 따라 국경의 위치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크로아티아 당국과 분쟁이 있었고, 분쟁을 중재하도록 요청받은 연방 당국이 크로아티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동시에 보이보디나는 크로아티아가 이전에 양도받았던 다뉴브 강 우안의 영토(바로쉬-비자 및 말라 시가)를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다.[6] 유고슬라비아 체제 내에서 이 문제는 연방 당국에 의해 해결이 권장되지 않았고, 관련 지역의 경제적 가치가 제한적이며, 사람이 살지 않고 자주 침수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4]
1948년까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국경의 두 가지 수정 사항에 동의했는데, Bapska 마을은 크로아티아로 이전되었고, Jamena는 보이보디나로 넘겨졌다. 국경에 대한 추가 변경 사항은 합의되지 않았다. 1967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군사지리연구소에서 발행한 이 지역 지도는 분쟁에서 크로아티아의 주장에 해당하는 지적도 기반 경계를 따라 국경을 묘사하고 있다.
3. 2. 21세기
2000년대 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국경을 결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했지만, 10년 동안 거의 활동이 없었다. 2010년 이후 양국에서 이 문제가 중요해졌고, 아파틴에 항구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분쟁을 촉발시켰다. 2010년 4월, 양국 정부 간 위원회가 자그레브에서 회의를 열었지만, 의견 차이만 확인했다. 같은 달 말, 세르비아 급진당(SRS)은 세르비아의 주장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도록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안했다.몇 달 후, 라도슬라프 스토야노비치는 이 분쟁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국경 분쟁과 피란 만의 분쟁에 비유하며,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보다 먼저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여 세르비아의 EU 가입 과정에 조건을 부과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1년까지 세르비아 외교관들은 EU에 여러 차례 요청하여 크로아티아에 압력을 가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EU는 이를 거부했다.
이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이 분쟁이 양국 관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이지만, 해결이 어렵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요시포비치는 양국 모두 수용 가능한 해결책으로 간주되는 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2014년, 세르비아 주재 크로아티아 대사는 요시포비치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반면, 조란 밀라노비치 크로아티아 총리는 국경 분쟁 해결이 세르비아의 EU 가입 협상에서 크로아티아가 내세울 조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7월 28일, 유고슬라비아군 순찰선이 부크오바르-스리엠 주의 도지사, 부크오바르와 바치카 팔란카의 시장 등을 태운 민간 선박에 경고 사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민간 선박 승객과 승무원이 체포되었으나, 이후 석방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외무 장관은 유감을 표명했지만, 크로아티아 총리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세르비아군은 2006년 10월 국경에서 철수하여 세르비아 경찰에 통제권을 넘겼다.
2006년, 부코바르와 바치 시 대표는 부코바르 섬을 레크리에이션 시설과 해변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협정에 도달했다. 이 섬은 부코바르에서 출발하는 보트를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국경 통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2012년까지 이 섬의 방문객은 연간 15만 명에 달했다.
4. 분쟁 해결 노력
2002년 7월 28일, 유고슬라비아군 순찰선이 부크오바르-스리엠주 도지사, 부크오바르와 바치카 팔란카 시장 등을 태운 민간 선박에 경고 사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샤렌그라드 섬에서 8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으며, 크로아티아 순찰선이 접근하려 하자 사격이 가해졌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민간 선박의 승객과 승무원은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고란 스빌라노비치 유고슬라비아 외무 장관은 유감을 표명했지만, 이비차 라찬 크로아티아 총리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세르비아군은 2006년 10월 국경에서 철수하여 세르비아 경찰에 통제권을 넘겼다.
4. 1. 양자 협상
2000년대 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국경을 확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했지만, 처음 10년 동안 위원회는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1] 2010년 이후, 양국에서 이 문제가 중요해졌고, 크로아티아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아파틴에 항구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분쟁을 격화시켰다.[2] 수년간 활동이 없던 양국 간 국경 확인 및 결정 위원회는 2010년 4월 자그레브에서 회의를 열었지만, 의견 차이만 확인했다.[3] 그 달 말, 세르비아 급진당(SRS) 의원들은 세르비아의 주장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라는 결의안을 제안했다.[4] 몇 달 후, 보스니아 대량 학살 사건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전 법률 대리인이자 전 네덜란드 대사인 라도슬라프 스토야노비치는 이 분쟁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국경 분쟁과 피란만 분쟁에 비유하며,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보다 먼저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여 세르비아의 EU 가입에 조건을 부과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5]
2011년, 세르비아 외교관들은 EU에 여러 차례 요청하여 2013년 유럽 연합 확대 이전에 분쟁을 해결하도록 크로아티아에 압력을 가할 것을 요청했다. 이는 크로아티아가 슬로베니아의 선례를 따라 세르비아의 가입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지만, EU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6] 크로아티아 대통령 이보 요시포비치는 이 분쟁이 크로아티아-세르비아 관계의 가장 논쟁적인 문제이지만, 해결이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2012년 요시포비치는 양국 모두 수용 가능한 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2014년, 세르비아 주재 크로아티아 대사는 요시포비치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반면, 조란 밀라노비치 크로아티아 총리는 국경 분쟁 해결이 세르비아의 EU 가입 협상 조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4. 2. 국제 중재
2000년대 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국경 문제를 다룰 위원회를 설치했지만, 10년 동안 거의 활동이 없었다. 2010년 이후, 이 문제는 양국 간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특히 크로아티아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아파틴 지역에 항구를 건설하려는 세르비아의 계획이 분쟁을 격화시켰다.2010년 4월, 양국 간 국경 설정을 위한 위원회가 자그레브에서 회의를 열었지만, 의견 차이만 확인했다. 같은 해, 세르비아 급진당은 세르비아 정부가 세르비아 측 주장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안했다. 라도슬라프 스토야노비치 전 네덜란드 주재 세르비아 대사는 이 분쟁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국경 분쟁과 비교하며, 크로아티아가 EU 가입을 통해 세르비아에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1년, 세르비아는 EU에 크로아티아가 국경 분쟁을 해결하도록 압력을 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EU는 이를 거부했다. 이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이 분쟁이 양국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이지만, 해결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국제 중재를 통한 해결을 제안했다.,, 2014년, 세르비아 주재 크로아티아 대사도 요시포비치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조란 밀라노비치 크로아티아 총리는 국경 분쟁 해결이 세르비아의 EU 가입 조건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4. 3. 유럽 연합의 역할
2011년, 세르비아 외교관들은 유럽 연합 (EU)에 2013년 유럽 연합 확대 이전에 크로아티아가 분쟁을 해결하도록 압력을 가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이는 크로아티아가 슬로베니아의 선례를 따라 국경 분쟁을 이유로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EU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4] 이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이 분쟁이 크로아티아-세르비아 관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이지만, 해결하기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2012년 요시포비치는 크로아티아가 이 문제로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막아서는 안 되며, 양국 모두 수용 가능한 해결책인 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2014년, 세르비아 주재 크로아티아 대사는 요시포비치의 2012년 입장을 재확인했다. 반면, 조란 밀라노비치 크로아티아 총리는 국경 분쟁 해결이 세르비아의 EU 가입 협상에서 크로아티아가 내세울 조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5. 미승인 국가의 영유권 주장
2015년 4월 13일, 체코의 자유 시민당 소속 비트 예들리츠카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양국 모두가 주장하지 않은 땅 중 하나인 고르냐 시가에 미소국가 리버랜드를 선포했다.[1][2]
세르비아 외무부는 2015년 4월 24일에 세르비아가 "리버랜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 "새로운 국가"가 다뉴브강으로 경계가 정해진 세르비아 국경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밝혔다.[3] 2019년에는 다뉴브강 서쪽의 포켓 3 지역이 호주 정치인 다니엘 잭슨에 의해 미소국가 베르디스 자유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4][5]
참조
[1]
웹사이트
Liberland
https://web.archive.[...]
2015-04-15
[2]
뉴스
Člen Svobodných vyhlásil na území bývalé Jugoslávie vlastní stát
https://web.archive.[...]
Novinky.cz
2015-04-15
[3]
뉴스
Liberland: Could the world's newest micronation get off the ground?
http://edition.cnn.c[...]
CNN
2015-04-25
[4]
웹사이트
Verdis, la "eco-república libre" que preside un pibe de 17 años | Es un pequeño territorio ubicado en los Balcanes y que pide reconocimiento internacional
https://www.pagina12[...]
2021-09-28
[5]
웹사이트
Osnovali državu na našem spornom teritoriju: 'Cilj nam je pomirenje naroda'
https://www.vecernji[...]
[6]
서적
A Legal Geography of Yugoslavia's Disintegra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9-09-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