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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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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 조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삼국시대부터 제천 의례가 있었으나, 고려 시대에 제도화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에 조공하는 관계로 중단되었다.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며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다시 설치하였으나, 1912년 일제에 의해 헐리고 현재는 황궁우, 석고 등의 유적만 남아있다. 2007년에는 환구단의 정문이 복원되었으며, 1967년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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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환구단, 1904년경
1904년경 환구단의 두 주요 건물. 파괴되기 전의 황궁우(가운데 오른쪽)와 현재까지 남아있는 환구단(왼쪽)
위치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112
주소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112
명칭
한글환구단
한자圜丘壇
로마자 표기Hwanggudan
역사
건립1897년 (고종 즉위 기념)
황궁우 건립1899년
사적 지정1967년 7월 15일 (사적 제157호)
건축
종류제단, 사당
면적4,278m² (보호구역: 764.7m²)
기타 정보
관리 주체서울특별시 중구
소유 주체한국관광공사
관련 시설조선철도호텔 (현재 조선호텔앤리조트)

2. 명칭

자는 '둥글 원'과 '돌 환' 두 가지 훈음으로 읽혀 혼란이 생겼다. 본래 圜은 圓의 이체자로 구별 없이 쓰여 원구단이 맞다. 圜은 구한말 화폐 단위의 이름으로 쓰였는데, 1910년 발행된 구한국은행권을 보면 한자로 圜이라 하고 한글로는 "환"이 아니라 "원"이라 표기하고 있다. 즉, 애초에 圜은 원으로 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53년 화폐개혁 시 화폐 단위를 圓에서 圜으로 바꾸고 음독을 '환'으로 변경한 이래 사람들이 원구단을 환구단으로 바꾸어 읽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1] 1924년 11월 24일, 1925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분명히 한글로는 원구단으로 표기되어 있다.[1]

3. 역사

환구단은 원래 '원구단'으로 불렸으나, '圜' 자가 '원'과 '환' 두 가지로 읽히면서 혼란이 생겼다. 1953년 화폐개혁 때 화폐 단위를 '圓'에서 '圜'으로 바꾸고 '환'으로 읽게 되면서, 원구단도 환구단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24년과 1925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원구단으로 표기되어 있다.[17]

원래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성역으로 지정된 거대한 규모였으나, 1912년 일제가 호텔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원구단 본단은 없어지고 황궁우만 남았다. 현재 원구단 본단 자리에는 웨스틴 조선호텔이 들어서 있다.[17]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되었다.[17]

3. 1.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한국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 고구려 태조대왕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국가적으로 거행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제도화된 환구제(圜丘祭)는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재위 981∼997) 때부터라고 전해진다.[1][2][3] 원구단 의례는 천자만이 거행할 수 있었다.[2] 고려 군주들은 몽골의 지배 하에서도 1385년까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1][2]

3. 2.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된 것으로 믿어진다.[17] 삼국 및 고려 시대의 한국 군주들은 역사적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1][2][3]

제도화된 환구제(圜丘祭)는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재위 981∼997) 때부터라고 전해진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되어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 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983년 고려 성종에 의해 원구단 의례가 도입되면서 유교화되었다.[2][3] 원구단 의례는 천자만이 거행할 수 있었다.[2] 고려 군주들은 몽골의 지배 하에서도 1385년까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1][2]

조선 세조(재위 1455∼1468) 때 왕권강화를 위해 환구제를 다시 부활시켰으나, 세조 10년에 폐지하고 종묘로 대체하였다. 조선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조공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세조 10년(1464년)에 환구제는 중단되었다.[4]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왕조를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이다.[17]

3. 3.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1897년(광무 원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환구단에 나아가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드린 후 황제에 즉위했다.[17] 당시 환구단이 마련된 곳은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남별궁(南別宮)이 있던 자리였다.[17] 이때 만들어진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는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圓錐形)의 지붕이었다. 환구단에는 하늘과 땅, 별과 천지만물에 깃든 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동지나 새해 첫날에 제천 의식을 거행하였다.

1906년의 모습. 좌측에 황궁우가, 우측에 환구단이 보인다.


본단에서 바라본 황궁우


황궁우(皇穹宇)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정자로, 환구단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년(광무 4년)에 환구의 북쪽에 건립하여 신위판(神位版)을 모셨다.[4] 황궁우의 건물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3층은 각 면에 3개씩의 창을 냈으며, 천장의 칠조룡(七爪龍) 조각은 황제를 상징한다. 황궁우 앞에는 1902년(광무 7년)에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돌로 만든 [石鼓]을 세웠는데,[17] 이 북은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무늬가 있다.

환구단과 황궁우는 당시 고종이 황제로서 제천 의례를 행하던 곳으로, 예로부터 천자라고 주장해 온 중국이나 천황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과 대등한 자격으로 서기 위해 황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한편 서구 열강에 대해 독립적인 국가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적ㆍ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1912년 일본은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을 세웠으며,[17] 이 건물은 1968년에 지금의 조선호텔 건물로 대치되었다. 현재는 황궁우와 3개의 돌북, 그리고 석조 대문만이 남아 있다.

한편, 1960년대 해체되어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환구단의 정문이 2007년 8월 강북구 우이동 옛 그린파크호텔 터에서 발견되어 복원 공사가 진행되어[18] 2009년 12월에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19]

1897년 10월 11일,[7] 고종은 왕위에 오르기 위한 준비로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완전한 제례를 거행하기 시작했다.[9][4]

덕수궁에서 출발하는 황실 행렬 (1899)


황룡포를 입은 고종의 초상


왕과 황태자는 각각 약 50명의 사람들에 의해 금색 가마에 태워졌다.[10] 의식은 오전 5시쯤에 끝났다. 그날, 명성황후의 시호를 황후로 추존하기 위한 또 다른 의식이 신전에서 시작되었다.[11]

환구단 단일 건물인 황궁우 (2015)


1899년, 조선의 창건자인 태조를 기념하기 위해 황궁우가 세워졌다.[4] 하늘의 신, 바다의 신, 달의 신에게 헌정된 석비가 그곳에 보관되었다.[12][13]

축하 행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명목상의 독립만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곧 일본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결국 1910년 일본에 의해 공식적으로 식민지화되었고,[7][8] 대관식 장소는 1913년에 철거되었고, 이듬해 조선철도호텔로 대체되었다.[4] 이로 인해 환구단만 남게 되었다.[7]

3. 4. 해방 이후

1945년 한국의 해방 이후, 환구단은 대체로 잊혀졌으며, 오늘날에도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13][12] 1960년, 환구단의 정문은 조선호텔 건설 사업을 위해 철거되어 우이동의 다른 호텔 근처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거의 잊혀졌으나, 나중에 환구단에 속했던 것으로 밝혀져 2007년에 원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15] 환구단은 1967년 7월 15일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다.[13][12]

이 유적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원구단(원구단|圜丘壇한국어), 제천단(제천단|祭天壇한국어), 원단(원단|圜壇한국어)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2005년부터 이 제단의 정부 선호 명칭은 환구단이 되었다.[7]

환구단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보수 공사를 거쳤다.[5] 관광객의 환구단 출입은 허용되었으나, 2018년부터 금지되었다.[5]

2017년, 고종 즉위 120주년을 기념하여 덕수궁서울광장에서 고종 즉위식 재현 행사가 열렸다. 즉위 장소는 행사를 위해 다른 장소에 재현되었다. 상징적인 제스처로, 시민들은 행사의 다양한 역할에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초청되었고, 관리, 경비, 가마꾼, 그리고 왕족 역할을 맡을 사람으로 선정되었다.[14]

4. 건축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기 위해 환구단을 건설했다. 환구단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남별궁 자리에 화강암으로 만든 3층 단으로 조성되었으며, 중앙 상부는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 지붕 형태였다.[20] 당시 최고 도편수였던 심의석이 설계를 맡았고, 10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10일 만에 완공되었다.[20] 이는 청나라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 후, 고종이 대한제국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7][8]

환구단의 설계는 베이징의 천단에 큰 영향을 받았다. 꼭대기 단에는 금색 차양이 있었고, 가장 낮은 단은 화강암 벽으로 둘러싸인 세 개의 단으로 구성되었다.[15][10] 가장 아래층은 지름이 약 48m, 가운데는 24m, 맨 위는 12m였다.[6][10] 아래 두 단은 각각 아홉 개의 계단을 통해 다음 단으로 이어졌다.[10]

황궁우(皇穹宇)는 1899년(광무 4년) 환구단 북쪽에 건립된 3층 팔각 정자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져 신위판을 모셨다.[4] 건물 내부는 통층이며, 3층은 각 면에 3개씩 창을 냈고,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칠조룡 조각이 있다. 황궁우 앞에는 1902년(광무 7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돌로 만든 (石鼓) 3개를 세웠는데,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무늬가 있다.[13][5]

미국 여행가 벌튼 홈즈가 게재한 사진에서, 대관식 장소의 플랫폼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1899)


환구단과 황궁우는 고종이 황제로서 제천 의례를 행하던 곳으로, 중국이나 일본과 대등한 자격으로 서기 위해 황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서구 열강에 독립적인 국가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는 황궁우와 3개의 돌북, 석조 대문만이 남아있다.

1960년대 해체된 것으로 알려진 환구단의 정문은 2007년 8월 강북구 우이동 옛 그린파크호텔 터에서 발견되어 2009년 12월 복원되었다.[18][19]

5. 현대의 환구단

1897년에 환구단은 약 1,000명의 노동자에 의해 10일 만에 건설되었다.[5][6] 이곳은 과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사용되었던 연회장 부지에 건설되었으며,[10] 조선의 군주 고종이 청나라가 한국의 종주권을 포기한 후 세운 대한제국의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7][8]

1899년에는 조선의 창건자인 태조를 기념하기 위해 황궁우가 세워졌고,[4] 하늘의 신, 바다의 신, 달의 신에게 헌정된 석비(神位版|신위판중국어)가 그곳에 보관되었다.[12][13]

1945년 한국의 해방 이후, 환구단은 대체로 잊혀졌으며, 오늘날에도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13][12] 1960년에는 환구단의 정문이 조선호텔 건설 사업을 위해 철거되어 우이동의 다른 호텔 근처로 옮겨졌으나, 나중에 환구단에 속했던 것으로 밝혀져 2007년에 원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15] 1967년 7월 15일, 환구단은 대한민국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다.[13][12]

이 유적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원구단(圜丘壇|원구단중국어), 제천단(祭天壇|제천단중국어), 원단(圜壇|원단중국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나, 2005년부터 정부 선호 명칭은 환구단이 되었다.[7]

환구단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보수 공사를 거쳤다.[5] 관광객의 환구단 출입은 허용되었으나, 2018년부터 금지되었다.[5]

5. 1. 문화 행사

1897년 10월 11일,[7] 고종은 왕위에 오르기 위한 준비로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완전한 제례를 거행했다.[9][4] 역사적인 한국 신문인 ''독립신문''은 이 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6]

고종과 황태자는 각각 약 50명의 사람들에 의해 금색 가마에 태워졌다.[10]

2017년, 고종 즉위 120주년을 기념하여 덕수궁과 서울광장에서 고종 즉위식 재현 행사가 열렸다. 즉위 장소는 행사를 위해 다른 장소에 재현되었다. 상징적인 제스처로, 시민들은 행사의 다양한 역할에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초청되었고, 관리, 경비, 가마꾼, 그리고 왕족 역할을 맡을 사람으로 선정되었다.[14]

참조

[1] 웹사이트 https://folkency.nf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2021-10-29
[2] 웹사이트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1-10-29
[3]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2023-08-25
[4]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2023-08-25
[5] 웹사이트 https://n.news.naver[...] 2023-08-25
[6] 웹사이트 http://contents.hist[...] 2023-08-25
[7] 웹사이트 http://contents.hist[...] 2023-08-25
[8] 웹사이트 https://mediahub.seo[...] 2023-08-25
[9] 웹사이트 Hwangudan Altar (환구단) http://english.visit[...] 2023-08-25
[10] 웹사이트 The emperor is crowned: Part 1 https://www.koreatim[...] 2023-08-25
[11] 웹사이트 The emperor is crowned: Part 2 https://www.koreatim[...] 2023-08-25
[12] 웹사이트 [Eye Plus] Hwangudan Altar, remains in the city but unfamiliar to many https://www.koreaher[...] 2023-08-25
[13] 웹사이트 Hwangudan, hidden in the center of Seoul https://www.koreatim[...] 2023-08-25
[14] 웹사이트 https://mediahub.seo[...] 2023-09-16
[15] 웹사이트 https://www.joongang[...] 2023-08-25
[16] 간행물 사적 제157호 '환구단' 보호구역 지정 문화재청장 2015-12-16
[17]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18] 뉴스 환구단 대문, 버스 차고지 출입구로 전락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10-01-20
[19] 뉴스 고종의 혼 서린 환구단 정문, 42년 만에 제모습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1-20
[20] 뉴스 1897년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 위해 옛 남별궁터에 환구단 조성 https://news.naver.c[...]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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