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선
1. 개요
손자선은 1844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한국 천주교 순교자이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신앙심이 깊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 2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968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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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출신 -
김좌진
김좌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한국독립당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받았다. -
홍성군 출신 -
한용운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로,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불교 혁신과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 저항 문학을 대표했다. -
1866년 사망 -
김정호
김정호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여러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조선 시대 지리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 95016 김정호가 명명되었다. -
1866년 사망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조선교구 사도대목구장이었던 안토니 다블뤼는 1845년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 및 문서 선교에 기여, 주교 서품 후 사도대목구장을 이어받았으나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다미앵 신부
벨기에 출신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예수 성심 성모 수도회 소속 선교사인 다미앵 신부는 하와이 몰로카이섬에서 한센인들을 16년간 헌신적으로 돌보며 사목 활동을 펼치다 자신도 한센병에 감염되었으나 봉사를 이어갔고, 사후 시성되어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2. 생애
손자선은 1844년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매우 근면하고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후, 손자선은 덕산 관아에 약탈 피해를 호소했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는 덕산과 해미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해미 관장은 손자선에게 손의 살가죽을 스스로 물어뜯으라고 강요했고, 손자선은 그렇게 하면서까지 신앙을 지켰다. 결국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감옥에서도 기도와 단식을 계속했고, 태형에도 굴하지 않았다. 1866년 5월 18일 2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2.1. 출생과 성장
손자선은 1844년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마을에 있는, 3대째 천주교를 믿으며 순교자들을 배출한 매우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손자선은 매우 근면하고 독실한 신자였으며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아침과 저녁 기도를 절대 거르지 않았다. 그의 가정 생활은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문의 깊은 신앙을 반영했으며 그 자체가 신앙 고백이었다.
2.2. 병인박해와 체포
1866년 병인박해가 발발하였다. 3월 11일에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고 며칠 후, 포졸 몇 명이 손자선이 살고 있는 마을을 급습하여 천주교인들의 가산을 약탈하였다. 교인들의 강한 저항 때문에, 그 고을의 관장은 약탈에 대한 배상을 약속했다. 손자선은 덕산의 관아로 가서 약탈물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관장은 외려 그에게 배교를 요구했다. 손자선은 이를 거절하며 "저는 죽는 것이 무섭지만, 저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손자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거꾸로 매달려 격심하게 매질을 당했고, 그의 입에는 많은 양의 쓰레기가 넣어졌다. 그 어떤 고문도 그를 배교시킬 수 없었다.
2.3. 고문과 순교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고 며칠 후, 포졸들이 손자선이 사는 마을을 급습하여 천주교인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손자선은 덕산 관아에 가서 약탈물 반환을 요구했으나, 관장은 오히려 배교를 요구했다. 손자선은 "저는 죽는 것이 무섭지만, 저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손자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거꾸로 매달려 매질을 당하고 입에 쓰레기가 넣어지는 등 가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상처가 심하여 거의 죽어갈 때 다른 수감자들이 돌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손자선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오셔서 저를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며칠 후 상처가 모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덕산 관장은 손자선을 해미 감옥으로 이송시켰다. 거기서 손자선은 주뢰를 틀리는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졌다. 해미 관장은 손자선에게 손의 살가죽을 스스로 물어뜯으라고 강요했고, 손자선은 그렇게 하면서까지 배교를 거부했다. 결국 관장은 손자선을 공주 감영으로 이송시켜 사형 선고를 받게 했다.
공주 감영에서도 손자선은 의식을 잃을 때까지 태형을 당했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1866년 5월 18일, 관찰사는 손자선의 교수형을 집행했고, 손자선은 2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열흘 뒤 장례가 치러졌는데, 시신이 썩지 않고 있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