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시타 시게루
1. 개요
스기시타 시게루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 감독으로, 투수로서 활약했다. 데이쿄 상업학교 시절 4번 타자 겸 1루수로 뛰었으며, 군 복무 후 사회인 야구팀 이스즈 자동차에서 투수로 전향했다. 1949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1950년부터 1955년까지 6년 연속 20승 이상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고, 1954년에는 32승을 거두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1951년, 1952년, 1954년에는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수상했다. 1958년 은퇴 후 주니치 감독을 역임했으며, 이후 한신 타이거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세이부 라이온스 등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선수 시절 일본 최초의 포크볼 투수로 이름을 알렸다. 198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2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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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스기시타 시게루 |
|---|---|
| 원어 이름 | 杉下 茂 |
| 로마자 표기 | Shigeru Sugishita |
| 출생일 | 1925년 9월 17일 |
| 출생지 | 도쿄부도쿄시간다구(현: 도쿄도지요다구) |
| 사망일 | 2023년 6월 12일 |
| 사망지 | 도쿄도 |
| 신장 | 182cm |
| 체중 | 71kg |
| 포지션 | 투수 |
| 투구 | 우투 |
| 타석 | 우타 |
| 프로 입단 연도 | 1949년 |
| 첫 출장 | 1949년 4월 3일 |
| 최종 출장 | 1961년 10월 1일 |
| 별명 | フォークボールの神様일본어 |
| 고등학교 | 구제 제이쿄 상업학교 |
|---|---|
| 실업 야구 | 이즈 자동차 |
| 대학교 | 메이지 대학구제 전문부 |
| 프로 야구 | 주니치 드래건스/나고야 드래건스 (1949-1958) 다이마이 오리온스 (1961) |
| 감독 | 주니치 드래건스 (1959-1960, 1968) 한신 타이거스 (1966) |
|---|---|
| 코치 | 다이마이 오리온스 (1962)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1980) 세이부 라이온스 (1993-1994) |
| 통산 승패 | 215승 123패 |
|---|---|
| 통산 승률 | 0.636 |
| 통산 평균 자책점 | 2.23 |
| 통산 탈삼진 | 1761개 |
| 일본 삼관왕 | 1954년 |
|---|---|
| 사와무라 에이지상 | 3회 |
| 센트럴 리그 MVP | 1954년 |
| 일본 시리즈 MVP | 1954년 |
| 노히트 노런 | 1955년 5월 10일 |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1985년 |
|---|---|
| 헌액 구분 | 경기자 표창 |
| Baseball-Referenc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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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마이 오리온스 선수 -
도이 쇼스케
도이 쇼스케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 고쿠테쓰 스왈로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다이마이 오리온스에서 유격수로 활동했고, 은퇴 후 일본과 대만, 한국 프로 야구팀 코치를 맡아 지도자로서 KBO 리그 발전에 기여하며 한국 야구계에 영향을 미쳤다. -
다이마이 오리온스 선수 -
아라마키 아쓰시
아라마키 아쓰시는 빠른 공으로 유명했던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에서 신인왕, 다승왕, 최우수 평균 자책점 3관왕을 달성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고 은퇴 후 야구 해설가와 코치를 지냈으며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 -
후지타 모토시
후지타 모토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하며 리그 MVP를 2연패하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 -
기타벳푸 마나부
기타벳푸 마나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213승을 기록한 전설적인 투수로, 일본시리즈 우승과 MVP 수상, 명예의 전당 헌액 등 화려한 선수 경력 이후 야구 해설가, 지도자, 유튜버로 활동했다. -
주니치 드래건스 선수 -
선동열
선동열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야구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MVP를 수상했고, KBO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KBO 리그 통산 평균자책점 1.20, WHIP 0.80의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으며, 은퇴 후에는 프로 야구팀 감독과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야구 해설위원 겸 KBO 기술위원이다. -
주니치 드래건스 선수 -
오카모토 신야
일본과 한국 프로야구에서 중간 계투로 활약하며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최우수 중간 계투상을 수상하고 여러 팀에서 우승을 경험한 오카모토 신야는 은퇴 후 음식점 운영과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2. 선수 시절
스기시타 시게루는 데이쿄 상업학교와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1949년 프로 구단인 주니치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첫 해 8승에 그쳤으나, 이듬해인 1950년부터 1955년까지 6년 연속 20승을 포함해 9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며 주니치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특히 1954년에는 32승을 올리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11승을 거두며 '요미우리 킬러'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7경기 중 5경기에 등판, 4경기를 완투하며 3승 1패의 성적으로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하여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1955년에는 가네다 마사이치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1957년에는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1958년 한 차례 은퇴했다가 1961년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에서 선수로 복귀했지만, 4승에 그치며 다시 은퇴했다.
스기시타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포크볼을 구사한 투수로 알려져 있으며, '포크볼의 신'으로 불린다. 나가시마 시게오는 스기시타를 "일생 동안 최고라고 생각했던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주니치 시절 통산 211승은 2012년 야마모토 마사에게 경신되기 전까지 구단 최다승 기록이었다. 통산 11개의 타이틀과 5개의 주요 상을 수상했으며,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3회 수상하고, 센트럴리그 최초로 투수 5관왕을 달성했다.
2.1. 프로 입단 전
스기시타 시게루는 데이쿄 상업학교 시절 아마치 슌이치(天知俊一) 감독 아래에서 4번 타자 겸 1루수(一塁手)로 활약했다. 장신을 활용해 투수(投手)로도 등판했지만, 약한 어깨와 송구 불안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44년 졸업 후 군에 입대, 야구 경험을 바탕으로 중대 대항 수류탄(手榴弾) 던지기 대표로 선발되었다. 약한 어깨를 극복하기 위해 투구폼을 교정하여 강한 어깨를 얻게 되었고, 수류탄 던지기 대회에서 우승했다.
종전 후 이스즈 자동차에 입사, 카리타 히사토쿠(苅田久徳) 감독의 권유로 투수로 전향했다. 닛폰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주심을 맡은 아마치 슌이치는 강속구 투수로 변모한 스기시타의 모습에 감탄했고, 스기시타는 이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ノーヒットノーラン)을 달성했다. 이후 아마치의 모교인 메이지 대학(明治大学)에 권유로 입학했다. (단, 메이지 대학 측은 아마치가 입학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2.2. 주니치 드래건스 (1949년 ~ 1960년)
1949년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하여, 첫 등판이었던 도큐 플라이어스전에서 오시타 히로시에게 포크볼로 3타석 연속 삼진을 빼앗았다. 입단 첫 해에는 8승(3선발)에 그쳤으나, 1950년부터 1955년까지 6년 연속 20승(1952년 21선발승, 1954년 21선발승 - 벳쇼 다케히코와 함께 센트럴 리그 최다 선발승)을 포함하여 9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1950년 16선발승, 1951년 12선발승, 1952년 21선발승, 1953년 14선발승, 1954년 21선발승, 1955년 18선발승, 1956년 12선발승)를 기록했다.
1950년 센트럴 리그 탈삼진 및 투구 이닝 수 부문 1위를 기록했다. 1951년 28승 13패, 평균자책점 2.36으로 센트럴 리그 다승왕에 올랐고,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처음 수상했다. 1952년 61경기에 출전하여 355⅔이닝을 투구하며 32승 14패, 평균자책점 2.33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1954년 32승을 올리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당시 우승을 다투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팀이 거둔 14승(12패) 중 11승(5패)을 혼자 거두며(한 시즌에 요미우리를 상대로 10승 이상을 거둔 선수는 스기시타가 유일하다) ‘요미우리 킬러’의 면목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7경기 중 5경기에 등판, 그 중 4경기를 완투했으며(4경기 완투는 1958년 이나오 가즈히사와 동률) 3승 1패를 기록, 팀의 일본 시리즈 제패에 기여하며 주니치 구단 역사상 첫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이 해에 32승 12패, 평균자책점 1.39를 기록하며 세 번째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다. 395⅓이닝을 투구했고, 완투 27경기, 7경기 완봉승, 273탈삼진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다. 스기시타는 사와무라상, MVP, 일본 시리즈 MVP를 같은 해에 모두 수상한 NPB 역사상 세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주니치는 2007년까지 일본 시리즈 우승에서 멀어지게 되면서 오랫동안 스기시타는 ‘주니치 선수로서 유일하게 일본 시리즈 MVP를 손에 넣은 남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1955년 5월 10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 가네다 마사이치와 상대해 1-0의 근소한 점수 차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1957년 가네다가 주니치를 상대로 1-0의 점수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을 때에도 상대 투수는 스기시타였다. 2년 뒤인 1957년 10월 23일 요미우리를 상대로 통산 200승을 달성했는데, 당시 패전 투수는 바바 쇼헤이(자이언트 바바)였다.
1958년 은퇴하였는데, 주니치 시절 기록한 211승은 2012년 야마모토 마사에게 추월당할 때까지 구단 최고 기록이었다. 1959년에서 1960년에는 감독을 역임했는데, 명목상은 겸임 감독이었으나 감독 자리에 충실하기 위해 현역에서 은퇴했다. 1958년 시즌 후, 32세의 젊은 나이에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드래곤즈의 감독이 되었다. 2시즌 동안 팀을 이끈 후, 1960년 시즌 드래곤즈가 5위를 기록하자 경질되었다.
2.3.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 (1961년)
杉下 茂일본어는 1961년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로 이적해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해에는 4승(1선발)에 그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기록했고, 결국 시즌을 끝으로 다시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스기시타는 통산 한 시즌 평균 20승을 달성하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3. 지도자 경력
스기시타 시게루는 현역 은퇴 후 1964년 한신 타이거스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1966년에는 한신 감독, 1968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을 역임했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1993년부터 1994년까지는 세이부 라이온스 코치를 역임했다.
스기시타가 지도한 팀들은 일본 시리즈에 총 5번(1964년, 1976년, 1977년, 1993년, 1994년) 진출했지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스기시타의 감독 시절 성적은 다음과 같다.
1978년 가네다 마사이치를 중심으로 하는 명구회가 설립되었는데, 스기시타는 명구회 가입 조건인 투수 200승을 만족시켰으나, 다이쇼 시대 태생이라는 이유로 가입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8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현재는 TBS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의 나고야 80D'sers의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주니치 신문 스포츠 란에 자서전을 게재하고 있다. 주니치 드래건스의 스프링 캠프는 매년 방문하며 임시 코치로서 투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3.1. 주니치 드래건스
1950년, 스기시타는 센트럴 리그에서 탈삼진과 투구 이닝 수 부문 1위를 기록했다. 1951년에는 28승 13패, 평균자책점 2.36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다승왕에 올랐고, 사와무라상을 처음 수상했다. 1952년에도 61경기에 출전하여 355⅔이닝을 투구하며 32승 14패, 평균자책점 2.33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이 해에도 그는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1954년, 스기시타는 32승 12패, 평균자책점 1.39를 기록하며 세 번째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그는 395⅓이닝을 투구했고, 완투 27경기, 7경기 완봉승, 273탈삼진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다. 시즌을 마무리하며 1954년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는데, 7경기 중 4경기에 출전하여 3승을 거두었고, 특히 7차전 결승전에서 승리했다. 그는 사와무라상, MVP, 일본 시리즈 MVP를 같은 해에 모두 수상한 NPB 역사상 세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스기시타 시게루와 김다 정일(당시 국철 스왈로스)의 투수 대결은 1950년대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명승부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954년 주니치 드래건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우승을 다투고 있었는데, 국철과의 경기에 패하면 우승을 놓치는 성적이었다. 감독인 아마치 슌이치는 스기시타에게 국철의 에이스 김다가 등판하는 경기에는 반드시 등판하도록 지시했고, 스기시타도 그렇게 조정하고 있었다. 결국 스기시타는 김다와 겨뤄 전승을 거두었고, 김다는 주니치 드래곤즈전에서 1승 7패로 크게 부진했다. 스기시타는 "3년차 이시카와 카쓰히코가 21승을 거두면서 (자신과 함께) 투수진의 두 축이 갖춰진 것이 컸다. 내가 던지는 경기는 주로 자이언츠전과 김다가 선발하는 국철전이었다. 김다에게는 점수를 뽑기 어려우니 상대 타선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는 이시카와의 담당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1955년 5월 10일 경기(가와사키 구장)에서도 김다와 맞붙어 1-0의 근소한 점수 차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이 경기에서 스기시타가 허용한 주자는 볼넷 하나뿐인 준완봉승이었지만, 그 볼넷은 김다에게 준 것이었다. 경기 후, 심판을 맡았던 엔죠지 미츠루는 스기시타에게 "미안했다. 그(김다에게 준 볼넷이 된) 높은 공은 스트라이크라고 해도 괜찮았다."라고 말했지만, 스기시타는 후년에 "스트라이크 존이 넓은 현대라면 당연한 스트라이크다. 고저는 공 하나 이상 차이가 났고, 좌우도 절반 이상 차이가 났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1957년 8월 21일 경기(주니치 구장)에서는 0-1로 패전 투수가 되었지만, 그 경기에서 김다는 완봉승을 기록했다.
1957년 10월 2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고라쿠엔 구장)에서는 프로 데뷔 8년 만에 통산 200승을 달성했으며, 패전 투수는 이후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마장 정평이었다.
1958년 시즌 후, 스기시타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드래곤즈의 감독이 되었다. 구단 사무실을 방문했을때 "니시자와(당시 37세)와 하토리(당시 38세)는 그만두게 할 것이다. 30세 이상의 선수는 필요 없다"라는 말을 들었다. 스기시타 자신도 이듬해에는 34세가 되지만, 스기시타에게는 잔류가 요청되었다. 그러나 그 요청 또한 투수로서의 등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고, 다른 날 방문하자 감독 취임을 요청받았다. 스기시타는 전년에도 11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본인에게는 뜻밖의 일이었지만, 감독 취임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하토리와 니시자와의 등번호(10·15)를 영구 결번으로 하고 은퇴 경기를 치르는 것을 요청했다. 이 조건은 승낙되었고, 스기시타는 자신의 등번호 20도 결번으로 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직 팀에 있습니다"라며 거부했다. 주니치 드래건스 시대에 거둔 통산 211승은 2012년에 야마모토 마사에게 넘어갈 때까지 구단 기록이었다.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의 선수 겸임 감독에 취임했지만, 감독 업무에 전념했기 때문에 공식전 출전은 전혀 없었다. 감독 1년차에는 이나 이사무(당시 24세), 코다마 야스시·오야네 히로오미(둘 다 당시 25세) 등의 젊은 투수들이 포진했고, 야수진에서는 포수로 입단한 신인 에토 신이치를 1루수로 기용하고, 입단 2년차 마에다 마스호를 3루수나 유격수로 발탁했다. 급격히 젊어진 팀은 64승 61패 5무로 한신과 동률 2위가 되었지만, 감독 2년차인 1960년에는 투수진이 무너지며 63승 67패로 5위에 그쳤다. 1960년 시즌 드래곤즈가 5위를 기록하자 스기시타는 경질되었다.
1968년 주니치 감독을 역임 하였다.
※1959년부터 1962년, 1966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주니치 드래건스의 스프링 캠프는 매년 방문하며 임시 코치로서 투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3.2. 한신 타이거스
1964년 한신 타이거스의 코치를 시작으로, 1966년에는 한신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그 해 투수진의 부진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15게임 차로 4위에 머물렀다.
어느 날 경기에서 곤도 마사토시의 투구폼에 대한 심판의 지적이 있었고,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마키노 시게루 코치의 계략으로 볼크 판정을 받아 1점을 잃고 패했다. 이 사건에 대해 포수 쓰지 요시키는 스기시타의 미온적인 대응을 비판했다. 스기시타는 오너에게도 질책을 받았고, 결국 같은 해 8월 13일 휴양 명령을 받고 후지모토 사다노리가 다시 지휘를 맡게 되었다.
스기시타는 신인 후지타 히라오를 기용하라는 오너의 지시와 요시다 요시오의 포지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다음은 한신 타이거스 감독 시절 성적이다.
3.3.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요미우리 코치를 역임했다. 그 동안 지도했던 팀들은 일본 시리즈에 2번 출전했으나(1976년, 1977년) 일본 제일을 경험해보진 못했다.
3.4. 세이부 라이온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세이부 라이온스의 코치를 역임했다. 스기시타 시게루가 지도했던 팀들은 1993년, 1994년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일본 제일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4. 은퇴 이후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스기시타 시게루는 1964년 한신 타이거스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 경력을 이어갔다. 1966년에는 한신 감독, 1968년에는 주니치 감독을 맡았으며, 1976년부터 1980년까지는 요미우리 코치, 1993년부터 1994년까지는 세이부 코치를 역임했다. 그가 지도했던 팀들은 일본 시리즈에 5번(1964년, 1976년, 1977년, 1993년, 1994년) 진출했지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1978년 가네다 마사이치를 중심으로 명구회가 설립되었을 때, 스기시타는 투수 200승 조건을 만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이쇼 출생이라는 이유로 가입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85년, 스기시타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후 TBS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의 나고야 80D'sers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주니치 신문 스포츠 란에 자서전을 게재하고 있다.
스기시타는 매년 주니치 드래건스의 스프링 캠프에 방문하여 임시 코치로서 투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5. 포크볼
메이지 대학 재학 시절 텐치 슌이치에게서 포크볼을 배웠다. 처음 시합에서 던졌을 때는 빗맞은 안타가 되어, 스기시타는 징크스를 느껴 포크볼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프로 입단 후, "푸른 배트"로 불린 오시타 히로시에게서 삼진을 빼앗는 등 "일본 최초의 포크볼 투수"로 이름을 알렸다.
스기시타 시게루는 현재의 포크볼 투수들처럼 높은 탈삼진율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포크볼을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여기는 신념 아래, 승부처에서만 던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경기에서 던지는 포크볼은 많아야 5~6개 정도였다.
스기시타는 포크볼에 대해 "가와카미 테츠하루 씨를 위한 공"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와카미 씨 이외에는 변화구로만 사용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대는 (포크볼이) 언제 올지 몰라 망설였다. 또한, '가와카미 씨를 꺾고 일본 최고의 투수가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히로오카 타츠오(広岡達朗)로부터 가와카미가 스기시타의 포크볼 치는 방법을 밤새도록 연구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스기시타는 "가와카미 씨에게도 한 번도 맞은 적이 없다. 확실히 직구만으로는 당할 테니까, '가와카미 씨'를 속이기 위한 공이었다"고 회상했다.
스기시타는 자신의 현역 시절을 모르는 사람들은 포크볼만 던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1경기에 몇 개만 던졌다고 말했다. 그는 프로 입단()부터 일본 시리즈 우승()까지만 포크볼을 던졌고, 현역은 까지 계속했지만 이후로는 거의 던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스기시타는 직구에 자신이 있었고, 속임수 공으로 삼진을 잡아도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첫 대결 상대 타자에게는 포크볼을 먼저 던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바깥쪽 낮은 곳에 2개, 마지막은 안쪽 높은 곳. 처음에 안쪽인지 바깥쪽인지는 던진 당사자조차 모른다. 포수는 미트를 좌우로 움직여 공을 따라가도 포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주 배터리를 이룬 카와이 야스히코(河合保彦)는 몸으로 막을 수 있도록 허리를 굽혀 자세를 취했다. 던지는 목표는 카와이의 마스크 뒤쪽 이마. 높은 곳 바로 아래로 던져 포수의 손 앞에서 바운드했기 때문에, 낙차는 최대 1미터 정도였을 것이다. 사인은 직구는 펴고, 커브는 주먹을 쥐고, 포크볼은 가위였다"고 설명했다.
스기시타의 투구는 직구 중심이었고, 커브 등의 변화구를 섞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포크볼에 집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구 승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3월 25일에는 히가사 카즈오(樋笠一夫)에게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대타 역전 끝내기 홈런"을 맞았고, 히로오카에게도 끝내기 홈런을 맞았다. 선수 말년에는 새로운 투구 방법을 모색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아, 에 이적한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즈에서는 겨우 4승에 그치고, 포크볼로 회귀하지 않은 채 같은 해 은퇴했다. 은퇴 후 자서전에서 그는 현재처럼 포크볼 중심의 투구를 했다면 더 좋은 성적을 남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했다.
스기시타가 던지던 포크볼은 현재 일반적인 포크볼과 달리, 공이 전혀 회전하지 않고 좌우로 흔들리며 떨어지는, 소위 "너클볼"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공은 나비처럼 히라히라(ひらひら) 춤춘다고 여겨졌으며, 컨디션이 좋을 때는 3단으로 흔들리며 떨어지고, 타자의 손 앞에서 더욱 2단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가와카미 테츠하루(川上哲治)가 "공의 솔기가 보였다", "포수가 못 잡는데 타격이 가능할 리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변화가 심했던 것은 스기시타의 긴 손가락 덕분이었다. 스기시타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의 제2관절 사이를 공이 스치지 않고 통과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스기시타는 "(공이)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공의 마음대로였다. 정밀한 제구력과는 무관한 것이었다"라고 회상하며, 포크볼을 던질 때는 무엇보다 팔을 최대한 휘둘러 포수의 얼굴을 향해 던지는 것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주위에서는 "마구"라고 불렀고, 다른 팀에서도 많은 타자가 연구했지만, 스기시타는 자신의 재산이라며 비밀을 지켰다. 올스타전 등에서 다른 팀의 포수와 배터리를 이룰 때는 결코 던지지 않았으며, 언론에도 그립을 보여주는 것을 거부했다.
현역 시절 스기시타와 명승부를 펼친 키누타 마사카즈(金田正一)는 "내가 본 최고의 투수는 후지모토 히데오(藤本英雄)도 베소 기코(別所毅彦)도 아니다. 진정한 포크볼을 던진 스기시타 씨다"라고 말했다. 아오타 노보루(青田昇)에게서도 "키누타보다 네가 더 빨랐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스기시타는 "포크볼의 아류를 던진 사람은 많지만, 진짜 포크볼을 던진 사람은 5명이다. 나와 무라야마 미노루(村山実), 무라타 쵸지(村田兆治), 노모 히데오(野茂英雄), 사사키 카즈히로(佐々木主浩)다"라고 말했다. 또한 현재 투수들이 포크볼이라고 칭하며 던지는 것은 스플리터라고 말하며, 실투가 아닌 포크볼이 안타가 된 것은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에게 단 한 번뿐이라고 덧붙였다.
스기시타는 판도 에이지(板東英二)에게 처음으로 포크볼을 전수했다. 프로 야구 선수로서 손이 큰 편이 아니었던 판도가 포크볼을 습득한 것은 스기시타에게도 인상 깊었던 듯하다. 197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読売ジャイアンツ)의 투수 코치로 취임한 후 에가와 히로시에게 투구 방법을 지도할 때, 일부러 판도를 원정지로 불러 "포크볼의 잡는 방법을 보여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고 한다. 또한, 무라야마 미노루 등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포크볼을 무기로 활약한 투수의 대부분은 자신의 제자라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발언했다.
스기시타는 무라야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라야마가 간사이 대학(関西大学) 시절부터 어떤 사람을 통해 가르쳤다. 중일과 자이언츠도 노렸지만 간장(肝臓)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손을 떼고 한신에 들어갔다. 최초의 중일 감독 시절에는 라이벌 팀이었지만 기자를 통해 부탁을 받고 불펜에서 몰래 지도한 적도 있다. 3루 코치로 설 때 그가 포크볼을 던질 때는 전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타자에게 전달했다. 한신에서 코치와 선수의 관계가 되자 '팔의 위치를 낮추고 좋은 변화를 하는 곳을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포크볼은 사이드암이든 언더핸드든 던질 수 있다. 그는 '관객들은 제가 위에서 아래로 던지는 "자토페크 투구법"을 보러 옵니다. 이미지를 망치고 싶지 않으므로, 정말 안될 때 (팔의 위치를) 낮춥니다'라고 오버핸드에 집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기시타 자신은 직구야말로 투수의 가치이며 변화구는 기량 저하를 보완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으며, 변화구는 우수한 투수의 필수 조건이 아니며, 투수의 기술도 아니라고 말했다.
6.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스기시타 시게루는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센트럴리그 우승 1회, 일본 시리즈 우승 1회에 기여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야구기구(NPB)에서 총 11개의 타이틀과 5개의 주요 상을 받았다.
1950년에는 센트럴 리그에서 탈삼진과 투구 이닝 수 부문 1위를 기록했다. 1951년에는 28승 13패, 평균자책점 2.36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다승왕에 올랐고,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처음 수상했다. 1952년에도 32승 14패, 평균자책점 2.33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다.
1954년에는 32승 12패, 평균자책점 1.39를 기록하며 세 번째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고, 센트럴 리그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195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7경기 중 5경기에 등판, 3승 1패를 기록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제패에 기여하여 MVP를 차지했다. 그는 사와무라 상, MVP, 일본 시리즈 MVP를 같은 해에 모두 수상한 NPB 역사상 세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NPB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포크볼 구사자로 알려져 있으며, "포크볼의 신"으로 불린다. 1954년에 32승을 거두는 등 주니치 드래건스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역사상 최초로 3회 수상했고, 역사상 4번째이자 센트럴리그 최초로 투수 5관왕을 달성했다.
6.1. 타이틀
| 타이틀 | 내용 |
|---|---|
| 최다승 | 2회 (1951년, 1954년) |
| 최우수 방어율 | 1회 (1954년) |
| 최다 탈삼진 | 2회 (1950년, 1954년) ※스즈키 케이지, 우에하라 히로키와 함께 최장 기록 |
| 최고 승률 | 1회 (1954년) |
6.2. 수상
* 사와무라 상: 3회(1951년, 1952년, 1954년) ※ 최다 타이 기록(다른 선수는 가네다 마사이치, 무라야마 미노루, 사이토 마사키, 야마모토 요시노부)
* 최우수 선수(MVP): 1회(1954년)
* 베스트 나인: 1회(투수 부문: 1954년)
* 야구 명예의 전당 선수 부문 헌액(1985년)
* 일본 시리즈 MVP: 1회(1954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회(1954년)
7. 개인 기록
| 기록 | |
|---|---|
| 첫 등판·첫 승리 | 1949년 4월 3일, 대 난카이 호크스 2차전(주니치 구장) |
| 통산 100승 | 1953년 4월 25일, 대 다이요 웨일스 3차전(오사카 구장) |
| 통산 100선발승 | 1955년 7월 2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1차전(주니치 구장) |
| 통산 150승 | 1954년 10월 14일, 대 히로시마 카프 25차전(주니치 구장) |
| 통산 200승 | 1957년 10월 23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5차전(고라쿠엔 구장) |
| 1000 탈삼진 | 1954년 10월 10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5차전 (주니치 구장), 요나미네 요로부터 |
| 일본 시리즈 완투 | 4차례(1954년, 시리즈 타이 기록) |
| 올스타전 출장 | 6회(1951년~1956년) |
| 노히트 노런 | 1회(1955년 5월 10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전, 가와사키 구장) ※역대 21번째 |
| 투수 3관왕 | 1회 (1954년) ※역대 5번째, 센트럴 리그 최초 |
| 2841.2이닝 볼크 없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