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모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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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즈키 모사부로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그는 아이치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시베리아 특파원으로 시베리아 개입을 목격하고 전쟁 반대 입장을 굳혔다.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여 무산대중당, 도쿄무산당 등을 결성했으며, 제1차 인민전선 사건으로 체포되어 정치 활동이 금지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여하여 당내에서 입지를 다졌으며,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청년들이여, 두 번 다시 총을 들지 마라"는 평화 운동의 상징적인 구호를 남겼다. 사회당 좌우 분열과 재통합, 그리고 재분열을 겪으며 위원장직에서 사임했으며,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스즈키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반전 평화 사상을 펼쳤으며, 전후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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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하타 간손은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평론가, 번역가로서,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초기 발전에 기여했으며, 전후에는 일본 사회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다. - 노농파 - 사회주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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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마츠 켄은 《아이러브 서티》, 《러브히나》, 《마법선생 네기마!》 등의 미소녀 러브 코미디 만화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이자, 2022년 참의원 의원 당선 후 표현의 자유 옹호와 저작권 보호 등의 활동을 하는 정치인이다. - 가이조 고등학교 동문 - 고바야시 세이조
고바야시 세이조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 대장,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 수석 해군 전문가, 연합 함대 사령장관, 타이완 총독 등을 역임했으며, 종전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었다가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스즈키 모사부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스즈키 모사부로 |
원어 이름 | 鈴木 茂三郎 |
출생일 | 1893년 2월 7일 |
출생지 | 아이치현 호이군 가마고리 |
사망일 | 1970년 5월 7일 |
사망지 | 도쿄 |
국적 | 일본 |
직업 | 언론인 수필가 정치인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산대중당 일본대중당 도쿄무산당 노농무산협의회 일본무산당 무소속 일본사회당 사회당 좌파 일본사회당 |
국회의원 | 중의원 |
선거구 | 도쿄도 제2구 도쿄도 제3구 |
당선 횟수 | 9회 |
임기 시작 | 1946년 4월 11일 |
임기 종료 | 1966년 12월 27일 |
직책 | 제2대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
취임일 (위원장) | 1951년 1월 21일 |
퇴임일 (위원장) | 1960년 3월 23일 |
학력 | |
출신 학교 | 와세다 대학 |
기타 | |
이전 직업 | 호치 신문 기자 도쿄 일일 신문 기자 |
2. 생애
아이치현 호이군 가마고리정(현 가마고리시)에서 태어났다. 하타모토인 다케모토가의 분가 후손으로 아버지는 인력거꾼이었다. 1907년 가마고리난부 심상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가마고리키타부 소학교에서 대용교원으로 일하다가 도쿄시 고지마치에서 인력거 제조 공장 등에서 일하는 등 힘든 생활을 했다.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고자 차부와 신문 배달 등 통학에 지장이 없는 일을 병행하면서 구제 가이조 중학교와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호치 신문』, 『다이쇼 니치니치 신문』, 『도쿄 니치니치 신문』 등에서 기자로 일했는데, 주로 경제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1918년 시베리아 특파원으로 파견되었을 때 시베리아 개입을 획책하던 군부의 음모를 알고 군부를 불신하게 되었고, 일관되게 전쟁 반대를 주장하게 되었다. 시베리아 이후에도 여러 차례 소련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사회주의를 접했는데, 어린 시절 빈곤했던 경험이 겹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도쿄 니치니치 신문』 기자 시절에는 잡지 『노농』의 동인으로 참여하여 집필했다.
1928년 신문 기자를 그만둔 뒤 사회주의 운동에 전념했다. 7월 22일 도쿄에서 구로다 히사오 등과 함께 무산대중당을 창당하고 서기장에 취임했다. 12월에는 일본대중당에 합류했다가 이듬해 5월 16일 당내 대립으로 구로다, 이노마타 쓰나오 등과 함께 제명되자 7월에 도쿄무산당을 결성했다.
1936년 5월 4일 가토 간주 등과 함께 노농무산협의회를 결성하고 사회대중당과 공투를 모색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37년 3월 11일 협의회가 일본무산당으로 개칭되자 스즈키는 서기장이 되었다. 사회대중당이 군부와 관계를 강화하며 국가사회주의적 노선을 취했지만, 스즈키는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반대를 명확히 했다. 1937년 제1차 인민전선 사건에 연좌되어 검거되는 등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전시 중에는 고서점을 경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직후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총선에서 당선되었고, 1947년 정책심의회장, 1949년 서기장을 거쳐 1951년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중의원 예산위원장 시절 사회당 우파의 동의 없이 내각 제출 예산안 철회 요구를 통과시켜 가타야마 내각 붕괴의 원인을 제공했다. 스즈키는 내각 붕괴가 목적이 아니었고, 니시오 스에히로가 이 사건을 내각 총사직의 구실로 이용했다는 평가가 있다.
1951년 사회당 위원장 취임 당시 당대회 마지막 날에 "청년들이여, 두 번 다시 총을 들지 마라"는 표어를 내걸어 평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비준을 둘러싸고 1951년 사회당 좌우파가 분열하자, 스즈키는 사회당 좌파 위원장이 되었다. 분열 후 16석에 불과했던 의석수는 1955년 총선에서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지원과 비무장 중립론에 힘입어 89석으로 크게 늘었다.
1955년 10월 13일 사회당 좌우파 통합으로 스즈키는 다시 위원장이 되었고,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서기장에 취임했다. 스즈키는 가와카미 조타로 등 우파와 협력하며 온건 노선을 추구, 사회당을 자유민주당을 대체하는 수권 정당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1958년 총선과 1959년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고, 당내 좌우파 대립이 격화되면서 1960년 니시오가 탈당하여 민주사회당을 결성했다. 스즈키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1961년 5월, 일본 스모 협회 운영심의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스즈키는 에다 사부로의 구조개혁론(에다 비전)에 반대하는 등 교조적인 언동을 보였고, 1962년 사회주의이론위원장이 되어 「일본에서의 사회주의로의 길」 책정에 관여하며 사회당 좌경화에 일조했다.
1967년 1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1970년 5월 7일 간경화증으로 사망했으며, "오우치 선생님, 잘 부탁합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2. 1. 초기 생애와 언론 활동
1893년 아이치현 가마고리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력거꾼, 신문 배달 등을 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호치 신문, 다이쇼 니치니치 신문, 도쿄 니치니치 신문(현 마이니치 신문)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다.[3] 주로 경제부에 소속되어 경제 저널리스트로 알려졌다.1918년 특파원으로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는데, 이때 시베리아 출병을 꾀하는 일본 군부의 음모를 목격하고 군부에 대한 불신과 전쟁 반대 사상을 갖게 되었다.[2] 이후 여러 차례 특파원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사회주의를 접하고, 유년 시절의 빈곤한 경험이 더해져 사회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도쿄 니치니치 신문 기자 시절에는 잡지 『노농』의 동인으로 참여하여 '우스키모진(すすき・もじん)'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2. 2. 사회주의 운동과 탄압
1928년(쇼와 3년), 신문기자를 그만둔 스즈키 모사부로는 사회주의 운동에 전념했다. 같은 해 7월 22일 도쿄에서 쿠로다 토시오 등과 함께 무산대중당을 결성하고 서기장에 취임했다.[4] 12월에는 일본대중당에 합류했으나, 이듬해인 1929년(쇼와 4년) 5월 16일, 당내 대립으로 쿠로다, 이노마타 쓰나오 등과 함께 제명[5]되었고, 같은 해 7월에 도쿄무산당을 결성했다.1936년(쇼와 11년) 5월 4일에는 가토 칸주 등과 함께 노농무산협의회를 결성했다. 사회대중당과의 공동 투쟁을 모색했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1937년(쇼와 12년) 3월 11일에 협의회가 일본무산당으로 개칭되자 서기장에 취임했다. 사회대중당이 군부와 관계를 깊게 하고 국가사회주의적인 노선을 택하자, 스즈키는 끝까지 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 대상이 되어, 1937년(쇼와 12년) 제1차 인민전선사건에 연좌되어 체포되었고, 이후 1945년(쇼와 20년) 일본의 패전까지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전시 중 스즈키는 헌책방 경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2. 3. 일본 사회당 활동과 분열
1945년 일본 패전 직후, 스즈키 모사부로는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여하여 좌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사회주의정치경제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1946년 1월 31일 제1회 회합을 가졌다.[6] 같은 해 4월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후, 1947년 정책심의회장, 1949년 서기장을 거쳐 1951년 위원장에 취임하며 당내 지위를 굳혔다.1948년 중의원 예산위원장 시절, 가타야마 내각의 예산안 처리에 사회당 우파와의 합의 없이 강행 처리하여 예산안 철회 동의안을 가결, 내각 붕괴의 원인을 제공했다. 스즈키는 내각 붕괴 의도는 없었으며, 니시오 스에히로가 가타야마 내각 총사퇴의 구실로 이용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12월에는 섬유 비리 사건으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증인 소환되었다.[7]
1951년 일본 사회당 위원장 취임 당시 당대회 마지막 날인 1월 21일, 위원장 취임 연설에서 “'''청년이여 다시 총을 들지 마라'''”는 구호를 내걸어 평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미국의 재군비 요구를 거부하기 위한 명분이었다는 해석도 있다.[8] 이 구호는 일본교직원노동조합에도 채택되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비준을 둘러싸고 사회당은 좌우로 분열되었고, 스즈키는 사회당 좌파 위원장을 맡았다. 분열 당시 16석에 불과했던 좌파 사회당은 1955년 제27회 중의원의원총선거에서 총평의 지원과 무장 중립론을 내세워 89석으로 약진했다.
1955년 10월 13일, 사회당 좌파와 사회당 우파는 재통합하여 스즈키가 위원장에,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서기장에 선출되었다.[9] 스즈키는 가와카미 조타로 파와 협력하며 온건 노선을 추구, 자유민주당에 대항하는 정권정당으로 일본 사회당을 변모시키려 했다.
1956년에는 최고재판소 기구 개혁과 병행하여 위헌 재판 절차법 법안을 중의원 법무위원회에 제출했다.[10]
그러나 1958년 제28회 중의원의원총선거와 1959년 제5회 참의원의원통상선거에서 패배하며 좌우파 대립이 격화, 1960년 니시오 스에히로 등이 탈당하여 민사당을 결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즈키는 당 분열의 책임을 지고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1961년 5월, 아사누마 이네지로의 후임으로 사회당 고문으로서 일본 스모협회운영 심의 위원회 위원에 취임했다.[11]
스즈키 모사부로의 중의원 의원 당선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선거명 | 년도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총선거 | 1946년 | 도쿄도 2구 | 일본사회당 | 91,896표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47년 | 도쿄도 3구 | 일본사회당 | 52,561표 | 33.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49년 | 도쿄도 3구 | 일본사회당 | 42,448표 | 23.3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52년 | 도쿄도 3구 | 좌파사회당 | 69,626표 | 27.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53년 | 도쿄도 3구 | 좌파사회당 | 63,804표 | 26.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55년 | 도쿄도 3구 | 좌파사회당 | 72,128표 | 24.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58년 | 도쿄도 3구 | 좌파사회당 | 95,093표 | 27.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60년 | 도쿄도 3구 | 일본사회당 | 97,387표 | 28.7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총선거 | 1963년 | 도쿄도 3구 | 일본사회당 | 75,973표 | 20.9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2. 4. 사회당 통합과 재분열, 그리고 말년
1955년, 일본사회당 좌파와 우파는 통합하여 위원장에 스즈키 모사부로, 서기장에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취임했다. 스즈키는 가와카미 조타로 등 우파와 협력하며 온건 노선을 추구했고, 자유민주당을 대체할 수 있는 정당으로 성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1958년 총선과 1959년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고 당내 좌우파 간 대립이 격화되면서 위원장직에서 사임했다.1960년, 니시오 스에히로 등이 탈당하여 민주사회당을 결성했다. 스즈키는 에다 사부로의 구조개혁론(에다 비전)에 반대하는 등 교조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1962년에는 사회주의이론위원장에 취임하여 「일본에서의 사회주의로의 길」 책정에 관여, 사회당의 좌경화에 영향을 주었다.
1967년, 스즈키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1970년 5월 7일, 간경변으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지막 말은 도쿄대학 명예교수 오우치 헤이에게 남긴 "오우치 선생님, 부탁드립니다"였다.[14]
3. 사상과 평가
스즈키 모사부로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일본에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2] 그는 카를 카우츠키와 안토니오 그람시 등의 이론을 연구했는데,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이긴 하지만 스즈키의 이념과는 다른 이론적 구성을 가졌기에 노농파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와는 다소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2]
그의 반전 평화 사상은 일본 사회당의 주요 노선 중 하나였으며, 전후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1년 당수 취임 연설에서 "젊은이들이여, 무기를 들지 마십시오. 젊은 여성들이여, 남편과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은 일본 평화주의 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한국의 관점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4. 저서
제목 | 출판사 | 발행일 |
---|---|---|
노농 러시아의 국빈으로서 | 일본평론사출판부 | 1923년 1월 30일 |
일본형 독점자본의 전망 | 백양사 | 1931년 9월 |
신문비판 | 오하타서점 | 1933년 |
일본재벌론 | 개조사 | 1934년 9월 19일 |
일본형 독점자본의 해부 | 학예사 | 1935년 4월 18일 |
재계인물평론 | 개조사 | 1936년 4월 20일 |
전환기를 가는 일본재벌의 해부 | 오늘의 문제사 | 1936년 9월 15일 |
재계인물평론 | 춘추사 | 1937년 |
남작 고우 세이노스케 씨전 | 고우 남작기념회 | 1943년 |
사랑과 투쟁 | 노동문화사 | 1949년 5월 1일 |
재정독본 | 실업교과서 | 1949년 11월 25일 |
어떤 사회주의자의 반생 | 문예춘추신사 | 1958년 4월 30일 |
나의 걸어온 길 | 가와데쇼보신사 | 1960년 9월 30일 |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중앙공론사 | 1961년 7월 25일 |
5.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 회차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 여부 | 비고 |
---|---|---|---|---|---|---|---|---|
1946년 총선거 | 22회 | 도쿄도 2구 | 일본사회당 | 91,896표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47년 총선거 | 23회 | 도쿄도 3구 | 일본사회당 | 52,561표 | 33.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49년 총선거 | 24회 | 도쿄도 3구 | 일본사회당 | 42,448표 | 23.3%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2년 총선거 | 25회 | 도쿄도 3구 | 좌파사회당 | 69,626표 | 27.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3년 총선거 | 26회 | 도쿄도 3구 | 좌파사회당 | 63,804표 | 26.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5년 총선거 | 27회 | 도쿄도 3구 | 좌파사회당 | 72,128표 | 24.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8년 총선거 | 28회 | 도쿄도 3구 | 일본사회당 | 95,093표 | 27.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0년 총선거 | 29회 | 도쿄도 3구 | 일본사회당 | 97,387표 | 28.7%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3년 총선거 | 30회 | 도쿄도 3구 | 일본사회당 | 75,973표 | 20.9%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참조
[1]
웹사이트
Suzuki Mosaburō
http://kotobank.jp/w[...]
Kōdansha
2013-05-12
[2]
뉴스
Mosaburo Suzuki, Socialist Leader
https://www.nytimes.[...]
1970-05-08
[3]
간행물
蒲郡市発行『蒲郡市史 本文編2 近世編』および蒲郡市小中学校教職委員会・蒲郡市教育委員会編『蒲郡の人』
[4]
논문
[5]
뉴스
旧日農と無産大衆党の五幹部を除名
大阪毎日新聞
1929-05-17
[6]
서적
近代日本総合年表 第四版
岩波書店
2001-11-26
[7]
웹사이트
第4回国会 衆議院 不当財産取引調査特別委員会 第4号 昭和23年12月12日
https://kokkai.ndl.g[...]
1948-12-12
[8]
서적
戦後史のなかの日本社会党
中公新書
[9]
웹사이트
政権交代、他弱…与野党区別できない時代に? 戦後政治、野党の歩み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2-06-19
[10]
웹사이트
1956年3月12日衆議院議事録第16号、1959年3月12日参議院議事録第9号
https://kokkai.ndl.g[...]
1956-03-12
[11]
뉴스
朝日新聞
1961-05-10
[12]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2009-03
[13]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14]
서적
世界の名言臨終のことば
https://books.google[...]
PHP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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