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메옹 드니 푸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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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메옹 드니 푸아송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다. 푸아송은 유체 및 탄성 역학, 정적분, 푸리에 급수, 확률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푸아송 방정식, 푸아송의 법칙, 푸아송 비, 푸아송 분포 등 그의 이름을 딴 개념들이 존재한다.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런던 왕립학회 회원, 코플리 메달을 수여받는 등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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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메옹 드니 푸아송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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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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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781년 6월 21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루아레주 피티비에 |
사망일 | 1840년 4월 25일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오드센주 소 |
국적 | 프랑스 |
분야 | 수학, 지리학, 물리학 |
직장 | 에콜 폴리테크니크 국립 공무국 파리 과학 대학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
모교 | 에콜 폴리테크니크 |
박사 지도 교수 |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
학문적 조언자 |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
박사 제자 | 페터 구스타프 르죈 디리클레 조제프 리우빌 미셸 샬 |
주목할 만한 제자 | 니콜라 레오나르 사디 카르노 |
알려진 업적 | 푸아송 과정 푸아송 괄호 푸아송 다양체 푸아송 방정식 푸아송 분포 푸아송 비 푸아송 잡음 푸아송 생성 함수 푸아송 극한 정리 푸아송 커널 푸아송 합 공식 푸아송의 점 푸아송 영점 컨웨이-맥스웰-푸아송 분포 오일러-푸아송-다르부 방정식 |
종교 | 무신론자 |
수상 | 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 (1818) |
기타 | 에펠탑에 새겨진 72인 중 하나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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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781년 6월 21일 프랑스 루아레주 피티비에(Pithiviers프랑스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시메옹 푸아송(Siméon Poisson프랑스어)은 군인이었다.
1798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졸업 후 바로 조교(répétiteur프랑스어)가 되었고, 1802년에 조교수(professeur suppléant프랑스어), 1806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1808년에 경도 연구소(Bureau des Longitudes프랑스어)에 부임하였고, 1809년에 파리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817년 낭시 드 바르디(Nancy de Bardi프랑스어)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푸아송의 아버지는 귀족을 증오했던 경험 때문에 그를 엄격한 프랑스 제1공화국 신념으로 키웠다. 프랑스 혁명, 프랑스 제1제정, 그리고 그 이후의 복고 시대를 거치면서 푸아송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수학에 집중했다.
1818년에 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이 되었고, 1821년 루이 18세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1840년에 오드센주 소(Sceaux프랑스어)에서 사망하였다. 푸아송은 에펠탑에 이름이 새겨진 72인의 과학자 가운데 하나이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781년 6월 21일 프랑스 루아레주 피티비에(Pithiviers프랑스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시메옹 푸아송(Siméon Poisson프랑스어)은 군인이었다.[1]1798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수석을 차지했고, 곧 학교 교수들의 주목을 받았다. 교수들은 그에게 무엇을 공부할지 스스로 결정하도록 자유를 주었다.[1] 입학 후 2년도 채 되지 않아 졸업반에 다니던 그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하나는 에티엔 베주(Étienne Bézout프랑스어)의 소거법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한차분 방정식의 적분 개수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매우 인상적이어서 1800년 졸업 시험 없이 졸업할 수 있었다.[1],[2] 실베스트르 프랑수아 라크루아(Sylvestre-François Lacroix프랑스어)와 아드리앵 마리 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프랑스어)는 그의 논문이 당시 18세였던 푸아송에게는 전례 없는 영광인, '''외국 학자 논문집(Recueil des savants étrangers프랑스어)'''에 게재되어야 한다고 추천했다. 이 성공으로 푸아송은 과학계에 바로 진입하게 되었다.[23]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함수론 강의를 들었던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프랑스어)는 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친구가 되었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프랑스어)는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다.[23]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서투른 손재주 때문에 의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수학으로 전향했다. 1798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등에게 대수학 등을 배웠다.
2. 2. 학문 및 교육 활동
1798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바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조교(répétiteur프랑스어)가 되었고, 1802년에 조교수(professeur suppléant프랑스어), 1806년에 정교수가 되었다.[23] 1808년에 경도 연구소(Bureau des Longitudes프랑스어)에 부임하였고, 1809년에 파리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23] 1812년 연구소 회원, 1815년 생시르 군사학교(É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프랑스어) 시험관, 1816년 에콜 폴리테크니크 졸업 시험관, 1820년 대학 평의원, 1827년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의 후임으로 경도국 기하학자가 되었다.[23]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학업을 마친 직후, 푸아송은 학생 시절에도 맡았던 조교(répétiteur)로 임명되었다. 까다로운 강의 후에는 학우들이 그의 방을 찾아가 강의 내용을 반복해서 설명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1802년 부교수가 되었고, 1806년 장 밥티스트 조제프 푸리에의 후임으로 정교수가 되었다.[23] 1808년에는 경도국의 천문학자가 되었고, 1809년 파리 과학부(Faculté des sciences de Paris프랑스어)가 설립되었을 때 이론역학(mécanique rationelle프랑스어) 교수로 임명되었다.[23]
수학 교사로서 푸아송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조교로서 보여준 초기의 능력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매우 성공적이었다.[23]
1808년과 1809년에 푸아송은 주요 업적으로 여겨지는 몇몇 논문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프랑스어) 회보에 발표했다. 1808년의 Sur les inégalités des moyens mouvement des planètes프랑스어에서는 행성의 운동을 다루며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와 조제프루이 라그랑주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시도했다. 이어 1809년에는 Sur le mouvement de rotation de la terre프랑스어 및 Sur la variation des constantes arbitraires dans les questions de méchanique프랑스어에서 이를 발전시켰다. 1811년에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의 강의록을 2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프랑수아 아라고는 "삶은 수학을 하고 가르치는 두 가지 일에만 좋다."라고 푸아송이 말했다고 전한다.[5] 푸아송은 많은 공직에도 불구하고 300편이 넘는 저술을 발표할 시간을 찾았다.[23]
2. 3. 개인적인 삶
1781년 6월 21일 프랑스 루아레주 피티비에(Pithiviers프랑스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시메옹 푸아송(Siméon Poisson프랑스어)은 군인이었다.[1]1817년 낭시 드 바르디(Nancy de Bardi프랑스어)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23] 그의 아버지는 귀족을 증오했던 경험이 있어 푸아송을 엄격한 프랑스 제1공화국 신념으로 키웠다. 프랑스 혁명, 프랑스 제1제정, 그리고 그 이후의 복고 시대를 거치면서 푸아송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수학에 집중했다.[23]
1821년 루이 18세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나,[23] 훈장을 받거나 작위를 사용하지는 않았다.[23]
1840년 오드센주 소(Sceaux프랑스어)에서 사망하였다.[1] 푸아송은 에펠탑에 이름이 새겨진 72인의 과학자 가운데 하나이다.[1]
2. 4. 말년과 죽음
1818년에 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이 되었고, 1821년에 루이 18세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23] 1825년 남작 칭호를 받았지만,[23] 훈장을 받지도, 칭호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1818년 3월 왕립학회 회원(Fellow of the Royal Society)으로 선출되었고,[3] 1822년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명예 외국 회원,[4] 1823년 스웨덴 왕립과학원(Royal Swedish Academy of Sciences) 외국 회원이 되었다.1830년 7월 혁명으로 모든 영예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나, 프랑수아 장 도미니크 아라고가 장관회의에서 그의 "해임"이 모의되고 있는 동안 시민왕 루이 필리프가 그를 팔레 로와얄에서 만찬에 초대하도록 하여 정부의 불명예를 피했다. 그는 그곳에서 시민왕에게 공개적으로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 후 7년 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프랑스 과학의 대표로서 프랑스 귀족(peer of France)이 되었다.[23]
300편이 넘는 과학적 업적에 대한 헌사로 1837년 프랑스 귀족 작위를 받았다. 1840년에 오드센주 소(Sceaux프랑스어)에서 사망하였다. 에펠탑에 이름이 새겨진 72인의 과학자 가운데 하나로, 에펠탑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3. 업적
시메옹 드니 푸아송은 유체 및 탄성 역학과 관련된 다양한 법칙과 방정식, 그리고 순수 수학 분야에서의 여러 업적을 통해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 수리물리학: 푸아송 방정식, 푸아송 법칙, 푸아송 비 등을 통해 유체 및 탄성 역학에 기여했다.
- 순수 수학: 정적분, 푸리에 급수, 변분법, 확률론 등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 역학: 변분법을 발전시키고 응용했으며, 푸아송 괄호를 도입하여 해밀턴 역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 광학: 빛의 파동설을 지지하는 아라고 스팟 (푸아송 스팟) 발견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 확률론: 푸아송 분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푸아송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보에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의 강의록은 책으로 출판되어 오랫동안 표준적인 저서로 여겨졌다. 1818년에는 런던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32년에는 코플리 메달을 수상했다.[27]
3. 1. 수리물리학
푸아송은 유체와 탄성 역학에 대한 푸아송 방정식·푸아송 법칙·탄성 물질에 관한 푸아송 비율 등으로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순수 수학 분야에서도 정적분·푸리에 급수·변분법·확률론 등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퍼텐셜 이론에서 포아송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
이는 퍼텐셜 에 대한 2계 편미분 방정식 인 라플라스 방정식의 잘 알려진 일반화이다.
만약 가 연속 함수이고 (또는 점이 무한대로 '이동')일 때 함수 가 충분히 빠르게 0으로 수렴한다면, 포아송 방정식의 해는 뉴턴 퍼텐셜
:
이다. 여기서 은 체적 요소 와 점 사이의 거리이다. 적분은 전체 공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포아송 방정식은 처음으로 ''Bulletin de la société philomatique'' (1813)에 발표되었다.[23] 이 주제에 대한 포아송의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논문은 ''Sur l'attraction des sphéroides'' (Connaiss. ft. temps, 1829)와 ''Sur l'attraction d'un ellipsoide homogène'' (Mim. ft. l'acad., 1835)이다.[23]
푸아송은 라플라스 방정식이 고체의 외부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변화하는 밀도를 가진 질량에 대한 엄밀한 증명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1839년에 처음 제시했다. 포아송 방정식은 중력뿐만 아니라 전기와 자기에도 적용된다.[6]
18세기 말, 정전기에 대한 인류의 이해는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미 전하와 전하 보존의 법칙의 개념을 확립했고, 샤를 쿨롱은 그의 정전기의 역제곱 법칙을 발표했다. 1777년,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는 넓게 퍼져있는 물체의 중력을 계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퍼텐셜 함수의 개념을 도입했다. 1812년, 푸아송은 이 아이디어를 채택하여 전기에 대한 적절한 표현식을 얻었는데, 이는 퍼텐셜 함수 를 전하 밀도 와 관련짓는다.[7] 푸아송의 퍼텐셜 이론에 대한 연구는 조지 그린의 1828년 논문 ''전기와 자기에 대한 수학적 분석의 응용에 관한 에세이''에 영감을 주었다.
1820년,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는 근처의 전기 회로를 닫거나 열어 자침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는 이 현상을 설명하려는 수많은 논문 발표로 이어졌다. 앙페르의 법칙과 비오-사바르 법칙이 빠르게 유도되었다. 전자기학이라는 과학이 탄생한 것이다. 푸아송 또한 이 당시 자기 현상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그는 전기와 자기를 별개의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을 고집했다. 그는 1826년에 자기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8] 1830년대까지 전기 연구의 주요 연구 과제는 전기가 물질과 구별되는 유체 또는 유체인지, 아니면 중력처럼 물질에 작용하는 것인지 여부였다. 쿨롱, 앙페르, 그리고 푸아송은 전기가 물질과 구별되는 유체라고 생각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기분해를 시작으로 한 그의 실험 연구에서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패러데이는 전기가 물질의 일부라고 믿었다.[9]
3. 2. 역학
푸아송은 유체와 탄성 역학에 대한 푸아송 방정식, 푸아송 법칙, 탄성 물질에 관한 푸아송 비율 등으로 크게 이바지하였다.[23] 18세기에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에 의해 창시된 변분법은 19세기에 푸아송에 의해 더욱 발전하고 응용되었다.[15]:
:여기서 이다. 그러면 는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을 만족하면 극값을 갖는다.
:
:하지만 가 의 고계도함수에 의존한다면, 즉
:
:이면, 는 오일러-푸아송 방정식을 만족해야 한다.
:[16]
푸아송의 [http://catalog.hathitrust.org/Record/000387664 ''Traité de mécanique''] (2권 8vo, 1811년과 1833년)는 라플라스와 라그랑주의 스타일로 쓰여졌으며 오랫동안 표준적인 저서였다.[23]
:를 위치, 를 운동 에너지, 를 위치 에너지(둘 다 시간 와 무관)라고 하자. 라그랑주 운동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15]
:
:여기서 점 표기는 시간 미분을 나타낸다. . 푸아송은 로 설정했다.[15] 그는 가 와 무관하다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따라서[15]
:
:그는 운동량에 대한 명시적인 공식을 도입했다.[15]
:
:따라서 운동 방정식에서 그는 다음을 얻었다.[15]
:
푸아송의 저술은 윌리엄 로언 해밀턴과 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의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푸아송의 [https://books.google.com/books?id=lksn7QwUZsQC&q=Poisson+mechanics Treatise on Mechanics]의 번역본은 1842년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와 를 운동의 정준 변수 와 의 함수라고 하자. 그러면 그들의 푸아송 괄호는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17]
:이 연산은 반교환 법칙을 따른다. 더 정확하게는 이다.[17] 해밀턴의 운동 방정식에 의해, 의 전체 시간 미분은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는 해밀토니안이다. 따라서 푸아송 괄호의 관점에서 해밀턴 방정식은 와 로 쓸 수 있다.[17]
:가 운동 상수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다음을 만족해야 한다.
:
:또한, 푸아송의 정리는 임의의 두 운동 상수의 푸아송 괄호도 운동 상수임을 나타낸다.[17]
1821년, 클로드-루이 나비에는 탄성체와의 유추를 사용하여 점성 유체의 기본 운동 방정식에 도달했는데, 이는 현재 나비어-스톡스 방정식으로 알려져 있다. 1829년 푸아송은 독자적으로 같은 결과를 얻었다. 조지 가브리엘 스톡스는 1845년에 연속체 역학을 사용하여 이를 재도출했다.[20] 푸아송, 오귀스탱-루이 코시, 소피 제르맹은 19세기 탄성 이론에 주요한 기여를 한 사람들이다.[15]
3. 3. 순수 수학
푸아송은 유체와 탄성 역학에 대한 푸아송 방정식, 푸아송의 법칙, 탄성 물질에 관한 푸아송의 비율 등으로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순수 수학 분야에서도 정적분, 푸리에 급수, 변분법, 확률론 등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순수 수학 분야에서 푸아송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정적분에 관한 일련의 논문과 푸리에 급수에 대한 논의였다. 후자는 같은 주제에 대한 페터 구스타프 르장 디리클레와 베른하르트 리만의 고전적인 연구를 위한 길을 열었다. 이러한 연구는 1813년부터 1823년까지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저널과 1823년 아카데미 회보에 실려 있다. 그는 또한 푸리에 적분을 연구했다.[23]
푸아송은 변분법에 관한 논문(아카데미 회보, 1833년)과 관측 결과의 평균 확률에 관한 논문(코네상스 데 탕, 1827년 등)을 저술했다. 확률 이론에서의 푸아송 분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3]
1820년 푸아송은 복소평면에서의 경로를 따라 적분을 연구하여 이를 처음으로 수행한 사람이 되었다.[13]
1829년 푸아송은 탄성체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나중에 발산 정리로 알려지게 된 특수한 경우에 대한 진술과 증명이 포함되어 있었다.[14]
3. 4. 확률론
푸아송은 순수 수학 분야에서 정적분, 푸리에 급수, 변분법, 확률론 등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정적분에 관한 일련의 논문과 푸리에 급수에 대한 논의는 페터 구스타프 르장 디리클레와 베른하르트 리만의 고전적인 연구를 위한 길을 열었다.[23]푸아송은 변분법에 관한 논문(아카데미 회보, 1833년)과 관측 결과의 평균 확률에 관한 논문(코네상스 데 탕, 1827년 등)을 저술했다. 확률 이론에서의 푸아송 분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3]
3. 5. 광학
푸아송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de l'Institut de France)의 "원로" 회원으로, 빛의 입자 이론을 확고히 믿고 대안적인 파동 이론에 회의적이었다. 1818년 아카데미는 상금 주제로 회절을 선정했다. 참가자 중 한 명인 토목 기술자이자 광학자인 오귀스탱-장 프레넬은 휘헌스-프레넬 원리와 영의 이중 슬릿 실험 분석을 바탕으로 회절을 설명하는 논문을 제출했다.[10]푸아송은 프레넬의 이론을 자세히 연구하여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을 찾았다. 푸아송은 빛의 점광원을 가리는 원형 장애물의 그림자 중심축 상에 프레넬의 이론이 밝은 점을 예측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결함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빛의 입자 이론은 완전한 어둠을 예측하는 반면, 푸아송은 이것이 불합리하며 프레넬의 모델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은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쉽게 관찰되지 않는데, 대부분의 일상적인 광원은 좋은 점광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원회 위원장인 도미니크-프랑수아-장 아라고는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2mm 금속 디스크를 밀랍으로 유리판에 고정했다.[11] 놀랍게도 모두 예측된 밝은 점을 관찰했고, 이는 파동 모델을 입증했다. 프레넬은 경연에서 우승했다.
그 후 빛의 입자 이론은 사라졌지만, 20세기에 다른 형태인 파동-입자 이중성으로 부활했다. 아라고는 나중에 회절 밝은 점(나중에 아라고 스팟과 푸아송 스팟으로 알려짐)이 이미 1세기 전에 조제프-니콜라 델리슬[11]과 자코모 F. 마랄디[12]에 의해 관찰되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3. 6. 기타
푸아송은 유체와 탄성 역학에 대한 푸아송 방정식, 푸아송 법칙, 탄성 물질에 관한 푸아송 비율 등으로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순수 수학 분야에서도 정적분, 푸리에 급수, 변분법, 확률론 등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23]파동 이론에 관한 논문(Mém. ft. l'acad., 1825)을 발표했다.[23]
푸아송은 수많은 회고록 외에도 여러 논문을 발표했는데, 대부분은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 수리물리학에 관한 방대한 저술의 일부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중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언급할 수 있다.[23]
- ''Nouvelle théorie de l'action capillaire'' (4to, 1831)
- ''Recherches sur la probabilité des jugements en matières criminelles et matière civile'' (4to, 1837), 모두 파리에서 출판됨.
- 푸아송의 모든 논문과 저작 목록은 ''Oeuvres complétes de François Arago, Vol. 2''에서 찾아볼 수 있다.
- Mémoire sur l'équilibre et le mouvement des corps élastiques (''Mémoires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de l'Institut de France'' 제8권, 1829),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의 디지털 사본
- Recherches sur le Mouvement des Projectiles dans l'Air, en ayant égard a leur figure et leur rotation, et a l'influence du mouvement diurne de la terre (1839)

정치 활동가였던 에바리스트 갈루아가 에콜 노르말에서 퇴학당한 후 수학으로 돌아왔을 때, 푸아송은 그에게 방정식 이론에 관한 그의 연구를 제출할 것을 요청했고, 그는 1831년 1월에 제출했다. 7월 초, 푸아송은 갈루아의 연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했지만, 갈루아에게 "그의 모든 연구를 출판하여 최종적인 의견을 형성하라"고 격려했다.[24] 푸아송의 보고서는 갈루아가 7월 14일에 체포되기 전에 작성되었지만, 10월까지 감옥에 있는 갈루아에게 전달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당시 그의 성격과 상황을 고려할 때, 갈루아가 학회를 통해 논문을 출판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대신 그의 친구 오귀스트 슈발리에를 통해 개인적으로 출판하기로 결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갈루아는 푸아송의 조언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모든 수학 원고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1832년 4월 29일 석방[25]된 후에도 그의 아이디어를 다듬는 것을 계속했으며, 그 후 어떤 식으로든 치명적인 결투로 판명된 결투에 참가하도록 설득되었다.[26]
4. 저서
- (1811) 《역학》(Traité de mécanique프랑스어), 총 2권
- (1831) 《모세관 현상의 새로운 이론》(Nouvelle théorie de l'action capillaire프랑스어)[23]
- (1835) 《열의 수학적 이론》(Théorie mathématique de la chaleur프랑스어)
- (1837) 《형법과 민법의 판결에서의 확률에 대한 연구》(Recherches sur la probabilité des jugements en matières criminelles et matière civile프랑스어)[23]
- ''Nouvelle théorie de l'action capillaire'' (4to, 1831)
- ''Recherches sur la probabilité des jugements en matières criminelles et matière civile'' (4to, 1837), 모두 파리에서 출판됨.
- 푸아송의 모든 논문과 저작 목록은 ''Oeuvres complétes de François Arago, Vol. 2''에서 찾아볼 수 있다.
- Mémoire sur l'équilibre et le mouvement des corps élastiques (''Mémoires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de l'Institut de France'' 제8권, 1829), 프랑스 국립도서관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의 디지털 사본
- Recherches sur le Mouvement des Projectiles dans l'Air, en ayant égard a leur figure et leur rotation, et a l'influence du mouvement diurne de la terre (18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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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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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sson; Simeon Denis (1781 -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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