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시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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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몬 시몽은 프랑스의 배우로, 1931년 영화 《미지의 가수》로 데뷔하여 프랑스에서 성공적인 배우로 자리 잡았다. 1930년대 중반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걸스 도미토리》, 《레이디스 인 러브》 등에 출연했으나, 1930년대 후반 프랑스로 돌아와 《인간 야수》에 출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다시 할리우드로 건너가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 《고양이 인간》 등에 출연했다. 전쟁 후 프랑스로 돌아와 《라 롱드》에 출연했으며, 1973년 마지막 영화 출연을 끝으로 배우 활동을 마무리했다. 시몬은 2005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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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몬 시몽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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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시몬 테레즈 페르낭드 시몬 |
| 출생일 | 1911년 4월 23일 |
| 출생지 | 마르세유, 프랑스 |
| 사망일 | 2005년 2월 22일 |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 직업 | 배우 |
| 활동 기간 | 1931년 – 1973년 |
| 주요 작품 | 제7천국 캣 피플 |
2. 초기 생애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한 프랑스계 유대인 엔지니어이자 비행기 조종사인 앙리 루이 피르맹 클레르 시몽이었고, 어머니는 이탈리아 주부 에르마 마리아 도메니카 조르첼리였다. 시몽은 어린 시절 마다가스카르, 부다페스트, 토리노, 베를린 등 여러 도시에서 살다가 마르세유에 정착하여 성장했다.[9] 1931년에는 파리로 가서 잠시 가수, 모델, 패션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한때 조각가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다.[6]
1931년 프랑스에서 영화 배우로 데뷔하여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1934년 영화 ''레이디스 레이크'' 출연 이후 20세기 폭스의 대릴 F. 재넉에게 발탁되어 1935년 할리우드로 진출했다.[6] 그러나 큰 기대를 받으며 홍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폭스에서 출연한 영화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시몽은 주로 부프 파리지앵 극장에서 연기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사샤 기트리와 함께 《오 몽 벨 앵코뉘》라는 작품에 출연하며 보다 진지한 연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6]
3. 경력
이에 실망한 시몬은 1938년 프랑스로 돌아가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 ''인간 야수''에 출연했다.[14]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다시 할리우드로 건너가 RKO와 계약했으며, 이 시기에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 (1941), 호러 영화 ''고양이 인간'' (1942) 및 그 속편 ''고양이 인간의 저주'' (1944) 등 영어권 영화에서 성공을 거두었다.[14] 특히 발 루턴이 제작한 '고양이 인간' 시리즈는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지속되지 못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비교적 평범한 영화에 출연하는 데 그쳤다.[14] 전쟁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1950년 영화 ''원무'' 등에 출연했으나, 이후 영화 출연은 크게 줄어들었다. 1973년 마지막 영화 출연을 끝으로 사실상 은퇴했다.
1953년에는 제1회 프랑스 영화제 참석차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19]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나, 조지 거슈윈을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 2월 22일 파리에서 노환으로 사망했으며, 향년 94세였다.
3. 1. 프랑스에서의 활동 (1931-1936)
1931년 6월, 한 식당에서 빅토르 투르장스키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계약 제안을 받으면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던 계획을 접었다.[9] 같은 해 영화 ''미지의 가수''(Le chanteur inconnu프랑스어)로 데뷔했으며, 당시 연기 경험이 전혀 없었다고 후에 밝혔다.[2] 이 영화를 통해 시몬은 빠르게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영화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1932년부터는 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1934년 마르크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레이디스 레이크''(Lac aux dames프랑스어)에 출연하며 큰 명성을 얻었다. 시몬은 이 작품을 ''미지의 가수'' 이후 자신의 첫 번째 진지한 역할로 여겼으며,[6][2] 이후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공에 알레그레 감독의 공이 크다고 감사를 표했다.[6]
''레이디스 레이크''에서의 연기를 눈여겨본 20세기 폭스의 대릴 F. 재넉은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1935년 8월 그녀를 할리우드로 초청했다. 시몬은 미국 진출을 결정하기 전, 알레그레 감독과 함께 ''검은 눈''(Les yeux noirs프랑스어) (1935)과 ''아름다운 날들''(Les beaux jours프랑스어) (1935) 두 편의 영화를 더 촬영했다.[6]
3. 2. 할리우드 진출과 좌절 (1936-1938)
대릴 F. 재넉은 마르크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레이디스 레이크'' (Lac aux dames프랑스어, 1934)에 출연한 시몬을 눈여겨보고,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1935년 8월 그녀를 할리우드로 데려왔다.[6] 시몬은 미국 계약을 수락하기 전,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검은 눈'' (Les yeux noirs프랑스어, 1935)과 ''아름다운 날들'' (Les beaux jours프랑스어, 1935) 촬영을 마쳤다.[6]
당시 외국 배우들이 활동 전 몇 달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시몬은 단 몇 주간의 영어 수업만 받고 촬영장에 투입될 예정이었다.[3] 그러나 스튜디오는 그녀에게 맞는 역할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당초 스페인 소녀 역으로 ''가르시아에게 보내는 메시지'' (1936)를 통해 미국 영화계에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리타 헤이워드로 교체되었다.[4] 1935년 중반에는 ''두 개의 깃발 아래'' (1936)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지만, 제작 도중 해고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병 때문이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변덕스러운 행동으로 영화 감독 프랭크 로이드를 불쾌하게 하여 촬영 12일 만에 재넉에게 해고당한 것으로 밝혀졌다.[4] 시몬 본인은 1936년 인터뷰에서 영화를 위한 수 주간의 테스트와 리허설 후 병이 났다고 주장했다.[3] 하지만 제작 초기에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스타의 가치는 스스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달렸다"는 마를레네 디트리히와의 대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도 했다.[5] 그녀는 자신이 무례하거나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 미국 생활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6] 건강 악화로 입원까지 하게 되자, 시몬은 미국 계약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5]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직후,[5] 스튜디오는 그녀를 세 번째 주연 역할로 ''걸스 도미토리'' (1936)에 캐스팅했다. 시몬은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고 자신의 캐릭터에 "훌륭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5] 하지만 촬영 중 다시 변덕을 부린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는 주연 배우 루스 채터튼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채터튼은 시몬이 자신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는다고 느꼈다.[5][7] 시몬은 스튜디오 임원들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고 있어 촬영 내내 긴장했다고 털어놓았다.[5] ''걸스 도미토리''는 그 해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나,[8] 대중에게는 금방 잊혔고 시몬의 미국 데뷔는 인상적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몬은 센세이션으로 주목받았고 비평가들은 그녀의 연기를 호평했으며,[9] 잡지들은 그녀가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되었다고 보도했다.[6]
영화 개봉 직후, 그녀는 프로듀서 어빙 커밍스와 다시 작업하게 될 B급 영화 ''화이트 헌터''에 캐스팅되었으나, 촬영 중 또다시 독감에 걸려 결국 배우 준 랭으로 교체되었다.[10] 대신 스튜디오는 1936년 중반 촬영된 로맨틱 코미디 ''레이디스 인 러브'' (1936)에 그녀를 급히 투입했다. 이 영화에는 자넷 게이너, 로레타 영, 콘스탄스 베넷 등 쟁쟁한 여배우들이 함께 출연했는데, 일부는 시몬이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고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9] 이러한 캐스팅은 시몬이 배우로서 제대로 경쟁할 기회를 제한했다. 시몬은 갈등을 피하고 자신의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조수를 고용하기도 했다.[11]
주급을 받는 등 큰 기대를 모았음에도 불구하고,[7] 시몬이 20세기 폭스에서 출연한 영화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무성 영화 고전 ''제7의 천국'' (1927)의 자넷 게이너 역할을 맡아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출연한 1937년 리메이크작 역시 흥행에 실패했다. 이후 ''위험 - 직장에서의 사랑'' (1937)에 캐스팅되었으나, 심한 프랑스 억양 때문에 앤 서던으로 교체되었다.[12] 적절한 역할을 찾지 못한 스튜디오는 그녀에게 8주간의 프랑스 휴가를 허락했고, 1937년 6월 복귀 후 ''수에즈'' (1938)에 배정되었으나, 프로젝트가 보류되면서 결국 이 역할에서도 제외되었다.[13]
1930년대 후반, 시몬은 미국에서의 경력 정체와 부정적인 언론 홍보에 실망하여 프랑스로 돌아갔다.[14] 귀국 후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 ''인간 야수'' (1938)에 출연했다.
3. 3. 프랑스 귀환과 재기 (1938-1940)
1930년대 후반, 시몬은 미국에서의 영화 경력과 관련된 홍보 방식에 불만을 느끼고 프랑스로 돌아갔다.[14] 프랑스로 돌아온 후, 그녀는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 ''인간 야수 (영화)'' (La Bête humaine, 1938)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할리우드로 건너가 RKO 픽처스에서 일하게 된다.
3. 4. 다시 할리우드로 (1940-1947)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몬은 다시 할리우드로 건너가[14] RKO 라디오 픽처스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 (1941), 괴기 영화 ''고양이 인간'' (1942), 그리고 속편 격인 ''고양이 인간의 저주'' (1944) 등에 출연하며 영어권 영화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14] 특히 후자의 두 영화는 발 루턴이 제작한 유명 공포 영화 시리즈의 일부였다.[14]
당시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던 시몬은 자신의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소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마리온 데이비스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사생아이며, 오리건 주 세일럼 출신의 파라마운트 전속 배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15] 이러한 영화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는 더 큰 스타덤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시몬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상대적으로 평범한 영화들에 출연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14]
3. 5. 프랑스 복귀와 이후 활동 (1947-1973)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로 돌아와 연기 활동을 이어갔다. 1950년에는 영화 《원무》(La Ronde)에 출연했다. 그러나 이 영화 이후 시몬의 영화 출연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며, 1973년에 마지막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1953년 10월에는 제1회 프랑스 영화제 참석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때 앙드레 카야트, 제라르 필립 등과 함께 방문단에 포함되었다.[19]
4. 사생활
마르세유에서 태어났으며,[1]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한 프랑스계 유대인 엔지니어이자 비행기 조종사인 앙리 루이 피르맹 클레르 시몽이었고, 어머니는 이탈리아 주부 에르마 마리아 도메니카 조르첼리였다. 시몽은 마르세유에 정착하여 성장하기 전에 마다가스카르, 부다페스트, 토리노, 베를린 등지에서 살았다.[9] 1931년 파리로 이주하여 잠시 가수, 모델,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했으며, 한때 조각가를 꿈꾸기도 했다.[6]
시몽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의 비서에 따르면, 시몽이 관심을 가진 남성, 특히 조지 거슈윈에게 금으로 만든 침실 열쇠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영화 역사가 그레그 맹크는 이 이야기가 당시 고용주로부터 돈을 갈취한 혐의로 재판 중이던 비서에게서 나왔으며, 그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해당 비서는 이후 유죄 판결을 받았고, 집행 유예 조건으로 이 스캔들에 대해 다시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1950년대에는 프랑스 은행가이자 경주마 소유주 겸 사육사인 알렉 웨이스바일러와 연인 관계를 맺었다. 그의 아내 프랑신 웨이스바일러는 장 콕토의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중 간첩이었던 두샨 포포프(암호명 "Tricycle")와도 관계를 가졌다.[16]
시몽은 2005년 2월 22일,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94세로 자연사했다. 사망 며칠 후, 프랑스 문화부 장관 르노 도니외 드 바브르는 성명을 통해 시몽의 "매력과 저항할 수 없는 미소"를 언급하며, "시몬 시몽의 죽음으로 우리는 20세기 전반 프랑스 영화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뛰어난 스타 중 한 명을 잃었다"고 애도했다.[17]
2011년, 영국 작가 스티븐 모즐리는 자신의 기묘한 이야기 모음집 《시몬 시몽을 사랑한 소년》(The Boy Who Loved Simone Simon)에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5. 사망
2005년 2월 22일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94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며칠 후, 프랑스 문화부 장관 르노 도니외 드 바브르는 성명을 발표하여 시몽의 "매력, 저항할 수 없는 미소 ... 시몬 시몽의 죽음으로 우리는 20세기 전반 프랑스 영화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뛰어난 스타 중 한 명을 잃었다."라고 칭송했다.[17]
6. 주요 출연 작품

|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
| 1931 | 뒤랑 대 뒤랑 | 엘리안 | |
| 맘젤 니투슈 | 크레딧 없음 | ||
| 미지의 가수(Le chanteur inconnu) | 피에레트 | 원제: Le chanteur inconnu | |
| 온 오페레 상 도울뢰르 | |||
| 1932 | 초콜릿 소녀 | 줄리 | 원제: La petite chocolatière |
| 아메리카에서 온 아들 | 마리제 | 원제: 'Un fils dAmérique'' | |
| 호텔의 왕 | 빅투아르 | 원제: Le roi des palaces | |
| 행복하게 살기 | 자클린 | 원제: Pour vivre heureux | |
| 1933 | 슬픈 가방 | 릴리 | 원제: Tire au flanc |
| 페인트 조심 | 아멜리 가다린 | 원제: Prenez garde à la peinture | |
| 발렌시아의 별 | 리타 | ||
| Le Voleur | |||
| 1934 | 레이디스 레이크 | 퍽 | 원제: Lac aux dames |
| 1935 | 검은 눈(Les yeux noirs) | 타니아 | 원제: Les yeux noirs |
| 아름다운 날들(Les beaux jours) | 실비 | 원제: Les beaux jours | |
| 1936 | 걸스 도미토리 | 마리 클로델 | |
| 레이디스 인 러브 | 마리 아르망 | ||
| 1937 | 제7의 천국 | 디안 | |
| 위험 - 직장에서의 사랑 | 이베트 게린 | ||
| 1938 | 조제트 | 르네 르블랑 | |
| 인간 야수 | 세베린 루보 | 대체 제목: The Human Beast, Judas Was a Woman | |
| 1940 | 사랑의 캐벌케이드 | 줄리에트 | 원제: 'Cavalcade damour'' |
| 1941 |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 | 벨 | 대체 제목: All That Money Can Buy |
| 1942 | 고양이 인간 | 이레나 두브로브나 리드 | |
| 1943 | 타히티 허니 | 수제트 수지 뒤랑 | |
| 1944 | 고양이 인간의 저주 | 이레나 리드 | |
| 조니는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 캐시 오몽 | 대체 제목: And So They Were Married | |
| 마드모아젤 피피 | 엘리자베스 부세 – 작은 세탁부 | 대체 제목: 기 드 모파상의 마드모아젤 피피 | |
| 1946 | 페트루스 | 미고 | |
| 1947 | 유혹의 항구 | 카멜리아 | 대체 제목: Temptation Harbor |
| 1950 | 이름 없는 여자들 | 이본느 드부아 | 원제: Donne senza nome |
| 1950 | 라 롱드 | 마리, 하녀 | |
| 1951 | 올리비아 | 마드무아젤 카라 | 대체 제목: The Pit of Loneliness |
| 1952 | 르 플레지르 | 조세핀 – 모델 | 대체 제목: House of Pleasure (세그먼트 "Le Modèle") |
| 1954 | 세 명의 도둑 | 도리스 오르나노 | |
| 이중 생활 | 프랑소와즈 드누아예 | 원제: Das zweite Leben | |
| 1956 | 특별한 날 | 미셸 블랑샤르 | |
| 1973 | 푸른 옷을 입은 여인 | 라 담 드 뫼동 | 원제: La femme en bleu (마지막 영화 배역) |
7. 기타
시몬은 평생 독신이었지만, 많은 동료 배우나 음악가 등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시중을 들던 하녀에 따르면, 관심을 가진 남성에게는 누구에게나 개인실 열쇠를 건네주었다고 하며, 그중에는 조지 거슈윈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1953년 (쇼와 28년) 10월 20일, 제1회 프랑스 영화제 참석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앙드레 카야트, 제라르 필립과 함께 방일하여 도쿄, 오사카, 교토 등지를 방문했다.[19]
2005년 기준으로, 시몬이 출연한 영화 《수수인간》, 《캣 피플》, 《윤무》가 일본에서 DVD로 판매되었다. 과거에는 《캣 피플의 저주》의 LD도 판매된 바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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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Simone Simon (Biography)
http://www.altfg.com[...]
2005-02-24
[2]
뉴스
Tender Little Savage: France's Favorite Descends upon the Hollywood Scene
Oakland Tribune
1935-12-29
[3]
뉴스
Simone Simon Was Ready to Go Home
The Milwaukee Journal
1936-11-13
[4]
웹사이트
Notes for Under Two Flags (1936)
http://www.tcm.com/t[...]
2010-06-06
[5]
뉴스
Simone Simon Heartstick, Wanted to Go Home
The Milwaukee Journal
1936-11-13
[6]
뉴스
Pouting Lady From France
Oakland Tribune
1936-11-29
[7]
뉴스
Pittsburgh Press
1936-08-31
[8]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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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04-30
[9]
뉴스
The Strange New Star in Hollywood's Heaven
The Salt Lake Tribune
1936-09-20
[10]
웹사이트
Notes for White Hunter (1936)
http://www.tcm.com/t[...]
2010-06-06
[11]
뉴스
Simone Simon Hires Expert to Avoid Quarrels
Chicago Tribune
1936-07-24
[12]
서적
The World and Its Double: The Life and Work of Otto Preminger
Macmillan Publishers
2009
[13]
뉴스
Idle Simone At Last Is Given Role
Pittsburgh Press
1937-06-18
[14]
뉴스
Simone Simon A Star Again
The Gazette (Montreal)
1944-05-31
[1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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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McFarland
[16]
웹사이트
UK exposes secret agent's sex life
http://archives.cnn.[...]
2002-05-08
[17]
웹사이트
Renaud Donnedieu de Vabres rend hommage à Simone Simon
http://www.culture.g[...]
2005-02-23
[18]
뉴스
Simone Simon Stars in 'Thin Man' Mystery
https://www.newspape[...]
2016-01-14
[19]
간행물
フランス映画祭 ジェラール・フィリップ シモーヌ・シモン アンドレ・カイヤット 来る
株式会社スタア
195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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