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카 고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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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즈카 고젠은 겐페이 전쟁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애첩이었다. 생애는 『아즈마카가미』에 기록되어 있으며, 요시츠네를 따라 규슈로 향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헤어진 후 가마쿠라로 압송되어 춤을 추고, 요시츠네의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을 잃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는 일본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기념되며, 연극, 무용,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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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카 고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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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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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시즈카 고젠 |
일본어 표기 | 静御前 (しずかごぜん) |
묘지 |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조후쿠지 |
생애 | |
출생 | 1165년 경 |
사망 | 1211년 |
활동 시기 | 헤이안 시대 말기 ~ 가마쿠라 시대 초기 |
신분 | 기녀, 무녀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이소노젠지 시게나리 (磯禅師成方) |
어머니 | 이소노젠니 (磯禅尼) |
배우자 |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
자녀 |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아이 (아들, 사산) |
기타 정보 | |
주요 활동 |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의 사랑, 비극적인 죽음 |
전설 | 전국 각지에 시즈카 고젠 관련 전설이 남아 있음 |
등장 작품 | 요시쓰네 (NHK 대하드라마, 2005년) Fate/Grand Order |
2. 생애
요시츠네는 겐페이 전쟁 후 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대립하여 교토를 떠나 규슈로 향했으나, 요시츠네의 선단은 폭풍을 만나 해안으로 되돌아왔다. 요시노에서 요시츠네와 헤어진 시즈카는 교토로 돌아가던 중 종자에게 소지품을 빼앗기고 산속을 헤매다 산승에게 붙잡혀 호조 도키마사에게 인도되어 분지 2년(1186년) 3월에 어머니 이소노젠지와 함께 가마쿠라로 보내졌다.[2]
1186년 4월 8일, 시즈카는 요리토모의 명으로 쓰루오카 하치만구 앞에서 시라뵤시 춤을 추게 되었다. 이때 시즈카는 요시츠네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렀다.[2]
- ''시즈야 시즈 시즈노오다마키 쿠리카에시 옛날을 지금으로 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네''
- ''요시노 산 봉우리의 흰 눈을 밟아 가며 들어간 사람의 흔적이 그리워''

이 노래는 요리토모를 격분시켰으나, 그의 아내 호조 마사코가 중재하여 시즈카는 목숨을 건졌다.
이때 시즈카는 요시츠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요리토모는 "딸이면 살려주되, 아들이면 죽여라"라고 명령했다. 1186년 윤7월 29일, 시즈카는 아들을 낳았으나, 아다치 기요쓰네에게 빼앗겨 유이가하마에 수장되었다.
1186년 9월 16일, 시즈카와 이소노젠지는 교토로 돌아갔다. 마사코와 오히메는 불쌍히 여겨 많은 보물을 주었다고 한다.[2] 그 후의 소식은 알려진 바가 없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시즈카 고젠의 출생지는 일반적으로 단고국 아미노초(網野町)의 이소(磯)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머니 이소노젠지[2] 역시 시라뵤시였다. 교토부 교탄고시 아미노정 이소 지구에는 시즈카 고젠 탄생지 석비가 세워져 있으며[8], 근처에는 시즈카 신사가 있다.[8][9]
『기케이키(義経記)』에 따르면, 고시라카와 법황은 가뭄이 계속되자 신센엔 연못에서 100명의 승려에게 독경을 시켰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래서 100명의 아름다운 시라뵤시에게 춤을 추게 하여 비를 빌게 했다. 99명까지는 효험이 없었지만, 시즈카가 춤을 추자 검은 구름이 나타나 3일 동안 비가 계속 내렸다. 시즈카는 법황으로부터 "일본 제일"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이때 요시츠네를 만나 첩이 되었다고 한다.
2. 2. 요시쓰네와의 만남과 이별
요시쓰네는 겐페이 전쟁이 끝난 후, 형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대립하게 되면서 1185년 교토를 떠나 규슈로 향했다.[2] 시즈카 고젠은 요시쓰네를 따라 나섰으나, 요시쓰네 일행의 배는 폭풍우를 만나 난파되었다.[2] 시즈카 고젠은 요시노에서 요시쓰네와 헤어지게 되었다.[2]교토로 돌아가던 시즈카 고젠은 종자에게 소지품을 빼앗기고 산속을 헤매다 산승에게 붙잡혀 호조 도키마사에게 인도되었고, 분지 2년(1186년) 3월 어머니 이소노젠지와 함께 가마쿠라로 압송되었다.[2]
2. 3. 가마쿠라에서의 춤과 요시쓰네를 향한 노래
분지 2년(1186년) 4월 8일, 시즈카는 요리토모의 명으로 쓰루가오카하치만구샤 앞에서 시라뵤시 춤을 추게 되었다. 이때 시즈카는 요시츠네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2]- ''시즈야 시즈 시즈노오다마키 쿠리카에시 옛날을 지금으로 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네''
(倭文(시즈)의 천을 짜는 삼실을 둥글게 감은 오다마키에서 실이 풀려나오듯이,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부디 옛날을 지금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 ''요시노 산 봉우리의 흰 눈을 밟아 가며 들어간 사람의 흔적이 그리워''
(吉野山の峰の白雪を踏み分けて姿を隠していったあの人(요시츠네)의 흔적이 그리워)
이 노래는 요리토모를 격분시켰으나, 그의 아내 호조 마사코가 "제가 그녀의 입장이라도 저렇게 노래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중재하여 시즈카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2][3] 『아즈마카가미(吾妻鏡)』는 시즈카의 춤을 "진실로 이것은 사단의 장관, 료진(梁塵)이 거의 움직이게 될 듯, 상하 모두 흥감을 일으킨다"라고 극찬했다.
2. 4. 요시쓰네의 아들 출산과 죽음
이때 시즈카는 요시츠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요리토모는 "딸이면 살려주되, 아들이면 죽여라"라고 명령했다.[2] 윤7월 29일, 시즈카는 아들을 낳았다. 아다치 기요쓰네가 아이를 데려가려 했지만, 시즈카는 울부짖으며 놓지 않았다. 이소노젠지가 아이를 빼앗아 기요쓰네에게 건넸고, 갓 태어난 아이는 유이가하마에 수장되었다.[2]9월 16일, 시즈카와 이소노젠지는 교토로 돌아갔다. 마사코와 오히메가 불쌍히 여겨 많은 보물을 주었다고 한다.[2]
2. 5. 그 후의 행적과 죽음
요시츠네와 헤어진 후 시즈카 고젠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자살설과 여행 중 객사설 등 여러 전승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자살설: 홋카이도 오토베정 히메카와에 몸을 던졌다는 설, 유이가하마에 입수했다는 설 등이 있다.
- 객사설: 요시츠네를 쫓아갔으나, 어린 나이에 이동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설 등이 있다. 시즈카 고젠이 생을 마감한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시즈카 고젠의 죽음에 대한 전승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주요 전승 내용이다.
지역 | 내용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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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테현미야코시 스즈카나 | 요시츠네가 히라이즈미를 떠나 홋카이도로 갔다는 요시츠네 북행기의 경로에 해당한다. 시즈카는 이곳에서 요시츠네의 둘째 아이를 낳으려 했지만, 난산으로 모자 모두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지역 주민들은 시즈카 고젠을 존경하여 신으로 모셨고, 이것이 [https://moonraitomama.wixsite.com/website-1 스즈가 신사]이다. | 신사 입구에는 시즈카 고젠 공양탑이 있다. | ||||||||||||||||||||||||||||||||||||||||||||||||||||||||||||||||||||
이바라키현고가시 시모베미 | 시즈카 고젠이 행선지를 고민했다고 전해지는 시안바시라는 다리가 있다.[17] | |||||||||||||||||||||||||||||||||||||||||||||||||||||||||||||||||||||
사이타마현쿠키시쿠리하시 | 요시츠네를 쫓아온 시즈카 고젠은 1189년 5월, 현재 이바라키현 고가시 시모베미에서 요시츠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야나기 절에서 출가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여행에 지쳐 병을 얻어 같은 해 9월 15일에 사망했다고 한다.[16] 쿠리하시역 동쪽 출구에는 시즈카 고젠의 묘 등이 있다. | 매년 9월 15일에 시즈카 고젠 묘전제라는 추선 공양이 열린다. | ||||||||||||||||||||||||||||||||||||||||||||||||||||||||||||||||||||
효고현아와지시 시즈키 | 시즈카 고젠은 가마쿠라에서 요시츠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살해당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이후 요리토모의 여동생의 남편인 이치조 요시야스에게 맡겨졌다. 이치조 가문의 장원이 시즈키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은거하며, 1211년 겨울에 47세로 사망하여, 공양으로 호쿄인토가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 |||||||||||||||||||||||||||||||||||||||||||||||||||||||||||||||||||||
나라현야마토타카다시 | 이소노 젠니의 마을로, 시즈카 고젠도 어머니의 마을로 돌아와 생을 마쳤다는 전설이 있다. | |||||||||||||||||||||||||||||||||||||||||||||||||||||||||||||||||||||
니가타현나가오카시 토치오 | 시즈카 고젠의 것으로 전해지는 묘가 있다. | |||||||||||||||||||||||||||||||||||||||||||||||||||||||||||||||||||||
후쿠시마현코리야마시 | 요시츠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시즈카 고젠이 몸을 던졌다고 전해지는 미녀 연못과, 그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시즈카 고젠당이 있다. 시즈카 고젠당 앞의 큰 길은 시즈카 고젠 거리로 불린다. | |||||||||||||||||||||||||||||||||||||||||||||||||||||||||||||||||||||
나가노현오마치시 미아사 오시오 | 시즈카 고젠이 오슈와 오시오를 착각하여 도착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 때 땅에 꽂은 지팡이에서 싹이 텄다는 개벚나무 거목 시즈의 벚나무가 있다. | |||||||||||||||||||||||||||||||||||||||||||||||||||||||||||||||||||||
후쿠오카현후쿠츠시 | 몰락한 시즈카 고젠은 분고국・우스키를 거쳐 3. 『아즈마카가미』에 나타난 시즈카 고젠(시즈의 천을 짜는 삼실을 둥글게 감은 오다마키에서 실이 풀려나오듯이,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부디 옛날을 지금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이 노래는 요리토모를 격노하게 했지만, 아내 호조 마사코가 "제가 시즈카의 입장이라도 저렇게 노래했을 것입니다"라고 변호하여 목숨을 건졌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는 시즈카의 춤 장면에 대해 "진실로 이것은 사단의 장관, 료진(梁塵)이 거의 움직이게 될 듯, 상하 모두 흥감을 일으킨다"라고 극찬했다. 당시 시즈카는 요시츠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요리토모는 "딸이면 살려두되, 아들이면 죽여라"라고 명령했다. 윤달 7월 29일, 시즈카는 아들을 낳았지만, 아다치 키요츠네가 아이를 빼앗아 유이가하마에 수장시켰다. 9월 16일, 시즈카와 이소노젠지는 교토로 돌아갔다. 마사코와 오히메는 시즈카 모녀를 불쌍히 여겨 많은 보물을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시즈카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기록된 시즈카 고젠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4. 각지의 전승
시즈카 고젠의 출생지, 사망지, 유적지 등에 대한 전승은 일본 각지에 널리 퍼져 있다. 주요 전승지는 다음과 같다.
5. 관련 작품
시즈카 고젠은 일본의 다양한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노 연극 ''후나 벤케이''와 분라쿠 연극 ''요시쓰네 센본자쿠라''에 나오며, 이 두 작품은 가부키로 각색되기도 했다. 지다이마츠리에서 시즈카 고젠으로 분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5. 1. 노(能)
5. 2. 무용요리토모가 쓰루가오카하치만구샤 앞에서 시라뵤시 춤을 명했을 때 시즈카가 춘 춤을 표현한 일본무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5. 3. 영화5. 4. TV 드라마
5. 5. 가요곡
5. 6. 서적/만화
5. 7. 게임
참조
[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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