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즉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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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즉물주의는 1920년대 독일에서 시작된 예술 운동으로, 표현주의의 주관성을 거부하고 현실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1925년 만하임 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를 통해 회화 분야에서 처음 개념이 제시되었으며, 고전주의와 베리스무스(사실주의)의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후 사진, 건축, 영화, 문학, 연극, 음악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었으나, 나치 정권의 등장과 함께 1933년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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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미술은 20세기 초 사물의 재현을 벗어나 순수한 조형 요소로 표현하는 미술 양식이며, 바실리 칸딘스키 등에 의해 시작되어 다양한 운동을 거쳐 발전했고 기하학적 추상과 서정적 추상으로 분류된다.
신즉물주의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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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920년대 |
국가 | 독일 |
이전 운동 | 표현주의 |
영향 받은 운동 | 초현실주의 마술적 사실주의 |
특징 | |
주제 | 전쟁의 참상 바이마르 공화국의 부조리 사회 비판 |
기법 | 극사실주의적 묘사 냉소적 시각 사회 비판적 메시지 강조 |
양식 |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표현 감정 배제 차가운 리얼리즘 |
주요 인물 | |
화가 | 오토 딕스 게오르그 그로츠 막스 베크만 크리스티안 샤드 카를 그로스베르크 다다 |
작가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에른스트 윙거 알프레트 되블린 베르톨트 브레히트 |
건축가 | 에른스트 마이 미스 반 데어 로에 발터 그로피우스 |
사진작가 | 아우구스트 잔더 카를 블로스펠트 |
배경 | |
시대적 배경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혼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 |
철학적 배경 | 실증주의 객관주의 허무주의 |
어원 | |
독일어 명칭 | Neue Sachlichkeit |
영어 명칭 | New Objectivity |
의미 | 새로운 객관성, 새로운 사실주의 |
2. 미술
신즉물주의 미술은 1925년 만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하르트라우프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표현주의 이후 독일 미술의 새로운 경향을 지칭했다. 표현주의가 주관적인 감정 표현에 치중하여 비합리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것에 반대하며, 객관적인 대상 파악을 통해 현실감을 회복하고자 했다.[1]
하르트라우프는 신즉물주의를 좌익의 베리스무스(사실주의)와 우익의 고전주의 두 가지 경향으로 구분했다. 베리스무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혼란한 독일 사회의 모습을 좌익적인 시각에서 통렬하게 비판했으며, 대표적인 화가로는 게오르크 그로스와 오토 딕스가 있다. 고전주의는 객관적이고 정적인 묘사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게오르크 슈림프와 알렉산더 카놀트 등이 대표적이다.
프란츠 로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신즉물주의, 그 중에서도 특히 고전주의의 특징을 설명했다. 그는 평범한 사물의 객관적인 묘사를 통해 현실의 신비로움을 드러내고자 했다.
신즉물주의는 나치가 대두하면서 퇴폐 예술로 낙인찍혀 탄압받았고, 결국 소멸되었다.
신즉물주의 주요 화가들은 다음과 같다:
화가 | 출생-사망 |
---|---|
아돌프 엘프스로 | 1881-1947 |
알렉산더 카놀트 | 1881-1939 |
카를로 멘제 | 1886-1965 |
게오르크 슈림프 | 1889-1938 |
게오르크 숄츠 | 1890-1945 |
루돌프 슈리히터 | 1890-1955 |
오토 딕스 | 1891-1969 |
조지 그로스 | 1893-1959 |
루돌프 바커 | 1893-1939 |
카를 그로스베르크 | 1894-1940 |
크리스찬 샤드 | 1894-1982 |
콘라트 펠릭스뮐러 | 1897-1977 |
엘프리데 로제-베흐틀러 | 1899-1940 |
2. 1. 베리스무스 (사실주의)
신즉물주의 운동에서 사회 비판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낸 분파는 베리스무스(사실주의)였다.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날카롭게 묘사했다.[7] 대표적인 화가로는 게오르크 그로스와 오토 딕스가 있으며,[8] 이들은 베를린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사회적 풍자를 담은 작품을 제작했다.[3]게오르크 그로스, 오토 딕스, 게오르크 숄츠, 루돌프 슐리히터와 같은 베리스무스 화가들은 사건 뒤에 숨겨진 광기를 묘사하고, 참여자들을 만화처럼 과장되게 표현하는 풍자적인 장면을 그렸다. 초상화를 그릴 때는 묘사된 인물의 특징적인 면모나 특정 사물을 강조하여 표현했다.
크리스티안 샤트와 같은 다른 베리스무스 화가들은 임상적인 정확성으로 현실을 묘사했는데, 이는 경험적 분리와 대상에 대한 친밀한 지식을 모두 암시했다. 샤트의 그림은 예술 평론가 빌란트 슈미트의 말에 따르면 "피부 아래를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예술적 인식"이 특징이다.[9] 그의 작품에는 종종 잠재적인 무의식적 현실을 암시하는 심리적 요소가 도입되었다.
2. 2. 고전주의
신즉물주의의 고전주의는 베리스무스와 달리 객관적이고 정적인 묘사를 추구했으며,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표현하고자 했다.[6] 대표적인 화가로는 알렉산더 카놀트, 게오르크 슈림프 등이 있다.[11] 이들은 19세기 예술, 이탈리아 형이상주의 화가, 노베첸토 이탈리아노의 예술가들, 그리고 앙리 루소에게서 영감을 받았다.[13] 특히 앙리 루소는 1910년에 사망했지만, 신즉물주의 작품에 가장 뚜렷한 영향을 미친 프랑스 화가였다.[4]고전주의자들은 프란츠 로의 용어인 마술적 사실주의로 가장 잘 이해되지만, 로는 원래 "마술적 사실주의"를 신즉물주의 전체와 동의어로 사용하려고 했다.[14] 로는 표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우리 주변의 객관적 세계의 자율성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사물로 결정화될 수 있는 물질의 경이로움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15] 즉, 평범한 세계의 "마법"을 강조하며, 일상적인 물건을 자세히 보면 그것들이 얼마나 이상하고 환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2. 3. 마술적 사실주의
프란츠 로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신즉물주의의 특징을 설명했다. 이는 표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 주변의 객관적 세계의 자율성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사물로 결정화될 수 있는 물질의 경이로움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었다.[15] 즉, 일상적인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를 통해 현실의 신비로움을 드러내고자 했다. 로는 평범한 세계의 "마법"을 강조했는데, 우리가 일상적인 물건을 정말로 볼 때 그것들이 어떻게 이상하고 환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를 강조했다.[14]로는 원래 "마술적 사실주의"를 ''신즉물주의'' 전체와 동의어로 사용하려고 했지만,[14] 이후 신즉물주의의 한 경향, 특히 게오르크 슈림프, 알렉산더 칸올트, 카를로 멘세, 하인리히 마리아 다브링하우젠, 빌헬름 하이세 등이 속한 고전주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11] 이들은 19세기 예술, 이탈리아 형이상주의 화가, 노베첸토 이탈리아노의 예술가, 앙리 루소에게서 영감을 얻었다.[13]
2. 4. 지역 그룹
신즉물주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널리 여행하지 않았고, 양식적 경향은 지리적 위치와 관련이 있었다. 고전주의자들은 주로 뮌헨에 기반을 둔 반면, 사실주의자들은 주로 베를린(그로스, 딕스, 슐리히터, 샤트)에서 활동했다. 드레스덴 (딕스, 한스 그룬디히, 빌헬름 라흐니트 등), 카를스루에 (카를 후브부흐, 게오르크 숄츠, 빌헬름 슈나렌베르거) 등에서도 활동했다.[11] 카를스루에 예술가들의 작품은 후브부흐의 수채화 《쾰른 수영 선수》(1923)에서와 같이 딱딱하고 정밀한 드로잉 스타일을 강조한다.[16]쾰른에서는 프란츠 빌헬름 자이베르트와 하인리히 뢰를레가 이끄는 구성주의 그룹에 게르트 아른츠도 포함되었다. 안톤 래더샤이트 역시 쾰른 출신으로, 짧은 구성주의 단계를 거쳐 안토니오 동기와 형이상학적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하노버에서 활동한 그레테 퓌르겐스, 한스 메르텐스, 에른스트 톰스, 에리히 베그너와 같은 예술가들은 종종 서정적인 스타일로 지방적인 주제를 묘사했다.[17]
프란츠 라트지빌은 불길한 풍경을 그렸으며, 작은 해안 마을인 당가스트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살았다.[18] 카를 그로스베르크는 아헨과 다름슈타트에서 건축을 공부한 후 화가가 되었으며, 산업 기술을 임상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19]
3. 사진
알베르트 렝어-파트슈와 아우구스트 잔더는 이전의 회화적인 사진과 달리 날카로운 초점과 객관적인 시선을 강조하는 '신 사진'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20] 카를 블로스펠트의 식물 사진 역시 신즉물주의의 변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21]
신즉물주의가 사진에 미친 영향은 독일에서 1920년대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예로 알베르트 렝거=파치의 『세상은 아름답다』(Die Welt ist Schönde, 1928년)와 카를 블로스펠트의 『예술의 원형』(Urformen der Kunstde, 1928년) 사진집이 있다. 전자는 공장이나 기계를 중심으로 사람과 동물을 포함한 다양한 것을, 후자는 식물만을 기술적 실험성 없이 냉정하고 비인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선으로 촬영한 작품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단순한 전통적 리얼리즘이 아닌, 신즉물주의적인 시선·색채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또한 클로즈업이나 수평선·수직선의 강조 등 구성주의적인 언어도 사용되고 있다. 아우구스트 잔더는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인물을 포착한 사진가로 1929년 사진집 『시대의 얼굴』(Antlitz der Zeitde)을 출판했다.
더 나아가 기계 미학이라는 측면에 주목하면, 프랑스 제르멘 쿨의 『메탈』(Métal프랑스어, 1927년) 등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작품 경향은 모홀리너지 등의 바우하우스의 실험적·전위적인 사진과 함께 노이에 포토(독일 신흥 사진)로 묶여졌다.
일본에서는 신즉물주의의 사진에 대한 영향이 신흥 사진의 일부로 1930년경에 전개되기 시작하여 보도 사진, 전위 사진 등의 다양한 분야의 사진 작품에 침투해 갔다.
사진에 있어서 신즉물주의의 영향은 표현적인 면이 대부분이며, 정치성이나 사회 풍자(예: 게오르크 그로스)와 같은 사상적인 면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4. 건축
건축에서 신즉물주의는 회화와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이마르 문화의 1920년대 초 과도기적 독일 작품을 묘사하며, 이는 표현주의 건축의 양식적 과잉과 국가적 분위기의 변화에 대한 직접적인 반작용이었다. 브루노 타우트, 에리히 멘델존, 한스 푈치히와 같은 건축가들은 신즉물주의의 직설적이고 기능적이며 사실적인 건축 접근 방식으로 전환했는데, 이는 독일에서 노이에스 바우엔|새로운 건축d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노이에스 바우엔|새로운 건축de 운동은 도스 계획 채택과 나치의 부상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번성했으며, 바이센호프 단지와 같은 공개 전시회, 타우트와 에른스트 마이의 대규모 도시 계획 및 공공 주택 프로젝트, 바우하우스의 영향력 있는 실험을 포함했다.
독일공작연맹 발기인 헤르만 무테지우스가 신즉물주의 건축의 출발점을 제시했다.
신즉물주의 건축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브루노 타우트, 미스 반 데어 로에, 에른스트 마이, 한스 푈치히 등이 있다.
5. 영화
영화에서 신즉물주의는 사실적인 배경, 간결한 촬영 기법과 편집, 인물과 사건을 해석하는 방법으로서 무생물을 탐구하는 경향, 노골적인 감정 표현의 부재, 그리고 사회적 주제로 나타났다.
이 운동과 가장 연관된 감독은 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이다. 1920년대 파브스트의 영화는 낙태, 매춘, 노동 분쟁, 동성애, 중독과 같은 사회 문제에 집중했다. 그의 차분하고 비판적인 1925년 작품 ''즐거움 없는 거리''는 신즉물주의 스타일의 랜드마크이다. 다른 감독으로는 에르뇌 메츠너, 베르톨트 피어텔, 게르하르트 람프레히트가 있었다.
6. 문학
신즉물주의 문학은 현실에 대한 정치적 관점을 주요 특징으로 했다.[22] 디스토피아를 감상적이지 않고, 무감정적인 보도 스타일로 묘사하며, 세부 사항의 정확성과 "사실"에 대한 숭배를 통해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휴머니즘, 유토피아로서의 예술, 현실 도피로서의 예술을 거부하고, 인류에 대한 뚜렷한 냉소주의를 보였다.[23] 대표적인 신즉물주의 문학가로는 알프레드 되블린, 한스 팔라다, 이르가르트 코인, 에리히 케스트너 등이 있으며, 아프리칸스 문학에서는 시인 잉리드 욘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욘커가 있다.
7. 연극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표현주의 연극이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은 인간이다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연극 제작에 협업 방식을 도입했다.[24] 이러한 연극 기법은 "브레히트적"이라고 알려졌으며, 그와 함께 작업한 작가 및 배우 집단을 "브레히트 집단"이라고 부른다.
8. 음악
음악에서 신즉물주의는 후기 낭만주의의 과도한 감정 표현과 표현주의의 격정적인 표현을 거부하고, 간결하고 명확한 형식과 객관적인 표현을 추구했다. 파울 힌데미트는 음악 분야에서 이러한 경향을 실천적으로 보급한 인물로, 스스로 '실용음악'(Gebrauchsmusikde)으로 분류한 작품들을 통해 이를 보여주었다. 그의 목관 5중주곡인 '작은 실내음악 작품번호 24의 2'가 대표적이다.[25] 쿠르트 바일 역시 '하류 오페라'를 비롯한 무대작품을 통해 명랑하고 활발한 신즉물주의 음악을 선보였다.[25]
이들은 반음계와 안어울림음을 사용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감이 있는, 신바로크풍의 음악을 추구했다. 나치스 집권 이후 두 사람 모두 미국으로 망명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힌데미트는 바로크 음악 모델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형식과 안정적인 다성 음악 구조를 사용하면서도, 현대적인 불협화음과 재즈의 영향을 받은 리듬을 결합했다.[25] 에른스트 토흐와 쿠르트 바일도 1920년대에 신즉물주의 음악을 작곡했다.[25] 초기에는 신즉물주의 운동과 연대했던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는 만년에 고전 음악에 대한 엄격한 해석으로 유명해졌다.
9. 종말과 유산
신즉물주의 운동은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바이마르 공화국과 함께 끝났다고 여겨진다.[26] 나치는 신즉물주의의 많은 작품을 "퇴폐 미술"로 규정하여 압수하고 파괴했으며, 많은 예술가들의 전시를 금지했다. 카를 후브부흐, 아돌프 우자르스키, 오토 나겔 등 일부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완전히 금지당했다. 이 운동의 주요 인물 중 일부는 망명했으나, 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계속 그리지는 않았다. 게오르크 그로스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낭만주의 양식을 채택했고, 막스 베크만의 작품은 1937년 독일을 떠날 무렵 프란츠 로의 정의에 따르면 표현주의였다.
독일 밖에서 신즉물주의의 영향은 발튀스, 살바도르 달리(1924년의 ''루이스 부뉘엘의 초상''과 같은 초기 작품에서)[27], 오귀스트 에르뱅, 마루하 마요, 카냐초 디 산 피에트로, 그랜트 우드, 아담슨-에릭, 유한 묵스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신흥 사진의 일부로 1930년경부터 신즉물주의가 사진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여 보도 사진, 전위 사진 등 다양한 분야의 사진 작품에 스며들었다. 다나카 초토쿠가 도몬 켄의 작품을 논할 때 신즉물주의를 언급하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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