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미즈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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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르미즈드 2세는 303년부터 309년까지 사산 제국을 통치한 페르시아의 왕이었다.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쿠샨 왕조와 연관된 통치를 하기도 했다. 호르미즈드 2세는 가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암살당했고, 그의 아들 샤푸르 2세가 태어나자마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는 잔혹함과 자비로움이 공존했으며, 아르메니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딸을 결혼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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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미즈드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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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칭호 | 이란과 비이란의 샤한샤 |
왕조 | 사산 왕조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통치 | |
즉위 | 303년 |
퇴위 | 309년 |
이전 통치자 | 나르세 |
다음 통치자 | 아두르 나르세 |
가족 | |
아버지 | 나르세 |
어머니 | 샤푸르두크탁 |
배우자 | 이프라 호르미즈드 |
자녀 | 아두르 나르세 호르미즈드 샤푸르 2세 아르다시르 2세 |
2. 어원
호르미즈드(Ōhrmazd, Hormozd로도 표기)라는 이름은 조로아스터교 최고 신 이름의 중세 페르시아어 버전으로, 아베스타어로는 아후라 마즈다라고 한다.[1]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Auramazdā''이며, 그리스어로는 ''Hormisdas''이다.[2][3] 이 이름은 아르메니아어로는 ''Ormizd'', 조지아어로는 ''Urmizd''로 기록되어 있다.
호르미즈드 2세는 7년간 재위했지만, 그의 통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는 임신 중인 왕비 이프라에게 왕자를 낳으면 샤푸르 2세라 이름 짓고 후계자로 삼으라고 명했다.[1] 이프라는 샤푸르 2세를 임신한 동안 왕관을 다리 사이에 두어, 샤푸르 2세가 태어나자마자 왕관을 쓸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309년 샤푸르 2세는 태어나자마자 왕위에 올랐고, 이프라의 섭정이 시작되었다.[2]
3. 생애
하지만 호르미즈드 2세에게는 이미 아다르나세스와 또 다른 아들(이름 미상, 장님이라고 함), 그리고 셋째 아들 호르미즈드가 있었다. 장자 아다르나세스는 포악한 성격 탓에 귀족들에게 암살당했고,[3] 셋째 호르미즈드는 샤푸르 2세 즉위 당시에도 감옥에 갇혀 있었다. 323년, 호르미즈드는 부인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망명했다. 363년 율리아누스의 군대에 합류하여 페르시아 크테시폰으로 진격하기도 했다.
호르미즈드 2세는 아랍계 가산 왕에게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 시리아로 원정길에 올랐다. 그는 가산 왕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그 잔당에게 사냥 도중 암살당했다.
동방 전역을 휩쓴 호르미즈드의 반란 이후, 쿠샨은 거의 독립 상태에 있었다. 쿠샨 왕들은 독자적으로 화폐를 발행했고, 호르미즈드 2세는 왕자 시절 쿠샨 족장의 딸과 결혼하기도 했다. 초기 사산 왕조의 역사는 바흐람 1세 계통(273년~바흐람 3세의 293년)과 나르세 계통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는데, 호르미즈드의 반란은 쿠샨을 힘으로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쿠샤노-사산 왕조라 불리는, 사산 왕조 왕족이 번왕으로 통치하는 체제가 부활했음을 의미한다.
3. 1. 배경
호르미즈드의 아버지 나르세는 293년 왕위에 오르면서 나크셰 로스탐에 즉위 부조를 제작했다. 이 부조에는 여신 아나히타로 추정되는 여성에게 왕권을 상징하는 반지를 받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여성이 그의 아내이자 호르미즈드의 어머니인 샤푸르두크탁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1] 나르세 뒤에 서 있는 인물은 사산 왕조의 후계자가 주로 착용했던 동물 전부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어 호르미즈드일 가능성이 높다.[2]
호르미즈드는 아버지의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쟁은 사산 왕조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나르세의 아내와 일부 자녀들이 포로로 잡혔고, 그는 가족을 돌려받기 위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몇몇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할애해야 했다.[2]
호르미즈드는 300년부터 303년까지 쿠샨-사산 왕국을 잠시 통치했던 사산 왕자 호르미즈드 2세 쿠샨샤와 동일인물일 수 있다.[3] 이들은 날개 달린 왕관을 쓴 모습이 묘사된 동전을 주조했으며, 동전 뒷면에는 전통적인 불의 제단이 두 명의 시종에 의해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고, 불꽃에서 머리가 솟아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호르미즈드 2세 치세에 처음 등장한 쿠샨-사산 스타일의 전형적인 디자인이다.[3]
3. 2. 통치
303년에 호르미즈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초창기 사산 왕조의 통치자, 예컨대 바흐람 2세가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 왕관을 썼다. 호르미즈드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는 잔혹한 통치자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자비로운 통치자가 되었다고 한다.
thumb에서 적을 꿰뚫는 모습의 부조]]
처음 두 샤, 아르다시르 1세와 샤푸르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행해졌던 종교적 관용 정책으로 돌아갔던 그의 아버지와 달리,[2] 호르미즈드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롭게 살았던 마니교 신자들을 박해했다. 호르미즈드는 후제스탄 지방의 이제 근처에 쿠랑 (또는 와히슈트-호르모즈드)이라는 농촌 지역을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호르미즈드는 티리다테스 3세 치하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아르메니아와의 사산 제국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딸 호르미즈드두흐트를 마미코니안 가문의 바한이라는 왕자와 결혼시켰다.[3]
파르스 지방(현재의 파르스 주)의 나크셰 로스탐에 있는 호르미즈드의 암석 부조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 내부에 혼란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부조에서 그는 말을 타고 헬멧에 바흐람 2세와 나르세의 통치 기간 동안 알바니아의 (총독)로 활동한 고위 귀족 파파크의 가문 문양이 새겨진 적을 꿰뚫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호르미즈드는 통치 말년에 시리아의 가산 왕조 왕국의 영토를 침략하여 조공을 갈취하려 했다. 그 결과 가산 왕조 왕은 로마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로마군 증원군이 나타나기 전에 살해되었다. 호르미즈드는 309년에 사막에서 사냥을 하던 중 가산 왕조 군대에 매복하여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죽음에 대한 더 유력한 이유는 그를 외딴 곳에서 살해하고 그의 아들들마저 제거하려 했던 이란 귀족이었을 것이다.
11세기의 ''세르트 연대기''에 따르면 호르미즈드는 아버지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로마와 전쟁을 선포했으며, 아르벨라 연대기는 로마 황제가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호르미즈드가 대군을 일으켜 로마 영토를 침략하고 많은 도시를 약탈했다고 한다. 이 두 출처의 신빙성은 의심스러우며, 다른 출처에서는 이러한 사건이 보고되지 않았다. 이란학 학자 알리레자 샤푸르 샤흐바지에 따르면 "호르미즈드의 시리아 침략설을 반영한 것일 뿐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동방 전역을 휩쓴 호르미즈드의 반란(사카 왕 오르에미스) 이후, 쿠샨은 거의 독립 상태에 있었다. 쿠샨의 왕들은 호르미즈드의 반란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화폐를 계속 발행했다. 호르미즈드 2세는 왕자 시절, 쿠샨 족장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초기 사산 왕조의 역사는 바흐람 1세의 계통(273년부터 바흐람 3세의 293년까지)과 나르세의 계통의 대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르에미스는 바흐람 1세의 계통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쿠샨을 힘만으로는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부 지방을 완전히 나르세파가 장악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쿠샤노-사산 왕조라고 불리는 사산 왕조의 왕족이 번왕이 되어 통치하는 체제가 다시 부활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사산 왕조 자체가 불안정해지자마자 쿠샨 왕들이 독립을 지향하여 사산 왕조를 뒤흔들게 된다.
호르미즈드 2세에게는, 확인되는 것만으로 아두르나르세와 호르미즈드라는 왕자가 있었다. 장자 아두르나르세는 잔혹하여, 동생 호르미즈드를 13년이나 옥중에 감금했다. 그는 아내의 도움으로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망명했다. 이후,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군에 종군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은 로마의 집정관으로 잠시 임무를 수행했지만, 363년, 샤푸르 2세 시대에 드디어 귀환할 수 있었다.
호르미즈드 2세는 아랍계 가산의 왕에게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 시리아로 원정하여, 가산 왕을 쳐 죽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잔당에게 사냥 도중 암살당했다. 호르미즈드 2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임신 중인 왕비가 왕자를 낳으면 샤푸르라고 이름 짓고 후계자로 삼으라고 말했다("페르시아의 제왕사").
이것이 후에 반세기 동안 군림하는 샤푸르 2세이며,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왕관을 받드는 매우 드문 군주가 되었다. 호르미즈드 2세는 샤푸르 2세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전에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4. 후계
호르미즈드 2세는 재위 기간(7년) 동안 치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임신 중이던 왕비 이프라에게 왕자를 낳으면 샤푸르 2세라 이름 짓고 후계자로 삼으라고 명했다.[1] 이프라는 샤푸르 2세를 임신한 동안 왕관을 다리 사이에 두어 샤푸르 2세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왕관을 쓸 수 있도록 했다.[2] 309년 샤푸르 2세는 태어나자마자 왕위에 올랐고, 이프라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호르미즈드 2세에게는 아들 아다르나세스(Adarnases)와 호르미즈드가 있었다. 장남 아다르나세스는 성격이 포악하여 귀족들에게 암살당했고,[3] 셋째 아들 호르미즈드는 투옥되었다가 323년 부인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망명했다. 이후 호르미즈드는 363년 율리아누스의 군대에 합류하여 페르시아의 크테시폰으로 진격했다.
호르미즈드 2세 사후, 장남 아두르 나르세가 왕위를 이었으나 몇 달 만에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 귀족들은 둘째 아들을 맹인으로 만들고, 셋째 아들 호르미즈드를 투옥했다. 왕위는 호르미즈드 2세의 아내 이프라가 잉태한 샤푸르 2세에게 돌아갔다. 샤푸르 2세는 어머니 뱃속에서 왕관을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4. 1. 쿠샨-사산 왕조와의 관계
호르미즈드 2세는 300년부터 303년까지 쿠샨-사산 왕국을 잠시 통치했던 사산 왕자 호르미즈드 2세 쿠샨샤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날개 달린 왕관을 쓴 모습으로 묘사된 동전을 주조했는데, 동전 뒷면에는 전통적인 불의 제단이 두 명의 시종에 의해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고, 불꽃에서 머리가 솟아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호르미즈드 2세 치세에 처음 등장한 쿠샨-사산 스타일의 전형적인 디자인이다.동방 전역을 휩쓴 호르미즈드의 반란(사카 왕 오르에미스) 이후, 쿠샨은 거의 독립 상태에 있었다. 쿠샨의 왕들은 호르미즈드의 반란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화폐를 계속 발행했다. 호르미즈드 2세는 왕자 시절, 쿠샨 족장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초기 사산 왕조의 역사는 바흐람 1세 계통(273년부터 바흐람 3세의 293년까지)과 나르세 계통의 대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르에미스는 바흐람 1세 계통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쿠샨을 힘만으로는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부 지방을 완전히 나르세파가 장악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쿠샤노-사산 왕조라고 불리는 사산 왕조의 왕족이 번왕이 되어 통치하는 체제가 다시 부활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사산 왕조 자체가 불안정해지자마자 쿠샨 왕들이 독립을 지향하여 사산 왕조를 뒤흔들게 된다.
5. 자녀
호르미즈드 2세는 아내 이프라-호르미즈드와 여러 다른 부인 및 첩에게서 많은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아두르 나르세 | 3세기 – 309년 | 사산 제국의 9대 왕[1] |
샤푸르 2세 | 309년 – 379년 | 사산 제국의 10대 왕[2] |
아두르프라즈기르드 | ??? – 4세기 | 남부 아르바이스탄의 총독[3] |
자마스프 | ??? – 4세기 | 북부 아르바이스탄의 총독 |
샤푸르 사칸샤 | ??? – 4세기 | 사카스탄의 총독 |
호르미즈드 | ??? – 4세기 | 이란 귀족에 의해 투옥되었고 이후 로마 제국으로 망명 |
아르다시르 2세 | 309년 – 383년 | 사산 제국의 11대 왕 |
나르세 | ??? – 4세기 | 330년대 중반에 잠시 아르메니아 왕위를 차지함 |
호르미즈드두흐트 | ??? – 4세기 | 마미코니안 왕자 바한과 결혼 |
참조
[1]
출처
2010-07-15
[2]
출처
2010-07-15
[3]
출처
201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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