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모리 (키프로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모리 (1155년 이전 출생, 1205년 사망)는 뤼지냥 가문 출신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치안판사, 키프로스 영주,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1187년 하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후 석방되었고, 1194년 형의 사망으로 키프로스 영주가 되었다. 1197년에는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1198년에는 예루살렘의 이사벨 1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 그는 두 왕국을 통치하며, 아이유브 왕조와 휴전을 맺고, 키프로스에서 법률 개정을 추진하는 등 평화와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아모리는 1205년 사망했으며, 키프로스 왕위는 아들 위그 1세가, 예루살렘 왕위는 이사벨 1세의 딸 마리아가 계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145년 출생 - 마쓰도노 모토후사
    마쓰도노 모토후사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구교로, 섭정과 관백을 역임했으나 정치적 대립으로 부침을 겪었고 유식고실에 능통하여 후대 섭관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145년 출생 - 쇼시 내친왕 (1145년)
    쇼시 내친왕은 토바인과 카스가노츠보네 사이에서 태어나 타카쿠라 천황의 카모 사이인으로 점정되었으나 사임하고, 렌게죠인을 창건하여 죠에 법친왕을 유자로 삼았으며, 다이고제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 키프로스 국왕 - 기 드 뤼지냥
    기 드 뤼지냥은 12세기 프랑스 귀족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하틴 전투 패배 후 왕위를 잃고 키프로스 영주가 되어 뤼지냥 가문에 의한 키프로스 왕국 성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 키프로스 국왕 - 앙리 1세 (키프로스)
    앙리 1세는 키프로스의 왕으로 8세에 즉위하여 롬바르드 전쟁을 겪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을 지냈고 위그 2세에게 왕위를 계승했다.
  • 1205년 사망 - 보두앵 6세 드 에노
    보두앵 6세 드 에노는 에노 백작이자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9세로, 제4차 십자군 원정 후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으나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사망 후 가짜 보두앵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1205년 사망 - 이사벨 1세 (예루살렘)
    이사벨 1세는 1172년 이전에 태어나 네 번의 결혼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졌으며, 왕위 계승 분쟁 속에서 왕국을 통치하다 1205년에 사망한 예루살렘 왕국의 여왕이다.
아모리 (키프로스)
기본 정보
아모리의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왕으로서의 인장
아모리의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왕으로서의 인장
라틴어Aimericus
그리스어Αμωρί
칭호키프로스 영주 (1194–1196)
키프로스 왕 (1196–1205)
예루살렘 왕 (1198–1205)
왕조뤼지냥 가문
아버지위그 8세 드 뤼지냥
어머니부르고뉴 드 랑송
출생1153년
사망1205년 4월 1일
매장니코시아
통치
키프로스 공국 통치 시작1194년
키프로스 공국 통치 종료1196년
키프로스 왕국 통치 시작1196년
키프로스 왕국 통치 종료1205년
키프로스 왕국 대관식1197년 9월
예루살렘 왕국 통치 시작1198년
예루살렘 왕국 통치 종료1205년
예루살렘 왕국 대관식1198년 1월
예루살렘 왕국 공동 통치자예루살렘의 이사벨 1세
배우자
배우자 1에스키브 디벨린
배우자 2예루살렘의 이사벨 1세
자녀
자녀 목록부르고뉴, 툴루즈 여백작
엘비스, 안티오크 공주
위그 1세, 키프로스 왕
시빌, 아르메니아 여왕
멜리상드, 안티오크 공주

2. 초기 생애

아모리는 1155년 이전에 뤼지냥의 위그 8세와 랑콘의 부르고냐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 푸아투 출신인 그의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십자군으로 명성을 떨쳤다. 증조부 뤼지냥의 위그 6세는 1102년 람라 전투에서 사망했고, 할아버지 뤼지냥의 위그 7세는 제2차 십자군에 참여했다.[2] 아버지 또한 성지로 갔다가 1160년대에 이슬람교도에게 사로잡혀 사망했다.[3] 초기 학자들은 그를 아마리(또는 프랑스식 이름인 아모리)로 잘못 언급했지만,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는 "아이메리쿠스"라고 불렸다.(중세 시대에 이미 "아마리쿠스"와 혼동되기도 했다).[4] 룬시만[5]을 비롯한 현대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와 혼동하여 그를 예루살렘의 아마리 2세로 잘못 언급하기도 한다.

1168년 토르니의 로베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아모리는 잉글랜드의 헨리 2세(푸아투 통치)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했으나, 헨리 2세가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아모리는 예루살렘 왕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다마스쿠스에 억류되었는데, 13세기 노바라의 필립과 이벨린의 존은 예루살렘 왕 아마리가 직접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풀어주었다는 전설을 기록했다.

에르눌(신뢰성은 의문시됨)은 아모리가 예루살렘의 아모리의 전 부인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아모리는 이벨린의 발두인의 딸 이벨린의 에시바와 결혼했다. 1174년 7월 11일, 예루살렘의 아모리가 사망하고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발두인 4세(나병 환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아모리는 장인의 지원을 받아 왕실 궁정에 합류했다.

아모리의 막내 동생 기는 1180년 4월 발두인 4세의 누이 시빌라와 결혼했다. 에르눌은 아모리가 시빌라와 그녀의 어머니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에게 기를 잘생기고 매력적인 젊은이라고 소개했다고 썼다. 또한 에르눌은 아모리가 푸아투로 돌아가 기를 왕국으로 데려오도록 설득했다고 주장했지만, 티레의 윌리엄은 아모리가 기와 시빌라의 결혼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에르눌의 기록(특히 아모리의 푸아투 여행)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2. 1. 가문 배경

아모리는 1155년 이전에 뤼지냥의 위그 8세와 그의 아내 랑콘의 부르고냐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그의 고향인 푸아투에서 십자군으로 명성을 떨쳤다. 증조부 뤼지냥의 위그 6세는 1102년 람라 전투에서 사망했고, 할아버지 뤼지냥의 위그 7세는 제2차 십자군에 참여했다.[2] 아버지 또한 성지로 갔고 1160년대에 이슬람 교도 감옥에서 사망했다.[3] 초기 학문에서는 그를 아마리 (또는 프랑스식 이름인 아모리)로 잘못 언급했지만, 기록물 증거에 따르면 그는 실제로 "아이메리쿠스"라고 불렸는데, 이는 구별되는 이름이다 (비록 그는 때때로 이미 중세 시대에 "아마리쿠스"와 혼동되기도 했다).[4] 룬시만[5]과 다른 현대 역사가들은 그를 예루살렘의 아마리 2세로 잘못 언급하는데, 그들이 그의 이름을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의 이름과 혼동했기 때문이다.

1168년 토르니의 로베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아모리는 잉글랜드의 헨리 2세 (푸아투를 통치하기도 했다)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했지만, 헨리는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아모리는 성지로 떠나 예루살렘 왕국에 정착했다. 그는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다마스쿠스에서 억류되었다. 13세기 노바라의 필립과 이벨린의 존에 의해 처음 기록된 대중적인 전설에 따르면, 예루살렘 왕 아마리가 그를 직접 몸값으로 풀었다.

에르눌 (그의 신뢰성은 의문시됨)은 아모리가 예루살렘의 아모리의 전 부인인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아모리는 예루살렘 왕국의 가장 강력한 귀족 중 한 명인 이벨린의 발두인의 딸인 이벨린의 에시바와 결혼했다. 1174년 7월 11일에 사망한 예루살렘의 아모리는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그의 열세 살 된 아들 발두인 4세가 계승했는데, 그는 나병을 앓고 있었다. 아모리는 장인의 지원을 받아 왕실 궁정에 합류했다.

아모리의 막내 동생인 기는 1180년 4월 발두인 4세의 과부인 누이 시빌라와 결혼했다. 에르눌은 아모리가 그의 형제를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인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에게 잘생기고 매력적인 젊은이라고 묘사하며 소개했다고 썼다. 에르눌은 아모리가 푸아투로 급히 돌아가 기를 왕국으로 데려오도록 설득했다고 썼지만, 시빌라는 아모리의 장인에게 약속했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티레의 윌리엄은 아모리가 그의 형제와 왕의 누이의 결혼에 어떤 역할도 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에르눌의 보고서의 많은 요소들 (특히 아모리의 푸아투 여행에 대한 주장)은 아마도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2. 2. 예루살렘 왕국 정착

아모리는 1155년 이전에 태어났다.[1] 그는 뤼지냥의 위그 8세와 그의 아내 랑콘의 부르고냐의 다섯째 아들이었다.[2][3] 그의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그의 고향인 푸아투에서 십자군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증조부인 뤼지냥의 위그 6세는 1102년 람라 전투에서 사망했고, 아모리의 할아버지인 뤼지냥의 위그 7세는 제2차 십자군에 참여했다.[4] 아모리의 아버지 또한 성지로 갔고 1160년대에 이슬람교도 감옥에서 사망했다.[5] 초기 학문에서는 그를 아마리 (또는 프랑스식 이름인 아모리)로 잘못 언급했지만, 기록물 증거에 따르면 그는 실제로 "아이메리쿠스"라는 구별되는 이름으로 불렸다. (비록 그는 때때로 이미 중세 시대에 "아마리쿠스"와 혼동되기도 했다). 룬시만과 다른 현대 역사가들은 그를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와 이름이 혼동되어 예루살렘의 아마리 2세로 잘못 언급하기도 한다.

1168년 토르니의 로베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아모리는 잉글랜드의 헨리 2세 (푸아투를 통치하기도 했다)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했지만, 헨리는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아모리는 성지로 떠나 예루살렘 왕국에 정착했다. 그는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다마스쿠스에서 억류되었는데, 13세기 노바라의 필립과 이벨린의 존에 의해 처음 기록된 대중적인 전설에 따르면, 예루살렘 왕 아마리가 직접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에르눌 (그의 신뢰성은 의문시됨)은 아모리가 예루살렘의 아모리의 전 부인인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아모리는 예루살렘 왕국의 가장 강력한 귀족 중 한 명인 이벨린의 발두인의 딸인 이벨린의 에시바와 결혼했다. 1174년 7월 11일에 예루살렘의 아모리가 사망하고,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그의 열세 살 된 아들 발두인 4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나병을 앓고 있었다. 아모리는 장인의 지원을 받아 왕실 궁정에 합류했다.

아모리의 막내 동생인 기는 1180년 4월 발두인 4세의 과부인 누이 시빌라와 결혼했다. 에르눌은 아모리가 그의 형제를 시빌라와 그녀의 어머니인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에게 잘생기고 매력적인 젊은이라고 묘사하며 소개했다고 썼다. 에르눌은 계속해서 아모리가 푸아투로 급히 돌아가 기를 왕국으로 데려오도록 설득했지만, 시빌라는 아모리의 장인에게 약속했었다고 썼다. 그러나 티레의 윌리엄은 아모리가 그의 형제와 왕의 누이의 결혼에 어떤 역할도 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에르눌의 보고서의 많은 요소들 (특히 아모리의 푸아투 여행에 대한 주장)은 아마도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3.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활동

젊은 왕관을 쓴 남자(주교와 성직자들에 둘러싸여)가 젊은 여성과 남성의 손을 잡고 있다
아모리의 남동생 기 드 뤼지냥과 시빌라의 결혼식,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의 여동생


아모리는 1182년 2월 24일 처음으로 예루살렘의 치안판사로 언급되었다.[1] 스티븐 런시먼과 말콤 바버는 아모리가 1179년 4월 그의 전임자 토론의 험프리 2세가 사망한 직후 그 직책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지만,[2][3] 역사가 버나드 해밀턴은 아모리의 임명이 그의 형제인 기 드 뤼지냥의 영향력이 커진 결과이며, 1181년경에 임명되었다고 기록한다.[4]

1183년 9월 29일, 아이유브 왕조의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5] 아모리는 장인과 형제 이벨린의 발리앙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 교전에서 술탄의 군대를 격파했다. 십자군의 주력 부대는 살라딘의 진영 근처 샘까지 진격하여 9일 후에 그를 후퇴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의 지명된 상속자였던 아모리의 형제 기는 원정 중 왕국의 대부분 남작들과 협력하지 않았다. 보두앵 4세는 기를 해임하고 그의 다섯 살 된 조카(기의 의붓아들) 보두앵 5세를 1183년 11월 20일 공동 통치자로 만들었다.

1185년 초, 보두앵 4세는 보두앵 5세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할 경우 교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에게 그의 여동생 시빌라와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 중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보두앵 4세는 1185년 4월 또는 5월에, 그의 조카는 1186년 늦여름에 사망했다. 시빌라는 보두앵 4세의 칙령을 무시하고 지지자들에 의해 여왕으로 선포되었고, 남편 기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아모리는 그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해밀턴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그의 형제와 처남을 지지했다.

1187년 7월 4일, 아모리는 치안판사로서 하틴 전투 전에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를 부대로 편성했으나, 살라딘에게 패배했다. 아모리는 대부분의 기독교 군대 지휘관들과 함께 전장에서 포로로 잡혔다. 아스칼론 포위 중 살라딘은 수비수들에게 항복할 경우 그들이 지명한 열 명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모리와 기는 9월 4일 항복하기 전에 수비수들이 지명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지만, 살라딘은 1188년 봄까지 그들의 석방을 연기했다.

1190년 말 시빌라와 그들의 두 딸이 사망하자, 왕국의 대부분 남작들은 기가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주장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모리는 그의 형제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기의 반대자들은 11월 말 시빌라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와 결혼한 몽페라의 콘라드를 지지했다. 1192년 4월 16일, 왕국 귀족 회의는 콘라드를 합법적인 왕으로 만장일치로 선언했다. 콘라드는 12일 후 암살당했고, 그의 미망인은 상파뉴의 앙리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으로 선출되었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기에게 예루살렘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 키프로스 섬(리처드가 1191년 5월 정복)을 템플 기사단으로부터 구입하는 것을 허가했다. 기는 리처드에게 40,000 비잔트를 지불해야 했고, 리처드는 그 금액을 기에게 징수할 권리를 상파뉴의 앙리에게 기증했다. 기는 5월 초 키프로스에 정착했다.

아모리는 야파에서 티레까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좁은 땅으로 축소된 예루살렘 왕국에 남아 있었다. 상파뉴의 앙리는 5월에 피사 상인들을 아크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했는데, 그가 그들을 뤼지냥의 기와 공모했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아모리가 상인들을 대신하여 개입한 후, 왕은 그를 체포했으나, 그랜드 마스터 템플러와 구호 기사단의 요구에 의해서만 석방되었다. 아모리는 잉글랜드의 리처드가 아모리의 맏형 뤼지냥의 조프리에게 준 야파로 은퇴했다.

3. 1. 예루살렘 치안관 임명

아모리는 1182년 2월 24일 처음으로 예루살렘의 치안판사로 언급되었다.[1] 스티븐 런시먼과 말콤 바버는 아모리가 1179년 4월 그의 전임자 토론의 험프리 2세가 사망한 직후 그 직책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2][3] 반면, 역사학자 버나드 해밀턴은 아모리의 임명이 그의 형제인 기 드 뤼지냥의 영향력이 커진 결과이며, 1181년경에 임명되었다고 기록한다.[4]

1183년 9월 29일,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예루살렘 왕국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5] 아모리는 장인과 형제 이벨린의 발리앙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 교전에서 술탄의 군대를 격파했다. 십자군은 살라딘 진영 근처 샘까지 진격하여 9일 후 그를 후퇴하게 만들었다. 이 원정에서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의 후계자로 지명된 기와 협력하려는 남작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병든 왕은 기를 해임하고, 1183년 11월 20일 그의 다섯 살 된 조카(기의 의붓아들) 예루살렘의 보두앵 5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1185년 초, 보두앵 4세는 보두앵 5세가 성년이 되기 전 사망할 경우 교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이 자신의 여동생 시빌라와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 중 후계자를 결정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나병 환자였던 보두앵 4세는 1185년 4월 또는 5월에 사망했고, 보두앵 5세는 1186년 늦여름에 사망했다. 시빌라는 보두앵 4세의 칙령을 무시하고 지지자들에 의해 여왕으로 선포되었고, 남편 기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아모리는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해밀턴에 따르면 형제와 처남을 지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모리는 치안판사로서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 전에 예루살렘 왕국 군대를 편성했다. 이 전투에서 살라딘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아모리는 대부분의 기독교 군대 지휘관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아스칼론 포위 중 살라딘은 수비수들에게 항복하면 그들이 지명한 열 명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모리와 기는 9월 4일 항복 전 수비수들이 지명한 열 명에 포함되었으나, 살라딘은 1188년 봄까지 이들의 석방을 연기했다.

1190년 말 시빌라와 두 딸이 사망하자, 왕국의 대부분 남작들은 기가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권리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모리는 계속해서 기에게 충성했다. 기의 반대자들은 11월 말 시빌라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와 결혼한 몽페라의 콘라드를 지지했다. 1192년 4월 16일, 왕국 귀족 회의는 만장일치로 콘라드를 합법적인 왕으로 선언했다. 콘라드는 12일 후 암살당했고, 그의 미망인은 상파뉴의 앙리 2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으로 선출되었다.

아모리는 예루살렘 왕국에 남아 있었는데, 왕국은 야파에서 티레까지 지중해 연안의 좁은 땅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상파뉴의 앙리는 5월에 피사 상인들을 아크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하며, 그들이 기와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아모리가 상인들을 대신하여 개입하자 앙리는 그를 체포했다. 아모리는 그랜드 마스터 템플러와 구호 기사단의 요구로 석방된 후,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아모리의 맏형 뤼지냥의 조프리에게 준 야파로 은퇴했다.

3. 2. 살라딘과의 전투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은 1183년 9월 29일 예루살렘 왕국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 아모리는 자신의 장인이자 형제인 이벨린의 발리앙의 도움을 받아 살라딘의 군대를 소규모 전투에서 격파했다. 십자군은 이 승리 덕분에 살라딘의 진영 근처 샘까지 진격했고, 결국 9일 후 살라딘은 후퇴했다. 그러나 이 원정 중에 왕국의 대부분의 남작들이 아모리의 형제인 기 드 뤼지냥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는 당시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의 후계자로 지명된 상태였다. 보두앵 4세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결국 기를 해임하고 1183년 11월 20일에 자신의 다섯 살 된 조카(기의 의붓아들)인 예루살렘의 보두앵 5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1185년 초, 보두앵 4세는 보두앵 5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할 경우를 대비해 교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에게 자신의 여동생 시빌라와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선택할 권한을 부여하는 칙령을 내렸다. 하지만 보두앵 4세는 나병을 앓다가 1185년 4월 또는 5월에 사망했고, 그의 조카인 보두앵 5세도 1186년 늦여름에 사망했다. 보두앵 4세의 칙령은 무시되었고, 시빌라는 지지자들에 의해 여왕으로 선포되었으며, 그녀는 자신의 남편인 기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1187년 7월 4일, 아모리는 치안판사로서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를 이끌고 하틴 전투에 참전했으나, 이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크게 패배했다. 아모리는 대부분의 기독교 군대 지휘관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아스칼론 포위전에서 살라딘은 수비수들에게 항복하면 그들이 지명한 10명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모리와 기는 9월 4일 항복 전에 수비수들이 지명한 사람들에 포함되었지만, 살라딘은 1188년 봄까지 이들의 석방을 미루었다.

3. 3. 기 드 뤼지냥의 왕위 계승 지원



아모리는 1182년 2월 24일 처음으로 예루살렘의 치안판사로 언급되었다.[1] 스티븐 런시먼과 말콤 바버는 아모리가 1179년 4월 그의 전임자 토론의 험프리 2세가 사망한 직후 그 직책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지만,[2][3] 역사가 버나드 해밀턴은 아모리의 임명이 그의 형제의 영향력이 커진 결과이며, 1181년경에 임명되었다고 기록한다.[4]

1183년 9월 29일, 아이유브 왕조의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5] 아모리는 장인과 형제 이벨린의 발리앙의 지원을 받아 소규모 교전에서 술탄의 군대를 격파했다. 십자군의 주력 부대는 살라딘의 진영 근처 샘까지 진격하여 9일 후에 그를 후퇴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의 지명된 상속자였던 아모리의 형제 기는 원정 중 왕국의 대부분 남작들과 협력하지 않았다. 보두앵 4세는 기를 해임하고 그의 다섯 살 된 조카(기의 의붓아들) 보두앵 5세를 1183년 11월 20일 공동 통치자로 만들었다.

1185년 초, 보두앵 4세는 보두앵 5세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할 경우 교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에게 그의 여동생 시빌라와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 중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보두앵 4세는 1185년 4월 또는 5월에, 그의 조카는 1186년 늦여름에 사망했다. 시빌라는 보두앵 4세의 칙령을 무시하고 지지자들에 의해 여왕으로 선포되었고, 남편 기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아모리는 그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해밀턴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그의 형제와 처남을 지지했다.

1187년 7월 4일, 아모리는 치안판사로서 하틴 전투 전에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를 부대로 편성했으나, 살라딘에게 패배했다. 아모리는 대부분의 기독교 군대 지휘관들과 함께 전장에서 포로로 잡혔다. 아스칼론 포위 중 살라딘은 수비수들에게 항복할 경우 그들이 지명한 열 명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모리와 기는 9월 4일 항복하기 전에 수비수들이 지명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지만, 살라딘은 1188년 봄까지 그들의 석방을 연기했다.

1190년 말 시빌라와 그들의 두 딸이 사망하자, 왕국의 대부분 남작들은 기가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주장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모리는 그의 형제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기의 반대자들은 11월 말 시빌라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와 결혼한 몽페라의 콘라드를 지지했다. 1192년 4월 16일, 왕국 귀족 회의는 콘라드를 합법적인 왕으로 만장일치로 선언했다. 콘라드는 12일 후 암살당했고, 그의 미망인은 상파뉴의 앙리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으로 선출되었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기에게 예루살렘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 키프로스 섬(리처드가 1191년 5월 정복)을 템플 기사단으로부터 구입하는 것을 허가했다. 기는 리처드에게 40,000 비잔트를 지불해야 했고, 리처드는 그 금액을 기에게 징수할 권리를 상파뉴의 앙리에게 기증했다. 기는 5월 초 키프로스에 정착했다.

아모리는 야파에서 티레까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좁은 땅으로 축소된 예루살렘 왕국에 남아 있었다. 상파뉴의 앙리는 5월에 피사 상인들을 아크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했는데, 그가 그들을 뤼지냥의 기와 공모했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아모리가 상인들을 대신하여 개입한 후, 왕은 그를 체포했으나, 그랜드 마스터 템플러와 구호 기사단의 요구에 의해서만 석방되었다. 아모리는 잉글랜드의 리처드가 아모리의 맏형 뤼지냥의 조프리에게 준 야파로 은퇴했다.

3. 4. 키프로스 섬 획득 지원

아모리 치세 중인 1197년 동부 지중해


아모리는 그의 형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주장을 잃은 후에도 그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1192년 4월 16일 왕국의 귀족 회의에서 기의 반대자들은 몽페라의 콘라드를 합법적인 왕으로 만장일치로 선언했다. 콘라드는 12일 후에 암살되었고, 그의 미망인 이사벨라는 상파뉴의 앙리와 결혼하여 예루살렘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을 잃은 기를 보상하기 위해 그가 템플 기사단으로부터 키프로스(리처드가 1191년 5월 정복)을 구입하는 것을 허가했다. 기는 5월 초 키프로스에 정착했다.

4. 키프로스 통치

기 드 뤼지냥예루살렘 왕국의 여왕 시빌과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으나, 1190년 시빌이 사망하면서 시빌의 여동생 이자벨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192년, 기는 예루살렘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잉글랜드리처드 1세로부터 키프로스 섬을 할양받았다. 1194년 기가 사망하자 키프로스 섬은 그의 형인 에메리가 계승했다. 1195년, 에메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로부터 키프로스 왕 칭호를 받았고, 1197년에는 황제가 파견한 콘라트 폰 힐데스하임으로부터 왕관을 받았다.[2] 같은 해, 에메리는 남편 샹파뉴 백작 앙리 2세와 사별한 예루살렘 여왕 이자벨과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에도 올랐다.

1198년, 트리폴리 백작 레이몽 3세의 의붓아들 티베리아스의 라울이 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영지 몰수를 선고받았다. 라울은 왕이 아닌 최고 법원의 재판을 요구하며 반항했고, 다른 귀족들도 이에 동조하여 왕에게 반항했다. 에메리는 라울을 국외로 추방했으며, 이때부터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법률 지식을 가진 귀족들이 왕에게 반항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에메리는 법률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왕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키프로스 섬의 실질적인 건설자로 여겨진다. 그는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과의 휴전 협정도 지속했다.

1205년 4월 1일, 에메리는 물고기를 먹고 중독되어 사망했다. 키프로스 왕위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위그 1세가 계승했다. 왕비이자 예루살렘 여왕이었던 이자벨도 에메리 사망 4일 후 사망했고, 예루살렘 왕위는 이자벨과 몬페라토 후작 콘라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 마리아가 계승하여 키프로스 왕위와 예루살렘 왕위는 다시 분리되었다.

4. 1. 키프로스 영주 즉위

기 드 뤼지냥은 1194년 5월에 사망했고, 키프로스를 형인 제프리에게 유증했다. 그러나 제프리는 이미 푸아투로 돌아간 상태였고, 이에 기의 가신들은 아이메리를 새로운 영주로 선출했다.[1] 샴페인의 앙리는 키프로스의 계승에 관해 상의할 권리를 요구했지만, 키프로스 귀족들은 그를 무시했다.[2] 거의 같은 시기에, 샴페인의 앙리는 예루살렘의 감찰관으로 아이메리 대신 요한 오브 이벨린을 임명했다.[3]

아이메리는 키프로스의 국고가 거의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이는 그의 형제가 섬의 대부분의 토지를 지지자들에게 하사했기 때문이라고 에르눌은 전한다.[4] 그는 가신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5] 그는 그들 각자가 자신보다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음을 강조한 후,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하여 "강압, 우정, 또는 합의"를 통해 그들의 임대료와 토지를 일부 반환하게 했다.

젊은 수염 난 남자가 옥좌에 앉아 있다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는 아이메리가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아이메리의 대관식을 허가했다.


아이메리는 교황 첼레스티노 3세에게 사절을 보내 키프로스에 로마 가톨릭 교구를 설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대리인 지블레의 라니에를 하인리히 6세에게 보내 황제가 왕관을 보내주면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아이메리는 주로 잠재적인 비잔틴의 키프로스 침략에 대한 황제의 지원을 확보하고 싶어했지만, 그는 또한 자신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싶어했다. 지블레의 라니에는 1196년 10월 겔른하우젠에서 아이메리를 대신하여 하인리히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십자군 원정을 성지로 이끌기로 결정한 황제는 자신이 직접 아이메리에게 왕관을 씌워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브린디시와 트라니의 대주교들을 파견하여 키프로스를 다스릴 권리의 상징으로 황금 을 아이메리에게 전달하게 했다.

4. 2. 키프로스 왕 즉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6세의 두 사절이 1196년 4월 또는 5월에 키프로스에 상륙했다. 아모리는 그 무렵에 왕의 칭호를 사용했을 수 있는데, 교황 첼레스틴이 1196년 12월에 보낸 편지에서 그를 이미 왕으로 칭했기 때문이다.[1] 같은 달에 교황은 니코시아에 로마 가톨릭 대교구를 설치하고 파마구스타, 리마솔 및 파포스에 세 명의 주교를 두었다.[1] 그리스 정교회 주교들은 추방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재산과 수입은 새로운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에게 몰수되었다.[1]

헨리 6세의 대법관 콘라트, 힐데스하임 주교는 1197년 9월 니코시아에서 아모리를 왕으로 즉위시켰다.[2] 아모리는 대법관에게 봉건적 예속의 의미로 신종을 바쳤다.[2]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왕국 모두에서 봉토를 소유한 귀족들은 아모리와 샹파뉴의 헨리 사이의 화해를 원했다.[2] 그들 중 한 명인 베이산의 발두인, 키프로스 군사령관은 샹파뉴의 헨리가 1197년 초에 키프로스를 방문하도록 설득했다.[2] 두 왕은 평화를 맺었고, 아모리의 세 아들이 헨리의 세 딸과 결혼하기로 합의했다.[2] 헨리는 또한 아모리가 키프로스에 대해 여전히 빚지고 있는 빚을 포기하고 아모리가 그의 군대를 야파에 주둔하도록 허락했다.[2] 아모리는 레날 바를라이를 보내 야파를 점령하게 했다.[2] 아모리는 1197년 11월에 다시 예루살렘 군사령관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샹파뉴의 헨리와의 조약의 결과로 그 직위도 회복했음을 시사한다.[2]

5. 예루살렘 왕 즉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의 사절들이 1196년 4월 또는 5월에 키프로스에 상륙했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1196년 12월에 보낸 편지에서 이미 아모리를 왕으로 칭했기 때문에, 아모리는 그 무렵에 왕의 칭호를 사용했을 수 있다.[1] 같은 달 교황은 니코시아에 로마 가톨릭 대교구를 설치하고 파마구스타, 리마솔, 파포스에 세 명의 주교를 두었다.[1] 그리스 정교회 주교들은 추방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재산과 수입은 새로운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에게 몰수되었다.[1]

1197년 9월, 하인리히 6세의 대법관 콘라트는 니코시아에서 아모리를 왕으로 즉위시켰다.[2] 아모리는 대법관에게 신종을 바쳤다.[2]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왕국 모두에서 봉토를 소유한 귀족들은 아모리와 샹파뉴의 헨리 사이의 화해를 원했다.[2] 그들 중 한 명인 베이산의 발두인은 샹파뉴의 헨리가 1197년 초에 키프로스를 방문하도록 설득했다.[2] 두 왕은 평화를 맺었고, 아모리의 세 아들이 헨리의 세 딸과 결혼하기로 합의했다.[2] 헨리는 또한 아모리가 키프로스에 대해 여전히 빚지고 있는 빚을 포기하고 아모리가 그의 군대를 야파에 주둔하도록 허락했다.[2] 아모리는 레날 바를라이를 보내 야파를 점령하게 했다.[2] 아모리는 1197년 11월에 다시 예루살렘 군사령관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샹파뉴의 헨리와의 조약으로 그 직위도 회복했음을 시사한다.[2]

5. 1. 이사벨 1세와의 결혼

1197년 9월 10일 샹파뉴의 앙리가 아크레에서 사망하면서, 아이메리는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1]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 아이마로 모나코 데이 코르비치는 이 결혼이 정식 절차에 어긋난다고 반대했지만, 티레의 요시우스 대주교가 아이메리와 협상을 시작하여 1198년 1월 티레에서 아이메리와 이사벨라는 왕관을 쓰는 의식을 올렸다.[2]

옷을 길게 늘어뜨린 젊은 남자, 오른쪽에 여자, 왼쪽에 사제가 있다
아이메리의 두 번째 부인인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토론의 험프리 4세의 결혼


아이메리는 이사벨 1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3]

5. 2. 두 왕국 통치



1197년 9월 10일, 샹파뉴의 앙리가 아크레에서 궁전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했다.[1] 귀족 출신이지만 가난했던 생 오메르의 라울이 그의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었으나, 군사 기사단의 단장들은 그를 반대했다.[1] 며칠 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 1세가 야파를 점령했다.[1]

20일 후 아크레에 도착한 마인츠의 콘라트 대주교는 아이메리에게 왕관을 제안해야 한다고 처음 제안했다.[2] 아이메리의 첫 번째 부인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의 과부 여왕인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와 결혼할 수 있었다.[2]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 아이마로 모나코 데이 코르비치는 결혼이 정식 절차에 어긋난다고 말했지만, 티레의 요시우스 대주교가 아이메리와 협상을 시작했고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다.[2] 총대주교도 반대를 철회하고 1198년 1월 티레에서 아이메리와 이사벨라에게 왕관을 씌웠다.[2]

키프로스 군대는 아이메리의 통치 기간 동안 예루살렘 왕국을 위해 싸웠지만, 그는 두 왕국을 별도로 통치했다.[3] 대관식 전, 아이메리는 브라반트의 앙리 1세 공작 지휘하의 독일 십자군과 힘을 합쳐 아이유브 군대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3] 그들은 알 아딜을 물러나게 하고 10월 21일에 베이루트를 점령했다.[3] 그는 토론을 포위했지만, 2월 2일에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독일 십자군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3]

1198년 3월, 아이메리는 티레를 지나가다가 4명의 독일 기사에게 공격받았다.[4] 그의 수행원들이 그를 구출하고 4명의 기사를 생포했다.[4] 아이메리는 생 오메르의 라울이 공격자를 고용했다고 비난하고 동료의 재판 없이 그를 추방하는 형을 선고했다.[4] 라울의 요구에 따라 이 사건은 예루살렘 고등 법원에 회부되었고, 법원은 아이메리가 라울을 불법적으로 추방했다고 판단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울은 아이메리의 호의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자발적으로 왕국을 떠나 트리폴리에 정착했다.[4]

아이메리는 1198년 7월 1일에 알 아딜과 휴전을 맺어 십자군에게 아크레에서 안티오크에 이르는 해안 지역의 소유권을 5년 8개월 동안 확보했다.[5]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3세 앙겔로스는 키프로스를 되찾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만약 아이메리를 파문하여 1201년에 비잔틴 제국이 침공할 수 있게 해준다면 새로운 십자군을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인노첸시오 3세는 1191년 리처드 1세가 그 섬을 정복했을 때 비잔틴인이 키프로스에 대한 권리를 잃었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1204년 9월, 아이메리와 알 아딜의 사절들은 6년 동안의 새로운 휴전을 체결했다. 알 아딜은 야파와 라믈라를 예루살렘 왕국에 양도하고 예루살렘과 나사렛에서 기독교 순례자들의 방문을 간소화했다.

5. 3. 아이유브 왕조와의 휴전

샹파뉴의 앙리가 1197년 9월 10일 아크레에서 사망하자, 알 아딜 1세가 야파를 점령했다.[1] 며칠 후, 마인츠의 콘라트 대주교가 아이메리에게 왕관을 제안했다. 아이메리의 첫 번째 부인이 죽었기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와 결혼할 수 있었다.[2] 1198년 1월 티레에서 아이메리와 이사벨라에게 왕관을 씌웠다.[3]

키프로스 군대는 아이메리의 통치 기간 동안 예루살렘 왕국을 위해 싸웠지만, 그는 두 왕국을 별도로 통치했다.[4] 대관식 전, 아이메리는 브라반트의 앙리 1세 공작의 지휘하에 있던 독일 십자군과 힘을 합쳐 아이유브 군대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 그들은 10월 21일에 베이루트를 점령했다.[5] 그는 토론을 포위했지만, 하인리히 6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독일 십자군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2월 2일에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1198년 3월, 아이메리는 티레를 지나가다가 4명의 독일 기사에게 공격을 받았다. 아이메리는 생 오메르의 라울이 공격자를 고용했다고 비난하고 동료의 재판 없이 그를 추방하는 형을 선고했다. 라울의 요구에 따라 이 사건은 예루살렘 고등 법원에 회부되었고, 아이메리가 라울을 불법적으로 추방했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울은 자발적으로 왕국을 떠나 트리폴리에 정착했다.

아이메리는 1198년 7월 1일에 알 아딜과 휴전을 맺어 십자군에게 아크레에서 안티오크에 이르는 해안 지역의 소유권을 5년 8개월 동안 확보했다. 알렉시우스 3세 앙겔로스는 인노첸시오 3세에게 아이메리를 파문하여 1201년에 비잔틴 제국의 침공을 가능하게 한다면 새로운 십자군을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인노첸시오 3세는 1191년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 섬을 정복했을 때 비잔틴 제국이 키프로스에 대한 권리를 잃었다고 말하며 그를 거절했다.

1204년 5월, 아이메리의 함대는 이집트 나일 삼각주의 작은 마을을 약탈했다. 아이메리와 알 아딜의 사절들은 1204년 9월에 6년 동안의 새로운 휴전을 체결했다. 알 아딜은 야파라믈라를 예루살렘 왕국에 양도하고 예루살렘과 나사렛에서 기독교 순례자들의 방문을 간소화했다.

6. 암살 시도와 법적 분쟁

1198년, 트리폴리 백작 레이몽 3세의 의붓아들 티베리아스의 라울이 아모리 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영지 몰수를 선고받았다. 라울은 왕이 아닌 최고 법원의 재판을 요구하며 반항했고, 다른 귀족들도 이에 동조하여 왕에게 반항했기 때문에 아모리는 라울을 국외로 추방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법률 지식을 가진 귀족들이 왕에게 반항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아모리는 왕으로서 법률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7. 죽음

1205년 4월 1일에 아모리는 사망했다. 물고기를 먹고 중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키프로스 왕위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위그 1세가 계승했다.[1] 왕비이자 예루살렘 여왕이었던 이자벨도 아모리의 사망 4일 후에 사망했고, 예루살렘 왕위는 이자벨과 몬페라토 후작 콘라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 마리아가 계승하여, 키프로스 왕위와 예루살렘 왕위는 다시 분리되어 계승되었다.[1]

8. 유산 및 평가

역사학자 메리 니커슨 하드위크는 아모리를 "자신감 있고, 정치적으로 예리하며, 때로는 강인하지만 감상에 잘 빠지지 않는" 통치자라고 묘사했다.[1] 그의 통치는 평화와 통합의 시기였다.[2] 그는 왕실 특권을 명시하기 위해 예루살렘 왕국의 법률을 개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3] 예루살렘 왕국의 법학자들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4] 그들 중 한 명인 이벨린의 존은 아모리가 죽을 때까지 키프로스와 예루살렘을 "훌륭하고 현명하게" 통치했다고 강조했다.[5]

9. 가족 관계

아모리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이벨린의 에스치바로, 이벨린의 보두앵과 베이산의 리켈다의 장녀였다.[1] 이들 사이에서는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부르고뉴1178년경 - 1210년경툴루즈의 레이몽 6세와 결혼(1193년, 1196년 이혼), 몽벨리아르의 발터와 재혼(1204년). 발터는 1205년부터 1210년까지 위그 1세의 섭정을 맡았다.[4]
헬비스1190년경 - 1217년경레이몽-루펜과 결혼.[5]
? - 1205년어릴 때 사망.
요한? - 1205년어릴 때 사망.
위그 1세1194년 - 1218년샹파뉴의 앨리스와 결혼. 키프로스 왕.



두 번째 부인은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로,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와 마리아 콤네네의 외동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시빌라1198년 -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의 두 번째 부인.
멜리센드1200년경 - 1249년 이후안티오크의 보에몽 4세와 결혼.
아모리(에메리)1201년 - 1205년1205년 2월 2일에 어린 시절 사망.


참조

[1] 학위논문 Η περίοδος της ακμής του βασιλείου των Λουζινιάν στην Κύπρο (1285-1369) 2011-03-01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