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이 이쓰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사이 이쓰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로, 1990년부터 2006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고등학교 시절 외야수로 주목받았고, 1989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에 6순위로 지명되었다. 프로에서는 주로 대타로 활약하며 뛰어난 성적을 기록, 특히 대타 통산 타율 0.315는 센트럴 리그 역대 2위에 해당한다. 2006년 은퇴 후에는 히로시마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2군 타격 코치, 1군 타격 코치, 3군 총괄 코치를 역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도야마현 출신 야구 선수 - 아라키 다카히로
아라키 다카히로는 2010년부터 2023년까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내야수와 외야수로 활약하며 팀 내 최고 수준의 훈련량을 소화하는 노력가로, 2021년에는 개인 최다 100경기 출전으로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일본 야구 선수이다. - 도야마현 출신 야구 선수 - 이시카와 아유무
이시카와 아유무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지바 롯데 마린스 소속 투수이며 2013년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하여 퍼시픽 리그 신인왕과 최우수 평균 자책점을 수상했고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 도야마현 출신 - 후지코 후지오 A
후지코 후지오 A는 1934년생 일본 만화가 안손자 스오의 필명으로, 후지모토 히로시와 '후지코 후지오'로 공동 활동 후 독립하여 『오바케의 Q타로』, 『닌자 핫토리군』, 『괴물군』 등 아동 만화와 『웃음 판매원』 같은 성인 만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2022년 88세로 사망한 후에도 그의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제작되어 독특한 작풍과 블랙 유머로 인정받고 있다. - 도야마현 출신 - 후지코 후지오
후지코 후지오는 후지모토 히로시와 아비코 모토오, 두 일본 만화가로 이루어진 콤비의 필명으로, 1951년 데뷔하여 1987년까지 '후지코 후지오'라는 이름으로 '도라에몽', '오바케의 Q타로' 등 많은 인기 만화를 만들었으며, 해체 후 각자 후지코 F. 후지오, 후지코 후지오 A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 일본 프로 야구 1루수 - 맷 데이비드슨
맷 데이비드슨은 미국, 일본 프로 야구를 거쳐 2024년 KBO 리그 NC 다이노스에 입단하여 타율 0.306, 46홈런, 119타점을 기록하며 KBO 홈런상을 수상한 야구 선수이다. - 일본 프로 야구 1루수 - 마쓰바라 마코토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 마쓰바라 마코토는 사이타마현 출신으로 포수와 내야수로 활약하며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전신팀인 다이요 웨일스의 간판 타자로 이름을 알렸고, 은퇴 후에는 여러 팀에서 코치를 역임하고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했다.
아사이 이쓰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아사이 이쓰키 |
로마자 표기 | Itsuki Asai |
출생일 | 1971년 12월 14일 () |
출생지 | 도야마현 도야마시 |
신장 | 183cm |
체중 | 90kg |
포지션 | 내야수 / 외야수 / 코치 |
투구 | 좌투 |
타석 | 좌타 |
프로 입단 | 1989년 |
드래프트 순위 | 6순위 |
선수 경력 | |
소속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0년 ~ 2006년) |
데뷔 | 1993년 4월 18일 |
최종 경기 | 2006년 10월 16일 (은퇴 경기) |
통계 (2006년 기준) | |
타율 | 0.285 |
안타 | 523 |
홈런 | 52 |
타점 | 259 |
도루 | 41 |
코치 경력 | |
소속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07년 ~ 2019년) |
기타 | |
고등학교 | 도야마현립 도야마 상업 고등학교 |
2. 선수 경력
아사이 이쓰키는 아버지와 캐치볼을 한 것을 계기로 야구를 시작, 초등학교 3학년 때 소년 야구단에 입단했다.[33] 오쿠다 중학교 시절 1학년 때는 투수를 맡았지만 2학년부터 외야수로 전향했다.[33] 도야마 상업고등학교 진학 후 1학년 여름부터 벤치에 들어갔고,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도야마현 대회 결승에 출전했지만 신도 다쓰야가 소속된 다카오카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했다.[33]
1학년 가을부터 주전 중견수로 활약, 2학년 때 하계 선수권 대회(제70회)에 출전하여 첫 경기에서 다이라 고이치의 오키나와 수산고등학교에게 패했다.[33] 3학년 때 하계 선수권 대회(제71회) 1차전에서는 패했지만 홈런을 기록했다.[34]
고교 시절 호타준족의 외야수로 주목받았고, 1989년 드래프트 회의를 앞두고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가 드래프트 번외 획득 의사를 밝혔다. IBM 야스에서도 영입 의사를 표명했지만,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6순위로 지명했다.[35] 다이요의 사회인 야구팀 입단 권유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 입단을 결정, 계약금 2500만엔, 연봉 360만엔(추정)에 계약했다.[36]
1990년 프로 입단 후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동기 마에다 도모노리의 타격 기술에 충격을 받았다.[35] 같은 해 지요마루 아키히코, 미즈사와 히데키, 마에마 다카시 등과 파이오니어 리그 게이트 시티 파이오니어스에 파견, 58경기에 출전하며 다양한 사고방식을 배우고 시야를 넓혔다.[37][38] 귀국 후 2군에서 우치다 준조 코치 등의 지도를 받으며 맹훈련했고,[38] 1993년에 1군 첫 출전을 달성했다.
1995년, 마에다의 부상으로 대타로 1군 승격, 6월 15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프로 첫 안타를 기록했다. 7월 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프로 첫 홈런 포함 2홈런 3타점을 기록했고,[38] 그 해 타율 3할 3리를 기록하며 1군에 정착했다. 1996년 9월 21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파울볼을 치다 오른손 유구골 골절로 전치 1개월 부상을 당했지만,[39] 시즌 타율 3할 3푼 9리, 대타 성공률 4할 5푼 3리를 기록했다.[33] 시즌 후 연봉 2900만엔(추정)에 재계약했다.[40]
이러한 활약에도 가네모토 도모아키, 오가타 고이치, 에토 아키라, 루이스 로페즈 등 주전 선수층이 두터워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41] 반면, 대타로서 '대타의 비밀병기'로 불렸다.[41]
1997년 시즌 후 결혼했고,[38] 1998년 로페즈 퇴단으로 마치다 고지로, 티모니엘 페레스와 주전 1루수 경쟁을 펼쳤다.[42] 7월에는 가네모토 결장으로 5번 타자로 기용되어 홈런을 기록했고,[43] 2년 만에 100경기 이상 출전, 개인 최다 75안타를 기록했다.
1999년 다쓰카와 미쓰오 감독의 공격형 타선 시도로 4월 6일 한신전 2번 타자로 기용되었다.[44] 시즌 후 에토를 대신해 센트럴 리그 올스타 동서 대항에 출전했지만,[45] 시즌 타율 2할 3푼 5리로 부진, 연봉 3650만엔(추정)으로 500만 엔 삭감되었다.[47]
2000년 4월 14일 주니치 드래건스전 2홈런 5타점,[46] 5월 7일 한신전 끝내기 만루 홈런 등 활약했다.[48] 로페즈 재입단 후에도 부상으로 빠진 오가타 대신 외야수로 선발 기용되었고, 8월에는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49] 시즌 개인 최다 13홈런, 46타점을 달성했다.
2001년 6월 한신전 수비 도중 펜스와 충돌, 오른쪽 무릎 부상에도 출전을 강행했다.[38] 시즌 후 도야마현 이와세 스포츠 공원에서 야구 교실을 개최했다.[50]
2002년 대타 중심으로 타율 3할 8리, 연봉 5300만엔(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51] 2003년 노무라 겐지로 부상으로 아라이 다카히로가 3루수를 맡는 동안 1루수로 선발 기용되어 좋은 타격을 선보였다.[52] 2004년 6월 11일 요미우리전에서 대타 만루 홈런을 날렸고,[53] FA권 취득 후 이적을 고려했지만 히로시마 잔류를 선택했다.[54] 정규 시즌 센트럴 리그 역대 5위 타이 기록인 대타 20타점을 기록했다.[57] 2005년 선수 등록을 외야수에서 내야수로 변경했다.
2006년 6월 말 메니에르 병을 앓았고, 마티 브라운 감독의 젊은 선수 기용 방침으로[55]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다. 구단의 코치직 제안을 수락, 10월 14일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10월 16일 주니치와의 은퇴 경기에서 7회 대타로 출전, 중견수 앞 안타를 기록했다.[55]
은퇴식에서 아사이는 눈물을 흘리며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입단 동기 마에다는 이 경기에서 홈런 포함 4안타를 기록하며 아사이의 은퇴를 축하했다.
2. 1. 프로 입단 전
아버지와 캐치볼을 한 것을 계기로 야구를 시작하여 초등학교 3학년 때 소년 야구단에 입단했다.[33] 오쿠다 중학교에서는 1학년 때 투수가 됐지만 2학년부터는 외야수를 맡았다.[33] 중학교 졸업 후 도야마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학년 여름부터 벤치에 들어갔고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도야마현 대회 결승에서는 중도에 출전했지만 신도 다쓰야가 소속된 다카오카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했다.[33]1학년 가을부터는 주전 중견수로 고정됐고 2학년 때인 하계 선수권 대회(제70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서 첫 경기에서는 다이라 고이치가 소속된 오키나와 수산고등학교에게 패했다.[33] 3학년 때 하계 선수권 대회(제71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1차전에서는 패했지만 이 경기에서 홈런을 날렸던 것이 좋은 추억이 됐다고 한다.[34]
호타준족의 외야수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1989년 드래프트 회의를 앞두고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가 드래프트 번외로 획득할 의사를 나타낸 것 외에도 사회인 야구팀인 IBM 야스에서 영입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35] 그러나 드래프트에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갑작스럽게 6순위로 지명을 받았고 다이요에서는 사회인 야구팀에 입단하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히로시마의 입단을 결정했다.[35] 계약금과 연봉은 각각 2500만엔, 360만엔(모두 추정치)이었다.[36]
2. 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프로 1년차인 1990년, 아사이 이쓰키는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입단 동기인 마에다 도모노리의 뛰어난 타격 기술에 충격을 받았다.[35] 그 해 지요마루 아키히코, 미즈사와 히데키, 마에마 다카시 등과 함께 파이오니어 리그의 게이트 시티 파이오니어스에 파견되어 58경기에 출전했다.[37] 그는 하나의 플레이에 대해 다양한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시야를 넓혔다.[38] 귀국 후 2군에서 우치다 준조 타격 코치 등의 지도를 받으며 맹훈련을 거듭했고,[38] 프로 4년차인 1993년에 1군 첫 출전을 달성했다.1995년, 마에다의 부상으로 대타로서 1군에 승격된 아사이는 6월 15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프로 첫 안타를 기록했다. 7월 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프로 첫 홈런을 포함하여 2홈런 3타점을 올리는 활약을 펼쳤고,[38] 그 해 1군에 정착하여 타율 3할 3리를 기록했다. 1996년 9월 21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파울볼을 치다가 오른손 유구골이 골절되어 전치 1개월의 부상을 입었지만,[39] 시즌 타율 3할 3푼 9리, 특히 대타 성공률은 4할 5푼 3리를 기록하며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33] 시즌 후 계약 협상에서 1,500만 엔이 상승한 연봉 2900만엔(추정치)으로 재계약했다.[40]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가네모토 도모아키, 오가타 고이치, 에토 아키라, 루이스 로페즈 등 주전 선수층이 두터워 주전 자리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41] 반면, 대타로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며 '대타의 비밀병기'로 자리매김했다는 딜레마도 있었다.[41]
1997년 시즌 후, 3년 전 구로시오 교육 리그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했다.[38] 1998년에는 로페즈의 퇴단으로 마치다 고지로, 티모니엘 페레스와 주전 1루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고,[42] 7월에는 가네모토의 결장으로 5번 타자로 기용되어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43] 그해 2년 만에 100경기 이상 출전하며 개인 최다인 75안타를 기록했다.
1999년, 다쓰카와 미쓰오 감독이 공격형 타선을 시도하면서 4월 6일 한신전에서 2번 타자로 기용되었다.[44] 시즌 후에는 결장한 에토를 대신하여 센트럴 리그 올스타 동서 대항에 출전했다.[45] 전년도의 활약으로 주전으로 정착하는 듯했으나,[46] 시즌 타율이 2할 3푼 5리에 그치는 등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고, 계약 갱신에서 500만 엔이 삭감된 연봉 3650만엔(추정치)으로 재계약했다.[47]
2000년 4월 14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2홈런 5타점을 기록하는 등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고,[46] 5월 7일 한신전에서는 끝내기 만루 홈런을 쳐냈다.[48] 5월에 재입단한 로페즈가 주전 1루수로 정착했지만, 부상으로 빠진 오가타를 대신해 외야수로 선발 기용되기도 했다. 8월에는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는 등[49] 시즌 개인 최다인 13홈런, 46타점을 기록했다.
2001년 6월 한신전에서 수비 도중 펜스와 충돌하여 보행이 어려울 정도로 오른쪽 무릎이 부어올랐지만, 부상을 숨긴 채 출전을 강행했다.[38] 시즌 후에는 도야마현 내 초등학생 340명을 대상으로 도야마현 이와세 스포츠 공원에서 야구 교실을 개최했다.[50]
2002년에는 대타를 중심으로 타율 3할 8리를 기록하며 600만 엔이 상승한 연봉 5300만엔(추정치)으로 계약을 갱신했다.[51] 2003년에는 노무라 겐지로의 부상으로 아라이 다카히로가 3루수를 맡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아라이를 대신하는 1루수로 선발 기용되어 좋은 타격을 선보였다.[52] 2004년 6월 11일 요미우리전에서 1점 차로 따라가던 9회에 맷 랜들로부터 대타 만루 홈런을 날렸다.[53] 같은 해 FA권을 취득하여 선발 출전 기회를 얻기 위해 이적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히로시마에 대한 애정으로 잔류를 선택했다.[54] 정규 시즌에서는 센트럴 리그 역대 5위 타이 기록인 대타로서 20타점을 기록했다.[57] 2005년부터는 선수 등록을 외야수에서 내야수로 변경했다.
2006년 6월 말 메니에르 병을 앓게 되었고, 마티 브라운 감독의 젊은 선수 중심 기용 방침으로 인해[55]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다. 현역 생활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강했지만, 구단 측은 아사이의 승부욕과 야구 이론을 높이 평가하여 코치직을 제안했고, 아사이도 이를 수락했다. 10월 14일 현역 은퇴를 표명하며 17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경기가 된 시즌 최종전 10월 16일 주니치전에서는 7회 대타로 출전하여 중견수 앞 안타를 기록했다.[55]
은퇴식에서 아사이는 눈물을 흘리며 팬들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했다.
입단 동기인 마에다는 "17년간 함께 활약해 온 아사이를 최고의 모습으로 내보내고 싶다"며 이 경기에서 홈런을 포함한 4안타를 기록했다.
3. 은퇴 이후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2007년에 히로시마의 2군 타격 코치로 부임하여 2009년까지 맡았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1군 타격 코치, 2013년부터 3군 총괄 코치를 맡았다. 2019년 10월 28일에 구단으로부터 다음 시즌의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고 퇴단했다.[26] 2020년부터는 히로시마 구단 편성부 편성과장 겸 베이스볼 클리닉 코치를 맡고 있으며, 주고쿠 신문이 제작하는 웨스턴 리그 중계에서 해설을 맡고 있다.[27] 2021년도부터 베이스볼 클리닉은 "카프 아사이 타격 학원"으로 아사이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변경되었다.[27]
4. 플레이 스타일
마에다 도모노리, 가네모토 도모아키, 오가타 고이치 등 1500안타, 200홈런 이상을 기록한 선수들이 같은 시기에 활약하여 주전으로 뛰지는 못했지만, 다른 구단이었다면 강력한 타격을 가진 외야수로 활약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38] 본인은 1년이라도 주전으로 기용되고 싶어했지만, 구단에서는 주전 선수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춘 '슈퍼서브'로 높이 평가했다.[38] 여름에 강해 '여름남(夏男일본어)'이라고도 불렸다.[56]
우타자 마치다 고지로와 함께 대타의 비밀병기로 오랫동안 활약하며 대타 통산 타율 0.315(2012년 기준 센트럴 리그 역대 2위),[57] 154안타(2013년 기준 센트럴 리그 역대 3위),[57] 끝내기 안타 4개, 93타점(센트럴 리그 역대 5위)[57]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41][58] 야마모토 고지 감독은 벤치에 있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위압감을 준다고 평가했다.[41] 야구계에서 손꼽히는 강한 승부욕을 자랑하며,[54] 통산 7개의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는데 그 중 3개는 끝내기 홈런이었다.[59]
배트를 높이 세우고 한 발로 타이밍을 잡는 독특한 타격폼을 가지고 있었다.[41] 입단 초기에는 한 방을 노리는 호쾌한 스윙이 특징이었지만, 대타로 포지션이 바뀌면서 홈런보다는 상황에 맞는 타격에 철저했다. 센터쪽으로 받아치거나 역방향으로 공을 가볍게 밀어치는 타법에 능숙하여 재치있는 면모도 보였다.
외야수로 등록된 시즌이 대부분이었지만, 1루 수비도 안정적이었다.[41] 2005년에는 중간에 출장하면서도 3경기 연속 도루를 성공시켰고, 때로는 대주자로 기용되기도 했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연속 3루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경기 중에 유니폼 소매를 짧게 걷어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는 근육을 과시하여 투수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행동은 팀 동료인 모리카사 시게루와 다무라 게이가 따라하기도 했다. 좌타 강타자로 인정받았다.[28]
5. 상세 정보
아사이 이쓰키는 1990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2006년 은퇴할 때까지 17년간 활약한 야구 선수이다. 외야수였지만, 1루수로도 뛰었으며 2005년부터는 내야수로 등록을 변경했다.
통산 성적 (13년): 1070경기 출장, 타율 .285, 523안타, 52홈런, 259타점, 41도루
타격:방망이를 높게 들고 한 발로 타이밍을 잡는 독특한 타격 폼을 가졌다.[11] 입단 초기에는 홈런을 노리는 호쾌한 스윙이 특징이었지만, 대타로 활약하면서 상황에 맞는 교타를 치는 데 집중했다. 특히 센터 방향과 역방향으로 타구를 잘 보내는 재치를 보였다.
수비:외야수 등록이 대부분이었지만, 1루수 수비에도 정평이 있었다.[11]
주루:2005년에는 중간 출전임에도 3경기 연속 도루를 성공시키는 등 빠른 발을 활용하여 대주자로 기용되기도 했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연속 3루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기타:경기 중 유니폼 소매를 짧게 걷어 올려 근육을 보여줌으로써 투수를 위협하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팀 동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팀 | 경기 수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타율 |
---|---|---|---|---|---|---|---|---|---|---|
1993 | 히로시마 | 2 | 2 | 0 | 0 | 0 | 0 | 0 | 0 | .000 |
1995 | 63 | 174 | 46 | 6 | 1 | 6 | 16 | 5 | .303 | |
1996 | 103 | 131 | 42 | 3 | 1 | 6 | 28 | 7 | .339 | |
1997 | 87 | 88 | 18 | 2 | 1 | 1 | 6 | 1 | .234 | |
1998 | 109 | 311 | 75 | 11 | 2 | 6 | 40 | 4 | .271 | |
1999 | 96 | 178 | 38 | 8 | 2 | 2 | 14 | 4 | .235 | |
2000 | 112 | 269 | 74 | 10 | 1 | 13 | 46 | 5 | .300 | |
2001 | 107 | 214 | 54 | 11 | 2 | 4 | 24 | 3 | .286 | |
2002 | 97 | 159 | 45 | 6 | 1 | 4 | 19 | 1 | .308 | |
2003 | 92 | 232 | 66 | 6 | 1 | 7 | 32 | 6 | .319 | |
2004 | 79 | 97 | 25 | 4 | 1 | 3 | 21 | 0 | .284 | |
2005 | 80 | 118 | 26 | 6 | 0 | 0 | 9 | 3 | .265 | |
2006 | 43 | 66 | 14 | 0 | 0 | 0 | 4 | 2 | .222 | |
통산 (13년) | 1070 | 2039 | 523 | 73 | 13 | 52 | 259 | 41 | .285 |
연도별 수비 성적:
연도 | 구단 | 포지션 | 경기 수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1993 | 히로시마 | 외야수 | 1 | 0 | 0 | 0 | 0 | ---- |
1995 | 1루수 | 19 | 83 | 8 | 1 | 14 | .989 | |
외야수 | 41 | 65 | 3 | 0 | 2 | 1.000 | ||
1996 | 1루수 | 47 | 70 | 7 | 1 | 6 | .987 | |
외야수 | 26 | 29 | 0 | 2 | 0 | .935 | ||
1997 | 1루수 | 16 | 29 | 3 | 0 | 3 | 1.000 | |
외야수 | 3 | 4 | 0 | 0 | 0 | 1.000 | ||
1998 | 1루수 | 84 | 647 | 70 | 5 | 50 | .993 | |
외야수 | 1 | 0 | 0 | 0 | 0 | ---- | ||
1999 | 1루수 | 64 | 303 | 41 | 3 | 35 | .991 | |
외야수 | 5 | 4 | 0 | 0 | 0 | 1.000 | ||
2000 | 1루수 | 56 | 194 | 22 | 1 | 13 | .995 | |
외야수 | 49 | 73 | 0 | 2 | 0 | .973 | ||
2001 | 1루수 | 27 | 35 | 5 | 1 | 3 | .976 | |
외야수 | 49 | 58 | 1 | 0 | 0 | 1.000 | ||
2002 | 1루수 | 48 | 232 | 21 | 0 | 19 | 1.000 | |
외야수 | 8 | 14 | 2 | 0 | 1 | 1.000 | ||
2003 | 1루수 | 43 | 256 | 16 | 4 | 27 | .986 | |
외야수 | 27 | 22 | 3 | 1 | 0 | .962 | ||
2004 | 1루수 | 31 | 103 | 12 | 1 | 5 | .991 | |
외야수 | 1 | 0 | 0 | 0 | 0 | ---- | ||
2005 | 1루수 | 19 | 117 | 11 | 1 | 9 | .992 | |
2006 | 1루수 | 10 | 82 | 6 | 2 | 8 | .978 | |
통산 1루수 | 464 | 2151 | 222 | 20 | 192 | .991 | ||
통산 외야수 | 211 | 269 | 9 | 3 | 3 | .989 |
주요 기록:
- 첫 출장: 1993년 4월 1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10회초에 좌익수로 출장[35]
- 첫 타석: 상동, 10회말에 이시게 히로시에게 삼진[35]
- 첫 안타·첫 타점: 1995년 6월 15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8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1회초에 우도 가쓰야로부터 우중간 적시 2루타[38]
- 첫 홈런: 1995년 7월 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2회말에 기다 마사오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38]
- 1000경기 출장: 2005년 7월 27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9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7번·1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405번째
대타 기록:'대타의 비장의 카드'로 오랫동안 활약하며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기록 | 내용 |
---|---|
통산 대타 기용 | 582회 (역대 5위) |
통산 대타 안타 | 154개 (역대 3위)[57] |
통산 대타 타율 (기용수 300 이상) | 0.315 (역대 2위)[57] |
통산 대타 타점 | 93타점 (역대 5위)[41][58] |
한 시즌 최고 대타 성공률 | 0.453 (1996년) |
한 시즌 최다 대타 타점 | 20타점 (2004년, 센트럴 리그 역대 5위 타이 기록)[57] |
통산 7개의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으며, 그 중 3개는 끝내기 홈런이었다.[59]
5. 1. 출신 학교
오쿠다 중학교와 도야마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33] 도야마 상업고등학교 1학년 여름부터 벤치에 들어갔고, 2학년과 3학년 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하계 고시엔)에 출전했다.[33][34]5. 2. 선수 경력
야구를 시작한 계기는 아버지와 캐치볼을 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소년 야구단에 입단했다.[33] 도야마시립 오쿠다 중학교에서는 1학년 때 투수를 맡았지만, 2학년부터는 외야수를 맡았다.[33] 중학교 졸업 후, 도야마 현립 도야마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학년 여름부터 벤치에 들어갔다.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도야마현 대회 결승에서는 중도에 출전했지만, 신도 다쓰야가 소속된 다카오카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했다.[33]1학년 가을부터 주전 중견수로 고정되었고, 2학년 때인 하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첫 경기에서 다이라 고이치가 소속된 오키나와 수산고등학교에게 패했다.[33] 3학년 때 하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1차전에서 패했지만, 이 경기에서 홈런을 날린 것이 좋은 추억이 되었다고 한다.[34]
호타준족의 외야수로 주목받았고, 1989년 드래프트 회의를 앞두고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가 드래프트 번외로 획득할 의사를 나타낸 것 외에도 사회인 야구팀인 IBM 야스에서 영입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35] 그러나 드래프트에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갑작스럽게 6순위로 지명을 받았고, 다이요에서는 사회인 야구팀에 입단하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히로시마 입단을 결정했다.[35] 계약금과 연봉은 각각 2500만엔, 360만엔(모두 추정치)이었다.[36]
1990년 춘계 캠프에서 동기인 마에다 토모노리의 타격 기술에 충격을 받았다.[5] 같은 해 치요마루 아키히코, 미즈사와 히데키, 마에마 타쿠와 함께 파이오니아 리그의 Pocatello Giants영어에 파견되어 58경기에 출전했다.[7] 하나의 플레이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시야가 넓어졌다고 한다.[8] 귀국 후 2군에서 타격 코치 우치다 준조 등의 지도를 받고 맹연습을 거듭했다.[8]
1993년에 1군 첫 출전을 했다.
1995년, 마에다의 부상으로 대타로 1군에 승격되자, 6월 15일 요코하마전에서 프로 첫 안타, 7월 1일 요미우리전에서 프로 첫 홈런을 포함한 2홈런 3타점의 활약을 보였다.[8] 같은 해 1군에 정착하여 타율.303의 성적을 남겼다.
1996년 9월 21일 한신전에서 파울볼을 쳤을 때 오른손 유구골이 골절되어 전치 1개월의 중상을 입었지만,[9] 시즌 통산 .339의 고타율을 기록했고, 특히 대타 성공률은 .453에 달했다.[3] 오프 계약 갱신에서는 1500만엔 증가한 연봉 2900만엔(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0]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동년배 야수로서 마에다 외에 카네모토 토모아키, 오가타 코이치, 에토 사토시가 있었고, 루이스 로페스를 포함한 주전 층은 두터워 포지션을 빼앗을 수 없었다.[11] 반대로 대타로 결과를 남겼기 때문에 대타의 비장의 카드로 정착해 버린다는 딜레마도 있었다.[11]
1997년 오프에 3년 전 흑조 리그에서 알게 된 여성과 결혼했다.[8]
1998년에는 로페스의 퇴단으로 마치다 코지로나 티모니엘 페레스와 1루수 주전 자리를 다퉜다.[12] 7월에는 카네모토의 결장을 받아 5번 타자로 기용되어 홈런을 날리는 활약으로 이에 응답했다.[13] 같은 해 2년 만에 100경기 이상에 출전하여, 자기 최다인 75안타를 기록했다.
1999년에는 신임 감독 타츠카와 아키토요가 공격형 타선을 시도하여, 4월 6일 한신전에서는 2번 타자로 기용되었다.[14] 오프에는 결장한 에토 대신 센트럴 리그 올스타 동서 대항에 출전했다.[15] 전년의 활약으로 주전 정착을 노렸지만,[16] 시즌 타율은 .235 등 성적이 좋지 않아, 계약 갱신에서는 500만엔 감액된 연봉 3650만엔(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7]
2000년 4월 14일 주니치전에서 2홈런 5타점의 활약을 보이는 등, 좋은 출발을 했다.[16] 5월 7일 한신전에서는 카트 밀러로부터 끝내기 만루 홈런을 날렸다.[18] 1루수 주전에는 5월에 재입단한 로페스가 정착했지만, 부상당한 오가타를 대신하여 외야수로 선발 출장했다. 8월에는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는 등,[19] 시즌 통산으로는 자기 최다인 13홈런, 46타점의 성적을 남겼다.
2001년 6월 한신전에서 수비 시 펜스에 격돌하여, 보행이 곤란할 정도로 오른쪽 무릎이 부어 올랐지만, 부상을 숨기고 출전을 계속했다.[8] 오프에는 도야마현 내 초등학생 340명을 대상으로, 도야마현 이와세 스포츠 공원에서 야구 교실을 개최했다.[20]
2002년 대타를 중심으로 타율 .308의 성적을 남겼고, 600만엔 증가한 연봉 5300만엔(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21]
2003년 노무라 겐지로의 부상으로 아라이 타카히로가 3루수를 맡는 기회가 늘어났고, 아라이를 대신하는 1루수로서의 선발 기용에 좋은 타격으로 응답했다.[22]
2004년 6월 11일 요미우리전에서, 1점 차로 따라붙은 9회에 매트 랜들로부터 대타 만루 홈런을 날렸다.[23] 같은 해 FA권을 획득하여, 선발 출전 기회를 얻기 위해 이적도 검토했지만, 애착이 있는 히로시마에서 우승을 목표로 하고 싶다며 FA권은 행사하지 않고 잔류했다.[24] 시즌에서는 센트럴 리그 역대 5위 타이기록인 대타로 20타점을 올렸다.[30]
2005년부터 선수 등록을 외야수에서 내야수로 변경했다.
2006년 6월 말에 메니에르병을 발병하여, 감독 마티 브라운의 젊은 선수 기용 방침도 있어서[25] 구상 밖이 되었다. 한때 현역 속행에 강한 의욕을 보였지만, 구단 측이 그 대타로 길러온 승부 근성과 야구 이론을 평가하여 코치로서 팀에 남도록 타진했고, 본인도 승낙했다. 같은 해 10월 14일 현역 은퇴를 표명, 17년간의 현역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은퇴 경기가 된 시즌 최종전 10월 16일 주니치 드래곤즈전에서는 7회에 대타로 출전하여 중전 안타를 날렸다.[25] (같은 경기에서 등번호 6번을 다음 해부터 짊어질 본 에이신이 풀이닝 출장으로 4타수 2안타). 은퇴 세레모니에서는 "저는 카프를 정말 좋아합니다. 팀 동료도 팬 여러분도 정말 좋아합니다. 이제부터는 그 사랑하는 팀과 여러분에게 조금씩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약속합니다."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동기 입단의 마에다도 "17년간 함께 플레이해 온 아사이 선수를 최고의 형태로 보내드리고 싶다."며 이 경기에서 홈런을 포함한 4안타를 날렸다.
좌타 강타자로 인정받았다.[28] 그러나 1500안타, 200홈런 이상을 기록한 마에다 토모노리, 카네모토 토모아키, 오가타 코이치가 동시에 활약하고 있어서 주전으로 정착하지 못했지만, 다른 구단에 들어갔다면 강타의 외야수로서 활약했을 것이라고 말해진다.[8] 본인은 1년이라도 좋으니 주전으로 기용되고 싶다고 느꼈지만, 구단에서는 주전 선수와 견줄만한 실력을 가진 슈퍼 서브로 높게 평가받았다.[8] 여름에 강해서, '여름 남자'라고 불리기도 한다.[29]
우타자인 마치다 코지로와 함께 대타의 비장의 카드로 오랫동안 활약하며, 대타로 통산 타율 .315 (2012년 현재, 센트럴 리그 역대 2위)[30], 154안타 (2013년 현재, 센트럴 리그 3위)[30], 끝내기 안타 4개, 93타점 (동일 5위)[30]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11][31] 감독 야마모토 코지로부터는 벤치에 있는 것만으로 상대를 위압할 수 있다고 평가받았다.[11] 구계 굴지의 승부 근성을 자랑하며,[24] 통산 7개의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으며, 그중 3개는 끝내기 홈런이었다.[32]
방망이를 높게 들고 한 발로 타이밍을 잡는, 독특한 타격 폼이었다.[11] 입단 초에는 한 방을 노리는 호쾌한 스윙이 특징이었지만, 대타 포지션에 오르면서부터는 홈런보다는 상황에 맞는 교타에 전념하는 경우가 많았다. 센터 방향으로의 타구와 역방향으로의 밀어치기를 잘하여, 재치 있는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외야수로 등록된 해가 대부분이었지만, 1루수로서의 수비에 정평이 있었다.[11] 또한, 2005년에는 중간 출전이면서도 3경기 연속으로 도루를 성공시켰으며, 때로는 대주자 요원으로 기용되기도 했다. 또한,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연속으로 3루타를 기록했다. 경기 중에 유니폼 소매를 짧게 걷어 올렸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근육을 보여줌으로써 투수를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이 행동은 팀 동료 모리카사 시게루와 타무라 메구미가 따라 했다.
5. 3. 지도자 경력
아사이 이쓰키는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2007년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2군 타격 코치로 부임하여 2009년까지 맡았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1군 타격 코치를, 2013년부터는 3군 총괄 코치를 맡았다. 2019년 10월 28일, 구단으로부터 다음 시즌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고 퇴단했다.[26] 2020년부터는 히로시마 구단 편성부 편성과장 겸 베이스볼 클리닉 코치를 맡고 있으며, 주고쿠 신문이 제작하는 웨스턴 리그 중계에서 해설을 맡고 있다.[27]5. 4. 개인 기록
아사이 이쓰키는 프로 선수 생활 동안 여러 기록을 남겼다. 다음은 주요 시즌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연도 | 소속팀 | 경기 수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타율 |
---|---|---|---|---|---|---|---|---|---|---|
1993 | 히로시마 | 2 | 2 | 0 | 0 | 0 | 0 | 0 | 0 | .000 |
1995 | 63 | 174 | 46 | 6 | 1 | 6 | 16 | 5 | .303 | |
1996 | 103 | 131 | 42 | 3 | 1 | 6 | 28 | 7 | .339 | |
1997 | 87 | 88 | 18 | 2 | 1 | 1 | 6 | 1 | .234 | |
1998 | 109 | 311 | 75 | 11 | 2 | 6 | 40 | 4 | .271 | |
1999 | 96 | 178 | 38 | 8 | 2 | 2 | 14 | 4 | .235 | |
2000 | 112 | 269 | 74 | 10 | 1 | 13 | 46 | 5 | .300 | |
2001 | 107 | 214 | 54 | 11 | 2 | 4 | 24 | 3 | .286 | |
2002 | 97 | 159 | 45 | 6 | 1 | 4 | 19 | 1 | .308 | |
2003 | 92 | 232 | 66 | 6 | 1 | 7 | 32 | 6 | .319 | |
2004 | 79 | 97 | 25 | 4 | 1 | 3 | 21 | 0 | .284 | |
2005 | 80 | 118 | 26 | 6 | 0 | 0 | 9 | 3 | .265 | |
2006 | 43 | 66 | 14 | 0 | 0 | 0 | 4 | 2 | .222 | |
통산 (13년) | 1070 | 2039 | 523 | 73 | 13 | 52 | 259 | 41 | .285 |
1990년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동기인 마에다 도모노리의 타격 기술에 충격을 받았다.[35] 같은 해 파이오니어 리그의 게이트 시티 파이오니어스에 파견되어 58경기에 출전했다.[37] 귀국 후 2군에서 맹훈련을 거듭하여,[38] 1993년에 1군에 첫 출전했다.
1995년에는 마에다 도모노리의 부상으로 1군에 승격, 프로 첫 안타와 홈런을 기록하며 1군에 정착했다. 1996년에는 오른손 유구골 골절 부상에도 불구하고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39] 1998년에는 루이스 로페즈의 퇴단으로 주전 경쟁을 펼쳤고, 1999년에는 공격형 타선 시도로 2번 타자로 기용되기도 했다.
2000년에는 끝내기 만루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고, 2001년에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강행했다.[38] 2004년에는 FA권을 취득했으나 잔류를 선택했다. 2005년에는 선수 등록을 외야수에서 내야수로 변경했다. 2006년 메니에르 병 발병과 마티 브라운 감독의 젊은 선수 기용 방침으로 은퇴를 결심했다.[55]
아사이 이쓰키는 특히 대타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통산 대타 타율은 0.315(센트럴 리그 역대 2위)이며,[57] 154개의 안타(센트럴 리그 역대 3위),[57] 4개의 끝내기 안타, 93타점(센트럴 리그 역대 5위)을 기록했다.[41][58]
5. 4. 1. 첫 기록
- 첫 출장: 1993년 4월 1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10회초에 좌익수로 출장[35]
- 첫 타석: 상동, 10회말에 이시게 히로시에게 삼진[35]
- 첫 안타·첫 타점: 1995년 6월 15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8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1회초에 우도 가쓰야로부터 우중간 적시 2루타[38]
- 첫 홈런: 1995년 7월 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2회말에 기다 마사오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38]
5. 4. 2. 기록 달성 경력
다음은 아사이 이쓰키 선수의 기록 달성 경력이다.- 첫 출장: 1993년 4월 1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10회초에 좌익수로 출장[35]
- 첫 타석: 위와 같음, 10회말에 이시게 히로시에게 삼진
- 첫 안타·첫 타점: 1995년 6월 15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8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1회초에 우도 가츠야로부터 우중간 적시 2루타[38]
- 첫 홈런: 1995년 7월 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2회말에 키다 마사오로부터 우월 솔로[38]
- 1000경기 출장: 2005년 7월 27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9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7번·1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405번째
; 대타 기록
5. 4. 3. 대타 기록
아사이 이쓰키는 대타로서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통산 대타 타율은 0.315(센트럴 리그 역대 2위)이며,[57] 154개의 안타(센트럴 리그 역대 3위),[57] 4개의 끝내기 안타, 93타점(센트럴 리그 역대 5위)을 기록했다.[41][58] 특히 1996년에는 대타 성공률이 0.453에 달했다.[33] 2004년에는 센트럴 리그 역대 5위와 타이 기록인 대타로서 20타점을 기록했다.[57]기록 | 내용 |
---|---|
통산 대타 기용 | 582회 (역대 5위) |
통산 대타 안타 | 154개 (역대 3위) |
통산 대타 타율 (기용수 300 이상) | 0.315 (역대 2위) |
야마모토 고지 감독은 아사이가 벤치에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위압감을 준다고 평가했다.[41] 그는 야구계에서 손꼽히는 승부욕을 자랑했으며,[54] 통산 7개의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는데 그 중 3개는 끝내기 홈런이었다.[59]
참조
[1]
웹사이트
Itsuki Asai Minor & Japanese Leagues Statistics & History
https://www.baseball[...]
[2]
웹사이트
Asai's grand slam sees Carp top Giants
http://www.japantime[...]
2004-06-12
[3]
서적
新野球浪漫 男たちの詩 9回 フラッシュの嵐 浅井樹 レギュラーになるんだという気持ちがなくなったらやってられない
週刊ベースボール
2002-07-08
[4]
뉴스
朝日新聞
2009-01-29
[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2-07-08
[6]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2-07-08
[7]
웹사이트
baseball reference.com マイナーリーグ成績
http://www.baseball-[...]
[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2-07-08
[9]
뉴스
朝日新聞
1996-09-21
[10]
뉴스
朝日新聞
1996-12-21
[11]
뉴스
朝日新聞
2006-06-28
[12]
뉴스
朝日新聞
1998-03-17
[13]
뉴스
朝日新聞
1998-07-08
[14]
뉴스
読売新聞
1999-04-07
[15]
뉴스
読売新聞
1999-11-10
[16]
뉴스
読売新聞
2000-04-15
[17]
뉴스
朝日新聞
1999-12-21
[18]
뉴스
読売新聞
2000-05-08
[19]
뉴스
朝日新聞
2000-08-18
[20]
뉴스
読売新聞
2001-12-17
[21]
뉴스
毎日新聞
2002-12-05
[22]
뉴스
読売新聞
2003-06-24
[23]
뉴스
読売新聞
2004-06-12
[24]
뉴스
朝日新聞
2004-11-19
[25]
뉴스
読売新聞
2006-10-17
[26]
뉴스
広島初の"特命コーチ"…使命は未来の強打者育成 見逃さない「子どもの目が光る時」
https://full-count.j[...]
2023-11-17
[27]
뉴스
「カープ浅井打撃塾」開講 フロント入りした元鯉戦士・浅井さんがジュニアを徹底指導
https://www.daily.co[...]
2023-11-17
[28]
뉴스
「カープ浅井打撃塾」開講 フロント入りした元鯉戦士・浅井さんがジュニアを徹底指導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2-12-14
[29]
뉴스
朝日新聞
1998-07-16
[30]
웹사이트
NPB セ・リーグ年度別代打成績(pdf)
http://www.npb.or.jp[...]
[31]
뉴스
毎日新聞
2006-10-17
[32]
웹사이트
NPB セ・リーグ年度別サヨナラ試合勝敗表(pdf)
http://www.npb.or.jp[...]
[33]
서적
신 야구낭만: 남자들의 시(9회) - 플래시의 폭풍우 아사이 이쓰키 주전이 된다는 기분이 없었더라면 할 수 없다
슈칸 베이스볼
2002-07-08
[34]
뉴스
아사히 신문
2009-01-29
[35]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2-07-08
[36]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2-07-08
[37]
웹사이트
baseball 마이너 리그 성적
http://www.baseball-[...]
[38]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2-07-08
[39]
뉴스
아사히 신문
1996-09-21
[40]
뉴스
아사히 신문
1996-12-21
[41]
뉴스
아사히 신문
2006-06-28
[42]
뉴스
아사히 신문
1998-03-17
[43]
뉴스
아사히 신문
1998-07-08
[44]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9-04-07
[45]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9-11-10
[46]
뉴스
요미우리 신문
2000-04-15
[47]
뉴스
아사히 신문
1999-12-21
[48]
뉴스
요미우리 신문
2000-05-08
[49]
뉴스
아사히 신문
2000-08-18
[50]
뉴스
요미우리 신문
2001-12-17
[51]
뉴스
마이니치 신문
2002-12-05
[52]
뉴스
요미우리 신문
2003-06-24
[53]
뉴스
요미우리 신문
2004-06-12
[54]
뉴스
아사히 신문
2004-11-19
[55]
뉴스
요미우리 신문
2006-10-17
[56]
뉴스
아사히 신문
1998-07-16
[57]
웹사이트
센트럴 리그 연도별 대타 성적(PDF)
http://www.npb.or.jp[...]
[58]
뉴스
마이니치 신문
2006-10-17
[59]
웹인용
센트럴 리그 연도별 끝내기 경기 승패표(PDF)
http://www.npb.or.jp[...]
2013-10-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