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안지추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지추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531년에 태어나 591년에 사망했다. 그는 랑야 안씨 가문 출신으로, 여러 왕조를 거치며 관직을 역임했다. 안지추는 저서 《안씨가훈》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삶의 지혜를 자손에게 전했으며, 불교를 옹호하고 화장지에 대한 초기 언급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저술은 6세기 중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으며, 후손으로는 안사고와 안진경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안지추
기본 정보
이름안지추
출생513년
사망591년
시대남북조 시대
국적중국
직업문학가, 사상가, 교육가
업적
주요 저서《안씨가훈》
기타 업적북제에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냄
북주에서 학사(學士)를 지냄
수나라에서 문제(文帝)에게 불려 태자학사(太子學士)가 됨

2. 가계 배경

안지추는 양 무제 중대통 3년(531) 강릉(江陵)에서 태어나 수 문제 개황 11년(591)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낭야임기(琅琊臨沂)의 명문가 출신으로, 그의 먼 조상은 공자의 제자인 안회였다. 9대조 안함(顔含)은 서진 시대 사마씨 정권을 따라 강남으로 이주했다.[2]

안지추의 집안은 랑야의 귀족 안씨(琅邪顏氏) 가문이었다. 오호 십육국 시대 동안 서진의 수도 장안이 함락된 후, 안씨 가문은 317년에 양쯔강 이남으로 이주했다. 동진의 새로운 수도인 건강(현재의 난징)에서 안씨 가문은 엘리트 가문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안씨 가문은 동진 왕조와 그 뒤를 이은 남조 왕조의 정부에서 많은 관료를 배출했다.[2]

안지추의 조부 안건원은 박학다식하여 남제의 주요 관직을 지냈다. 그러나 제·양 교체기에 소연(양 무제)의 반역을 반대하고 남제에 대한 절의를 주장하며 단식하다가 사망했다. 502년 4월에서 5월 사이에 남제에서 양나라로 정권이 교체될 때, 안건원은 남제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며 양나라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거부했다. 양 무제가 남중국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르자, 안건원은 자신이 섬겼던 왕조에 대한 를 다하기 위해 단식하다가 죽었다.[2]

안지추의 부친 안협(顔勰)은 양나라 상동왕 소역의 진서부자의참군을 지냈으며,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형초 지역의 비문 가운데는 그가 쓴 것이 많았다. 안지추는 안협의 아들이며, 안지이와 안지삼은 그의 형들이었다. 안지추는 부친의 뛰어난 서예 재능을 물려받았으나, 잡예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을 경계하고 유학에 힘써 정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안지추는 오랜 가학을 이어받아, ≪주례≫, ≪춘추좌씨전≫에 정통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식했으며, 특히 문자학에 밝아 여러 서적을 교감(校勘)하는 데에도 조예가 깊었다.

3. 생애

531년 양 무제 중대통 3년에 강릉에서 태어나, 591년 수나라 문제 개황 11년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낭야임기의 명문대가 출신으로, 9세 때 부친을 여의었으나 두 형의 보살핌과 엄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 그의 먼 조상은 공자의 애제자인 안회이며, 9대조 안함 때 사마씨 정권을 따라 강남으로 내려왔다. 조부 안견원은 박학다식하여 제나라의 주요 관직을 지냈으나, 제·양 교체기에 소연의 반역을 반대하고 제나라에 대한 절의를 주장하며 단식하다 사망했다.[3][4] 부친 안협은 양나라 상동왕 소역의 진서부자의참군을 지냈으며,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초서예서에 뛰어나 형초 지역의 비문 가운데는 그가 쓴 것이 많다. 안지추는 부친의 서예 재능을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서예에 관심을 보였으나, 유학에 힘써 정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안지추는 가학을 이어받아 ≪주관≫, ≪좌씨전≫에 정통했다. 12세에 소역의 문도가 되기도 했지만, 노장의 현담을 좋아하지 않아 가학에 몰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식했으며, 특히 문자학에 밝아 여러 서적을 교감하는 데 조예가 깊었다. ≪안씨가훈≫의 제17장 <서증> 편은 교감학에 대한 그의 집념을 보여 준다. 음훈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각종 기물의 이름 및 발음 등을 고증했다. 그는 호탕하고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절도가 있었으며, 술을 좋아했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 20세 전에는 용모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 소탈하게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안지추는 양나라에서 벼슬하여 상동왕 소역의 좌국상시를 시작으로 진서묵조참군, 산기시랑을 지냈다. 후경의 난 때는 약 4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풀려났으며, 554년 서위가 침공하자 다시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이송되었다.[2] 양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북제에서 벼슬해 중서사인, 황문시랑 등의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북제는 북주에 의해 멸망했고, 그는 다시 포로 생활을 겪은 뒤 북조에서 어사상사의 벼슬을 지냈다. 수나라 양견이 북조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면서 정치적 부침은 일단락되고, 그는 태자의 학사로 부름을 받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세 차례의 포로 생활과 세 차례의 망국을 경험하면서 네 왕조에 벼슬했다. 그는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도 올바른 옛 도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고된 경험은 수나라의 전국 통일 이후 남북의 문풍을 융합해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안지추는 생전에 ≪문집≫ 30권을 남겼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가훈≫ 20편 외에 ≪환원지≫ 3권이 있으며, ≪북제서≫와 ≪북사≫에 그의 전기가 기록되어 있다. 송대 무월의 ≪안지추 연보≫에 따르면, 안지추는 사로, 민초, 유진이라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이들에게 근본을 잊지 말고 학업에 힘쓸 것을 일깨우고자 ≪안씨가훈≫을 남겼다. 사로의 아들이자 안지추의 손자 안사고는 당나라 초기의 학자로 문자학과 경학에 정통해 ≪오경정의≫ 편찬에 참여했다. 안진경은 그의 5대손이다.

십 대 시절 안지추는 건강에서 하급 궁정 시종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후징이 양나라에 반기를 들고 권력을 잡았다. 안지추와 왕족 한 명[5]은 후징의 포로가 되었을 때 처형을 간신히 면했다.[2]

552년, 안지추는 후경의 반란 전에 섬기던 양나라의 왕자를 따라 강릉 (현 징저우)으로 도망쳤다. 양나라 왕자는 경쟁적인 궁정을 세웠지만, 서위가 북쪽에서 침략하여 555년 1월 강릉을 점령하면서 멸망했다. 스물네 살이 된 안지추는 노예가 된 포로가 되어 10만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위의 수도인 장안으로 끌려갔다.

556년, 그의 가족은 장안에서 탈출하여 남조의 양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진나라557년 11월 진 무제의 즉위와 함께 남쪽의 양나라를 전복시켰다. 안지추는 남제에서 양나라가 권력을 찬탈했을 때 양나라를 섬기기를 거부했던 그의 할아버지처럼, 새로운 진나라 정권을 섬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안지추는 중국 북동부의 북제에서 여러 궁정 직책을 맡게 되었다. 577년 2월 북주가 북제를 물리치고 중국 북부를 지배하는 유일한 왕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흔여섯 살이 된 안지추는 한때 감금되었던 장안으로 다시 이주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어떤 정부 직책에도 임명되지 않았고, 잠시 빈곤 상태에서 고통을 받았다. 수 문제가 이끄는 수나라가 북주의 권력을 찬탈하자 안지추는 다시 인정받아 여러 학술 및 장관직에 임명되었다.

남조 양의 진서부 자문의 안협의 아들로 태어난 안지추는, 대대로 『주례』와 『춘추좌씨전』에 통달한 가문 출신이었다. 안지추 역시 노장 사상을 싫어하고 유학을 좋아했으며,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에 재능이 있었다. 남조 양의 상동왕 소역 밑에서 좌상시·진서 묵조참군에 임명되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술을 즐겨 마시고 방종한 생활을 했다. 영주에서 장관기를 맡고 있었는데, 후경의 난으로 영주가 함락되자 포로로 잡혀 건강으로 보내졌다. 난이 평정되자 강릉으로 돌아갔다. 소역이 황위에 오르자 안지추는 산기시랑이 되었다. 승성 3년 (554년), 서위가 강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안지추는 포로로 잡혀 이현경의 보호를 받아 홍농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황하의 범람을 틈타 가족과 함께 북제로 망명했다.

문선제의 마음에 들어 봉조청이 되어 황제의 측근으로 섬겼다. 중서사인·조주 공조참군·사도로기참군 등을 역임하고 황문시랑이 되었다.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자, 뒤에 어사상사로 불려졌다. 가 북주를 멸망시키자, 태자 양용에게 불려 문학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4. 저술 활동

안지추는 육법언의 연회에 초대되어 『절운』 작성 관련 논의에 참여했고, 이 책의 작성에도 기여했다. 「관아생부」는 자전적인 로, 『북제서』에 인용되어 있다. 「계성부」라는 부도 지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4. 1. 안씨가훈

그의 26장 분량의 저서 《안씨가훈》(《顏氏家訓》, "안씨 가문의 가르침")에서 안지추는 자신의 철학과 인생 조언을 담은 저술을 아들들에게 남겨,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 어떤 길을 가고 어떤 길을 피해야 하는지 조언했다. 게다가 그는 당대의 중국 북조와 남조의 차이점, 특히 언어, 풍습, 문화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형이 자신에게 엄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복하는 데 수년이 걸린 많은 나쁜 습관을 형성했다고 적었다.[2] 그는 좋은 교육을 받을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교육을 잘 받은 신하들이 관직에 등용되었고, 수 세기 동안 명망 있는 가문을 둔 이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농장에서 일하거나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2] 그는 서예, 그림 그리기, 거문고(고금) 연주를 마스터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너무 많이 연습하고 지나치게 많은 기술을 얻는 것을 경고했다. 이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그들을 불러 끊임없이 즐겁게 하고 즉석에서 기발한 서예, 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 안지추는 가문 소장 서예품에 대한 고미술 연구가였으며, 그의 소유에는 초기 서예의 대가인 왕희지와 그의 아들 왕헌지가 쓴 작품들이 있었다.

안지추는 저술에서 불교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불교에 대한 확고한 비판자였던 많은 동료들에 맞서 불교를 옹호했는데, 이는 안지추 자신이 공자의 학문과 교육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이다. 안지추는 또한 아들들에게 자신의 장례식에 불교 의례를 치르도록 요구했고, 전통적인 조상 제사에서 고기를 바치지 않도록 설득했다.[2] 그는 아들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존중하라고 요구했지만, 아들들이 은둔하고 고립된 수도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여전히 아들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종이는 기원전 2세기부터 중국에서 포장 및 완충재로 알려졌지만,[6] 화장지에 대한 초기 언급은 안지추에 의해 이루어졌다.[7] 서기 589년, 안지추는 "오경 또는 성현의 이름이 적힌 종이는 변소 용도로 감히 사용하지 않겠다."라고 썼다.[7]

안씨가훈』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손들에게 학문의 중요성을 설파한 저작이다. 6세기의 중국 사회의 양상이 남북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 그 점에서의 귀중한 증언이 되고 있다. 중국 고전에서 "가훈"이라고 하면, 이 『안씨가훈』을 가리킬 정도로 유명하다. 자녀의 유아기부터의 교육 방법, 재혼의 경우의 주의점,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사랑의 방식 등 현대에도 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4. 2. 환원지

還冤志|환원지중국어지괴소설의 일종이다.

4. 3. 기타 저술

안씨가훈』은 안지추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손들에게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다. 이 책에는 6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사회상이 잘 기록되어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중국 고전에서 "가훈"이라고 하면, 보통 『안씨가훈』을 가리킬 정도로 유명하다. 자녀의 유아기 교육 방법, 재혼 시 주의점, 부모의 자식 사랑 방식 등 현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

안지추는 육법언의 연회에 초대받아 『절운』 작성 관련 논의에 참여했고, 이 책의 작성에도 기여했다.

『환원지』는 지괴소설의 한 종류이다.

「관아생부」는 안지추의 자전적인 로, 『북제서』에 인용되어 있다. 안지추는 「계성부」라는 부도 지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5. 사상

안지추는 자신의 철학과 인생 조언을 담은 26장 분량의 저서 《안씨가훈(顏氏家訓》, "안씨 가문의 가르침")을 아들들에게 남겼다. 그는 이 책에서 아들들이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 어떤 길을 가고 어떤 길을 피해야 하는지 조언했다. 또한, 그는 당대 중국 북조와 남조의 차이점, 특히 언어, 풍습, 문화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2]

안지추는 좋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교육을 잘 받은 신하들이 관직에 등용되었고, 수 세기 동안 명망 있는 가문을 둔 이들이라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농장에서 일하거나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2] 그는 서예, 그림 그리기, 거문고(고금) 연주를 마스터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너무 많이 연습하고 지나치게 많은 기술을 얻는 것은 경고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굴욕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불러 끊임없이 즐겁게 하고 즉석에서 기발한 서예, 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 안지추는 가문 소장 서예품에 대한 고미술 연구가였으며, 그의 소유에는 초기 서예의 대가인 왕희지와 그의 아들 왕헌지가 쓴 작품들이 있었다.

안지추는 저술에서 불교를 지지했다. 그는 공자의 학문과 교육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대한 확고한 비판자였던 많은 동료들에 맞서 불교를 옹호했다. 안지추는 또한 아들들에게 자신의 장례식에 불교 의례를 치르도록 요구했고, 전통적인 조상 제사에서 고기를 바치지 않도록 설득했다.[2] 그는 아들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존중하라고 요구했지만, 아들들이 은둔하고 고립된 수도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여전히 아들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종이는 기원전 2세기부터 중국에서 포장 및 완충재로 알려졌지만,[6] 화장지에 대한 초기 언급은 안지추에 의해 이루어졌다.[7] 서기 589년, 안지추는 "오경 또는 성현의 이름이 적힌 종이는 변소 용도로 감히 사용하지 않겠다."라고 썼다.[7]

6. 평가 및 영향

안지추는 그의 저서 《안씨가훈》(《顏氏家訓》)에서 아들들에게 자신의 철학과 인생 조언을 남겼다. 그는 이 책에서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 어떤 길을 가야 하고 어떤 길을 피해야 하는지를 조언했다.[2] 또한, 그는 당대 중국 북조와 남조의 언어, 풍습, 문화 차이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2]

안지추는 좋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교육을 잘 받은 신하들이 관직에 등용되었고, 수 세기 동안 명망 있는 가문을 둔 이들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농장에서 일하거나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2] 그는 서예, 그림, 거문고 연주를 익혀야 하지만, 너무 많이 연습하여 지나치게 많은 기술을 얻는 것은 경고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굴욕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불러내어 즉석에서 기발한 서예, 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 안지추는 가문 소장 서예품에 대한 고미술 연구가였으며, 그의 소유에는 초기 서예 대가인 왕희지왕헌지의 작품들이 있었다.

안지추는 불교를 지지하며, 불교에 대한 확고한 비판자였던 많은 동료들에 맞서 불교를 옹호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자신의 장례식에 불교 의례를 치르고, 전통적인 조상 제사에 고기를 바치지 않도록 설득했다.[2] 그는 아들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존중하라고 했지만, 그들이 수도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장했다.

> ...불경을 암송하고 읽어 미래의 존재를 위한 통로를 마련하라. 윤회하여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어렵다.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라![2]

종이는 기원전 2세기부터 중국에서 포장 및 완충재로 알려졌지만,[6] 화장지에 대한 초기 언급은 안지추에 의해 이루어졌다.[7] 서기 589년, 안지추는 이렇게 썼다.

> ...오경 또는 성현의 이름이 적힌 종이는 변소 용도로 감히 사용하지 않겠다.[7]

7. 가족 관계

안지추의 조상은 본래 현재 산둥성 린이시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랑야의 귀족 안씨(琅邪顏氏) 가문이었다. 오호 십육국 시대 동안 서진의 수도 장안이 함락된 후, 안씨 가문은 317년에 양쯔강 이남으로 이주했다. 동진의 새로운 수도인 건강 (현재의 난징)에서 안씨 가문은 엘리트 가문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동진 왕조와 그 뒤를 이은 남조 왕조의 정부에서 많은 관료를 배출했다.

안지추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9대조안함(顔含)사마씨 정권을 따라 강남으로 이주
조부안건원박학다식, 제나라 주요 관직 역임. 제·양 교체기에 소연(蕭衍)의 반역을 반대하고 제나라에 대한 절의를 주장하며 단식하다 사망.
부친안협(顔勰)양나라 상동왕 소역의 진서부자의참군 역임. 여러 서적 섭렵, 초서와 예서에 뛰어남.
안지이, 안지삼
아들안사로, 안민추, 안유진



502년 4월에서 5월 사이에 남제에서 양나라로 정권이 교체될 때, 안지추의 할아버지 안건원은 남제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며 양나라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거부했다. 양 무제가 남중국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르자, 안건원은 자신이 섬겼던 왕조에 대한 를 다하기 위해 단식하다가 죽었다.[2] 할아버지의 이런 헌신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안협은 양 무제와 새로운 양나라를 섬기기로 결정했다.

7. 1. 후손

안실루, 안민추, 안유친 세 아들을 두었다.[1] 당나라안사고와 안진경은 안지추의 자손이다.[2]

송대 무월(繆鉞)의 ≪안지추 연보(顔之推年譜)≫에 따르면, 안지추는 안사로(사로), 안민추(민초), 안유진(유진) 세 아들을 두었으며, 이들에게 근본을 잊지 말고 학업에 힘쓸 것을 일깨우고자 ≪안씨가훈≫을 남겼다.[1] 안사로의 아들이자 안지추의 손자 안사고는 당나라 초기의 이름난 학자로 문자학과 경학에 두루 정통해 ≪오경정의(五經正義)≫ 편찬에 참여했다.[1] 안진경은 안지추의 5대손이다.[1]

참조

[1] 서적 Yan Zhitui's biographies in vol.83 of Bei Shi and vol.45 of Bei Qi Shu Bei Shi, Bei Qi Shu 581-01-01 # আনুমানিক বছর
[2] 서적 Ebrey
[3] 서적 Liang Shu
[4] 서적 Yanshi jiaxun
[5] 서적 Bei Qi Shu
[6] 서적 Needham
[7] 서적 Science and Civilization
[8] 웹사이트 顔之推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1-09-0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