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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판다우 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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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판다우 교도소는 독일 베를린에 위치했던 교도소로, 1876년 군사 구금 시설로 시작하여 1919년부터 민간 수감자를 수용했다. 나치 시대에는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나치 전범들을 수용하기 위해 연합군이 운영했다. 1947년부터 7명의 전범을 수용했으며, 이 중 3명은 형기를 마치고, 3명은 건강 악화로 조기 석방되었으며, 마지막 수감자였던 루돌프 헤스는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수감 생활을 했다. 헤스 사망 후 교도소는 철거되었고, 현재는 쇼핑센터가 들어서 있다. 교도소 운영과 관련하여 과도한 운영 비용, 수감자 처우, 헤스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 등의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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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판다우 교도소
기본 정보
슈판다우 교도소
1951년 경의 슈판다우 교도소
위치독일 베를린 슈판다우
좌표52° 31′ 16″ N, 13° 11′ 07″ E
주소Wilhelmstraße 22, 13595 Berlin
건설 시작1876년
개장1881년
폐쇄1987년
철거1987년
수용 인원600명
관할연합국 통제 위원회
소유주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이전 이름슈판다우 육군 교도소
역사
건설1876년 ~ 1881년
용도육군 교도소
전쟁 범죄자 수감1947년 ~ 1987년
철거1987년
수감자
주요 수감자발두어 폰 시라흐
카를 되니츠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에리히 레더
알베르트 슈페어
발터 풍크
루돌프 헤스
기타
현재 상태주차장

2. 역사

슈판다우 교도소는 1876년 빌헬름슈트라세에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프로이센 군대의 군사 구금 시설로 사용되었고, 1919년부터 민간 수감자도 수용했다.

1933년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히틀러의 반대자들과 에곤 키슈, 카를 폰 오시에츠키와 같은 기자들이 보호 구금 명목으로 수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나치 체제의 주요 전범들을 수용했다.

뉘른베르크 후속 재판의 전범들은 란츠베르크 암 레히의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용되었다.

슈판다우 교도소는 서베를린 영국 관리 지역 내에 있었지만, 냉전 중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이 공동으로 운영했다. 교도소의 운영은 매달 교대로 이루어졌다.

1987년에 마지막 수감자 루돌프 헤스가 사망하자, 네오나치의 선전에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설은 철거되었다. 철거된 잔해는 북해에 뿌려졌고, 부지에는 브리타니아 센터 슈판다우 쇼핑센터가 건설되었다.

2. 1. 설립 초기 (1876년 ~ 1933년)

슈판다우 교도소는 1876년 빌헬름슈트라세에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프로이센 군대의 군사 구금 시설로 사용되었으며, 1919년부터 민간 수감자도 수용하기 시작하여 최대 600명의 수감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

1933년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히틀러의 반대자들과 에곤 키슈 및 칼 폰 오시에츠키와 같은 기자들이 이른바 보호 구금으로 수감되었다. 슈판다우 교도소는 나치 강제 수용소의 전신과 같은 역할을 했다. 프로이센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운영했지만, 게슈타포는 수감자들을 고문하고 학대했다.[11] 1933년 말까지 최초의 나치 강제 수용소가 다하우, 오스트호펜, 오라니엔부르크, 존넨부르크, 리히텐부르크 및 에스터베겐 주변 습지대 수용소에 설립되었고, 주 감옥에서 이른바 보호 구금 상태였던 모든 수감자들이 이러한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2. 2. 나치 시대 (1933년 ~ 1945년)

1933년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히틀러의 반대자들과 에곤 키슈, 카를 폰 오시에츠키와 같은 기자들이 이른바 보호 구금으로 슈판다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11] 슈판다우 교도소는 나치 강제 수용소의 전신과 같은 역할을 했다. 프로이센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운영했지만, 키슈가 자신의 감옥 회상에서 언급했듯이 게슈타포는 수감자들을 고문하고 학대했다. 1933년 말까지 최초의 나치 강제 수용소가 다하우, 오스트호펜, 오라니엔부르크, 존넨부르크, 리히텐부르크 및 에스터베겐 주변 습지대 수용소에 설립되었고, 주 감옥에서 이른바 보호 구금 상태였던 모든 수감자들이 이러한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수용자가 600명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 1987년)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 교도소는 서베를린 영국 점령 지역에 위치했지만, 사대국 당국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나치 전범들을 수감하기 위해 운영했다.

1947년 7월 18일, 뉘른베르크에서 7명의 수감자가 도착했다.

이름번호상태출생사망연령
발두르 폰 시라흐120년 형을 선고받고 1966년 9월 30일 석방됨.1907년 5월 9일1974년 8월 8일
카를 되니츠210년 형을 선고받고 1956년 9월 30일 석방됨.1891년 9월 16일1980년 12월 24일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315년 형을 복역하다 건강 악화로 1954년 11월 6일 조기 석방됨.1873년 2월 2일1956년 8월 14일
에리히 뢰더4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건강 악화로 1955년 9월 26일 석방됨.1876년 4월 24일1960년 11월 6일
알베르트 슈페어520년 형을 선고받고 1966년 10월 1일 석방됨.1905년 3월 19일1981년 9월 1일
발터 푼크6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건강 악화로 1957년 5월 16일 석방됨.1890년 8월 18일1960년 5월 31일
루돌프 헤스7무기징역을 복역하던 중 1987년 8월 17일 교수형으로 자살함.1894년 4월 26일1987년 8월 17일



이들 중 3명은 형기를 채우고 석방되었고, 2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건강 악화로 조기 석방되었다. 알베르트 슈페어와 발두르 폰 시라흐가 석방된 1966년부터 1987년까지 루돌프 헤스는 교도소의 유일한 수감자였다.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교도소장 유진 K. 버드였으며, 버드는 헤스의 수감 생활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슈판다우 교도소는 연합군 통제 위원회 해체 후에도 운영을 계속한 두 개의 사대국 기구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베를린 항공 안전 센터였다. 베를린의 4개 점령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매달 교대로 교도소 관리를 맡았다. 연합군 통제 당국 건물에 게양된 사대국 깃발을 통해 어느 국가가 관리 중인지 알 수 있었다.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근무 교대 (왼쪽 미국군, 오른쪽 영국군)


마지막 남은 수감자였던 헤스가 사망한 후, 1987년 8월 교도소는 신나치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철거되었다.[1] 철거를 확실히 하기 위해, 부지는 주차 시설과 브리타니아 센터 슈판다우라는 쇼핑센터로 만들어졌다. 이 쇼핑센터는 영국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를 본떠 "헤스코"라는 별명이 붙었다.[2] 철거된 교도소의 모든 자재는 분쇄되어 북해에 뿌려지거나, 전 RAF 가토우 공군 기지에 매립되었다.[3] 현재 킹스 오운 스코틀랜드 보더러스의 연대 박물관인 베릭 막사에 열쇠 한 세트가 전시되어 있다.

감시탑


스무츠 막사에서 본 전경


해체 직전


해체 중


해체 후


구 정원

2. 4. 철거 (1987년 이후)

마지막 남은 수감자 루돌프 헤스가 사망한 후, 이 교도소는 신나치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87년 8월 철거되었다.[1] 철거를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그 부지는 주차 시설과 브리타니아 센터 슈판다우라는 쇼핑센터로 만들어졌는데, 유명한 영국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를 본떠 "헤스코"라는 별명이 붙었다.[2] 철거된 교도소의 모든 자재는 분쇄되어 북해에 뿌려졌거나, 전 RAF 가토우 공군 기지에 매립되었다.[3] 단, 열쇠 한 세트는 현재 킹스 오운 스코틀랜드 보더러스의 연대 박물관인 베릭 막사에 전시되어 있다.

3. 교도소 시설 및 운영

슈판다우 교도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나치 전범들을 수용하기 위해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공동으로 관리한 시설이다. 수감자들의 생활은 엄격한 규정에 따라 통제되었으며, 교도소 운영은 4개국이 매달 교대로 담당했다.

교도소는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벽돌 건물로, 높은 벽과 철조망, 감시탑 등 삼엄한 경비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수감자들은 독방을 사용했으며, 다른 방들은 도서관이나 예배당으로 활용되었다. 수감자들은 매일 정해진 일과에 따라 생활했으며, 정원에서 채소를 재배하거나 실내에서 봉투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교도소 운영은 프랑스, 영국, 소련, 미국이 매달 교대로 담당했으며, 각 국가는 자체적인 규정을 적용했다. 특히 소련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여 다른 국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나치 시절의 권력 관계가 이어져 갈등과 반목이 존재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루돌프 헤스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수감자들은 외부와의 연락이 제한되었지만, 일부 직원들의 도움으로 비밀 통신을 유지하기도 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회고록을 집필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교도소 운영은 4개국이 매달 번갈아 담당했으며, 각 국가는 1년에 총 3개월을 담당했다.

담당 국가담당 월
영국1월, 5월, 9월
프랑스2월, 6월, 10월
소비에트 연방3월, 7월, 11월
미국4월, 8월, 12월


3. 1. 시설

교도소는 처음에는 수백 명의 수감자를 수용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여러 겹의 높은 벽과 철조망, 감시탑 등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벽돌 건물이였다.[4] 교도소 시설은 다음과 같았다.

  • 4.5m 높이의 벽[4]
  • 9m 높이의 벽[4]
  • 전기가 통하는 철조망이 얹어진 3m 높이의 벽[4]
  • 가시철선으로 된 벽[4]


또한, 기관총이 설치된 6개의 경비 초소에서 60명의 병사 중 일부가 24시간 경비 근무를 했다.[4]

수감자들이 모스 부호로 통신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수감자 독방 사이에 빈 독방을 남겨두었다.[4] 나머지 독방들은 교도소 도서관이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4] 독방은 길이 약 3m, 너비 약 2.7m, 높이 약 4m였다.[4]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특별한 곳은 정원이었다. 수용 인원이 적고 공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처음부터 수감자들에게 할당되었다. 수감자들은 다양한 식물을 심었는데, 카를 되니츠는 콩, 발터 푼크는 토마토, 알베르트 슈페어는 꽃을 심었다.

3. 2. 정원

수감자들의 관점에서 교도소에서 특별한 곳은 정원이었다. 수용 인원이 적고 공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처음부터 수감자들에게 할당되었다. 수감자들은 다양한 식물을 심었는데, 각자 선호도가 달랐다. 예를 들어, 카를 되니츠는 콩, 발터 푼크는 토마토, 알베르트 슈페어는 꽃을 심었다.[1]

수감자 수가 적었던 것에 비해 매우 넓었던 정원은 처음에는 각 수감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보통 채소를 재배하는 데 사용하는 작은 개인 텃밭으로 나뉘어 있었다. 되니츠는 강낭콩을, 푼크는 토마토를, 슈페어는 데이지를 좋아했지만, 소련 관리자는 나중에 한때 꽃을 금지했다.[1] 모든 농산물은 감옥 부엌에서 사용되어야 했지만, 수감자와 간수 모두 종종 이 규칙을 무시하고 정원의 산물을 즐겼다.[1] 감옥 규정이 느슨해지고 수감자들이 무관심해지거나 너무 아파서 자신의 밭을 관리할 수 없게 되자, 정원은 하나의 큰 경작지로 통합되었다.[1] 이것은 전직 건축가였던 슈페어에게 적합했는데, 그는 수감자 중 가장 젊고 활동적인 사람 중 한 명이었으며, 나중에 전체 부지를 길, 석가산 및 꽃밭이 있는 대규모 복합 정원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맡았다.[1] 비가 오는 날처럼 정원에 접근할 수 없는 날에는 수감자들은 본관 복도에서 함께 봉투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1]

3. 3. 4개국 공동 관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나치 전범들을 수용하기 위해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슈판다우 교도소를 공동으로 관리했다. 교도소 운영은 매달 교대로 이루어졌으며, 각 국가는 1년에 3개월씩 담당했다.

각 국가별 담당 월은 다음과 같다.

담당 국가담당 월
영국1월, 5월, 9월
프랑스2월, 6월, 10월
소비에트 연방3월, 7월, 11월
미국4월, 8월, 12월



연합군 통제 위원회 건물에 게양된 국기를 통해 당시 교도소를 관리하는 국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냉전 시기에도 슈판다우 교도소는 베를린 항공 안전 센터와 함께 4개국 공동 관리 체제를 유지했다.

3. 4. 교도소 규정 및 일상

알베르트 슈페어


슈판다우 교도소의 일상생활은 연합국(프랑스, 영국, 소련, 미국)이 수감자 도착 전에 미리 정해둔 복잡하고 엄격한 규정에 따라 진행되었다. 당시 다른 교도소와 비교해도 슈판다우의 규정은 매우 엄격했다. 수감자들은 가족에게 한 달에 한 페이지 편지를 쓸 수 있었고, 동료 수감자와 대화, 신문 구독, 일기 및 회고록 작성은 금지되었다. 가족 면회는 두 달에 한 번, 15분으로 제한되었으며, 자살 방지를 위해 밤에는 15분마다 독방에 불을 켰다.[4]

수감 초기, 일부 직원들의 도움으로 수감자들은 외부와 비밀리에 연락하는 방법을 마련했다. 이 연락은 검열을 받지 않았고, 양도 제한이 없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회고록 집필이 거부되자,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몰래 기록하여 외부로 빼돌렸고, 이는 훗날 베스트셀러 ''제3제국의 내부''로 출판되었다. 발터 푼크는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꼬냑을 구해 다른 수감자들과 나눠 마시기도 했다.

이후 많은 규정이 완화되거나 교도소 직원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프랑스, 영국, 미국 측 교도소장과 간수들은 이러한 엄격한 조치에 계속 항의했지만, 소련은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거부했다.[4]

매일 아침 6시, 수감자들은 기상, 세면, 독방 및 복도 청소를 하고 아침 식사를 했다. 날씨가 좋으면 정오까지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고, 점심 식사 후 독방에서 휴식한 뒤 다시 정원으로 나갔다. 오후 5시에 저녁 식사가 제공되었고, 이후 수감자들은 독방으로 돌아가 밤 10시에 소등했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는 면도와 이발을, 매주 월요일에는 세탁을 했다. 이러한 일과는 수년간 거의 변동이 없었지만, 각 관리 국가는 자체적으로 규정을 해석했다.

수감자들에게 특별한 공간은 정원이었다. 넓은 정원은 처음에는 각 수감자 텃밭으로 나뉘어 카를 되니츠는 강낭콩, 발터 푼크는 토마토, 알베르트 슈페어는 데이지를 심었다. 규정상 모든 농산물은 교도소 주방에서 사용해야 했지만, 수감자와 간수들은 종종 이를 어기고 정원에서 수확한 것을 즐겼다. 규정이 느슨해지고 수감자들이 밭을 관리할 수 없게 되자, 정원은 하나의 큰 경작지로 통합되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정원 전체를 길, 석가산, 꽃밭이 있는 대규모 정원으로 바꾸는 작업을 맡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수감자들이 본관 복도에서 봉투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3. 5. 수감자 간 관계

나치 지도부 내의 권력 투쟁은 슈판다우 교도소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이어졌다. 알베르트 슈페어루돌프 헤스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외면받았는데,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비판했기 때문이고, 헤스는 비사교적인 성격과 불안정한 정신 상태 때문이었다.

에리히 레더카를 되니츠는 해군 원수 출신으로, 서로를 껄끄럽게 여기면서도 함께 행동했다. 이들은 감옥 도서관에서 각각 관장과 조수를 맡기도 했다. 발두르 폰 시라흐와 발터 펑크는 서로 친밀한 관계였다.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외교관 출신으로 모두에게 존경받았다.

수감자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진정한 화해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되니츠는 슈페어를 혐오했으며, 히틀러가 슈페어의 추천으로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믿었다.[5]

슈페어는 수감 생활 동안 엄격한 일과를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회고록과 일기 등 많은 글을 썼다. 이 글들은 비밀리에 반출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건축가로서 감옥 정원을 개조하기도 하고, "세계 여행"을 상상하며 정원을 돌기도 했다.

에리히 레더


카를 되니츠


레더와 되니츠는 "제독 각하들"이라 불리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레더는 도서관 관장, 되니츠는 조수를 맡았다. 되니츠는 자신이 여전히 독일의 국가 원수라고 생각했고, 레더는 다른 수감자들의 태도를 경멸했다. 되니츠는 석방 후 정계 복귀를 꿈꿨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1945년 뉘른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된 루돌프 헤스. 슈판다우 교도소의 마지막 수감자였다.


루돌프 헤스는 '슈판다우에서 가장 게으른 남자'로 불렸으며, 잡일 등을 피했다.[7] 그는 건강염려증을 앓았고, 음식을 의심했다. 뢰더, 되니츠, 시라흐는 헤스를 경멸했지만, 슈페어와 펑크는 그에게 관대했다. 헤스는 밤에 고통을 호소하며 다른 수감자들의 수면을 방해하기도 했다.

4. 논란과 비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나치 전범들을 수용하기 위해 연합국이 관리했던 슈판다우 교도소는, 7명의 전범을 위해 과도한 시설과 인력이 투입되면서 운영 비용 문제가 제기되었다.[1] 수감자 수가 감소하고 특히 1966년 알베르트 슈페어와 발두르 폰 시라흐가 석방된 후 루돌프 헤스만 남게 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수감자 처우 또한 논란의 대상이었다. 연합국 4개국은 교도소 운영에 대해 합의했지만, 소련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여 수감자들에게 엄격한 규정을 적용했다. 편지, 대화, 신문, 면회 등이 제한되거나 금지되었고, 밤에는 자살 감시를 위해 독방에 조명이 비춰졌다.[4] 서방 연합국은 이러한 조치에 반대했지만,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규정 완화는 쉽지 않았다.

루돌프 헤스는 복역 중 전기 코드로 목을 매 자살했지만, 유족은 사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이러한 상황은 루돌프 헤스를 네오나치들에게 순교자로 추앙받게 만들었다.

4. 1. 과도한 운영 비용

연합국은 1946년 11월에 슈판다우 교도소를 징발하여 100명 이상의 전범을 수용할 것으로 예상했다. 감옥 안이나 주변에는 60명 정도의 군인이 근무했고, 그 외에도 4개국 출신 전문 민간 교도관, 교도소장 4명과 부소장 4명, 군의관 4명, 요리사, 통역관, 웨이터, 운반원 등이 배치되었다. 이는 자원의 심각한 오용으로 인식되었고, 교도소장, 각국 정치인, 특히 슈판다우 운영 비용을 부담해야 했지만 자체 교정 시스템 공간 부족에 시달렸던 서베를린 정부 사이에서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었다.[1] 이처럼 큰 공간에 많은 비용과 보조 인력을 들여 7명의 전범을 수감하는 것에 대한 논쟁은 수감자들이 석방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1]

1966년 슈페어쉬라흐가 석방된 후, 슈판다우에는 헤스 한 명만 남게 되면서 감옥 과소 이용 문제가 최고조에 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감자들을 다른 더 큰 감옥의 적절한 크기 병동으로 이전하거나, 석방 후 가택연금하는 방안 등이 수년 동안 고려되었다. 그러나 미결 수감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공식적인 명령이 있었고, 결국 감옥은 7명의 전범만을 위해 독점적으로 사용되었다.[1]

4. 2. 수감자 처우 문제

슈판다우 교도소의 생활은 연합국(프랑스, 영국, 소련, 미국)이 정한 엄격한 규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당시 다른 교도소와 비교했을 때 매우 엄격했는데, 수감자들은 편지, 대화, 신문, 일기, 회고록 등이 제한되거나 금지되었고, 가족 면회도 두 달에 15분으로 제한되었다. 밤에는 자살 감시를 위해 15분마다 독방에 조명이 비춰졌다.[4]

서방 연합국 교도소장과 간수들은 이러한 엄격한 조치에 지속적으로 반대했지만, 소련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소련은 전쟁 중 자국 민간인 희생이 컸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수감자 전원의 사형을 주장했기 때문에 서방과의 타협을 꺼렸다. 또한, 자본주의 세력의 탈나치화 노력이 부족하다는 공산당 선전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4]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규정은 완화되거나 교도소 직원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수감자들은 동정적인 직원들의 도움으로 외부와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알베르트 슈페어는 이를 통해 회고록을 집필하여 출판했고, 카를 되니츠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편지를 썼다. 발터 펑크는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꼬냑을 구해 다른 수감자들과 나눠 마시기도 했다.

1947년 7월 18일,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전범 7명이 슈판다우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수감 번호로 불렸으며, 초기에는 독방에 수감되었다.

수감자 번호이름나치 시대 직책판결석방사망주석
1발두르 폰 시라흐제국 청소년 지도자 및 제국 총독20년1966년 10월 1일1974년 8월 8일형기 만료
2카를 되니츠해군 원수, 해군 총사령관, 1945년 5월 마지막 제국 대통령10년1956년 10월 1일1980년 12월 24일형기 만료
3콘스탄틴 폰 노이라트1932년부터 1938년까지 제국 외무장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총독15년1954년 11월 6일1956년 8월 14일건강상의 이유로 조기 석방
4에리히 레더해군 원수, 1943년 1월 30일까지 해군 총사령관종신1955년 9월 26일1960년 11월 6일건강상의 이유로 조기 석방
5알베르트 슈페어무기 탄약 장관, 제국 수도 건설 총감20년1966년 10월 1일1981년 9월 1일형기 만료
6발터 펑크제국 경제 장관, 제국 은행 총재종신1957년 5월 16일1960년 5월 31일건강상의 이유로 조기 석방
7루돌프 헤스1941년까지 총통 대리종신1987년 8월 17일1987년 8월 17일복역 중 사망(자살)



수감자들은 나치 지도부 내의 권력 투쟁과 라이벌 관계에 따라 그룹을 형성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루돌프 헤스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외면받았는데, 알베르트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히틀러를 비판했고, 루돌프 헤스는 비사교적인 성격과 불안정한 정신 상태 때문이었다. 해군 원수였던 에리히 레더카를 되니츠는 항상 함께 다녔고, 발두르 폰 시라흐와 발터 펑크는 "둘도 없는 친구"로 평가받았다.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외교관 출신으로 모두에게 존경받았다.

루돌프 헤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가장 오랫동안 복역했다. 그는 "슈판다우에서 가장 게으른 자"로 불렸으며, 잡초 제거와 같은 노역을 피했다. 편집증적인 심기증 기질로 항상 여러 질병을 호소했고, 독살을 두려워하여 가장 멀리 있는 음식을 집었다. 다른 수감자들은 루돌프 헤스의 행동을 경멸했지만, 알베르트 슈페어는 그를 돌보며 코트를 덮어주고 옹호하기도 했다. 루돌프 헤스는 1969년에 이르러서야 가족 면회가 허락되었고, 유일한 수감자가 되자 교도소장들은 그의 정신 상태를 우려하여 대부분의 규칙을 완화했다.

루돌프 헤스는 복역 중 전기 코드로 목을 매 자살했지만, 유족은 사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이러한 상황은 루돌프 헤스를 네오나치들에게 순교자로 추앙받게 만들었다.

4. 3. 헤스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

루돌프 헤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된 다른 수감자들과 달리 끝까지 석방되지 않아 가장 오랫동안 복역한 수감자였다. 그는 "슈판다우에서 가장 게으른 자"로 불리며 잡초 제거와 같이 자신의 품위에 맞지 않는다고 여긴 모든 노역을 피했다. 일요일 미사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편집증적인 건강염려증 때문에 항상 여러 가지 질병, 특히 위통을 호소했다. 제공되는 모든 음식에 의혹을 품고 자신의 자리에서 가장 멀리 있는 접시를 집었는데, 이는 독살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7]

다른 수감자들은 헤스의 행동을 경멸하며, 관심을 끌거나 일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그러나 알베르트 슈페어와 발터 펑크는 헤스에게 관대했다. 슈페어는 헤스를 돌보며 다른 수감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헤스가 밤중에 고통 때문에 소리를 지르면 교도소 의사로부터 "진정제" 주사를 맞는 경우가 있었는데, 사실 이것은 단순한 생리식염수 주사였지만 효과가 있었다. 헤스는 슈페어와 접촉할 때만 정신 상태가 좋았고, 교양 있고 예의 바르며, 항상 입에 올리던 정신의학적 반응은 잊은 듯했다.[7]

헤스는 20년 이상 면회를 거부하다가 1969년에 이르러서야 아내와 이미 성인이 된 아들을 만났다. 헤스가 유일한 수감자가 되자, 교도소장들은 그의 정신 상태를 우려하여 대부분의 규칙을 완화했다. 예배당이었던 넓은 방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되었고, 차나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전기 주전자가 제공되었다. 방은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고, 세탁실과 도서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7]

헤스는 복역 중 전기 코드로 목을 매 자살했다. 그러나 유족은 두 차례의 부검 결과와 모순되는 점이 있다며 사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은 결국 나치즘에 대한 명백한 신앙고백으로 간주되었고, 헤스는 네오나치들에게 순교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래서 매년 헤스가 사망한 날에는 이러한 종류의 단체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유진 버드 미군 장교는 1964년부터 1972년까지 미군 감옥 사령관이었다. 1972년 루돌프 헤스와 함께 헤스에 관한 책을 집필했는데, 이는 규칙 위반이었기 때문에 버드는 곧 해임되었다. 1987년 헤스가 사망하자, 자살이라는 공식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선두에 섰다.

5. 대중문화 속 슈판다우 교도소

영국 밴드 스판다우 발레(Spandau Ballet)는 밴드의 친구이자 기자, DJ인 로버트 엘름스(Robert Elms)가 베를린 나이트클럽 화장실 벽에 낙서된 'Spandau Ballet'이라는 글자를 보고 밴드 이름을 지었다.[8] 이 낙서는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사용된 교수형 방법으로 인해 사형수가 줄 끝에서 경련하며 "춤을 추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9] "타이번 춤"(dancing the Tyburn jig)과 같은 교수대 유머 표현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10]

이 교도소는 루돌프 헤스(Rudolf Hess)를 납치하는 가상의 용병 집단 이야기를 다룬 1985년 영화 ''와일드 기스 2(Wild Geese II)''에 등장한다. 또한 그렉 아일스(Greg Iles)의 책 ''슈판다우 피닉스''(Spandau Phoenix)에도 등장하는데, 이 책은 헤스와 슈판다우 교도소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하인리히 브렐레어 감독의 시리즈 『Speer und erde』 3부 "슈판다우 – 처벌 (Spandau – Die Strafe)"에서는 감옥 내부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영화 『와일드 기스 II』(1985년, 미국, 액션 영화)에서는 헤스의 슈판다우 감옥에서 용병들이 탈옥하는 것을 그리며, 헤스 역은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기했다. 영화 『Inside Out (1975 film)|인사이드 아웃영어』(1975년, 영미 합작)에서는 나치의 금괴 은닉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테리 사발라스와 제임스 메이슨이 헤스의 감옥 탈출을 시도한다.

참조

[1] 뉴스 Hess's body exhumed and grave destroyed to stop neo-Nazi pilgrimages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2011-07-22
[2] 간행물 BRIXMIS in the 1980s: The Cold War's 'Great Game www.php.isn.ethz.ch Parallel History Project on Cooperative Security (PHP)
[3] 서적 Tales from Spandau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Florida
[4] 웹사이트 World War II: Combatants and Casualties http://web.jjay.cuny[...]
[5] 서적 The Spandau Diaries https://archive.org/[...] Macmillan
[6] 웹사이트 Minutes of the meetings of the physicians of the Spandau Allied Prison 1947–1987 http://oculus.nlm.ni[...] National Library of Medicine
[7] 서적 Prisoner #7: Rudolf Hess
[8] 서적 #추정
[9] 서적 #추정
[10] 서적 #추정
[11] 서적 Werner Scholem - eine politische Biographie (1895-1940) UVK Konst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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