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와타노 야부시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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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와타노 야부시라즈는 일본 지바현 이치카와시에 위치한 숲으로, 예로부터 출입이 금지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에도 시대 문헌에서 언급되며, 숲에 얽힌 다양한 전설이 존재한다. 야마토타케루, 타이라노 마사카도 등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설화, 독가스 발생설, 미토 고몬의 숲 방문 일화 등이 전해진다. 이러한 전승은 숲을 경외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현재까지도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야와타노 야부시라즈는 "미로"나 "출구를 알 수 없는 것"을 비유하는 관용구로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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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와타노 야부시라즈 | |
|---|---|
| 위치 정보 | |
| 기본 정보 | |
| 종류 | 금족지, 신역 |
| 소재지 | 일본 지바현이치카와시 야와타 4-13-17 |
| 좌표 | 35°43′35.3″N 139°55′16.8″E |
| 상세 정보 | |
| 금기 | 입산금지 벌채 금지 건물 건설 금지 |
| 면적 | 약 1,900m² (570평) |
| 특징 | 대나무 숲 미로와 같은 구조 |
| 전승 | 한 번 들어가면 길을 잃고 나올 수 없게 된다. 재앙이 닥친다. |
| 관리 | 인접한 가와라기 신사에서 관리 |
| 역사 | |
| 기원 | 불명 |
| 추정 시기 | 무로마치 시대 말기 ~ 센고쿠 시대 |
| 관련 인물 | 다이라노 마사카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도쿠가와 이에야스 |
| 에피소드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길 안내를 부탁했으나, 마을 주민 누구도 숲에 들어가지 못해 안내할 수 없었다. |
| 문화재 정보 | |
| 지정 종류 | 이치카와시 지정 사적 |
| 지정일 | 1972년 3월 17일 |
| 시설 정보 | |
| 시설 명칭 | 가와라기 신사 (葛飾八幡宮) 내 부지 |
| 웹사이트 | 가와라기 신사 공식 웹사이트 |
2. 유래
야와타노 야부시라즈 전승은 에도 시대의 문헌에서부터 이미 볼 수 있는데, 에도 시대 이전부터 전승이 존재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또 왜 이 땅이 출입금지 구역이 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단일한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인근 사람들은 이 숲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도 들어가는 것은 금기시된다.
전승 유래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들이 있다.
- 야마토타케루의 영소라는 설[2]
- 타이라노 요시마사의 묘소라는 설
-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묘소라는 설
-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가신의 묘소라는 설 - 이 땅에서 마사카도의 목을 계속 지키며, 그대로 진흙 인형이 되었다고 한다. 간엔 2년(1749년)에 쓰여진 『가쓰시카기』에는, 쳐진 마사카도가 이 땅을 지날 때 따르던 하인 6명이 흙 인형으로 나타나, 풍설에 의해 흙으로 변했다고 한다.
- 마사카도가 조정군과 싸웠을 때, 마사카도 군의 귀문에 해당되는 장소였다는 설[2]
- 마사카도 정벌을 위해 펼쳐진 팔진법의 흔적 설 - 진을 펼친 타이라노 사다모리와 후지와라노 히데사토가 난 평정 후 귀경할 때, 지역 주민들에게 "이 장소는 팔문둔갑의 사문(천지의 귀신이 각 방위를 순환하여 생사를 한다는 신앙에 근거한 8개의 문 중 하나[3])이므로, 앞으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발을 들인 자에게는 반드시 해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설[2][4]
- 그 외, 옛 호족 · 귀족의 묘소라고 하는 설

- 도쿠가와 미츠쿠니(미토 고몬)이 길을 잃고 나오지 못했다는 설
- : 미토 고몬이 전승을 듣고, 어리석은 이야기라고 이 땅에 들어갔는데,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경고를 어기고 들어오다니 무슨 일이냐, 너는 귀인이니 죄는 용서하지만, 이후 경고를 어겨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전승[2]。후에 니시키에에 그려져 널리 퍼졌다.[2]
- 숲 중앙부의 움푹 파인 곳에서 독가스가 나온다는 설[5]
- 숲에 밑 빠진 늪이 있다는 설
- 카치스카 하치만 궁의 옛터 설
- : 지근에 있는 가쓰시카 하치만 궁의 구지라는 설 - 분카 7년 (1810년) 간행의 『가쓰시카 지략』에는, 지역의 노인의 이야기로는 가천궁(본전 낙성 동안이나 사전 개축 공사 동안, 신체를 옮겨 두는 임시 사전)이었다고 한다.
- 인근 교토쿠 마을의 비지(입회지) 설
- : 지역인 야와타의 주민은 이 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전설이 생겼다는 설[2]。
이러한 위인 관련설은 모두 해당 인물이 평안히 잠들도록 출입금지가 된 것으로 있다. 그러나 이설도 많다.
2. 1. 위인 관련 설
야와타노 야부시라즈 전승은 에도 시대 문헌에서부터 나타나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땅이 출입금지 구역이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인근 사람들은 이 숲에 경외감을 느껴 현재도 들어가는 것을 금기시한다.[2]전승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 야마토타케루의 영소라는 설[2]
- 타이라노 요시마사의 묘소라는 설
-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묘소라는 설
-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가신의 묘소라는 설. 이 땅에서 마사카도의 목을 계속 지키며 진흙 인형이 되었다고 한다. 간엔 2년(1749년)에 쓰여진 『가쓰시카기』에는, 쳐진 마사카도가 이 땅을 지날 때 따르던 하인 6명이 흙 인형으로 나타나, 풍설에 의해 흙으로 변했다는 기록이 있다.
- 마사카도가 조정군과 싸웠을 때, 마사카도 군의 귀문에 해당되는 장소였다는 설[2]
- 마사카도 정벌을 위해 펼쳐진 팔진법의 흔적이라는 설. 진을 펼친 타이라노 사다모리와 후지와라노 히데사토가 난 평정 후 귀경할 때, 지역 주민들에게 "이 장소는 팔문둔갑의 사문(천지의 귀신이 각 방위를 순환하여 생사를 한다는 신앙에 근거한 8개의 문 중 하나[3])이므로, 앞으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발을 들인 자에게는 반드시 해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설[2][4]
이러한 위인 관련 설은 모두 해당 인물이 평안히 잠들도록 출입금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묘소나 진야터의 비정지에는 이설도 많다.
- 옛날 호족의 무덤이라는 설
- 미토 고몬(도쿠가와 미츠쿠니)이 들어갔다 헤매고 출입금지로 지정했다는 설. 미토 고몬이 전승을 듣고 어리석은 이야기라며 이 땅에 들어갔는데,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경고를 어기고 들어오다니 무슨 일이냐, 너는 귀인이니 죄는 용서하지만, 이후 경고를 어겨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전승이 니시키에에 그려져 널리 퍼졌다.[2]
- 숲 중앙의 요지에서 독가스가 나온다는 설.[5] 그러나 과학적 근거는 없다.
- 숲의 바닥이 모래늪처럼 꺼지는 땅이라는 설.
- 인근의 카치스카 하치만 궁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 중앙의 요지가 죽은 동물을 공양하는 연못이었는데 "함부로 연못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가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이 없어지고 연못도 말라버려서 맥락없이 "들어가면 안된다"만 남아버렸다는 설이다.
- 인근 교토쿠 마을의 비지(입회지) 설. 지역인 야와타의 주민은 이 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전설이 생겼다는 설이다.[2]
2. 2. 기타 설
야와타노 야부시라즈가 출입금지 구역이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인근 사람들은 이 숲을 경외하며 현재도 출입을 금기시한다. 에도 시대 이전부터 전승이 존재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전승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 야마토타케루의 영소라는 설[2]
- 타이라노 요시마사의 묘소라는 설
-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묘소라는 설
-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가신의 묘소라는 설 - 이 땅에서 마사카도의 목을 계속 지키며 진흙 인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마사카도가 조정군과 싸웠을 때, 마사카도 군의 귀문에 해당되는 장소였다는 설[2]
- 마사카도 정벌을 위해 펼쳐진 팔진법의 흔적이라는 설[2][4]
이러한 위인 관련설은 모두 해당 인물이 평안히 잠들도록 출입금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설도 많다.
- 옛 호족의 무덤이라는 설
- 미토 고몬(도쿠가와 미츠쿠니)이 숲에 들어갔다가 헤매고 나와 출입금지로 지정했다는 설 - 백발 노인이 나타나 경고를 어기고 들어온 미토 고몬을 꾸짖고, 이후 출입을 금지했다는 전승이 니시키에에 그려져 널리 퍼졌다.[2]
- 숲 중앙의 요지에서 독가스가 나온다는 설[5] (과학적 근거는 없다)
- 숲 바닥이 모래늪처럼 꺼지는 땅이라는 설
- 인근의 카치스카 하치만 궁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 - 중앙의 요지가 죽은 동물을 공양하는 연못이었는데, "함부로 연못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가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이 없어지고 연못도 말라버려서 "들어가면 안된다"는 경고만 남았다는 설이다.
- 인근 교토쿠 마을의 비지(입회지) 설 - 지역 주민인 야와타 사람들은 이 땅에 들어갈 수 없어 이러한 전설이 생겼다는 설이다.[2]
3.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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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세기의 변천
에도 시대의 지지(地誌)에서 야와타노 야부시라즈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 초기에는 다이라노 마사카도나 야마토타케루와 연결되어 설명되었으며, 1814년 (분카 11년)에 쓰여진 『유력잡기』에서 미토 고몬 설화가 추가되었다.[6][7]
- 1749년 (간엔 2년) 『가쓰시카기』
- 1765년 (메이와 2년) 『가네가사쿠 기행』
- 1810년 (분카 7년)경 『가쓰시카 시략』
- 1813년 (분카 10년) 『가쓰시카 지도 수로주』
- 1814년 (분카 11년) 『유력잡기』
- 1823년 (분세이 6년) 『후나바시 기행』
- 1829년 (분세이 12년) 『에도 명소도회』 서
- 1835년 (덴포 5년) 『가료 기행』
- 1846년 (고카 3년) 『시모후사 명승도회』
- 1854년 (가에이 7년) 『진노산 일기』
- 1858년 (안세이 5년) 『나리타 산케이키』
미토 고몬 설화는 호레키 연간 (1751년 - 1764년) 전후에 성립된 실록 소설 『미토 고몬 인덕록』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8] 또한, 반야심경의 주석서인 『반야심경 그림 입고석』에도 야부시라즈 설화가 수용되어 "석의 정념"이라는 승려가 야부시라즈에 발을 들여놓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9]
에도 시대에는 이 숲을 본떠 미궁식의 야부를 만들어 입장료를 받고 들어가게 하여 무사히 나온 사람에게 상품을 주는 흥행장이 나타난 적이 있었다.[10]
5. 근대 이후의 전개

메이지 10년경(1877년경)에는 미궁식 흥행장이 부활하여 크게 유행했다.[10] 이러한 미로는 야와타노 야부시라즈 외에, 팔진(八陣), 가쿠레스기 등으로 불렸다.[10] 메이지 11년에는 가부키로 『황문기 야와타 대수풀』[11]이 상연되었다.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니시키에(錦絵)는 이 흥행 팜플렛에 게재된 것이다.
다이쇼 12년의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군지』[12]에는 야부시라즈에 대한 일곱 가지 정도의 설이 소개되어 있다.
구전 문예 자료로는 『이치카와의 옛날 이야기』(1980년), 『속・이치카와의 옛날 이야기』(1990년), 『이치카와의 전승 민화』(1992년)[13], 『개정 신판・이치카와의 옛날 이야기』(2012년) 등이 있다.[7]
6. 관용구
전승이 유명해지면서, "야와타노 야부시라즈"는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숲이나 미로"를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것이 더 나아가 "길을 잃는 것", "출구를 알 수 없는 것"을 "야와타노 야부시라즈" 또는 "야와타시라즈"라고 부르게 되었다.[14]
7. 접근성
소부 본선 및 도영 신주쿠선 모토야와타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으며, 게이세이 본선 게이세이 야와타역에서도 도보로 5분 거리에 야와타노 야부시라즈가 위치하고 있다.
참조
[1]
문서
江戸崎出身の江戸商人
https://web.archive.[...]
[2]
웹사이트
葛飾八幡宮と文化財
https://www.city.ich[...]
市川市公式Webサイト
2021-07-21
[3]
Kotobank
八門遁甲
2022-04-02
[4]
문서
千葉県 不知八幡森
https://dl.ndl.go.jp[...]
田山宗尭、ともゑ商会
明治45年
[5]
문서
この説は「底なし沼」説と共に『千葉県東葛飾郡誌』(千葉県東葛飾郡教育会 編、1923)が掲げている。
[6]
학술지
初編上巻三十二「やはたしらずの藪の事実」
https://iss.ndl.go.j[...]
2003-04
[7]
웹사이트
八幡のやぶ知らず
https://www.city.ich[...]
市川市中央図書館
2021-02-22
[8]
서적
近世実録全書
https://iss.ndl.go.j[...]
早稲田大学出版部
1929
[9]
학술지
翻刻・『般若心經繪入講釋』「無〔ケイ〕碍故無有恐怖」(八幡不知森説話)
https://iss.ndl.go.j[...]
2003-04
[10]
문서
八幡不知の大流行
https://dl.ndl.go.jp[...]
相馬二郎 著(金竜堂出版部、1938)
[11]
웹사이트
黄門記八幡大藪・新形蒔絵護謨櫛・後開榛名曙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1-02-21
[12]
서적
千葉県東葛飾郡誌
https://iss.ndl.go.j[...]
東葛飾郡教育会
1923
[13]
서적
市川の伝承民話
https://iss.ndl.go.j[...]
市川市教育委員会
1992
[14]
문서
『言泉』(大倉書店、1927 - 1929)や『[[広辞苑]]』などの辞書にもそのまま収載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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