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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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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광 김씨는 경순왕의 후예인 김심언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영광을 본관으로 하며, 김심언은 고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 등을 역임했다. 김보당의 난으로 계대가 실전되어 후손들이 각 파조를 1세조로 하여 영광을 관향으로 삼았다. 주요 인물로는 김극검, 김보당, 김필, 김광원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영광 김씨는 여러 파로 분파되었으며, 과거 급제자 12명을 배출했다. 집성촌은 전라남도, 충청남도, 울산광역시, 경기도 등에 분포하며, 인구는 2015년 기준 38,33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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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자 표기靈光金氏
나라한국
관향전라남도 영광군
시조김심언(金審言)
원시조김알지(金閼智)
집성촌전라남도 영광군
장흥군
충청남도 태안군
2015년 인구38,338명
주요 인물

2. 역사

시조 '''김심언'''(金審言)은 경순왕의 후예로, 정주(靜州. 영광의 별호) 영광현(靈光縣) 사람으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현종 대에 예부상서・상서내사시랑평장사(尙書內使侍郞平章事)거쳐 서경유수(西京留守)를 지냈다. 문안공(文安公)의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오성군(筽城君 : 영광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김심언990년(성종 9) 상소문 <봉사 2조(封事二條)>를 올려 성종 때 본격화되는 유교적 정치이념 구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상시(常侍) 최섬(崔暹)의 사위이며 제자이다.[1][2]

후손 동북면병마사인 김보당(金甫當)이 1173년 의종 복위 거사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멸족의 화를 당해 중간계대(中間系代)가 실전(失傳)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각 파조를 1세조로 하고 영광을 관향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고려조에 공조전서(工曺典書)를 역임한 '''김태용'''(金台用)을 시조로 한다. 그는 상서내사시랑 평장사(平章事) 김심언(金審言)의 후예라 한다.

《김씨 분관록》·《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는 시조가 김태용(金台用)으로 고려조에 공조전서(工曺典書)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그는 상서내사시랑 평장사(平章事) 김심언(金審言)의 후예라 한다.

2. 1. 시조

고려조에 공조전서(工曺典書)를 역임한 '''김태용'''(金台用)을 시조로 한다. 그는 상서내사시랑 평장사(平章事) 김심언(金審言)의 후예라 한다.

2. 2. 중시조

《김씨 분관록》·《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는 시조가 김태용(金台用)으로 고려조에 공조전서(工曺典書)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그는 상서내사시랑 평장사(平章事) 김심언(金審言)의 후예라 한다.

3. 본관

영광(靈光)은 전라남도 북서부 해안에 인접한 지명이다. 백제 때의 무시이군(武尸伊郡)을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에 무령군(武靈郡)으로 고쳤다가, 고려초 940년(태조 23)에 영광군으로 바뀌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영광군이라 했다. 영광(靈光)의 별호를 '정주'(靜州)라 하였다.

4. 분파

영광 김씨는 김정보(金鼎輔)를 파조로 하는 경파(京派), 김연(金衍)을 파조로 하는 영광파(靈光派), 김태용(金兌鏞)을 파조로 하는 장흥파(長興派), 김효민(金孝敏)을 파조로 하는 문장파(文章派), 김광찬(金光贊)을 파조로 하는 양사파(楊泗派), 김중보(金重寶)를 파조로 하는 용강파(龍岡派), 김무수(金茂壽)를 파조로 하는 삼화파(三和派), 김문경(金文卿)을 파조로 하는 강계파(江界派) 등으로 분파되었다.

5. 인물

wikitext

김행경은 김극검의 조부로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를 역임했다. 김수녕은 김극검의 아버지로, 추봉 장사랑 전중성 내급사를 지냈다. 김극검(1068년 ~ 1139년)은 조부 김행경의 덕으로 음서로 벼슬에 진출하여 감찰어사,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를 역임하고, 고려 인종 때 태자소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기열이다.

김보당은 고려 중기 문신으로, 우간의대부, 공부시랑을 지냈으며, 이세연의 딸과 혼인하였다. 동북면병마사로서 무신정권을 전복시키고 귀족정치로 환원하려고 경주에서 정치적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죽임을 당했다. 김지당은 합문지후, 상서예부낭중을 역임했으며, 부인은 최윤의의 둘째 딸이다.

김정부는 김극검의 후손으로 금오위별장을 지냈으며, '''경파'''의 중시조이다. 김연은 김극검의 후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도판서를 지냈으며, '''영광파'''의 중시조이다. 김지는 고려 공민왕 11년(1362년) 문과에 급제하여 당후관을 지냈다. 김사민은 창왕 즉위년(1388년)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를 지냈다.

김태용은 김극검의 후손으로 공조전서를 지냈으며, '''장흥파'''의 중시조이다. 김효민은 김극검의 후손으로 내사시랑을 지냈으며, '''무장파'''의 중시조이다.

영광 김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김덕생(金德生)은 김태용의 후손으로 무과 출신이며 벼슬이 좌영호군(左領護軍)이었고, 사후 동지중추원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시(金時)는 감무를 지냈고, 김경의(金敬義)는 평강 현감을 역임했다. 김찬(金璨)은 김경의의 아들로 홍문관 전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김필(金㻶, 1426~1470)은 김찬의 동생으로, 세종 ~ 성종 때의 문신이다. 1447년(세종 29) 식년시에 합격하여 이조 낭청 등을 역임하다가, 1453년(단종 1)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장흥으로 낙향했다. 이후 조정에 복귀하여 1457년(세조 3) 중시에 합격하고 사헌부감찰, 이조정랑, 의정부 사인, 호조참의, 중추부 동지사, 충청·경기 관찰사 등을 지냈다.

김괴(金塊, 1450~1482)는 김필의 장자로, 예종 ~ 성종 때의 문신으로 남효온과 교유했으며 봉사, 사간원 헌납 등을 지냈다. 김물(金勿)은 김필의 차자로, 성종 때의 문신이다. 전한, 사간원 헌납, 1489년(성종 20)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등을 지냈다. 김광원(金光遠, 1478~1550)은 김괴의 아들로, 호는 월봉(月峰)이며, 조광조의 문인이다. 중종 ~ 명종 때의 학자로, 홍문관 습독관을 지냈으며, 기묘사화조광조가 사사되자 장흥에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장흥 예양서원(汭陽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우윤(金友尹)은 1572년(선조 5) 별시 병과에 합격하여 문한관, 공조좌랑, 목사를 지냈으며, 파직된 후 고향 영광에서 독서에 열중했다. 김의정(金義精)은 1450년(문종 즉위년) 식년시 을과에 합격하여 현감을 지냈다. 김상은(金相殷, 1652~ ?)은 1679년(숙종 5)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현감을 지냈다. 김해(金該)는 지갑산군사를 지내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개(金漑)는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지평을 지냈으며, 중종반정 운동을 펼쳐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지조 있는 삶을 살았고, 효행과 학문이 뛰어나 장성 수산사(水山祠)에 배향되었다.

김한로(金漢老, 1646~1687)는 1675년(숙종 1)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직강을 역임했다. 김상은(金相殷, 1652~?)은 1679년(숙종 5)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현감을 역임했다. 김중태(金重泰, 1663~1735)는 1690년(숙종 16)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찰방을 역임했다. 김급(金汲, 1661~?)은 1711년(숙종 37)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전한을 지냈다. 김성유(金聖猷, 1711~?)는 1756년(영조 32) 정시 갑과에 장원 급제했으며, 호가 운산(雲山)이고 관서 삼화부(關西 三和府) 사람이다. 김한목(金漢穆, 1865~1934)은 호가 탁신재(濯新齋)이며, 월봉(月峰) 김광원(金光遠)의 후손이다. 노사 기정진, 면암 최익현의 제자로, 장성 물매 마을에 소요암(逍遙菴)이라는 초당을 짓고 도학(道學)을 닦으며 수행에 전념했다.

항일 투쟁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김규철(金圭哲)이 있다. 의병 활동을 한 김규철은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군이었던 김문택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김준식(金駿植, 1888∼1969)은 탁신재(濯新齋) 김한목(金漢穆)의 아들로, 자는 언경(彦卿), 호는 동곡(東谷)이며, 경서, 사기, 백가서에 모두 통달하였다. 1930년대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하고 수련산에 들어가 초당을 건립하여 수백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으며, 장성 동강사(東江祠)에 배향되었다.

김문평(金汶枰, 1906~1987)은 제헌 국회의원(전남 여수갑)을 지냈으며, 장인은 김병로(金炳魯)이다. 김태정은 제48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김주훈조선대학교 제12대 총장과 국기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민환고려대학교 언론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대학교수 김승환은 전라북도교육감을 역임했다. 김성은 민선 6기 장흥군수를 역임했다. 김연식은 서울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이자 운강학원 이사장이다. 김규환은 안산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교수이다. 영화감독 김화라(1990~)가 있다.

5. 1. 고려

김행경은 김극검의 조부로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를 역임했다. 김수녕은 김극검의 아버지로, 추봉 장사랑 전중성 내급사를 지냈다. 김극검(1068년 ~ 1139년)은 조부 김행경의 덕으로 음서로 벼슬에 진출하여 감찰어사,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를 역임하고, 고려 인종 때 태자소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기열이다.

김보당은 고려 중기 문신으로, 우간의대부, 공부시랑을 지냈으며, 이세연의 딸과 혼인하였다. 동북면병마사로서 무신정권을 전복시키고 귀족정치로 환원하려고 경주에서 정치적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죽임을 당했다. 김지당은 합문지후, 상서예부낭중을 역임했으며, 부인은 최윤의의 둘째 딸이다.

김정부는 김극검의 후손으로 금오위별장을 지냈으며, '''경파'''의 중시조이다. 김연은 김극검의 후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도판서를 지냈으며, '''영광파'''의 중시조이다. 김지는 고려 공민왕 11년(1362년) 문과에 급제하여 당후관을 지냈다. 김사민은 창왕 즉위년(1388년)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를 지냈다.

김태용은 김극검의 후손으로 공조전서를 지냈으며, '''장흥파'''의 중시조이다. 김효민은 김극검의 후손으로 내사시랑을 지냈으며, '''무장파'''의 중시조이다.

5. 2. 조선

영광 김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3][4] 김덕생(金德生)은 김태용의 후손으로 무과 출신이며 벼슬이 좌영호군(左領護軍)이었고, 사후 동지중추원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서원에 배향되었다.[3][4] 김시(金時)는 감무를 지냈고, 김경의(金敬義)는 평강 현감을 역임했다. 김찬(金璨)은 김경의의 아들로 홍문관 전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김필(金㻶, 1426~1470)은 김찬의 동생으로, 세종 ~ 성종 때의 문신이다. 1447년(세종 29) 식년시에 합격하여 이조 낭청 등을 역임하다가, 1453년(단종 1)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장흥으로 낙향했다. 이후 조정에 복귀하여 1457년(세조 3) 중시에 합격하고 사헌부감찰, 이조정랑, 의정부 사인, 호조참의, 중추부 동지사, 충청·경기 관찰사 등을 지냈다.

김괴(金塊, 1450~1482)는 김필의 장자로, 예종 ~ 성종 때의 문신으로 남효온과 교유했으며 봉사, 사간원 헌납 등을 지냈다. 김물(金勿)은 김필의 차자로, 성종 때의 문신이다. 전한, 사간원 헌납, 1489년(성종 20)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등을 지냈다. 김광원(金光遠, 1478~1550)은 김괴의 아들로, 호는 월봉(月峰)이며, 조광조의 문인이다. 중종 ~ 명종 때의 학자로, 홍문관 습독관을 지냈으며, 기묘사화조광조가 사사되자 장흥에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장흥 예양서원(汭陽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우윤(金友尹)은 1572년(선조 5) 별시 병과에 합격하여 문한관, 공조좌랑, 목사를 지냈으며, 파직된 후 고향 영광에서 독서에 열중했다.[5] 김의정(金義精)은 1450년(문종 즉위년) 식년시 을과에 합격하여 현감을 지냈다. 김상은(金相殷, 1652~ ?)은 1679년(숙종 5)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현감을 지냈다. 김해(金該)는 지갑산군사를 지내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개(金漑)는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지평을 지냈으며, 중종반정 운동을 펼쳐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지조 있는 삶을 살았고, 효행과 학문이 뛰어나 장성 수산사(水山祠)에 배향되었다.

김한로(金漢老, 1646~1687)는 1675년(숙종 1)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직강을 역임했다.[6] 김상은(金相殷, 1652~?)은 1679년(숙종 5)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현감을 역임했다. 김중태(金重泰, 1663~1735)는 1690년(숙종 16)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찰방을 역임했다.[7] 김급(金汲, 1661~?)은 1711년(숙종 37)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여 전한을 지냈다. 김성유(金聖猷, 1711~?)는 1756년(영조 32) 정시 갑과에 장원 급제했으며, 호가 운산(雲山)이고 관서 삼화부(關西 三和府) 사람이다. 김한목(金漢穆, 1865~1934)은 호가 탁신재(濯新齋)이며, 월봉(月峰) 김광원(金光遠)의 후손이다. 노사 기정진, 면암 최익현의 제자로, 장성 물매 마을에 소요암(逍遙菴)이라는 초당을 짓고 도학(道學)을 닦으며 수행에 전념했다.

5. 3. 근·현대

항일 투쟁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김규철(金圭哲)이 있다. 의병 활동을 한 김규철은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군이었던 김문택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김준식(金駿植, 1888∼1969)은 탁신재(濯新齋) 김한목(金漢穆)의 아들로, 자는 언경(彦卿), 호는 동곡(東谷)이며, 경서, 사기, 백가서에 모두 통달하였다. 1930년대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하고 수련산에 들어가 초당을 건립하여 수백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으며, 장성 동강사(東江祠)에 배향되었다.

김문평(金汶枰, 1906~1987)은 제헌 국회의원(전남 여수갑)을 지냈으며, 장인은 김병로(金炳魯)이다. 김태정은 제48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김주훈조선대학교 제12대 총장과 국기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민환고려대학교 언론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대학교수 김승환은 전라북도교육감을 역임했다. 김성은 민선 6기 장흥군수를 역임했다. 김연식은 서울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이자 운강학원 이사장이다. 김규환은 안산대학교 건축디자인과 교수이다. 영화감독 김화라(1990~)가 있다.

6. 과거 급제자

영광 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2명을 배출하였다.[8]

7. 집성촌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용산면, 부산면 내안리, 금안리, 영광군 영광읍 월평리,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수산,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원청리, 신온리,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범서면 척과리,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석천리 등에 영광 김씨 집성촌이 있다.

8. 인구

1985년 영광 김씨는 6,689가구 28,443명이었다. 2000년에는 9,974가구 32,412명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에는 38,338명으로 조사되었다.

참조

[1] 서적 고려사 https://terms.naver.[...]
[2] 문서 봉사 2조(封事二條)
[3] 문서
[4] 문서
[5] 서적 국조방목(國朝榜目)
[6] 서적 국조방목(國朝榜目)
[7] 서적 국조방목(國朝榜目)
[8] 간행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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