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영국과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쟁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식민지 확장을 놓고 벌인 일련의 전쟁을 통칭한다. 이 전쟁들은 미국에서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 퀘벡에서는 식민지 간 전쟁으로 불리며, 유럽의 전쟁과 연관 지어 제2차 백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 내륙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전쟁으로는 윌리엄 왕 전쟁, 앤 여왕 전쟁, 더머 전쟁, 조지 왕 전쟁, 르 루트르 신부 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 등이 있다. 이 전쟁들은 유럽식 전술과 원주민 전술의 혼합으로 진행되었으며, 영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 제국은 축소되었고, 영국은 북미 지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협이 사라지자 영국 식민지들은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는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북아메리카의 역사 - 빈란드
빈란드는 라이프 에이릭손이 북아메리카 일부 지역에 붙인 이름으로, "포도주 땅" 또는 "목초지"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랑스 오 메도스 유적 발견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불확실하며, 사가 기록과 고고학적 발견에도 불구하고 여러 미스터리를 남기고 있다. - 북아메리카의 역사 - 프렌치 인디언 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1754년부터 1763년까지 북미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쟁탈을 벌인 전쟁으로, 7년 전쟁의 일부이며, 영국의 승리로 프랑스의 북미 영향력은 제거되었지만, 이는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 프랑스의 옛 식민지 - 세네갈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세네갈 공화국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 이슬람교를 배경으로 농업, 어업, 관광 등의 경제 부문을 기반으로 하며, 프랑스 식민 지배를 거쳐 독립 후 비교적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다중 언어 국가이다. - 프랑스의 옛 식민지 - 알제리
알제리는 아프리카 북부 마그레브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하라 사막을 포함한 국토를 가지고 있으며,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거쳐 독립했으며, 현재는 대통령 중심 공화국 체제이나 군부의 영향력이 큰 국가이다. - 아메리카의 옛 영국 식민지와 보호국 - 영국령 기아나
영국령 기아나는 17세기 초 네덜란드가 건설한 남아메리카 북부의 식민지를 영국이 점령하여 1831년 에세키보-데메라라와 베르비체가 통합되어 성립되었으며,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경제에서 다각화되었고, 노예 노동과 인도인 계약 노동에 기반한 사회 구조를 거쳐 1966년 가이아나로 독립하였으나 현재 주변국과 영토 분쟁이 남아있다. - 아메리카의 옛 영국 식민지와 보호국 - 그레나다
그레나다는 소앤틸레스 제도 최남단의 섬나라로,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쳐 독립 후 격변의 시기를 겪었으나 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하며 농업, 관광업, 특히 육두구 생산으로 유명하고 다양한 문화적 영향이 나타나는 나라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쟁 | |
---|---|
개요 | |
명칭 | 북미 식민지 전쟁 |
다른 명칭 | 프랑스-인디언 전쟁 (French and Indian War, 특히 북미에서의 네 번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유럽과 북미를 포함한 전 세계적 규모의 분쟁이라는 점에서) |
![]() | |
주요 정보 | |
기간 | 1688년 - 1763년 |
장소 | 북아메리카 |
원인 | 유럽 열강 간의 식민지 확장 경쟁 모피 교역 통제권 분쟁 종교적 갈등 |
결과 | 영국, 북아메리카 지배권 확립 프랑스, 북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 상실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의 독립 의식 고취 |
교전 세력 | |
영국과 동맹 세력 | 영국 아메리카 식민지 이로쿼이 연맹 |
프랑스와 동맹 세력 | 프랑스 아브나키족 휴런족 기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
주요 전쟁 | |
윌리엄 왕 전쟁 (1689년 - 1697년) | 유럽에서의 9년 전쟁과 동시 발생 북미 식민지 간 국경 분쟁 |
앤 여왕 전쟁 (1702년 - 1713년) | 유럽에서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동시 발생 아메리카 식민지, 영국, 프랑스 간의 분쟁 심화 |
조지 왕 전쟁 (1744년 - 1748년) | 유럽에서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동시 발생 북미 식민지 간의 영토 분쟁 지속 |
프랑스-인디언 전쟁 (1754년 - 1763년) | 유럽에서의 7년 전쟁과 동시 발생 영국, 북아메리카 지배권 확립 |
영향 | |
아메리카 독립 혁명 | 영국 정부의 식민지 정책 변화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 고조 아메리카 독립 전쟁 발발 |
2. 명칭
이 일련의 전쟁들은 미국에서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s)이라고 불린다. 퀘벡 주에서는 "식민지 간 전쟁"(Intercolonial Wars)이라고도 불린다. 일부에서는 유럽에서의 전쟁과 연관 지어 "제2차 백년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17세기 후반부터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 경쟁이 심화되었다. 양국은 서부 내륙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 네덜란드 등 다른 유럽 국가들도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쟁에 참여했지만,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 구도였다. 영국은 13개 식민지를 중심으로, 프랑스는 누벨프랑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로쿼이 연맹은 영국과, 와바나키 연맹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등, 원주민 부족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럽 열강과 협력하거나 대립했다.
3. 배경
전쟁이 진행되면서 군사적 우위는 인구와 생산능력, 해상 보급 능력에서 앞선 영국 측으로 기울었다. 프랑스는 원주민 동맹을 통해 이를 상쇄하려 했으나, 결국 네 번째 전쟁에서 압도당했다.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는 13개 미국 식민지의 상실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협이 사라지자 미국 식민지는 영국의 군사적 보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1763년 선언에 따른 영국의 식민지화 제한 정책에 불만을 품어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의 처음 세 차례 전쟁은 유럽에서 시작되어 북아메리카로 확산되는 패턴을 따랐으나, 마지막 분쟁은 북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은 정규군 투입을 늘렸고, 점령한 프랑스 영토를 거의 돌려주지 않았다. 프랑스는 캐나다와 루이지애나를 할양해야 했고, 프랑스의 신세계 제국은 생피에르 미클롱, 서인도 제도 섬, 프랑스령 기아나로 축소되었다.
4. 주요 전쟁
4. 1. 윌리엄 왕 전쟁 (1688-1697)
명예 혁명으로 영국의 왕(잉글랜드 국왕)이 된 윌리엄 3세는 1689년에 유럽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에 참가하면서 영·불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북미에서도 영국령 아메리카와 프랑스령 캐나다가 전쟁을 벌였으나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고 1697년의 레이스바이크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4. 2. 앤 여왕 전쟁 (1702-171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호응하여 시작된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쟁(1702년~1713년)으로, 영국군은 프랑스령 아카디아의 포트 로열을 점령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캐나다 동부의 뉴펀들랜드 섬과 허드슨 만 지역을 획득했다.
4. 3. 더머 전쟁 (1722-1725)
앤 여왕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분쟁으로, 뉴잉글랜드와 와바나키 연맹 간의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4. 4. 조지 왕 전쟁 (1744-1748)
유럽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호응하여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쟁이 1744년부터 1748년까지 벌어졌다. 뉴잉글랜드 식민지군은 캐나다 동부의 요충지인 루이부르 요새를 함락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아헨 조약에 의해 요새는 프랑스 측에 반환되었다. 어렵게 이룬 식민지군의 분투는 유럽 전체에서의 영국의 국익을 위해 무시된 셈이 되었다.
4. 5. 르 루트르 신부 전쟁 (1749-1755)
1749년, 영국인 정착민들이 핼리팩스를 설립하면서 미크마크 족과의 대립이 깊어졌다. 노바스코샤 주 지배를 위해 영국은 많은 요새를 건설했지만, 미크마크 족과 말리시트 족이 이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카디아와 노바스코샤를 둘러싼 이 전쟁에서, 미크마크 족과 와바나키 연합 및 그 동맹국 프랑스는 초기에 영국에 대해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최종적으로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다트머스 습격 (1749년)
생크루아 전투
다트머스 습격 (1751년)
모코돔 습격
1755년 6월 8일 해전
보세주르 요새 전투
4. 6. 프렌치 인디언 전쟁 (1754-1763)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유럽의 7년 전쟁 (1756년 - 1763년) 2년 전부터 북미에서 시작된 영불 식민지 전쟁 (1754년 - 1763년)이다. 초반에는 인디언과 동맹한 프랑스군이 우세했으나, 영국군이 퀘벡 시와 몬트리올을 점령하여 캐나다를 제압했다.
1762년, 비밀 조약인 퐁텐블로 조약의 조인으로 프랑스는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비밀리에 스페인 (누에바 에스파냐)에게 할양했다.
1763년,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는 미시시피 강 동쪽과 캐나다 전역을 영국에 할양했다. 프랑스는 북미 식민지를 실질적으로 상실했지만, 영국에 대해 식민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5. 전쟁의 양상
5. 1. 작전 목표
교전국들은 식민지를 본국과 연결하는 해상 항로, 또는 서로 다른 식민지 사이에 존재하는 육상 항로뿐만 아니라 북미 내륙으로 이어지는 주요 모피 무역로를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무역로는 일반적으로 대서양에서 미시시피강까지 이어지는 호수와 강을 따라 있었다. 많은 원주민 국가들이 이 항로 주변에 살았고, 유럽 열강 간의 전쟁에 관여하게 되었다.[3] 교전국들은 주요 교통 요충지에 요새를 건설하고, 이러한 요새를 방어하고 적의 거점을 공격하기 위해 현지 원주민들의 도움을 요청했다.[3] 예를 들어, 카리용 요새(Fort Carillon)는 조지 호수와 샹플랭 호수(Lake Champlain) 사이의 포테이지를 통제했다.[3]5. 2. 유럽식 전술과 원주민 전술
일반적인 견해는 유럽의 전투 방식과 군사 전술이 아메리카의 숲과 토착 전쟁 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국 식민지 주민들이 토착 전투 방식을 참고하여 새로운 전투 기술을 설계했다고 추정된다. 엄폐를 포함하고 매복을 강조한 이러한 기술이 식민지 주민들이 결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 독립 전쟁 동안 영국군을 격파한 이유라고 여겨진다.[4][5] 그러나 실제로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전통적인 유럽식 전술을 적용하여 영국이 승리했다. 루이부르 요새는 유럽 전쟁 규칙에 따라 수행된 포위 공격 이후 두 번이나 항복했으며, 1759년의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는 개활지에서 밀집 대형으로 벌어진 유럽식 전투였다.[4][5]비록 궁극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프랑스는 당시의 전술 교리인 ''라 프티트 게르''(la Petite guerre) 또는 오늘날의 게릴라전에 따라 전투를 벌였다. 북미에서 프랑스군의 수적 열세로 인해 표준적인 유럽식 전술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상당 부분 원주민 동맹군을 활용했다. 프랑스 인구의 적음, 모피 무역에 대한 뉴프랑스의 의존성, 이는 프랑스와 원주민 모두에게 상호 이익이 되었고, 그리고 영국 식민지로부터의 공통된 위협은 원주민들이 기꺼이 동맹이 되도록 만들었다. 모농가헬라 전투는 소규모 전쟁 전술의 가장 큰 성과였다. 그러나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끝날 무렵, 캐나다 남성 인구 거의 전체가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의 수적 우위가 압도적이 되었고, 표준적인 유럽식 전술이 승리하여 전쟁에서 이겼다.[6]
5. 3. 군사력
5. 3. 1. 영국군
영국 군대는 영국 육군의 정규 연대와 독립 중대, 영국령 아메리카의 여러 식민지에서 모집된 지방 연대, 그리고 식민지 민병대로 구성되었다.[7]영국군은 북아메리카에 두 종류의 부대를 두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 파견되어 비교적 장기간 또는 단기간 식민지에 주둔하는 정규 연대와, 요새와 성채의 수비대로서 식민지에 영구 주둔하는 1721-1763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영국 육군 독립 중대가 있었다. 영국군은 주로 빈곤층과 범죄 계층에서 모집되었지만, 독립 중대의 지위는 더 낮았다. 독립 중대의 병력은 주로 정규 군에서 전역한 사람들, 주로 전직 군인, 그리고 탈영병들로 채워졌다. 장교는 종종 부사관에서 진급했다. 독립 중대는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종종 군 복무를 민간 직업의 부업으로 바꾸었으며, 입대 기간이 만료된 후에도 식민지에 남아 있었다.[7]
전쟁이 시작되자 여러 식민지는 임시 징병을 통해 자체 군대인 지방군을 조직했다. 병사들은 사회 하층 계급 출신이었으며, 이는 그들의 신뢰성이나 효율성을 높이지 못했다. 매사추세츠만, 뉴욕 및 코네티컷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반면, 남부 식민지는 제국주의적 대의에 대해 항상 매우 꺼려하며 기여했다. 영국군은 레인저 부대를 제외하고 지방군의 전투력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연합 작전 중 지방군은 매우 엄격한 영국 군법의 적용을 받았다. 지방군 장교는 정규군 장교보다 상대적으로 계급이 낮았으며, 지방 야전 장교는 선임 영국 대위와 동등한 계급이었다. 비록 이들 장교가 식민지 엘리트였고, 종종 식민지 입법부 의원이었다 할지라도 그러했다. 정규군 장교와 지방군 장교 간의 계급 및 서열에 대한 분쟁은 흔했다. 하급 지방군 장교는 종종 인기 있는 민병대 장교였으며, 쉽게 한 개 중대를 모집할 수 있었다.[8][9]
각 식민지는 자체적인 민병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원칙적으로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건강한 남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민병대 구성원이 사회의 좀 더 유복한 계층으로 제한되었는데, 모든 민병대원은 스스로 머스킷, 군장, 화약, 탄환, 부싯돌, 그리고 칼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각 지역 사회는 자체적인 민병대를 조직했다. 장교들은 총독에 의해 임명되거나 구성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지역 민병대의 주요 임무는 지역 방어였으며, 야전에서 복무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다소 효율적인 향토 방위대 역할을 했다.[8][9]
5. 3. 2. 프랑스군
해군 자유 중대(Compagnies Franches de la Marine)는 뉴 프랑스 군사력의 핵심을 이루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 동안에만 프랑스 왕립 육군 부대가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식민지 민병대는 영국령 아메리카의 민병대보다 더 중요했다.[12]프랑스 식민지는 해군 장관을 통해 관리되었으며, 해군 부대가 뉴프랑스를 수비했다. 프랑스 해병대는 "해병대 자유 중대"(Compagnies franches)라고 불리는 독립 부대로 편성되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 동안에는 해군 포병-폭격병 중대도 북아메리카에 주둔했다. 해병대의 다른 계급은 프랑스에서 모집되었지만, 장교단은 장교의 아들을 모집하면서 점점 더 캐나다인이 되었다. 모든 진급은 실력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임관 매수는 금지되었다. 영국 레인저는 프랑스 식민지 해병대의 전술을 모방하려는 시도였다. 스위스 카레르 연대 또한 프랑스 왕립 해군 소속으로 운용되었다. 이 연대의 보급 기지는 로슈포르에 있었지만, 그 중대는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에서 복무했다.
1754년에는 아르투아, 베아른, 부르고뉴, 기옌, 랑그독, 라 렌 연대의 6개 대대가 뉴 프랑스로 이동했다. 1757년에는 로얄 루시용과 라 사르에서 2개 대대가 추가로 도착했고, 이듬해 베리에서 2개 대대가 뒤따랐다. 포병 중대도 대서양을 건너 파견되었다.
캐나다 식민지 민병대는 영국 지방군과 영국 식민지 민병대보다 사기와 전투력이 훨씬 높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향토 방위군이나 야전 전사로 고용되었을 때만 해당되었다. 캐나다 민병대는 전투 역할 외에도 수송 및 도로 건설과 같은 중요한 임무를 후방에서 수행했다.[11]
6. 원주민 동맹
6. 1. 영국 측 동맹
이로쿼이 연맹은 온타리오 호 동쪽 및 남쪽에 위치하여 영국과 프랑스 간 북아메리카 동북부 지역의 쟁탈전에서 중요한 전략적 역할을 했다.[3] 이 연맹의 공격적인 군사 및 상업 정책은 5개 이로쿼이 부족에게 광대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부여하여 수많은 소규모 원주민 부족들을 굴복시켰다.[3] 이로쿼이는 코버넌트 체인을 이용하여 뉴욕 식민지 및 기타 영국 식민지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관련된 당사자들에게 이익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프랑스에게는 재앙이 되었다.[3]6. 2. 프랑스 측 동맹
프랑스는 원주민 부족의 독립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영토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으며, 다른 유럽 열강에 맞서 원주민 동맹의 입장을 대변할 권리를 주장했다.[13] 프랑스의 동맹국들은 자치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허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보호령을 받아들였다.[13]미크마크와 아베나키는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노바스코샤에서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에 맞서 프랑스와의 동맹을 확인하는 것이었다.[13] 미크마크와 아베나키 외에도, 프랑스의 주요 동맹국은 뉴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지에 거주하는 ''인디앙 도미실리에''(resident Indians, 거주 인디언)였다.[13] 이들 중 다수는 뉴욕 중부에 위치했던 과거 영토 출신의 모호크족이었지만, 뉴잉글랜드의 다른 부족 구성원도 있었다.[13] 이들은 필립 왕의 전쟁 중과 이후에 뉴잉글랜드 식민지 개척자들의 공격을 피해 프랑스 영토로 이동하게 되었다.[13]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끝날 무렵, 모든 거주 원주민들은 캐나다 일곱 부족 연맹에 합류했다.[13]
6. 3. 원주민과 백인 간의 전쟁 양상
유럽 식민 열강과 아메리카 원주민 간의 충돌은 4차례의 주요 프랑스-원주민 전쟁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났다.[3] 일부 원주민 부족과 식민지 간의 복잡한 관계는 원주민 부족이 식민 열강의 동맹국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3] 이러한 동맹은 모피 무역으로 형성된 경제적 관계와 원주민 경쟁 부족에 대항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3] 전쟁에는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학대가 포함되었으며, 식민지와 원주민 정착촌 모두 공격 대상이 되었다.[3]7. 역사적 평가와 영향
전쟁이 진행되면서 영국의 우위가 점차 뚜렷해졌다. 프랑스의 누벨 프랑스 식민지(캐나다)에 비해 영국의 미국 식민지는 인구와 생산력에서 우위를 보였고, 프랑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군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이를 보완하려 했지만 결국 영국에 압도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는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상실을 초래했다. 프랑스의 위협이 사라지자 뉴잉글랜드 식민지는 영국의 군사적 보호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새롭게 획득한 캐나다가 뉴잉글랜드로부터 분리되어 통치된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1763년 파리 조약으로부터 12년 후, 미국 독립 전쟁(1775년-1783년)으로 이러한 불만이 폭발하게 된다.
더욱이 멕시코는 멕시코 독립 혁명(1810년-1821년)으로 멕시코 제1제국(1821년 - 1823년)을 거쳐 멕시코 합중국으로 독립했다. 미영 전쟁을 거쳐, 1836년의 텍사스 혁명(1835년-1836년)으로 텍사스 공화국(1836년-1845년)이 독립했다. 1845년의 텍사스 합병으로 미국 합중국령 텍사스주가 되었다.
오리건 트레일을 통해 오리건 컨트리로 흘러 들어간 미국인 개척자들이 오리건 경계 분쟁을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겪었지만,[15] 1846년의 오리건 조약에 의해 평화적으로 해결되었고, 오리건 경계는 북위 49도선으로 설정되었다.
1846년의 미국-멕시코 전쟁 중에는 캘리포니아 공화국이 멕시코 합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단 1개월 동안 존재했지만, 전쟁 후인 1848년에,멕시코 할양지 (현재의 애리조나주, 콜로라도주, 뉴멕시코주, 와이오밍주)와 함께 미국 합중국령 캘리포니아주가 되었다. 1853년의 개즈던 매입으로 현재의 미-멕시코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이처럼 뉴네덜란드, 누벨 프랑스, 와바나키 연맹(Wabanaki Confederacy), 영국령 아메리카, 이로쿼이 연맹, 누에바 에스파냐는 미국에 병합되어 가게 되었다.
8. 각주
참조
[1]
서적
Histoire du peuple américain. États-Unis, Volume 2
https://books.google[...]
Paris
1863
[2]
서적
La guerre de la conquête, 1754–1760
https://books.google[...]
Montréal
1955
[3]
논문
Colonial Indian Wars
Smithsonian Institution
1988
[4]
웹사이트
Review of: Guy Chet (2003). Conquering the American Wilderness: The Triumph of European Warfare in the Colonial Northeast Amherst
http://www.h-net.org[...]
2017-02-10
[5]
뉴스
Warfare tactics from British, not those of tribes, helped Americans win War of Independence, historian says
https://news.unt.edu[...]
University of North Texas
2017-02-10
[6]
서적
Canadian Military History
Montreal: Art Global
1993–2000
[7]
웹사이트
The British Military Presence in America, 1660-1720
http://historyrecons[...]
2017-02-11
[8]
논문
The British Forces in North America during the Seven Years' War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74
[9]
웹사이트
Colonial Military Experience
http://www.colonialw[...]
2017-02-11
[10]
서적
The French Soldier in Colonial America
Museum Restoration Service
1984
[11]
서적
A Military History of Canada
Hurtig
1985
[12]
논문
The French forces in North America during the Seven Years' War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74
[13]
웹사이트
Indigenous-French Relations
http://www.thecanadi[...]
2017-02-12
[14]
문서
1778年の[[アメリカ独立戦争]]を経て、1800年に秘密条約・[[第三次サン・イルデフォンソ条約]]を調印し、フランスは秘密裏にスペイン([[ヌエバ・エスパーニャ]])からルイジアナを取り戻す。1804年の{{仮リンク|3国の旗の日|en|Three Flags Day}}で[[アメリカ合衆国]]に譲渡することになる([[ルイジアナ買収]])。これが[[ルイス・クラーク探検隊]]の西部探検に繋がって[[オレゴン・カントリー]]を得ることになり、[[1810年]]に太平洋岸の{{仮リンク|アストリア砦|en|Fort Astoria}}が出来ると、[[1848年]]にそこから初めてのアメリカ人[[ラナルド・マクドナルド]]が来日する。
[15]
문서
[[1867年]]に「{{仮リンク|憲法法 (1867年)|en|Constitution Act, 1867|label=カナダ自治領}}」が成立する以前であるため、米英間の境界紛争であった。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