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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녜 공비 프린세스 로열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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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라녜 공비 프린세스 로열 메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 찰스 1세와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의 장녀로, 1631년에 태어났다. 1641년 오라녜 공 빌럼 2세와 결혼하여 네덜란드로 갔으며, 잉글랜드 내전과 청교도 혁명 시기에 가족들과 함께 망명 생활을 했다. 그녀는 영국 왕실 최초의 프린세스 로열 칭호를 받았으며, 남편의 사망 후 아들 빌럼 3세를 낳았다. 1660년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으며, 윌리엄 3세는 이후 네덜란드의 스타트홀더가 되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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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녜 공비 프린세스 로열 메리
기본 정보
아드리안 하네만 - 오렌지 공녀 메리 (1631-60)
아드리안 하네만, 1660년 작품
칭호프린세스 로열
결혼오라녜 공비
나사우 백작 부인
전체 이름메리 헨리에타 스튜어트
왕가스튜어트 가
출생일1631년 11월 4일
출생지잉글랜드 왕국, 미들섹스, 웨스트민스터 시, 세인트 제임스 궁전
사망일1660년 12월 24일 (29세)
사망 장소잉글랜드 왕국, 미들섹스, 웨스트민스터 시, 화이트홀 궁전
매장일1660년 12월 29일
매장지웨스트민스터 사원, 웨스트민스터 시
가족 관계
배우자빌럼 2세 판 오라녜 (1641년 결혼, 1650년 사별)
자녀윌리엄 3세
아버지찰스 1세
어머니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
통치
오라녜 공비 통치 기간1647년 3월 14일 – 1650년 11월 6일

2. 초기 생애

메리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 리치몬드 궁전, 햄프턴 코트 궁전에서 오빠, 여동생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주들의 교육은 록스버그 백작부인 진 커가 맡았다. 메리는 우아함, 아름다움, 매너로 유명했으며, 춤에는 뛰어났지만 과학 지식은 부족했다.[4] 앙리에타 마리아 여왕은 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비밀리에 가톨릭 신자인 젊은 여성을 메리의 친구로 소개했지만, 찰스 1세는 이를 즉시 중단시켰다.

1640년 1월, 8살의 메리는 13살의 오라녜 공 빌럼 2세로부터 첫 결혼 제안을 받았다. 빌럼 2세의 어머니 조름스-브라운펠스의 아말리아는 메리의 이모 보헤미아 여왕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시녀이자 가까운 친구였으며, 이는 훗날 메리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라녜가의 제안은 찰스 1세에 의해 처음에는 거절되었는데, 그는 딸을 아스투리아스 공 발타자르 카를로스(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외아들이자 상속자, 메리의 외사촌)와 결혼시키고 싶어했다. 이 결혼의 전제 조건은 메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이었지만, 어머니의 요청으로 가톨릭 교리를 공부한 공주는 신앙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았다.[4] 또한, 앙리에타 마리아 여왕은 반(反) 스페인 성향으로 스페인과의 동맹에 반대했다. 메리의 사촌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이 또한 구혼했지만, 이 제안도 결국 무산되었다.

2. 1. 출생과 가족

메리 헨리에타 공주는 1631년 11월 4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찰스 1세와 그의 아내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 사이에서 셋째(생존한 자녀 중 둘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4] 출생 당일 윌리엄 로드 캔터베리 대주교의 주관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갓 태어난 공주가 건강하지 않아 죽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메리라는 이름은 외할머니인 프랑스 여왕 마리 드 메디치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1640년 메리는 남동생 글로스터 공작 헨리 스튜어트의 세례식에서 어린 왕자의 유일한 대모가 되면서 첫 공식 석상에 등장했다.

메리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 리치몬드 궁전, 햄프턴 코트 궁전에서 오빠, 여동생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주들의 교육은 록스버그 백작부인 진 커에게 맡겨졌다. 메리는 우아함, 아름다움, 매너로 유명했으며, 춤에는 뛰어났지만 과학 지식은 부족했다. 앙리에타 마리아 여왕은 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싶어 비밀리에 가톨릭 신자인 젊은 여성을 메리의 친구로 소개했지만, 찰스 1세는 이를 즉시 중단시켰다.

메리의 형제자매로는 찰스 2세, 제임스 2세, 글로스터 공작헨리, 엘리자베스, 오를레앙 공작필리프 1세의 비 헨리에타 앤이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메리의 외사촌이었다.[4]

2. 2. 유년 시절

앤서니 반 다이크, 1637년작, 6세의 메리


메리 헨리에타 공주는 1631년 11월 4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찰스 1세와 그의 아내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생존한 자녀 중 둘째)이자 장녀였다. 갓 태어난 공주가 건강하지 않아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출생 당일에 윌리엄 로드 캔터베리 대주교의 주관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외할머니인 프랑스 여왕 마리 드 메디치를 기리기 위해 첫 번째 이름을 받았다. 메리의 첫 공식 데뷔는 1640년 그녀의 남동생 글로스터 공작 헨리 스튜어트의 세례식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녀는 어린 왕자의 유일한 대모가 되었다.[4]

메리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 리치몬드 궁전과 햄프턴 코트 궁전에서 오빠, 여동생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주들의 교육은 록스버그 백작부인 진 커에게 맡겨졌다. 메리는 우아함, 아름다움, 매너로 유명했으며, 춤에도 뛰어났지만 과학 지식은 부족했다. 소녀의 어머니인 앙리에타 마리아 여왕은 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싶어 비밀리에 가톨릭을 믿는 젊은 여성을 메리의 친구들에게 소개했지만, 찰스 1세는 아내의 행동을 즉시 중단시켰다.

1640년 1월, 8살의 메리는 13살의 오라녜 공 빌럼 2세로부터 첫 결혼 제안을 받았다. 잠재적인 신랑의 어머니 조름스-브라운펠스의 아말리아는 메리의 이모 보헤미아 여왕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시녀이자 가까운 친구였으며, 이는 나중에 메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라녜가의 제안은 찰스 1세에 의해 처음에는 거절되었는데, 그는 딸을 아스투리아스 공 발타자르 카를로스, 즉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외아들이자 상속자이자 메리의 외사촌과 결혼시키고 싶어했다. 이러한 결혼의 전제 조건은 메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이었지만, 어머니의 요청으로 가톨릭 종교의 기본을 공부한 공주는 자신의 신앙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인 앙리에타 마리아 여왕은 반 스페인적이었고 스페인과의 동맹에 반대했다. 메리의 사촌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이 또한 그녀에게 구혼했지만, 결국 이 제안도 무산되었다.

3. 오라녜 공비 시절

1640년대 말, 영국 사회는 종교, 사회 관계, 도덕, 정치 권력을 둘러싼 논쟁으로 매우 긴장된 상태였다. 메리의 어머니는 가톨릭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여 영국에서 인기가 없었다. 1641년 초, 찰스 1세는 오라녜 공 프레데리크 헨리크와 다시 협상했다.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어, 1641년 2월 10일 찰스 1세는 의회에 딸의 약혼이 완료되었음을 발표했다. 찰스 1세는 비상시 오라녜 공이 영국에서 왕실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희망했다.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제1차 잉글랜드 내전) 발발 직전에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혁명이 진행되면서 다른 왕족들도 대륙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오빠 찰스와 남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 헨리를 네덜란드에서 맞이했다.[6]

1647년 헤라르트 판 혼트호르스트의 메리, 프린세스 로열, 그리고 오라녜 공 윌리엄 2세


1644년 2월, 메리는 완전히 네덜란드 궁정 생활에 융화되었다.[2] 그녀는 알현을 하고, 외국 대사들과 만났으며, 그녀의 나이에 놀랍다고 여겨지는 중요성과 위엄으로 그녀에게 할당된 모든 기능을 수행했다. 3월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간의 최근 동맹에 대한 궁정 축하 행사에 참여했으며, 남편 윌리엄 2세가 프랑스 대사를 위해 준비한 엔터테인먼트를 이끌었다.

영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소식을 받던 메리는 아버지 찰스 1세의 대의에 동정심을 느꼈다. 1646년 12월, 그녀는 찰스 1세에게 네덜란드로 도망갈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찰스 1세는 거절했다. 헤이그에서 메리는 그녀의 이모인 보헤미아 여왕과 매우 따뜻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메리는 시어머니인 아말리아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해 그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오라녜 공 프레데리크 헨리가 1647년 3월 14일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 당일, 의회가 소집되어 윌리엄 2세를 그의 아버지의 후계자이자 군대의 수장으로 선포했다. 메리의 남편에게 고인의 나머지 칭호가 하나씩 인정되었고, 그는 새로운 오라녜 공이 되었다. 1648년, 메리는 그녀의 형제들인 웨일스 공 찰스와 요크 공 제임스의 방문을 받았다. 1649년, 메리의 아버지 찰스 국왕이 처형되었고, 이후 메리는 많은 영국 왕당파 망명자들을 도왔다. 그녀의 후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앤 하이드의 가족, 즉 요크 공의 미래의 아내이자 메리 2세와 이라는 두 명의 잉글랜드 여왕의 어머니가 있었다.

3. 1. 결혼

1641년 안토니 반 다이크의 약혼한 윌리엄과 메리


1641년 5월 2일, 런던 화이트홀 궁전의 채플 로열에서 오라녜 공 프레데리크 헨리의 아들 윌리엄과 메리의 소박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1]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은 개신교 의식이었기 때문에 종교 의식에 참석할 수 없었고, 대신 작은 갤러리에서 딸의 결혼식을 지켜봤다.[1] 국왕의 장녀의 결혼은 1년도 안 되어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영국에서 사실상 축하받지 못했다.[1] 국왕은 그녀에게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크리스탈과 금으로 된 캐스팅 병과 덴마크의 앤에게 속했던 "AR"이라는 암호가 새겨진 금목걸이를 선물했다.[1]

메리와 윌리엄은 궁정에서 축하를 받았고, 여러 선물을 받았다.[1] 또한 신혼 부부를 기리기 위해 120문의 총이 발사되었다.[1] 의식 후, 윌리엄은 네덜란드로 돌아갔다.[1] 결혼 계약에 따르면, 메리는 12세가 될 때까지 영국에 머물 수 있었으며, 남편은 개인 비용으로 그녀에게 연간 1,500 리브르를 제공할 예정이었다.[1] 또한, 윌리엄이 갑작스럽게 사망할 경우 메리는 연간 10,000 리브르의 유지비와 그녀의 개인적인 사용을 위한 두 개의 거주지를 받게 될 예정이었다.[1] 결혼 계약은 또한 메리와 그녀의 영국인 수행원들이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 가입하는 대신 잉글랜드 교회의 방식으로 여전히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규정했다.[1]

1642년 초, 영국의 상황은 악화되었다.[1] 메리와 그녀의 부모는 햄프턴 코트로 피신해야 했지만, 상황은 점차 공개 전쟁으로 바뀌었다.[1] 2월,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은 딸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다.[1] 그들은 15척의 네덜란드 함대를 타고 여행했다.[1] 메리는 나중에 그녀의 측근이 된 스탠호프 부인과 함께 네덜란드로 갔다.[1]

1643년 11월, 헤이그에서 메리와 17세의 윌리엄 간의 두 번째 결혼식이 거행되었다.[2]

3. 2. 네덜란드 생활과 청교도 혁명

1640년대 말, 영국 사회는 종교, 사회 관계, 도덕, 정치 권력을 둘러싼 논쟁으로 매우 긴장된 상태였다. 메리의 어머니는 가톨릭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여 영국에서 인기가 없었다. 1641년 초, 찰스 1세는 오라녜 공 프레데리크 헨리크와 다시 협상했다.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어, 1641년 2월 10일 찰스 1세는 의회에 딸의 약혼이 완료되었음을 발표했다. 찰스 1세는 비상시 오라녜 공이 영국에서 왕실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희망했다. 1641년 5월 2일, 런던 화이트홀 궁전의 채플 로열에서 소박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은 개신교 의식이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작은 갤러리에서 딸의 결혼식을 지켜봤다. 전쟁 발발로 인해 국왕의 장녀의 결혼은 영국에서 사실상 축하받지 못했다. 국왕은 덴마크의 앤에게 속했던 "AR"이라는 암호가 새겨진 금목걸이 등을 선물했다.[1]

메리와 윌리엄은 궁정에서 축하를 받았고, 여러 선물을 받았다. 또한 신혼 부부를 기리기 위해 120문의 총이 발사되었다. 의식 후, 윌리엄은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결혼 계약에 따라, 메리는 12세가 될 때까지 영국에 머물 수 있었으며, 남편은 개인 비용으로 그녀에게 연간 1,500 리브르를 제공할 예정이었다. 또한, 윌리엄이 갑작스럽게 사망할 경우 메리는 연간 10,000 리브르의 유지비와 개인적인 사용을 위한 두 개의 거주지를 받게 될 예정이었다. 결혼 계약은 또한 메리와 그녀의 영국인 수행원들이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 가입하는 대신 잉글랜드 교회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규정했다.

1642년 초, 영국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메리와 그녀의 부모는 햄프턴 코트로 피신해야 했지만, 상황은 점차 공개 전쟁으로 바뀌었다. 2월,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은 딸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다. 그들은 15척의 네덜란드 함대를 타고 여행했다. 메리는 나중에 그녀의 측근이 된 스탠호프 부인과 함께 네덜란드로 갔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메리의 결혼은 1643년에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었는데, 헨리에타 마리아는 네덜란드 정부를 설득하여 찰스 1세에게 배와 무기를 제공하고 영국으로 보냈다.

네덜란드로 떠나기 직전, 메리는 아버지에 의해 ''프린세스 로열''로 지정되어, 영국의 국왕의 장녀가 이 칭호를 가질 수 있다는 전통을 확립했다. 이 칭호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딸인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이 자신의 딸이 프랑스 국왕의 장녀의 칭호인 "''마담 로열''"에 필적하는 칭호를 갖기를 원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전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왕의 장녀들은 다양하게 '레이디' 또는 '공주'라는 칭호를 받았다. 영국 군주의 차녀들은 1714년 영국 조지 1세가 즉위할 때까지 일관되게 그레이트브리튼 공주라는 칭호를 받지 않았고 "왕자 전하"라는 스타일을 사용했다.

1647년경 헤라르트 판 혼트호르스트의 메리 스튜어트


1643년 11월, 12세의 메리와 17세의 윌리엄 간의 두 번째 결혼식이 헤이그에서 거행되었다. 1644년 2월, 메리는 완전히 네덜란드 궁정 생활에 융화되었다.[2] 그녀는 알현을 하고, 외국 대사들과 만났으며, 그녀의 나이에 놀랍다고 여겨지는 중요성과 위엄으로 그녀에게 할당된 모든 기능을 수행했다. 3월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간의 최근 동맹에 대한 궁정 축하 행사에 참여했으며, 남편이 프랑스 대사를 위해 준비한 엔터테인먼트를 이끌었다.

영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소식을 받던 메리는 아버지 찰스 1세의 대의에 동정심을 느꼈다. 1646년 12월, 그녀는 찰스 1세에게 네덜란드로 도망갈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찰스 1세는 거절했다. 헤이그에서 메리는 그녀의 이모인 보헤미아 여왕과 매우 따뜻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메리는 시어머니인 아말리아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해 그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오라녜 공 프레데리크 헨리가 1647년 3월 14일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 당일, 의회가 소집되어 윌리엄 2세를 그의 아버지의 후계자이자 군대의 수장으로 선포했다. 메리의 남편에게 고인의 나머지 칭호가 하나씩 인정되었고, 그는 새로운 오라녜 공이 되었다. 1648년, 메리는 그녀의 형제들인 웨일스 공 찰스와 요크 공 제임스의 방문을 받았다. 1649년, 메리의 아버지 찰스 국왕이 처형되었고, 이후 메리는 많은 영국 왕당파 망명자들을 도왔다. 그녀의 후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앤 하이드의 가족, 즉 요크 공의 미래의 아내이자 메리 2세와 이라는 두 명의 잉글랜드 여왕의 어머니가 있었다.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제1차 잉글랜드 내전) 발발 직전에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혁명이 진행되면서 다른 왕족들도 대륙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오빠 찰스와 남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 헨리를 네덜란드에서 맞이했다.[6]

3. 3. 남편의 죽음과 아들 빌럼 3세의 탄생

1647년 가을, 메리는 유산을 겪은 후 몇 년 동안 임신하지 못했다.[3] 1650년 초, 다시 임신했다. 그해 10월 말에서 11월 초, 임신이 끝나갈 무렵 남편 빌럼 2세는 천연두에 걸려 암스테르담 점령 시도 직후인 11월 6일에 사망했다.[2] 남편이 사망하고 8일 후이자 메리의 19번째 생일날, 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갓 태어난 왕자의 요람은 아버지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 네덜란드의 스타트허우더와 오라녜 공 칭호는 상속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는 태어난 직후 그 칭호를 받지 못했다.

아들을 낳은 직후 메리는 시어머니 아말리아와 여러 차례 갈등을 겪었다. 메리는 처형된 아버지의 이름을 기려 아들의 이름을 찰스로 지을 계획이었지만, 아말리아는 윌리엄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더 나은 선택이었다. 네덜란드 연합 주의 첫 번째 통치자는 오라녜 공 윌리엄 1세였고, 게다가 윌리엄 2세도 아들의 이름을 윌리엄으로 짓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손자의 이름에 대한 싸움에서 이긴 아말리아는 메리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법적 후견인이 되기를 원했다. 1651년 8월 13일, ''Hoge Raad van Holland en Zeeland''(최고 법원)는 후견권을 메리, 시어머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그의 아내 루이즈 헨리에테는 윌리엄 2세의 장녀였다)이 공유하기로 판결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두 여성 사이를 중재할 수 있었고, 잠재적인 상속자로서 아말리아가 낭비할 것을 두려워했던 오라녜 가문의 재산을 보호하는 데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오렌지 공 윌리엄 3세 (1654년) 4세, Adriaen Hanneman의 작품.

4. 섭정 시기

메리는 1647년 남편 빌럼 2세가 네덜란드 총독에 취임했지만, 3년 후인 1650년 천연두로 사망하자 아들 빌럼 3세의 섭정을 맡았다.[7] 시어머니 아말리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함께 빌럼 3세의 후견인이 되었다.[8]

그러나 메리는 청교도 혁명으로 망명 온 스튜어트 가 왕족들을 후대하여 네덜란드에서 인기가 없었다. 요한 데 비트가 오라녜 가문의 권력을 제한하면서, 메리가 오빠 찰스 2세와 남동생 요크 공작을 지원하는 것을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아 친족을 받아들이는 것이 금지되었다.[9] 이 때문에 1654년부터 3년간 네덜란드 국외에서 지내야 했다. 1657년 네덜란드 섭정이 되었지만, 루이 14세의 개입으로 어려운 통치를 해야 했다.

잉글랜드 왕정복고 이후 네덜란드에서 메리와 빌럼 3세의 입장이 호전되었다. 1660년 9월 귀국했지만, 천연두에 걸려 화이트홀 궁전에서 사망했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10]

4. 1. 네덜란드 정치 상황과 갈등

1647년 가을, 메리는 유산을 겪은 후 몇 년 동안 임신하지 못했다.[3] 1650년 초, 다시 임신했고, 남편 빌럼 2세는 천연두에 걸려 암스테르담 점령 시도 직후인 11월 6일에 사망했다.[2] 8일 후, 메리는 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갓 태어난 왕자는 아버지에 대한 애도로 검은 천으로 덮인 요람에 누워 있었다. 네덜란드의 스타트허우더와 오렌지 공 칭호는 상속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는 태어난 직후 그 칭호를 받지 못했다.

아들을 낳은 직후 메리는 시어머니 아말리아와 여러 차례 갈등을 겪었다. 메리는 처형된 아버지 찰스 1세의 이름을 기려 아들의 이름을 찰스로 지으려 했지만, 아말리아는 오렌지 공 윌리엄 1세를 따라 윌리엄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651년 8월 13일, ''Hoge Raad van Holland en Zeeland''(최고 법원)은 메리, 시어머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그의 아내 루이즈 헨리에테는 윌리엄 2세의 장녀였다)가 윌리엄의 후견권을 공유하기로 판결했다.[8]

메리는 올리버 크롬웰에게 더 호의적인 네덜란드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1650년 1월, 메리가 아버지의 기일 1주년을 기념하려 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영국 정부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잉글랜드 의회 사절단이 국회에 접수되었을 때, 메리는 브레다로 은퇴했지만, 그녀의 영향력으로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지 못했다. 1651년 메리가 비밀리에 동생 찰스 2세를 만난 후, 네덜란드 정부는 그녀가 친척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지했다.[2] 메리와 그녀의 숙모의 가구는 "독사의 둥지"라고 불리며, 네덜란드, 잉글랜드, 특히 크롬웰에 반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알려졌다.

1652년, 잉글랜드와의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메리의 아들은 젤란트와 여러 북부 주에서 스타트허우더로 선출되었지만, 공화주의 지도자 요한 데 비트는 윌리엄이 홀란트에서 선출되는 것을 막았다. 배제법에 따라 홀란트가 오렌지 왕조의 일원을 스타트허우더로 선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메리는 공식적으로 항의했지만, 내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평화 조약은 1654년 5월 27일에 체결되었다.

4. 2. 어려운 통치

1647년 가을, 메리는 유산을 겪은 후 몇 년 동안 임신하지 못했다.[3] 1650년 초, 다시 임신했고, 그해 10월 말에서 11월 초, 남편 빌럼 2세는 천연두에 걸려 암스테르담 점령 시도 직후인 11월 6일에 사망했다.[2] 남편의 사망 8일 후이자 자신의 19번째 생일날, 메리는 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갓 태어난 왕자의 요람은 아버지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

아들을 낳은 직후, 메리는 시어머니 아말리아와 여러 차례 갈등을 겪었다. 메리는 처형된 아버지 찰스 1세의 이름을 따 아들의 이름을 찰스로 지으려 했지만, 아말리아는 오렌지공 윌리엄 1세를 기려 윌리엄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말리아는 손자의 이름을 윌리엄으로 짓는 것에 성공하고, 메리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법적 후견인이 되기를 원했다. 1651년 8월 13일, ''Hoge Raad van Holland en Zeeland''(최고 법원)는 메리, 시어머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그의 아내 루이즈 헨리에테는 빌럼 2세의 장녀였다)이 윌리엄 3세의 후견권을 공유하기로 판결했다.[8]

메리는 올리버 크롬웰을 지지하는 네덜란드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1650년 1월, 메리가 동생 제임스, 숙모 엘리자베스와 함께 아버지의 기일 1주년을 기념하려 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영국 정부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잉글랜드 의회 사절단이 국회에 접수되자, 메리는 브레다로 은퇴했다. 1651년 메리가 찰스 2세를 비밀리에 만난 후, 네덜란드 정부는 그녀가 친척을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2]

1652년 잉글랜드와의 전쟁 발발로 네덜란드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메리의 아들은 젤란트와 여러 북부 주에서 스타트호더로 선출되었지만, 공화주의 지도자 요한 데 비트는 홀란트에서 선출되는 것을 막았다. 크롬웰은 평화 조약 체결 조건으로 배제법 채택을 주장했는데, 이는 홀란트가 오렌지 왕조의 일원을 스타트호더로 선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메리는 공식적으로 항의했지만, 내전 위협에도 불구하고 평화 조약은 1654년 5월 27일에 체결되었다.[9]

메리는 아들의 지위에 대한 걱정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654년 7월, 그녀는 온천에 갔고, 몇 주 후 오빠 찰스가 있는 쾰른을 방문했다.[9] 1655년 7월, 다시 찰스를 만나러 쾰른에 갔고, 프랑크푸르트 박람회를 익명으로 방문한 후 11월 15일에 귀국했다. 1656년 1월, 메리는 어머니와 여동생 헨리에타가 있는 파리로 가서 프랑스 궁정에서 환영받았다.[9]

5. 잉글랜드 왕정복고와 죽음

영국 왕정복고로 오빠 찰스 2세가 즉위하면서 메리의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다. 네덜란드에서 메리에 대한 태도가 관대해졌고, 메리와 아들 빌럼 3세는 왕족으로서 예우를 받았다. 배제법은 무효가 되었다.[2]

1660년 9월, 메리는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오빠가 제임스 2세와 앤 하이드의 결혼을 인정하고 그 자녀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런던에서 의회로부터 금전적 선물을 받고 지참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가 임명되었다.[2]

12월 20일, 메리는 천연두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 어머니 헨리에타 마리아가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으나 메리는 거절했다. 프랑스인 의사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12월 24일 유언장을 작성하고 사망했다.[6][7] 메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4]

5. 1. 잉글랜드 왕정복고

1659년 11월, 메리는 아들 빌럼 3세레이던 대학교에 유학 보냈다. 1660년 5월 14일, 네덜란드 의회는 영국 왕정복고와 오빠 찰스 2세의 즉위를 브레다에 있던 메리에게 알렸다. 며칠 후 메리는 헤이그에서 열린 축하 행사에 참여했다.[2] 메리는 오빠 제임스 2세와 헨리에 이어 영국 왕위 계승 서열 3위에 올랐다(헨리는 그해 늦게 사망했다). 잉글랜드 공주로서의 새로운 지위는 네덜란드에서 그녀에 대한 태도가 더 관대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고,[3] 메리와 아들이 거쳐가거나 공식 행사에 참석한 모든 도시에서 그들은 왕실의 예우를 받았다.[2] 스튜어트 왕정 복고 이후, 잉글랜드 연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배제법은 무효라고 선포되었다. 1660년, 메리는 시어머니 아말리아와 함께 여러 주에 빌럼 3세를 미래의 스타트홀더로 인정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거부했다.[1]

1660년 9월 30일, 메리는 잉글랜드로 항해했는데, 망명한 동포와 오빠들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 알려져 있었기에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런던에 도착한 메리는 오빠 국왕이 제임스 2세와 자신의 전 시녀인 앤 하이드의 결혼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3] 그들의 자녀를 완전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잉글랜드의 왕자, 공주로 선언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 사실은 메리를 매우 화나게 하여 조국 방문을 크게 단축하기로 결심했다. 메리는 화이트홀 궁전 예배당에서 공식 예배에 참석했고, 엘리아스 애슈몰에게 몇 가지 해부학적 호기심을 보여주기 위해 화이트홀에서 개인적인 리셉션을 열었다. 또한 11월 7일자 서신으로 받은 의회로부터의 금전적 선물을 받아들였고, 오랫동안 약속된 지참금을 요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왕은 위원회를 임명했다. 1660년 11월, 메리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갱신하기 위해 온 연합주 공화국 대사들과 만났다.[2]

5. 2. 귀국과 죽음

1659년 11월, 메리는 아들 빌럼 3세레이던 대학교에 유학 보냈다. 1660년 5월 14일, 네덜란드 의회는 영국 왕정복고와 오빠 찰스 2세의 즉위를 브레다에 있던 메리에게 알렸다. 며칠 후 메리는 헤이그에서 열린 축하 행사에 참여했다.[2] 이후 메리는 오빠 제임스와 헨리에 이어 영국 왕위 계승 서열 3위에 올랐다(헨리는 그해 늦게 사망). 잉글랜드 공주로서의 새로운 지위는 네덜란드에서 메리에 대한 태도가 더 관대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고,[3] 메리와 아들이 거쳐가거나 공식 행사에 참석한 모든 도시에서 그들은 왕실의 예우를 받았다.[4] 스튜어트 왕정 복고 이후, 잉글랜드 연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배제법은 무효라고 선포되었다. 1660년, 메리는 시어머니와 함께 여러 주에 윌리엄을 미래의 스타트홀더로 인정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거부했다.[5]

1660년 9월 30일, 메리는 잉글랜드로 항해했는데, 망명한 동포와 오빠들에 대한 관심이 알려져 있었기에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런던에 도착한 메리는 오빠 국왕이 요크 공작 제임스와 자신의 전 시녀였던 앤 하이드의 결혼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3] 그들의 자녀를 완전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잉글랜드의 왕자, 공주로 선언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 사실에 메리는 매우 화가 나서 조국 방문을 크게 단축하기로 결심했다. 메리는 보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이 모인 화이트홀 예배당에서 공식 예배에 참석했고, 엘리아스 애슈몰에게 몇 가지 해부학적 호기심을 보여주기 위해 화이트홀에서 개인적인 리셉션을 열었다. 또한 11월 7일자 서신으로 받은 의회로부터의 금전적 선물을 받아들였고, 오랫동안 약속된 지참금을 요구했다. 국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원회를 임명했다. 1660년 11월, 메리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갱신하기 위해 온 연합주 공화국 대사들과 만났다.[4]

12월 20일, 잉글랜드 궁정은 메리가 천연두에 심각하게 걸렸다는 소식에 술렁였다.[2] 이 소식을 들은 헨리에타 마리아 여왕은 죽어가는 딸 곁으로 달려가 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지만 메리는 거절했다. 여왕은 자신의 프랑스인 의사가 공주의 치료를 맡도록 고집했는데, 많은 동시대인들은 이 의사가 출혈 요법을 열렬히 지지했기 때문에 메리에게 치명적이라고 믿었다.[6] 12월 24일, 메리는 유언장에 서명했고 같은 날 사망했다.[7] 메리는 자신의 요청에 따라 1660년 9월 천연두로 사망한 오빠 글로스터 공작 헨리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4]

6. 가계도

'''오라녜 공비 프린세스 로열 메리'''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6. 1. 스튜어트 왕가

'''오라녜 공비 프린세스 로열 메리'''는 잉글랜드의 찰스 1세와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의 딸이다.

스튜어트 왕가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범례
브루스 왕가 (스코틀랜드 왕)
튜더 왕조 (잉글랜드 왕)
스튜어트 왕조 (스코틀랜드 왕)
스튜어트 왕조 (스코틀랜드 왕 및 잉글랜드 왕)
하노버 왕조 (대영국 왕)


6. 2. 오라녜-나사우 가문

관계
1오라녜 공비 프린세스 로열 메리
2잉글랜드의 찰스 1세
3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
4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5덴마크의 앤
6프랑스의 앙리 4세
7마리 드 메디치
8다알리 경 헨리 스튜어트[1]
9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1]
10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2]
11메클렌부르크의 조피아[2]
12방돔 공작 앙투안[3]
13나바라의 잔 3세[3]
14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3]
15오스트리아의 요안나[3]


참조

[1] 논문 Papers relating to the Royal Jewel House
[2] 웹사이트 Royal renegades: the forgotten children of Charles I https://www.panmacmi[...] Pan Macmillan 2016-11-15
[3] 서적 Werken Historisch Genootschap, 3e serie
[4] 문서 森
[5] 문서 (서술적 내용)
[6] 문서 友清
[7] 문서
[8] 문서 友清
[9] 문서 友清
[10] 문서 友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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