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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 고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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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타니 고즈이는 일본의 승려이자 탐험가로, 오타니 코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 탐험대(오타니 탐험대)를 이끌며 불교 유물을 수집했다. 니시혼간지 주지를 역임했으나 재정 스캔들로 물러났으며, 이후 중국, 대만 등지에서 문화 활동과 열대 농업 경영에 참여했다. 그는 '오타니 컬렉션'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 유물을 수집했으며, 혜초가 신라 승려임을 밝히는 등 학문적 업적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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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 고즈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타니 고즈이
존칭백작
이름오타니 고즈이
다른 이름교뇨
직업불교인, 탐험가
출생일1876년 10월 27일
출생지교토, 일본
사망일1948년 10월 5일
불교 정보
이름 (일본어)大谷光瑞
법명교뇨 상인 (鏡如上人)
어린 시절 이름슌마로 (峻麿)
원호신에이인 (信英院)
출생지 (일본어)일본, 교토부
사망지 (일본어)일본, 오이타현벳푸시
종파정토진종혼간지파
사찰니시혼간지
스승묘뇨, 마에다 에운

2. 생애

1876년 교토 니시혼간지에서 21대 문주 오타니 코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3년 아버지 묘뇨(오타니 코손)가 사망하여 니시혼간지의 22대 문주가 되었다.[1] 그는 종교적 책임 외에도 오타니 탐험대를 이끌고 중앙아시아 탐험을 지원하고, 중국, 만주, 중국 도자기에 관해 글을 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1]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탐험했다.[1] 러일 전쟁에는 다수의 종군 포교사를 파견하는 등 해외 전도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원은 종파에 막대한 부채를 안겨주었다.[1]

1914년 오타니 가문이 안고 있던 거액의 부채와 교단의 의혹 사건으로 인해 문주 직에서 물러나 다롄으로 은퇴했다.[2] 은퇴 후에도 문화 활동을 계속했으며, 1913년 쑨원과 회견한 것을 계기로 중화민국 정부의 최고 고문을 맡기도 했다.[2]

태평양 전쟁 중에는 고노에 내각에서 내각 참의, 고이소 내각의 고문을 맡았다.[3] 1945년 방광암으로 쓰러져 입원 중 소련군에 억류되었다가 1947년 귀국하여 벳푸에서 요양 중 사망했다.[3]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76년 교토 니시혼간지에서 21대 문주 오타니 코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5년 9세에 득도했으며, 1886년 도쿄 가쿠슈인에 입학했으나 퇴학했다. 그 후 샤쿠 신파치가 개설한 쿄리츠 학사라는 영어 학교에 입학했지만 역시 퇴학했다. 교토로 돌아가 마에다 케이운 (후에 도요 대학 총장·류코쿠 대학 총장)에게서 교육을 받았다.[2]

2. 2. 중앙아시아 탐험 (오타니 탐험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오타니 탐험대를 이끌고 중앙아시아를 탐험했다.[1] 1차 탐험(1902년~1904년) 중 인도에서 석가와 관련된 영취산을 발견했다.[1] 둔황(敦煌)과 쿠차 등지에서 불교 유물을 수집했으며, 이 중 일부는 니시혼간지(西本願寺) 파산으로 구하라에게 팔렸다가 1916년 데라우치 총독 시절 조선총독부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국고에 귀속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1]

오타니 탐험대의 전체 소장품은 5,000점이나 되었는데, 상당수는 일본에, 나머지는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중국 뤼순 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1]

오타니는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혜초당나라 승려가 아니라 신라의 학승임을 주장했으며, 이는 오늘날 정설로 받아들여진다.[1]

1902년부터 1910년까지 중앙아시아로 세 차례 탐험대를 지원했지만, 후계자 지명으로 인해 참여가 중단되었다.[1] 왕립 지리학회 회원이던 오타니는 스벤 헤딘, 알베르트 폰 르 코크 등 여러 중앙아시아 탐험가들을 초청했다.[1] 그의 수집품은 "오타니 컬렉션"으로 불리며 오늘날 도쿄, 교토, 중국, 한국에 흩어져 있지만, 여전히 중앙아시아학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1]

2. 3. 니시혼간지 문주 시대

1885년(메이지 18년), 9세에 득도하였다. 1886년(메이지 19년)에 상경하여 가쿠슈인에 입학했지만 퇴학했다. 그 후, 샤쿠 신파치가 개설한 쿄리츠 학사라는 영어 학교에 입학했지만 역시 퇴학했다. 교토로 돌아가 마에다 케이운(후에 도요 대학 총장·류코쿠 대학 총장)에게서 배웠다.

1903년 아버지 묘뇨가 사망하여 니시혼간지의 22대 문주가 되었다.[1] 조도신종 종파의 근대화에 힘썼으며, 러일 전쟁에는 다수의 종군 포교사를 파견했다. 해외 전도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후원은 종파에 막대한 부채를 안겨주었다.[1]

1908년(메이지 38년), 롯코 산 기슭의 오카모토(현재의 고베시히가시나다구)에 맹우 이토 츄타의 설계로 지은 '''니라쿠소'''를 짓고, 탐험 수집품을 공개 전시·정리하였다. 그 외에 영재 교육을 위한 사숙인 무코 중학교 (부지는 현재 코난 대학 이학부 캠퍼스), 원예 시험장, 측후소, 인쇄소 등을 설치하여 교육·문화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1914년(다이쇼 3년), 오타니 가문이 안고 있던 거액의 부채 정리 및 교단의 의혹 사건 때문에 법주를 사임하고, 다롄으로 은퇴했다. 니라쿠소와 탐험 수집품도 이때 넘겼다. 현재 이들 컬렉션은 흩어져 있고[2], 니라쿠소도 1932년(쇼와 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2. 4. 퇴위와 이후 활동

1914년(다이쇼 3년), 오타니 가문이 안고 있던 거액의 부채를 정리하고, 교단의 의혹 사건 때문에 법주에서 물러나 다롄으로 은퇴했다. 니라쿠소와 탐험 수집품도 이때 넘겼다. 현재 이들 컬렉션은 흩어져 있으며[2], 니라쿠소도 1932년(쇼와 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은퇴 후에도 문화 활동을 계속하여, 1919년(다이쇼 8년)에는 코쥬카이를 설립하여 불전 원전 (범자로 기술)의 번역에 힘썼고, 1921년(다이쇼 10년)에는 상하이에 차세대를 담당할 인재 육성을 위해 책진 서원을 개교했다.

1913년(다이쇼 2년)에 쑨원과 회견한 것을 계기로, 쑨원이 이끌던 중화민국 정부의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

1935년(쇼와 10년) 2월, 자바 섬에서 열대 농업 경영 경험을 바탕으로 대만 농업 발전에 협력하고자 대만 총독부의 요청으로 2주간 대만을 시찰했다. 귀국 후, 대만 방문을 토대로 『대만 섬의 현재』를 저술했다. 그해 10월, 열대 산업 조사회가 타이베이에서 총독부에 개최되었고, 대만에 다시 참석했다.

1939년(쇼와 14년), 가오슝이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당시 교외였던 다이강푸에서 대만 제당 주식회사로부터 토지를 구입, 오타니 농원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또한 차원과 과수원에도 투자하여 레몬, 바나나, 파인애플을 통조림 가공 공장으로 운송했다.

가오슝 쇼요엔 (수복 후)


1940년(쇼와 15년), 대만 가오슝 다이강푸에 별장으로 건설된 쇼요엔이 준공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고노에 내각에서 내각 참의, 고이소 내각의 고문을 맡았다. 그러나 1945년(쇼와 20년)에 방광암으로 쓰러져 입원 중 소련군에 억류되었다. 1947년(쇼와 22년)에 귀국하여 병 치료를 위해 벳푸에 머물렀다. 이듬해 벳푸에서 사망했다. 이 사이에 공직 추방되었다[3].

생전에는 고베 니라쿠소 외에 중국의 뤼순 (오타니 저택), 다롄 (욕일장), 상하이 (무우원), 대만의 가오슝 ([https://zh.wikipedia.org/zh-tw/%E9%80%8D%E9%81%93%E5%9C%92_(%E9%AB%98%E9%9B%84%E5%B8%82) 쇼요엔]), 인도네시아 (환취산장, 경운산장), 벳푸 데쓰와 별장 등 여러 곳에 별장을 마련했다. 현재의 스마 이리큐 공원은 그중 하나로, 1907년(메이지 40년)에 궁내성에 매입되었으며 그 대체지로 오카모토의 니라쿠소가 되었다.

만년의 땅인 벳푸에서는 당시 국제 관광 도시 건설을 목표로 정부에 특별 도시 건설법의 입법 (1950년(쇼와 25년)에 「벳푸 국제 관광 온천 문화 도시 건설법」으로 제정)을 촉구하고 있던 시장 와키 테츠이치에 찬동하여 조언을 하고, 스스로 사안도 세웠다.

3. 오타니 컬렉션과 그 의의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한 유물들은 '오타니 컬렉션'으로 불리며, 중앙아시아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1] 오타니 컬렉션은 도쿄, 교토, 중국, 대한민국 등지에 흩어져 있다.[1]

오타니 고즈이는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재정 문제로 인해 컬렉션 일부를 1916년 당시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다.[2] 이 유물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국고에 귀속되었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오타니 탐험대의 전체 소장품은 5,000점에 달했으며, 그중 상당수는 일본에, 나머지는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중국 뤼순 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4. 평가

오타니 고즈이는 탐험가, 종교인이자 정치인이었다.

1902년부터 1910년까지 세 차례 중앙아시아 탐험을 지원하여 불교사 연구에 기여했다. 왕립 지리학회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스벤 헤딘, 알베르트 폰 르 코크 같은 탐험가들을 초청했다. 그의 수집품은 "오타니 컬렉션"으로 불리며 도쿄, 교토, 중국, 한국에 흩어져 있지만, 중앙아시아학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1] 그러나 그의 탐험은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었고, 유물 반출 논란도 있다.

조도 신슈 종파 근대화에 헌신하여 종단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의 후원은 종파에 막대한 부채를 안겼고, 1914년 재정 스캔들로 퇴위했다. 쑨원이 이끌던 중화민국 정부 최고 고문을 맡았고, 태평양 전쟁 중에는 고노에 내각 내각 참의, 고이소 내각 고문을 맡는 등 정치 활동도 했다.

그의 활동은 당시 일본의 국제, 정치, 사회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며, 그레이트 게임 동안 영국과 러시아 정보기관은 그의 고고학 탐험이 첩보 활동의 은폐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일본은 불교가 일본으로 전파된 경로에 대한 순수한 조사였으며 정치적 연관성은 없었다고 주장한다.[1]

그는 불제자였지만 미식에 관심이 많았고, 일반 서민을 어리석게 여기는 오타니 가의 귀족적 체질을 보여주는 일화를 남겼다.[4]

5. 저서 및 관련 자료


  • 大谷光瑞全集일본어』, 다이죠샤(전13권), 1935년
  • 大谷探検隊西域探検紀行全集9일본어』 나가사와 가즈토시 편, 백수사, 1966년 (단행 신판 2004년 외)
  • 스기모리 히사히데 大谷光瑞일본어』 (주오코론신샤, 1975년)
  • 쓰모토 요 大谷光瑞の生涯일본어』 (가도카와 문고, 1999년)
  • 大谷光瑞とアジア일본어』 (시바타 미키오 편, 벤세이 출판, 2010년 5월) - 다각적인 관점에서의 논고 수록.
  • 大谷光瑞研究 アジア広域における諸活動일본어』 (시바타 미키오, 벤세이 출판, 2014년 5월) - 오타니 고즈이의 평전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자료.
  • 大谷光瑞と国際政治社会 チベット、探検隊、辛亥革命일본어』 (시라스 키요마사 편, 벤세이 출판, 2011년 10월) - 당시의 국제 정세에서의 활동의 일면을 논고.
  • 大谷光瑞とスウェン・ヘディン일본어』 (시라스 키요마사 편, 벤세이 출판, 2014년 9월) - 당시의 국제 정치 사회에서의 탐험가 스벤 헤딘(스웨덴)과의 교류를 논고.
  • 「世界」へのまなざし 最古の世界地図から南方熊楠・大谷光瑞まで일본어』 (미타니 마스미 편, 호조칸, 2017년 12월)

6. 기타

오타니 고즈이는 스키야키에 대해 쇠고기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고, 양고기나 돼지고기는 그보다 못하다고 평가했다.[4] 고기와 채소를 함께 끓이는 조리법은 스키야키의 참맛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4] 이는 불제자이면서도 미식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일반 서민을 낮춰보는 오타니 가의 귀족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아라마타 히로시의 소설 《제도 이야기》에서는 가지기도로 미국, 영국, 소련의 전쟁 지도자를 저주하여 죽이려 했다는 묘사가 나온다.[4] 그러나 정토진종 교리에서는 가지기도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는 사실과 다른 창작이다.

쓰지하라 토오루의 소설 《용서받지 못한 자》에 등장하는 타니 아키유키는 교토에 총본산을 둔 거대한 불교 교단의 종가 장남으로, 서역을 탐험하고 조사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오타니 고즈이를 연상시킨다.

6. 1. 미식가로서의 면모

오타니 고즈이는 스키야키일본어에 대해 쇠고기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고, 양고기나 돼지고기는 그보다 못하다고 하였다.[4] 또한 고기와 채소를 함께 끓이는 것을 스키야키일본어의 참맛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며, "고기와 야채를 동시에 끓이면, 고기가 익을 때쯤 야채는 아직 덜 익고, 야채가 익을 때쯤에는 고기가 너무 익어 질겨진다. 고기와 야채를 함께 끓이는 것은 맛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충 만든 조리법이며, 진정으로 맛을 추구하는 사람이 할 요리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4] 이는 불제자이면서도 미식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일반 서민을 낮춰보는 오타니 가의 귀족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6. 2. 소설 속 묘사

아라마타 히로시의 소설 《제도 이야기》에서는 가지기도를 통해 미국, 영국, 소련의 전쟁 지도자를 저주하여 죽이려 한다.[4] 이는 사실과 다른 창작으로, 정토진종 교리에서는 가지기도를 부정하기 때문에 작중 묘사는 이에 반한다. 영화판 《제도대전》에서는 관아미 코오라는 가공의 인물로 대체되었다.

쓰지하라 토오루의 소설 《용서받지 못한 자》에 등장하는 타니 아키유키는 교토에 총본산을 둔 거대한 불교 교단의 종가 장남으로, 서역을 탐험하고 조사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오타니 고즈이를 연상시킨다.

참조

[1] 문서 Information stand in the Tokyo National Museum
[2] 문서 大谷コレクションは、中国・旅順博物館、韓国国立中央博物館、東京国立博物館、龍谷大学などで分蔵している。『大谷光瑞と西域美術』<日本の美術434号>至文堂(2002年)に一部紹介されている。
[3] 서적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4] 서적 食 大乗社東京支部
[5] 간행물 叙任及辞令 1903-03-31
[6] 간행물 宮廷録事 194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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