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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마이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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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코하마 마이니치는 1871년 일본 최초의 일간 신문으로 창간되었다. 가나가와 현령 이세키 모리타카의 설득과 인쇄업자들의 협력으로 요코하마에서 창간되었으며, 무역 관련 정보를 주로 다루다가 민권파 신문으로 변화했다. 1879년 도쿄로 이전하여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했고, 이후 '마이니치 신문', '도쿄 마이니치 신문'으로 이름을 바꾸며 러일 전쟁 관련 논조를 펼쳤다. 1908년 호치 신문사에 매각된 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1940년 제도 일일 신문에 흡수 합병되어 폐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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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마이니치
기본 정보
도쿄 마이니치 신문의 광고 (1922년 책에서)
도쿄 마이니치 신문의 광고 (1922년 서적에서)
유형일간지
사업자(요코하마 활판사→)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사→)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사→)
(마이니치 신문사→)
도쿄 마이니치 신문사
본사(가나가와현요코하마시나카구혼초 6-50-1)
(도쿄도주오구 긴자 5-4-3)
(도쿄도주오구 긴자 5-8-1)
(도쿄도지요다구 내유라초 1-2-2)
도쿄도 지요다구유라쿠초 2-1
창간1871년 (메이지 4년) 1월 28일
폐간1940년 (쇼와 15년) 11월 30일
전신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
마이니치 신문
도쿄 마이니치 신문
언어일본어
관련 정보
외부 링크

2. 연혁

1871년 1월 28일 (구력 메이지 3년 12월 8일)[8],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정(현 요코하마시 나카구)에서 일본 최초의 일간 신문으로 창간되었다.[8] 초기에는 요코하마 활판사[21]가 발행을 맡았으며, 무역 정보를 주로 다루었으나 점차 민권파 신문으로 성격이 변해갔다.[6] 창간 당시 편집자는 고야스 다카시였고, 이후 구리모토 조운, 쓰마키 요리노리, 시마다 사부로 등이 편집을 담당했다.[20]

1879년 11월 18일, 누마마 모리이치가 신문을 인수하고[8] 본사를 도쿄 긴자로 이전하며 제호를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으로 변경했다.[8] 이후 嚶鳴社|오메이샤일본어 계열의 민권 신문으로 자리 잡았고, 입헌개진당의 기관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8] 1886년 5월에는 『'''마이니치 신문'''』[8], 1906년 7월에는 『'''도쿄 마이니치 신문'''』[8]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1888년 시마다 사부로가 사장에 취임했으며, 러일 전쟁에 대해 초기에는 비전론을 주장하다가 1903년 개전론으로 입장을 선회했다.[8]

그러나 경영난을 겪으며 1908년 호치 신문사에 매각되었고,[8] 이후 야마모토 사네히코[8], 요리모키 게이키치, 오하라 타쓰아키[8] 등으로 소유권이 여러 차례 넘어갔다. 오하라 소유 시기에는 "우리는 정의의 편이다"[6][9][10][11][8][12]라는 구호를 내걸고 오스기 사카에 등을 기용하며[10][11][8] 진보적, 노동자 친화적 입장을 표방했으나, 사내 노동 운동을 탄압하여 비판받기도 했다.[8][11][12]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본 후 소유권은 지바 히로미에게 넘어갔다.[8] 1940년 11월 30일, 노요리 히데시가 경영하던 『제도 일일 신문』(帝都日日新聞|제도 일일 신문일본어)에 흡수 합병되면서[8] 70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이 합병으로 도쿄에서 '마이니치' 제호의 신문이 사라지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는 도쿄 일일 신문의 제호를 『마이니치 신문』으로 통일하여 현재의 전국지 마이니치 신문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2. 1. 창간 배경

1871년 1월 28일 (구력 메이지 3년 12월 8일)[8], 가나가와현 구라키군 요코하마정 (현 요코하마시 나카구)에서 창간된 일본 최초의 일간 신문이다.[8] 발행은 요코하마 활판사[21](후에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사)가 맡았다.

창간 배경에는 당시 가나가와 현령(현지사)이었던 이세키 모리타카의 역할이 컸다. 그는 근대적인 신문의 필요성을 요코하마의 무역상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하였다.[6] 이에 인쇄업자인 모키 쇼조와 요 코니가 협력하였고[20], 요코하마 세관의 번역관이었던 고야스 다카시가 초대 편집자로 참여했다.[20] 창간에 필요한 자금을 출자하고 과정을 주도한 시마다 도요히로가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초대 편집자였던 고야스가 퇴사한 후에는 구리모토 조운이 편집장을 맡았고[20], 구리모토가 물러날 즈음에는 쓰마키 요리노리가 잠시 편집을 담당하기도 했다.[20] 이후 시마다 사부로(시마다 도요히로의 양자)가 편집장을 이어받았으며[20], 가나자키 루분이 기자로 활동했다.[20]

신문은 창간 경위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무역 관련 정보를 주로 다루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민권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문으로 성격이 변해갔다.[6]

2. 2. 초기 운영 (1871년 ~ 1879년)

1871년 1월 28일 (구력 메이지 3년 12월 8일)[8], 가나가와현 구라키군 요코하마정(현 요코하마시 나카구)에서 창간된 일본 최초의 일간 신문이다.[8] 요코하마 활판사[21](후에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사)가 발행했다.

당시 가나가와 현령(현지사)이었던 이세키 모리타카는 근대 신문의 필요성을 요코하마의 무역상들에게 설득했고[6], 인쇄업자인 모키 쇼조와 요 코니의 협력을 얻어[20] 창간에 이르렀다. 초기 편집자는 요코하마 세관의 번역관이었던 고야스 다카시였다.[20] 출자 및 창간을 주도한 시마다 도요히로가 초대 사장을 맡았다. 고야스가 퇴사한 후에는 구리모토 조운이 편집장을 맡았고[20], 구리모토 퇴사 즈음에는 쓰마키 요리노리가 잠시 편집을 담당하기도 했다.[20] 이후 시마다 도요히로의 양자인 시마다 사부로가 편집장을 맡았으며[20], 가나자키 루분이 기자(문장가)로 활동했다.[20]

창간 초기에는 발행 경위에서 알 수 있듯이 무역 관련 정보가 지면의 중심이었으나, 점차 민권파 신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6]

신문의 형태는 막부 말기의 책자 형태와 달리, 처음부터 양면에 납활자로 기사를 인쇄한 양지(洋紙)를 사용했다.[22][20]

과거에는 창간 당시 제호가 『요코하마 신문』이었고 후에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으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었으나[20](미야타케 가이코쓰 등이 주장[24][20]), 1964년 창간 제1호 실물이 발견되면서[20] 창간 당시부터 제호가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이었음이 확인되었다.[8][20][21] 창간 일자 역시 구력 메이지 3년 12월 8일로 확정되었다.[20]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은 일본 최초의 일본어 일간 신문으로 평가받는다.[19] (이보다 앞서 1863년에 창간된 영자 일간지 『데일리 재팬 헤럴드』[18] 등이 존재했다.[20][18])

1879년 (메이지 11년) 11월 18일, 누마마 모리이치가 신문을 인수하고[8] 사장직도 시마다 도요히로에서 누마마로 교체되었다. 본사는 도쿄 긴자 모토스기야초로 이전했으며, 제호는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으로 변경되었다.[8]

2. 3. 도쿄 이전과 민권 운동 (1879년 ~ 1906년)

1879년 11월 18일, 누마마 모리이치가 신문을 인수하고[8] 사장에 취임하며 본사를 도쿄 긴자 모토스기야초로 이전했다. 제호는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으로 변경되었다.[8] 히즈카 류 등이 집필진으로 참여하면서 嚶鳴社|오메이샤일본어 계열의 민권파 신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고,[8] 이후 누마마가 참여한 입헌개진당의 기관지 역할을 수행했다.[8]

1886년 5월에는 제호를 『'''마이니치 신문'''』으로,[8] 1906년 7월에는 『'''도쿄 마이니치 신문'''』으로 다시 변경했다.[8] 이 시기인 1888년에는 누마마의 뒤를 이어 시마다 사부로가 사장에 취임했다. 시마다는 러일 전쟁에 대해 초기에는 비전론(非戦論)을 펼쳤으나,[8] 1903년 10월에는 개전론(開戦論)으로 입장을 바꾸었다.[8] 『마이니치 신문』으로 발행되던 1895년에는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 『노키모루 달』(たけくらべ일본어)이 연재되기도 했다.

2. 4. 경영난과 소유권 변동 (1908년 ~ 1940년)

1908년 (메이지 41년), 경영난으로 인해 호치 신문의 발행사인 호치사에 매각되었다.[8] 이 과정에서 도쿄 긴자 오와리정에 있던 본사 건물도 세이요켄에 매각되었고, 이후 다이일본 맥주를 거쳐 카페 라이온→삿포로 긴자 빌딩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긴자 플레이스가 들어섰다.

신문사는 본사를 고지마치구 우치사이와이초 (현재 히비야 다이빌 위치)로 이전하여 호치사의 자매지 형태로 존속했으나, 곧 호치사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1914년 (다이쇼 3년), 훗날 개조사를 창립하는 야마모토 사네히코에게 양도되었다.[8] 이후 요리모키 게이키치의 소유를 거쳐, 1918년에는 야치요 생명 보험 (현 매뉴라이프 생명 보험)의 창업자 오하라 타쓰아키가 소유하게 되었다.[8]

오하라가 소유했던 시기의 도쿄 마이니치 신문은 지면과 광고에서 "우리는 정의의 편이다"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며[6][9][10][11][8][12], 오스기 사카에 등을 집필진으로 영입하여[10][11][8] "정의의 편, 노동자의 편"[11]이라는 진보적인 입장을 표방했다. 그러나 신문 인쇄공 조합인 쇼신카이가 주도한 노동 쟁의(쇼신카이 쟁의)가 자사로 확산되자, 쇼신카이 가입 사원들을 해고하며 사내 노동 운동을 탄압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8][11] 이로 인해 쇼신카이의 상급 단체인 노동조합 동맹회로부터 구호와 다른 배신 행위라는 비판을 받았다.[11][8][12]

1923년 (다이쇼 12년)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신문사는 큰 피해를 입었고, 소유권은 오하라에서 지바 히로미에게 넘어갔다.[8] 우치사이와이초의 본사는 미쓰비시 합자회사 (현 미쓰비시 지소)를 통해 오사카 빌딩사 (현 다이빌)에 매각되었다. 이후 신문사는 같은 고지마치구 내 성선 유라쿠초역 앞에 있던 호치사 본사 건물 (현 요미우리 회관)으로 이전하여 발행을 이어갔다.

1940년 (쇼와 15년) 11월 30일, 노요리 히데시가 경영하던 『제도 일일 신문』에 흡수 합병되면서[8] 일본 최초의 일간지였던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의 제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합병으로 도쿄에서 '마이니치'를 제호로 사용하는 일간지가 없어지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는 도쿄 일일 신문의 제호를 마이니치 신문으로 통일하여 현재의 전국지 마이니치 신문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2. 5. 간토 대지진과 합병 (1923년 ~ 1940년)

1923년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도쿄 마이니치 신문은 큰 피해를 입었고, 소유권은 오하라 타쓰아키에서 지바 히로미에게 넘어갔다.[8] 도쿄 우치사이와이초에 있던 본사는 미쓰비시 합자(현 미쓰비시 지소)를 거쳐 다이빌에 매각되었으며, 신문사는 고지마치구 유라쿠초역 앞에 있던 호치사 본사 건물로 이전하여 발행을 이어갔다.[8]

1940년 11월 30일, 도쿄 마이니치 신문은 노요리 히데시가 경영하던 『제도 일일 신문』(帝都日日新聞|제도 일일 신문일본어)에 흡수 합병되면서[8], 1871년 창간된 일본 최초의 일간지였던 본지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이 합병으로 도쿄에서 '마이니치'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일간지가 사라지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는 기존에 도쿄에서 발행하던 도쿄 일일 신문의 제호를 마이니치 신문으로 통일하여 전국지 마이니치 신문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8]

도쿄 마이니치 신문을 합병한 제도 일일 신문은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을 수행하던 군부대본영, 도조 내각을 비판하는 논조를 보이다가 발매 금지와 정간 처분을 반복해서 받았다. 결국 1944년 4월 3일, 내각 정보국은 신문지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을 이유로 제도 일일 신문에 발행 정지 명령을 내려 폐간시켰다. 종전 후 잠시 복간되었으나, 경영자 노요리가 공직 추방되면서 다시 휴간 상태가 되었다. 이후 1958년 7월 19일에 완전 복간되었고, 노요리 사후인 1969년 7월 1일에는 고다마 요시오가 소유하던 국민 타임즈(현 도쿄 스포츠)에 인수되어 '''야마토 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전자 신문으로 전환하여 발행을 이어가고 있다.

3. 이후

도쿄 마이니치를 합병한 제국일일은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 대전) 수행으로 나아가는 군부·대본영 보도부·도조 내각을 비판하는 언론 활동으로 인해 발매 금지나 정간 처분을 반복해서 받았다. 결국 1944년 4월 3일, 내각 정보국으로부터 신문지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을 근거로 발행 정지 명령을 받아 폐간되었다. 종전 직후 일시적으로 복간되었지만, 노요(能代)가 공직 추방되면서 다시 휴간 상태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6년 후인 1958년 7월 19일에 완전한 부활을 이루었다. 노요 사망 후인 1969년 7월 1일에는 우익 인사 고다마 요시오가 소유주였던 국민 타임즈(현 도쿄 스포츠)의 옛 신문명을 이어받아, '''『야마토 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웹 사이트 갱신을 통해 수시로 간행하는 전자 신문으로 전환하였다.

4. 주요 인물


  • 이시바시 단잔: 1908년 입사하였으나 이듬해 징병으로 퇴사하였다. 이후 제55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 이도 레이잔: 기자 및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880년대 전반에는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 1895년 전후에는 "마이니치 신문", 1914년 이후에는 "도쿄 마이니치 신문"에 재직했다.[13]
  • 오스기 사카에[10][14]
  • 오자키 시로[14]
  • 가토 간주[14]
  • 가야하라 가잔[10][14]
  • 기시가미 가쓰미: 고토쿠 슈스이 및 요코야마 겐노스케의 추천으로 1903년 입사했다. 이후 사이타마 니치니치 신문 주필을 거쳐 우라와 정 의회 의원을 지냈다.
  • 기노시타 나오에
  • 히즈카 류: 후에 중의원 의원으로 8번 당선되었고, 부의장도 역임했다.
  • 고이즈미 마타지로: 1887년 시마다 사부로의 비서가 되었다. 이후 중의원 의원으로 12번 당선되었으며, 귀족원 칙선 의원까지 지낸 거물 정치인이 되었다. 그의 손자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제87-89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 시마다 사부로: 1874년 입사했다. 문부성 근무를 거쳐 1881년 복귀했으며, 누마마 모리카즈의 퇴임 후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중의원 의원으로 14번 당선되었고, 의장까지 오른 거물 정치인이 되었다.
  • 스기무라 준: 1875년 입사했으며, 후에 외교관으로 활동했다.[15][16]
  • 세키 가즈토모: 1907년 만초보에서 이적했다. 이후 중의원 의원으로 7번 당선된 유력 정치인이 되었다.
  • 히라사와 게이시치[14]
  • 후지타 이사무: 기자로 재직한 후, 1919년부터 사장을 역임했다.[10][14]
  • 미즈노 시게오: 1925년에 약 반 년간 재직했다.[17] 후에 일본 공산당 중앙 기관지 『아카하타』 초대 편집장 및 산케이 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 야마구치 고켄[14]
  • 요코야마 겐노스케

참조

[1] 문서 '現・[[横浜市]][[中区 (横浜市)|中区]][[横浜アイランドタワー|本町6-50-1]]'
[2] 문서 '現・東京都[[中央区 (東京都)|中央区]]銀座[[対鶴館ビル|5-4-3]]'
[3] 문서 '現・東京都中央区銀座[[銀座プレイス|5-8-1]]'
[4] 문서 '現・東京都[[千代田区]]内幸町[[日比谷ダイビル|1-2-2]]'
[5] 문서 '[[太陰暦|旧暦]]明治3年12月8日'
[6] 서적 復刻版 横浜毎日新聞 不二出版
[7] 웹사이트 子安峻とは https://kotobank.jp/[...] 2021-01-30
[8] 서적 新聞史話 生態と興亡 社会思想社
[9] 서적 園池製作所労働争議 : 最近の模範的労働運動 https://dl.ndl.go.jp[...] 東京毎日新聞社
[10] 서적 新聞総覧 大正11年版 日本電報通信社
[10] 서적 新聞総覧 大正11年版 https://dl.ndl.go.jp[...] 大空社
[11] 서적 明治・大正期自立的労働運動の足跡 印刷工組合を軸として JCA出版
[12] 서적 荒畑寒村著作集 第二巻 社会運動 大正 平凡社
[13] 논문 井土靈山の生涯と事績 名古屋大学人文学研究論集
[14] 서적 民本主義の論客 茅原華山伝 不二出版
[15] 웹사이트 杉村濬(すぎむらふかし) https://www.city.mor[...] 盛岡市 2008-01-10
[16] 간행물 杉村濬 2023-03-15
[17] 서적 水野成夫の時代: 社会運動の闘士がフジサンケイグループを創るまで 日本工業新聞社
[18] 웹사이트 館報「開港のひろば」 第94号 http://www.kaikou.ci[...] 横浜開港資料館 2006-11-01
[19] 뉴스 日刊紙発祥の記念碑を公開 新聞協会が再建、横浜 https://this.kiji.is[...] 2020-04-27
[20] 서적 復刻版 横浜毎日新聞 解説・総目次 不二出版
[21] 웹사이트 横浜毎日新聞 〔明治3年~明治39年刊〕 全149巻別冊3巻 〔復刻版〕 http://www.fujishupp[...] 不二出版 2020-07-22
[22] 웹사이트 横浜毎日新聞復刻版カタログ http://www.fujishupp[...] 不二出版 1995-12
[23] 서적 「毎日」の3世紀――新聞が見つめた激流130年(上巻) 毎日新聞
[24] 서적 明治奇聞 第4編 https://dl.ndl.go.jp[...] 半狂堂 1926
[25] 웹사이트 書誌詳細 http://www.meitan.j.[...] 東京大学大学院 法学政治学研究科附属 近代日本法政史料センター 明治新聞雑誌文庫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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